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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 친구는 청소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날 어머니 영정 앞에서 동생을 끌어안고 울었다. 그때 집안 어른이 다가와 친구의 등짝을 때리며 말했다고 한다. “정신 차려. 그렇게 울고만 있으면 어쩌겠다는 거냐. 지금부터 네가 동생을 보살피고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살아가야지.” 등짝은 아팠고, 기분은 나빴다고 친구는 회상했다. 그는 “지금도 그 어른의 ‘어리석음’을 용서하기 힘들다”고 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아무런 위로도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냥 울게라도 해줬으면 마음이라도 추스를 수 있었을 텐데….”
‘원래 그런 슬픔은 없다’에 소개된 독일 판화가 케테 콜비츠의 작품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
‘사랑과 전쟁’류의 TV 드라마에서 자주 본 장면이 있다. 한 사람이 아파하거나 슬퍼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달랜다. 그 곁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이 아파하는 사람의 상처를 후벼판 뒤 말한다. “왜! 내가 뭐 못 할 말 했수?” ‘못 할 말’은 ‘틀린 말’ 또는 ‘없는 말’로도 변주된다. 없는 사실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니어서 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그 말은 언제나 아프거나 슬픈 사람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상처를 주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위로를 못 하는 걸까?
허찬욱 에세이 ‘원래 그런 슬픔은 없다’는 큰 위로가 됐다. 간직하고 싶은 책이다. 가톨릭 사제이며 대구가톨릭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허찬욱 저자는 독일에서 공부하고 온 종교 철학자인데, 종교 철학자가 아닌 그냥 철학자보다 사유가 넓고 유연하며 감각이 섬세하다는 느낌을 준다. “너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말이 상대방에게는 정작 공감의 말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려면, 타인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 조심스레 물어야 합니다. 타인이 슬픔을 대하는 방식은 어떤 것인지 섬세하게 봐야 합니다.” 그가 말을 잇는다.
“이해되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원래 그런 슬픔’은 없는 거니까요.”(20쪽)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작가 김연수가 번역한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수록 작품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소개한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엄청난 슬픔에 처한 부부가 있다. 빵집 주인은 그 사연을 몰랐다. 그래서 그 부부와 티격태격했다. 그들의 슬픔을 알게 된 빵집 주인은 놀란다. 이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원문은 a small, good thing)”라고 말하며 부부에게 빵과 커피를 내놓는다. 그리고 듣는다. 밤이 가고 아침이 온다.
저자 허찬욱은 ‘작은 이야기’의 힘을 강조하며 이렇게 쓴다. “만약 빵집 주인이 부부의 슬픔을 직접 위로하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지나간 일을 털어버리고 일어나라는 훈계라도 했다면 어땠을까요?”
등짝을 얻어맞은 친구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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