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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강화도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
▲강화도 해병대 총기사고 현장검증이
실시된 2011년 7월 19일 휠체어에 앉은
범인 김 상병이 생활관(내무반)에서 조사
를 마친 뒤 수사관들과 이동하고 있다.
점심시간을 앞둔 4일 오전 11시 44분,
강화군 길상면 선두 4리에 있는 모 해병
부대. 해병대 김모(19) 상병이 생활관
(내무반)에서 돌연 K-2 소총을 꺼내 들어
난사(亂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이승훈(25) 하사와 이승렬(20) 상병,
박치헌(21)상병,권승혁(20) 이병이
쓰러졌다.
이때 총소리를 듣고 생활관 입구 쪽으로
달려간 권혁(19) 이병은 김 상병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발포로 달아오른 총신(銃
身)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이 상태로
권 이병은 김 상병을 내무반 밖으로 밀쳐
냈고, 안에서 문을 잠갔다. 오른쪽 허벅
지 안쪽과 바깥쪽에 2발의 총알을 맞았
지만, 굴하지 않았다. 목숨을 건 권 이병
의 이 행동으로 당시 내무반에 있던 10
여명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권 이병에게 저지당한 김 상병은 생활관
근처 격실로 갔다. 그는 이곳에서 수류탄
을 터뜨려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
쳤다.
해병대 사령부 관계자는 “김 상병은 이날
오전 10시쯤 낮 경계 근무자가 교대할 때
소총을 보관하는 상황실에서 소총과 탄
약을 훔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총기 및 실탄, 수류탄 관리 허점이 확인된
것이다.
해병대 총기 사건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
과, 김 상병의 해안 소초에서 구타와 가혹
행위, ‘기수열외’(해병대식 집단따돌림)
등 여러 건의 병영 부조리 사례를 적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해병대 사령부 보통군사법원 심판
부는 13일 김모(20) 상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또 김 상병과 함께 범행을 공
모하고 상관 살해를 방조한 혐의로 기소
된 정모(21) 이병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2015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소년, 호날두 지원 등에 힘입어 포르투갈 유소년팀 입단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소년이 축구선수의 꿈을 이뤘다. 여섯 살 때 쓰나미에 휩쓸린 마르투니스는 실종 21일 만에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돼 화제가 됐다. 당시 그는 포르투갈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11년이 지나 그가 포르투갈 프로축구팀 스포르팅 리스본의 유소년클럽에 입단한 것이다.
포르투갈 유소년팀에 입단한 쓰나미 생존 소년 마르투니스. 위는 2013년 환경 캠페인을 위해 인도네시아를 찾은 호날두와 재회한 모습. 아래는 2004년 구조 당시 포르투갈 유니폼을 입은 모습.
인도네시아 반다 아체에 살던 그는 축구하다가 쓰나미를 맞았다. 어머니와 두 형제를 잃었다. 생라면을 먹고 웅덩이 물을 마시며 3주를 버티다가 취재 기자에게 발견됐다. 그는 구조 직후 “쓰나미는 두렵지 않았다. 나중에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를 병원으로 데려간 ‘세이브 더 칠드런’ 구조대원은 “하루만 늦었어도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포르투갈 유니폼을 입고 역경을 이겨낸 아이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포르투갈축구협회가 마르투니스의 집을 다시 짓도록 4만유로(약 5000만원)를 지원했다. 소년의 영웅이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인도네시아까지 가서 직접 만나 교육비를 대주기로 약속했다. 당시 호날두는 “우리는 용기를 보여준 그를 존경해야 한다. 마르투니스는 특별한 아이”라고 했다. 스포르팅 리스본 유소년클럽은 호날두가 축구를 시작한 팀이다.
마르투니스는 호날두의 지원으로 고향 반다 아체에서 축구학교를 다녔다. 지난해 인도네시아 유소년 대표팀 선발에서 탈락하는 좌절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이달 초 포르투갈 명문 구단의 유소년팀에 합류하며 꿈에 한 발짝 다가가게 됐다. 그는 “행복하다. 포르투갈 프로리그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2015년 44년 5개월 최장기간 토크쇼
진행..일본 만담가 가쓰라 기네스북 올라
▶2005년 우주탐사선 딥 임팩트호 발사체, 혜성 ‘템펠1’과 충돌 실험 성공
무게 372㎏의 세탁기만한 충돌체가 24시간 동안 시속 3만7000㎞로 80만㎞를 날아가 폭 4.8㎞ 길이 14.5㎞의 혜성에 정확히 꽂혔다. 충돌체가 혜성에 충돌하는 순간, 밝은 섬광이 혜성의 아랫부분을 뒤덮었고, 지구에서 관측된 혜성은 충돌 전에 비해 두 배나 밝아졌다.
지난 1월 13일 미국 플로리다의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에서 발사된 미국의 혜성 탐사선 딥 임팩트호가 발사한 충돌체가 4일 오후 2시52분(한국시각) 혜성 ‘템펠1’과 충돌했다고 미 항공우주국(NASA)이 밝혔다.
지난 98년 지구와 혜성의 충돌로 인한 재난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 ‘딥 임팩트’의 이름을 딴 이번 혜성탐사선은 지구를 떠난 지 172일 11시간5분 동안 4억3100만㎞를 날아가 혜성에 충돌했다. 사람이 발사한 인공 충돌체를 우주 공간에서 혜성 표면과 충돌하게 한 것은 인류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4일 오후 2시52분. 지름 65㎝ 무게 372㎏의 충돌체가 ‘템펠1’과 충돌하는 순간, 조용한 수면 위에 물보라가 쳐오르듯 하얀 섬광이 새까만 우주공간 밖으로 환하게 퍼져 나갔다. 좁게는 자동차 크기에서 넓게는 축구장 크기만한 흔적을 남기게 될 충돌로 혜성 아랫부분은 밝게 빛났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 태양의 일부가 삐죽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인 것도 잠시, 그 빛은 사방으로 밝게 확 퍼져 나갔다. 충돌과 함께 튀어 나온 혜성의 먼지와 표면 얼음층이 폭발 당시 발생한 불꽃과 태양광에 반사되는 모습이었다.
과학자들은 이번 충돌로 혜성의 밝기가 16~40배나 밝아져 9등급이던 혜성의 밝기가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6등급까지 밝아질 것으로 예측해왔다. 충돌 직전과 직후 영상을 비교해보면 ‘템펠1’ 혜성이 엄청난 빛을 내며 방대한 양의 먼지와 혜성 물질을 분출시켰음을 알 수 있다.
딥 임팩트에서 발사된 충돌체는 충돌순간까지 대략 시속 3만7000㎞의 속도를 유지했다. 딥 임팩트는 지구에서 발사될 때 얻은 힘으로 우주공간을 계속 항해했으며, 분리된 충돌체도 그 힘으로 혜성으로 돌진했다. 무게 372㎏인 충돌체가 시속 3만7000㎞로 충돌하는 순간의 파괴력은 TNT 5t이 폭발할 때의 위력과 맞먹는다. 충돌이 일어나자 나사 관계자들은 “기획 당시 예상에서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며 “미리 만들어 놓은 예상 애니메이션과도 일치한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1999년부터 추진된 이번 프로젝트에는 NASA의 제트추진연구소와 메릴랜드대 등의 연구진 250여명이 참여했고 모두 3억3000만달러(3300억원)의 막대한 예산이 들어갔다.
