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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에 앞설 자를 계수하라
민 1:1-19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3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4 각 지파의 각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 한 사람씩을 너희와 함께 하게 하라
5 너희와 함께 설 사람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르우벤 지파에서는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요
6 시므온 지파에서는 수리삿대의 아들 슬루미엘이요
7 유다 지파에서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요
8 잇사갈 지파에서는 수알의 아들 느다넬이요
9 스불론 지파에서는 헬론의 아들 엘리압이요
10 요셉의 자손들 중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요 므낫세 지파에서는 브다술의 아들 가말리엘이요
11 베냐민 지파에서는 기드오니의 아들 아비단이요
12 단 지파에서는 암미삿대의 아들 아히에셀이요
13 아셀 지파에서는 오그란의 아들 바기엘이요
14 갓 지파에서는 드우엘의 아들 엘리아삽이요
15 납달리 지파에서는 에난의 아들 아히라이니라 하시니
16 그들은 회중에서 부름을 받은 자요 그 조상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이스라엘 종족들의 우두머리라
17 모세와 아론이 지명된 이 사람들을 데리고
18 둘째 달 첫째 날에 온 회중을 모으니 그들이 각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인 남자의 이름을 자기 계통별로 신고하매
1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가 시내 광야에서 그들을 계수하였더라
민 1:1-19 /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두번째 되는 해 이월 초하룻날,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 있는 만남의 장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너희는 이스라엘 온 공동체 사람들의 수를 세어라. 각 씨족별로 또 각 집안별로 남자들을 세어 일일이 이름을 불러 가면서 명단을 작성하여라. 3) 20세 이상되는 남자들로 군대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되 너와 아론이 함께 이 일을 맡아 하여라. 4) 또 각 지파에서 집안의 우두머리를 한사람씩 뽑아내어 너희의 일을 돕도록 하여라. 5) 너희를 도와줄 사람들은 각 지파별로 다음과 같다. 르우벤 지파에서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 시므온 지파 중 수리삿대의 아들 슬루미엘, 유다 지파에서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 잇사갈 지파에서 수알의 아들 느다넬, 스불론 지파에서 헬론의 아들 엘리압, 에브라임 지파 중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 므낫세 지파에서 브다술의 아들 가말리엘, 베냐민 지파에서 기드오니의 아들 아비단, 단 지파에서 암미삿대의 아들 아히에셀, 아셀 지파에서 오그란의 아들 바기엘, 갓 지파에서 드우엘의 아들 엘리아삽, 납달리 지파에서 에난의 아들 아히라, 이 가운데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이다.' 6) - 16) 이상 열두 사람은 이스라엘 온 공동체에서 뽑아 낸 사람들로 조상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각 지파 대표들이면서 또한 군대로 편성된 이스라엘 각 사단을 지휘하는 사령관들이었다. 17) 모세와 아론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18) 애굽에서 나온 지 두번째 되는 해 이월 초하루에 이스라엘 온 공동체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20세 이상된 남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가며 각 씨족과 집안별로 등록하도록 하였다. 19)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수를 세어 병적부를 작성하였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가족과 종족에 따라 군대 조직에 필요한 자들을 계수합니다.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1-4) 출애굽 후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속하기 위하여,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씩 속전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출 30:11-16).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차례 인구 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출 38:26).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세우신 성막을 완공한 후(출 40:2, 17), 한 달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군대로 재편하고, 약속의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인구 조사를 하였고, 두 번째는 출애굽 제 40년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 정복과 분배를 위한 준비 작업을 위해 실시되었습니다(26:1-65).
인구 조사를 관장한 사람들(5-16) 모세와 아론을 도와서 인구조사에 함께 했던 사람들은 각 지파의 두령(족장)들입니다(4, 6). 이들은 선민 공동체인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과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들은 “회중에서 부름 받은 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겸손함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벧전 5:5). 그리고 이렇게 선택된 족장들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조언에 따라 선택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들과 동일한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출 18:24-26). 또한 “종족들”이란 ‘여러 천들의’라는 뜻으로, 수 없이 많은 수로 상징되며, 종족이나 일족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창 24:60; 출 12:37; 민 1:21).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17-19) 다윗 당시 인구 조사는 거의 열 달 동안 진행되기도 했으나(삼하 24:1-9), 본문에서는 출애굽 2년 2월 1일, 하나님께서 인구 조사를 하도록 명령하신 그 날로 조사가 끝났습니다(1, 18).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한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던 것, 그리고 과거에 인구 조사를 했던 자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출 30:11-12). 그 결과 각 지파의 족장을 따라 전쟁에 나갈만한 남자가 총 603,550명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을 볼 수 있는데, 야곱의 75명 가족을 약 430년간의 애굽 생활을 통해 수백만 명의 큰 민족으로 만드시는 기적을 이루신 것입니다(출 12:40).
적용: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준비된 자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준비되어 있습니까?
< 설 교 >
하나님의 계수
민수기 1:1-4 / 서 철 목사
예배하러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1. 하나님은 성도들을 계수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시내 광야 회막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수하라고 하셨습니다. 민수기는 말 그래도 백성들의 수를 헤아린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민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백성들의 수를 계수하였습니다. 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을 계수한 성경입니다. 싸움에 나갈만한 20세 이상의 남자를 계수하였고(민1:3), 일 개월 이상 된 레위지파와 장남을 계수하였으며(민3장), 회막에서 봉사할 30세~50세까지의 남성을 계수하였습니다.(민4장)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시내 광야 회막에서 계수하셨습니다.(민1:1) 시내 광야 회막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도들을 만나던 거룩한 성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서 계수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계수는 하나님의 약속이행의 준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계수하십니다. 하나님은 섬세하시고 분명하십니다. 성도들을 정확하게 계수하시고 계수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땅을 주시기 위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갈 사람들을 계수하셨습니다. 종족과 조상의 명수에 따라 정확하게 계수하셨습니다. (민1:2)
2. 하나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계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시내 광야 회막에서 <계수>를 명령하셨습니다.
