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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5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서귀포 남동쪽 해상서 홍콩 원목운반 화물선 침몰 18명 실종 4명 구조
2023년 울릉도 24시간동안 75.1cm 적설로 도로 마비
2023년 러시아에서 북한노동자 9명 집단탈북 국내 입국
러시아 극동지역 등에서 일하던 북한 노동자 9명이 지난해 11월과 12월 모스크바를 경유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25일 알려졌다. 북한 노동자 9명은 모스크바에서 유엔난민기구의 도움을 얻는 방식으로 탈출해 국내로 입국했다. 9명 모두 러시아에서 벌목·건설 현장 등에 투입됐다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본격화되면서 도심 외곽의 소규모 건설 현장이나 농장 등에서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자들이 탈출을 결심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 속에 폐허가 된 돈바스 지역의 재건 사업에 투입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2019년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 주에서 광산 댐 붕괴 사망 100명 이상
2013년 울산 자매살인범 김홍일 사형 선고
2011년 이집트 카이로 타흐리르(해방) 광장에서 첫 민주화 시위(2.11까지 16일 동안 계속됨 사망 846명).
2011년 '이데올로기의 종언' 석학 다니엘 벨(Daniel Bell) 타계
1919년 5월 10일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난 벨 교수는 1939년 뉴욕시립대를 졸업한 후 '뉴 리더' '포천'지(誌)의 편집장을 지냈다. 1960년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시카고대·컬럼비아대·하버드대 등에서 30여년간 사회학을 가르쳤다.
벨 교수는 동서냉전(冷戰)이 한창이던 1960년 저서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을 통해 이념이 사회를 주도하는 시대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고, 1973년 저서 '후기산업사회의 도래(The Coming of Post-Industrial Society)'를 통해 정보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정보사회'의 출현을 전망했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전후(戰後) 미국의 위대한 지성'으로 묘사했으며, 미국 출판업체 맥밀러의 ‘미래 백과사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서 클라크, 앨빈 토플러 등과 함께 ‘세계 100대 미래학자’에 선정했다.
2010년 바그다드, 연쇄 폭탄테러 발생
2010년 1월 25일 오후 3시 40분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주요 호텔들을 겨냥한 연쇄 차량 폭탄 테러로 최소 36명이 숨지고 71명이 다쳤다.
첫 폭발은 바그다드 쉐라톤 호텔 주차장 근처에 설치된 폭탄 테러 방어벽(blast wall)에서 발생했으며 곧이어 바빌론·알함라 호텔 앞에서 잇달아 차량 폭탄이 터졌다. 세 호텔 모두 서방 언론인과 사업가들이 주로 투숙하는 곳이다. 세 건 모두 자살폭탄 테러였다.
쉐라톤 호텔의 콘크리트 방어벽은 약 한달 전 127명이 죽고 500명 이상이 부상당한 다섯 번의 연쇄 폭탄 테러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이 폭발로 바그다드 내 안전지대(Green Zone)부터 티그리스강 건너편까지 여러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
한편 바빌론 호텔에서 약 400m 떨어진 주 이라크 한국 대사관도 공관 전체가 흔들리면서 유리창이 거의 완파됐지만 대사관 직원들은 모두 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군포 실종 20대 여성 살해 용의자 검거
2008년 12월 경기도 군포시에서 괴한에 납치된 20대 여학생 A(21)씨가 실종 37일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2009년 1월 25일 A씨를 납치해 살해한 혐의로 강호순(38·스포츠마사지사·안산시 팔곡동)씨를 붙잡아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 경기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이날 안산시 본오동 논두렁에서 A씨의 시신을 수습했다.
강씨는 안산시 본오동에 있는 한 스포츠마사지 전문점에서 마사지사로 근무해왔으며 사건 발생 당일인 12월 19일 오후 3시10분쯤, 강씨는 에쿠스 승용차를 몰고 군포보건소 앞 버스정류장을 지나다가,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A씨에게 접근했다.
