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철학하는 수행자,
해강 스님
“취재거리가 없나 봐요. 이 산골에 나 같은사람 만나러 오고요.”(웃음) 해강 스님(54)은 너털웃음으로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사를 오른쪽으로 끼고 3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실상사 산내 암자인 약수암이 보인다. 요사채와 작은 보광전. 마당에는 밭을 일구었는지 작은 두렁들이 객을 맞이한다. 햇수로 4년째, 더 오래전 머문 것까지 합하면 10년이다. 약수암에는 스님과 한 분이 더 있다. 스님의 노모老母이시다. 밖에서 보면 스님이 노모를 모시는 듯하지만, 열다섯에 출가해 따뜻한 밥 한 끼 살갑게 주지 못했던 어미의 간청으로 함께 머물게 되었다. 출가는 새로운 인연을 지어나가는 것이지만, 옛 인연도 업이 되어 따라오는 것인가. 스님은 “이제 4년이 지났으니 그 청은 대략 갚은 것 같다.”고 했다.
해강 스님은 불교계에서는 낯선 분이다. 94년 실상사 내 승가대학원 격인 화림원 생활을 시작으로 근 20여 년 실상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사와 인연 있는 이들은 알고 있다. 번역과 이해가 어렵기로 손꼽히는 『조론肇論』을 강의할 정도로 경전을 바라보는 안목이 남다르며, 불교계 고등 교육기관인 ‘화림원’과 ‘화엄학림’을 이끌며 수행공동체, 교육공동체 실험을 해왔다는 것을. 수줍고, 사교성이 없고, 아는 반연도 별로 없는 스님은 2015년부터 쌍계사 율학승가대학원장 소임을 맡으면서 때때로 외부에 나가 발언도 하게 됐다.
| 스물두 살에 참선을 그만뒀다
1978년 중학교 3학년에 서울 도봉산 망월사로 출가, 열여섯부터 수계 받고 그다음 해부터 선방을 찾아 다녔다. 지금은 10대 수좌가 거의 드물지만, 당시에 10대 수좌는 꽤 있었다. 때로 부여 화산 석굴암에서는 겨울을 홀로 났고, 대둔산 안심사 너머 빈집을 토굴 삼아 참선하며 살기도 했다. 그렇게 참선 공부를 이어가자 이전에 읽으면 이해되지 않았던 조사어록이 술술 읽히고 이해가 되었다. 한참 환희심이 일어났다.
“어느 날 갑자기 탁 막히고, 깜깜해졌어요. 입술이 부르트고, 머리 뒤쪽에 팥죽처럼 뾰루지들이 올라왔는데, 상기죠. 대개 수좌들이 겪는데, 은산철벽 같은 날이 계속되었어요.”
구참 수좌에게 물어봐도 풀리지 않았다. 제방의 큰스님들을 찾아다녔지만, 의문만 쌓였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내가 답답하고 막혀 있던 그 증세, 그것은 초보 수좌들의 일반적인 병통이었다. 이 현상을 환자에 비유하면, 매우 일반적인 증세다. 조실, 방장스님들이 이런 일반적이고 초보적인 병통조차 환자가 증세의 호전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처방을 해주지 못했다.
“마치 꼭대기에서 손을 내밀면서 손을 잡으라고 합니다. 나는 손을 잡을 힘이 없는데. 그렇다면 그 손은 나에게 아무런 역할을 못하죠. 그 손을 잡을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손이 큰 가치가 있지만, 나에게는 가치가 없는 셈이었죠.”
스물두 살에 참선을 그만뒀다. 절 뒷방을 돌아다니며, 손에 잡히는 책을 읽었다. 개심사에서 100일 기도 후 인도와 티베트로 갔다. 그곳에 가면 뭔가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였다. 인도와 티베트의 속살이 보고 싶었다. 인도 수행자와 티베트 큰스님들을 찾아뵙고, 궁금한 것을 여쭤보았다. 그분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사소하고 별것도 아닌 것을 아주 자상하게, 깊은 공감을 표현해주었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서 알려주었다. 또 본인이 답하기 어려우면 또 다른 스님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받아들일 때의 진지함, 이런 것이 한국의 큰스님과 달랐다. 적지 않은 위로가 됐다. 인도 수행자들의 공동체에 들어가서 함께 살기도 했다. 그렇게 3년을 보냈는데 결론은 이랬다. “이(한국) 집이나 저(인도) 집이나 앓고 있는 병이 비슷했어요. 인간이 살아가는 업습業習이 비슷하니까요. 그 당시 내 수준으로는 더 이상 인도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 티베트 불교는 어떠했나요?
“제가 경험한 티베트 불교는 귀족불교였어요. 소수 몇몇 하이클래스 승려들에게만 기회가 보장된 승가였어요.”
