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화엄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하고 싶은 이야기 삼특상 그리고 관념 / 황벽님
눈꽃 추천 0 조회 61 25.06.08 08:38 댓글 36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25.06.08 08:45

    첫댓글 이리로 갖고와서 대화하는게 좋을 듯 해서 끌고 왔습니다.

    황벽님 말씀은 아마도 세상을 봄에 있어서 우리는 각자의 관념을 투영하여 보는거 아닐까?
    이런 내용으로 읽혔는데 제가 잘 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어요^^

  • 25.06.08 10:41

    화형으로 돌아가시면서도 의연했던, 어느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수녀님)의 "자아가 소멸된 영혼은 모든 피조물에서, 도처에서 천국만을 본다" 는 말씀이 떠올랐는데요,

    자신이 받아들인 혹은 믿는 관념을 '현실'에 투사하는 메카니즘이, 무상ㅡ고ㅡ무아를 확증하는 불교의 경로와 같은 것 같아 질문을 드리게 됐습니다.

  • 작성자 25.06.08 10:57

    삼특상인 무상 고 무아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지만, 일단 그 삼특상을 '언어' 등으로 먼저 접하게 되고 결국 개념의 그릇인 언어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또 수행이라는 것도 한다면
    결국은 수행으로 드러난 것도 관념의 황야를 거니는 것과 같지 않겠느냐는 말씀 같아요.

    저는 수행이 일천하여 내세울 무엇도 없지만,
    무상 고 무아는 개념의 황야가 아니라 자연법칙과도 같은 사실이라고 보기에 수행으로 무언가 드러난다면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거 같습니다.
    -----

    정신 산란하게시리, 제가 쓸데없이 한말씀 보탰네요.

    황벽님의 질문에 방문객님의 답을 기다리며..

    아~~
    제 썰은 무시하시고요^^

  • 25.06.08 11:04

    최근에 본 판타지 소설의 내용이 생각나네요.

    "범인은 현실만을, 그리고 현실에서 작동하는법칙만을 유일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는 이 현실의 법칙에 종속된다.

    반면 마법사는 자신만의 내적 세계(심상, 이데아)를 구축하고, 그 세계의 리얼리티를 강화해가는 존재들이다. 리얼리티가 강해지는 만큼, 그 세계의 법칙을 '이 현실'에 관철시킬 수 있다.

    그는 현실을 보면서도, 능동적으로 그 위에 자신의 세계를 실현시킨다. 그 자신에게는, 현실보다 자신의 내적 세계가 확고한 실상이자 진실이다

  • 25.06.08 11:12

    눈꽃님 말씀과 관련해서..

    (무상, 무아는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일단 고성제를 보면요

    순간순간 인간의 직접적 경험은 락과 고가 교차하는 거잖아요(분명 '좋은' 순간들이 있으니깐요)

    고성제는 그 모든 순간(경험)들을 관통하는 혹은 포괄하는 명제로서, '사실'이라기 보다는 추상화 과정을 거친 결과물로 보입니다.

    [도처에서 천국을 본다]도 동일한 결과물이구여

  • 25.06.08 11:22

    무상, 무아에 대해 얘기하면 우기기로 빠질 것 같아서..^^;;

    방님께서 의견 주실 때

    범위를 좁혀서
    "현실은 고다" 와 "현실은 천국이다"는
    두가지 대비되는 관념에 한정하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작성자 25.06.08 11:36

    무상과 무아는 모두 드러난 일체는 연기 즉 '현상'이기에 고정된 존재가 아님을 뜻하고요.
    연기 즉 현상인 무상과 무아는 모든 것은 순간순간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것이기에 안정되지 못하잖아요.
    그렇게 안정되지 않고 계속 변하는 것(무상. 무아)은 들뜸이라..그 들뜸은 많은 에너지의 소비가 필요한데 에너지를 소비하는 과정은 정말 불안정한 상태이죠. 자연은 늘 안정한 상태로 가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편안하기 때문이죠.
    그러니 무상과 무아는 안정한 것이 아니기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니 '고'를 어떤 느낌이나 감정의 상태가 아닌, 자연의 현상에 따르는 어떤 상태로 정의한다면..