강씨는 A씨를 태우고 가다가 군포보건소에서 800m쯤 떨어진 47번 국도변에 차를 세운 뒤, 반항하는 A씨를 주먹과 발로 마구 때려 제압한 다음 자신의 넥타이로 A씨의 양손을 묶었다. 강씨는 A씨를 태운 채 안산시 본오동 도금단지 근처 외진 길가로 이동한 다음, A씨의 신용카드를 빼앗고 비밀번호를 알아낸 뒤 스타킹으로 A씨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강씨는 A씨의 시신을 근처 논두렁에 버린 뒤, 같은 날 오후 7시26분쯤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에 있는 모 금융기관 현금인출기에서 A씨의 신용카드로 현금 70만원을 인출해 달아났다.
경찰은 안산시와 군포시 일대의 폐쇄회로카메라(CCTV) 300여 대와 교통정보분석정치(AVI)에 찍힌 영상을 통해 범행이 유력한 차량 1,700여 대를 전수 조사해 검정색 에쿠스 승용차를 찾아냈다. 차주는 강씨의 어머니인 김모(여·65)씨였으며 조사 결과 강씨를 유력용의자로 판단하고 지난 23일 법원에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다.
경찰 수사망이 좁혀지자 강씨는 24일 오전 5시10분쯤 자택 근처 공터에서 범행에 이용한 에쿠스 차량을 불태우고 집에 있던 컴퓨터를 새로 포맷한 다음 직장에 출근했으나 같은 날 오후 5시30분쯤 강씨의 직장에서 붙잡혔다.
2008년 나훈아, 괴소문 해명 기자회견
나훈아는 2008년 2월 25일 오전 11시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중에 떠도는 루머에 대해 55분에 걸쳐 모두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당시 시중에 떠돌던 루머는 ‘신체 특정 부위를 크게 다쳐 수술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 일본 폭력조직과 유명 여배우 K양이 연루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2007년 3월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갑자기 취소하고 활동을 중단한 뒤 나돌기 시작한 소문이 점점 커진 것이다. 급기야 K양으로 지목된 배우 김혜수·김선아씨가 2008년 2월 17일 공개적으로 소문을 부인했고, 나훈아도 25일 기자회견을 갖게 되었다.
나훈아는 이날 오전 10시 58분, 취재진을 비롯해 600여명이 참석한 회견장에 나타났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뒤로 짧게 묶고 검정 양복을 입은 나훈아는 잠시 미소를 짓다가 곧장 굳은 표정으로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우선 2007년 3월 ‘세종문화회관 공연 취소 후 잠적’은 당시 기획사 ‘플랜위즈’측의 실수였던 것으로 드러났으며, 나훈아는 이어 그동안 여행 및 공부를 해왔음을 밝혔다. 이어서 ‘다른 연예인의 아내를 가로챘다’, ‘야쿠자의 연인을 건드려 야쿠자로부터 신체 일부를 훼손당했다’는 등의 소문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해명 과정에서 나훈아는 테이블 위로 올라가 바지 지퍼를 반쯤 내리는 등 억울함을 호소하며 모든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2003년 대만, 한국에 대해 입국비자 면제
2003년 인터넷 대란 `웜바이러스` 침투
2003년 1월 25일 오후 2시10분쯤 서울 가락동 정보보호진흥원에는 긴박한 전화벨이 잇따라 울려댔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드림라인으로부터 “정상적인 네트워크 소통에 엄청난 지장을 주는 이상 데이터가 폭주하고 있다.”는 일보가 날아든 것이다. 정보통신부와 정보보호진흥원은 서둘러 긴급 대응팀을 가동, 현황 파악과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30분쯤 지나 휴대전화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유·무선 인터넷 접속이 완전히 불통됐다.
사상 초유의 ‘인터넷 대란’이 발생한 것이다.
사태는 11시간여 만에 가까스로 수습됐다. 이번 사고로 국내 주요 유·무선 인터넷이 모두 다운된 것은 국내·외 인터넷 데이터 흐름을 연결하는 KT 혜화지사의 DNS(도메인 네임 시스템) 서버가 다운됐기 때문이었다. DNS란 인터넷 주소를 숫자로 바꿔주는 번역기로 인터넷 네트워크의 중추신경 기능을 한다.
이날 사태의 주범은 MS사의 데이터베이스 관리 프로그램인 SQL의 허점을 이용한 웜바이러스였다.
