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겐 '스토 부인'이라고 알려진 해리엇 비처 스토...
그녀가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다보면
인간의 존엄성을 새삼 깨닫게 되지요.
민주주의가 발달되었다고 생각한 미국에서도
아주 오래전에는 이렇게 비인간적인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끔찍합니다.
톰의 길고긴 여정은 비록 죽음으로 끝났지만
톰의 인간적인 자세와 소신 있는 행동은 길이길이 남겠죠.^^
아래 글도 해박함에 반해 잽싸게 옮겨온 글입니다. 같은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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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국을 곧잘 다양한 인종들이 조화롭게 섞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내는 용광로(melting pot)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이 용광로라는 표현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을까? 미국 중에서도 특히 동부지역은 백인들의 본거지이다.
미국 동부 문학기행을 해보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이후 나는 열서너 군데의 유명인들의 생가 및 기념관을 둘러보았다.그곳을 찾았던 시기가 관광의 성수기인 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동부지역 작가들의 집에서는 유색인종을 거의 만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인종차별이 철폐되었다고 말하는 오늘날에도 미국의 문화속에 각인되어 있는 인종적 간극이 얼마나 깊은지를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동부는 백인중에서도 WASP(White,Anglo-Saxon,Protestant),즉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지역이다. 마크 트웨인과 바로 이웃하고 있는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1811~1896)의 집은 바로 그 암묵적인 인종적 장벽 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양키의 정신을 아주 잘 구현하고 있었다.
정성스레 가꾸어진 집 앞의 정원부터가 그녀의 단아하면서도 부지런한 생활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단순하지만 정적인 장식,비누 절약 용기,식품 저장용 캐비닛 등 그녀의 집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실용적 감성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 집에서 필자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끈 것은 양키 특유의 실용주의가 아니라,조시아 헨선(Josiah Henson)이라는 흑인 도망 노예의 사진이었다.물론 그녀의 집에 조시아 헨선의 사진만이 걸려있는 것은 아니었다.그녀가 직접 그린 그림들,에이브러햄 링컨의 사진 등이 그 집의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그녀의 그림들은 정원을 가꾸기를 좋아하는 그녀의 취미생활과 연관된 것이었고,링컨의 사진은 재임 당시의 그의 정책과 두 사람 사이의 친분으로 미루어 그 의미를 추측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미국 최초의 사회문제 소설이라고도 불리는 스토의 대표작 <엉클 톰스 캐빈>은 오늘날엔 주로 아동소설로 읽히지만,그 시대에는 미국 뿐만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동시에 당시로서는 최고의 판매기록을 세웠던 작품이다.링컨은 심지어 이 책을 두고서 스토부인을 남북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추켜세웠을 정도였다. 어쨌든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사회문제,최소한 당시의 노예문제에 관한 한 서로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흑인 노예의 사진을 대하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해리엇 스토가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하여 노예제도의 철폐를 주장하고,실제로 도망노예를 숨겨주거나 도피시켜 주는등의 사회적 활동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이 보수적인 백인들의 본거지에서,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내기가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아무리 이 곳이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한 동북부 지역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류애나 평등의식의 소산이라기 보다는 남부의 흑인 노동력을 싼값으로 북부로 유입시키고자 했던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백인의 집에 걸려있는 흑인의 초상화는 정말 묘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동시에 해리엇 비처 스토라는 생각과 행동이 일치되어 나타나는 이 고집스런 여자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한 명의 여성작가의 문학적 운명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표하지 않은 수 없었다.그녀는 <엉클 톰스 캐빈> 외에도 32편이 넘는 작품을 집필했다.그녀의 작품은 세부묘사나 토착어의 구사 등으로 미뤄 볼때 사실주의 소설의 선구적인 작품으로서 평가되어야 마땅함에도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미국문학 선집에서 빠져 있거나 아주 군소작가 정도로밖에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노예제도라는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만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5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녀는 백인 남성 중심의 문학과도 한 판 전쟁을 치른다. 사실 스토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역사가 일천한 신생미국에서 글로 먹고 사는 전업작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스토는 전업작가로서 성공한 최초의 작가였다.당시 미국은 국민문화와 출판 사업이 도약단계에 이르렀을 때였고,젊은 시절의 그녀는 글쓰기로 돈을 벌기 시작한 많은 여성작가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오늘날 신비평이라고 알려진 이론이 대두하기 시작하면서,그녀를 포함한 여성들의 작품은 너무나 도덕적이고 감상적이라고 평가절하되어 대중들의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갔다.드디어 탈정치적 작품이 정치적 작품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지키는 시대의 서막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물론 이것은 정치적 투쟁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스토를 포함한 여성작가들은 이 전쟁에서 참혹하게 패배한다.그들의 작품은 강력한 남성적 예술의 표준에 의해 지나치게 감상적,교훈적,도덕적이라는 이유로 기준에 미달하는 아마추어 작가들로 격하되고,예술의 이름으로 백인 남성 중심의 작품들이 오늘날 미국의 정전으로 확립된 것이다.
여성문학의 서글픈 낙마,이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 만년의 스토는 가정적 불행과 더불어 아주 우울증이 심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층의 그녀 침실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드레싱 룸의 한 쪽에 놓여있는 약병들이 그 사실을 반증하는 듯 했다. 첨언하자면,하트퍼드의 이 집은 현존하는 유일한 집이다.그녀가 태어난 리치필드의 생가는 현존하지 않고,메인 주에 있는 그녀의 또 다른 집은 현재 해리엇스 플레이스 (Harriet's Place)라는 이름의 레스토랑겸 여관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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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캘빈과 함께(1880, 플로리다 맨다린) |
해리엇 엘리자베스 비처 스토(Harriet Elizabeth Beecher Stowe)는 종교적인 가문의 딸로서 코네티컷주 리치필드에서 1811년 6월15일 출생했다. 1833년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그녀는 신시네티로 이사를 갔고 1836년 신학교 교수인 캘빈 스토와 결혼한다. 결혼 후 흑인 노예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그리스도교적인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엉클 톰스 캐빈>(1852년)을 발표,국내외에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밖에 <오르섬의 진주>(1862),<고향 민담>(1869) 등 뉴잉글랜드를 무대로 하여 지방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몇몇 작품이 있다. <엉클 톰스 캐빈>의 줄거리는 켄터키의 부유한 농부 셀비씨의 농장에서부터 전개된다. 그는 노예들에게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는데,사업에 실패하고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자기 집에서 일하던 충실한 노예 톰과 하녀 에라이자의 아들인 5살난 혼혈아 하리를 노예 상인에게 판다. 그후 톰과 하리는 척박한 삶의 운명에 내맡겨진다.....
덧붙임: 역시 사진은 신문사로 왔다갔다 하는 도중 잃어버렸다.
제일 첫 사진은 가지고 있던 스토 집앞에서 찍은 사진 중 얼굴이 있어 신문사로 보내지 못한 사진이고, 마지막 사진은 부산일보 웹에 올라와 있는 사진이다.
하트포드에 있는 스토부인의 집.
거실
스토부인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