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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 길이 전부고, 길이 끝이다
눈꽃 추천 0 조회 87 25.05.31 06:48 댓글 2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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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5.06.02 19:26

    첫댓글 머리가 쭈삣할 때, 그냥 지나치고 잊지 말구요.

    "아... 내가 이런 상황에서는 그렇구나"라고 사실을 긍정하고, 이 상황이 어떤 건지 구체적으로 잘 분석한 다음, 자신이 그 상황에서는 그러함을 잘 기억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 따르면, 싸우거나 극복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냥 잘 알려고 해야 합니다.

  • 작성자 25.06.03 08:56

    아 그렇지요.
    잠시 놓칠뻔 했던 주제네요.
    자연의 흐름이니 뭐니..
    했던 것들은 객관화된 사고이고요.

    진짜 가야할 길은,
    오로지 이 마음하나 흔들리지 않도록
    이 마음을 잘 알려고 하는 그 止지를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거요.

    止가 지혜이고
    불교는 지혜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거 같습니다.

  • 25.06.04 15:53

    제가 알기로는 觀이 지혜(통찰)이며, 觀을 하려면 止(집중)가 필요한줄 아는데요?

  • 작성자 25.06.05 06:31

    숨결님 많이 반갑습니다.
    우리 붓다의 길을 어깨동무하고 함께가요.

    네 숨결님 말씀에 저도 적극 동의합니다.
    역시 화엄 가족들은 다른 스쿨들에서의 붓다에 대한 논의보다 그 깊이가 출중한거 같아요

    아~
    이쯤에서 방문객님의
    지, 관, 지혜, 통찰에 대해 한말씀 들어보고 싶기도 하네요.

  • 25.06.06 20:13

    맞습니다, 맞고요.

    止(집중)하면 觀(지혜,통찰)이 발생합니다.

    한문 표현에서 관왈(觀曰)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관용적으로 "관하여 이르길"이라고 번역하니까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거는 조금 오해의 여지가 있는 번역이구요. "觀(지혜,통찰)을 말하자면"이라고 번역하는게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불교에서 觀(지혜,통찰)은 소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止(집중)도, 있는 그대로 알게 하는 방법 내지 행위라고 의미를 받아들이면 무난합니다. 그 행위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가 고요함입니다. 그래서 고요함이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止(집중)는 방법 즉 행위이지, 그 자체가 곧바로 觀(지혜,통찰)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었듯, 止(집중)이란 행위로 觀(지혜,통찰)이라는 산냐(판단, 소위 있는 그대로 앎, 과보)가 발생하므로, 특히 선불교에서는 그냥 止(집중)만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길'이 곧 '진리'...이런 연결 구조는 범종교적입니다.

    대승불교는 기본적으로 삼매 전승이므로, 대승불교의 지관은 선정 영역에서의 앎(선정들 그 자체의 앎과 선정에서 사대의 알아차림등을 포함한 오온을 숙달함)을 의미하는 편입니다.

  • 작성자 25.06.07 06:19 새글

    지止는 관觀을 하기 위한 것이고, 관은 사실을 사실대로 알기 위함 '앎'의 방법이고, 그렇게 체득된 앎에 의거함을 지혜라고 한다.
    그러니
    止. 觀. 앎(깨달음). 지혜. 이 4가지는 함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작성자 25.06.07 06:25 새글

    [대승불교는 삼매전승]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오랜기간 깨달음의 길은 삼매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말씀이 갑자기 꽂힙니다.
    즉 오로지 자신만을 파악함으로써 일체를 알게됨에 도달하게 된다는 거지요.
    하지만 이 길은 실로 험난한 것 같습니다.
    저 또한 꽤 많은 날들을 삼매에 돌입이라도 해보고 싶어 止를 해봤지만 삼매는 커녕 니미타에 드는 것 조차 안되는데 이게 과연 내가 해낼 수 있는 '앎'의 길인가..하는 회의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지사인 거 같습니다.