    사실 고통도 관념이 아닌 사실이 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25.06.08 11:53

    넵.

    말씀해주신
    "그러니 무상과 무아는 안정한 것이 아니기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니 '고'를 어떤 느낌이나 감정의 상태가 아닌, 자연의 현상에 따르는 어떤 상태로 정의한다면..
    <사실 고통도 관념이 아닌 사실이 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 > 부분이
    제가 '관념을 현실에 관철시킨다' 는 표현으로
    가리키는 지점입니다.

  • 작성자 25.06.08 12:00

    아 그렇게 해석되는 군요.
    멋진 해석이십니다.

  • 25.06.08 13:32

    불교 역사에서, 황벽님이 제시한 논점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대응이 나옵니다.

    그런데 뭐 그런 부분은, 요즘 시대에는 AI에게 "정리해줘" 이러면 되는 거 같구요.

    과거 적었던 글에서도, 제 나름의 경험등과 생각에 비춰, 이미 여러가지 방향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하지만 몇가지 이유에서 과거의 글을 막아놓은 것도 있어서요.

    제가 자주 사용한 말이 있습니다.

    <<
    마음이 그와 같이 일어난다면, 사실이 그와 같이 드러나고 알려질 것이다.
    >>

    그렇죠?

    황벽님의 지적은, 현실은 괴로움이다 천국이다 이런 말 하기 이전에 더 범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죠?

    {{
    무상, 고, 무아임을 알려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사실이 그와 같이 무상, 고, 무아로 드러나고 알려질 것이다.
    }}

    위와 같은 취지는, 이런 저런 경험하고 불교 공부 한참 하던 30년 정도 이전, 제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해당 논점으로, 후배들과 이야기하기도 하구요.

    기본적으로 불교에서는 그런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면에서 긍정합니다.

    그리고 그러함을 가장 간명하게 경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개념이, 방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방편이다. 희론을 끝장낸다.

  • 25.06.08 13:50

    .
    희론을 끝장낸다? 그런 말이 나오니까, 중론 반야부가 생각나죠?

    방편이라는 개념이 반야부와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이게 불법 자체가 화엄이라서 말이죠... 하핫

    지금 주제는 얼마전 황벽님과 잠깐 오고간 대화에서도 다룬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어쨌든 후배들이 딴에는 나름 고민해서 지적하는 건데, 너무 간단하게 대답하니까, 순간 벙쪄서 다음 류의 질문을 던졌던 거 같아요. 저는 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대응하구요.

    방편이라구요? 진리는 없어요?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술수예요?

    오히려 진리가 있다면, 무아가 아니라 유아이고, 무상이 아니고 항상할 걸? 무무상, 괴로움, 무아...이 언명 자체가 이미 스스로를 배척할 준비를 하는 언명이야, 아니야? 부정의 언명이 그런 것이거든? 불교는 처음부터 붙잡을 게 없도록 안배되었어. 상좌의 언명이든, 대승의 언명이든...

    반박을 잘 못하죠. 보통 그래요. 그래서 다음 말을 했던 거 같아요.

    내 대답에서 벙찌는 부분이 있다면, 이제 골몰할 문제가 생긴 건데...하핫

    방편은, 대단히 심오한 개념입니다. 연기가 방편이라서 그래요. 연기의 다른 이름이 방편입니다. 연기의 여러 모습 중 하나가 방편이란 이름입니다.

  • 25.06.08 13:59

    .
    우리는 파랑새가 필요한 편이죠? 눈 앞에 파랑새가 있기를 바래요. 뭐... 나쁘지 않아요, 당연한 거죠.

    너무 간명해서 얼빠지니까, 조금 더 포장하면요. 다 과거 적었던 말인데, 다음의 말도 가능합니다.

    반야부식으로다가.

    무무상이기에 무상하다, 무상하다면 무무상이다... ... 괴로움이 없기에 괴롭다, 괴롭다면 괴로움이 없다...

    법 즉 사실은, 방편이다, 그렇다고 방편을 떠난 사실이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청정한 부처님 불국토가 방편으로 드러난 것이라 하는 것이다.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하자면요. 과거 적은 글 중 다음 취지의 표현이 있습니다.

