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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반 년만에 잇는 죄인입니다.
글 잘 쓰고 싶다. 진짜 잘 쓰고 싶다.
새해가 밝았고, 아키텐의 꼬마 여왕님은 중2가 되었습니다. 아빠 나이는 +20, 막내이모와 새엄마 나이는 +14입니다.
“오라드!”
자욱하니 세상을 덮은 하얀 눈구름에 소리조차 침잠한 듯 고요한 날이었다. 새소리처럼 높고 맑은 어린 목소리가 내 딸의 이름을 반갑게 불렀다. 작은 손을 위로 올려 힘차게 흔들면서. 내 딸은 활짝 웃으며 반갑게 그 상대를 불렀다.
“시빌!”
어른이 준비한 격식 따위 아이들에게는 쓸모없다. 앙굴렘의 어린 백작은 나비처럼 옷자락을 팔랑거리며 달려와 오라드를 덥석 안았다. 뒤에 따라온 마틸드는 놀란 토끼처럼 겁먹은 눈으로 나를 흘끔 올려다보더니 이내 꾸벅 몸을 숙였다. “폐하.” 마틸드가 우물쭈물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자 나는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고 팔을 벌렸다.
“이리 오렴, 아이야.”
마틸드는 조금 긴장하더니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 아이를 안아 올려 서너 바퀴쯤 빙그르르 돌았다. 손목 힘이 부족해서 번쩍 들어주는 건 할 수 없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어린 마틸드는 나를 꼭 잡고 방글방글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줄리아나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옛날 생각이 나서요. 예전에도 형부가 저 많이 안아주셨잖아요.”
처음 만났을 때 줄리아나는 마틸드만큼이나 작고 어렸다. 그때는 나도 파트리샤보다 조금 큰 정도였지만. 문득 그해 겨울 처남과 처제가 물갈이와 성장통으로 앓아누운 나를 위해 쟁반에 받쳐 들고 온 나란한 눈사람이 떠올라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내 눈사람, 파트리샤와 키가 같았지.
“이렇게 빨리 와줄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나는 마틸드를 내려놓으며 처제에게 말했다. 해가 바뀌는 연말은 모든 영주가 분주했다. 선대 백작인 어머니도 보좌해줄 아버지도 모두 잃은 타이유페르 가문의 마지막 자매에게 가신과 영민들이 어떤 모습을 기대할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서 가라고 재촉하던걸요. 서두르지 말고 오래오래 있다가 오라고요.”
그것도 맞는 말이군. 선선대 백작은 병약해 중용되지 못했고 선대는 작위를 계승한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불과 25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지금 백작이 국왕의 절친한 동무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지에서 영주의 소임을 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줄리아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곧 오빠 기일이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나는 내 손을 겹쳐 잡았다.
“형부, 고마워요. 앞으로는 저도 언제나 있을게요.”
12월 21일. 그리고 1월 27일. 신년을 맞는 아키텐은 기쁨과 설렘이라는 외피 속에 슬픔을 억눌렀다. 반란을 진압하며 전사한 이들 중 정확한 기일을 알 수 없는 이들의 유족은 주군이었던 처남을 따라 12월 21일을 기일로 삼고 파트리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던 마지막 전투를 전후해 사망한 이들은 1월 27일이 기일이 되었다. 내가 섭정을 맡은 첫날 바로 파트리샤가 재위 38일 만에 승하했음을 알렸는데 그 후 그렇게 각각 갈라졌다고 한다.
푸아티에 성의 사람들은 몇 달 전 우리 부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십 년도 더 지난 세월 끝에 가문의 고향으로 돌아온 막내 공주를 진심으로 반겼다. 줄리아나는 시종들의 인사를 받으며 살아남은 이의 손을 잡고 떠나간 이를 그리며 눈물을 보였다. 타이유페르 성을 가진 두 의붓딸은 손님으로서 존중받았다. 내 처제는 그 아이들이 세상에서 부모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나 푸아티에는 혈연 아닌 신하의 외가가 되어주려 하지 않았다. 미묘한 차이를 눈치챈 건 물론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제 가족이에요. 그리고 아버지는 푸아티에예요.”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닌 모양인지 어린 국왕은 넌지시 말을 건네고는 바로 제 동무의 손을 잡으러 갔다. 손을 잡힌 시빌이 오라드와 나란히 서고 그 뒤를 나이 비슷한 마틸드와 아드마르가 따랐다. 저희끼리 놀던 다른 아이들도 어느새 스스럼없이 와서 뭉쳤다. 아이들은 새하얀 숫눈을 찾아다니며 배불뚝이를 만들고 토끼를 만들고 백조를 만들었다. 백조였다. 마틸드가 눈을 밟으며 산책 나온 내게 수줍게 웃으며 자신의 걸작을 보여줬을 때, 미처 긴 목과 툭 튀어나온 부리를 알아보지 못한 내가 “멋진 닭을 만들었구나.” 했다가 아이를 서글프게 만들었기에. 판사는 오라드였고 배심원은 프레브라나였으니 나는 자연히 유죄였다. “뭘 만들었는지 먼저 물어보세요.” 마틸드를 달랜 후 프레브라나가 내게 넌지시 속삭였다.