  • 작성자 25.06.07 06:32 새글

    참으로 깨닫고는 싶고, 능력은 안되고..그러다보니 세상에 퍼져있는 이런저런 객관세계를 알아 나를 알고자하는
    욕망으로 바뀌어가고 있게 되었습니다.

    AI가 판단한 나.

  • 25.06.07 10:35 새글

    아닙니다, 아니고요.

    단어, 즉 언어는 그 의미가 문맥에 따라 결정되는데, 지와 관 같은 거는 전승마다 조금 다르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을 숙지하고 개별적 전승에서 어떤 변화를 줘서 사용하는가 검토를 해야 합니다.

    즉 별 다른 기준 없이(예로, 중국 천태종의 지관은 무엇인가등 기준 제시 없이) 지와 관 같은 거가 무엇인가를 물으면, 혹은 그 단어를 사용한다면, 가장 범용적인 뜻으로 그래서 구체적 기준에서 맞춰 변용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까진 어렵지 않죠?

    기본적으로요. 위에 적었듯, '지'는 행위 즉 업 곧 행온이구요, '관'은 통찰 즉 과보 곧 상온(산냐)입니다. 업이 있으면, 과보 즉 보가 따릅니다. 업보요.

    따라서 지가 있으면 관이 발생합니다. 관이 발생하면, 관을 조건으로 견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견은 또 행위 즉 업 곧 행온이죠?

    우리가 '수행'이라고 할 때, 지와 관을 같이 이야기하는데, 통상 지는 집중(고요함)의 개발이라고 관은 지혜(통찰)의 개발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관한다는 표현이 곧잘 쓰이는데요. 관은 정확히 말하면, 행위가 아니예요. 산냐 즉 판단이니까.

  • 25.06.07 10:57 새글

    '
    단어가 같으면 뜻이 같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안되요. 단어는 기본적 의미를 숙지한 상태에서, 그 단어가 여기서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새롭게 파악해야 합니다. 당연하죠?

    자, 어쨌든 행위가 아닌데, 관의 개발 내지는 관한다는 표현이 쓰이는 이유가 뭔가?

    지관으로 불교의 수행을 패러프레이징했을 때, 즉 불교의 수행을 지관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보께요.

    지라고 말하는 모든 행위'들'의 특성은 고요함이 특징이예요, 이 고요함이 무슨 의미냐? 법이 알려지는 상태라는 특성이라는 의미입니다. 행위들을 총칭해 지잖아. 즉 지 곧 집중에 어떠한 방향성을 주는가에 따라서 생기는 관 즉 통찰이 달라요.

    무상에 초점을 맞추는 지 즉 집중이라면, 무상의 관 즉 통찰이 생기고... 괴로움에 초점을 맞춘 지라면, 괴로움의 관이 생기고... 무아에 초점을 맞춘 지라면, 무아의 관이 생기는 거예요.

    무상 고 무아...이게 관 즉 통찰의 대표 유형들.

    그러니 관 즉 통찰의 개발이라는 표현도 등장하는 거라고.

    그런데 관 즉 통찰의 개발, 즉 통찰을 발생시키는 힘이 관에 있는게 아니야. 지에 있어요. 지를 조정하는 거라고. 과정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 25.06.07 11:50 새글

    .
    그러니까 관의 개발이라는게 지의 개발이라고... 다양한 지를 개발하여 다양한 관이 개발된다... 여기서 행위는 지 뿐이고...

    다양한 관이 왜 필요한가? 모든 지라는 행위의 특성이 법이 알려지는 상태이고, 개별적 지에 따라 개별적 법이 알려지는데 그 방향성을 다양하게 설정하여 알려진 법을 온전하게 알게 한다는 거예요. 보통 무상 고 무아 라는 법의 세가지 측면은 알도록 개발하라고 권유하죠. [경]에서 그래요.

    위에서, 지관이 불교수행의 다른 표현이라고 했잖아요? 패러프레이징...