<민수기 1:1>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광야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계수는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명령되었고, 모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계수하였습니다. <광야>는 연단의 자리이지만 동시에 완성의 자리입니다. 고난과 훈련의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공동체를 만들어 갔던 완성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계수하라고 하신 뜻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완벽하게 준비하여 하나님의 공동체를 완성시키라는 뜻이 있습니다. 시내 광야는 출애굽과 가나안의 중간 과정 단계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얻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훈련의 과정>입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십년간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엘리야는 광야 길을 지나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왕상 19장)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4장) 광야는 애굽을 떠나온 사람들이 겪었던 고난의 장소가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갈 사람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였던 성별의 장소였습니다. 광야의 훈련과 연단은 하나님의 약속을 얻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훈련의 과정입니다.
요즘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이자 광야의 시험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 전 까지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40일간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넉 사에 열흘 순을 합친 말로 열흘이 네 번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금년 부활절은 4월 5일입니다. 그래서 역산해서 40일을 계산한 2월 18일에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2월 18일 부터 4월 5일 까지는 실제 46일이지만 40일로 계산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을 계산할 때 주일은 계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주일은 6일이고 여섯 주를 곱하면 36일에 역산하니까 토금목수 해서 항상 수요일에 사순절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언제나 수요일에 시작하는 데 이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합니다. 올 해는 2월 18일이었습니다. 재의 수요일은 전통적으로 참회를 하고 회심을 하면서 참된 인생의 가치를 생각합니다. 종려나무의 재를 태워서 이마에 십자가를 그어주면서 성경을 읽어줍니다.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창 3:19), 혹은 “회심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막 1:15). 우리가 언제나 생각해야 할 것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 말은 우리 모두는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일체의 욕심을 버리고 잘못된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덧없는 육신을 위하여 악한 마음으로 살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믿음으로 사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선용하여 선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축복하며 살아갑니다. 이제라도 악한 마음,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 탐욕스런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돌이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40은 고난의 상징수입니다. 땅의 수 4에 땅의 만수를 합친 40은 훈련이 채워진 숫자입니다. 예수님의 40일 광야 금식(마4:2), 모세의 40일 시내산 훈련, 노아의 40일 홍수(창7:17), 정탐꾼의 40일 정탐(민13:25), 삼손 출생 직전의 40일 불레셋 치하(삿13:1), 엘리야의 40일 광야 행군(왕상19:8),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 행군, 부활하신 예수님의 40일 현현(행1:3), 등 성경은 40일을 <훈련과 연단의 완성기간>으로 말합니다. 올 사순절에는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돌아보시고 스스로 자기를 연단시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신을 완성시켜 가보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은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을 계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사람을 계수하라고 하셨습니다.
<민1:3>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 하나님은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을 계수하셨습니다. 이 때는 출애굽을 한 지 2년 2개월 되던 첫 날이었습니다.(민1:1) 하나님은 애굽을 떠난 후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광야를 지나는 동안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을 계수하셨습니다. 그냥 계수한 것이 아니고 이십 세 이상의 남자들을 계수하였습니다. 가나안은 <싸움에 나갈 만한 성도>가 차지합니다. 모세가 계수한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은 총 603,550명이었습니다.
<민1:45~46> 45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 조상의 가문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이스라엘 자손이 다 계수되었으니 46 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우선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입니다. 더더욱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어린 아이와 여자들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준비를 완성해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광야는 훈련과 연단의 장소이고 가나안 입성을 위한 준비의 완성 장소입니다. 그리고 광야는 예수님이 시험을 이겨 내셨듯이 영적으로 마귀와 싸워야 하는 장소입니다. 성도들에게도 광야가 있습니다. 광야를 지날 때 낙심하지 말고 시험을 이기시고 마귀를 이기시고 악한 영들과 싸워 이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수를 받은 성도들은 영적전투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신앙심은 영적전투를 할수록 강해집니다. 슈틀리케의 축구는 실전감각을 존중했습니다. 영성도 실전감각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영적 전투를 할수록 더 깊어집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과 싸워야 하고(롬7:25), 악한 영들과 싸워야 합니다.(엡6장) 이를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의 궤계를 대적해야 합니다.
<엡6:10~17>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시험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십시오!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얻게 됩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습니다.(딤전3:13) 마지막 싸움과 마지막 승리를 계시하는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에게 영적전투에서 승리하라고 독려합니다.(계13:4)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교회를 다니시면 편하기는 하지만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때로는 영적인 싸움에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조금 부딪히고 힘들어도 광야의 시험이 있어도 사역의 현장에서 주님의 일을 해 본 사람만이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의 주인공이 됩니다.
4. 하나님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을 새롭게 계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계수한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자 모두 다 소멸하시고 새로운 사람들을 계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두 번 계수하셨습니다. 그래서 603,550명과 601,730명, 22,000명과 23,000명의 다른 계수 결과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처음 계수하신 수는 603,550명(20세 이상 남자), 22,000명(레위지파), 22,273명(장남), 그리고 8,580명(30세~50세 회막 봉사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염병 후에 다시 계수하십니다.(민26:1) 두 번 째 계수는 601,730명(민26:51)과 23,000명(민26:62)이었습니다. 첫 번 째 계수했던 603,550명은 단 두 명 여호수아와 갈렙 만을 제외하고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22,000명의 레위인도 그리 되었습니다. 계수는 하나님의 성별(거룩한 구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두 번 계수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필요하다!