- 의외의 판단인데요. 우리에게 티베트 불교는 달라이 라마를 상징으로 호감이 높습니다.
“티베트 불교에는 다른 나라 불교 승가가 갖지 못한 장점이 분명 있어요. 현재 티베트 전체 승가를 볼 때 하이클래스에 속하는 소수의 승려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승려들은 어떻게 중노릇을 해나가야 할 것인지, 고민이 없어요. 뭐 해먹고 살 것인지, 이런 고민만 있죠. 생계출가와 문화정서적인 출가가 많아요. 발심출가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지 출가생활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물론 티베트 불교는 상위계층에게 풍부한 기회가 되는 곳입니다.”
- 실상사와 어떻게 인연이 되었는가요?
“1994년 12월에 법인 스님(일지암)이 실상사 ‘화엄학림’이 종단 교육기관으로 공식 문을 열었으니, 함께 공부하자고 했어요. 당시 전 한문을 전혀 할 줄 몰랐는데, 법인 스님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번역본과 대조하면서 본다고 했죠. 공부를 시작했는데, 속았습니다.(웃음) 학장이며 유일한 강사분이 연관 스님이셨어요. 연관 스님이 공부할 책이라고 던져주었는데, 이두 토가 달린 목판본 『화엄현담』이었어요. 방에 들어와 한 페이지에 내가 아는 한자가 몇 개나 있는지 세어봤는데 열 개가 안 넘어요.”(웃음)
법인 스님, 입적한 고경 스님, 오경 스님, 오성 스님, 해강 스님 이렇게 다섯 명이 모였다. 해강 스님을 빼고는 다들 한문에 밝았고, 경학을 이해하는 안목이 높았다. 공부 방식은 전통식으로 했다. 다음에 공부할 것을 학인들끼리 모여 새기고, 다음날 학인이 강사 앞에서 읽고, 질문을 던진다. 당시 실상사 대중 스님들이 청강생으로 함께 했다. 공부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 그때 경을 바라보는 안목이 달라졌겠습니다.
“당연히 도움을 많이 받았죠. 제 차례가 돌아와 경을 새기면 나만 혼났습니다. 나는 강원에 가지 않았어요. 강원풍으로 경을 새기지 못했죠. 그러면 연관 스님이 그것은 그렇게 새기는 것이 아니다, 하고 꾸짖습니다. 그러면 저는 뜻이 틀렸습니까, 하고 물었죠. 제가 좀 달랑거리잖아요.(웃음) 연관 스님이 뜻은 맞는데 글을 새기는 방식이 틀렸다, 하셨죠. 제가 뜻을 알려고 보는 것이지, 새기는 방식을 보려고 합니까, 하기도 했죠.(웃음) 그렇게 6개월 정도 하니까 따라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 화엄학림, 화림원에서 공부한 것들
- 언제까지 이어졌는가요?
“2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동안 몇 분이 왔다 갔다 하셨는데, 주로 우리 다섯 명이 함께 『화엄현담』과 『화엄경』, 화엄개론서 등을 읽고 토론하며 공부했습니다. 연관 스님께 강의를 들었지만, 다섯 명이 함께 토론하고 논쟁했던 것이 큰 공부였습니다.”
- 실상사에 화엄학림에 이어, 2008년에 화림원을 개원했습니다. 스님의 역할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화림원은 자기 수행과 전법, 경과 선, 삶의 청정함이 함께 하는 곳을 꿈꾸었습니다. 다분히 이상적이죠.(웃음) 열린 수행공간, 삶의 도량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 교육기관이 아니라, 수행공동체인가요?
“예. 수행공동체죠.”
- 당시 실상사에는 초기 경전을 공부했던 재연 스님과 각묵 스님이 계시기도 하셨습니다. 재밌게도 연관 스님과 도법 스님, 화림학림 스님들은 대승 경전을 공부했습니다. 논쟁이 꽤 됐을 것 같습니다.
“예, 입장이 분명히 달랐죠. 그게 장점입니다. 재연 스님께서 화림원에 함께 하셨는데, 우리들도 남방불교를 새롭게 알게 됐고, 재연 스님도 화엄과 대승불교를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죠. 화림원에서 종단 처음으로 간경결제도 했습니다. 당시 각묵 스님이 초기불교의 눈으로 『금강경』을 번역했는데, 이것으로 결제를 했습니다. 경으로 결제하는 것이 처음이었죠.”
- 지금 화림원과 화엄학림은 없습니다. 왜 그 좋은 공부공동체가 없어졌죠?
“실패한 것이죠. 화림원은 2006년에 문을 닫았고, 화엄학림은 2010년에 접었습니다. 목적 실현이 불가능했다고 판단해서 접은 거죠. 물론 화림원의 역할과 의미는 많아요. 화림원을 거쳐 간 분들은 대부분 다 에너지를 얻고 가셨으니까요.”
