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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랑을 느끼거나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사실적인 감정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고, 저울질할 수도 없다.
어떠한 객관적인 대상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실제적인 것으로 —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When we think of interrelatedness, we usually think of big or small things that are in relationship with one another. However, the way I’m using the word is not like that. I’m not denying that, but there is something deeper than that. Things are actually nothing but interrelatedness itself.
상호 연관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대개 서로 관계하여 있는 크고 작은 것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쓰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 더 심오한 의미가 있다.
사물은 사실 상호 연관성 그 자체일 뿐이다.
It’s really hard for a human mind to think that a thing could be nothing but interrelatedness, that interrelatedness itself ends up to be what things actually are. In this sense, things end up to be no-things, and no-things end up to be all things. So when we hear words like no-thing or nothingness, we shouldn’t try to understand that conventionally. In its truest sense, nothingness doesn’t have much to do with nothing. It has to do with interrelationship or interrelatedness.
인간의 마음은 만물이 단지 상호연관성일 뿐이고,
상호연관성 자체가 결국 만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정말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만물은 무(無)가 되고, 무(無)는 만물이 된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그것을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무는 무와 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상호 관계 또는 상호연관성와 관련이 있다.
And so it is with each of us. When you look inside for your true being, you might say, “Okay, exactly, precisely, what is this thing called ‘me’? What actually is it?” The more you look for it, the more you can’t find it. The reason you can’t find it is because it is nothing but interrelatedness. There’s no substance. There’s no thought, idea, or image to grasp. In that sense, it’s empty, but not empty in the sense of being nonexistent. It’s empty in the sense of being unexpected or inconceivable.
그리고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있다.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찾기 위해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럼, 정확히, '나'라는 게 무엇인가?, 무엇이 실제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찾으면 찾을수록 더 찾을 수가 없다.
그대가 그것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상호 연관성일 뿐이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이나 관념도, 이해해야 할 이미지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공허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공허하지 않다.
예상하지 못했거나 상상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공허하다.
When you feel love or fall in love, that’s a very real feeling to you, and yet you can’t see it, you can’t weigh it; it doesn’t have any objective sort of existence. Nonetheless, we treat it as more real than the things we consider to be real—certainly as more important. Most people, if they feel love, their love feels more important to them than the solidity of their toaster. The love has no solidity to it at all. It has no objective tangibility to it, and yet, it’s something that one could orient their whole life around.
당신이 사랑을 느끼거나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사실적인 감정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고, 저울질할 수도 없다.
어떠한 객관적인 대상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실제적인 것으로 —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느낄 때,
그들의 사랑이 토스터기의 견고함보다 그들에게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 사랑은 전혀 견고하지 않다.
그것은 객관적인 명백함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삶 전체의 방향을 정할 수 있는 것이다.
The Buddha used to talk about the thusness or suchness of each moment. It means not just each moment, but the thusness or suchness of each apparent thing that we perceive. So when I say being, this is the sense I’m using it in, a similar way that the Buddha used the thusness or suchness of something. When we perceive the thusness or suchness of something, we’re actually perceiving it as being nothing but interrelatedness itself. So this ordinary moment, with nothing particularly unusual about it, is being awareness, and awareness itself is interrelatedness. It’s not like interrelatedness is aware; it’s more like interrelatedness is. It’s not that the interrelatedness is that which is aware—it’s that the interrelatedness is awareness.
부처는 매 순간의 이러함이나 그러함((眞如, 如如)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것은 단지 매 순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지하는 각각의 명백한 것의 이러함 또는 그러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내가 존재라고 말할 때,
이것은 내가 사용하고 있는 감각으로,
부처가 어떤 것의 이러함과 그러함을 사용하셨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우리가 어떤 것의 이러함과 그러함을 인식할 때,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단지 상호 연관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특이한 것은 없지만
이 평범한 순간은 인식 그 자체이고,
인식 자체가 상호 연관성이다.
상호연관성이 인식되는 것이 아닌
상호연관성 자체에 더 가깝다.
상호연관성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연관성이 자각이라는 것이다.
This is probably the fundamental barrier that any of us will bump into in spirituality: the barrier between awareness and the objects of awareness. The fundamental duality is that there is this world of things, and then there’s seeing and experiencing this world of things, and somehow those two are different. One of the great misunderstandings about unity is the belief that it reduces the world to a sort of homogenized “goo” of agreement. Actually, in some ways it’s almost the opposite. It frees the uniqueness in you, and it frees you to allow the uniqueness in others. Uniqueness flourishes when we see the unity of things. It doesn’t get flattened out—just the opposite. You just stop arguing with the difference that isn’t like yours.
