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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Royal Na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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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명은 오랑캐의 위협을 막기 위해 북방에 성벽을 쌓아 흩어져 있던 성벽과 요새들을 하나 둘씩 이었고, 이로써 오늘날 만리장성의 모습이 갖춰지게 된다. <출처: gettyimages>
명의 초대 황제, 주원장. 주원장은 양쯔강 이남에서 시작하여 원을 몰아내고 1369년에 남경에 도읍한 명(明) 왕조를 창건하였다.
12세기 초, 북송의 수도인 개봉(開封,카이펑)이 무너지고 여진의 금(金)이 현재의화이허[淮河, 양쯔강, 황허와 함께 중국의 3대하로 불리는 강] 이북을 차지하자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을 하던 한족은 큰 충격을 받았다. 군사력을 키워 다시 북부를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남부로 쫓겨 간 남송은 실질적으로 북부를 찾을 능력이 없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주희(朱熹, 1130~1200)의 이기론(理氣論)이다.
남송의 학자인 주희는 이(理)와 기(氣)에 대한 개념을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입시켰다. 그의 이론 안에서, 만물의 기본이 되는 원리인 이(理)는 한인(漢人)들을 상징하는 화(華)가 되었고 원리에 종속되어 움직이는 ‘힘’인 기(氣)는 오랑캐를 뜻하는 이(夷)가 되었다. 사실, 화이(華夷)의 개념은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생겨난 개념으로 주자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주자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상황, 즉 문명의 중심인 중화가 강성한 오랑캐에게 쫓겨서 몰려있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화이관에 이기(理氣)의 개념을 덧붙인 것이다. 당장은 기운(氣)이 왕성하여 원리(理)를 누르고 있지만 원리가 기운을 다스리는 것이 우주의 질서이니 곧 질서가 회복될 것이라 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오랑캐가 강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곧 한족의 힘이 다시 왕성해져 중원을 회복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주희의 바람과는 달리 ‘오랑캐’들의 힘은 약해지지는 않았다. 여진 금나라의 뒤에는 보다 훨씬 강력한 칭기즈칸[成吉思汗, 1162~1227]의 몽골이 있었다. 몽골의 기마군은 서하(西夏)와 금을 무너뜨리고 이어 1279년에 남송마저 무너뜨렸다.
한인들이 중원을 회복한 것은, 그후로도 100여년의 시간이 지나, 일개 농군이자 평범한 명교(明敎) 신도였던 주원장(朱元璋, 1328~1398)에 의해서였다. 대부분의 중국 왕조들이 북방에서 시작하여 중원을 통일한 것에 비해 주원장은 양쯔강 이남에서 시작하여 몽골의 원(元)을 몰아내고 1369년에 남경(南京, 난징)에 도읍한 명(明) 왕조를 창건하였다. 1127년에 개봉이 함락된 후 252년만에 한족이 남북중국을 아우른 통일왕조를 세운 것이다.
영락제. 영락제는 명의 수도를 남경에서 연경, 즉 지금의 북경으로 옮기고 몽골에 대한 정복을 단행하는 동시에 몽골족들이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의 정책을 추진했다.
몽골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운 명나라는 당연히 북방의 위협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몽골은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제국을 세워보았던 몽골의 귀족들은 여전히 봉건적인 권력을 유지하며 명나라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 초기에 태조 주원장의 측근인 장군 서달(徐達, 1332~1385)이 네 차례, 영락제(永樂帝, 1360~1424) 주체(朱逮)는 일곱 번이나 북벌을 감행하여 원나라의 복원을 꾀하는 몽골세력을 소멸시키려고 했다.
특히, 명의 3번째 황제인 영락제는 유목민들에 대한 적극적 전진전략의 일환으로 명나라의 수도를 남경에서 연경(燕京), 즉 지금의 북경으로 옮긴다. (영락제가 이토록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스스로가 북쪽에서 성장하였고 14세기 말 북원(北元)과의 치열한 전쟁을 겪었던 세대였기 때문이다.) 영락제는 몽골에 대한 정복을 단행하는 동시에 몽골족들이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책을 추진했다.
영락제는 북경 북쪽으로부터 요동 북쪽까지 널리 분포한 몽골세력인 우량하 [兀良哈, 우량카이, ‘오랑캐’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전해진다]의 군장들에게 작위를 내려주고 교역특권과 함께 관대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그들을 서쪽의 오이라트[衛拉特]와 북부의 타타르[韃靼]에 대한 방벽으로 삼고자 하였다. 하지만, 적극적인 정책과 달리 영락제 당시 명조의 북방국경은 오히려 후퇴하였다. 태조 주원장이 현재의 다닝[大寧]과 오르도스 이북으로 밀어 올렸던 북방변경을 포기하였고 이 지역은 다시 몽골 부족들의 차지가 되었다.
명조의 반복되는 정벌에도 유목세력은 강대함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몽골세력간 다툼에 대한 명조의 개입은 군사적/방어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몽골의 대명 투쟁을 격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명 영락제 19년에 신하인 하원길(夏原吉)이 “이번 출정으로 얻은 것은 거의 없고 군마와 축적된 군량의 8-9할이 없어졌습니다. 재해가 계속되어 농사를 망쳤으며 나라 안팎이 모두 곤하여졌습니다”하며 친정을 하지 말 것을 간할 정도였다. 이처럼 명의 북방 정벌은 별로 소득이 없는 일이었으며 그 뒤를 이은 선덕제(宣德帝, 1399~1435)는 대신 군사요새인 보(堡)를 많이 지어 북방에서의 위협에 맞선다.
명 영종 정통제. 토목보의 전투에서 몽골의 포로가 되는 망신을 당한다.
명의 소극적 북방정책은 명의 6대황제인 영종 정통제(正統帝, 1427~1464)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정통제는 선덕제의 방어선 강화전략을 그대로 채택하여 방어선을 서부 협서(陜西)와 감숙(甘肅) 지역까지 연장한다. 그러나 어린 나이(8세)에 즉위한 정통제는 통치에 있어 관료들보다는 측근의 환관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고 결국 환관인 왕진(王振)의 말을 믿고 1449년에 50만 대군을 이끌고 계속된 오이라트의 약탈을 응징하기 위해나섰다. 그러나 이 대군은 길도 모르는 사막으로 들어갔다가 물과 식량이 끊기게 되고 결국 토목보(土木堡)라는 요새에서 자칭 북원의 태사(太師)라 칭하는 에센타이시[也先太師]의 2만 몽골군에게 전군이 함몰된다. 정통제는 황제로서 포로가 되는 치욕(토목의 변)을 겪는다.
그러나 북방을 향한 공세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명의 성화제(成化帝, 1447~1487)가 청수(淸水,칭수이)에서 영하(寧夏,닝샤) 간 991km의 성을 짓는 등 요새와 성 쌓기에 집중하였다. 계속되는 성 쌓기로 북방에 흩어져 있던 성벽과 요새들이 하나 둘씩 연결이 되었고 오늘날 보이는 만리장성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현재의 만리장성(빨간 색 선 부분).
명나라 시절에 그려진 여진도(女眞圖).
명나라의 건국으로 한족이 동아시아 정세를 주도하게 되자 주자가 이야기하였던 화(理)와 이(氣)의 질서가 바로잡힌 듯 보였다. 한때 대금제국을 건설하며 동아시아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여진족(女眞族)은 명나라 초기에 이르러서는 요동 지역에 각각의 부(部)로 분열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명이 세워질 때 그 위정자들은 훗날 여진이 거대한 위협세력으로 다시 등장하리라고 전혀 예상을 못하였다.
명나라의 요동 진출이 시작된 것은 홍무(洪武, 주원장의 연호) 8년, 즉 1375년이었다. 북원(北元) 세력이 힘을 잃고 요동지역에서 철수하면서 힘의 공백이 생겼고 명나라는 이 지역을 재빨리 차지하였다. 지역의 중심도시인 요양 (遼陽, 랴오양)에 요동지배를 위한 요동도사(遼東都司)를 설치하고 25위(衛)를 세웠다. 위소(衛所)는 군호(軍戶)들이 평시에는 해당 지역에서 둔전(屯田)을 하면서 자급자족하다가 위기가 닥치면 다른 위의 병사들과 합쳐 군을 형성하는 방위체제, 즉 명이 변방지역의 방위를 위하여 고안해낸 방어체계였다.