- 왜 실패한 것이죠?
“책임질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비전이 없었죠. 실상사 형편에서 화림원과 화엄학림 운영에 거의 올인 했는데 그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 부족했습니다. 강사도 부족했고, 학인들도 역량이 아쉬웠죠. 강의와 토론도 수평적이어서 강사들이 버티기 힘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지금도 화엄학림과 화림원 출신들은 그곳에서 불교의 토대를 새롭게 쌓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 화엄학림과 화림원에서 공부하면서 불교를 보는 시각이 어느 정도 달라졌나요?
“처음 절에 들어와 참선만 했지, 화엄학림에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불교는 사상집단입니다. 그 일원으로 내가 속했다면, 그 사상이 뭔지, 그 사상을 어떻게 내 것으로 할 것인지, 이런 것을 안내할 시스템이 없었죠. 화엄학림과 화림원에서 그 세계관, 인생관이 정립되었습니다.
- 어떤 공부를 했죠?
“화엄과 중론, 유식입니다. 화엄을 보게 되니까 중론을 볼 수밖에 없었죠. 중론을 보니, 유식도 함께 보게 된 것입니다. 화엄학림의 주된 교과목이기도 합니다.”
- 불자들은 화엄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요?
“일반 대중들은 『화엄경』을 다 볼 필요는 없습니다. 『화엄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서는 화엄개론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화엄의 설계도를 이해해야죠. 『화엄경』도 필요한 부분만 뽑아서 읽어도 됩니다. 처음부터 다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화엄경』 자체가 편집자가 짜깁기를 한 것입니다.”
| 수행과 삶과 사회가 어우러지는 불교
스님은 질문하면, 그 질문의 뜻하는 바를 다시 묻는다. 그렇게 문답을 하다보면, 정작 질문한 내용은 사라지고 대화가 다른 맥락과 고리로 연결되어 나간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다른 가지로 이어간 문답도 묵직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스님께서 불자들에게 경을 추천한다면 어떤 경전이 좋을까요?”란 질문을 던지면, 대개 어떤 경전이 좋다, 이렇게 답을 하는데, 스님은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체계적으로 관심을 갖고 경전을 읽으려면 어떤 목적으로 읽으려는지, 어떤 지식을 갖고 있는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라고 말한다. 단어 사용도 꽤 직설적이다. 교계 스님들에게 적지 않은 반응을 일으킨 화엄학림과 화림원은 지금 없다. 두 기관의 책임을 맡았던 스님이 직접 접는 역할을 했다.
- 실상사 내 승가 공부공동체나 공부모임 계획은 없는가요?
“전 포기했습니다.”
- 포기요?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지금 출가해 절집 안에서 공부하는 평균적인 스님들과 더불어 불교를 논하기는 어려워요. 물론 일반론은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불교철학과 사상을 이야기하기는 어렵고, 더구나 수행과 삶과 사회가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못한다면 무슨 공동체와 모임을 만들 수 있겠어요. 더구나 이런 이야기를 할 만한 스님들은 이미 자기 자리를 갖고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 왜 그렇죠?
“이미 고정된 자기 동선이 있어서, 이 동선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죠. 사상과 수행, 삶을 이야기하면서 이미 고정된 자기 동선을 벗어날 층은 없다고 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앞으로도 없다고 보시나요?
“앞으로는 더더욱 없다고 봅니다.”
- 굉장히 절망적입니다.
“절망적이죠. 그래서 저는 과감하게 현재의 승단은 깨져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극단적이고 불순한 시각이죠. 뭔가 파격적인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 지금은 할 일이 별로 없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현재는 그렇습니다. 근래에 출가한 스님들 중에 지적 토대가 있는 분들은 전부 밖으로 나갑니다. 왜냐하면 승가 안에서 그런 지적 요구를 충족시킬 공적, 사적 시스템이 없습니다. 그나마 역량 있는 분들도 시스템에 의해 교육된 것이 아닌, 개인적인 노력 때문입니다. 모든 조직이 그렇지만, 조직의 발전은 조직구성원의 평균 수준과 그와 별도로 특별한 몇몇 인물에 의해 발전되는데, 현재는 둘 다 없어요.”
- 희망은 없는 것인가요?
“현재 조계종은 집단의 유지 전승이 목적입니다. 집단은 그릇이고 도구인데요. 도구를 위해 종단이 존재하면 안 되거든요. 예를 들면 오히려 출가 조건을 까다롭게 만드는 것도 한번 시도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한국불교가 세상에 당당히 얼굴을 드러낸 때는 불과 60여 년밖에 안되죠. 또 제가 출가할 때와 지금 한국불교를 볼 때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한국불교는 희망적입니다. 큰 흐름으로 볼 때는 희망입니다. 현재는 그 희망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절망이고요.(웃음)”
- 왜 절망이죠?