두 선왕과 죽어간 장병들, 그리고 역병에 희생된 모든 이들을 기리는 추모 기도회를 시작으로 연말 행사는 조용히 막을 올렸다. 매일 저녁 이어지는 만찬회에는 국왕의 강력한 의향으로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함께 자리했는데, 고귀한 자는 수를 다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적으니 자연히 농민과 상공인, 말단 사환과 신입 병사 등 일을 하는 자들이 훨씬 많았다. 어린 자식을 데리고 온 가족들은 상석으로 나아가 오라드에게 축복을 청하기도 했다. 오라드는 환히 웃으며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오라드와 주근깨투성이인 작은 파트리샤를 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참석자들 사이의 형평을 맞추려 매일 같은 식사를 받고 낮에는 교역소, 농경지, 시장, 공방, 수도원 등을 싫은 기색 한 번 없이 바쁘게 다니던 어린 국왕은 결국 신년 하례를 받으며 한 해 동안 특별히 공로가 있던 자들을 포상하는 마지막 행사를 마친 뒤 침대로 풀썩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닭고기 안 먹을래요. 냄새도 맡기 싫어요.”
오라드는 사흘을 내리 자기만 했다. 졸지에 국왕을 수행하며 모든 자리를 함께한 앙굴렘 백작 시빌도 녹초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틸드는 봉신의 의무가 없어 크게 고생하지는 않았으나 추위에 약한지 제 언니 곁에 드러누웠다. 아드마르만 조금도 지치지 않은 것처럼 활기차게 쏘다니며 어느새 부쩍 친해진 제 또래와 함께 어울리거나 우리 부부 곁에 앉아서 살갑게 재잘거릴 뿐이었다.
“여자는 원래 약하다고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어머니도 카트린도 약하니까 아버지 안 계실 때면 제가 꼭 지켜야 한다고요.”
오라드가 방에만 있어 서운하지 않냐고 내가 물었을 때 아드마르는 그렇게 대답했다. 이 아이를 들이기 전 오라드가 가장 걱정했던, 자신의 병약함을 알게 될 우려는 다행히 내 예상처럼 성별로 희석되었다. 나는 튼튼한 아들을 가진 고티에르가 내심 부러웠다. 제 아버지를 닮아 강골을 타고났을까. 또 다른 방문자들도 내실을 종종 찾아왔다. 오라드와 비슷하거나 더 어린 아이들이.
“여왕님이 다녀가셔서 모두 행복해했어요. 여왕님을 보고 싶어서 다들 기다렸어요. 이모는 여왕님을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예쁜 분이 계시느냐고 했어요.”
“그래도 저희 할아버지는 좀 힘들어하셨는데. 썰어야 할 고기가 많아서요. 그래도 모처럼 공주님이 오셨고 또 여왕님이 잘 드시니까 부지런히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막내 삼촌이, 아, 막내 삼촌은 열네 살이에요. 막내 삼촌이 주방에서 많이 도왔어요. 정말 열심히요. 막내 삼촌이 조금 더 크면 할아버지나 할머니처럼 여기서 일하게 될 거랬어요.”
“저, 폐하. 저는 제 아비를 보러 종종 치안대에 갑니다. 식구가 만찬에 초청받아 텅 빈 집만 골라서 터는 도둑이 있다고 합니다. 아비가 꼭 잡을 것입니다.”