이후 후금에 이어 청을 건국하고 중원을 차지하게 되는건주(建州)여진은 몽골에 집중된 명초기의 정책을 이용하려 했다. 아직도 세력이 강성한 몽골과 신흥강국 명의 간섭을 최소화하면서 살기에 좋은 정착지를 찾아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영락제는 이들을 회유하고자 1403년에 건주위를 설치하고 1412년에는 건주좌위(左衛)를 두면서 여진 중에서 세력이 강성한 건주여진을 명나라의 통치체계 안에 붙들어 두려고 하였다.
이후 몽골의 위협이 다시 증가하면서 명나라는 북변에 쌓은 요새와 장성을 위주로 한 방어체계로 전환하였고 요동지역도 중앙정부의 정책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정통제가 몽골에게 패하기 전에 해금정책으로 인한 남부의 경제적 파국과 함께 요동지역 둔전의 생산량이 급감하고 경영이 어려워졌다. 이는 요동지역에 대한 식량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통제가 하세(下世)한 후 홍치제(弘治帝, 1488~1505) 때는 위소제도 자체가 붕괴하기 시작하였고 둔전지역에서의 인구 유출로 군사력이 약화되어 유사시 대응하기 어렵게 되었다. 아울러 장성 위주의 방어정책 때문에 병력은 주로 북부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요동 동쪽의 금나라 후예들에게 다시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여진은 요동도사가 그들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음을 알았고, 점차 명나라 요동도사의 동부와 조선의 북변을 위협하는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누르하치[努爾哈赤, 1559~1626]는 1559년에 건주여진의 군장이자 명의 ‘지휘사’ 벼슬을 하고 있는 타크시[塔克世]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 왕조의 관점에서 여진에게 주는 작위는 그들이 중화에 복속했다는 의미였다. 그렇지만 작위를 받는 여진의 군장들에게는 부족민들에게 내세우는 권위의 상징임과 동시에 명과 무역을 할 수 있는 일종의 허가와 비슷한 것이었다. 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토지를 구입하고 주변에서 노예를 구입하거나 잡아와서 장원을 일구어 더 큰 부를 이룩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누르하치는 상당히 유복하게 자라났다.
후금(청)의 창건주 아이신교로 누르하치 초상.
비록 명의 지휘사 직위가 여진 군장들의 통치수단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누르하치의 조부인 기오창가[覺昌安]와 타크시는 명나라와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다른 여진 부족에 비해서도 상당히 명나라에 협조적인 편이었다. 이들은 명군에게 쫓기다가 살해된 건주우위(右衛) 추장 왕고(王果)의 아들인 아타이[阿台]가 1582년에 예허[叶赫]부와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전쟁에 향도(전쟁에서 길을 인도하는 사람)로 참전하였다. 당시 명조의 진압군을 이끌고 있었던 것은 조선사람 이영(李英)의 후손으로 알려진 이성량(李成梁, 1526~1615)이었다. 아타이는 고륵산성에서 이성량에게 죽는데 이 과정에서 기오창가와 타크시가 명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 있던 또 다른 여진 군장인 니칸-와이란[尼堪外蘭]에게 죽는다. 이들의 죽음에 관해서는 몇 가지의 주장이 있는데 기오창가와 타크시가 아타이와 친척간임을 들어 싸우지 않자 이들 부자(父子)가 아타이편으로 붙은 것으로 잘못 안 이성량이 이들을 오살(誤殺)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은, 이들 부자(父子)가 명 왕조와 가까우면서도 건주위에 대한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이 이성량과 명 관리들을 불안하게 했고, 이들이 후일 건주위를 통일할 경우 명나라에게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이성량이 니칸-와이란을 사주하여 모살(謀殺)하였다는 것이다. (‘니칸-와이란’이 사실은 군장의 이름이 아니라 “한인(漢人)의 총독” 또는 “한인의 관리”를 뜻하는 여진말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필자의 의견으로는 후자쪽이 보다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누르하치에게 있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은 일생을 바꾼 사건이었다. 명나라에서는 무역 허가증 격인 칙서 30개와 말 30필을 보내면서 죽음을 애도하였지만 누르하치의 집안은 ‘갑옷 13개밖에 남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다. 이후 ‘칠대한(七大恨)’에 포함될 정도로 큰 사건이었지만 누르하치는 표면적으로는 명조에 계속하여 충성하였다. 그는 일단 부조(父祖)의 원수를 명 왕조가 아니라 니칸-와이란으로 규정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하에 1583년에 군을 일으킨다. 명조는 여진인들간의 일이라며 개입을 하지 않고 누르하치는 이를 기회로 삼아 건주위의 군소부락을 통합하고 1584년에는 니칸-와이란을 죽인다. 누르하치는 명 왕조로부터 도독(都督)으로 임명되어그의 권리를 인정받음과 동시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지녔던 지휘사로서의 지위도 계승하게 된다. 5년후 1589년에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통일하면서 이후 중원 정벌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그가 지닌 엄청난 야심을 마음속에 숨기며 명나라와의 현실적인 역량 차이를 인정한다. 1590년에 북경에 직접 가서 조공을 함으로서 명나라의 충실한 번신(藩臣)임을 보여준다. 1592년에 일본의 조선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倭)를 정벌하여 은혜를 갚겠다며 참전을 요청한다. 비록 명나라와 조선이 거부하기는 하였으나 계속되는 충성의 표시덕택에 누르하치는 1593년에 명나라로부터 ‘용호장군(龍虎將軍)’의 칭호를 얻게 된다.
누르하치의 급성장은 다른 여진 군장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급기야 1593년에 예허부를 비롯한 9개의 부가 연합하여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을 공격한다. 명나라는 이에 개입하지 않았고 누르하치는 구레[古勒]의 전투에서 9부의 연합군을 격파한다. 이로써 다른 여진 부(部)들은 그 세력이 심하게 약화되고 반대로 누르하치의 위상은 급상승하며 자신의 건주여진뿐만 아니라 해서(海西)여진 소속의 후룬[扈倫] 4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누르하치의 출신지이자 청의 발상지인 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시 위치.
이러한 ‘양다리 걸치기’는 누르하치가 별다른 제재나 방해를 받지 않고 여진통일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601년에는 하다[哈達]부를 통합하고 1607년에는 후이파[輝發]부가 누르하치 예하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613년에는 우라[烏拉]부를 통합시키게 된다. 물론 명 왕조가 누르하치를 무작정 믿고 아무 것도 안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전에 9부 연합군의 선두에 섰다가 패하기는 하였지만 예허부는 아직도 세력이 강했으며 후룬 4부의 장형(長兄)으로서 명조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명나라는 해서여진의 후룬 4부에게 건주여진에 대한 견제역할을 맏긴 것이다.
만주문으로 쓴 누르하치의 정식호칭. '만국을 이롭게 하는 임금'이라는 뜻이다. <출처: (CC)Abstrakt at wikipedia.org>
다른 여진 부족의 군장과는 달리 누르하치는 단순히 자신이 속한 부(部)나 건주여진만 뿐만이 아니라 여진 전체의 차원에서 자신의 전략을 실행시켜 나갔다. 다른 부에 대한 통합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여진인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기초작업을 진행하였다. 1599년 2월, 누르하치는 2명의 신하에게 명하여 만주문자(滿洲文字)를 만들도록 지시한다. 사실 금나라 시절에 거란문자를 빌려서 만든 만주문이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원래의 만주문자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외부로 향하는외교문서는 몽골문자로 써서 내보냈다. 이런 상황은 여진사회 내부의 통합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등장하였다. 누르하치의 명을 받은 2명의 학자는 몽골문자의 자모(字母)를 기본으로 하여 여진언어의 음(音)을 표현할 수있는 문자를 만들었고 이후 널리 쓰이면서 명나라/조선과의 외교, 그리고 누르하치의 명령이나 포고문, 그리고 한문으로 된 서적의 번역에까지 쓰이게 되었다. 군장으로서 명나라를 수없이 다녀왔으며 한인(漢人)들과의 접촉도 잦았던 누르하치는 문자를 통하여 여진인들이 스스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일종의 민족적 자각(自覺)을 가지게 하였다. 이는 그가 여진을 부족사회에서 국가체제로 발전시키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여진과 몽골은 그 거주지역이 다르기는 하였지만 중원지역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명에게 서로 다를 바 없는 외이(外夷)였다. 사실 여진의 성장과정은 다른 관점에서 명나라의 몽골 견제에 따른 혜택을 입었다고 볼 수도 있다. 명 왕조의 북방전략은 주로 몽골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만주족에 대한 경계는 상대적으로 덜 하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흔히 알려진 것과달리 몽골인들은 대원(大元)의 멸망 이후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한 체 북방의 초원에 대한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각 부간의 내전이 심하여 명 왕조나 외부의 세력에 대한 군사력의 투사가 어려웠다.