    그런데 8정도에서 말이죠. 계 정 혜 3학에서. 정을 보면, 알아차림(념)과 삼매가 나오잖아요. 노력 즉 정진은 뭐 하나 알았다고 다 알은 거처럼 우쭐 대지 말고 계속 개발 즉 수행하라 곧 행위를 일으켜라는 거니까...

    지관을 불교수행이라고 할 때, 지에 8정도의 정념과 정정 그러니까 알아차림과 삼매를 총섭하는 개념일 거 아니예요? 그렇죠? 구조가 그렇잖아. 관을 개발한다는 거는, 관에 방점이 찍힌게 아니라 그 실체가 정진인 거고...

    우리가 이해를 하면, 기본 뜻을 가지고 이해를 해야 하는데... 8정도 따로고 지관 따로고 이런게 아니거든요. 어쨌든 하나만 알아도 돼.

  • 25.06.07 11:31 새글

    .
    우리가 아는 개념이 아주 많은데, 다 따로 놀아요. 이해를 안해서 그렇다니까 진짜... 자신이 생각한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자신은 생각을 안하고 있다니까... 스스로 생각한다고 착각하고 있다니까요.

    생각하는게 쉬우면, 8정도에서 정사유라고 따로 있겠어요?

    정사유가 뭐냐? 위에 제가 적은 내용을 기준으로 적자면, 정진(정정진)의 토대가 되는 사유야... 위에 적은 내용을 기준으로 하자면, 그거를 의미하는게 되는 거예요. 관의 개발... 관의 개발이 의미하는 것은, 관이라는 어떤 단일한 무엇 그 자체를 개발하는게 아니라, 여러 관을 발생시키게 하는 행위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 사유를 하는 사람은 글이 달라. 정말 달라요. 올라오는 거 보면, 현재 AI는 생각 즉 사유를 아직 못해요. 사람도 생각 못하는 사람 천지니까, 그게 모자라다는 뜻은 아니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라고... 어쨌든 AI는 사유 능력이 없어요. 고급 AI는 다를지 모르겠는데... 고급은 아직 본 적이 없어서...

    사유 즉 이해는, 전체적 모습에 빠그러지는게 없이 어떤 것으로 들어가도 온전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거...따로 따로 놀지 않고, 함께 빛나게 하는 거야.

  • 25.06.07 11:50 새글

    그게 화엄의 이해로 나아가는 거고...

    다시 지와 관...

    위에 적은 내용을 아래 가져오께요.

    <<
    지가 있으면 관이 발생합니다. 관이 발생하면, 관을 조건으로 견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견은 또 행위 즉 업 곧 행온이죠?
    >>

    그래서 우리가 '관견'이라는 말을 써요. 그 관견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수행에 따라 발생한) 관에 따라 본다는 거야. 이게 정견이예요.

    위에 적었듯, 견은 행위 즉 행온이므로, 상응한 과보가 따라요. 업보... 인과... 정견이 발생하면, 법이 소위 있는 그대로 "펼쳐지는(알려지는)" 세계를 거닌다 이거예요.

    수행의 패러프레이징이 8정도인데, 8정도도 따로 국밥이 아니거든...지관도 수행의 패러프레이징이니까, 지관이 8정도고...

    수행이라는게 뭐냐? 수행자 표상 획득이야. 수행이라는 업이 있으면, 과보가 따를 거 아니야. 수행자 표상이 과보거든...

    인과는, 업보는...지옥의 버러지들이든, 천상의 신들이든, 표상을 획득해 거니는 부처님이든, 정한 이치라고...표상은 그러한 이치로 성립해요.

    표상을 떠나면? 그런 것도 없죠... 하지만 표상을 일으키는 업이 있고, 그래서 표상이 있는 한, 일체는 평등해요. 평등하다고.