대부분 어른은 아이를 경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가 어른 무리에 섞여 돌아다녀도 괘념치 않고 오히려 아이에게 이것저것 털어놓기도 한다. 덕분에 나는 그들이 어전에서 돌아간 후 저들끼리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일부나마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프레브라나가 아이들을 자주 불러 간식을 대접해도 그 시간에 내가 정무를 잠시 쉬며 내실로 돌아가도, 그 누구도 ‘똑같이 어린 자식을 키우는 부부’를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이들을 돌려보낸 후 내가 잠시 말이 없자 프레브라나가 눈을 깜빡이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맥없이 대답했다.
“내가 저만했을 때 생각이 나서.”
더 나아지고 싶었다. 내려오는 밧줄이 어디로 이어져 있든 그게 무엇이라도 잡고 싶었다. 그러나 겨우 귀족의 이름만 가진 채 벽지에서 재산 한 푼 없는 셋째아들인 내게는 올라갈 계단조차 없었다. 누군가를 의지하려 해도 너무 어렸고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될 가족도 있었으니. 그리고 지금의 나는 저 아이들이 나를 호의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용하고 있다. 내 아이를 위한다는 핑계로. 그러자 프레브라나가 생긋 웃었다.
“사실은 저도 그래요. 저도 더 좋은 집으로 가보고 싶었어요. 높은 사람들도 만나고요. 왕궁에도 가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니 내가 아주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소.”
“저 아이들에게 해가 될 일을 하지는 않으시잖아요. 아이들이 당신 오기를 얼마나 기다리는데요.”
프레브라나는 작은 두 손으로 내 손을 꼬옥 감쌌다.
“당신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좋은 사람이에요. 선생님도 불러주고 임금님도 만나게 해주고 앞으로 함께할 동무들도 모아줬어요. 우리가 떠난 뒤에도 몇 년이 흘러도 푸아티에 성에서 이번 겨울을 보냈다는 경험은 저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줄 거예요. 당신이 해준 거예요. 돈주머니를 쥐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에요.”
“누구든 그 정도는 하지 않겠소? 선대왕 시절에도 했던 일인데.”
“저 아이들 지금 시기에 이런 배려를 해줄 수 있는 영주님은 당신뿐인걸요. 당신이 아니면 누구도 못 해요.”
프레브라나는 겹쳐 잡은 내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다 댔다. 그리고 순한 동물이 그러는 것처럼 자신의 얼굴을 몇 번 비비고는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내 얼굴에는 자연히 미소가 떠올랐다. 양심의 가책은 잠시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며칠 뒤 지루한 겨울비가 조용히 내리며 눈을 다 녹였다. 오라드는 눈이 내릴 적보다 더 추워하며 불가 옆을 떠나지 못했다. 국왕을 교육하는 영예를 누리던 교사들은 국왕 대신 국왕의 친구들만으로 시간을 채웠다. 줄리아나는 제 몸 두께만큼이나 겹겹이 이불을 덮은 조카가 잠드는 걸 지켜본 뒤에 넌지시 내게 말했다.
“오라드는 할아버지 체질을 많이 닮았나 봐요. 아버지가 겨울을 질색하셨잖아요. 어머니와 언니는 안 그랬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자란 나는 아이에게 약한 몸을 물려주었을 거라는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오라드는 사실 나를 많이 닮았다. 병에 걸리기 전에는 배앓이 한 번 하지 않았던 건강한 아이였다.
언제나 시리게 하얗던 하늘이 조금씩 색채를 되찾아갈 무렵이었다. 새로 수습 관료가 된 이들을 배치하기 전 기존 인원들의 소소한 인사이동이 있었다. 작년 연말에 논의한 대로 보르도의 관원과 당분간 임지를 교환하게 된 이들은 떠나기 전 오라드에게 작별을 고했는데, 오라드가 떠나는 이들에게 차례로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고 잘 지내다 오라는 짧은 인사까지 건네자 몇 사람이 깜짝 놀란 눈으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나와 오라드를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르도에서 출발한 관원들이 도착해 내가 주재하는 가운데 서로 간단한 인사와 친목을 나눴다. 그들도 오라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오랜만에 만난 동네 이웃을 대하는 양 웃는 낯으로 안부를 묻자 얼굴의 홍조를 감추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인상을 바꾸려 길렀던 수염을 윤곽만 남을 정도로 짧게 잘랐다. 하는 김에 길이가 애매해진 머리카락도 다듬고 나와 비슷한 나이대 청년 관료들이 즐겨 입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말쑥한 새 옷이었으나 평소 걸쳤던 것에 비하니 어쩐지 옷을 다 입지 않은 것처럼 허전했다. 아르투아 백작이 가장 먼저 내 변한 모습을 보고는 해득하기 어려운 푸른 눈을 들어 조심스레 물었다.