토목보에서 불과 2만의 병력으로 영통제를 사로잡아 명 왕조의 위신을 추락시킨 에센-타이시의 죽음 이후 강력했던 오이라트부 내에서 내분이 일어났으며, 현재의 몽골 공화국 동부에서부터 중국 내몽골성 중부까지 예전 원조(元朝)를 구성하였던 다양한 집단이 난립하였다. 과거 칭기즈칸의 묘를 수호하였다고 전해지는 우량하를 비롯하여 칼카, 차하르[察哈尔], 투메트, 욘세브, 카라친부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주변의 세력(즉 명 왕조)과 협력하기도 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난립한 몽골세력은 다얀 칸[達延汗, 1464~1524]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통일되기도 하지만 다시 분열하였고, 이후 알탄 칸[阿勒坦汗, 1507~1582]에 의한 재통일이 이루어지며 명 왕조의 수도인 북경을 위협하였다.
비록 분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누르하치에게는 아직도 명 왕조가 주요 경계대상으로 삼을 만큼 강대한 세력을 가진 몽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아무리 누르하치가 건주위를 통일하였고 여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고 하여도 명나라와 여진 사이의기본적인 국력 차이는 엄청났다. 이는 당연히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청나라 건국의 분수령이 되는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 싸얼후 전투]에서 명나라가 동원한 병력이 약 10만 3천 정도였던데 반해 여진은 2만에 불과했는데, 더구나 10만 3천이라는 숫자는 명 왕조가 지닌 병력의 극히 일부분이었다. 누르하치는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기동력과 공격력을 겸비한 몽골의 기병은 누르하치의 대업에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아울러 비록 멸망하였다고는 하지만 초원과 그외 유목민족들에게 있어 몽골과 원(元) 제국의 위명(威名)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이 누르하치의 제국 건설에 동참하도록 하는 방법으로는 대원 제국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과거 정치세력들간의 결혼은 그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였으며 건국 직후의 후금 역시 다르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여진의 귀족들과 몽골 유력 부(部)들간의 통혼을 적극 권장하였다. 몽골과의 통혼정책에 있어 누르하치는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가문과 몽골 왕공들과의 혼인을 추진하였다. 예를 들어 1608년에 코르친부는 건주여진의 공격을 맞아 건주의 병력이 강력함을 알고 싸우기 보다는 사신을 보내 통혼의사를 누르하치에게 타진하였고 누르하치는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1612년, 누르하치는 코르친부 밍간 바이러[貝勒, 부장(部長)이라는 뜻]의 딸을 맞아들인다. 밍간은 보르지긴[博爾濟吉特]씨로서 몽골의 왕족이었고 몽골 왕족 중에서는 건주와 혼인을 맺은 첫 번째가 되었다. 3년후 1615년에 누르하치는 역시 보르지긴씨인 쿠르친 콩구르 바이러의 딸을 맞아들였다. 누르하치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주요 아들들에게도 몽골 왕족과 귀족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후일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청의 태종(太宗)이 되는 홍타이지[皇太極, 1592~1643] 역시 세 아내 역시 모두 보르지긴 가문의 몽골왕족이었다. 그 중 두번째 부인이 순치 말기와 강희 초기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가 된다.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인 예친왕(禮親王) 다이산[代善, 1583~1648]역시 결혼한 뒤였지만 보르지긴 출신의 부인을 얻는다. 제 14자인 예친왕(睿親王)이자 이후 순치제의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 되는 도르곤[多爾袞, 1612~1650]의 부인 열 명중 다섯명이 몽골인이었다. 누르하치의 15자 왕자인 예친왕(豫親王) 도도[多鐸, 1614~1649]의 정부인 역시 몽골인이었다. 이처럼 몽골인들은 후금의 건국기부터 귀족이자 왕비족으로 청 황가(皇家)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한다.
명 신종 만력제. 즉위 초반에는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이후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으면서 환관들의 득세와 명 말기의 혼란을 초래한다.
대야망을 품고 있던 누르하치였지만 그는 대원을 찾으려고 몸살이 난 몽골의 왕공(王公)들과는 달리 서두르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이미 1587년에 퍼아라[佛阿拉]라 불리는성채와 궁을 짓고 국도(國都)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지만 명나라의 신경을 크게 거스르지 않았고 정기적으로 조공도 바치면서 충성스런 오랑캐 신하로서 행세하였다. 1589년에 건주여진을 통일한 후 건주인들 사이에서는 임금을 칭하였지만 앞서 말한대로 1593년에는 명 왕조로부터 용호장군의 작위를 받는다. 그 와중에서도 여진 내부를 자신의 의도대로 다지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1599년의 만주문자 창제 역시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비롯된 것이다.
1601년에는 건주여진과 라이벌이었던 해서여진의 후룬 4부중 하다부까지 통합하면서 건주의 인구가 크게 늘게 되었고 이에 효과적으로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에 누르하치는 여진족의 전통적인 수렵조직인 니루[牛菉]에 기반한 체제를 만들게 된다. 우선 기존의 니루 조직을 확대하여 300명을 하나의 니루로 편성하고 니루-에젠을 두어 각 니루를 통솔하게 하였다. 니루의 숫자가 늘어나자 유사시 군사동원과 작전의 효율을 기하기 위하여 구사[旗]라는 조직을 편성하고 이를 황홍람백(黃紅藍白)의 4색으로 나누었다. 이후 만주사회의 기본이 되는 팔기(八旗)의 태동이었다. 1603년에는 당시까지의 근거지였던 퍼아라를 떠나 허투알라[赫圖阿拉, 현재의 랴오닝성 신빈현] 지역을 새로운 중심지로 삼아 집단의 쇄신을 꾀하였다.
대국의 건설을 위한 기반을 다지고 있던 누르하치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은 명 왕조가 알아채고 본격적인 견제, 또는 토벌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명나라에 대한 조공에 열심이었다. 1590년에 부하 108명을 데리고 북경에 가서 명 신종 만력제(萬曆帝, 1563~1620)에게 조공한 후 3년마다 정기적으로 진공(進貢)하였다. 물론 중국의 조공제도란 것이 변방의 번국(藩國)들이 진공을 오면 천자의 체면상 진공한 것보다 많은 물건을 ‘선물’로 하사(下賜)해야 했다. 아울러 조공사신단을 따라온 상인들에게 장사할 기회도 허락하여 주었다. 누르하치는 많은 하사품과 함께 조공무역으로 얻는 이윤으로 여진사회의 경제를 성장시켰고 동시에 명 왕조의 내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이러한 조공은 1611년, 기록에 따라서는 후금 건국 직전인 1615년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이중정책은 어디까지나 명 왕조의 눈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건주위와 하다부를 통합한 누르하치는 다른 부에 대한 통합작업에 나서 1607년에 해서의 후이화부, 그리고 1613년에는 우라부를 차례로 격파하고 통합시켰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누르하치는 마침내 1616년, ‘칸’으로 등극하고 옛 금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후금(後金)을 건국한다. 그리고 근거지인 허투알라를 정식으로 국도로 삼는다. 번신 신분을 벗어던지고 명 왕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제 누르하치는 명 왕조의 눈치를 보지않고 여진전체의 통일에 나섰고 세 번에 걸쳐 동해여진을 정벌하여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하였다. 1618년에 이르러 숙적이던 해서여진의 예허부를 제외하고는 여진 전체가 누르하치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1618년, 누르하치는 그 유명한 7대한을 하늘에 고하고 제사 지내면서 자신이 표면적으로 섬기는 명 왕조에 대하여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곧바로 군사작전에 돌입하여 명나라 요동지방의 주요 성(城)중 하나인 푸순[撫順]성을 함락시킨다. 이어 7월에는 명나라의 요동의중요 요새인 청하보(淸河堡)를 공격하여 떨어뜨린다. 누르하치가 여진인들의 구심점으로 삼기 위하여 선포한 7대한은 다음과 같다.