  • 25.06.07 12:10 새글

    .
    표상을 일으키는 업도 없고, 그래서 표상도 없다면? 평등하다 말할 거도 없는 겁니다. 굳이 말하자면, 더더욱 평등한 거예요.

    ===

    여담으로, 읽는 사람에 따라 기분 상할 수도 있고, 편안해질 수도 있는 말을 몇 자 적습니다.

    현실에서 다음 말을 곧잘 해요. 현실에서는 당연히 제가 불교 신자라는 거 다 알아요.

    <<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았으면 나름 선방한 거다.
    >>

    수행이라는게 별 거 아닙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그나마 사람으로만 살았다면 나름 수행 잘 한 겁니다.

    그나마 사람으로 사는게 뭡니까?

    자기만 특별 대우하지 않고, 나쁜 짓 안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특별 대우하지 않는 거,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그러니까 특별 대우하더라도, 자신을 특별 대우하는 줄 알면서 특별 대우하는 정도만 해도 사람으로 산 거예요.

    사람이 사람으로만 살아도 아래로는 가지 않아요. 이거 정말 쉬운 거 아니예요. 어려워요.

    한발 더 나아가, 사람이 사람의 특징이 극히 두드러지는 거를 하면 위로만 갑니다. 이거부터는 난이도가 폭증합니다.

    사람의 특징이 극히 두드러지는 거 대표가, 사유 즉 생각하는 겁니다.

  • 25.06.07 12:22 새글

    .
    사유 즉 생각하는 거는요. 파고들어야 합니다. 미친년 널뛰기 하듯, 산란하면, 절대 생각할 수 없습니다.

    파고드는 거? 이게 止(집중)의 특성입니다.

    사유하는 것만으로도 止(집중)가 개발된다구요. 止(집중)는, 사유를 이끌어낸다구요.

    그래서 사유를 할 수 있으면, 생각할 수 있으면, 위로만 가게 됩니다. 止(집중)가 개발되니까...

    책을 읽는다? 그것이 사유냐? 아니예요. 책을 읽고 이해해야 사유한 겁니다. 이해와 암기는 사뭇 달라요.

    그래서 사유, 생각하는 거를 폼나게 명상이라고도 해요. 자기 개발 방법이거든.

    파고들면 통달해요. 불교에서 그래요.

    이해나 사유, 생각하는 거... 이거는 파고들어야 되요. 물론 시험을 칠라고 하면, 여기 저기 닥치는 대로 암기해야 하지만, 우리가 시험칠 거도 아니고...

    파고든다는 거는, 골몰한다는 거고... 그게 止(집중)입니다. 골몰하는게 집중이고 사유를 일으켜요.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뭔가 엄청 폼나는 거 같은 거, 선정 같은 거... 그딴 거 그거는 밥 먹어서 똥 마려운 거랑 비슷한 거고... 밥 마이 먹으면 똥 마이 나오잖아. 그런 것일 뿐입니다.

    생각하며 사람으로 사는게 수행입니다.

  • 작성자 25.06.07 14:29 새글

    방문객님께서 모처럼 설명해주시니, 어떻게 가야할지 가는 방법과 가야할 목적지가 명확하게 보이네요.

    지다. 관이다. 견이다. 뭉뚱거려 하나로 이해했었는데 지와 관과 견이 업- 과보- 행위(업) 등으로 결국 연기의 흐름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네요.

    방문객님을 귀찮게 만드는건 항상 이득이 있다니까요 ^^

    止를 행하고 그에따라 관(산냐)이 되고 그래서 정견이 일어나는 이 루프를 외면하고 불자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25.06.07 22:10 새글

    제가 보기엔 '지.관.견'이 문제가 아니라 방문객님 말씀처럼 '사람답게'가 문제인 것 같네요..
    나는 과연 사람답게 살고 사유하고 있는가? ㅜㅜ

  • 05:33 새글

    모든 지라는 행위의 특성이 법이 알려지는 상태이고, 개별적 지에 따라 개별적 법이 알려지는데 그 방향성을 다양하게 설정하여 알려진 법을 온전하게 알게 한다는 거예요. 보통 무상 고 무아 라는 법의 세가지 측면은 알도록 개발하라고 권유하죠

    위 말씀과 관련해서요.