    <<
    연기는 세계를 담는다.

    연기는 세계를 담은 수레이다.

    수레는 그 무엇이든 능히 담는다.

    기독교든, 불교든, 베단따든...

    연기를 보는 자는, 연기를 담은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연기라는 수레를 본다.

    하지만 수레가 담은 내용물을 떠나 수레가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불은 그 조건에 따라 이름이 붙는다, 나무에 타면 장작불, 기름을 태우면 호롱불...

    연기가 그와 같다.
    >>

    불자는 연기를 아는 자이고, 그 연기의 모습 중 하나가 바로 세계를 자아내는 겁니다.

  • 25.06.08 14:38

    고성제 등은 연기라는 수레에 담은(담긴이 아닌) 내용물이고
    (=고성제가 <사실>이거나 <유일한 참된 관점>인 것이 아니다)

    불자는 내용물이 아닌, 수레(연기)를 보는 자다.

    그러면..

    수레에 담은 < >이 무엇인가에 관계없이,
    스스로가 < >을 담고, 의지하는 구조를 보는 자
    즉, 수레(연기)를 보는 자는
    불자라 할 수 있다

    : 라고 이해했습니다.

    ㅡㅡ

    비약이 있으면 지적 바랍니다 -()-


    ** 이거 통과하면, 저도 불자 꿈나무 간판 달 수 있다는..

  • 작성자 25.06.08 15:15


    통과~~!!!

  • 25.06.08 15:21

    한 이십년전에 화엄과 관련해 거의 소책자 분량의 글을 적었던 거 같은데요.

    이게 생각할게 엄청나게? 엄청나게까지는 아닐지라도 여하간 많습니다.

    바로 아래 본글 꼬리말에 적었듯, 파고든다는 거는 골몰한다는 거고, 파고들면 즉 골몰하면 통달합니다.

    골몰할 때는 구체성을 띄어서 진행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법 즉 사실입니다. 개념을 쓰더라도 구체적 진행이 요구됩니다. 꼭 언어적 생각이 수반되는 것만은 아니긴 한데요. 개념이 아닌 착안점 같은 거... 그런 거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말을 하는 거니까요, 타인과의 교류는 다 그런 거니까...

    [ 불은 그 조건에 따라 이름이 붙는다, 나무에 타면 장작불, 기름을 태우면 호롱불... ] 이거 아함이나 니까야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불은, 조건에 따라 이름이 붙습니다.예를 들자면요. 예수가 조건인 불이면, 기독교등이라 이름합니다. 부처님이 조건인 불이면, 불교등이라 이름합니다. 브라흐마가 조건인 불이면, 베단따등이라 이름합니다.

    불교는요. 세계의 성립과 소멸을 봅니다. 꿈을 봅니다. 연기는 꿈을 담아요. 세계가 꿈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기독교 불교 베단따 등 이름을 떠난 세계가 따로이 있겠어요?

  • 25.06.08 15:33

    구체적인 그 세계, 꿈을 떠나 연기를 논할 수 있겠어요? 아니겠죠?

    자... 사실과 유일한 참된 관점이란게 어떤 의미일까요?

    과거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칸토르 집합론에서 무한집합의 두차원이 있어요. 무한이 있지만, 무한의 무한도 있다... 둘은 같은 차원이 아니다...

    이 세계는 무한합니다. 꿈이 무한합니다. 무한해서 꿈입니다.

    제 글을 보세요. 무상, 고, 무아를 부정합니까? 긍정합니다. 또한 무상 고 무아를 말하지 않는데, 무한의 무한을 엿볼 수 있겠습니까?

    좀 더 쉽게, 무상 고 무아를 논한 불교가 아니고서야, 기독교 불교 베단따 등 그 모든 것이 자아내지는 것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에서 그럴 수 있어요?

    베단따가 그럴 수 있나요?

    진리니 사실이니 유일한 참된 관점이니 하는 일체의 말 즉 희론들은, 무한에서 꿈에서 가능한 겁니다. 무한의 무한에서는 그런 말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여러번 다음의 말을 했습니다.

    << 샤마니즘을 탈피한 유일한 것, 그것이 불교다. 이거는 정말 인간의 작품이 아니다. >>

    모든 인간의 꿈은 샤마니즘으로 환원할 수 있습니다..

