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은 수많은 대사를 유행시켰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자 주인공인 형사 해준의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는 대사다. '붕괴'는 어쩌면 이 영화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기도 하다. <헤어질 결심>은 "원전 완전 안전"이라는 표어를 내세우는 대한민국의 한 핵발전소 소재 도시에서 벌어지는 '붕괴'의 이야기다.
'붕괴'는 한국 사회에서만 관심을 끄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나라 밖에서 더 떠들썩하다. 기후 급변 때문이다. 매년 북반구에 여름이 닥칠 때마다 기온 상승 신기록이 깨지고, 날씨의 변덕이 더욱 극심해진다. 급기야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 온난화' 대신 이제 '지구 열대화'라 불러야 한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기후 재앙으로 인한 문명의 붕괴가 이미 시작된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곳곳에서 들린다.
물론 한반도 역시 이런 전 지구적 기후 재앙에서 예외일 리 없다. 한데 대한민국에서는 붕괴하는 게 이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에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비극이 있고 나서 우리는 새삼 이 나라의 학교가 붕괴 중임을 확인했다. 학생과 교사, 학부모, 학교 당국이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날 수 있는 곳이 우리의 '학교'라는 쓰라린 진실에 뒤늦게 눈떴다.
학교는 사회 전체에서도 특히 그 미래를 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부위다. 그런데 바로 이 부위가 이런 형편이다. 가뜩이나 기록적인 출생률 저하로 고민하는 사회가 그나마 있는 후세대를 미래 시민으로 키우는 과정에서도 이미 실패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이렇게 미래를 스스로 잡아먹는 사회에 '붕괴'라는 말 외에 다른 어떤 진단을 내릴 수 있을까.
참으로 희한한 노릇이다. '붕괴'라는 진단을 받는 이 사회는 또한 최근까지 곳곳에 'K'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세상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나라가 됐다고 자축하던 그 사회다. 특히 'K-민주주의'라는 말에는 미국이나 일본을 능가하는 민주주의 수준을 달성했다는 뿌듯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한데 그런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나라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배양지인 학교를 이토록 처참한 상황에 빠뜨릴 수 있다는 말인가? 붕괴의 와중에 K-민주주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K-민주주의는 붕괴에 맞서는 처방이 될 수 없다. 붕괴의 원인을 해결하기는커녕 이를 늦추거나 피해를 줄일 수도 없다. 오히려 K-민주주의야말로 우리 사회를 이 지경에 빠뜨린 몇 가지 중대한 요인 중 하나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는 붕괴의 유일한 원인까지는 아니어도 어쨌든 이를 더 부추기고 복잡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K-민주주의라지만, 결국은 1987년에 틀을 갖추어 지금껏 이어지는 민주주의, 즉 1987년형 민주주의다. 이 무렵, 대다수 한국 시민에게는 특정한 형태의 민주주의 이해가 뿌리를 내렸다. 거리의 시민들 사이에서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주의'와 등치되고 이후에 정치적 관심과 열정이 대통령 직접선거에 쏠리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독특한 민주주의관이 단단히 자리 잡았다. 또한 이 민주주의관은 민주노동조합이나 대학교 총학생회처럼 민주주의를 앞장서서 실천하는 시민사회 조직을 통해 한국 사회에 깊이 스며들었다.
지금 이 민주주의의 공백과 한계, 오점과 결함이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 민주주의는 한 마디로, 선출된 대리인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민주주의다. 직접선거로 선출된 대리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을 민주주의 자체와 동일시하는 민주주의 ― 이것이 87년형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이다.
이런 선출된 대리인의 가장 대표적인 표상은 물론 대통령이다. 다수 대중의 의지는 대통령 한 사람에 집약돼 표출되며, 이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가 곧 한국 민주주의의 성취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그리고 이런 메커니즘이 직접선거로 대표를 뽑는 모든 민주적 결사체로 확산돼 재생산된다. 지방자치단체, 정당, 노동조합, 학생회 등등으로 말이다.