<민26:63~65> 63 이는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계수한 자라 그들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계수한 중에는 64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65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이 계수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정확한 보고를 중시하는 불신앙적이고 불순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성적인 정확한 보고를 분석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제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계수 속에는 바로 그런 깊은 영적인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싸움에 나갈만한 이십 세 이상의 남자와 함께 레위지파도 따로 계수하신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레위 지파는 일 개월 이상 된 사람을 계수하였고, 그 중에서도 삼십 세에서 오십 세 까지의 남자들을 따로 계수하여 회막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 조차도 소멸하시고 새로운 사람을 계수하셨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오늘날 목사가 레위지파요 장로와 교회의 중직자들과 사역자들이 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교회의 목사 장로가 되고 권사 집사가 되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계수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나안을 약속해주셨지만 우리가 불신앙적으로 불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여지없이 소멸하시고 새로운 사람을 계수하셔서 하나님의 복을 새로운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신앙적인 사람들에게 가나안을 주십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십니다.
<결 론>
하나님의 계수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준비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을 계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사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룰 사람을 계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시면서 이 사순절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계획하신 일들을 펼쳐나가십니다. 그러나 그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주관과 인간의 책임이 밀접하게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거룩한 전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하는 전쟁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만이 아닌 우리 자신의 적극적인 참여 즉 순종 또한 필요합니다.
계수딘 사람들
민 1:1-4 / 박봉수 목사
훈련소는 군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기관입니다. 군인을 만들어내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민간인을 군인으로 다듬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회 생활하던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나라의 부름을 받고 몰려왔습니다. 학교 다니던 사람, 직장 다니던 사람, 백수 건달로 살던 사람... 등등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훈련소의 문을 들어섰습니다. 말도 많습니다. 제 멋대로 입니다. 명령이 내려져도 어슬렁 거리며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결코 군인이 될 수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6주 훈련기간이 지나고 나면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눈빛이 빛이 납니다. 온 몸에 군기가 가득 배입니다. 말투도 달라집니다. 명령 한 마디가 떨어지면 민첩하게 움직입니다. 막 전쟁터에 내 보내도 될 정도로 사람들이 달라졌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나니까 자대 배치를 받게 됩니다. 봉투를 든 장교 한 사람이 번호와 이름을 부릅니다. "이상 몇 명 몇 사단!" 해당된 군인들은 저마다 짐을 꾸려 트럭에 올라탑니다. 자대로 떠나게 됩니다. 본격적인 군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일종의 훈련소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광야로 불러내셔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 땅으로 진군해 들어가기 위해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성인 남자들을 부대별로 나누어 계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파별로 전투대형으로 군대의 진용을 갖추고 훈련받은 사람들을 배치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수를 세는 일이 내용의 중심이라고 해서 이 책의 이름을 민수기 영어로 " numbers " 라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 아시다시피 요셉 때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 거기서 무려 430년 간을 노예로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저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유월절을 지낸 뒤에 애굽을 출발하여 만 2개월이 지나서 시내 광야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시내 광야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께서 저들과 계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저들에게 십계명을 위시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성막을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시내 광야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1절에 나오는 것처럼 출애굽 제 2년 2월 1일 즉 출애굽한 지 1년 1개월이 경과한 때, 시내 광야에 머문 지 11개월이 된 때 하나님께서 가나안 진군을 위한 준비를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명령을 따라서 가나안 진군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작업이 계수를 하는 작업입니다. 훈련받은 군사들을 군대로 조직하고 전쟁에 나갈 수 있게 준비한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구약 신학자 월터 부르기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광야 생활 특히 시내 광야에서 새로운 백성으로 거듭 태어났다고 해서 이 광야를 훈련소로 부르고 있습니다. 정말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던 민간인들이 군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이 훈련소인 것처럼 이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에서 영적 군대가 되도록 변화시켰던 훈련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광야 훈련소를 거친 사람들이 계수되어 조직되었습니다. 1:20절에서 46절까지 계수된 내용이 자세하게 지파별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르우벤 지파; 46500명, 시므온 지파; 59300명, 갓 지파; 45650명, 유다 지파 74600명, 잇사갈 지파 54400명, 스불론 지파 57400명, 에브라임 지파; 40500명, 므낫세 지파 32200명, 베냐민 지파 35400명, 단지파 62700명, 아셀 지파; 41500명, 납달리 지파 53400명 총계가 6십만 3천 5백 5십명이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영적으로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들은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 계수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고 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비롯하여 계수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오늘 여기에서 역사하시는 동안 계수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사도 요한이 계시 가운데 보았던 영적 숫자 144,000이라는 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계수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우리가 성령께 계수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계수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그러면 계수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먼저 본문에서 계수된 사람들 6십만 3천 5백 5십 명안에 포함된 사람들은 누구인 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홍해를 건넌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건넜다는 사실은 지리적인 이동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애굽 땅에서 살다가 이제 광야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저들의 신분이 달라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저들은 홍해 저편에 살 때 부역장에 끌려가서 국고성을 세우기 위한 부역 노예로 중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감시를 받았습니다. 허락된 장소에서만 살아야 했습니다. 주는 것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자유를 박탈당한 채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가, 사탄의 종이었던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9:1에서 이런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야 사도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내주로 모시기 전에 욕망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이기적인 욕심에 집착하여 살았습니다. 때로는 죄의 수렁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벗어나고 싶어도 끊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고 끊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런 것들을 훌훌 털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죄의식을 벗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욕망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욕심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유인이 된 이들에게도 여전히 무거운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자유를 지키고 자유를 계속 누려야 한다는 문제입니다. 자유는 방종과 다르기 때문에 무거운 책임이 따라야 하고 자유를 지키기 위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봅 바틀렛이라고 하는 탐험가가 경험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외국을 여행하는 중에 아주 희귀한 새 몇 마리를 얻었습니다. 이것을 새장에 가두어 가지고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이릅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중에 이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난히도 시끄럽게 굴면서 새장에 갇혀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새장을 발톱으로 할퀴고 머리를 찧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새장에서 계속 푸덕푸덕 푸덕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몸부림을 치고 열광을 하니까 결국은 새장 문이 열렸습니다. 새는 망망한 대해 한 가운데로 도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새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창공을 높이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새장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몇 시간 후에 이 봅 바틀렛씨는 자기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렇게 날아올랐던 새들이 다시 배로 돌아와서 날개의 힘이 지쳐 가지고 그 갑판 위에 그냥 툭 떨어져서 쓰러지는 거예요. 저들은 자유를 얻었다고 날아올랐는데 망망대해에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물론 먹을 것도 없습니다. 죽기 살기로 이 배를 향해서 다시 돌아온 겁니다. 온 힘을 다해서 돌아와서, 간신히 돌아와서 갑판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지킬 힘이 있을 때 계속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 자유를 지킬 힘이 부족하면 또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유를 지킬 힘이 부족하자 과거 애굽 시절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비록 노예였지만 차라리 그 시절이 더 좋았다고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능력이 소멸되면 자유를 잃게 되고 또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욕망의 늪 속으로, 죄의 구렁텅이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훈련을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수 d있게 훈련시키셨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훈련하셨고, 능력을 갖추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 가지로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는 예배 훈련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 훈련입니다.