▶2004년 한국 지휘자 정명훈-일본
나루히토 왕세자, ‘우정의 가교’ 음악회서
공동 연주
한국의 음악인 정명훈(鄭明勳)씨와 일본의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한 무대에서 함께 연주했다. 7월 4일 오후 6시30분 일본 도쿄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 대전시관에서 열린 ‘일한(日韓)우호 특별기념 음악회’가 무대다.
정명훈씨는 피아노, 나루히토 왕세자는 비올라를 연주했다. 세계적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도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인 아라이 에이지(바이올린)가 함께 참여, 넷이서 모차르트 ‘피아노 사중주 제1번’을 연주했다.
이 음악회는 2002년 정명훈씨가 제안해 성사됐다. 2000년부터 도쿄필하모닉 특별고문을 맡아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정명훈씨는 2002년 도쿄에서 오페라 ‘나비부인’을 지휘할 때 관람하러 온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함께 연주할 기회를 갖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2년 후 일본민예관측이 조선미술에 심취했던 예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를 기려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조공예와의 만남 90주년 특별전’을 기획하자 때맞춰 정명훈씨측이 나루히토 왕세자측에 2년 전에 제안한 대로 함께 연주할 것을 요청해 성사된 것이다. 이 특별음악회는 일본민예관의 운영기금을 마련하는 자선음악회로 열렸다.
영국 찰스 왕세자가 첼로를 취미로 연주하는 것처럼 악기 하나쯤 취미삼아 익히는 왕실의 전통대로, 일본 나루히토 왕세자는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도쿄 가쿠슈인(學習院)대학 문학부 사학과 재학 중에도 대학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수석을 지냈고 지난 해에도 이 오케스트라에 참여, 드보르자크 교향곡을 연주했다. 지금도 그는 도쿄의 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재단이사장을 맡아 후원하는 등 음악에 애정을 쏟고 있다.
정씨의 매니지먼트사인 CMI의 정명근 사장은 “나루히토 왕세자는 한국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야나기씨의 한국 전통공예 수집품 특별전에서 자신이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인과 함께 연주하면 양국 우호의 정신을 더 잘 살릴 수 있다며 흔쾌히 초청에 응했다”고 말했다.
종교철학자 겸 예술평론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1914년 조선 땅을 처음 밟아 조선백자와 민예품 등에 심취, 1924년 경복궁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웠다. 이번 특별음악회가 열린 일본민예관도 야나기씨가 1936년 개관했다.
이날 음악회서 정명훈씨와 나루히토 왕세자의 연주는 후반부에 있었다. 전반부에선 정명훈씨와 미샤 마이스키 등이 독주와 이중주를 펼쳤다. 이날 음악회는 한국과 일본측 인사 100여명이 초대받았다.
▶ 2004년 '시베리아의 요정'
17세 마리아 샤라포바 윔블던 우승
▶2002년 중국 서기동수(西氣東輸)
대장정 착공
중국의 서기동수(西氣東輸 ·서부의 천연가스를 동부로 보내는 것) 사업이 2002년 7월 4일 전면 착공했다. 중국 서부 타림(塔里木)분지에서 동쪽 끝 상하이(上海)까지 장장 4천여km에 가스 파이프 라인을 건설하는 170억달러짜리 초대형 공사였다. 이날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 자회사인 중국석유공사와 더치 셸이 주도하는 국제 컨소시엄이 사업 기본협정을 체결했고,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국회의사당)에서 착공 기념식이 성대히 열렸다.
서부대개발의 핵심 사업 중 하나인 `서기동수`는 서부 천연가스 개발과 동부의 에너지난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노린 것이다. 서부의 타림·차이다무(柴達木)·산간(陝甘)·촨위(川兪) 분지의 대형 가스전(田)이 개발되고 가스 파이프 공사가 완공되면, 중국의 천연가스 생산량은 50%까지 증가한다. 2005년 완공 이후 매년 120억㎥의 천연가스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려갈 예정이다. 지름 1m의 가스 파이프는 도중에 황하강을 3차례 넘나들며 장강과 화이허(淮河)강 등 대형 하천을 대부분 통과한다.
▶2001년 프랑스 문화재국,
3만년 전 동굴암각화 발견 발표
기원전 약 2만8000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사시대의 암각화가 프랑스 서부 도르도뉴 지방의 퀴삭 동굴에서 발견됐다고 아키텐 지역 문화재국이 4일 발표했다.
여성의 모습이 묘사된 동굴암각화.
동굴 내 암벽에는 수m에 걸쳐 말, 들소, 코뿔소 등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여성의 모습 등 사람을 표현한 그림도 다수 새겨져 있다.
문화재국의 수석 고고학자인 다니 바로는 “이 암각화는 기원전 1만6000년쯤에 그려진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 동굴 벽화만큼 높은 고고학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동굴 내에서는 사람의 뼈가 묻힌 무덤도 7곳 발견됐다. 이 동굴은 작년 9월 아마추어 탐험가에 의해 발견됐으나, 4일 처음 발표됐다.
▶2000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국무회의에서 의결
▶2000년 국어 로마자 표기법
16년 만에 개정
▶2000년 조덕송
조선일보 전 논설주간 별세
▶1998년 러시아 정부, 조성우 주러
참사관 추방, 한국정부 보복조치로
올레그 주한 참사관 맞추방
▶1998년 일본, 무인 화성탐사선
`플래닛-b` 발사
▶1997년 미국 패스파인더호
화성탐사 성공
NASA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왼쪽)가
화성에 착륙하는 개념도. 오른쪽이 원격
조정에 의해 지구밖의 행성을 누비는
탐사 로봇 소저너.
▶1996년 김수한 국회의장 피선
▶1996년 아랍계로 위장한 남파간첩
정수일(무하마드 깐수) 구속
국가안전기획부는 그동안 필리핀계 아랍인으로 위장-행세했던 남파간첩 정수일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96년 7월 4일 구속했다. 안기부는 정수일이 무하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필리핀인, 중국인, 아랍인 등으로 3차례 국적변조 과정을 통해 교묘히 신분을 위장 10여년간 국내에서 암약해온 남파간첩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무하마드 깐수로 12년간 남파간첩으로 암약해온 고정간첩 정수일씨.
정수일은 북한에서 출생한 한국인이지만 모습이 중동인과 흡사한데다 콧수염을 길렀고 아랍어과 영어,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알아 사람들이 그의 출신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난 1984년 4월 “말레이시아 대학교수로 근무하다 자료수집차 방문했다”며 입국,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단국대 사학과 박사과정을 밟아 1988년 학위를 취득한 뒤 단국대 사학과 교수와 외국어대 대학원 아랍어과 강사로 활동해 왔다.
그는 단국대에서 사학과 교수로 ‘동서교류사’를 강의하면서 1992년 6월엔 ‘신라-서역 교류사’를 한국어로 펴냈고 1995년 7월엔 ‘세계속의 동과서’ 등 고대 한국과 아랍과의 관계에 대한 책을 내 이 분야의 권위자로 알려지게 됐고, 신문기고와 방송 출연이 잦아지면서 일약 유명인사로 부각됐다.
그러나 이처럼 감쪽같은 그의 위장술은 7월 3일 서울 중구 소공동 p호텔에서 ‘한-미 국방부국장급 미사일 회담’에 관한 군사관련 정보를 북한 공작원에게 팩시밀리로 보내다 적발되면서 전모가 드러나게 됐다. 대법원은 1심과 2심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된 뒤 대법원으로 환송된 정수일 피고에게 1997년 12월 26일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그는 복역 중이던 2000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대전교도소에서 석방돼 저술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1989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한국과학기술대학(KIT) 통합
▶1987년 프랑스 법정, ‘리용의 백정’
클라우스 바비에게 종신형 선고
제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44년에 프랑스 남부 리용에서 나치스의 게슈타포(나치스 독일의 비밀경찰) 대장으로 있으면서 유태인 7천5백여명과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 4천3백여명을 살해한 혐의로 프랑스 법정에 회부된 ‘리용의 백정’ 클라우스 바비에게 1987년 7월 4일 법정최고형인 종신금고형이 선고됐다.