    오직 불교만, 석가모님 부처님만 샤마니즘을 담으면서 넘어갑니다.

  • 25.06.08 15:46

    아, 제가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했네요.

    기독교, 베단타 등의 모든 꿈들은
    그 꿈들이 유일하게 참된 꿈이라는 꿈과 함께하기에
    애초에 '기독교를 담은 수레'가 성립할 수 없겠네요
    수레가 곧 기독교가 되는 거니깐요.

    스스로의 포지션을 '하나의 꿈'으로 규정한다면
    이미 기독교나 베단타가 아니게 되죠.

    불교는 무상ㅡ무아를 말하기에, 그럼으로써
    수레라는 연기를,
    무한의 무한을 엿보는 거구요.

    ㅡㅡ

    여기저기 발가락을 걸쳐 둔 데가 많은
    혼종ㅡ잡탕인지라.. 섞어가지고 생각해버려씀미다 ㅎ

  • 25.06.08 15:54

    좀 유치할 수 있지만요..

    저는 '행복한 꿈'이라는 내용을 수레에 담고 싶습미다.
    그것이 내가 수레에 담은 꿈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요.

    보통 무상, 무아 ㅡㅡ> 고
    : 이렇게 나아가는데

    무상, 무아 ㅡㅡ> (그럼에도) 행복
    : 요렇게요..

    물론.. 내가 부여잡은 꿈인거는 아니깐..
    그러한 꿈이 실현되야만 한다는 기대나
    실현 안 될시의 좌절은 없겠습니다만..

    꿈을 꿀 수는 있잖아요 ^^;:
    (제 모토가 '잘먹고 잘살자'임 ㄷㄷ)

  • 25.06.08 15:50

    .
    모든 것이 꿈인데, 불교조차 꿈인데, 왜 우리 불자가 불법을 지켜내려 하는가? 보존하려 하는가?

    불교라는 꿈이 사라지면, 꿈을 여읠 방법을 잃습니다. 우리는 무한에 갇히고, 무한의 무한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한인 꿈의 입장에서, 소위 진리를 논할 수 있는 이 세계, 불교라는 불의 이름에서 우리 불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이 꿈을 포함한 모든 꿈에서 사실과 유일한 참된 관점, 이것이 불교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일체는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이다. 그것은 바로 여기서 확인된다. 와서 보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평등하고, 일체 중생 그리고 그 꿈을 차별 없이 품는다. 이것이 자비다.

    >>

    근래 논점 중 하나, 관을 통달한다는 거는 정말 단순하지 않습니다. 연기의 모습을 통달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불교는 정말 일체 수준의 중생에게 그에 부합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중생은 한량 없으니 불법도 한량이 없습니다.

    신들과 인간 그리고 한량 없는 중생을 유익하게 하시는 참된 스승, 오직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 25.06.09 00:30

    "불교라는 꿈이 사라지면, 꿈을 여읠 방법을 잃습니다. 우리는 무한에 갇히고, 무한의 무한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제가 화엄에 머무르는 이유는 선정과 같은 고난이도의 수행을 알지못할지라도 방문객님의 불법 대한 설명은 늘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보이기에 그 빛나는 통찰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물론 너무 어려워서 접근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지만요.. 위의 인용문 같은 경우요..

    1. '꿈을 여읠 방법'이라는 게 해탈을 의미하나요?

    2. '무한에 갇힌다'는 말은 끝도 없이 윤회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3. '무한의 무한을 볼 수 없다'는 말은 감히 짐작도 할 수가 없네요.. 제가 너무 1차원적으로 해석했나요?

    황벽님은 잘 캐치하시는 것 같은데 제 근기에 맞춰 설명하기에는 너무 힘드시겠죠?

    방문객님의 자비심을 알기에 분명 설명해 주긴 하시겠지만 바쁘신 분 괴롭혀드리는 것 같아 몹시 죄송합니다..^^;;;;

    4. 아.. 그리고 굳이 꿈을 여위여야하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 25.06.08 21:10

    무한에 갇힌다 ---> 스스로 건립하고 실현하는 꿈임을 모르고, 그것이 실재, 참, 사실인 줄 안다.