예배 훈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제사 제도를 세워주셨습니다. 성막에 나와 제사를 정기적으로 지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민 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행군 도중에 야영을 하거나 얼마 동안 한 자리에 머무르게 될 때 어떻게 진을 쳐야 할 것인가를 자세하게 지시해 주고 있습니다. 제일 중앙에 성막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 사면에 레위 지파가 자손별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사방위로 한 방위에 세 지파씩 자리를 잡습니다. 그 그림을 상상해 보십시오. 성막이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진영으로 자리잡고 있을 때 저들은 비록 그곳이 광야였지만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성막 위에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저들을 지켜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막이 이스라엘 진영 밖에 놓여있었다면 낮에 구름기둥이 저들을 지켜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낮에 저들은 견딜 수 없는 뜨거운 태양 빛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 불기둥이 저들을 지켜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차가운 사막의 바람으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생활에 예배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모든 생활이 예배를 중심으로 짜여지고 배치될 때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생활로 질서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생활 가운데 예배가 중심이 되지 못할 때 우리 생활은 뒤죽박죽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가 여러분의 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삶이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불안하고 문제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예배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예배가 여러분의 생활 저 밖에 밀려있지 않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서 예배를 여러분의 생활 한 복판으로 되돌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말씀 훈련
하나님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법궤에 모셔 놓았습니다. 이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 길을 인도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저들의 광야 생활을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민 10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군해 갈 때 어떻게 행렬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인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2지파를 네 부대로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부대에 세 지파씩 나눈 것입니다. 제일 앞 부분에 법궤가 나갑니다. 그리고 첫 부대인 세 지파가 나서고, 그 뒤에 성막 겉은 것, 그리고 두 번째 부대인 세 지파가 나서고, 그 뒤에 성물이 나가고, 그리고 그 뒤에 세 번째 네 번째 세 지파씩 나섰습니다. 이 행렬은 지대가 넓고 평탄한 곳을 지날 때와 협소한 지역을 지날 때로 구분이 됩니다. 그래서 폭이 넓을 때와 또한 폭이 좁을 때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렬을 짰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법궤가 맨 앞을 섰습니다.수 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널 때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특히 3:15을 보면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흘러내리던 물이 멈췄습니다. 그리고 3:17을 보면 그 법궤가 요단강 한 복판에 서 있는 동안에 강바닥은 마른 바닥처럼 물이 다 말라버린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4:18을 보면 법궤가 요단강에서 나오자 다시 요단강물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이 우리의 가는 길에 앞장을 서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말씀이 우리 앞의 요단강을 열고, 우리 앞에 놓인 장벽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할 때 우리의 가는 길이 하나님의 백성의 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이 하나님의 말씀을 앞장세우시는 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보내십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출애굽시키시고 예배로 말씀으로 훈련시킨 사람들을 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보내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군대의 진영을 갖추게 하셨을까요? 3절보면 싸움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수많은 적들이 있었습니다. 끝없이 전쟁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 준비를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와 보면 여러 곳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적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좋은 군사가 되라고, 영적 무장을 잘하라고 권면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딤후 2:3-4을 보겠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전쟁입니다.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우리는 먼저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1807년 독불 전쟁 때 독일은 프랑스에게 패했습니다. 당시 피히테는 1807년 12월부터 1808년 초까지 일요일마다 14회에 걸친 강연을 통해 독일 국민들에게 그들의 이기심과 도덕적 타락을 경고했습니다. 그후 1871년 다시 일어난 독불 전쟁에서는 독일이 프랑스를 굴복시켰습니다. 그 때에 개선장군의 첫마디는 다음과 같다. "조국의 승리는 내 공로가 아니라 독일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힘이었습니다. 모든 영광을 그들에게 돌립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기도 필요하고, 물자도 필요하고 필요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좋은 군인입니다. 올바른 국가관, 올바른 정신무장이 된 좋은 군인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이라는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실력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인맥도 필요하고 이런 저런 것들이 다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 더 필요한 것은
우리들의 영적인 무장입니다. 예배로 무장하고, 말씀으로 무장한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생이라는 전쟁터로 내보내시기 위해 계수하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배와 말씀으로 무장을 잘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늘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강한 남성이 있는 교회
민 1:1-4 / 이성희 목사
우리 총회가 정한 남선교회주일입니다. 모든 남선교회 회원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라며 우리 남선교회들이 전도하며 봉사하는 일에 더욱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최근 우리 국회에서는 호주제 폐지가 통과되어 여성의 지위가 많이 확보되고 가정에서도 남자들이 호주라는 이름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도 부모의 성을 선택할 권리를 가져서 형제간에도 성이 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느 신문에선 “여성의 능력과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남성 위주의 전통적인 결혼 관념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하였습니다. 전통적인 결혼 관념은 무너져도 성경적인 결혼 관념은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지위가 함께 보존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 세계 인구 중 여성은 52%입니다. 남성이 48%입니다. 수가 적은 남성이 움직이는 세계적인 힘은 엄청납니다. 그러나 소리 없이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의 힘도 무시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앞으로는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해서 남성의 역할이 적어지면 안 됩니다. 역시 남자는 남자입니다. 남자가 강해야 합니다. 너무 기죽이지 말고 기 살려주어야 합니다.
