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었던 듯싶다. 기원전 200년 대에 살았던 중국의 진시황!
그는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사람으로써 당대의 자신이 황제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하여 분서갱유를 일으켰으며 자신의 사후를 위하여 자신이 집권했었을 그 상황이 내세에 가서라도 그대로 이어질거라 생각하여 죽어서라도 그 영화를 누려보려 만들어 놓은 병마용을 20년 전 중국 여행 중 서안에서 참관하며 그의 인간적 욕망을 느꼈었다. 그때의 병마용의 현장을 바라 보며 20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어떻게 그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 할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가히 경탄스러울수가 없었는데 나는 지금 진시황이 살아생전 영원 불사하려는 욕심의 근원인 흔적을 찾아 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서복 박물관을 향하는 길에 옛것과 오늘날이 공존 하는 모습이 있어 한컷 찍었었다.
뒤에 보이는 사진은 이 서복 기념관을 복원하면서 세운 다리인듯 싶었고, 앞에 다리 방호막이있는 다리는 오랜 세월이 흐른 흔적이 남아 있어서 예전에 이곳은 정방폭포만 보면 다른 관광지로 이동하여 서복의 흔적을 느끼지도 못했을 시절이 있었는데 이 교각은 언제 건설됐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서복전시관의 건물은 어딘지 중국풍의 건물로 보였었다.건물의 용마루와 처마의 모습만을 본다면 예전 내가 중국생활하며 봐왔던 건축모양을 보는 것 처럼 우리나라의 고궁의 모습과는 영 딴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날의 이 서복 기념관에는 무슨 행사가 있는듯 싶었다. 전시관 앞에는 어떤 공연을 하기 위하여 마이크와 천막이 쳐져 있었고, 기념관 안으로 들어갈 때에도 적은 금액이지만 그날 만큼은 입장료없이 무료 입장을 할 수가 있었다.
이 처럼 기념관 안은 우리 고유의 궁궐 건축양식이 아니었다. 경내의 정원의 모습이나 출입문의 양식 또, 지어놓은 건물 모습은 중국풍의 모습을 느끼게 하여 내가 어느 중국의 고궁을 찾지 안했나 하는 착각이 들었으니까...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용마루를 벗어난 처마귓퉁이엔 원숭이,저팔계, 삼장법사 모습이 있는 잡상을 볼 수가 없었고, 단독 건물치고는 건물의 규모가 한국의 임금이 기거했던 규모 정도는 아니지만 꽤나 성실성있게 건축한 건물이 아닌가 여겨졌다.
서복 전시관에서 바로 본 문섬이다. 이 문섬은 새섬이라고도 하는데 고요하고 평화롭던 서귀포 앞 바다에 한 때 북한의 무장간첩선이 침투 했었던 적이 있었다.
1968년 8월 20일 밤 9시20분경!
북한은 거물급 간첩 이문규를 구출하기 위해서 무장된 간첩선을 타고 서해안의 공해를 통과해 남지나해까지 내려갔다가 어둠을 틈타 은밀히 서귀포 새섬 앞 속칭 ‘망동산’ 앞 해안에 접근 했었다.
미리 북한 무장간첩들의 침투 사실을 포착하고 있던 우리의 대간첩본부는 전투경찰대원들을 무장간첩선 침투지역에 잠복시키는 한편 해군 함정 등을 배치, 만만의 준비를 하고 이들을 기다렸던 것이다. 무장공비들이 고무보트를 이용, 해안으로 발을 내딛는 팽팽한 긴장감속에 숨을 죽이며 잠복하고 있던 기동타격대의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바다에서는 조명탄의 불빛 속에 함포 사격이 개시됐다.
이들은 혼비백산하고 간첩선의 뱃머리를 돌려 도주를 시도 하였지만 결국 우리 해군 함정이 발포한 포탄에 명중돼 격침됐고 무장공비 11명이 사살됐으며 3명은 생포됨으로써(1명은 생포된 후 부상이 심해 사망) 철통같은 우리 경찰과 해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당시에 나는 국민학교에 다녀 라디오나 신문지상으로 그랬구나 하고 지났쳤으나 10여년이 흘러 80년도 당시 계엄령이 발효되어 전국대학이 휴교령을 맞은 그해 여름 도보로 제주도일주를 하던 친구들을 위문하기 위하여 서귀포를 찾았었다.