“……혹여 제가 미진한 부분이 있었습니까?”
나는 짐짓 웃어 보였다.
“그대는 할 일이 많지 않은가. 다녀오겠네.”
아키텐으로 오고 싶은 건 생명을 위협받는 난민만이 아니었다. 제 살던 곳이 어지러워지거나 혹은 주군에게 밉보여 새 터전을 찾는 이들도 이주할 뜻을 넌지시 내비치곤 했다. 왕조에 봉사할 이들을 파악하는 것은 아르투아 백작의 소관이었으나 이번만은 다소 경우가 달랐다. 오는 사람이 나와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이었으므로. 스코틀랜드 던바의 장군 에릭이 며칠 전 생통주의 라 로셀 항구에 도착해 아키텐에 봉사할 뜻을 밝혔다. 이미 우리가 그의 좌천과 주군 백작의 냉대를 확인한 후 몇 차례 접선한 끝에 오는 것이나, 이 일을 담당하는 첩보관들은 혹여 의사 전달이 원활하지 않을까 싶어 통역관을 요청했다. 대화 주제와 사안의 기밀 유지를 고려하면 나 이상의 적임자는 없었다. 준비를 마친 나는 마침 같이 있던 프레브라나와 줄리아나를 찾아 잠시 자리를 비울 것임을 알리러 갔다. 그러자.
“그렇게 멀리 떨어져 본 적 없어요.”
프레브라나가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줄리아나는 나를 빤히 보더니 “지금이 더 낫네요.” 라 짧은 감상을 덧붙였다. 내 코 밑에 검댕으로 수염을 그리고선 마음에 안 들었는지 “지금이 더 나아요.” 하던 그리운 모습이 어렴풋이 겹쳐졌다.
하늘은 알맞게 흐렸다. 얼음을 품은 하얀 구름이 태양을 덮어 말들이 여유롭게 타박타박 걸었다. 회색 성을 벗어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산책 시간 끝에 도착한 생통주 접경의 초소 근처는 폭이 좁은 클랑 강이 굽이쳐 흘러 겨울의 옅은 습기가 감돌았다. 내 눈은 습관대로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돌림병의 예후를 살폈다. 잠시 기다리니 낯익은 얼굴 하나와 그를 위시한 이 몇이 등장했다. 낯익은 얼굴은 아르투아 백작 밑에서 일하는 첩보관이었는데, 그는 보기 드물게 눈을 둥글게 뜨며 나와 나를 호위하며 온 평복 차림의 이들을 빠르게 훑더니 바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 찰나였다.
“…자네가 이번 일을 도울 통역사인가?”
낯선 이가 슬며시 한 발짝 나서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내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고개 숙인 이가 벌떡 몸을 세우더니 그의 목덜미 뒤를 후려치며 한껏 낮춘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멍청한 놈아! 상왕 폐하이시다!”
말이 끝나자마자 나를 ‘자네’라 부른 이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몸을 숙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사람이 일제히 같은 행동을 취하자 행인 일부가 흘끗 고개를 돌리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하나 다행히 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내 차림새가 나를 그저 이들의 상급자로 보이게 한 것 같았다.
“이 중에 무인이 아닌 자를 찾은 눈썰미는 칭찬해야겠군. 더는 말하지 말게.”
그렇지만 겨우 화려한 옷을 벗고 모발을 다듬은 정도로 자국의 왕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첩보원들은 문제가 있다. 아무리 나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던 신입이라지만. 돌아가면 당장 화공을 불러 이들에게 줄 용도로 오라드와 나, 프레브라나와 줄리아나의 용모파기를 맡겨야겠다. 그 외 직접 볼 기회가 별로 없는 툴루즈 공이나 주요 요인들의 용모파기도 같이. 작은 계획을 세우며 나는 그들과 함께 창고로 들어가 공구가 즐비한 1층을 지나쳐 2층의 방으로 올라가 ‘고용된 통역사’답게 문과 가장 가까운 말석을 골라 앉았다. 내가 평범한 관리로 일했었던 처남 시절에도 절대 앉아본 적 없던 자리였다.