게슈타포 대장 클라우스 바비(가운데)가 프랑스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수갑을 찬 채로 법정을 나오고 있다.
바비는 독일 패전하자 남미 볼리비아로 도망가 숨어 살았으나 나치전범 추적자 비트 클라스펠트가 10여 년에 걸친 추적 끝에 1971년 소재지가 드러나고 말았다.
프랑스 정부는 10여년에 걸쳐 볼리비아와 송환협상을 벌인 끝에 1983년 미테랑 대통령 시절에 바비를 프랑스로 데려왔다. 이같이 송환이 늦어진 것은 2차대전 종전후 미육군방첩대(CIA)가 바비를 체포해 정보원으로 이용한 뒤 볼리비아로 빼돌리는 등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바비는 2차대전때 자신이 학살을 자행했던 리용감옥에 수감됐으며 이날 선고된 종신금고형으로 복역중이다가 1991년 감옥에서 사망,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982년 멕시코 새대통령에
미겔 데 라 마드리드 당선
▶1981년 한국, 소련에 직접교역 제의
▶1981년 전두환대통령,
프렘 태국수상 정상회담
▶1981년 쿠바 아바나 국제의회연맹
(IPU) 총회에 한국 초청
▶1980년 첫 국산 남제주
화력발전소 준공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자주-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남북간의 긴장완화와 통일문제에 관해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발표한 성명으로 미국과 중공의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종래의 대미의존적인 안보정책에서 탈피하고자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한 결실이 7.4남북공동성명이다.
성명이 나오기까지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이 각기 상대방을 방문(서울방문시에는 박성철 제2부수상이 대신 방문)해 회담을 진행했다.
그 내용은 1.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적 해결 2.돌발적 군사사고 방지, 상호간의 신속한 업무처리를 위한 서울과 평양간의 상설 직통전화 가설 3.남북적십자회담에 대한 적극 협조 4.상대방에 대한 중상비방, 무장도발 포기 5.남북간 다방면의 교류 6.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이다.
▶1952년 발췌개헌안 통과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을 목적으로 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부결되고 오히려 그와 대립하고 있던 국회가 1952년 4월 내각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별도로 제출하면서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이 시작됐다. 국회 내 교섭단체 ‘신라회’가 혼란한 틈을 타 제3의 개헌안을 제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발췌개헌안이 임시의사당의 야간국회
에서 기립표결로 통과됐다
이승만과 국회의 개헌안을 적당히 버무려 발췌한 개헌안이라 해서 ‘발췌개헌안’으로 불린 이 개헌안은 국회안을 일부 수용했다지만 야당의원들에게 명분을 주기 위한 치장에 불과할 뿐 직선제와 양원제를 그대로 살린 사실상 이승만의 개헌안이나 다름없었다.
이승만은 개헌안 통과를 위해 다양한 카드를 동원했다. 구속된 야당의원 10명을 석방해 협조를 유도했는가 하면 경찰들을 의원들의 자택으로 보내 참석을 종용했다.
7월 4일 밤, 의사당의 문이 봉쇄되고 군경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발췌개헌안이 기립표결로 통과됐다. 163명이 찬성하고 3명이 기권했다. 이로써 극도의 불안과 긴장을 조성했던 정치파동도 일단락됐지만 이승만에게는 재선과 장기집권의 길이 열렸다.
▶1950년 미국군과 북한군,
오산서 첫 접전
▶1946년 필리핀, 미국으로부터 독립
1946년 7월 4일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이 독립했다. 스페인의 식민지배기간까지 포함하면 425년 만이었다.
필리핀 초대 대통령 마누엘 록사스.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어 마누엘 록사스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대통령 취임식은 비가 오는 가운데 진행됐다. 취임식에 참석한 수십만 군중 앞에 선 록사스 대통령이 `필리핀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식장에 게양된 성조기가 내려지고 그 자리에 필리핀공화국기인 `태양과 별의 기`가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게양됐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필리핀 제도를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미국은 필리핀을 영구적으로 식민지화 할 생각이 없고 다만 필리핀이 민주적 자치능력이 생길때까지만 지배하겠다고 했지만 이 기간이 36년간이나 지속됐다. 필리핀은 1934년 미 연방의회로부터 자치권을 승인받아 1935년에 발족한 필리핀 연방의 대통령에 케손을 선출한 바 있다.
▶1945년 미국 육군,
탄도요격미사일 개발 건의
▶1934년 퀴리 부인 사망
노벨상을 두차례나 수상한 바 있는 마리 퀴리가 1934년 7월 4일 사망했다. 사인은 라듐에 의한 중독이었다. 의사들은 일생동안 방사능을 과도하게 쪼인 그녀의 모든 생채기관들이 서서히 파괴돼 죽음에 이르렀다고 소견을 밝혔다.
퀴리는 186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출생했다. 1891년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조국을 떠나 파리의 소르본대학에 입학한 퀴리는 1893년 학사시험을 수석으로 패스하고 공업진흥회의 위촉으로 강철의 자기 특성을 연구하다 남편을 만났다. 방사능을 찾기 위한 마리의 연구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녀는 1896년 앙리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광(鑛)에서 발생하는 신비한 광선을 토대로 연구를 시작했다.
1898년 퀴리부부는 마침내 방사능을 방출하는 두개의 새로운 원소를 찾아냈다. 마리는 두고온 조국 폴란드를 위해 첫번째 원소 이름을 폴로늄이라고 짓고 다른 하나는 라듐이라고 불렀다. 퀴리는 1903년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방사능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남편이 사망한 뒤인 1911년에는 라듐의 발견으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라듐 발견한 폴란드 태생 과학자, 마리 퀴리
1995.4.20 마리 퀴리, 여성 최초로 팡테옹에 묻히다
1995년 4월 20일, 한 부부의 유해가 엄숙한 의식이 거행되는 가운데 프랑스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팡테옹은 프랑스의 국가적 위인들만이 묻힐 수 있는 국립 묘지다. 아내 마리 퀴리는 남편의 업적이 아니라 자신의 업적만으로 팡테옹에 묻힌 최초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볼테르,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등 남성들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한 바로 그곳에 여성이 묻혔다는 사실만은 아니다. 마리 퀴리는 이민자 출신의 과학자였다. 그리고 과학자 집단은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만 해도 남성들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인 배타적이고도 공고한 사회였다.
"언니가 먼저 파리로 유학 가. 내가 뒷바라지할게. 그 다음 나를 도와주면 되잖아"
마리 퀴리는 1867년 11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스크워도프스키 브와디스와프와 어머니 스크워도프스키 브로니스와바의 다섯 아이 중 막내(폴란드 이름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로 태어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러시아는 폴란드의 문화와 전통을 무시했고, 폴란드어로 수업하는 것까지 탄압했다. 폴란드인들에게는 참으로 어둡고 슬픈 시절이었다.
마리 퀴리의 부모는 교사였다. 어머니는 마리가 열 살 되던 해인 1878년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는 공립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당시 폴란드에서는 여성은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못했다. 마리는 언니와 다짐했다. 언니가 먼저 파리에 가서 공부를 하고, 그 사이에 자신은 가정교사를 하며 돈을 벌어 학업을 돕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런 다음 언니가 학업을 마치면, 이번에는 언니가 동생을 뒷바라지하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물론 허드렛일까지 해야 하는 힘든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생활비가 따로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는 언니에게 돈을 보낼 수 있었다.