1. 명나라에서 조부 기오창가와 타크시를 아무 이유없이 죽인 것
2. 명나라가 건주부는 차별하고 예허부와 하다부의 편의만 보아준 것
3. 명나라가 누르하치와 맺은 영토협상을 파기하고 여진을 침공하여 인민을 살해한 것
4. 명나라가 예허부에 원병을 보내 건주여진을 막으려고 한 것
5. 예허부가 같은 여진인으로서 명나라와 내통하여 그 앞잡이가 되었으며 누르하치의 약혼녀를 강제로 몽골인과 혼인시킨 것
6. 명나라가 누르하치의 영토인 차이허, 산차와 푸안을 강탈한 것
7. 명의 요동총독인 소백지(蕭伯芝)가 권한을 남용하여 건주여진을 비롯한 여진백성들을 마구 괴롭힌 것
비록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고분고분했던 누르하치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명 왕조는 크게 동요하였다. 이에 즉시 누르하치를 토벌할 것을 선포하고 군병을 소집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요동순무(遼東巡撫)였던양호(楊鎬, ?~1629?)를 병부좌시랑겸우첨도어사요동경략(兵部左侍郞兼右僉都御史遼東經略)에 임명하여 토벌군의 수장으로 삼았다. 임명을 받은 양호는 광령에 도착하여 정벌준비에 착수하였고 1618년 8월에 황제로부터상방검(尙方劍)을 받아 생사여탈권을 쥔 총사령관임을 확실히 하였다. 이후 보다 효과적인 준비를 위하여 요동으로 옮긴 양호는 맹장 두송(杜松)을 산해관총병에 임명하고 퇴임한 노장인 유정(劉綎)을 관전총병관에 임명하여 후방에서의 군량조달을 담당하게 하였다. 아울러 군비로 200만냥을 모으고 9월 17일에 조선국왕 광해군(光海君, 1575~1641)에게 서신을 보내 원조를 요청(사실은 강요)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강홍립(姜弘立) 과 김응하(金應河) 휘하에 1만 3천의 병력을 파견한다. 양호는 누르하치에게도 서신을 보내어 항복과 함께 명 왕조에 다시 신속(臣屬)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누르하치는 이러한 요구를 모두 거부하였다. 명나라 토벌군에게는 누르하치의 본거지인 허투알라로 진격하여 누르하치의 ‘반란’을 뿌리 뽑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누르하치 역시 명군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여진을 거의 통일하고 건국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국력과 병력에서 절대적인 열세를 면할 수 없었다. 명군의 목표가 허투알라인 것이 분명해진만큼 명군이 허투알라로 진격할 때 거쳐야 하는 길목인 자이판과 사르후[薩爾滸, 싸얼후] 일대에서 군마에게 풀을 먹이고 자이판 중턱에는 요새를 축조하게 하였다.
1619년 2월 21일, 양호는 요양(遼陽)성에서 출정식을 가지고 10만의 대군을 후금의 도성인 허투알라를 향해 진격시켰다. 명의 토벌군은 4개의 부대로 진격했는데 진군의 신속함을 위하여 부대를 나누었다가 누르하치군이 포착되면 재빨리 군을 합하여 집중공격한다는 ‘분진합격(分進合擊)’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명 토벌군의 각 부대와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1. 서로군: 산해관총병관 두송
2. 북로군+예허부 증원병: 개원총병관 마림
3. 남로군: 요동총병관 이여백
4. 동로군+조선군 원병: 관전총병관 유정, 조선군 사령관 강홍립(김응하)
전령들을 통하여 명의 토벌군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누르하치는 이들이 예상대로 쟈이휘안과 사르후 지역으로 오자 보병 1만 5천, 기병 400기를 그 지역으로 보내어 복병(伏兵)으로 토벌군을 요격하려 하였다. 누르하치는 명의 토벌군이 여러 부대로 나뉘어 있다는 점에 착안, 이들의 상호구원을 차단하고 자신의 병력을 집중하여 한 부대씩 각개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각개격파의 첫 제물이 된 것은 두송의 서로군이었다. 누르하치의 군은 무순을 고의로 비워두었고 3월 1일에 무순을 떠나 사르후산 입구 길림애(吉林崖) 절벽 인근에 도착하였다. 지형이 몹시 험한 곳이었고 쑤쯔허[蘇子河]와훈허[渾河]가 만나는 곳이어서 싸우기에 좋지 않은 곳이었다. 두송의 부관들은 일단 야영을 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두송은 갈길이 급하다며 갑옷도 벗어버리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이에 그의 군이 뒤따랐고 이때 누르하치는 그의 군사들이 상류에 만들어놓았던 둑을 트게 하였다. 두송군의 일부는 물에 쓸려 익사하고 그의 군은 일부만 건너게 되어 둘로 나뉘게 되었다. 두송은 나아가 길림애 위에 진을 쳤고 누르하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력의 대부분을 동원하여 사르후산 입구에 남아있던 명군을 쳤다. 사르후산 입구에 남아있던 명군은 전멸하고 누르하치군의 공격은 두송군에 집중되었다. 두송은 병사들에게 화포를 있는대로 발사하게 하고 선두에 나서서 후금군을 공격하였으나 그의 군은 겹겹이 포위된 상태였다. 두송은 누르하치의 13자인 리암부[賴慕布]가 쏜 화살에 목숨을 잃고 서로군은 궤멸되었다.
두송군의 전멸 소식은 뒤따라오던 마림(馬林)에게 전해졌고 마림은 두송군의 패잔병과 그의 부대를 합쳐 세 곳에 임시요새를 만들었다. 누르하치는 지체하지 않고 병력을 집중하여 요새를 하나씩 공격하였다. 명군 진영에는 화포가 많았고 일부 후금군이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나 이 당시의 화포는 발사속도가 너무 느렸다. 결국 명군 포병들은 몇 번 발사하지 못하고 빠르게 돌진해온 후금기병들에게 제압당했고 다른 두 요새 역시 연이어 격파 당했다. 마림은 빠르게 도주하여 목숨은 건졌으나 그의 군 역시 후금군에게 전멸당하는 수모를 면치 못하였다.
사르후에서 명의 총병들을 공격하는 후금 기병.
누르하치는 이어 앞서 병사 몇 명을 전멸당한 두송의 전령들로 변장시켜 유정의 동로군이 오고 있던 방향으로 보냈다. 가짜 전령들은 두송이 이미 목표인 허투알라에 접근하고 있다며 동로군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동로군 사령관 유정은 지체없이 군의 진격속도를 높였고 아부달리(阿布達里)의 협곡을 지나게 되었다. 아부달리의 지형이 매우 좁아 유정의 군은 장사진(長蛇陣)으로 행군하게 되었는데 이때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산이 거느린 부대가 매복하고 있다가 동로군을 급습하였다. 유정은 미첨도를 휘두르며 싸우다가 죽었고 동로군에 포함되어있던 정예 절강병들 역시 전멸하였다. 이 동로군에는 강홍립이 지휘하고 있던 조선군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강홍립은 싸울 마음이 없어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하지 않았고 바람의 방향도 사수(射手)와 포수(砲手)로 구성된 조선군에게 불리하였다. 그러나 강홍립과 달리 김응하는 열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강홍립은 즉시 항복하였고 누르하치에게 조선이 처한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설명하였다. 강홍립의 항복으로 광해군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이 되었다.
한 편 북로군, 서로군, 그리고 동로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양호는 남로군 사령관 이여백(李如柏)에게 후퇴를 명하였다. 당시 누르하치의 본군은 남로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불과 수십명의 정찰대로 남로군의 행군을 감시하고 있었다. 남로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일설에는 이 정찰대의 대장이 마치 기습이 임박한 것처럼 뿔나팔을 불었고 이를 후금군의 공격으로 착각한 남로군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수천명의 명군이 동료들의 발에 밟혀 죽었다. 이로써 누르하치를 토벌하러 보낸 명의 토벌군은 전멸하였다.