한강을 한강(恨江)이라고 합니다. 한 많은 강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강에 몸을 던지는지 몰라요. 빚에 시달려, 명예 실추 때문에, 하루 1명꼴로 한강에 투신한다고 합니다. 한강에 투신하는 사람 가운데는 남성이 전체의 90%이고 50-60대의 중환자가 많습니다. 유명인사들은 명예 탓에, 서민들은 생활고 탓에 몸을 던집니다. 이런 때에 사회는 남성들의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남성의 85%가 가부장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사내대장부의 콤플렉스입니다. 생활의 책임을 짊어져야 합니다. 사소한 불평이나 고통내색, 걱정거리를 표현하지 못합니다. 울고 싶어도 “남자가 운다”는 말 때문에 울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스트레스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남성들에게 교회는 위로와 힘이 되어야 합니다.
중년남성들의 젊어지기 붐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최근 노화방지 클리닉에서는 유행 ‘보톡스’ 요법으로 얼굴 근육 일부에 주사를 놓아 근육을 당겨주어 주름을 없앤다고 합니다.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 기억력이 회복된다고 하여 주사를 맞는다고 합니다. 기억력이 없어지는 것도 좋은 일인데 말입니다. 중년 남성들 사이에 첨단 의학 기술로 신체 나이를 되돌리려는 ‘안티 에이징(Anti Aging 노화 방지)’이 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런 외형적인 노력이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힘을 키워야 합니다. 외형적인 힘만이 아니라 내면적인 힘을 키워야 합니다. 일본이 독도가 자기의 땅이라고 우기지 못하도록 힘을 키워야 합니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왜곡하지 못하게 힘을 키워야 합니다. 분단국가의 설움을 말끔히 날려버릴 수 있도록 힘을 키워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우리 힘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힘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세상입니다. 힘이 없으면 결국 스스로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성들에게도 이런 힘이 필요합니다. 힘이 있어서 누구도 얕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힘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단어는 ‘차일’(chayil)인데 ‘추을’(chuwl)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추을’이란 말은 진통이나 출산을 의미하는 구약성서의 단어입니다.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진통과 같은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출산과 같은 고통 끝에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열대 아메리카산인 짖는 원숭이가 정글에서 가장 소리가 큰 동물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힘이 센 것은 아니다”. 소리가 크다고 힘이 센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소리가 없는데서 큰 힘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포스코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곳곳에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입니다”(We move the world in silence)고 써놓았습니다. 이건 포스코에 써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에 써놓아야 할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고요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고요합니다. 겁이 많은 개가 크게 짓습니다. 우리가 소리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에서 우러나는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 남선교회 회원들이 힘이 있는 남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세 가지 힘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를 강하고 지혜롭게 살기 위하여 필요한 세 가지 힘을 잘 이해하고 힘을 키우기를 바랍니다.
첫째, 영력이 강한 남성
영성은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숨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위대한 교부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성이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영성이란 ‘그리스도와 일체된 삶’입니다.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삶의 방법과 생각을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닮아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영성이란 성령 즉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영성적 힘이 제일 먼저 필요합니다. 영성적 힘이 영력입니다. 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미래인이 추구하는 영성의 제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어야 세상에 대하여 영성을 제공할 수 있게 됩니다.
앙드레 말로는 “21세기는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요즘, 현대 의학의 가장 뚜렷한 흐름의 하나는 기도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과대학에서 기도와 영성을 가르치는 학교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기도하며 치료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정보사회는 양극화 시대입니다. 양극화란 경제뿐만 아니라 영성도 양극화됩니다. 이런 영성의 양극화 시대에는 결국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이름만 가지고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으로 크게 나누어질 것입니다. 칼 라너(Karl Rahner)도 이러한 양극화 현상을 “오늘날에는 신비주의자가 되든지 아니면 불신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생명을 얻는 영성이든 아니면 생명 파괴적 영성이든 다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한국 교회의 주제는 “예수 믿고 천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샌가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로 변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영적인 관심으로 교회의 관심이 변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적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삶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머리 속에 있는 영성이 아니라 삶이 영성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삶이 영성적이 되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영력을 키우는 방법은 기도와 말씀과 예배와 봉사 등입니다.
삼손은 성경에 나온 인물 가운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던 남성이었지만 자기의 충동을 통제할 만큼 강인하지 못했습니다. 외형적인 힘은 있었지만 내면적인 힘이 없었습니다. 외형적으로 강한 자가 내면적인 약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형 인간이 되어야 하고 영성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지력이 강한 남성입니다.