실험실의 피에르 퀴리(가운데)와 마리 퀴리(오른쪽)
마리 퀴리는 소르본 대학 교수이던 남편이 숨진 후 그의 교수직을 이어받음으로써 이 대학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됐다.
1891년, 드디어 마리는 파리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남학생은 9000명 정도나 되었지만 여학생이 200명 정도인 그곳 소르본 대학에서 마리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그것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받았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먹을 것조차 제대로 못 먹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였다. 원래는 학위를 받은 후 아버지가 계신 조국 폴란드로 돌아오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조국의 상황이 너무 암울했다. 그래서 프랑스에 남기로 했다.
1903년 퀴리의 노벨상 수상 연설 "라듐이 범죄자들 손에 들어가면 위험물질이 됩니다"
마리는 대학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물질의 결정을 연구하는 피에르라는 과학자였다. 두 사람은 1895년에 결혼했다. 결혼하기 전 마리가 피에르에게 보낸 편지 중 한 통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우리 두 사람이 마음 속에 같은 꿈을 살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이겠지요. 당신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가 인류를 생각하고 과학을 사랑하는 꿈 말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한 해인 1895년은 독일의 과학자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해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프랑스의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이 포함된 광석의 특이한 성질, 즉 인광(燐光) 방출 현상을 발견했다. 이 두 가지 발견에 자극을 받은 마리는 그런 특이한 성질에 관해 연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남편 피에르의 도움을 받아가며 우라늄의 성질을 연구하고 실험하던 중, 마리는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빛을 방출하는 원소를 발견했다. 마리는 이 새로운 원소에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란 이름을 붙였다. 1898년 7월, 플로늄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마리는 ‘방사능’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강력한 방사능을 방출하는 새로운 원소를 또 발견하고, 그것에 라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순수한 라듐을 분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1911년 마리 퀴리에게 수여된 노벨 화학상 원본
순수한 라듐을 분리하는 일은 엄청나게 고된 일이었다. 피치블렌드란 광물 몇 톤을 화학적으로 정제해야 했다. 부부는 비가 새는 헛간을 실험실 삼아 밤낮없이 열심히 연구했다. 그리고 1902년 4월 20일, 마침내 순수한 라듐 0.1그램을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공로를 인정 받아 이듬해인 1903년 부부는 앙리 베크렐과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피에르 퀴리는 노벨상 수상 기념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라듐은 범죄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캐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인류는 성숙한가, 아니면 오히려 해로운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남편이 사고로 숨진 후 다른 과학자와 불륜 관계라는 소문으로 자살까지 시도
1906년 4월 19일, 마리 퀴리는 남편을 잃었다. 피에르가 마차에 깔려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마리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 젖어 ‘서글프고 끔찍한 나날’을 보냈다. 살아 생전 남편이 했던 “어쨌든 계속해나가야만 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다시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마리는 남편이 맡았던 소르본 대학의 자리를 이어 받았다.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교수가 된 것이다.
구 소련에서 1987년 발행한 마리 퀴리 기념 우표(위)
퀴리의 조국 폴란드에서 그녀를 기려 유통되고 있는 지폐(아래)
1911년 1월, 마리 퀴리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 후보가 되었지만 두 표 차이로 떨어졌다. 여성인데다 폴란드 이주민이라는 출신 배경에 과학계 인사들의 보수성이 더해진 결과였다. 그리고 같은 해 마리 퀴리가 폴 랑주뱅이라는 과학자와 불륜 관계라는 기사가 언론에 실렸다. 이 기사의 영향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필요 이상의 엄청난 비난이 마리에게 퍼부어졌다. 심지어는 “프랑스 여인의 남편을 빼앗아간 외국X”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이 일들로 마리는 건강까지 나빠졌다. 자살까지도 시도했지만, 마리에게는 ’계속 해나가야 할’ 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같은 해 12월, 노벨 화학상을 받은 마리는 1914년에 라듐 연구소를 열었다. 하지만 그 해 8월 1차 세계 대전 때문에 연구 계획은 어긋났다. 젊은 남성 연구자들이 모두 군에 소집된 것이다. 마리도 X선 장치를 실은 구급차를 마련해 전쟁터로 나섰다. 딸 이렌도 동참해 장비 다루는 일을 맡았다.
전쟁이 끝난 후, 마리 퀴리는 직접적인 연구보다는 연구소의 재원을 마련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마리는 당시 1그램당 10만 달러나 되던 라듐 구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으로 모금 활동을 떠나기도 했다. 연구소에는 1그램의 라듐 밖에는 없었다. 한 여기자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마리의 대답은 간단했다. “실험실에서 쓸 라듐 1그램이에요!” 마리는 50만 달러가 넘는 기금을 모아 라듐을 더 구입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퀴리"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라듐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악성 빈혈이나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했다. 마리의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방사선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결과였다. 그리고 1934년 7월 4일, 마리는 세상을 떴다. 아인슈타인이 “유명한 사람들 중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낸 폴란드 출신 유대계 프랑스인 여성 과학자의 사인은 백혈병이었다. 동료 물리학자인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과학 저널 <네이처>에서 마리 퀴리를 이렇게 애도했다. “퀴리 부인은……과학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우리 시대 최고의 여성 연구자로 인정받았다……라듐의 발견과 분리는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라듐은)……일반적으로 원자의 내부 구조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늘리는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더욱이 라듐은……암을 치료하는 데 뛰어난 효능이 있음이 증명되었다……과학적 재능뿐 아니라 순수한 성격과 개성을 지닌 그녀를 존경하는 전세계의 많은 동료들은 지식의 성장과 과학적 발견을 통해 인류 복지에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의 때 이른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하지만 마리 퀴리 자신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 적이 있었다. “전 폴란드에서 태어났어요. 피에르 퀴리와 결혼했고, 두 딸을 두었지요. 연구는 프랑스에서 했어요.”
▶1925년 을축(乙丑)대홍수.
사망 6백70명
1925년 7월 4일부터 `을축년 대홍수`라 일컫는 홍수가 시작됐다. 이날부터 9월까지 네차례에 걸쳐 전국을 휩쓸어 6백70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재산피해는 가옥침수 및 붕괴 7만여호, 논밭 유실 약10만단보 등 1억3백만원을 기록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서울이었다. 1차 (7월9~12일) 와 2차 (7월15~19일) 두 차례 9일간에 걸쳐 서울에 내린 강우량은 무려 7백48.9㎜였다. 한강 수위는 뚝섬 13.59m, 인도교 11.66m, 구(舊)용산 12.74m로 사상최고를 기록했다. 서울은 온통 물바다였고 영등포와 용산은 한강 제방이 유실돼 3만여정보가 진흙밭이 됐다. 용산 철도관사들은 1층 천장까지 물이 들어찼으며, 용산역도 침수됐다. 뚝섬은 거의 모든 집들이 지붕까지 침수됐다. 청량리에선 역(驛)으로부터 용두교까지 나룻배로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진풍경을 빚기도 했다.