사르후에서 후금이 명의 본격적인 토벌시도를 보기좋게 무찌른 후 후금과 명의 처지는 180도 달라졌다. 후금의 흥기를 변방 오랑캐의 반란 정도로 얕잡아 보았던 명은 수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후금은 승세를 타고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당시 요-심(遼瀋, 요양-심양,랴오양-선양) 지역은 넓은 평야지대였고 본격적인 인구와 영토의 확장에 필요한 농업지역이었다.그 중요성을 알고 있던 누르하치는 이미 자이판과 사르후에 요새를 쌓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사르후 전투의 승리가 요-심지역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사르후에서의 승리 후 누르하치는 자신이 구축한 자이판성을 전진기지 삼아 요동의 명세력을 소탕하고 여진세력 중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복속되지 않고 있던 예허부를 쳤다. 사르후 전투 이후 누르하치의 군은 바쁘게 움직이면서 1619년 6월에 개원성(開原城), 다음 달에는 철령성(鐵嶺城)을 점령하고 그리고 8월에는 예허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어 1620년 요양과 심양지역으로 나가면서 요동의 대도시라고 할 수 있는 요양과 심양을 떨어뜨리고 요양-심양과 연계된 주변의 대소 요새 70곳도 함락시켰다. 이로써 후금은 요하(遼河, 랴오허강) 동쪽 지역을 모두 장악하였으며 1621년 4월에 수도를 허투알라에서 요양으로 옮긴다.
요양을 공격하는 청군. 1621년에 누르하치는 요양을 점령하였고 요양은 1625년까지 후금의 수도로서 기능한다.
한편 요동지역에서의 대패에 충격을 받은 명 왕조는 새로운 토벌군을 조직할 여력이 없었고 요서에 있는 요새들을 보강하여 후금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이중 영원성(寧遠城)은 요서의 중진(重鎭)이었는데 원숭환(袁崇煥. 1584~1630)이 그 수비를 맡게 되었다. 광동 출신의 원숭환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선교사들을 통해 많은 서양문물을 보고 배웠는데 특히 화포의 배치와 사용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원숭환은 홍이포(紅夷砲)라 불리우게 되는 대포를 도입하여 자신이 지키고 있던 영원성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요서에서의 수비정책을 주도하였던 손승종(孫承宗)이 실각하고 고제(高第)가 조정의 수반으로 등장하자 명의 수비정책은 더욱 소극적으로 바뀌어 만리장성 이북의 모든 야전군은 산해관(山海關) 안쪽으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원숭환은 이 명령을 사실상 거부하고 영원성의 수비를 더욱 강화하였지만 그의 휘하에는 병력 1만 정도밖에 없었다.
명나라의 야전군 철수 소식을 들은 누르하치는 1626년에 자칭 20만대군(실제로는 10만)을 이끌고 심양을 떠나 영원성으로 진격한다. 일단 원숭환은 성밖의 사람들을 안으로 불러들이고 성밖의 모든 가옥과 건물을 불태운다.청야(淸野)작전의 일환임과 동시에 화포를 자유롭게 활용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아울러 탈영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장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들에게 만약 영원성에서 탈영병이 오거든 지체없이 참수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영원성에 도착한 청군은 바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틀간 주야로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포의 성능과 사각(射角)에 대하여 면밀히 연구를 한 원숭환인 누르하치가 비교적 먼 곳에서 정예호위병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해당 위치에 대한 사격을 명하였고 이로 인하여 누르하치의 호위병 다수가 죽고 누르하치 역시 중상을 입게 된다. 누르하치는 회복하지 못하고 1626년 9월 30일에 사망한다. 이에 그의 여덟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후금의 새로운 칸으로 등극한다.
1626년 후금군의 영원성 공격. [청실록]의 영원성 전투 삽화.
후금의 2대 칸으로 등극한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한인차별정책을 바꾸어 한인들을 우대하고 관료로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한인들을 계속 차별하다가는 한인들과 서로 융합하지 못하고 한인들의 반란으로 밀려난 원조(元朝)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우려가 작용하였다. 아울러 홍타이지의 다른 우려사항은 요동반도 근해와 조선의 도서에 주둔한 모문룡(毛文龍, 1576~1629)등의 명군과 함께 배후에 있는 조선이었다.
명-후금 전쟁에 가급적이면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던 광해군 정권이 1623년의 쿠데타로 인하여 몰락하고 향명배금(向明排金)을 공식적인 정책으로 삼은 인조(仁祖, 1595~1649)정권이 들어섰다. 인조반정은 명과 후금 둘 다에게 지대한 관심사가 되었다. 전쟁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나라에서는 일단 만력제가 조선국왕으로서 책봉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것을 불법찬탈로 간주하였고 때문에 인조를 퇴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시 비등했다. 반정이후 인조정권이 북경에 사신을 파견했을 때에도 주요 관료들이 인조반정에 대하여 상당히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결국 인조정권은 요동 근해의 섬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을 통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고 하였고 책봉을 받는 조건으로 이전 광해군 정권이 거절하였던 둔전과 염전의 설치를 허락하여 주었다. 모문룡은 더 많은 것을 받아내려는 욕심 때문에 인조정권의 책봉노력을 적극 도와주었고 결국 인조는 책봉을 받는 데 성공한다.
영원성에서 패배하고 창건주인 누르하치의 사망으로 다소 어수선했던 분위기를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한 침략으로 상쇄하고자 하였다. 조선을 쳐서 명나라편을 들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모문룡 등의 명 주둔군에 대한 소탕 목적도 있었다. 바이러 아민(阿敏) 등이 지휘하는 3만의 후금군은 1627년에 조선을 침공한다. 이괄의 난의 여파로 북방의 수비가 허술해져 있던 조선은 의주와 정주 등이 함락당하는 등 잠시 위기를 맞았으나 정봉수(鄭鳳壽, 1572~1645) 등이 일으킨 의병으로 인하여 후금군의 후방이 위험해지자 후금은 조선에게 명의 연호를 쓰지 않을 것, 그리고 홍타이지와 인조간 형제맹약을 맺을 것을 약속받고 서둘러 철수한다.
명의 무장 원숭환은 명청전쟁 당시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군에 승리했으나 모반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 와중에 홍타이지는 새로운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데 집중한다. 중국식의 과거제도를 채택하는 것은 물론 명조의 혼란을 피해서 도망오는 한인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병졸들을 이끌고 오는 군관의 경우 매우 후대(厚待)하였다. 이는 더 많은 한인 장수들을 후금쪽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심지어 후금의 중신들이 망명해오는 한인 장수들은 ‘질이 좋지 않은 부랑자’들이며 이들을 접대함에 있어 칸의 융숭함이 지나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홍타이지의 정책은 압록강 하구와 요동반도 해안지역, 그리고 심지어 산둥성(山东省)의 도서에 배치된 장수들까지 후금으로 끌어들여 후금이 취약한 해안지대를 안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 끌어들인 한인장수들이 많아 홍타이지가 2개의 한인 기(旗)를 따로 만들 정도였다.
한편 홍타이지는 명나라에 대한 전면적 공략을 재개하여 1629년에는 만리장성을 돌파하고 북경을 포위한다. 영원성을 지키고 있던 원숭환은 부랴부랴 그의 군사를 서진(西進)시켜 후금군을 격퇴한다. 원숭환의 군이 북경공격을 막아내기는 하였지만 후금군이 117일간 하북(河北, 허베이) 지방을 휩쓸면서 엄청난 보물과 물자를 약탈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아울러 간신이자 내관인 위충현(魏忠賢, ?~1627)이 1627년 숭정제에게 주살된 이후에도 명 조정의 혼란은 계속되어 동북방 방어의 주축인 원숭환이 처형된다. 명의 약화와는 반대로 청나라는 1631년에 자체적으로 홍의포(紅衣砲)를 제작하였고 1633~4년에는 원숭환에게 주살당한 모문룡의 해상전력을 거의 흡수하였다. 이미 일부 군진만 제외하고 명의 방어체계는 와해된 것과 다름없었다. 이 당시 인조의 사신으로 북경에 사행(使行)을 갔던 잠곡 김육(金堉, 1580~1658)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적병이 6월 13일에 백마관을 통해서 들어와 창평주(昌平州), 탁주(涿州) 등 10여 현을 함락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모두 내지로, 성은 모두 토성이고 수비하는 군사도 적습니다. 그러므로 적들이 허술한 틈을 타고 승승장구하여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약탈한 것은 헤아릴 수 없는데, 장정은 붙잡아 가고 노약자는 목을 자르며, 지나간 성읍은 모두 불살랐습니다. 적들은 왔다 갔다 하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동쪽을 향해 가서 옥전(玉田) 등지를 노략한 다음 영평부(永平府)에 도착하였으며, 9월 4일에 냉구관(冷口關)을 경유하여 나갔습니다. 천하의 군사 16~17만 명이 한꺼번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도 감히 맞서 싸우지를 못하고 단지 뒤를 옹위한 채 따라만 가서, 관군은 손상된 바가 없으며, 적병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홍타이지는 앞서 말한 만몽일체 정책을 더욱 활발히 추진하여 청 황가와 몽골 왕공들과의 혼인동맹을 강화했다. 청군이 산해관으로 들어가기 전(1644)까지 여진족 황실의 여인 27명이 몽골의 왕공귀족들과 혼인하고 반대로 57명의 몽골여인들이 만주의 황가와 귀족들과 혼인했다. 이러한 혼인동맹은 중원을 도모하기 전에 몽골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려는 정책이었다.