현대를 살기 위해서는 지식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지식사회 혹은 정보사회라고 하는 현대사회는 과학과 기술, 정보와 지식으로 대변되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 살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피터 드러커는 지식 사회의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지식은 국경이 없습니다. 둘째는 지식은 상승 이동이 쉬워집니다. 셋째는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는 지식근로자 혹은 지식기술자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입니다. 지식의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식사회입니다. 지식이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지식을 가져야 살 수 있습니다. 힘도 이전에는 물리적 힘을 말하다가 이제는 지식의 힘을 말합니다. 힘도 이동된 사회입니다.
인간의 의식도 지정의(知情意)로 말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지성입니다. 정신 활동의 근본 기능이 지성, 감정, 의지인데 배우는 것은 지적 요소를 충족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어디까지나 미완성적인 존재이므로 계속해서 배워야 합니다. 인간이야말로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미숙한 존재입니다.
유대인들은 배움을 강조했습니다. 학자 라무단은 “학자는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배우는 자가 가장 현명한 자라고 합니다.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성경도 배움을 강조합니다. 구약에서는 “율법서를 읽어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신 17:19)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십니다. 바울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빌 4:9)고 합니다.
영성가 리처드 포스터는 ‘영적 훈련과 성장’(Celebration of Discipline)이란 책에서 “묵상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칼 바르트도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만 가지고 있으면 부족합니다. 중요하긴 하지만 신문이 있어야 성경도 가치를 발하게 됩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습한 제자였습니다. 그는 풍부한 지식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전 지식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신자들을 박해하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지식은 신앙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의 지식은 신앙을 만나 비로소 온전한 지식이 된 것입니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에서 학습할 때에 18년 동안 하였습니다. 처음 6년은 자연과학을 공부합니다. 중간 6년은 인문과학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6년은 신학을 공부합니다. 신학은 세상의 학문을 공부한 다음에 했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13에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것 즉 신앙과 아는 일 즉 지식이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됩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종교 없는 과학은 위험하고 과학 없는 신앙은 맹목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과 과학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폴 투르니에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라는 책에서 “말을 통해 남자는 생각을 표현하고 정보를 교환한다. 여자는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말한다”고 합니다. 남자들의 말은 지식 전달이 많습니다. 그 것이 남자들의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식을 더 많이 쌓아야 합니다.
셋째, 체력이 강한 남성
현대 사회에서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관심의 하나는 건강입니다. 건강하면 굉장한 관심을 가집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은 체력입니다. 체력은 국력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체력은 곧 생명입니다. 온 천하를 다 얻어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류가 직면하게 될 가장 큰 폭발의 첫째는 인류의 수명의 폭발이며 둘째는 정보의 폭발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은 남자가 72.8세이고 여자가 80세입니다. 평균수명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세계보건기구의 ‘21세기 삶 보고서’에 의하면 2025년 인류의 평균 수명은 73세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오래 사는 것도 좋지만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합니다.
효경에는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몸을 헐어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이 좋은 육체를 주신 하나님께 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몸을 성령의 거룩한 전인 줄로 알고 육체를 보존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19에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잘 보존해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롬 12:1) 자세가 육체를 잘 보존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보존은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갈 6:17). 성경대로 살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은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하-8)고 합니다.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연습해야 합니다. 운동해야 합니다. 바울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굉장히 유익합니다. 자신의 체력과 형편에 맞는 적절한 운동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40대 남자는 여자에 비해 사망할 확률이 3배 이상 높다고 합니다. 40대만 지나면 몸을 조심하고 잘 관리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하나님을 위해서,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나라의 정상 여성 85%가 자기가 비만이라 생각한답니다. 비만 남성 85%가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꼭 건강검진도 받으시고 건강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특출한 경제 최고경영자(CEO)들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철인처럼 일을 합니다. 체력을 키우기 위하여 자기 단련에 충실합니다. 그래서 엽기적인 체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들은 괴력의 소유자입니다. 한달 평균 30권 이상의 책을 읽습니다. 독서는 자기 계발의 필수과목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 정신 자세가 탁월한 리더를 만드는 것입니다. 체력을 겸비한 남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 론
어떤 물리학자가 만일 1그램 물질 속에 있는 에너지를 완전히 전환하면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1천 5백 명을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까지 끌어올릴 수가 있다. 5천 5명의 사람들에게 각각 4리터의 물을 끓여줄 수 있다. 1만 5천명 규모의 도시에 1년 동안 사용하는 양의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에너지를 모아 힘을 만든다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교회 남선교회 회원들의 힘만 모아도 엄청난 폭발력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의 힘만 가지고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힘을 가진 남선교회 회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든 남선교회 회원들이 남자같이 강건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외형과 내면이 함께 강한 남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용기와 신념을 심어주자
민 1:5-9, 딤후 1:7 / 김홍도 목사
어떤 분이 성경을 주의깊게 읽어보니까 "두려워말라. 근심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365번이나 기록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숫자는 1년 365일 매일 한 번씩에 해당되는 숫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민수기 1:5-9)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는 말씀이 무려 세 번이나 있고 그 외에도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는 고마운 말씀이 덧붙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7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기와 신념을 주시고자 할진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로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신념을 심어 주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요, 우리 자신이 행복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신념을 심어 주려면,
<1. 가치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십시오>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성의 가장 강한 면의 하나는 자기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기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가치를 알아 주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가치를 알아 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다 장점이 있는 법이고 그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아내서 인정해 줄 때 그 사람은 용기와 신념을 가지게 되고 자기를 좋아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성공적인 훌륭한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 자꾸 그 자녀의 좋은 점과 재능을 인정해 주고 알아줘야 합니다.