    무한의 무한을 엿본다 ---> 스스로 꿈을 일으켜서 의지하는 그 성립 혹은 작동 구조(=연기)에 대해 파악한다. [그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면, 그와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사실.. 무한의 무한.. 이런 어려운 말을 1도 모르구여.. 문맥상 대강 위와 같이 거칠게 이해하는 척 했슴미다..(자진납세는 무죄..)

  • 25.06.09 00:23

    역쉬 황벽님~

  • 25.06.09 00:33

    1번과 4번에 대한 황벽님의 답변도 궁금합니다~^^;;;

  • 25.06.09 00:51

    근데 괜히 질문했나봐요.. 너무 어려워요.. 설명해 주셔도 알아 들을 수나 있을지.. ㅜㅜ
    그래도 기왕에 했으니 기다려 봅니당~

  • 25.06.10 01:50

    숨결님 지적에 대해 제 딴에는 빠짐 없이 적었는데요. 일부러 1. 2. 3. 4.로 나눠 적지는 않았습니다. 이상하거나 미진한 부분 기타 등등은 그냥 편하게 다시 지적하시면 됩니다.

  • 25.06.09 06:15

    1. : 그런 듯 하구요.

    4. : 저도 잘 모르겠슴미다..

  • 작성자 25.06.09 05:41

    <무한의 무한> 그리고 연결된 일련의 말씀들을 연결해보고
    무한의 무한은..화엄 법계를 설하고 계신것으로 사료됩니다.

    와~~
    이 토막토막의 댓글난에다가 화엄법계를 그려넣고 계시다니요.

    참으로 탁월하십니다.
    이런 고급진 대화를 볼 수 있어 무쟈게 뿌듯하네요.

  • 25.06.10 00:53

    칸토르 집합론에서 무한집합의 두차원, '무한'과 '무한의 무한', '알레프 널'과 '알레프'... 이런 거는 그냥 배우면 아는 거고 안배웠으면 모르는 거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칸토르 집합론에 비춰, '무한의 무한'은 적절한 표현은 아닌데요. 칸토르를 언급한 것은, '무한이라고 다 같은 무한은 아니다', '무한이라도 원소의 개수 즉 크기가 다를 수 있다'... 그런 점...

    종교가 흔히 궁극과 잘 연결되니까, 궁극이라고 한다고 다 같은 궁극은 아니다... 그러한 말에 설득력을 주는 장치로, 수학을 도입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쉽게... 어떨까요...

    최근 적었던 이야기인데, 석가모니 부처님 불국토는 수용최적화 불국토입니다. 프리 티켓이라... 개나 소나 다 들어와. 프리거든... 그래서 혼란과 광란의 도가니랄까...

    아미타 부처님 불국토, 극락을 잘 대비시키는데... 극락에 입장하려면, 티켓이 있어야 되요. 공짜가 아니야. 그래서 정돈된 세계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세계는 수용최적화라 평등이 두드러지고, 아미타 부처님 세계는 수행최적화라 향상에 초점이 가 있습니다.

    둘 중 어느 취향인가는 사람마다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경향차...

  • 25.06.10 01:05

    .
    과거 그런 말 적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각자가 하나의 섬이다... 인간은 각자가 하나의 꿈이고 하나의 세계입니다.

    어떤 이의 세계는 기독교 류이고, 어떤 이는 베단따 류이고, 어떤 이는 불교 류이고... ... 이 모두 함께 부처님 불국토에 있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 불국토는, 기독교의 궁극을 배척하지 않고 베단따의 궁극도 배척하지 않고 불교의 궁극도 배척하지 않고... 그 어떤 궁극도 배척하지 않고 그 무엇도 배척하지 않고 평등하게 성립시킵니다.

    그러함을 두고, 우리는 '무아'라고 그래요. 그게 무아라는 표현의 또 다른 의미 중 하나입니다.