명은 여진족과 몽골의 동맹을 막으려고 무진 애를 섰다. 그러나 1634년 몽골의 마지막 대칸이었던 링단-칸[林丹汗, 1588~1634]이 죽고 1635년에 링단-칸의 아들 콩구르가 홍타이지에게 항복하고 전국옥새를 바쳤다. 이로써 몽골은 완전히 명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고 홍타이지는여진과 몽골을 온전히 하나로 합쳤다. 소위 명나라의 관외(關外) 지역 중 여덟 개의 성만 제외하고는 후금의 영토로 편입된다.
숭정제는 무능함과 의심으로 명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누르하치도 그러하였지만 홍타이지를 비롯하여 후금의 지도층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옛 후금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중원 전체를 석권하여 새로운 천하를 여는 것이었다. 이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1636년에 예전의 ‘금’을 연상시키는 ‘후금’이란 이름을 버리고 보다 중국적인 ‘청(淸)’을 국명으로 채택하고 아울러 ‘여진’이라는 호칭 역시 버리고 대신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종족명을 채택한다. 일설에는 명(明)이라는 국호와 국성(國姓)인 주(朱)는 불(火)과 연결이 되는데 행의 원리에 의하면 불이 쇠를 이기므로(火克金)하므로 후금의 금(金)이 명한테 패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따라서 역시 오행의 원리에 의거하여 물 부수가 들어간 청(淸)으로 국호를 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청의 태종(太宗)으로 등극하였다.
청을 세운 태종은 조선과의 형제맹약을 파기하고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인조정권은 청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청 태종은 1636년에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비록 광교산 등지에서 일부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청군과 싸우러 나온 소위 ‘근왕군(勤王軍)’과 조정의 관병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않아 청군에게 각개 격파 당한다. 인조는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리면서 항복하고 명과의 관계를 끊는다.
명나라도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경제적으로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조천록]에 따르면 전란으로 인명ㆍ재산 피해를 크게 본 지역들에는 기근이 크게 들었고, 난주(灤州)ㆍ영평(永平)ㆍ산해(山海) 일대가 특히 심각하였다. 북경 이동 지역에는 1637년 1월부터 윤 4월까지 비가 오지 않아 농사가 거의 불가능하였고 수많은 백성들은 굶주리다 못해 자식을 팔고 유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과거에 그러하였듯이 중국에서는 참다 못한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난다. 자연재해와 청의 침탈이 겹치면서 일어난 반란은 소소한 반란이 아니라 큰 세력을 형성하고 왕조를 위협하는 수준의 대반란이다.
이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섬서(陕西, 산시)에서 일어난 이자성(李自成, 1606~1645), 그리고 사천(四川, 쓰촨)에서 장헌충(張献忠, 1606~1646)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자성은 섬서의 기근을 견디다 못한 고영상(高迎祥, ?~1636)이 일으킨 반란군에 들어가 뛰어난 활약으로 그 군의 선봉장이 된다. 고영상이 죽은 후 반란군의 수령이 된 이자성의 군은 지방군과 정부군을 격파하고 1644년에는 북경 근방에 도착한다. 숭정제(崇禎帝, 1611~1644) 주유검(朱由檢)은 국경에서 두 개의 군을 불러들여 이자성의 반란군을 막으려 하지만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반란군이 북경에 난입한다.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은 숭정제는 공주 둘이 욕을 당하기 전에 칼로 찌르고 자금성(紫禁城) 뒤의 경산(景山)으로 들어가 자결한다. 청의 발흥 때문에 명이 약해지기는 하였지만 정작 북경을 함락시킨 것은 청군이 아니라 반란군 수령인 이자성이었다. 끝없는 의심으로 충신들을 주살하며 명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숭정제는 이렇게 죽었다.
오삼계는 명나라 말기의 무장으로 청나라의 중국 본토 진출을 돕는다.
숭정제의 명령을 받고 북경을 지키러 가던 산해관 총병오삼계(吳三桂, 1612~1678)는 도착하기도 전에 북경은 이미 함락되었고 숭정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삼계는 어려운 선택을 하여야 했다. 일단 오삼계는 다시 산해관으로 왔지만 그의 군을 가지고 홀로서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산해관에 근접한 두 세력, 즉 이자성의 반란군과 청나라 중 하나를 택하여야 했다.
이자성은 그나마 한인이었고 이미 새로운 왕조(大順, 대순)를 건립한 상태였다. 아울러 이자성은 화북지방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명 왕조를 어지럽혔던 모든 난정(亂政)과 부정(不正)을 바로 잡을 것을 약속하였다. 물론 이자성의 반란군이 오삼계의 아버지를 인질로 잡고 있어 만약 아버지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오삼계는 당연히 이자성에게 항복해야 했다. 그러나 이자성의 반란군은 규율이 잡힌 정규군이 아니라 농민이었고 그들이 북경에 난입할 때 행한 대규모 약탈, 그리고 사대부들의 가족을 잡아 몸값을 요구하는 등의 행위가 오삼계같은 고위 사대부에게 좋게 비쳤을 리 없다. 비록 이자성이 스스로를 대순의 왕이라 칭하기는 하였지만 그 휘하 반란군의 고삐 풀린 행동은 이자성이 반란군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의 군도 제어하지 못하는 이자성이 새로운 왕조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만주인들은 한인들이 천시하던 변방의 야만인들이었다. 오삼계같은 사대부에게는 야만인들에게 항복한다는 사실이 거부감이 들만도 하였다. 그러나 일단 홍타이지는 이미 나라를 세우고 이를 6부의 조정을 통하여 통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만주군이 화북지방을 휩쓸었을 때 자행한 대규모 학살이 마음에 걸렸으나 청의 조정에는 수많은 한인들이 관리가 되어 일하고 있었다. 아울러 스스로 굽히고 항복한 한인 관료들이 후대(厚待)받는 것을 볼 때 자신이 항복해도 자신의 지위와 부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오삼계는 청나라에 항복하기로 한다. 결국 북경을 무너뜨린 데 이어 청병(淸兵)을 중원으로 들인 것도 만주인이 아닌 한인이었던 것이다.
오삼계가 지키던 산해관(山海關). <출처: (CC)Daniel Ng at Wikipedia.org>
한편 청에서는 1643년 9월에 태종 홍타이지가 죽었고 오삼계가 청군과 접촉할 때는 홍타이지의 아들 푸린[福臨]이 순치제(順治帝, 1638~1661)로 등극한 뒤였다. 그러나 순치제는 아직 나이가 어려 실권은 홍타이지의 동생인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 도르곤에게 있었다. 이자성은 오삼계의 군을 제거하기 위하여 두개의 부대를 산해관 쪽으로 보내지만 5월 5일과 5월 10일에 오삼계군에게 패한다. 결국 이자성은 5월 18일에 본군을 이끌고 북경을 나온다. 이자성의 군은 5월 22일에 영평(永平)으로 나와 5월 25일에는 산해관 근처에 도착하였다. 오삼계는 청군의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오삼계가 전령을 보냈을 때 도르곤은 이미 서진(西進) 중이었고 오삼계에게 도움을 원한다면 청(淸)의 관리가 될 것을 종용하였다. 이 시점에서 오삼계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도르곤이 거느린 청군은 약 5만, 오삼계의 정규병은 약 4만정도였고 이와 더불어 주변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수를 불렸다. 이자성의 대순군은 약 10만 정도였다고 한다. 이자성은 도착하자마자 산해관으로부터 수 리(理)떨어진 사하(沙河, 사허)에 군을배치하였다. 오삼계는 부하들에게 수비병력을 주어 산해관의 방어를 맡긴 뒤 군을 이끌고 나와 이자성군과 맞섰다.
