경허선사 연보 - 일지
고재욱 정리
1846년 1세, 憲宗 12년 丙午
8월 24일 전주 자동리에서 부친 송두옥(宋斗玉)과 모친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출생. 태어난 뒤 사흘 동안 울지 않다가 목욕시키자 아기소리를 내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김. 만해 한용운은 자신이 작성한 〈경허약보(鏡虛略譜)〉에는 ‘선사의 속성은 송(宋)씨, 법명은 성우(惺牛)이며 처음 이름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 본관은 여산(礪山)이다’라고 적고 있다. 부친 송두옥은 일찍 작고. **자동리⇒우동리
1854년 9세, 哲宗 5년 甲寅
모친 박씨를 따라 지금의 경기도 의왕시 청계사(淸溪寺)에서 계허(桂虛)대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사미계를 수지함. 이후 14세까지 항상 나무하고 물을 길어 부처님과 스승 섬기기에 글을 읽을 겨를도 없이 초기 수행을 쌓음. 이때 가형 태허(泰虛)는 이미 공주 마곡사에 출가하여 수행 중이었다.
1859년 14세, 哲宗 10년 己未
절에 와서 한 여름을 지내는 선비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 한 번 눈에 스치면 배우고 듣는 대로 문리를 해석할 만큼 큰 진보가 있었음. 마침내 《통감사략(通鑑史略)》을 하루에 대여섯 장씩 암송. 글을 가르치는 선비는 “참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구나. 옛말에 천리마 같은 훌륭한 말도 백락(伯樂)을 만나지 못하여 소금수레나 끌며 고생한다더니 지금 동욱 자네가 바로 그렇구나. 훗날 반드시 큰그릇이 되어 일체중생의 스승이 되어지이다”라고 찬탄함. **선비 : 박처사라함
그해 스승 계허대사 환속. 스승이 써 준 추천서를 소지하고 동학사 강사 만화보선(萬化普善)의 문하에서 경학을 수업하기 시작.
1860년 15세, 哲宗 11년 庚申
1868년(23세, 高宗 5년)까지 동학사 강원(講院)에서 경전을 수업. 한용운의 〈경허약보〉는 이 시기의 경허를 ‘공부를 하는 데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않게(不閑不忙) 해도 남보다 앞섰으며, 내외전(內外典)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팔도에 이름을 떨쳤다’고 적고 있다. 불경뿐만 아니라 유명한 학숙(學塾)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유가(儒家)와 노장(老莊)의 전적들을 공부하여 일가를 이룸.
1862년 17세, 哲宗 13년 壬戌
진주민란 발생. 삼남각지에 민란이 발생함.
1866년 21세, 高宗 3년 丙寅
병인양요(丙寅洋擾) 발발. 외세와 직접적인 충돌이 시작됨.
1868년 23세, 高宗 5년 戊辰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추대되어 1879년(34세)까지 역임. 한암 중원(漢巖重遠)은 〈선사경허화상행장(先師鏡虛和尙行狀)〉에서 경허의 개강(開講)에 대해 ‘그 교의를 논하심에 파란양양하여 사방의 학자가 모두 귀의하였다(論敎義波瀾洋洋 四方學者多歸之)’고 기록. 주로 《화엄현담(華嚴玄談)》을 강의함.
1876년 31세, 高宗 13년 丙子
강화도 조약 체결.