하지만 이는 미국·대만·일본 등지에서도 발생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유무선 인터넷 시스템을 다운시키는 대형사고로 발전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정부가 사전에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해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또 KT·하나로통신·데이콤 등 주요 인터넷 업체들이 위험분산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1999년 콜롬비아 지진
1999년 1월 25일 오후 1시20분쯤 남미 콜롬비아에 리히터 지진계로 진도 6의 강진이 발생, 최종 사망자수가 2천여 명, 이재민수 1만명이 넘는 큰 피해가 발생했다. 이번 지진은 지난 1994년 콜롬비아 서부 카우카주에서 800여명이 숨진 이래 최대의 피해를 기록했다.
보고타에서 서쪽으로 225km 떨어진 바예 델 카우카주에서 발생, 중서부 일대 5개 주를 강타했다. 특히 피해가 컸던 곳은 킨디오주의 아르메니아시로, 325명 이상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50초간 계속된 최초 지진은 수도 보고타에서도 15초간 감지됐으며, 아파트건물이 흔들릴 정도였다 . 강력한 여진도 몇 차례 발생했다.
1994년 개인연금제 실시
1990년 컬럼비아 제트여객기, 케네디공항에 착륙하려다 실패한 뒤 연료 부족으로 뉴욕의 롱아일랜드에 추락, 73명 사망
1991년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원유 터미널 파괴로 걸프만에 대규모 원유 유툴
1994년 여야 정치관계법 합의(선거일 법정화)
1989년 헌법재판소 첫 위헌 결정
헌법재판소가 1989년 1월 25일 첫 위헌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은 1988년 9월 1일 재판소가 발족한 이래 첫 결정이며, 위헌 판결로서는 지난 1971년 당시 법률위헌심사권을 갖고 있었던 대법원이 국가배상법 2조1항에 대한 판결을 한 이래 18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날 위헌으로 결정한 헌법은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서는 재산권의 가집행청구를 할 수 없다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의 제6조1항 단서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결정으로 특례법 9조1항 단서조항은 즉시 효력을 상실케됐고 앞으로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판결때도 가집행 선고를 할 수 있게 됐다. 이날의 판결은 9명의 재판관 전원일치로 결정됐다.
1985년 제4통신위성 지구국(보은) 준공
1982년 미국 뉴욕주 온테리오 지너 원전 증기관 파열로 방사능 유출
1981년 10.26 뒤 지속돼 온 비상계엄 전면 해제
1981년 중국, 강청 장춘교에 조건부사형선고
모택동 사후 섭검영, 화국봉 등과의 권력싸움에서 패한 중국 4인방에 대한 판결이 1981년 1월 25일 내려졌다. 강청과 장춘교는 사형(2년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왕홍문은 무기 징역에 `정치 권리` 종신 박탈, 요문원은 징역 20년, 정치 권리 박탈 5년이 선고됐다.
법정에서 왕홍문은 기소 사실을 전면적으로 인정했다. 요문원은 법정에서 응수할 때 사소한 말 한마디까지 신경을 썼지만 죄를 인정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장춘교는 끝까지 완전히 묵비권을 행사했다. 강청은 사형 판결을 언도받자 `혁명 무죄!`라고 외쳤다. 강청은 병 때문에 보석중이던 1991년 77세로 자살했고, 왕홍문은 57세 때인 1992년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장춘교도 사망했으나 공식 발표는 없었고, 요문원은 1996년 6일 20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감했다.
이들 4인방은 모택동 사후 한달도 채 안된 1976년 10월 6일 쿠데타를 획책했다는 혐의로 반(反) 4인방파에 체포됐다. 1976년 4월의 제1차 천안문 사건 이후 급진파 4인방과 당 제1부주석 겸 수상 화국봉, 당부주석 섭겸영 등과의 대립이 심각했는데 모택동 사후 4인방은 고립돼 있었다. 그런 와중 강청 등이 ‘강청 당주석, 장춘교 수상’계획을 준비하던 중 화국봉과 섭검영 등이 이를 사전에 알고 이들을 체포한 것이다. 1980년 11월 2일 기소됐다.