한편 도르곤은 산해관으로 진격하고 있던 중 명 조정의 장수였다가 이자성군에 속하여 싸우고 있던 당통(唐通)의 부대와 맞닥뜨린다. 당통은 이자성의 명령으로 사하를 우회하여 오삼계군의 뒤를 치기 위하여 이동하고 있던 중에 청군을 만난 것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청군에 당황한 당통의 부대는 도르곤의 청군에게 전멸 당한다. 5월 27일에 산해관 근처에 도착한 청군은 오삼계군의 항복을 받는다.
예친왕(睿親王) 도르곤. 일명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 되어 나이 어린 순치제 대신 정치를 장악하였다. 산해관에서 이자성을 격파한 후 청군을 이끌고 북경에 입성한다.
5월 27일의 전투에서 이자성은 군을 거대한 학익진형으로 배치하고 오삼계의 산해관군의 돌격을 맞았다. 비록 이자성군의 포진이 조밀하지 못했지만 산해관군을 맞아 의외로 잘 싸웠고 산해관군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었다. 그때 강한 바람이 불면서 엄청난 먼지구름이 이자성군을 덮쳤고 이를 틈 타 도르곤의 청군 기마대가 대순군의 좌익을 강타하였다. 사실 이자성은 청군이 근방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당통의 부대가 갑자기 사라진 사실에 의아해했다. 그러던 와중에 먼지 속에서 변발을 한 대규모 기마병들이 뛰쳐나오자 대순군은 혼비백산하였다. 오삼계군과 싸우느라 지친 대순군은 강력한 청의 기병들에게 공격당하자 진형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후퇴하는 대순군은 앞다투어 영평으로 달아났고 이 과정에서 수천이 밟혀죽고 또 수천이 청군의 칼에 죽었다. 이 공으로 청에 협력한 오삼계는 평서백(平西伯)에서 평서왕(平西王)이 된다.
전투에서 패한 대순군은 다음 날 북경으로 후퇴하고 5월 31일에 북경에 재입성한다. 이자성은 그의 군이 청군의 공격에 견딜 수 없음을 알고 북경 안 관리들의 집을 약탈하라고 한 다음 6월 3일에 대순의 ‘황제’로 등극한다. 그리고 자금성에 불을 지르고 서쪽으로 탈출한다. 한편 이자성군을 무찌른 ‘승자’들을 맞으러 성밖으로 나간 북경의 유력자들과 관리들은 승리한 군이 명군이 아니라 청나라의 ‘오랑캐’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황부섭정왕 도르곤은 이에 신경쓰지 않고 자금성으로 직행하여 금군(禁軍)의 호위를 받는다. 이들은 이자성군의 난행을 보고 이자성을 섬기기를 거부했던 자들이었는데,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명 황실의 잔당들 대신 청나라와 순치제를 모시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순치제는 수 개월후 10월 19일에 북경에 도착하였고 11월 8일에 중원의 황제로서 등극한다.
새로이 북경의 주인이 된 청나라는 명분을 세우는 데 상당히 신경을 썼고 이자성의 반란군에 몰려 자살한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를 위하여 성대히 국장(國葬)을 치러주었다. 청군이 통치의 명분을 세우는 데 있어 명을 무너뜨린 ‘반란군’들을 토멸하는 것만큼 좋은 구실은 없었다. 그리고는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을 멸하기 위해서 들어왔노라고 선포하고 대순군을 추격한다. 홍타이지의 동생들인 아지게[阿濟格]와 도도[多鐸]가 이끄는 청군은 산서와 섬서성 등지에서 대순군을 연파하고 서안(西安, 시안)에 둥지를틀고 있던이자성은 뒤쫓아 오는 청군을 피하여 1645년 2월에 서안을 떠나 서쪽으로 도피해 호북성 무창(武昌, 우창)을 거쳐 강서성(江西省, 장시성) 북부까지 달아났다. 쫓기는 이자성은 끼니마저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일설에는 같은 해 9월에 민가에서 먹을 것을 훔치다가 성난 백성들의 손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한편 이자성과 비슷한 시기에 난을 일으킨 장헌충은 호북성에서 방어에 유리한 사천성으로 들어가 대서국(大西國)의 대순왕(大順王)이 된다. 그는 초기에는 사대부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관료로 만들고 ‘조정’을 세우고 과거를 시행하며 화폐를 발행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후기에는 망상에 빠져 전 아시아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의심이 가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면서 전횡을 일삼는다. 그는 청의 공격에 밀려 1646년말 수도인 성도(成都, 청두)를 포기하고 동쪽으로 도주하였으며 도주하는 와중에도 학살을 일삼다가 1647년 1월 청군에게 패하고 죽임을 당한다.
청나라가 반석위에 서기 위해서는 반란군 토멸보다 큰 일이 있었으니 바로 전(前) 왕조의 잔당들과 ‘충신’들을 일소(一掃)하는 것이었다. 어떠한 왕조가 멸망한 직후에는 해당 왕조를 되살리려는 ‘부흥군’이 일어난다. 왕조가 수백년 지속된 경우 해당 왕조를 살리는 행위는 ‘대의’의 차원에서 상당한 명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남경에 있던 관리들과 유력자들은 숭정제의 아들들의 생존이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가장 황위에 근접한 황족이자 만력제의 손자인 복왕(福王, ?~1646) 주유숭(朱由崧)을 황제로 내세워 구심점으로 삼았다. 주유숭은 1644년 6월 7일에 남경에서 황제의 인(印)을 인수하고 6월 19일에 명(남명)의 홍광제(弘光帝)로 등극한다.
남명의 네 임금(복왕, 노왕, 당왕, 계왕)의 주둔지와 활동을 표시한 지도.
그렇지만 남명의 관료들은 적을 앞에 두고 뭉치기보다는 서로 시기하며 반목하였다. 남경 정권의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마사영(馬士英)과 사가법(史可法)은 화합하지 못하고 따로 세력을 유지하였다. 아울러 남명 정부는 기가 막히게도 북경을 점령한 청이 아니라 이자성과 장헌충 등의 반란군을 주적(主敵)으로 여기고 있었다. 특히 홍광제의 남명 조정은 ‘오랑캐와 손을 잡고 도적들을 평정한다(聯虜平寇)’를 구호로 내세웠다.
그러나 청은 이자성을 토멸하는 동시에 다른 일군(一軍)을 남쪽으로 보내어 남명을 공격하였다. 1645년 초, 예친왕 도도가 이끄는 청군은 소주(蘇州, 쑤저우)를 함락시키고 4월에는 사가법이 지키고 있던 양주(揚州, 양저우)에 이르렀다. 도도의 청군은 대포 등 가지고 있던 무기를 총동원하여 양주를 공격하였지만 성민(城民)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양주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힘이 다하면서 양주는 5월 20일에 함락되었고 성민들을 지휘하던 사가법은 자신의 목을 베어 자결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사가법을 사로잡은 도도는 사가법의 충직함이 가상하다며 살아서 자신과 함께 강남(江南)을 평정하자고 종용한다. 그러나 사가법은 자신의 몸이 천갈래로 찢겨도 협력할 수 없다고 답하였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사가법의 충정에 대한 존경심과는 별도로 예친왕 도도는 양주에서 예상외로 큰 손해를 본 것에 몹시 분해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청군의 지휘관들은 약탈과 학살을 통제하였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었는데 양주가 그러한 경우였다. 도도는 강남인들에게 만약 청군에게 항거한다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하여 양주의 성민들에 대한 학살을 명하였다. 다음 열흘 동안 양주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이 자행되었고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양주성과 그 주변은 피와 신체의 일부, 그리고 훼손된 시신으로 가득하였다고 한다.
국성야(國姓爺) 정성공(鄭成功). 남명을 도와 복국운동에 참전하였으나 실패한다.
양쯔강 유역과 강남에 있던 남명의 도시들은 연이어 청군앞에 함락되었고 6월 1일 청군이 진강(鎭江, 전장)에서 양쯔강을 대대적으로 건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남경에 있던 남명의 황제 홍광제는도주하였다. 청군은 6월 8일에 남명의 수도인 남경에 무혈입성하였고 6월 15일 홍광제는 청군에게 잡힌다. 홍광제는 북경으로 보내지고 연금상태에 있다가 1년 후에 죽는다.