1879년 34세, 高宗 16년 己卯
6월, 환속한 옛 스승 계허를 만나기 위해 여행 중 천안 근처에서 콜레라가 만연하여 수많은 사망자가 나온 마을을 지나다가 선(禪)의 길로 회심(回心). 한암 중원은 당시 경허의 심경을 ‘화상께서 이 말을 듣고 모골이 송연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져서 죽음이 임박하여 목숨이 한 호흡 사이에 끊어질 것 같았으니, 일체 세간이 모두 꿈속에서 바라보던 경치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和尙忽聞其言 毛骨悚然 心神恍惚 恰似箇大限 當頭命在呼吸間 一切世間 都是夢外靑山)’고 기록함. **천안 근처⇒김제 만경이라 함
그해 6월 일본에서 부산으로 전염된 콜레라가 전국에 퍼졌으며 7월 콜레라로 인하여 부산 무역정(貿易停)을 폐쇄함. 경허는 콜레라의 거리에서 동학사로 돌아오는 길에 ‘이 생애가 다하도록 차라리 바보가 되어 지낼지언정 문자에 매이지 않고 조사의 도를 닦아 삼계를 벗어나리라(此生永爲痴呆漢 不爲文字所拘繫 參尋祖道 超出三界)’고 다짐하고 강의를 폐지함. 학인들을 모두 해산시킨 뒤, 방문을 닫은 채 꼿꼿이 앉아 참선을 시작.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驪事未去馬事到來)〉는 화두를 참구. 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부딪쳐서 수마(睡魔)를 쫓으며 필사적으로 정진.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침.
그해 11월 15일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듣고 대오(大悟).
한암 중원은 경허의 대오(大悟)를 다음과 같이 정리함.
‘이처사의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라는 말을 전해들은 화상의 안목은 정히 움직여(眼目定動), 옛 부처 나기 전의 소식이 몰록 드러나 활연히 현전하였다. 평평한 대지가 꺼지고 물(物)과 아(我)를 함께 잊으며 바로 옛사람의 크게 쉰 곳에 이르르니 백천법문과 무량한 묘의(妙義)가 당장 얼음 녹듯이 풀렸다’
1880년 35세, 高宗 17년 庚辰
지금의 서산시 고북면 천장암에서 오후(悟後) 보림(保任). 개당설법(開堂說法)을 행함.
〈오도송(悟道頌)〉
홀연히 고삐 뚫을 곳이 없다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 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라는 구절로 보아 개당설법이 이루어진 계절이 바로 유월이었음을 알려 준다.
1882년~1898년 37세, 高宗 19년 壬午~53세, 光武 2년 戊戌
주로 충청, 경상 일대의 동학사·천장암·서산 부석사·마곡사·장곡사·보석사·예산 용문사·대전 묘각사·사불산 대승사·문경 봉암사 등지에 주석하면서 선풍(禪風)을 진작하고 만공 월면(滿空月面)·수월(水月)·혜월(慧月)·침운(枕雲) 등의 제자들을 지도함. 천장암에서 혜월과 수월에게 보조 지눌의 《수심결(修心訣)》 강의. 승화상인(承華上人)에게 〈계차청심법문(契此淸心法門)〉을 설하고 천장암에서 〈장상사와 김석두에게 보내는 글(上張上舍金石頭書)〉, 〈자암거사에게 보내는 글(上慈庵居士書)〉 등의 서간을 씀.
1884년 39세, 高宗 21년 甲申
10월 초순 어느 날, 동학사에서 제자 도암(道岩, 훗날의 滿空)을 처음 만남. 당시 도암의 나이 14세. 도암을 천장암으로 보내 그해 12월 8일 태허화상을 은사로, 경허 자신이 계사(戒師)가 되어 월면(月面)이라는 법명과 사미계를 줌.
1898년 53세, 光武 2년 戊戌
서산 도비산 부석사에 주석. 그해 봄 동래 범어사의 초청으로 제자 월면·침운 등과 함께 범어사에 도착. 범어사의 등암 찬훈(藤庵璨勛)·회현 석전(晦玄錫詮)·혼해(混海)·성월 일전(惺月一全)·담해(湛海)·화월(華月) 등이 경허를 초청함. 〈범어사 선원을 시설하는 계의서(梵魚寺設禪社契誼序)〉를 작성.
범어사의 등암화상에게 선(禪)의 요체를 강의. 본 강의를 〈등암화상에게 준다(與藤庵和尙)〉는 문건으로 정리.