    그러함을 지식등으로 알아서 그러함이 알려지든, 그러함을 지식등으로 전혀 몰랐음에도 그러함이 알려지든, 그런 거는 중요한게 아닙니다. 저러함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러함 사이에선 더더욱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성문 아라한이든 벽지불 등이든, 벽지불은 독각이라고도 하는데 누구한테 배우지 않고 혼자 깨달은 이를 말합니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궁극이 그리 많은데, 인간마다 하나의 세계, 중생마다 하나의 세계인데, 그 나물에 그 밥 사이인게 무슨 문제가 될 여지라도 있겠습니까? 상좌 대승도 마찬가지.

  • 25.06.10 01:26

    .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 특히 상좌불교 공부하는 이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 중 하나가 무상, 고, 무아 등의 절대시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히려 궁극이 여럿 인정된다면, 궁극에서조차 무아인게 분명해지지 않겠습니까?

    궁극에서조차 무아인게 분명해진다?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 무아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죠? 무아예요. 그래서 궁극이 여럿이라...

    궁극, 또 다른 이름 무한... 무한이 여럿일 때, 무한은 고정된 모습이 없어요. 알레프 널 과 알레프... 이런 수학적 단초가, 위에 적었듯, 그러한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장치이구요. '말'로 할 때 그렇다 이거죠...

    꿈을 여읠 방법이라는 것은, 황벽님의 지적처럼 궁극을 성취했음에도 꿈이라는 점을 안다는 것이기도 하구요,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은, 대승에서는, 불국토 성취입니다.

    인간은 각자가 하나의 섬인데, 부처님이라는 섬을 불국토라고 그래요. 불국토가 화엄이죠. 위에서 적었던 것과 같은 불국토요.

    해탈은 자신의 세계, 꿈을 철저히 지배할 때 성취됩니다. 소멸만을 두고 보자면, 제가 언급한 것과 같은 소위 '무한의 무한'을 말하지 않아도 가능하기는 합니다. 소위 지혜는 부족할지라도.

  • 25.06.11 16:57

    오마이갓! 넷에서 읽고, 프린트해서 읽고, 버스 안에서도 읽고, 집에서도 읽고, 읽고 읽고 또 읽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본문부터 댓글까지 불교의 클라이맥스가 다 들어가 있는 것 맞지요?

    황벽님의 질문에서도 제 물음에서도 그동안 제가 품고 있던 제 깜냥의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아요. 물론 앞으로도 의문은 계속 되겠지만요..

    함께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혜의 기쁨이 넘쳐나는 이곳이 저는 참 좋습니다.

    화엄 최고~!!

  • 작성자 25.06.11 17:45

    와 숨결님 멋지세요.
    최고 입니다.

    함께 같이갈 수 있어서 기쁩니다. 👍

  • 25.06.11 20:53

    @눈꽃 저두요~♡♡♡

  • 작성자 25.06.11 17:46

    숨결님이 읽고 읽고 또 읽으셨다니
    저도 지금부터 촘촘하게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

  • 25.06.11 20:52

    저는 지식이 얕아서 그래도 여러번 읽으니 분절되어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것이 조금은 통합되는 것 같아요.. 아참 쓰면서 읽으니 효과는 더 좋았어요.. ㅎㅎ ^^;;;

  • 25.06.12 13:28

    갑자기 십여년 전에 개봉했던 좋은 놈,나쁜 놈,이상한 놈 이란 영화가 떠오르네요
    중생들 세상엔 별별 아무개 놈들이 다 있습지요

    타력구제의 종교인 기독교의 고린도전서에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덕목에서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도 있지만...

    역시 별의별 온갖 꿈을 지어내는 중생들 세상에서는 공덕을 갖춘 놈이 제일이 아닌가 합니다
    뭐 물론 복덕까지 함께하면 자력 + 타력 최고의 앙상블이 되겠지요

    글쎄요. 중생들이 지어내는 고만고만한 꿈결 속에서...지혜 제일이라 한들 딱히...
    예전에 로그인이라는 게시물에 제가 이런 댓글을 단 기억이 납니다

    "만렙을 찍었다고 순순히 로그-아웃(반열반?) 되는것도 아니고...쪼렙이라고 하세월 가망이 없는것도 아니다
    오히려 만렙이 하세월 기다려야 할수도 있고,그 사이 쪼렙이었던 사람이 로그-아웃 되며 빠이빠이 할수도 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