그때 나는 이 문섬이 훤히 내다 보이는 친구집 옥상에서 "야! 전망 좋다."라며 부러움을 표시함에 친구는 "야! 말도마라, 그때 서귀포 앞바다는 조명탄이 밤 하늘을 가르고 포 소리가 펑펑 울리니 꼭 무슨 전쟁이 난 줄알았어. 그때 나는 어려서 동생들과 이불 속에 몸을 숨기며 부들부들 떨기만 했었고, 어른들도 잠 못이루고 어찌 할 줄 몰라했었는데... 어떻게 북에서 남한 끝인 이곳까지 내려 올수가 있었냐?" 라며 당시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이 있었는데 40년이 다 되가는 그 때의 서귀포 앞바다는 언제 그런일이 있었냐는 듯이 평화로운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서복 전시관은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 관광권 개발 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 하였다. 전시관에는 중국 산동성 용구市에서 기증받은 서복 석상, 진황도市에서 기증받은 서복동도상, 원자바오 총리의 친필 휘호'서복공원'이 새겨진 태산석(泰山石)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원자바오 총리의 친필 휘호는 2007년 4월 한.중 친선협회 이세기 회장이 한.중 교류 15주년 개막식 참석차 방한 한 원자바오 총리에게 서복 전시관의 건립취지를 설명한 뒤 받은 것으로 그는 취임한 후 중국 내 어디를 가서도 휘호를 남기지 않기로 유명한데 이곳 서복 전시관의 휘호는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지 않는가 여겨진다.
중국에도 이 처럼 우리의 영웅을 기리는 장소가 한 군데 있다.
중국 산동성 동남쪽에 위치한 석도항 인근에 적산이라는 자그마한 산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 장보고 기념관, 장보고가 세웠다는 법화원등 장보고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는 곳으로 예전 아들이 중국에 와 있을 때 청도 한국영사관 주최 청도의 한국 청소년들 대상으로 한 '장보고 답사행사'에 같이 따라 간 적이있다.
그곳은 기념관을 깨끗이 정리하고 한국 드라마'해신' 스틸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주고, 주변경관을 아름답게 꾸며놓아 중국인들은 이렇게 남의 나라 영웅을 자기들 영웅인 양 주변을 잘 정돈해 우리 한국인들이 그곳을 찾았을 때 비싼 입장료를 받아가며 관광사업을 하고 있었다. 서귀포시의 이 '서복기념관'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중국 관광객들이 찾을지 모르지만 내가 본 그곳은 앞으로 그들을 위한 자료를 조금 더 수집을 해 놓고 시설물 역시 보완해 놓아야 할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서복 기념관'들어가는 입구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내가 제주에갔던 시기에 제주는 가는 곳 마다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날 역시 서귀포 전 지역에서 음악회, 락 페스티벌, 서귀포 문화원 주최 축제, 화가 이중섭을 기리는 축제등 서귀포뿐만 아니라 제주시에서, 구좌읍 세화리에서도'세계밭담축제'등 다양한 행사들이...
사진 속의 노래 부르는 아낙은 제주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간 여학생으로 아마츄어 가수로 자신이 노래를 작곡하고 직접 부르는 '싱어송 라이터'인것 같았다. 처녀의 몸으로 서울로 유학간 딸을 위하여 김치를 해서 올려보내주고, 겨울이면 옷을 사서 보내주는 어머니를 그리는 노래를 주제로 부르는 모습인데 그날 따라 서귀포의 날씨가 흐리고 쌀쌀하여 많은 사람이 방청객은 못 되어 주었던것 같다. 나는 이 기념관을 어서 들어가봐야 하는데 이 가수가 딱 정면을 가로 막고 있어서 공연이 다 끝나갈 무렵 기념관 폐관시간이 다 되어 들어갈 수가 있었다.
'서복 기념관'을 벗어나면 공원이 아름답다는 서복공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담벽에 부조로 서복일행이 제주 정방폭포로 오기 전 과정부터 도착 장면을 조각과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 놓은 곳으로 참 흥미롭게 읽었었다.
물론 고등학교시절 고문시간인지, 역사시간에 이 서복이 제주에 왔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한데 그 내용을 확실히 기억 나지 않아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할 수있어서 좋았던 기회가 아닌가 여겨진다.
다음 회 下편에는 이 서복일행이 입도과정을 설명해볼까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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