"장차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될거야"라고 이야기 해주고 신념과 용기를 불어넣어 줘야 합니다. "자기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가장 크고 유일한 자극이다"라고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자기도 훌륭한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넣어줘야 합니다. 공부를 잘 못하고,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빌어먹을 놈 제 밥그릇도 못찾아 먹을 놈, 아무 쓸데없는 놈"이라고 자꾸 꾸지람하면 그 아이는 그만 자신이 없어지고, 용기가 없어져서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한테 일부러라도 "너는 이 다음에 서울 대학에 들어갈거야 김활란 박사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거야" 하고 칭찬해 줍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멸시하는 말이나, 실망을 주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속담에도 귀중히 키운 딸은 시집가서도 귀중히 여김을 받고 잘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잘 안 듣는 아이라도 어쩌다 한 번 잘한 일이 있을 때 칭찬해 주고 착하다고 해 주면 정말 착하고 말 잘듣는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남편을 위대한 사람으로 성공시킨 사람은 거의 다 남편에게 자신을 불어넣어 주고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입니다.
처칠 수상의 부인은 평생에 한 번도 귀찮다거나 헐뜯는 말을 남편에게 한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은 그의 부인의 내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시계를 만든다고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한 때도 있었고 자동차를 연구한다고 짚차를 부셔서 한바탕 늘어놓고 번번히 부인을 귀찮게 해도 포드 부인은 한 번도 남편에게 시간을 낭비한다고 핀잔을 주거나, 남편을 못 만나서 고생을 한다고 팔자 한탄을 한 적도 없었답니다. 도리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하며 격려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가소린 엔진(Gasoline engine)을 만들기 위해서 농장을 팔고 살림살이를 몽땅 팔고 데트로이트(Detroit)로 이사를 가자고 하는데도 불평 한 마디 않고 "어디까지나 따라 가겠다"고 하면서 불평없이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포드는 가장 크게 성공했고,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 데트로이트에 있는 포드박물관을 구경했는데 몇 시간 봐도 못다 볼 만큼 굉장했습니다.
프로이드(Freud)라는 심리학자는 말하기를 모든 남성은 여성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듣고자 하는 숨은 동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인들은 어찌하든지 남편의 사기를 꺾는 말을 하지 말고 인정해 주고 칭찬해 줘야 합니다. 남편의 위신을 파괴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남편을 바보로 만드는 여자는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그런 남편이 나가서 성공하지 못합니다.
부인한테 존경받지 못하는 남편은 다른 사람한테도 존경받는 성공적인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다른 사람보다 멋이 없어도 "당신 참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멋이 있어요" 하고 말해 주면, 겉으로는 "비행기 태우지마" 하면서도 속으로는 좋아서 가끔 거울 앞에서 으시대 봅니다.
비록 돈벌이를 잘 못해도 자주 행복하다는 표현을 남편에게 들려 주면 자기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해서 돈도 잘 벌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몸만 컸지 정신적으로는 어린 아이 같아서 칭찬해 주고 인정해 줘야 좋아합니다.
제가 예배시간마다 설교하고 나서 다른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보다 아내의 눈치를 제일 먼저 살펴 봅니다. 설교를 잘 했다고, 은혜받았다고 하면 괜히 신이 나서 힘이 솟구쳐 오르고 다음에 더 잘하게 되지만,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 그만 맥이 쭉 빠지는 것이 다시는 강단에 설 용기조차 없어집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내가 뻔히 죽을 쑤고 잘못한 줄 아는데도 "여보 오늘 은혜받았어요. 참 좋았어요" 하고 말해 줍니다.
인사로 그러는 줄 알면서도 마음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지금까지 아내에게서 "무슨 설교를 그렇게 해요?" 하는 말을 별로 못들어 봤습니다. 심지어 설교할 때 자기를 흉보고 무시하는 것 같은 말을 했는데도 좀체로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아내의 내조가 큰 것 같습니다. 흔히 사모님들이 남편이 설교하고 내려오면 단점만을 들춰내고 잘못했다고 말해 주는 이가 많은데 그것은 물론 남편이 위대한 설교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더 잘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절대로 프러스(plus)보다 마이나스(minus)가 더 많습니다.
무조건 잘 한다고 칭찬해 줘야 합니다. 아내에 대해서도 남편들이 쓸데없이 까다로움을 피우고 못났다든지 살림을 못한다든지 음식솜씨가 왜 그러냐는 등, 트집을 잡으면 점점 더 나쁘게 되고 가정의 화평은 깨어지고 맙니다.
좀 예쁘지 않아도,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일일이 타박만 하지말고 "당신 참 볼수록 예쁜데……," 아무데 가서 먹어봐도 당신 음식솜씨가 제일이야……" 하면서 칭찬해 주면 입이 귀밑에 까지 올라가면서 써비스가 더 좋아지고 말을 더 잘 들어줍니다. 무슨 결점이나 고칠 것이 있어도 그것을 지적해 주면 잘 안 받아 드립니다.
남편도 아내도 다 마찬가집니다. 칭찬을 다 해 주고 나서 "이것 하나만 이렇게 해 주면 좋겠는데…" 하면 당시에는 못 들은척 해도 뒤에 가서는 꼭 해 줍니다.
무엇을 시키거나 요구할 때 절대로 명령조로 말하지 마십시오. "물 떠와" 하는 것보다 "물좀 줄래요?" 하는 것이 더 듣기도 좋고 효과적입니다. 남편이 출근할 때에 "저녁에 일찍 들어와요"하는 것보다 출근할 때 없는 먼지라도 털어주는 척하고 넥타이도 한 번 바로 잡아 주는 척하고 만져 주면서 "당신 참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멋이 있어져요, 어쩌면 이런 남편을 하나님이 내게 주셨는지 참 감사해요. 그런데 좀 일찍만 들어오시면 더 좋겠는데…" 하면서 부드러운 애교를 부리면 어찌하든지 일찍 들어오려고 노력합니다. 남편을 전도해서 교회로 나오게 하는 방법도 아내가 해야 할 온갖 써비스를 다 해두고 "여보, 예수믿어 요. 오늘 교회에 같이 가요 남들 부부가 가지런히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오는 것을 보면 제일 부러워요, 눈물이 날려고 해요" 하면 웬만하면 다 들어줍니다.