▶1918년 소련,
소비에트공화국 헌법 채택
▶1916년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1910년 제2차 러일협약 조인
▶1900년 재즈 음악인
루이 암스트롱 출생
▶1872년 미국의 제30대 대통령
쿨리지 출생
▶1831년 제임스 먼로
미국 대통령 사망
▶1826년 미국 작곡가 포스터 출생
▶1826년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사망
▶1807년 이탈리아 통일운동가
주제페 가리발디 출생
▶1804년 `주홍글씨`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호손 출생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
원문제목The Scarlet Letter
발표연도1850년
원문언어영어
장르장편소설
작가 너대니얼 호손(나다니엘 호손)
좋은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주홍 글씨)]는 패러독스의 세계를 잘 보여 준다. 줄거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마녀 재판이 횡행하던 17세기 미국 보스턴의 청교도 마을에서 어떤 남자(조금 읽으면 곧 그 남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지지만)와 간통을 저질러 ‘간음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어긴 죄로 ‘간통(adultery)’을 뜻하는 알파벳 ‘A’를 평생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게 이야기의 전부지만, 뭔가 아쉽다면 그녀의 간통 상대인 딤스데일과 그녀의 전남편인 칠링워스 등 등장인물의 욕망이 서로 뒤엉키면서 복수와 도주의 이야기 곡선을 만든다고 덧붙일 수도 있겠다.
이런 이야기에 대한 상식적인 반응은 아마도 헤스터가 태어난 지 세 달밖에 되지 않은 젖먹이 펄을 안고 감옥에서 나오는 첫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감옥 앞에 모여든 여자들은 앞다투어 이 계집은 우리 모두를 망신시켰으니까 죽여 버려야 마땅하다는 둥, 아무리 가볍게 처벌한다 해도 이마빼기에 활활 불타는 낙인을 찍어 맛 좀 보여 줘야 한다는 둥 떠들어 댄다. 자기 남편을 유혹한 것도 아닌데, 이들이 이처럼 흥분하는 까닭은 ‘그래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성경이나 법령집에 분명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 과연 그럴까? 성경이나 법령집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기만 하면 정말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며, 만약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당장 때려죽여야만 하는 것일까? 그 대답은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각자 찾아야만 할 테지만, 소설 곳곳에서 우리는 암시를 받을 수 있다.
헤스터의 상상력은 기묘하고도 고독한 삶의 고통 때문에 조금 달라졌고, 만약 그녀의 도덕과 지성의 바탕이 좀 더 섬세했더라면 아마 더욱더 달라졌을 것이다. 외형적으로만 인연을 맺고 있는 이 좁은 세계를 외로운 발걸음으로 오갈 때 이따금씩 헤스터는 주홍 글자 덕분에 새로운 감각을 부여받았다고 느끼거나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것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공상치고는 뿌리치기 힘들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가슴속에 숨어 있는 죄를 공감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주홍 글자 덕분에 헤스터가 부여받은 새로운 감각이란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죄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다. [주홍 글자]에는 이러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한 명 더 등장하는데, 바로 히빈스 노파다. 히빈스 노파는 치안 판사와 사람들의 행렬을 이끌고 위엄 있고 거룩한 표정으로 교회를 향해 가는 딤스데일 목사가 숲 속에서 저지른 죄를 똑똑히 보고 있다. 히빈스 노파의 옆에서 자기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헤스터는 당연히 그 죄를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뭘까? 히빈스 노파는 마녀로 처형당하고, 헤스터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슬프고 어려운 일을 모두 가져와 몸소 크나큰 시련을 겪은 그녀에게 조언을 구하는 등 성숙한 여성으로 여생을 마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그 이유는 자신의 죄를 꿰뚫어 보는 두 여자에 대한 딤스데일 목사의 반응에서 짐작할 수 있다. 히빈스 노파가 숲에 같이 가자고 말할 때, 딤스데일 목사는 “제 양심과 성격을 걸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부인의 말씀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군요!”라고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헤스터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헤스터, 차라리 버젓이 가슴에 주홍 글자를 달고 있는 당신이 행복한 거요! 내 주홍 글자는 가슴속에서 남몰래 불타고 있소!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거요. 지난 7년 동안 세상을 속이느라고 괴로워하던 끝에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주는 사람의 눈을 바라본다는 게 얼마나 마음의 위안이 되는지 당신은 잘 모를 거요!”
그의 말과 달리 그의 주홍 글자를 보는 사람은 헤스터뿐만이 아니다. 칠링워스도 있다. 그는 피하려야 피할 길이 없는 사람이다. 히빈스 노파와 헤스터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한다. 만약 칠링워스가 오래전에 바다에 빠져 죽었고, 헤스터와 펄마저 감옥에서 죽었다면, 그 후에도 딤스데일 목사는 세상을 속이느라 괴로워했을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이미 세상은 속고 있으니까 속일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에게나 히빈스 노파에게 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뗐을 것이다. 그럼에도 히빈스 노파는 그 죄를 다 안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그러니 그녀가 마녀로 몰려서 죽는 것도 이상하지만은 않다.
여기에 이르면 세 번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죄라는 건 도대체 뭘까? 어떤 행동이 죄라는 걸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건 죄가 되고, 아무도 모른다면 죄가 되지 않는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어떨까? 모든 사람이 그를 죄인이라고 하고, 경전과 법전에도 죄인이라고 나와 있다면 그는 죄인이 되는 것일까? 그럼에도 그 사람이 자신은 무구하다고 믿는다면 이 사람은 죄인일까 아닐까?
삶의 해답을 찾는 사람들에게 힌트를 하나 주자면, 확실한 답은 언제라도 정답이 아니다. 정답은 늘 모호하다. 역시 또 다른 패러독스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까지 내가 읽은 고전들은 우리의 인생이 곧 패러독스라고 말하는데.
줄거리
17세기 미국 보스턴. 순수하고 신성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 청교도 마을에서 ‘간음하지 말라.’라는 일곱 번째 십계명을 어긴 죄인으로, 헤스터는 ‘간통(adultery)’을 상징하는 글자 ‘A’를 평생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사람들의 경멸에도 죄악의 징표인 ‘A’를 주홍빛 천으로 만들어 그 둘레에 금실로 화려하게 수를 놓아 당당하게 달고 다니는 헤스터와는 달리, 그녀의 간통 상대인 딤스데일 목사는 자신의 죄를 차마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나날이 쇠약해져만 간다. 한편 뒤늦게 미국에 도착한 헤스터의 전남편 칠링워스는 우연히 목사의 비밀을 알아차리고,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의 의사직을 이용해 병약한 목사의 곁에 머물며 복수할 기회를 엿본다. 결국 궁지에 몰린 헤스터와 딤스데일 목사는 마을에서 함께 도망갈 것을 결의하지만 최후의 순간, 헤스터와 펄을 앞에 두고 딤스데일 목사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며 숨을 거두고 만다. 한편 단 하나의 목적이었던 복수를 마친 칠링워스는 삶의 목적을 잃은 후 자신의 재산을 모두 펄 앞으로 남긴 채 죽고, 펄은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후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하여 행복한 삶을 누린다. 딤스데일 목사와의 사랑을 간직한 헤스터는 마을에 남아 여생을 보낸 후 목사의 곁에 묻힌다.