방 안의 분위기가 숨소리조차 제대로 못 낼 것처럼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묻지 않아도 나 때문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임용을 검토하는 자리이기 이전에 내게 근무 평가를 받는 자리일 테니. 그렇다고 긴장을 풀도록 날씨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라도 하자고 권할 수는 없으니 나도 침묵을 유지했다. 답답한 시간은 내가 돌아가면 이들의 교육을 어떻게 하고 장차 충원은 어떻게 할지 속으로 서른 가지쯤 떠올려 본 후에야 끝이 났다. 우리가 기다리던 이가 문을 열고 등장했다. 그를 인도한 위병은 장검과 단도를 잠시 맡아두었음을 보인 후 물러났다. 나는 접선 당시 그가 밝혔던 오른쪽 눈 아래 작은 흉터를 찾아냈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 두툼하게 기른 콧수염. 알려진 대로 그는 무인보다는 일반 문관에 더 가까운 풍모였다.
“에릭 경,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아키텐에 잘 오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상석에 앉은 첩보관이 짧은 환영 인사를 하며 자신의 직급을 밝혔다. 그가 말을 마친 후 나는 정말 오랜만에 그리운 조국의 언어를 입에 올리며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에릭은 앉는 대신 내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의 현명하신 수호자께 인사 올립니다. 폐하, 배알하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모르겠다. 나는 에릭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사람 잘못 봤다며 그 말을 부정하지도 못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내 말이 어눌했나? 신분을 드러낼 만한 장식을 빼지 않고 왔던가? 아니면 이 방에 들어오기 전 바깥에서 왕족이 있음을 눈치챌 만한 단서가 있었나? 짧은 순간이었으나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그가 슬며시 시선을 들며 덧붙여 말했다.
“폐하께서는 형님이신 모레이 공을 많이 닮으셨습니다.”
던바의 중진이었으니 내 형을 본 적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제야 나는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감출 필요 없겠군. 맞게 봤네.”
에릭은 내 옷자락에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정체를 밝히자 상석에 앉은 이가 재빨리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일어선 김에 한 자리씩 옆으로 옮겼다. 나는 상석으로 자리를 옮긴 뒤 에릭에게 말했다.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내가 돕겠네. 심문하는 자리가 아니니 편히 말하게.”
나는 내게 자리를 내준 이에게 눈짓했다. 이 자리의 주무관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정말 본인이 맞는지 그동안 오간 서신의 내용부터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어 조금 전 그에게 얻어맞았던 이가 에릭의 태생과 최근 던바에서 있던 일 등 자신이 준비해온 것을 차근차근히 물었다. 나는 그가 신입이리라 짐작했는데, 가장 직급이 높은 이의 바로 옆에 있던 것도 그렇고 제법 지위가 있는 자였다. 내가 도울 일은 많지 않았다.
나는 횃불에 시야를 의지하며 이슬 맺힌 밤거리를 돌아왔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잠행이라 나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초소에서 묵을 수는 없었다.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태운 밤색 말이 축축해진 어두운 땅을 걸으며 한기에 몸이 시린지 가볍게 투레질을 했다. 내가 돌아왔을 때 내 사랑하는 딸은 기운 없는 몸으로 나를 기다리다가 지쳐 잠든 지 오래였다.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아예 안 자고 버틴 유일한 사람은 반달 같은 눈에 장난기를 가득 담고 나를 요모조모로 보며 대뜸 이렇게 말했다.
“못 보던 분이네요. 어디 살아요? 이름은 뭐예요?”
그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프레브라나는 내 앞으로 다가와 목에 손을 감고 바짝 몸을 붙였다.
“나랑 결혼해 주세요. 맛있는 거 많이 해드릴 수 있어요. 예쁜 털모자도 만들어 드릴게요.”
청혼이 꼭 순진한 아이를 꾀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조금 내밀어 그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유부녀가 그런 소리 해도 되오?”
“뭐 어때요.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안 되면 나랑 불장난해주세요. 남편한테 안 들킬 수 있어요.”
자신이 말하고도 퍽 웃긴 소리였는지 프레브라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까르르 소리 내며 웃었다. 웃음소리에 맞춰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프레브라나와 시선을 맞추며 무릎 위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서방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오. 어떤 사람이오?”
프레브라나는 멈칫하더니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곁에 앉아 팔짱을 꼈다. 겨울밤 공기를 지나며 언 몸에 닿은 체온은 기분 좋게 따뜻했다.
