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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 1: 18. 굳게 결심함을 보고 - 룻 1: 20. 나를 마라라 부르라.
룻 1: 18. 굳게 결심함을 보고 -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
1]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나오미는 여러 가지 현실을 들춰 가며 룻이 동족에게로 돌아가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룻의 의지는 단호하였다.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신앙으로 승화된 룻을 보고 나오미의 권유는 단순한 이유에 불과하였다.
* 시 16: 8-11 –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2] 굳게 결심함을 보고
룻이 나오미를 따라가려는 진술을 듣고 그녀의 결심이 확고부동함을 확인하였다.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항변하는 룻에게 더 이상의 권고가 무익함을 알았다.
심지어 여호와의 징계라도 달게 받겠다는 의지는 더 이상 권고 할 수 없게 하였다.
* 단 9: 3 -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다니엘의 굳은 결심으로 70이레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 단 10: 12 -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결심하던 첫날부터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로부터 말일에 될 이스라엘 백성이 당할 이상을 깨닫게 되었다.
3]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홀로 된 나오미 역시 그동안 정든 두 며느리들을 떠나보내는 것을 진정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두 자부의 현세적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욕심은 접어두고 그들을 돌려보내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시험적 형태를 띠게 되었고, 결국 룻만이 통과하게 되었다.
반면 두 자부는 나오미의 의도대로 각자 자신의 행복의 길을 추구했다. 즉 오르바는 모압 땅 자신의 아비 집으로 돌아가고, 룻은 시어머니를 통한 여호와의 돌보심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나오미는 그들의 선택을 기쁘게 인정했다.
굳은 결심
하나님께 나오는 자는 쉼을 얻고 휴식을 얻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성도 여러분들에게 마음의 쉼, 영혼의 안식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고향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하여 10년만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 나오미는 함께 과부 된 며느리 룻과 함께 이스라엘 베들레헴 땅, 하나님이 계신 곳을 찾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오고 있으며, 하나님은 어떤 위로와 휴식을 주셨는가를 살펴 봄으로서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휴식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모압 여인 룻은 이방 여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간 사람이다. (마 1: 5). 이방 여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그리스도 조상의 자리에 이름이 올랐다. 이는 운 좋게 복권에 당첨되듯이 얻은 영예가 아니다.
천국은 아무렇게나 굴러가다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자리는 저절로 갈 수 있는 처소가 아니다. 믿음을 가지고 굳세게 두드리는 자에게만 들어가며, 얻으려고 결심하여 애쓰고 땀 흘리는 자에게 열리는 복된 성소다.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다. 인격의 세 가지 요소는 지(知). 정(情). 의(意)이다. 알고, 느끼고, 의지를 갖는 것이다. 의지는 마음의 결심으로 알고 느낀 것에 대하여 결심하므로 행동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천국을 소유하는 사람은 모두 행동하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 마 7: 20-21 –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다. 그 진리도 굳센 결심으로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진리를 듣고 고개를 끄떡이는 분은 많으나 땀 흘려 그 진리에 결심하여 실천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 마 11: 12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을 얻으려고 결심하고 쟁취하는 자에게 천국은 오늘도 얻어지는 것이다. 룻은 굳게 결심하므로 천국의 평화와 안식을 얻은 지혜로운 성도였다.
(1) 함께 동행하는 결심을 했다. (16).
룻은 시어머니와 동행하려고 “그를 「붙좇았」” 고(14),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16)언제 어느 때나 동행하려고 결심했다.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을 잘 붙들어야 한다. 믿음이 좋아지려면 믿음이 좋은 사람을 붙잡고 동행해야 한다.
여러분은 어떤 이와 동행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을 인생의 표본으로 삼고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나눌 수 있는 친구는 누구입니까? 세상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나오미는 인간적인 배려와 율법적인 두려움으로 룻을 두고 혼자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오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룻은 결심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6)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들에게 다가오는 첫 경험은 주변 사람들의 냉대와 방해이다. 예수 믿는 길로 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 길로 가면 힘들고 어렵다는 것으로 쉽고 편안한 길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누구와 동행하겠는가? 세상의 친구들인가? 믿음의 친구들인가? 결심하십시오. “주님 가신 곳에 나도 가겠습니다.” “주의 종들이 가는 길로 나도 가겠다.” “집사님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다”라고,
* 마 7: 13-14 –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18절을 보면, 결심은 논쟁을 불식시켰다. 결심은 만류를 물리쳤다. 결심은 인생을 바꾸었다.