한 동안은 이런 민주주의관이 실제로 역사적 성과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현재의 헌정 체제를 기획한 장본인들인 양 김씨가 대통령을 역임하던 때에는 그랬다. 대중의 개혁 열망과 의지를 대변하는 유능한 대리인이 온갖 난국을 헤치고 개혁을 실현한다는 서사가 실물로 전개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를 겪으면서, 그리고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쳐본 경험이 있는 세대가 어느덧 중장년이 되면서, 87년형 민주주의는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거의 유일한 버전이 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 나올 법한 가장 비극적인 배역이었다. 그는 87년형 민주주의 서사의 완벽한 본보기로서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양 김씨에게 쏟아졌던 것 이상의 높은 기대가 그 한 사람에게 향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민감하게 정치의 본질을 꿰뚫고 있던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서사가 더는 현실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87년형 민주주의의 틀(혹은 함정)에서 벗어나려고 거듭 시도했다. 선거제도 개혁, 연립정부 구상,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의 뼈아픈 성찰 등등.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냉철히 직시한 이 문제적 상황을 그의 지지자들은 그만큼 뚜렷이 이해하지 못했다. 대선을 통해 만들어지는 거의 50% 대 50%의 대결 구도와 이것이 반영된 행정부-입법부 대립 관계가 어떤 영웅적 대리인도 지지자의 요구를 관철할 수 없게 가로막는다는 것을 직시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대한민국 제6공화국에서 87년형 민주주의 서사는 이제 현실과 만나는 지점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선출된 대리인에 대한 권력 위임이 민주주의라는 생각만은 끈질기게 남았다. 대선 때마다 더욱 강력히 재생산되는 '신화'로서 말이다.
촛불항쟁 직후인 문재인 정부 초기는 어쩌면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동의한 여러 색깔의 정당을 바탕으로 다양한 의견과 입장, 세력 사이의 잠정적 합의를 통한 정치를 실험할 기회였다. 이런 경험이 쌓일수록 87년형 민주주의 이해가 새로운 이해에 길을 내줄 가능성이 커질 수 있었을 것이다. 선출된 한 사람의 대리인에 대한 환상적 기대 대신 토론과 협상의 지난한 과정을 '민주주의'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이 기회는 유실됐다. '촛불정부'를 자임하던 세력은 '적폐 청산'이라는 구호 아래 의도적으로 87년형 민주주의 서사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신화'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치러진 대선에서 우리는 윤석열 정부를 그 결과로 받아들게 됐다. 학교 이전에 정치는 벌써 한참 전부터 붕괴하는 중이었다.
도대체 둘 사이에는 어떤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는가? 한국의 시민사회는 87년형 민주주의의 틀에 갇힌 탓에 제대로 된 민주적 훈련을 거치지 못했다. 시민들은 삶의 여러 장소와 순간마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권리와 의무를 조율해야 한다. 민주주의란 단순히 시민에게 전보다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시민 자신이 권리와 의무의 복잡한 조율 과정의 주역이 되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조율 과정에서 결정권을 함께 나누면서 동시에 그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숱한 충돌과 시행착오를 겪고 난 뒤에야 부분적이고 잠정적인 합의에라도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과정이다. 이 과정의 어려움을 덜어줄 이론이나 공식 따위는 없으며, 이 과정을 겪지 않고 그 결실만 누릴 수 있는 비법 역시 없다. 따라서 어떤 사회든 이런 힘든 수련 기간을 몸소 체험하는 수밖에는 없으며, 이를 인내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성숙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마지막 결정적 요소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리자에 대한 전권 위임을 민주주의라 이해해 온 한국 사회는 이제껏 이런 도제 기간을 제대로 밟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민주적 권리 확대에 우호적인 시민들조차 단지 자신들이 지지한 선출직 공직자가 과감하게 그런 개혁에 나서길 기대하고 기다릴 뿐이었다. 투표가 끝나고 난 뒤에는 결실을 기다리는 시간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시간은 그렇게 허비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이렇게 허비될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쟁점들, 저 모든 '붕괴'의 사안들(기후 급변부터 한국의 교실 현장까지)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스스로 대면해야만 풀어나갈 수 있는 것들이다. 독재 잔재를 뒤집는 일은 양 김씨 같은 특출한 대리인에게 맡길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탄소 배출을 줄여나가거나 학교에서 학생, 교사, 학부모, 교육 당국의 관계를 새롭게 짜는 일은 그렇지 않다. 시민들의 토론과 합의 과정을 통해서만 그나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지금이야말로 87년형 민주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사회가 자신의 문제들을 스스로 대면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할 때다.
이것은 물론 87년형 민주주의의 기둥 노릇을 하는 대통령제의 개혁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출발점에 불과하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전능한 대리인의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소 조치일 뿐이며, 이 환상은 사회 각 부분이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논쟁과 협상, 잠정 합의들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모든 선출직 공직자의 과제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이런 민주적 과정을 여는 일이 되어야 한다.
한시 바삐 이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미래는 이와 정반대되는 쪽으로 기울고 말 것이다. 전능한 대리인의 환상을 바탕으로 난마처럼 얽힌 위기들의 해결을 약속하는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부상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런 권력이 들어서고 난 뒤의 상황은 87년형 민주주의의 기준으로도 더는 '민주주의'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시민사회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한다며 시민사회를 해산시키는 정치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에 이런 정치는 '파시즘'이라 불렸다. 그때에도 이것은 붕괴와 쌍을 이루며 힘을 얻은 선택지였다. 우리는 지금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