그해 겨울 청암사 수도암 방문. 시 〈청암사 수도암에 오르며 (上靑巖寺修道庵)〉를 쓰고 《금강경》 강의. 청암사 수도암에서 제자 한암 중원(漢巖重遠, 1876~1951)을 만남.
1899년 54세, 大韓 光武 3년 己亥
가야산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김. 당시 해인사에는 고종(高宗)의 칙명으로 대장경을 인출하는 불사와 수선사(修禪社)를 설치하는 불사의 법주(法主)로 추대되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상당법어(上堂法語)를 행함.
4월 〈해인사수선사방함인(海印寺修禪社芳啣引)〉 작성,
9월 하순 〈합천군가야산해인사수선사창건기(陜川郡伽倻山海印寺修禪社創建記)〉 작성, 본 창건기에서 ‘결연히 기해년(己亥年) 가을 찾아와서 경을 열람하고 집을 둘러보고 홍류동 속에 신선의 신령스런 발자취를 더듬어 서성거리니 몸까지 잊을 정도였다’고 씀.
11월 1일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 〈상포계서(喪布契序)〉 작성.
12월 20일 〈귀취자기(歸就自己)〉 작성.
1900년 55세, 大韓 光武 4년 庚子
4월 상순 〈범어사총섭방함록서(梵魚寺總攝芳啣錄序)〉 작성.
송광사·태안사·화엄사·지리산천은사·영원사·실상사를 방문.
〈남원실상사백장암중수문(南原實相寺百丈庵重修文)〉 작성.
11월 하순 〈남원천은사불량계서(南原泉隱寺佛糧契序)〉 작성.
12월 상순 〈화엄사상원암복설선실정완규문(華嚴寺上院庵復設禪室定完規文)〉 작성.
12월 상순 〈동리산 태안사 만일회에서 범종을 사서 헌답한 신도방명기(桐裏山泰安寺萬日會梵鐘檀那芳啣記)〉작성.
12월 하순 송광사 차안당(遮眼堂)에서 〈취은화상행장(取隱和尙行狀)〉 작성. 취은 민욱(取隱旻旭, 1816~1900). 이 해 화엄사에서 진진응(陳震應)을 만나고 〈진응강백답송(震應講伯答頌)〉을 씀. 겨울 경상남도 화전(花田, 지금의 남해군) 용문사 방문. 용문사의 호은장로(虎隱長老)로부터 〈서룡화상(瑞龍和尙) 행장(行狀)〉을 집필해 줄 것을 의뢰받음.
1901년 56세 大韓 光武 5년 辛丑
해인사에서 몇 편의 영찬(影贊)을 작성.
3월 〈금우화상영찬(錦雨和尙影贊)〉 작성. 해인사에 소장된 진영에 의하면 이 영찬의 제재(題材)는 ‘扶宗樹敎龍巖直傳錦雨堂弼基大禪師眞影’이며 신축(辛丑, 1901)년 3월 호서귀(湖西歸) 문제(門弟) 성우(惺牛) 근찬(謹讚)이라는 기록이 첨부되어 있음.
〈인봉화상영찬(茵峯和尙影贊)〉 작성. 해인사에 소장된 진영에 의하면 이 진영의 제재(題材)는 ‘傳佛心印扶宗樹敎茵峯堂大禪師之眞’이며 문질(門姪) 성우(惺牛) 분향근찬(焚香謹讚)이라는 기록이 첨부되어 있음.
〈대연화상영찬(大淵和尙影贊)〉 작성. 해인사에 소장된 진영에 의하면 이 진영의 제재(題材)는 ‘扶宗樹敎華嚴講主大淵堂正添大禪師眞影’이라는 기록이 첨부되어 있음.
〈용은당대화상진영(龍隱堂大和尙眞影)〉 작성.