1981년 김철호, WBC 슈퍼라이트급 세계챔피언 타이틀 쟁취
프로복서 김철호 선수가 1981년 1월25일 슬럼프에 빠진 한국 프로복싱계에 활력소가 될 영광의 새 챔피언 밸트를 안겨주었다.
김철호는 남미 베네수엘라 샹크리스토발시 특설링에서 벌어진 WBC 슈퍼플라이급 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 라파엘 오로노를 맞아 9회 중반 한방의 왼주먹으로 캔버스에 누임으로써 통쾌한 KO승을 거두었다.
경기장에 모인 2만여 관중들은 오로노의 압승을 확신했으나 오로노가 9회 중반 김철호의 펀치를 맞고 쓰러지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편 이날 경기에서 오로노측이 김의 펀치가 벨트라인 아래를 때렸다며 항의했으나 주심은 벨트라인 위였다고 판정, 오로노측의 항의를 일축시켰다. 프로 경력이 2년밖에 되지 않은 김철호의 통쾌한 쾌거였다. 이날 경기로 김철호는 15승(7KO)1무1패를 기록하게 됐다.
1981년 이란억류 미국인질 52명 441일만에 귀국
1980년 이란대통령에 바니 사드르 당선
1980년 명동 위장결혼식 불법집회사건 윤보선에 2년-함석헌에 1년선고
1985년 제4위성통신지구국 보은에 준공
1980년 이란 첫 대통령선거, 초대 대통령에 바니 사드르 당선
이란 외무장관 바니 사드르가 1980년 1월 28일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현실정치 감각이 뛰어난 온건한 경제전문가로 알려졌으며 파리 망명시 프랑스내 반팔레비세력과 합류, 이란인권위원회 창설을 도왔다.
사드르는 1979년 2월 이란회교혁명이 성공해 호메이니가 이란으로 개선할 때 지근거리에서 그를 보좌할 정도로 호메이니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다. 그는 1933년 이란에서 태어나 1950년대초 과격민족주의자 모하메드 모사데그가 집권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모사데그가 미국 CIA가 배후조종한 정변으로 실각하자 지하로 잠입해 1963년 파리로 망명했다. 그러나 1980년 2월4일 취임한 사드르는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강경파인 회교혁명평의회와의 권력충돌에서 패해 호메이니에 의해 6월 해임됐다. 결국 1981년 7월29일 이란을 탈출, 다시 프랑스로 망명했다.
1970년 신민당, 한국독립당을 흡수
1971년 우간다에 쿠데타, 이디 아민 집권
1971년 동-서베를린 19년만에 전화개통
1973년 진도 앞바다서 여객선 한성호 침몰, 61명 사망
1977년 우리나라 최초로 간호학과에 남성 입학
1977년 북한, 평양방송 통해 불가침협정제의 거부하고 남북정치협상회의 제의
1969년 미국-월맹 첫 파리평화회담 개최
1968년 미군부대 초소 피습사건
미군부대 전방 초소근무자 5명이 무장공비 15명 가량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하였음. 피해(전사 2명, 부상 8명)
1967년 대한기독교 간호원회 조직
1966년 경향신문 공매처본
1965년 제2한강교(양화대교) 개통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긴 제2한강교가 1965년 1월 25일 아침 박정희 대통령 참석하에 개통됐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영등포구 당산동을 연결한 길이 1천1백28m, 넓이 18m의 이다리는 1962년 6월 20일 에 착공한지 만 2년6개월 만에 개통해 수도 서울의 `제2의 남문`이 됐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제1한강교로부터 김포, 인천, 영등포 방면을 다닐 때 보다 약3km, 20분간 단축되며, 전략상으로도 서부전성에서 도심지를 통하지 않고 약6km 48분간이 단축되며, 자동차 연료가 연간 약5천드럼이 절약되는 동시에 확장되는 서울의 도시계획상 서교동 영등포지구에 위성도시를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총공사비 5억1천4백만원, 연17만명의 인부가 동원된 제2한강교는 현대식 오픈형. 입체교차로 시설로 어떤 방향에서나 논스톱으로 달릴 수 있고, 양쪽난간에는 4백와트의 수은등 88개를 가설했다.
