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사
굴원
굴원이 추방되어 강과 호숫가를 이리저리 떠돌며 시를 읊고 방황하니
안색은 초췌하고 몰골이 마르고 시들었다. 어부가 그를 보고 말했다.
“그대는 초나라 삼려대부가 아니시오? 어찌 이곳에 이르러 방랑하시오
?” 굴원이 말했따. “세상이 모두 탁해졌는데 나 홀로 맑고 바르고자 했
으며,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 몽롱하거늘 나 홀로 술 깨어 있고자 했노라.
이런 연유로 추방되었노라.” 어부가 다시 말했다. “성인은 만사에 엉키
거나 얽매이지 않고 능히 세속과 어울러 옮아갈 수 있다 했고. 세인이
모두 탁하다면 왜 그대는 썩은 진창의 물을 더욱 어지럽게 하고 탁한
물결을 일게 하지 않으시오? 또한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 세인이 모두
혼몽하다면 왜 그대는 어울려 술지게미를 먹고 진한 술을 마시지 않으
시오? 무슨 까닭에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하여 스스로가 추방되게
하였소?” 굴원이 말했다. “내가 듣길, ‘새로이 머리를 감은 사람은 관
을 털어 머리에 얹고, 새로이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고 걸
친다’라고 했소, 그러니 어찌 청결한 몸에 더럽고 구저분한 것을 받을
수 있겠소? 차라리 상강 흐르는 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의 배 속에 묻
히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오, 어찌 깨끗하고 흰 내가 세속의 더러운 티
끌과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소?” 어부가 웃으며 노를 저어 배를 몰
아가며 노래를 지어 말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
랑의 물이 탁하고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 어부가 어딘가로 가 버려
다시 더불어 말을 나누지 못했다.
[작가소개]
굴원[ 屈原 ]
<요약>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시인.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주요 작품에는 《어부사(漁父辭)》등이 있다.
출생-사망 : BC 343 ? ~ BC 278 ?
자 : 원
본명 : 굴평
국적 : 중국 초나라
활동분야 : 정치, 문학
출생지 : 중국 호북성(湖北省) 자귀현(秭歸縣) 굴원진
주요저서 : 《이소(離騷)》,《어부사(漁父辭)》
시대 : 춘추전국시대
중국 호북성(湖北省) 자귀현(秭歸縣) 굴원진에서 출생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왕족과 동성(同姓)이며, 이름은 평(平), 자는 원이다. 생몰연대는 기본자료인 《사기(史記)》 <굴원전>에 명기(明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설이 있으나, 지금은 희곡 《굴원》의 작자인 궈모뤄[郭沫若]의 설에 따른다. 굴원의 대표작인 《이소(離騷)》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정칙(正則)이라고 했고 자를 영균(靈均)이라고 표기했다. 굴원은 젊어서 부터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았고 26세에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였다. 하지만 법령입안(法令立案) 때 궁정의 정적(政敵)들과 충돌하여, 중상모략으로 국왕 곁에서 멀어지기도 하였다. 《이소(離騷)》는 그때의 분함을 시(詩)로 표현한 것이라고 《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당시 초나라는 제(齊)나라, 진(秦)나라 3국이 대립하였던 때였다. 굴원은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설(合縱說)을 주장하였으나, 초나라 회왕과 중신들은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한 진나라의 장의(張儀)의 전략에 속아 오히려 굴원이 실각하고 말았다. 초나라는 연횡설에 따라 제나라와 단교하였다가 진나라에 기만당하였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출병(出兵)하여 진나라와 전쟁을 벌였지만 고전만 거듭하다 패하였다. 굴원이 다시 등용하여 정사를 맡게 되었고 진나라와의 화평조건으로 장의의 목숨을 요구하였다. 장의가 자진하여 초나라의 인질이 되었지만 내통한 정적과 왕의 애첩(愛妾)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장의를 석방하고 말았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굴원은 귀국하여 장의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이미 장의는 진나라로 달아난 뒤였다. 이후 진나라에서 화평을 위해 초나라 왕을 진나라로 초대한다는 계략을 펴오자 굴원은 왕이 진나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지만 결국 왕은 진나라로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왕이 진나라에서 객사(客死)하자,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자란은 아버지를 객사하게 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굴원은 그를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굴원의 대표작인《어부사(漁父辭)》는 정계에서 쫓겨나 강남에 머물며 집필한 작품이다. 창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깨친바를 집필한 책이다. 굴원은 어부사에서 자신을 중취독성(衆醉獨醒)이라 일컬으며 초나라가 처한 상황을 한탄했다.《사기》에는 <회사부(懷沙賦)>를 싣고 있는데, 이는 절명(絶命)의 노래이다. 한편, 자기가 옳고 세속이 그르다고 말하고, 난사(亂辭:최종 악장의 노래)에서는, 죽어서 이 세상의 유(類:법·모범)가 되고 자살로써 간(諫)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창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의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굴원이 멱라수에 투신하여 죽은 날이 음력 5월 5일 단오날인데 중국에서는 이날을 문학의 날로 기린다. 특히 단오날에 댓잎에 싸서 먹는 쫑쯔(粽子)는 굴원을 기리기 위한 음식로 유래되었는데 쫑쯔를 강물에 던져 물고기들이 굴원의 시신을 뜯어먹지 못하게 했다는 풍속이 전해진다. 또한 중국에서 행해지는 용선(龍船) 경주 시합도 강물에 빠진 굴원의 시신을 빨리 건져내기 위한 것에서 유래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굴원 [屈原]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