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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정봉환도(大政奉還圖)
무라타 탄료(邨田丹陵)作
명칭(일본어) : 대정봉환(大政奉還)
-한어-간체 : 大政奉还
-로시야어 : Возвращение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власти Императору
유형 : 정권반납
발생기간 : 1867년 11월 9일 - 1867년 11월 10일
결과 : 왕정복고 선포와 무진전쟁(戊辰戰爭) 발발
대정봉환(大政奉還)은 경응(慶應) 3년 10월 14일(1867년 11월 9일) 에도 막부(江戶幕府) 마지막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명치천황(明治天皇)에게 통치권 반납을 선언한 사건으로, 이는 260여 년간 이어져온 에도 막부의 종언을 의미하기도 한다.
개요
제 2차 조슈 정벌 이후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이미 일본을 통치할 권세를 잃었으며, 이로 인해 유신파(維新派) 대부분의 인사는 일본의 정치구조를 기초부터 다시 건설하지 않을 시 일개 분열된 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전망하였다. 도사 번(土佐藩)의 유신인사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는 적극적으로 대정봉환론을 제창하였는데 그 내용은 막부가 정권을 조정에 돌려주고 위아래로 두 개의 의회(議會)를 두며 헌법을 세워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 사카모토 료마
도사 번의 전 번주 야마우치 도요시게(山内豊信)는 새 입법기관의 수장은 장군이 담임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대정봉환론건백서(大政奉還論建白書)》를 막부에 올렸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 《대정봉환론건백서》를 받아보고 즉각 구두로 대정봉환의 요구를 수락했다. 이는 막부 세력의 구조를 통해 다시금 정권을 돌려받을 수 있으리란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로써 그다음 날인 서기 1867년 11월 9일 천황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반납한 정권을 회수할 것을 수락하였다.
그러나 이 정권반납이 있은 후 조정은 전국 각 번의 대명(大名)이 즉시 교토(京都)로 와서 국책을 함께 논할 것을 명했으나 단지 몇몇의 번주만이 상경했을 뿐 절대다수의 제후가 병력을 누르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대정봉환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혹시라도 막부에 밉보일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다시 이렇게 반복된다면 조정은 그저 다시 막부로 하여금 잠시 정권을 장악하도록 요구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책략이었다. 그러나, 조정이 정권을 회수하여도 전국 각 번의 제후들에게 명령이 하달되지를 않으니, 되려 도막파(倒幕派) 세력인 사쓰마 번(薩摩藩) 및 조슈 번(長州藩)은 이러한 상황 속에 무력으로 막부정권을 물리쳐야만 비로소 새로운 정부가 순조롭게 성립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 도쿠가와 요시노부
1867년 사쓰마, 조슈, 히로시마 등의 번이 토막연맹(討幕聯盟)을 조직해 막부를 무력으로 타도할 것을 계획했다. 사쓰마 번이 3,000명의 번병을 이끌고 가고시마(鹿児島)에서 4척의 함(艦)으로 나누어 교토로 진격했다. 이전에 이미 교토에 7,000명의 사쓰마 번병이 주둔 중이었으므로 곧 사쓰마 측의 총 병력은 1만에 달했다. 조슈 번은 1,200명의 상비군을 오사카(大阪) 서부의 니시노미야(西宮)로 진주시켰고, 그 외에도 1,300명을 더 보내 오노미치(尾道)에 진주해 명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에 가세해 히로시마 번(広島藩) 역시 300명의 번병을 파견하여 교토에 주둔시켰다. 반막부 세력이 이미 막부를 '토벌할' 진영을 갖췄으나 싸움은 바로 시작되지 않았는데 이는 좌막파(佐幕派) 아이즈 번(会津藩) 및 쿠와나 번(桑名藩) 역시 중무장한 병력을 교토에 주둔시켰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도쿠가와 요시노부 스스로가 이끄는 막부군(幕府軍)이 여전히 교토 내의 니조 성(二条城)에 남아 있었기에, 도막파 번주들은 경거망동을 삼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민군중의 반봉건투쟁이 교토, 오사카, 요코하마(横滨), 에도 등 대도시의 내적 막부관할지에서 석권하니, 막부의 통치는 곧 떨어질 낙엽과도 같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퇴위진(以退爲進)의 책략을 구사해 경응 3년 10월 24일(1867년 11월 19일) 거짓으로 조정에 사직(辭職)을 올리고 정권을 천황에게 돌려주며 이를 대정봉환이라 하였는데, 그의 장군직 사퇴와 막부의 공식적인 폐지가 선언된 것은 1868년 1월 8일의 왕정복고와 일본제국이 최종적으로 선포되고 나서였다.
결과
일찍이 1867년 12월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당하자 막부는 더 이상 대정봉환의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王政復古の大号令)》이 반포되자 이를 불법이라 선언한 요시노부는 병력을 이끌고 오사카로 이동해 사쓰마 번 및 조슈 번을 향해 군사를 배치하였으나 패퇴하여 에도로 물러나게 되어 이로부터 무진전쟁(戊辰戰爭)이 발발했다.
영향
정치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이 시작되어, 일본 사회 전면구조에 대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봉건제도가 폐기되었으며 에우로파의 정치체제가 들어섰고, 이는 그 법률체계와 정부체계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향후 일본 정체로 하여금 팽창적인 속성을 띄게 하였고 결국 갑오(甲午)년(1895년)의 청일전쟁(淸日戰爭)과 1905년의 로시야-일본 전쟁(日露戦争; 로시야어 : Рус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전쟁 속에 일본은 조선(朝鮮)과 대만(臺灣) 등을 점령하였다.
문화
▲ 서장(西裝)의 명치천황
대정봉환 이후 천황은 옛 제도에 따라 정권을 장악하였고, 일본인들은 상고의 대화(大和) 문화로부터 민족주의의 기초를 모색했으며, 민간엔 복고의 열풍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명치유신은 되려 동시에 매우 많은 소위 서학(西學)들을 들였고, 에우로파와 아메리카의 문명을 숭상했다. 신문화(新文化)와 구문화(舊文化)의 교체는 문자개혁으로부터 다원화된 노선을 띄었다. 학자들은 가명(假名)을 제창하거나 로마자를 채용하거나 문자를 새로 만들거나 심지어 일본어를 폐지하고 잉글랜드어만으로 말할 것을 제창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