1964년 판문점서 관광객 2명 납북(1명 자진, 1명 피랍)
1954년 미 영 불 소 외상 베를린회의
1957년 캐시미르 신헌법 발표, 인도에 편입
1953년 행운환호 침몰 100여명 이상 사망 또는 실종
1월 9일 발생한 창경호 침몰 사고를 수습 중이던 1월 25일, 전북 칠산과 전북 군산 사이를 운행하는 한국미곡창고 군산지점 소속의 행운호(또는 행운환호)가 오후 1시 전북승당을 출발한 2시간 만에 서천 앞바다에서 침수되었고, 해안에 배를 대고 상륙하려던 중에 배가 침몰하였다. 행운호의 정원은 75명이었으나, 160 ~ 170명을 태웠다고 보도되었다 초기에는 110여 명이 구조되고 53명의 시신이 인양되었다고 보도되었으나, 후에 십여 명만이 구조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정원, 적재량 초과와 침수가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1949년 소련, 동구5개국의 경제상호원조위원회(COMECON) 창설
동유럽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이 1949년 1월 25일 소련 주도하에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등 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창립됐다. 1947년 미국이 마셜 플랜 (유럽부흥계획)을 제안하였을 때 동유럽 여러나라가 동요함에 따라 소련을 중심으로 동유럽공산권이 경제협력체제를 창설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1960년대 이후 코메콘은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눈부신 발전에 대항하기 위하여 경제체제협력으로부터 경제통합으로 활동형태를 바꾸었다. 그러나 1989년 동유럽의 민주화변혁은 코메톤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고 1990년 1월에는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개최된 코메콘 10개국 지도자회의는 종래의 엄격한 중앙경제계획에서 시장중심의 무역제도로 전환하기로 결정, 1991년 6월 제46차 총회에서는 모든 조약과 문서를 취소시키고 기구해체 의정서에 서명했다.
1949년 서울 남산에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 기관지 신학정론 창간. 신학연구 논문지. 계간
1948년 이승만 김구 유엔 한국위원회와 처음으로 회담
1947년 갱스터 알 카포네 사망
20세기 초, 27살의 나이로 시카고 제1의 갱스터 자리에 올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 카포네가 1947년 1월 25일 사망했다.
우리는 그를 ‘전설적인 갱스터’ㆍ‘스카페이스(Scarface)’라고 부르지만, 1899년 뉴욕 브루클린 빈민가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년시절 여느 아이들과 별다를 바 없이 조용하고 성실한 아이였다.
14세 때 범죄조직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자신이 살던 가필드의 갱스터 조니 토리오를 만나게 된다. 1909년 시카고로 거점을 옮긴 토리오는 1919년 카포네를 시카고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1920년에 금주법이 실시되자 토리오는 밀주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끝내 라이벌 갱단에 의해 살해당한다.
1925년 토리오의 뒤를 이어 조직을 이끄는 보스가 된 그는 ‘스카페이스’라는 악명에 어울리는 잔인함과 교묘함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밤의 대통령, 암흑가의 황제로 불리며 700명의 조직원을 이끌던 카포네는 법위에 군림했으며 대중들에게 인기도 높았다.
그의 폭력성은 1929년 2월 14일 당시 시카고의 라이벌 조직이었던 아일랜드계 오바니온가의 조직원들을 암살하기 위해 벌인 세기의 유혈극 ‘성 발렌타이데이 습격사건’ 에서 정점에 달했다. 폭력을 자선사업이라는 교묘한 술책으로 덮어보려했던 그였지만, 이 사건으로 무소불위의 그의 시대도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시카고 검찰이 알 카포네를 제1의 공적으로 규정하고 탈세혐의로 그를 법정에 세우기 위한 수사를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그는 1931년 6월 연방소득세 위반으로 기소돼 10월에 11년형과 8만 달러의 벌금과 소송비용을 부과받았다.
이후 알 카포네는 자신의 옛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매독 증세로 1939년 가석방됐으나 모든 것을 잃은 채 매독말기 증세로 병원을 오가다 플로리다의 마이애미 해변에서 초라한 최후를 맞았다.