1902년 57세, 大韓 光武 6년 壬寅
가을 동래 마하사(摩訶寺)의 나한개분불사의 증명. 나한이 현몽하는 이적(異蹟)을 보임.
10월 결제날 〈범어사계명암수선사방함청규(梵魚寺鷄鳴庵修禪社芳啣淸規)〉 작성.
1903년 58세, 大韓 光武 7년 癸卯
늦은 봄, 〈범어사계명암창설선사기(梵魚寺鷄鳴庵創設禪社記)〉,〈범어사금강암칠성각창건기(梵魚寺金剛庵七星閣創建記)〉 작성.
《선문촬요(禪門撮要)》의 원형이 되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편찬하고 〈정법안장서(正法眼藏序)〉를 작성.
〈서룡화상행장(瑞龍和尙行狀)〉 완성.
그해 가을 범어사를 떠나 해인사에 들러 천장암으로 돌아옴. 이때의 심경을 읊은 시 한 수가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는 길에서 부른 노래(自梵魚寺向海印寺途中口號)〉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음.
아는 것 없이 이름만 높아서 세상의 액난을 만나니
어느 곳에 몸을 숨길지 알 수 없구나.
어촌과 술집엔들 숨을 곳이 없으랴마는
다만 헛된 이름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두렵도다.
1904년 59세, 光武 8년 甲辰
7월 15일 천장암에 들러 제자 월면을 인가하고 전법게를 수여함. 수덕사의 만공문도회가 펴낸 《만공어록》은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갑진년(甲辰年, 1904) 7월 15일 경허화상이 함경도(咸鏡道) 갑산(甲山)으로 가는 길에 천장사를 들르게 되었다. 스님은 경허화상을 뵙고 몇 해 동안 공부를 짓고 보림한 것을 낱낱이 아뢰니 경허화상은 기꺼이 허락하며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구름 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叟山禪子)의 대가풍(大家風)이여!
여기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한 조각 방편기틀이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이어 만공이라고 사호(賜號)하고 다시 이르되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자네에게 이어 가도록 부촉(付囑)하노니 불망신지(不忘信之)하라고 주장자를 떨치며 길을 떠났다.
1905년 60세, 光武 9년 乙巳
11월 을사늑약 체결.
가을 광릉 봉선사에 나타나 월초거연(月初巨淵)을 만남. 오대산 월정사에 머물며 3개월간《화엄경》 강의. 이후 금강산을 관람하고 〈금강산유산가(金剛山遊山歌)〉를 작성.
1906년 61세, 光武 10년 丙午
봄 안변 석왕사(釋王寺) 나한개분불사의 증명. 시 〈석왕사영월루에 부쳐(題釋王寺映月樓)〉를 씀.
이후 장발유복(長髮儒服)으로 함경도, 평안도로 잠적. 주로 평안북도 강계(江界)·위원(渭原)·함경남도 삼수(三水)·갑산(甲山)·희천(熙川) 등지로 자취를 감춘 뒤, 스스로 이름을 박난주(朴蘭洲)라고 지었으며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갓을 쓰고 변신한 뒤, 서당의 훈장을 하며 김탁(金鐸)·김수장(金水長) 등의 친지들과 술을 마시기도 하고 시를 지으며 소일하며 세간의 풍진(風塵) 속에 자신을 묻어버림.
1910년 65세, 隆熙 4년 庚戌
8월 29일 국권피탈.
1912년 67세, 壬子
4월 25일 함경남도 갑산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
외로이 홀로 밝은 마음의 달(心月孤圓)
온 누리의 빛을 머금었구나.(光呑萬像)
그 달빛 온 누리와 함께 사라졌으니(光境俱亡)
이는 다시 무엇인가.(復是何物)
1913년 癸丑
7월 25일. 경허의 입적 소식을 전해들은 만공과 혜월은
갑산 난덕산으로 가서 시신을 운구하여 다비에 붙임.
[출처] 경허선사 연보 - 일지 고재욱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