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原始林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石炭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發言.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無邊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純白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純金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짓.
지난 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純粹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 시집〈사랑하고 싶은 날〉시월 | 2009 -
〈오탁번 시인〉
△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 1985년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외
△ 1987년 제12회 한국문학작가상 외
△ 1998년 평론집 <현대시의 이해> 출간
△ 2023년 02월 14일 영면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를 두고 흔히들 겨울 대표하는 서정 시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이 시를 통해 오탁번은 만년의 시간을 붙잡고 늘어지는데 나무 가지 위를 덮은 적설積雪을 두고 우주의 존재, 그 궤적을 살펴내는 시각을 갖고 있지요.
동화와 시, 소설은 신춘문예 3관왕이라고들 하는데 오탁번은 1966년 동화, 1967년 시, 1969년 소설 등 신춘문예에 연달아 당선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 시는 그의 데뷔작이지요.
비록 좀체 눈 구경 하기 힘든 남녘이지만 겨울이 가기 전에 시의 이불을 덥고 누워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 광양시민신문 최인철 기자
오탁번 시인께서 어제(23.02.14) 영면하셨습니다.
일천구백육십칠년 중앙 문예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셨지만 실은 소설가로도 너무나 유명했습니다.
고려대학교에서는 최고의 지성인으로 후학들을 키웠고 시사랑회원들이 즐겨 읽었던 '시안'을 통해 시문학을 발전시킨 분입니다.
제천의 원서헌에서 시사랑 회원들에게 시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시고 밤새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던, 시사랑 회원들의 존경을 받던 시인이셨습니다.
홍정순 시인이 등단하던 날, 우리 시사랑회원들이 앉은 자리에 오셔서 한 사람 한 사람 까만 눈동자로 바라보시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제는 그 모습을 뵐 수 없어 많이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