“음. 세상에서 제일 착해요.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는 제일 착했으니까요. 그런데 자기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머리카락은 저 바깥의 나무줄기처럼 짙은 갈색이고 고양이처럼 눈이 초록색이에요. 키도 크고 잘생겼어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에요.”
히힛. 프레브라나는 내 어깨에 볼을 비볐다. 그러다가 무언가 중요한 게 떠오른 양 “아.” 하고 짧은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빤히 보았다.
“그렇지만 나를 건드린 걸 알면 그 사람이 당신을 죽일 거예요. 나를 정말 사랑하거든요. 화나면 아주 무서워요. 누구도 못 막을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잡히지 않은 다른 쪽 팔로 프레브라나를 감싸 안았다. 프레브라나는 배시시 웃으며 나와 이마를 맞댔다. 나와 그이는 서로의 축축한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목숨을 걸어야 할 미인을 옆에 두고도 모르고 살고 있었군.”
“미인이 아니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당신이 예쁘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없소.”
“그럼 제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예쁜 걸로 할게요.”
“첫 번째는 누구요?”
“우리 딸이요.”
작은 두 손이 내 뺨을 감쌌다. “따가워라.” 프레브라나는 내 뺨을 지그시 누르며 입을 맞췄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이를 쓸어 안았다. 그때까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장작불 소리가 타닥타닥 희미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사랑해요.” 하는 작은 속삭임과 함께.
다음날 나는 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아르투아 백작을 만나게 되었다.
“제 밑의 사람들이 폐하께 무례를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어제 자리를 비우느라 미뤄진 보고서를 읽으며 마르탱과 신병 모집을 의논하던 도중이었다. 아르투아 백작의 체면을 생각했는지 마르탱은 자리를 피해주려다가 내 손짓에 발걸음을 멈췄다. 한편 나는 다른 생각을 하다가 들은 탓에 아르투아 백작이 무슨 말을 한 건지 한참 멍하니 기억을 헤집어야 했다.
“내 직속도 아니고 그 친구들이 나를 언제 봤겠나. 꽤 놀랐을 테니 너무 나무라지 말게.”
내가 아르투아 백작을 장관으로 임명하고 6년이 지났다. 기존 체계를 이루던 관료들은 괴멸에 가까울 만큼 죽거나 살기 위해 떠났으니 어제 내가 본 이가 관적에 이름을 올리고 약 몇 년쯤 지났을지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나도 관료였고 지금은 이들의 수장이므로.
그런데 그이가 내 얼굴을 몰랐기로서니 그게 무례가 되나? 처녀만 찾는 고자라거나 바로 앞에서 북쪽 섬 야만인이라 한 것도 아닌데. 몇 년 전에는 일부러 여편네를 죽이고 이미 죽은 자식은 바꿔치기한 개자식이라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다. 처남도 내가 죽였다고 했었지.
“……일일이 다 죽였으면 지금쯤 내 앞에는 성벽 높이만큼 시체탑이…….”
“폐하?”
아르투아 백작이 눈에 띄게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불렀다. “음?” 나는 그이가 왜 저러는지 모르고 부름에 답했다가 내 입술이 열려 있음을 알아챘다. 정신 놓고 있다가 몇 마디가 새어나간 모양이었다.
“실언했군. 놀라게 해서 미안하네. 잊어버리게.”
내가 성내면 내 비위를 맞추려 많은 사람이 몸을 사리게 된다. 그중에는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없애려 일부러 나를 이용해 차도살인하려는 자도 나올 테고. 내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여러 사람의 목숨이 달렸다.
“그래도 언제 한 번 그 친구들 불러서 밥 한 번 먹이든지 해야겠군. 마침 줄리아나 공주가 여기 와 있으니. 그대가 한 번 자리를 마련해 보게. 닭은 꼭 빼고. 오라드가 아직 싫어하니까.”
나는 아르투아 백작에게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고 그이가 볼 수 있도록 내 앞에 놓인 서류들을 내민 뒤 잠시 기다렸다. 파악이 빠른 사람이라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먼저 내가 마르탱에게 말을 건넸다.
“상이자가 어느 정도 있으리란 건 예상했소. 하나 예전과 비교하면 그 비율이 퍽 높아 보이는데 혹시 다른 이유가 있소?”