1946년 해동석경원 창설 8만대장경 번역 착수
1930년 상해서 한국독립당 결성
1924년 프랑스 샤모니서 제1회 동계올림픽대회 개최
1925년 총독부, 1면 1학교 계획 시달
1929년 주일학교선생 창간.편집자 김수옥,발행자 스톡스,발행처 조선남감리교회 연회주일학교. 주일학교교사들의 참고서로 발간.
1915년 캘리포니아—뉴욕 전화개통
1915년 1월25일, 미국에서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간 4,700km를 잇는 대륙횡단 전화가 처음 개통됐다. 첫 통화자는 전화를 처음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뉴욕)과 영원한 조수 토마스 왓슨. 둘은 감회에 젖어 23분간을 통화했다.
이미 뉴욕과 보스턴(1877년), 뉴욕과 시카고(1892년) 간에 전화가 연결됐으나 이때는 방음실에 들어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소리전달이 약했다. 이 때문에 대륙횡단 전화선에는 증폭기를 사용, 음질을 향상시킨 것이 벨의 대륙횡단전화였다. 1927년 1월7일에는 뉴욕과 런던을 잇는 상업무선전화가 개통됨으로써 바야흐로 세계가 하나되는 신시대가 열렸다.
벨이 전화를 처음 발명한 것은 1875년, 자석을 이용한 전화기였다. 벨은 이 전화기를 다음해 2월14일 특허신청을 했는데, 몇시간 뒤 에리사 그레이라는 사람이 같은 원리의 특허신청을 하는 바람에 대법원 판결이 날때까지 20여년 간 법원을 드나들어야 했다. 몇시간 늦었다면 벨의 이름이 역사에 오르지 못했을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벨은 이 특허로 ‘세계최초의 전화발명자’라는 명예와 함께 전화사업을 독점할 수 있게 됐다.
벨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상대방에게 전달된 최초의 기록은 “왓슨군, 이리로 와주게. 도움이 필요하네(Mr.Watson, come here, I want you)”. 벨이 1층에서 실험을 하려던 순간 옆에 놓여있는 황산그릇을 잘못 건드려 황산이 옷에 쏟아지는 바람에 2층 실험실에서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왓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1876년 3월10일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전화실험이 공개적으로 이뤄진 것은 5개월 후인 8월3일,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였다. 이듬해 ‘벨전화사’가 설립되고 에디슨이 더욱 개량된 송화기를 개발함으로써 전화보급은 빠른 속도로 증가해 1887년에는 약 15만대의 전화기가 사무실과 가정에 보급됐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한 벨이 전화발명에 매달린 것은 귀머거리인 어머니와 아내에게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1922년 8월2일, 그가 숨지자 미국의 전화시스템은 1분간 침묵을 지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1907년 러시아, 만주서 철병 선언
1890년 뉴욕의 넬리 블라이기자, 72일 6시간11분만에 세계일주완료
1886년 한성주보 발간 (박문국에서 발간한 조선정부의 관보)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가 `갑신정변`으로 폐간된지 14개월 만인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로 다시 발행되었다. 우리나라 근대신문의 효시라고 볼 수 있으나 전 지면이 한문으로 인쇄되었고 정부의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발행하여 주사 사사 등 중급관리가 기자가 되고 인건비 제작비 등도 국비로 추렴했다는 점에서 `관보`의 테두리를 멀리 벗어날 수 없었다.
한지책자형의 양절(兩折)로 인쇄된 이 신문은 1면 16행, 1행 40자, 1호 16면 또는 18면씩 발행되었다. 국한문 혼용의 주간지였으며, 최초로 1886년 2월 22일자부터 상업광고를 실었다. 독일의 상사인 세창양행이 광고주로 등장한 이 광고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광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누적된 적자 운영을 감당하지 못하고 1888년 7월 박문국의 폐쇄와 함께 폐간됐다.
1395(조선 태조 4) 『고려사』 37권 편찬
1077년 성직자 임명권 둘러싼 카놋사의 굴욕
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가 황제의 사제임명 금지한 교황 그레고리 7세의 폐위를 선언하자 교황은 이에 맞서 하인리히 4세 파문, 제후와 신하들까지 교황 편에 서자 하인리히 4세가 카놋사로 교황을 찾아가 눈보라 속에서 몇 시간 동안 용서를 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