이것은 아마도 우리 중 누구라도 영적인 면에서 부딪치게 될 근본적인 장벽, 즉 인식과 인식의 대상 사이의 장벽일 것이다.
근본적인 이원성은 대상의 세계가 있으며,
그리고 대상의 세계를 보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다소 다른 것이다.
합일에 대한 큰 오해 중 하나는 합일이 세상을
일종의 동질화된 '끈끈한' 합의로 축소시킨다는 믿음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거의 정반대다.
그것은 당신 안의 독특함을 자유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 안의 독특함을 허용하여 자유롭게 한다.
독특함은 사물의 합일성을 볼 때 번성한다.
그 증가세는 꺾이지 않고, 정 반대이다,
이제 그대 자신과 다른 차이점에 대해 논쟁하는 것을 그만 멈추라.
When you have two viewpoints that are open to interrelating, almost always something will arise if you stick with it long enough, if you’re sincere, if you’re openhearted, if you actually want the truth more than you want to win or be right. Eventually something will bubble up from that engagement that’s truer than either one began with. If you have two people who are openhearted and see the truth and usefulness, even the utility, of really relating, they’ll see that, and both people walk away feeling like “Gosh, I feel good about that, like we both win because we both discovered more than we started with.”
두 가지 관점이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때,
그대가 충분히 오랫동안 그것을 고수한다면,
그대가 진실하게 마음을 열고,
승리하거나 옳기를 원하는 것보다 진실을 더 원한다면,
거의 항상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
결국에는 둘 중 하나가 시작했던 것보다 더 진실한 그 약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올 것이다.
마음을 열고 진실과 유용성, 심지어 실제로 관계를 맺는 유용성을 보는 두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알게 될 것이고,
두 사람 모두 "이런, 우리 둘 다 우리가 처음에 시작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긴 것 같아."라고 느끼면서 떠나갈 것이다.
The unity of things isn’t that there are no differences. It isn’t that a tree doesn’t look different than the sky, or behave differently than the sky, or have a different kind of life than the sky. The unity is that a tree—an object—is nothing but interrelatedness. The sky is nothing but interrelatedness, and the awareness of things is itself nothing but interrelatedness. That’s an explanation that is coming from a way of perceiving. That’s what enlightenment really is: seeing that the seeing and what one is aware of are one simultaneous arising. It’s an arising that’s always flowing because interrelatedness isn’t static—it’s ever flowing.
사물의 합일은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나무가 하늘과 다르게 보이거나, 하늘과 다르게 행동한다거나,
하늘과 다른 종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합일은 나무, 즉 대상은 상호 연관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늘은 상호 연관성에 불과하며
사물에 대한 인식 자체가 상호 관련성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식하는 방식에서 나오는 설명이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상호 관련성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항상 발생하는 현상이며, 항상 흐르는 것이다.
That’s why I’m always saying that this is really about a kind of vision, not in the sense of having visions, but the quality of our vision, the quality of our perception when we can perceive without the dualistic filter. What seems to be this impenetrable sort of barrier between us and things, us and the world, us and each other, is fundamentally between our consciousness and what consciousness is conscious of. That seemingly basic and immovable sense that there is a fundamental difference, a fundamental separation, is what’s really dispelled when our insight gets deep enough.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은 비전을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이원론적 필터 없이도 지각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시각의 질, 지각의 질에 관한 것이다.
우리와 사물, 우리와 세계, 우리와 서로 사이가 이 뚫을 수 없는 장벽으로 보이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의식과 의식이 의식하고 있는 것 사이에 있다.
근본적인 차이, 즉 근본적인 분리가 있다는 겉보기에는 기본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감각은 우리의 통찰력이 충분히 깊어질 때 실제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At the deepest level, the most fundamental level, interrelationship is just that—it’s interrelating. It’s not things interrelating. Things end up to be themselves interrelatedness. When vision becomes clear, that’s what we perceive. The world becomes not a world of things, but of interrelatedness.
가장 깊은 차원,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상호관계는 단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사물들이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물은 그 자체로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시야가 분명해지면, 우리는 그렇게 인식한다.
세상은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 상호 연관성의 세계가 된다.
Excerpted from “The World of Interrelatedness,” April 10, 2019 ~ Garrison, 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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