(2) 함께 살고 죽을 결심을 했다. (17).
사람이 죽기로 결심하면 무서울 필요가 없고, 못 할 것이 없다. 룻은 독한 여자다.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하나님을 따를 수 있다. 독하게 예수 믿는 사람이 축복받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여행에 파송하실 때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 10: 16)고 하셨다.
십자가의 길, 좁은 길, 생명의 길은 우물쭈물 가는 길이 아니다. 가다가 쉬는 길도 아니요, 힘들다고 뒤돌아 가는 길도 아니다. 독한 마음을 먹고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이다. 결심하고 실천하므로 즉 결단으로 가는 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결단하셨다. 사탄은 십자가를 지지 말도록 유혹하지만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리고 결심했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 39)
사도 바울도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 20-21)
우유부단한 사람, 맺고 끊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할 때, 그들의 결심은 이런 것이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 21)
(3) 함께 믿고 섬기기로 결심했다. (16).
삼풍백화점이나 성수 대교가 무너진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 무너진 것이다. 성수 대교를 만든 사람과 관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 다리는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분들의 변명은 대개 “바쁘다”는 것이다. “식구들이 반대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의 없다는 핑계일 뿐이다. 신앙생활에 불충하는 분들의 변명은 구구하나 사실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결심은 마음을 세우는 것이다.
룻은 마음을 세웠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참으로 위대한 결단이다. 위대한 결단이 있는 곳에 위대한 인생이 태어나고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를 보면, 그는 평생에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기 인생을 마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와 같이 자기 결심을 말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 15)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예수님께 나오는데 사람들이 많이 둘러싸여 만나기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결심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눅 19: 3-4)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룻은 결심으로 하나님께 나오므로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간 축복된 성도였다. 그녀는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의 복을 얻었다.
4. 귀향 ( 1: 19-22 )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나오미는 ‘기쁘다, 사랑스럽다’는 말(나엠)에서 나온 말이며, 마라는 ‘쓰다, 괴롭다’는 말(마르)에서 나온 말이다.
나오미는 자신이 모압으로 이민을 떠날 때 풍족하게 나갔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징벌하셨고 괴롭게 하셨다고 말한다. 사람의 지혜와 계산으로 행했던 모압 이민은 실패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모압 땅으로 이민 간 죄와 그의 두 아들을 이방 여인들과 결혼시킨 죄를 엄하게 징벌하셨다.
룻 1: 19. 베들레헴에 이를 때 -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
1]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은 태초로부터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장소로 예정된 축복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으로 가야 한다.
* 미 5: 2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 눅 2: 4-5 –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2]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1) 성읍 백성의 환호
성읍에서 유력한 가문이었던(2절) 엘리멜렉 가족이 먼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간 사실도 분명 한 때의 큰 화젯거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후, 낯선 여인과 함께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 나오미의 등장은 분명 조그마한 성읍 베들레헴을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소동하기에 충분히 재미난 화젯거리이었음이 틀림없다.
(2)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잃은 양의 비유(눅 15: 4-7)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하셨다.
되찾은 은전(눅 15: 8-10)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하셨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눅 15: 11-32)에서는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하셨다.
3]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이 말은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놀라움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이방 여인인 며느리만을 데리고 빈손으로 처량하게 돌아온 나오미의 모습을 보고, 연민의 정을 느껴 발한 탄성이다.
따라서 이 말은 10여 년 전 고향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르게(21절) 변한 나오미의 모습과 처지를 반영한 말이다.
룻 1: 20. 나를 마라라 부르라. -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
1]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오미'(Naomi)란 이름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본장의 전후문맥과 어근을 살펴 볼 때 '희락', '기쁨', '감미로운 자', '은혜로운 자', '사랑스러운 자'란 의미를 지닌다.
2] 나를 마라라 부르라.
마라(Mara)는 '괴로움', '쓰라림', '씀'을 의미한다.
* 출 15: 23 -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라 불러 달라고 한 것은 모압 생활의 슬픔과 고통뿐 아니라, 지금도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고 괴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 출 15: 22-25 –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3]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여기서 나오미가 특별히 하나님의 신 명칭을 '전능자'로 부르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전능자'(솨다이)란 신 명칭은 택한 백성이 순종의 길로 걸어갈 때는 무한히 축복해 주시되, 어그러진 길로 갈 때는 어김없이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 주는 명칭이다.
나오미도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사용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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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잠 11:29).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