서양속담에 "한 방울의 꿀은 한 개론의 쓸개보다 더 많은 파리를 잡는다"는 말입니다. 듣기 싫은 소리만 자꾸 하고 남의 약점만 폭폭 찔러주면 점점 부부간의 사이가 멀어지고 마주 대면하기 도 싫어집니다.
그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인관계에서도 똑똑한 체하고 남의 약점과 결점만 찔러주고 들춰내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로 그런 사람은 좋다는 말을 못 듣습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해 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관심을 가져 줘야 합니다.>
사람은 아이나 어른이나 관심을 가져 주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끌기 원합니다. 그래서 어린애들이 자기 동생을 얻게 되면 대소변을 아무데나 보는데 이것은 동생한테 빼앗긴 관심을 되찾아보려는 본능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관심이 너무 지나쳐도 역효과이지만, 아이들한테 무관심하기 때문에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남편한테 무관심하기 때문에 집에 잘 안들어 오거나 다른 여자한테 찾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관심 좀 가져달라고 하면 아내는 집안 일과 아이들 치닥거리를 핑계 대면서, 신혼생활 때 같이 생각하지 말라고 도리어 핀잔만 줍니다.
남편의 양복주머니에 손수건이 있는지 없는지, 내복을 한 달 입었는지, 두 달 입었는지 양말을 일주일 신었는지 전혀 무관심하게 되면 그 때부터 남편의 마음이 멀어집니다. 아내들도 밖에 나갈 때는 화장도 예쁘게 하고 옷도 깨끗이 하는데 남편 앞에서는 어느 옛날에 입던 누더기 옷을 입고 화장은 고사하고 세수도 않은체, 남편의 정을 떼는 행동을 하는 일은 반성해봐야 됩니다.
남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또 남편들도 아내에게 세심한 관심을 가져주는 것을 좋아하고 행복을 느낌니다. 헤어 스타일(hair style)이 좋다든지, 옷 색깔이 고상하다든지 하는 칭찬을 자주 해주어야 합니다. 아내의 헤어 스타일이나 옷에 전혀 무관심하게 되면 아내는 슬퍼지는 것입니다.
<3.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일하게 되고 자기 자신에게도 유익하고 행복해집니다. 자식이 부모를 멸시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부모를 경외해야 합니다.
윗사람에 대해서 경외심을 가져주지 않고, 멸시하고 비평하기 좋아하면 불쾌하고 용기를 잃게 됩니다. 또 그 사람 자신에게도 해롭습니다. 특별히 모든 남성들은 여성들 앞에서 높임을 받고 권위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짐승을 보면 숫놈들이 더 멋이 있습니다. 닭도 수탉이 벼슬도 요란하고 깃털이나 꼬리도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암탉들 앞에서 우쭐대면서 뽐내고 다닙니다. 꿩도 까투리보다 장끼가 더 모습이 멋이 있고 아름답습니다. 유독 사람만 남자보다 여자가 더 예쁘게 꾸미려고 하고 화장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도 그 내심(內心)에는 여자들한테 멋있게 보여서 권위를 인정받고, 공경받기를 원하는 본능은 짐승과 다름없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아내들은 남편을 가장으로 인정해 주고, 높여 줘야 합니다. 두려움으로 섬겨줘야 그 남편은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돈도 잘 벌어다 좋은 옷도 해주고 좋은 선물도 사다줍니다.
성경에도 에베소서 5:22에도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몸의 다른 부분은 부러지고 없어져도 살지만 머리가 없어지면 그 사람은 죽고 맙니다. 모든 아내들은 남편을 경외하고 복종해야 됩니다. 남편을 우습게 알고 남들 앞에서나 자식들 앞에서 멸시하고 깎아내리면 좋은 아내가 못됩니다. 영어에 공처가(恐妻家)는 hen-pecked husband라고 하는데 그 뜻은 암탉한테 쪼이는 남편이라는 뜻입니다.
암탉에게 자꾸 쪼여서 벼슬이 뜯기우고 털이나 뜯겨서 몽당가리가 된 수탉이 뭘 제대로 수탉 구실을 하겠습니까,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고(주 안에서) 복종하면서 남편을 경외해 줘야 됩니다. 그래야 용기와 담력을 가지고 일도 잘하고 성공합니다. 남자들이 뼈가 녹아지게 일을 해서 돈을 벌어다가 좋은 옷도 해 주고 맛있는 것도 사다주고 또 자가용도 타고 다니면서 으시대는 것은 모두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반드시 남편을 높여 주고 권위를 인정해 주고 경외해야 됩니다. 프로이드는 "남성이 하는 모든 일의 배후에는 숨은 동기가 있는데 그것은 여성의 마음에 들고 싶다는 소망이다"고 했으며 심지어 이 세상에 여성이 없으면 모든 사업은 끝나고 문명의 향상을 잃고, 야만인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투계(닭 싸움)도 암탉과의 로맨스를 경험하기 전에는 사납게 싸움도 할 줄 모르고 챔피온(champion)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어린애 같은 남편의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 줘야 좋은 아내입니다. 얼굴만 예쁘다고 훌륭한 아내가 되지 못합니다. 잠언 31:30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편과 부모, 윗사람에게 경외심을 나타내서 용기와 신념을 심어 주고 자신도 축복을 누리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