    인간의 직접적인 각각의 경험을 '현실'이라고 이름할 때, 현실 '그 자체는' 아무 말이 없잖아요.
    그래서
    소위 정견을 포함한 일체의 견해는 그 현실에 '대한' 판단으로 보입니다.

    불교에서는 삼특상이란 결론(견해)를 먼저 제시하고, 행자에게 지 등의 수단을 통해서 그 결론이 참임을 확증하라고 하죠.

  • 05:51 새글

    어제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멍 때리고(=다소 건조하게) 보다가, 문득 행복이라는 심상(산냐와 수온)이 일어나 주관경험세계에 색채를 입히려는 과정을 봤는데요.

    보통 '아, 이것은 행복한 모습인데, 내가 산란해서? 딴짓을 해서? 행복임을 놓쳤었구나' 라는 피드백을 하기도 하는데요 (자기계발서 감성..)

    그 발생 프로세스를 보면서 정반대의 파악이 있었어요.
    '아이들이 노는 모습(=현실) 그 자체가 나의 인식주관에 다이렉트로 주입하는 인풋은 없는데, 일정한 힘을 투사할 수 있는 나의 기존 관념이, '현실' 위에 혹은 '현실' 속으로 그 자신을 관철시키려는 움직임이 발생했구나'

    만약 삼특상을 숙고하던 행자라면, 동일한 현실에서
    삼특상을 봤을?테고(=삼특상이란 관념을 현실에 관철시킴)

    삼라만상 모든 피조물이 신의 은총임을 숙고하던 행자라면, 신의 은총을 봤겠죠(=신의 은총이란 관념을
    현실에 관철시킴)

    이 관념의 강도에 따라, 특정 수온 등 신체적 반응도 동반될 수 있는거구요.(몸 역시 '현실'의 구성요소니깐요)

  • 06:05 새글

    궁금한 것은..
    (제가 초점을 완전 잘못 잡은 건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래도 궁금하니깐 질문..)

    삼특상이나 신의 은총 혹은 다른 어떤 견해들이,
    현실 그 자체가 행자에게 발광? 투사?하는
    그런 직접적 산물이 아니라,
    누군가가 '파악한' 관념이고
    ㅡ 이 전제가 맞다면

    다시금, 행자는 (스스로 그렇다고 판단했든, 외부의
    권위를 수용했든) 현실을 '보며(관찰, 지, 등등)' 그 관념이 사실?임을 확증하고..

    이 순환이 진행될건데요.

    위에서 언급했듯이..행자가 [나는 현실에서 삼특상을 본다] 라는 인상을 갖게 되는 경험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나는 현실에서 삼특상을 관철시킨다]인 것 같아요.
    (현실은 아무 말이 없으니깐여)

  • 06:20 새글

    ㅡ만약 여기까지의 전개에 큰 무리가 없다면..
    (진짜 질문..)

    삼특상이나 신의 은총이나.. 관념의 위상인 점에서 평등하고
    그 관념이 관철된 행자의 주관세계가, 그 관념이 실현된? 일종의 이데아라는 위상에서 평등하다면

    삼특상만이 진리라는 선언은
    어폐가 있지 안을까요?


    "모든 관념과, 그의 투사로서의 모든 경험현실
    양자 모두 조건지어진 것으로서 평등하다. 끝.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보입니다만,

    소위 불교는
    '고성제는 진리이고,
    현실이 행복(은총)이라는 주장은 사견이다'
    로 나아가니깐요.

    ㅡㅡㅡㅡ

    깊이 사고하는 자가 아니라서.. 질문의 전제나 전개 자체에 빵꾸가 있다면, 지도편달 세이경청하겠슴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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