작가 소개
너대니얼 호손 (나다니엘 호손, Nathaniel Hawthorne, 1804.7.4 ~ 1864.5.19)
1804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태어났다. 메인 주 브런즈윅에 있는 보든칼리지에 입학하지만, 학업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작가로서의 길을 모색했다. 졸업 후, 고향 세일럼에서 12년 동안 ‘고독의 시대’를 보내며 여러 잡지에 단편소설을 기고하다가 1828년 첫 장편소설 [팬쇼(Fanshawe)]를 익명으로 출간했다. 1837년 발표한 첫 단편집 [두 번 들은 이야기(Twice-Told Tales)]에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에드거 앨런 포의 서평이 실리면서 비로소 작가로서 세상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소피아 피바디와 결혼하여 콩코드의 ‘옛 목사관’에 정착, 랠프 에머슨, 헨리 데이비드 소로, 마거릿 풀러, 엘러리 채닝등과 친교를 맺었으나 고독벽(孤獨癖)으로 인해 깊이 공명하는 바는 없었다. 경제적 불안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스턴 세관에서 검사관으로 일하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관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불만을 [주홍 글자]의 서문 격인 ‘세관’을 통해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1850년 대표작 [주홍 글자]를 발표,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당시 그와 친교를 맺고 있던 허먼 멜빌은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여 자신의 작품 [모비 딕]을 호손에게 헌정했다. 이후 [옛 목사관의 이끼], [일곱 박공의 집], [블라이드데일 로맨스] 등의 소설을 발표하면서 문학을 통해 인간의 영혼과 죄악 등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 노력했다. 1864년 여행 중 플리머스에서 사망했다.
▶ 1776년 미국, 독립선언
1776년 7월 4일 본국 영국과 갈등을 빚어온 북미 식민지 대표들이 본국에 대해 독립을 선언했다. 대표들은 필라델피아 식민정부 회의실에서 3차 대륙회의를 갖고 영국의 가혹한 지배에 반대해 식민지의 독립국임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미국 독립선언 당시의 상황을 그린 존 트럼블의 작품.
대표들은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일제히 환호하며 눈물을 흘렸다. 종교적 자유를 찾거나 정치적 박해를 피해, 혹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북미로 온 13개 식민지 대표들은 자신들만의 국가를 위해 영국과의 충돌도 감수한채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독립선언은 본국과 계속적으로 투쟁을 벌여온 식민지 주민들의 의지가 모아진 것이다.
미합중국의 탄생, 독립선언
게릴라 전에 초전을 패한 영국군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패배했다. 전쟁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베트남전의 결과를 보고 역사상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베트남의 게릴라들에게 패한 미국도 사실은 게릴라전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영국으로 독립하려는 미국 사람들은 독립전쟁 시기에 영국의 정규군을 상대로 종종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며 치고 빠지는 전술로 적의 주력을 묶어두거나, 가랑비에 옷젖는다는 식으로 출혈을 강요하였다. 영국은 이 당시 다른 나라들과의 경쟁을 위하여 해군에 비하여 부족한 육군을 증강하던 중이었다. 그런 군대가 제식훈련도 못 받고 남는 시간에 총질을 연습하던 식민지의 촌놈들하고 싸워서 결국은 지고 미국에서 물러난 것이다. 미국이 게릴라전으로 독립을 쟁취했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렉싱턴과 콩코드 주민들에게 영국군의 접근을 알린 폴 리비어(Paul Revere).
1775년 4월, 보스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사령관 토머스 게이지(Thomas Gage)는 보스턴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콩코드에 새뮤얼 애덤스와 존 핸콕을 따르는 반군이 무기고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게이지 장군은 자신의 심복인 프란시스 스미스 중령에게 700명의 정규군을 주어 무기고를 파괴하고 반영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애덤스와 핸콕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스미스의 부대가 보스턴 밖의 찰스 강을 건너자 이를 발견한 폴 리비어는 말을 타고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빨간 코트들이 온다(The Redcoats are coming)’라고 외쳤다. 영국군의 유니폼인 붉은 외투를 지칭한 말이다. 대부분의 인식과는 달리 폴 리비어는 홀로 밤을 달리며 영국군의 침공을 알렸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매사추세츠에서 유사시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던 수십명의 라이더(rider)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라이더들의 급박한 목소리와는 달리 영국군의 진격은 지루하였다. 라이더들의 외침에 총을 들고 나와 잠을 설치고 있던 렉싱턴 지역의 민병대원들은 영국군이 오지 않자 근처의 술집으로 들어가 맥주를 마시고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들이 서서히 기다림에 지쳐갈 새벽 4시경, 영국군이 마을 어귀에 다다랐다는 외침이 들려왔고 민병대원들은 서둘러 총을 들고 나갔다. 영국군이 렉싱턴에 다다랐을 때, 영국군 앞에서는 70명의 총든 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오와 열을 갖추어 선 것도 아니고 그냥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그러나 스미스의 부대는 이들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발포했고 민병대원들도 반격을 하였지만 널리 트린 평지에서 정규군을 마주보고 하는 정식 전투에서 영국군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많은 민병대원들이 쓰러지고 18명의 사상자가 났다. 민병대는 흩어졌고 영국군은 렉싱턴을 지나 콩코드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민병대는 사실 무작정 도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친구들이 영국군에게 총를 맞고 죽었다고 하며 싸우자고 하였고 이에 날이 밝자 주변에 살고 있던 4천명의 민병이 총을 들고 나온 상태였다.
영국군은 콩코드에 있는 여관에서 3문의 포와 소총 탄환 500파운드(약 220kg)을 발견하였다. 포대를 불태워 버리고 탄환은 강에 버렸다. 임무를 무사히 마친 영국군은 보스턴으로 회군을 시작하였지만 이들은 보스턴으로의 회군길이 그야말로 지옥도가 되리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영국군은 돌아가던 중 콩코드 근처의 노스브릿지(North Bridge)에서 400명 민병의 습격을 받아 14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후 대열을 바로 세우려는 장교들의 노력은 허사였고 영국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수천명의 민병들이 삼삼오오 돌담 뒤에서, 나무 뒤에서, 바위 뒤에서 숨어 있다가 영국군을 공격하였고 그때마다 피해는 늘어갔다. 엉망이 된 영국군 대열이 보스턴에 돌아왔을 때 영국군 73명이 전사하고, 174명이 중상을 입었다. 아울러 29명이 행방불명이었다. 매사추세츠의 민병들은 렉싱턴을 제외하고는 전면전으로 싸우지 않고 철저히 게릴라가 되어 영국군을 격퇴한 것이다. 호되게 당한 영국군은 보스턴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민병대는 조지 워싱턴의 지휘하에 보스턴을 포위했다. 마침내 대륙의회는 1775년 6월 14일에 각주의 민병대를 통합하여 일명 대륙군(Continental Army)의 창설을 선언하였고 조지 워싱턴을 총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83명이 독립시킨 뉴잉글랜드
매사추세츠에서의 활약으로 민병들이 보스턴을 포위하고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모셨지만 민병들은 자신들의 소총에 필요한 화약을 휴대한 것 외에는 화약과 기타 물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포위전에 필요한 대포 등의 대형화기도 없었다. 결국 민병들은 단순히 병력의 우세를 내세워 지리한 포위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은 이를 알고 인근의 벙커-힐에 주둔한 민병대를 공격하여 포위망을 뚫으려고 하였다. 민병대는 낮은 방벽 뒤에서 사격하면서 영국군에게 1000명의 사상자를 입히기는 하였지만 두 번의 일제사격 후 탄약이 소모되었고 영국군이 방벽을 넘어오면서 총검을 동원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결국 민병대는 벙커힐을 내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벙커-힐 뒤에 2차의 방어선을 만들어 두었기에 포위망은 건재하였고 영국군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벙커힐 전투 그림. 그러나 대형과 무기등의 그림은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다.
