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학 칼럼] 20여년 전 카드빚 사태 다시 보는 듯
홍종학 유튜브 경제스케치북 진행자
필자는 오래 전부터 가계부채가 경제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해 왔다. 현 정부가 강조하는 정부부채는 오히려 외국과 비교할 때 안정적이지만, 가계부채는 최악이고 최근 몇 년 사이 증가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올들어 IMF 같은 국제기구들이 한국의 가계부채에 대해 계속 경고하고 있고, 언론에서도 가계부채의 연체율이나 부실 가능성에 대한 기사가 자주 보도되고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도 가계부채 위기가 발생할 경우 외환위기보다 10배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할 정도다. 가계의 대규모 부실로 인해 장기 침체가 올 수 있다는 위험을 정부도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카드빚으로 휘청댔던 20여 년 전 사태의 데자뷔
현재의 상황은 20여 년 전의 데자뷔가 되어 그 때를 회상시킨다. 카드사들의 길거리 모집이 횡행해 누구나 손쉽게 여러 장의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던 시기였고 카드빚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던 때였다. 필자는 경제학자로서 곧 서민 경제가 무너지고 수많은 희생이 이어질 것을 직감했다. 전문가들을 만나 대책을 물어보았지만 뾰족한 대안을 얻지 못했다.
거의 6개월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만나는 사람에게 큰일났다를 외치고 다녔다. 사람들이 필자만 보면 신용카드를 떠올릴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는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대책은 찾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에 경제학 논문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금융 분야에 대해서도 공부를 꽤 했는데도 가계부채와 관련된 논의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
답답한 심정으로 경제학 논문들을 뒤지다가, 미국의 개인 파산제도를 접하게 되었다. 미국은 18세기부터 농민들이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상환불능 상태에 빠졌을 때 한시적으로 파산제도를 운영해 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언제든지 법원의 판결에 의해 파산이 가능하게 했다. 이후 채무자에게 유리하게 개선해 오던 중, 1978년 파산개혁법을 통해 채무자가 쉽게 파산을 신청하도록 하고 법원은 과감하게 면책을 허용하게 했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2005년 200만 명이 넘는 채무자가 파산을 신청하기도 했다. 이는 인구 비례로 보아도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한국주택금융공사(HF)는 3일부터 특례보금자리론 금리를 0.25%포인트(p) 인상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이날 서울의 한 은행 앞에 붙은 특례보금자리론 관련 현수막. 2023.11.3 연합뉴스
자본주의 본산 미국의 광범위한 채무자 파산제도
필자의 의문이 풀렸다. 이 법이 가계부채와 관련한 논의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그 이후 추가 논의가 많지 않아서 필자가 접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공부를 할수록 미국의 파산제도는 놀라웠다. 많은 주에서는 파산시 전 재산을 처분하지 않고 최소한 집 한 채는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직장인의 경우 월급의 25% 이상은 압류하지 못하도록 강제하기도 하고, 공정채권추심법이 있어 채권 추심을 까다롭게 규제했다.
파산법을 공부하면서 그동안 필자의 관심분야였던 규제 완화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미국은 1980년대 들어 금융규제를 대폭 완화했는데, 이는 파산개혁법을 포함한 소비자 보호제도를 강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규제 완화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소비자 피해인데, 이미 소비자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제도가 갖춰져 있다는 규제 완화론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은 이후 금융위기에서 가장 빠르게 회복하는 유연성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가계 부실을 빠르게 해소했기 때문이다.
필자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이론에 눈 뜬 계기가 되었다. 카드빚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가 부각되던 시기, 필자는 남들과는 다른 대안을 자신있게 제시할 수 있었다. 단순히 카드사의 일탈로 볼 것이 아니라, 가계부채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파산제도를 포함한 채무자 보호제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채무자의 재기를 도와 새출발할 때 경제는 다시 활력을 되찾게 된다는 중요한 이론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는 미국처럼 채권추심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공정채권추심법의 제정이 필요했다. 사회적 문제가 커져 갈수록, 불법적 채권 추심으로 인한 부작용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부에서도 뒤늦은 조치였지만, 추심업체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여 조금씩 개선되었다. 카드사태로 인해 카드회사가 정리된 이후에야 비로소 개인회생 및 파산법이 제정되어, 개인들이 재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필자는 국회의원이 된 후 미진한 채권추심 규제를 강화하고자 2014년 공정채권추심법을 개정하였다. 대리인을 지정한 후에는 채무자에게 직접 채권 추심을 할 수 없도록 금지하는 방어권을 보장한 것이다. 향후 많은 생명을 구할 중요한 조항이라고 믿고 있다.
금융회사 안정성 아닌 가계부채 해결에 명운 걸어야
이때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가계 대출에서 상환능력을 중시하는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은 금융전문가들이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으나, 당시만 해도 동조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 사이 한국의 가계부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때 더 소동을 피웠어야 하지 않았나 후회가 된다. 신자유주의적 미국식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면서도 채무자를 보호하는 제도는 외면해온 한국의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가계부채 위기는 필연적으로 한국 경제를 장기 침체에 빠지게 할 것이다. 그보다 더 답답한 것은 서민 경제가 무너지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카드사태 당시처럼 수많은 가계가 부실화되고 비극적 사건이 이어질 것이다. 부동산 거품을 조기에 안정화하고 가계를 회생시키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정부와 정치권은 별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그 때와 달리 답은 마련되어 있다. 개인회생과 파산에 관한 법률과 함께 공정채권추심법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부실 가계를 조속히 회생시키면 경제는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처럼 정부는 여전히 금융회사의 안정성만 걱정하고 있고, 법원은 과거 방식의 판결을 고집하고 있어 이번에도 큰 희생을 치를 것만 같아 걱정이다. 언론에서 공정채권추심법상 방어권에 대해 제대로 알려만 주어도 불필요한 희생을 막을 수 있을 텐데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절망에 대해서도 법원이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안타깝기만 하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도록 각성을 촉구한다. 과감하게 를 면책해서 사람도 살리고 경제도 살려야 한다. 금융회사가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는 지금이 적기다. 이 시기를 놓치면 한국경제도 잃어버린 20년을 맞게 될 지도 모른다.
출처 : 폭발 직전 가계부채 위기, 과감한 면책이 해결책이다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