“종단의 운영방식이나 가치가 자본주의죠. 불교집단이 아니고, 자본주의의 집단입니다.”
-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아직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닐까요?
“대안을 왜 찾죠? 그냥 놔두면 됩니다. 변화의 의지와 원력이 없다면 놔둬야죠. 오히려 다른 곳에 담아야죠. 실제 다른 그릇에 많은 사람들이 담아가고 있습니다. 썩은 나무는 놔두고, 새 집을 지어야죠.”
이런 파격성은 스님에게 낯설지 않다. 가령 스님은 이미 곳곳에서 이런 의견을 펼쳤다. 내가 이해한 불교는 틀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틀을 부수는 것이 불교다. 불교는 지금 이 자리에서 살고 있는 삶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불교를 불교라고 말하면 이미 불교가 아니다. 종교는 필요품이지, 필수품은 아니다. 종교는 유용하게 쓸 도구일 뿐이다. 불교도 부처님을 잘 써먹는 것이다. 잘 쓰기 위해서 불교를 알아야 한다. 경전도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다. 의심은 삐딱하게 보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가져야 불교를 제대로 볼 수 있다.
| 불교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법
- 신도들이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어떻게 답을 하시는가요?
“저는 스님들이나 신도들과 공부하고 대화할 때도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습니다. 잘못 물으면 잘 물을 때까지 계속 묻습니다. 제대로 된 질문이라야 제대로 된 답이 나옵니다. 저는 우문현답愚問賢答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문우답愚問愚答이죠. 신도들이 기도를 물으면 구체적으로 다시 묻게 합니다. 준비된 정답은 없습니다. 처해진 여건과 환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다수 대중을 위한 기도라면 교과서에 나온 답변을 하겠죠.”
- 스님의 기도 교과서는 어떤 것이죠?
“부처님은 돈 받고 복주는 분이 아닙니다. 기도 성취는 부처님을 설득시키는 것입니다. 설득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시선과 귀와 마음을 뺏어야 합니다. 큰 소리를 질러도 안쳐다봅니다. 공양물 많이 올려도 안 쳐다봅니다. 그럼 부처님은 어떨 때 쳐다보냐? 향기가 있을 때 봅니다. 부처님은 코가 민감합니다. 신중기도를 할 때도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신중은 향기로 대상을 인식합니다. 향기는 무엇으로 만들죠? 삶으로 만듭니다. 옛날 어른들이 새벽에 몸을 씻고 기도하는 것은 자신을 향기롭게 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내 언행이 깨끗해집니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은 일반 신도들에게 맞지 않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대상과 상황이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요. 그런 이야기는 주로 절에 오래 다녔고, 기도도 많이 하셨고, 연령도 좀 되신 분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금강경』 10만 독 했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금강경』 공부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불교를 왜곡시키는 데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경을 배우든 참선을 배우든 공부를 했으면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누가 봐도 확연하게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잘못 공부한 반증입니다.”
- 스님께서 영향을 받은 경전이라면 어떤 것인가요?
“화엄이죠. 그리고 중관입니다.”
- 다 대승불교입니다.
“경 자체를 대승과 소승으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경을 바라보는 해석에 따라 대승과 소승으로 나눌 수는 있겠죠. 오히려 소승의 안목으로 대승을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어떤 의미죠?
“단적인 의미로 참선이 최고다, 이러면 소승의 시각입니다. 법화가 최고다, 화엄이 최고다, 이러면 소승의 시각입니다. 대승의 시각이라면 열린 시각입니다. 모든 문을 열어놓고 보는 겁니다.”
- 스님께서 영향을 받은 분이 있다면 어떤 분이 계신가요?
“돌아가신 노스님이죠. 지금 생각하면 일상생활의 태도에서부터 불교를 바라보는 관점까지 그렇죠. 휴지도 3등분을 해서 사용하고, 청소와 빨래도 직접 다 하셨죠. 중이 지 빨래를 못할 정도라면 죽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한번은 사미계를 받고 인사를 드리려고 갔는데, 선물이라고 까만 휴대용 손거울을 주셨어요. 이게 뭔 선물이라고 손거울을 줍니까? 손거울이 어때서? 이놈아, 거울은 중의 필수품이야. 아니 거울이 왜 필수품인가요? 이놈아, 밥 먹고 이에 고춧가루 꼈는지 보고, 눈에 눈곱이 꼈는지도 보고 해야 할 것 아냐? 아니, 중이 왜 얼굴 생긴 것에 신경 씁니까? 아니, 이눔아 중이 지 얼굴에 신경 안 쓰면 어떻게 하냐? 중은 수시로 지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중이야. 그러셨어요. 그때는 공감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수행이 거창한 것이 아니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