보스턴을 포위한 민병대에게 가장 큰 위협은 영국함선들의 함포 사격이었다. 중화기가 없던 민병대는 이에 맞서서 반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벙커힐 전투 후에도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이때 보스턴 근처 코네티컷 주의 민병대장 에단․알렌이 허드슨 강(지금의 뉴욕시 앞을 흐르는 강) 상류에 있던 영국군 요새인 티콘데로가(Ticonderoga, 미국의 초기 이지스함 티콘데로가급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를 민병대원 83명으로 급습한다. 참플레인 호숫가 매우 구석진 곳에 위치하여 있어 누가 습격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요새 지휘관은 나룻배를 타고 조용히 건너온 민병대원들에게 새벽에 기습을 받아 무장해제 당하였다. 이 민병대원들은 여세를 몰아 근처에 있던 작은 요새들인 크라운 포인트와 앤 요새(Fort Ann)도 점령하였다. 이 기습으로 민병대는 수십문에 달하는 대포와 역시 수십톤의 화약을 얻었다. 티콘데로가 요새에서 노획한 무기들은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던 민병대에게 전해졌다. 워싱턴으로서는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었고 워싱턴은 포대를 만들고 영국함선들을 사격할 준비를 하였다. 만약 함선들이 격파당한다면 영국군은 유사시 꼼짝도 못하고 보스턴에 갇히게 될 것이다. 사태를 눈치 챈 토머스 게이지 장군은 워싱턴에게 협상을 제의한다. 만약 함선들을 포격하지 않으면 보스턴을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물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워싱턴은 민병대로서 보스턴 탈환을 위한 본격적인 시가전을 하기는 어렵다는 판단 하에 이를 수락한다. 1776년 3월 17일, 영국 함대는 병력을 태우고 캐나다로 후퇴하였고 식민지 민병대는 보스턴을 점령한다.
이후 뉴잉글랜드 (지금의 미국 메인, 버몬트,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등의 6개 주를 아우르는 지역)는 온전히 민병대에 의하여 접수가 되었다. 이 당시까지만 하여도 미국의 주들 중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이고 반영(反英)감정도 심했다. 한 마디로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는 지역이었다. 뉴잉글랜드 지역을 장악하게 됨으로서 미국의 독립운동은 확실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독립전쟁중에는 중요한 전투들이 많았지만 뉴잉글랜드 민병의 게릴라전이 아니었으면 독립전쟁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오합지졸 대륙군과 조지 워싱턴
1775년 당시 보스턴.
워싱턴이 보스턴에서 영국군을 쫓아낸 것은 아메리카로서는 상당한 성과였지만 민병대를 이끈 워싱턴은 오히려 상황이 어려워 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일단 영국군을 단순히 몰아낸 것이지, 궤멸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워싱턴 휘하의 병력은 유럽군대와 비교하면 군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영국군이 물러간 이유는 사실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보스턴은 지금의 넓은 도시가 아니라 바다로 튀어나온 조그마한 반도를 꽉 채우고 있는 도시였다. 1775년 콩코드 전투 이후 압도적인 병력의 뉴잉글랜드 민병대는 보스턴에서 육지로 나오는 입구를 틀어막았고 영국군의 훈련이라던가 무기의 우위가 발휘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게이지는 무리하게 싸우기 보다는 일단 후퇴하였다가 증원군을 얻어서 다시 오려고 하였던 것이다.
워싱턴은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병사들과 대륙의회의 민간인들은 객관적으로 약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승리가 따놓은 당상인 듯 생각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식민지민들의 생각으로는 영국 본국은 멀리 떨어진 식민지를 지키기 위하여 싸울 마음이 없고 만약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다면 화의를 청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기나긴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 보스턴에서의 승리가 그 약점을 가리고 있을 뿐 당시의 워싱턴 휘하에 형성된 ‘대륙군(Continental Army)’은 정규군으로서 결점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대륙군은 여러 지역의 병력이 모인 ‘잡군’이었다. 민병대가 주축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각주가 주지사 휘하에 두고 있던 주군(州軍)인 자원병(volunteers)이 혼합된 형태였다. 워싱턴도 엄밀히 말하자면 버지니아주의 자원병 출신이었다. 아울러 대륙의회가 형성되면서 워싱턴 휘하에 모인 민병대를 ‘대륙군’으로 편성하였지만 이들은 한 번 입대하면 1년 싸우고 고향에 돌아가는 병력이었다. 아울러 이들은 병영(兵營)을 세운다던가 일렬로 서서 일제 사격하는 방법도 몰랐고 군진에 모여서도 변변한 화장실 하나 마련해놓지 않아 주변의 숲속이나 덤불속에 들어가서 용변을 보았기 때문에 군진 주변에는 언제나 똥냄새가 감돌았다. 워싱턴이 이들을 다그쳐 그나마 종대(縱隊)진군과 병영 설치가 가능해졌지만 전투지휘에다 군진을 유지하고 대륙의회와 주민들과 협상하여 보급품을 받는 것까지 워싱턴은 지휘관-행정장교-보급장교의 1인 3역을 해야했다.
워싱턴이 새로이 창설된 대륙군의 사령관이 된 이유는 그가 전투와 지휘경험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남부인 버지니아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사실 당시 독립운동은 뉴잉글랜드와 뉴욕, 펜실베이니아 등지의 전문직업인들과 상인, 도시민들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고 남부의 인사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다. 아울러 남부에는 북부에 비하여 아직 영국 국왕에게 충성하는 왕당파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이 때문에 ‘남부’인 버지니아 출신인데다 대지주인 워싱턴에게 군권을 주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1775년 7월에는 ‘무장의 원인과 필요성에 대한 선언(Declaration of the Causes and Necessity of Taking Up Arms)’을 발표함으로 자신들이 단순히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이유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무장하였음을 밝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의회는 완전한 독립보다는 자치를 목표로 왕인 조지 3세에게 식민지와 본국 의회간 중재를 요청하였고 7월 8일에 영국에 청원서를 보내면서 독립은 ‘최후의 수단’임을 분명히 하여 아직 타협의 여지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른바 완전독립에는 아직까지도 회의적이었던 보수적 인사들을 대표하는 존 디킨슨(John Dickinson)의 ‘올리브 가지 청원서(Olive Branch Petition)’였다. 그렇지만 왕은 식민지의 청원서를 무시하였다.
온건파들은 Olive Branch Petition을 국왕 조지 3세에게 보내 마지막으로 국왕의 중재를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한술 더 떠 영국국왕 조지 3세는 1775년 8월 23일에 식민지가 ‘반란’상태에서 돌입하였음을 알리고 자신의 관리들과 군인들, 그리고 ‘충성스러운 백성’들이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보태줄 것을 명령하였다. 일부 영국 군인들은 왕의 명령을 너무 충실하게 이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1775년 10월 18일에 영국 군함 HMS Canceau의 함장은 현재 메인(Maine) 주의 팰머스(Falmouth)라는 작은 도시가 ‘용서할 수 없는 반란’을 일으켰다며 이 도시에 하루 종일 무차별 포격을 가하였고 포격이 끝났을 때 팰머스에는 서있는 건물이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영국의 행동은 그나마 아메리카에 남아있는 온건파들의 입지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고 더 많은 주민들을 적으로 돌리는 결과만 낳았을 뿐이다.
정치적인 정당성도 확보하였고 보스턴을 포위하고 영국군을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에 고무된 대륙의회는 베네딕트 아널드(Benedict Arnold)와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의 지휘 하에 캐나다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캐나다에도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는(주로 프랑스인들) 자들이 많아 ‘자유’의 구호를 내세워 캐나다를 침공한다면 캐나다에서도 반영 봉기를 일으킬 수 있고 이들을 영국과의 전쟁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대륙군은 한때 퀘벡의 관문인 생-쟝(Saint-Jean) 요새와 몬트리올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퀘벡에서의 주 전투에서 총독 가이 칼턴(Guy Carleton)이 지휘하는 수비군의 완강한 방어에 막히고 존 버고인(John Burgoyne)이 정규 지원병력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하면서 대륙군의 완패로 끝났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물적 인적으로 불리는 대륙군의 한정된 전력자산을 소모시키고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워싱턴은 원래 캐나다 공격에 회의적이었으며 캐나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지금 논란되고 있고 또 중요하다 간주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나라(캐나다)를 점령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려야 한다. 우리의 관심과 노력은 온전히 우리 땅에 대한 적들의 내침(來侵)을 막는데 두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특히 대륙군은 이렇다 할만한 해상전력이 전혀 없었던데 비하여 영국군은 배를 타고 어디에든 상륙하여 공격할 수 있었고 영국군은 이후 뉴욕을 기지로 하여 해군력을 최대한 활용하게 된다.