홍광제가 청군에 잡히자 명의 당왕(唐王, 1602~1646) 주율건(朱聿鍵)이 황제가 되었다. 주율건은 일찍부터 정치에 재능과 관심을 보였고 이 때문에 의심많은 숭정제에 의하여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후 홍광제에 의하여 풀려난 주율건은 남경 함락 당시탈출하여 그의 영지로 향하고 있었는데 7월 6일에 항주(杭州, 항저우)가 함락되자 길이 막힌 그는 강서(江西)를 통해 복건성(福建省, 푸젠성)의 복주(福州, 푸저우)에 이르렀고 8월 18일에융무제(隆武帝)로 등극한다. 융무제는 한때 해적연합 십팔지(十八芝)의 우두머리로서 중국 남동해안을 주름잡다가 명의 관리가 된 정지룡(鄭芝龍, 1604~1661)의 후원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지룡은 해적질과 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고 융무제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심지어 정지룡의 아들인 정삼(鄭森)은 아들이 없던 융무제의 양자가 되었고 성공(成功)이라는 이름을 받는데 황성(皇姓)을 받았다하여 후일 국성야(國姓爺)로 불리게 된다. ‘국성야’의 복건식 발음이 서양에 와전되어 그는 역사에 ‘콕싱가’로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청의 군대가 1646년 여름에 복건성을 들이쳤을 때 정지룡은 청군에 그대로 항복하였고 같은 해 10월 6일에 도주하던 주율건은 청군에 붙잡혀 거의 즉시 처형되었다.
융무제 주율건이 죽은 직후 남명 정권에서는 잠시 왕위다툼이 벌어졌다. 스스로를 ‘소무제’라 칭한 주율건의 동생과 ‘섭정’이었던 계왕(桂王, 1625~1662) 주유랑(朱由桹)이 서로 황제라고 칭하였다. 주유랑이 이 계승전에서 이기고 영력제(永曆帝)가 된다. 그러나 청군의 맹공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 싸움은 무의미하였고 새로운 정권은 복건성을 떠나 보다 남쪽으로 도망해야 했다. 영력제 정권은 강서(江西), 호남(湖南, 후난)등을 거쳐 광서(廣西, 광시)의 남령(南寧, 난닝)까지 쫓긴다.
이 과정에서 1657년에 연평왕(延平王)의 작위를 받은 정성공이 10만의 병력과 290척의 함대를 모아 남명의 수도 남경을 회복하려 하였다. 정성공이 숭명도(崇明島, 충밍다오)와 천주(泉州, 취안저우)를 수비하던 청군을 격파하고 양쯔강에서 장황언(張皇言)을 만나 군을 합칠 때 청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양 군은 남경을 포위하였으나 이는 반대편 군세가 모이기를 기다린 청의 계략이었다. 이윽고 사방에서 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정성공과 장환언의 군은 완전히 무너지고 지휘관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정성공은 겨우 탈출하여 본거지인 하문(夏門, 샤먼)으로 후퇴하였다. 정성공은 전력의 대부분을 잃고 이후 반청전쟁을 할 힘을 잃어버린다.
동남해안에서 정성공이 있었다면 내륙에 있는 영력제에게는 장군 이정국(李定國)이 있어 청군의 맹공을 잘 막아내었다. 한때 장헌충 밑에서 싸웠던 이정국은 이후 독립세력을 유지하다가 중원의 남서쪽 변경으로 밀려온 영력제의 군을 맡았다. 계림(桂林, 구에이린)에서 밀려나 난닝으로 후퇴하며 세력이 위축되어가던 남명정권은 이정국의 지휘에 힘입어 1652년에 계림을 탈환하는 등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승주(洪承疇)와 오삼계 등이 지휘한 토벌군에 밀려 1658년에는 운남(雲南, 윈난)의 곤명(昆明, 쿤밍)까지 후퇴하였으며 1661년에는 견디지 못하고 버마(미얀마) 북쪽으로 달아난다. 버마로 후퇴한 남명정권은 자치령을 만들어 일종의 복국(復國)을 위한 기지로삼으려 했으나 이를 불편하게 여긴 버마정권과의 갈등을 야기하였고 버마의 폐-민왕은 주유랑의 가족을 제외한 추종자들을 모두 죽인다.
1661년 12월, 오삼계가 2만군을 이끌고 버마경내로 돌아와서 주유랑의 신병인도를 요구한다. 폐-민왕은 1662년 6월에 주유랑의 가족을 배에 태우고 이정국(李定國)에게 돌려보낸다고 속이고 강물에 떠내려 보낸다. 주유랑이 탄 배는 오삼계의 진영에 이른다. 주유랑은 자신의 운명이 다했음을 알고 오삼계를 보자마자 역적(逆賊)이라 하면서 욕설을 내뱉는다. 오삼계는 친히 끈을 가지고 주유랑의 목을 졸랐다고 하는데 주유랑은 죽어가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네 놈 같은 역적의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니 좀 빨리 죽여다오.”
주유랑은 목이 졸려죽었고 1662년, 명 황조의 마지막 ‘황제’가 죽는다. 중원의 주인은 더 이상 한인(漢人)의 명(明)이 아니었다. 명의 한인들이 그리 멸시하고 야만시하였던 여진족, 즉 만주족이 중원 천하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이리 세워진 청나라는 18세기에 이르러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이루며 중국의 지경(地境)을 넓힌다. 근대 국가가 세워지기 전의 중국사를 장식하게 되는 마지막 왕조가 되는 것이다.
청대 최대로 확장된 영토의 모습. <출처: (CC)Jerrch and Nat at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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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근세에서도 기병의 활약이 대단한듯.
여진에서도 화약을 사용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명, 조선은 화약으로 화포와 총으로 무장했지만 기병에겐 무용지물이었던듯.
정확히 말하면, 기병에게 무용지물이었던 것이 아니라. 기동력을 이용해서 어택땅을 찍은 거죠. 지금도 그렇지만 싸우려면 예비군 불러모으고 향토방위병력 모으고 해야 하는데, 청군은 이걸 이용해서 제대로 된 성 공략도 안 하고 무조건 남하해서 한성으로 갔습니다.
인조가 친지를 강화도로 보낸것도 실수. 임진왜란 경험후 조총수 양산에 주력하고 창병이 지지부진핸것도 패전의 요인 우리나라 산지지형이 대부분이기때문에 제대로된 창병으로 기병을 막아 청의 속전속결 전략을 무산시키고 장기화됬다면 조선은 굴욕을 경험하지 않았을수도
@섹광 그러게요. 정말 시대를 잘 타고 나야 하기도 하겠지만 세상은 타이밍인듯...
김자점 이놈이 청의 후방을 치고 보급을 끊으면 삼전도 굴욕은 없었을텐데 부들부들 ;;
@섹광 그랬으면 청 자체가 휘청!했을지도
팔기군의 장점은 기병과 보병의 전환이 자유롭고 온갖 상황에 대응 가능한 뛰어난 지형적응력을 가지기 때문이지 그냥 짱센 기병이어서가 아님요.
앞에 대기병방책 깔고 포격전 준비하고 있으면 말에서 내려서 공병처럼 그런 장애물부터 정리하고 나서 다시 말에 타고 돌격하기도 하는게 팔기군.
그런데 청나라 하니까 생각나는데 세조때 이징옥의 난 일어나고 이징옥이 '대금황제'칭하고 조선 먹었다면 지금 우리도 청나라? ㅋㅋㅋㅋㅋㅋ
효종이 북벌해서 청 정복하는 소리 하시넴
@섹광 ㅋㅋㅋㅋㅋㅋ IF 니까요 ㅋㅋㅋㅋ
이징옥은 여진족이고 여진족과 금(유목민족에게 금은 특별한 것)은 특별한 관계입니다. 여진의 최전선기를 열고 송조의 정강의 지변을 잃으켜 송휘종 흠종을 포로 삼은 것은 대대로 전승이 된 것이죠.. 하지만 아이런니 한것은 여진족의 전선기를 연 완아부족은 후금이 건국될때 야인여진의 부류로 후금의 건주여진보다 뒷떨어진 상태라는 것이죠.
베트남판 남북조 시대의 한국 버전이 될 듯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클박클박 광해군의 인조반정 드립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