미합중국의 탄생
영국 국왕 조지 3세가 식민지민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함으로서 식민지민들은 독립이외에는 대안이 없어진다.
영국군이 절치부심하여 병력을 모으고 있는 동안 필라델피아에 있던 대륙의회는 영국왕이 13주의 청원을 끝내 거부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청원을 보내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아직 선뜻 독립에 찬성하지 못하는 의원들이 많았다. 이들은 결국 독립을 주장하는 독립파와 여러 날을 두고 설전을 벌이게 된다. 이들의 논리는 본격적인 독립을 선언하게 되면 영국군에게서 지금까지는 비교할 수 없는 전면적인 공격을 받게 되고 신생국으로서 영국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아울러 설사 어찌어찌 영국군을 물리친다 하여도 국력의 소모가 심하여 프랑스나 에스파냐같은 다른 유럽국가의 침공을 받아 금방 멸망하고 말 것이라며 독립을 반대하였다. 아울러 비록 악법 때문에 사이가 벌어지기는 하였지만 1776년 초기에도 식민지민 사이에서 완전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13주와 영국은 단지 정치경제뿐만이 아니라 언어 문화적인 관계도 밀접하였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친족들이 아직도 살고 있는 영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도 독립에 대한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자치와 독립사이에서 갈피를 못잡던 여론에 불을 지른 것은 1776년 1월 10일에 필라델피에서 출판된 [상식(Common Sense)]라는 조그마한 책자였다. 당시에는 익명으로 출간되었지만 그 저자는 놀랍게도 기존의 독립분자들이 아닌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이라는 영국 이민자였다. 1774년 말에 영국에서 필라델피아로 온 전직 세무관리이자 코르셋 제조업자인 페인은 필라델피아로 이민한 직후 필레델피아의 공인(工人)들 사이에 만연한 독립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곧 미국 독립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배운 독립사상을 정리하여 [상식]이라는 책자로 정리한 것이다. 대륙의회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은 학자나 법률가, 기업가 등의 엘리트들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이들은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단어와 문장으로 독립사상을 논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저술은 대중에게 널리 퍼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생활하던 토머스 페인은 고전의 문구와 시적인 단어, 그리고 화려한 문장으로 수놓아진 ‘배운 자’들의 저술방식을 버리고 약 70장 정도의 짧은 책에 사회와 정부간의 관계, 왕권의 부당함, 13주의 현재 상황과 현안을 일반 대중도 읽을 수 있는 일상용어로 정리하였다. 성경에서 빌어온 비유와 직접적 어법으로 쓰여진 토머스 페인의 ‘상식’은 일반 대중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미국의 독립전쟁을 통틀어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다. 사람들은 이를 통하여 ‘왕’이라는 존재가 그 통치를 원치않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역설하였고 심지어 “왕정이란 우상숭배의 확산을 위하여 악마가 세상에 펼쳐놓은 것 중 가장 성공적인 것”이라는 극언까지 하면서 왕권 통치의 정당성을 총체적으로 부정하였다. 아울러 로크의 사상에서 빌어온 사회계약론을 들어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권력은 곧 독재라고 주장하였다. 페인의 ‘상식’은 왕권에 대한 식민지 대중의 막연한 충성심, 그리고 영국에 대한 무의식적 향수를 그 근본에서부터 철저히 파괴하였다.
당시 아메리카 13주 전체를 대표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대륙의회밖에 없었다. 대륙의회가 독립을 선언하려면 보다 광범위한 여론의 지지가 있어야 했는데 마침 ‘상식’의 출간이 독립에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준 것이다. 당시 대륙의회 외에도 각 주 의회가 있었고 도시와 마을마다 사람들이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1776년 봄에 각 지방에서 독립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약 90개의 자치 위원회들이 서로 앞다투어 그들만의 ‘독립선언’을 하고는 하였다. 주 의회들은 보다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노스캐롤라이나가 대륙의회에 의원들을 파견하면서 1776년 4월 12일에 13주중에서 최초로 그 주를 대표하여 독립을 승인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에 매사추세츠 의회가 주민(州民)들이 모두 독립을 지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버지니아 의회도 5월 15일에 독립지지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6월 7일에 버지니아 의회의 결의안이 대륙의회에 도착하자 대륙의회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여전히 남아있는 온건파들은 소위 중간주(Middle States: 메릴랜드, 델라웨어, 펜실베이니아, 저지, 뉴욕)들의 여론이 지지해줄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였으나 중간주들도 재빨리 독립의 대열에 동참하였다. 6월 14일에 코네티컷주 의회가 독립지지를 천명하고 의원들을 파견하였다. 다음 날에는 뉴헴프셔와 델라웨어가 그 뒤를 따랐다. 뉴저지의 주지사이자 왕당파인 윌리엄 프랭클린(벤자민 프랭클린의 아들이다)은 반대하였으나 뉴저지 의회의 과격파들에 의하여 쫓겨나고 새로이 형성된 뉴저지 주정부는 6월 22일에 독립지지 표결을 위하여 의원들을 파견하였다. 메릴랜드 역시 6월 28일에 독립지지를 선언하고 의원들을 보낸다. 6월말에 이르러 독립을 늦추자는 소위 온건파들은 완전히 힘을 잃고 조용해졌다.
마침내 필라델피아의 대륙의회에 모인 주대표들은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벤자민 프랭클린 등에 의하여 작성된 독립선언문을 1776년 7월 4일 공식적으로 채택하면서 ‘아메리카의 13주’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합중국’을 만들기로 하였음을 선포한다.
▶1187년 이슬람 살라딘,
하틴전투 승리
유대교ㆍ이슬람교ㆍ그리스도교 모두가 성지로 여겨온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 수중으로 넘어간 것은 이슬람군이 1차 십자군 전쟁에서 패한 뒤인 1099년 7월이었다.
이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의 영토가 된 것은 불세출의 영웅 살라딘이 등장하고 부터였다. 쿠르드족이었던 살라딘은 종족과 종파로 뿔뿔이 갈라진 아랍을 하나로 묶은 위대한 군주였다. 그에게 예루살렘은 늘 눈엣가시였다.
1187년 7월4일, 1만5000명의 그리스도교군과 1만8000명의 이슬람군이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 중간에 위치한 하틴에서 맞붙었다.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초전, 그리스도교군은 참패했다. 살라딘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팔레스타인 해안가에 위치한 유럽인들의 영토로 쳐들어가 10월2일, 88년간 유럽인들의 왕국이었던 예루살렘을 마침내 굴복시켰다. 살라딘은 이때도 관대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다. 예루살렘의 왕을 풀어줬고 성안에서 결혼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공격을 하루 늦출 정도였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760여년간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1999년에 미 타임지는 ‘지난 1000년 세기의 인물’을 선정하면서 살라딘을 12세기의 인물로 당당히 올렸다.
https://youtu.be/xsY6YxTJ8cI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