의외로 병사는 다친 사람이 많다. 건장한 사람은 농사를 짓거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옮겨가 상공업에 종사한다. 물려받을 가업이 없으면서 재산마저 변변치 않은 이들이 주로 군영의 문을 두드리고 다소 상해를 입더라도 생계 문제로 퇴역하지 못한다. 웬만큼 경력이 있는 병사 중에는 손가락이 일부 없는 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 새내기더라도 끔찍한 흉터 정도는 드물지 않았다. 오히려 외모가 부드럽지 않아 채용을 거절당한 탓에 병사가 되기도 하므로. 마르탱은 자신의 잘못도 아니건만 면목 없어 하며 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이미 아시는 것에 더할 일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찾아가 봐야겠다. 생활 환경도 점검할 겸. 그렇게 내가 빈 날짜를 헤아리고 있을 때 아르투아 백작이 넌지시 대신 대답했다.
“신병 보충은 폐하께서 작년에 가장 마지막으로 지시하셨던 일입니다.”
그 말에 나는 “아.” 하고 벌어진 입 사이로 소리를 냈다. 이 사람 저 사람 빠지고 남은 사람들이 지원했다면 이 숫자는 그럴 만하다. 아르투아 백작은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 내가 건넸던 서류들을 조용히 우리 셋의 중앙으로 내밀었다. 나는 아르투아 백작을 향해 다음 화제를 이었다.
“투아르와 맞닿은 서쪽이 텅 비었네. 투아르는 전체가 다 그렇고. 지난 반란이 원인일 테지.”
지난 반란에서 푸아티에는 쭉 농성하며 국왕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그렇다면 공격받은 지역이야 당연히 쑥대밭이 되겠으나 반격을 받지 않은 투아르의 동부까지 사람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건 부자연스럽다. 반란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선왕께서 자애로 투아르를 품어주셨으나 군주를 시해한 오명은 왕조가 지속되는 한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반역자가 목표로 삼았던 푸아티에와 바로 이웃하니 더욱 그럴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페리고르도 가주가 반역을 저질러 참수되고 가산은 적몰되었네. 그렇지만 지금 그 사실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들이나 어렴풋이 기억하고 페리고르를 배척하진 않았지. 물론 그건 개국 후 페리고르의 영주가 된 엔초 경의 위명이 전 영주의 오명을 덮은 덕이겠지만.”
나는 결혼 초에 파트리샤가 데려가 준 작은 무덤을 떠올렸다. 이제는 나만 사연을 아는 무덤이다. 생전의 파트리샤는 줄리아나에게 어머니의 상처를 드러내는 씨다른 언니를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지금 페리고르는 이탈리아의 평민 기사 출신으로 개국공신의 자리에 오른 백작 가문의 봉읍일 뿐이다.
“겐트도 투아르와 비슷하겠지?”
“아르투아가 아니라 자주 돌아보지는 못했으나 거의 그러합니다.”
“그들은 그저 우연히 그곳에 태어나 살았을 뿐이네. 파트리샤도 무고한 자들이 차별받거나 향후 불이익을 받기를 원치 않아 국왕령의 직할지로 만들었지. 아마 선선대왕께서 승하하시는 일 없이 무사히 반란을 진압하셨더라면 더 관대한 처분을 내리셨을 걸세.”
반군으로 죽은 자는 주군을 잘못 만난 탓에 이름조차 밝히지 못한다. 살아남은 자는 미증유의 역병으로 행정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고향과 과거를 버렸다. 떠날 수 없었던 자들만 그대로 남아 백안시를 감수한다.
“아까운 땅이지. 그렇지 않소?”
나는 마르탱을 보며 손가락으로 지도를 톡톡 두드렸다. 마을 여러 곳이 깡그리 사라져버린 지역이었다. 다시 사람으로 채우지 않으면 손도 못 댈 야생으로 고착될 것이다. 먼저 부엽토로 뒤덮인 수로부터 깔끔히 정돈하고 생활에 필요한 시설을 갖춘 후 이주를 유도해야 한다. 이미 농번기다. 첫 길을 잘 트면 다음 길은 저절로 열리기 마련이다. 마르탱은 내 말을 열 마디로 알아들었다.
“하명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나는 한 마디를 더했다. 순전히 내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다.
“지금은 사람 하나가 지극히 아쉬운 때이니, 출신이든 외모든 부당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자가 없는지 세심히 살펴주시오.”
며칠 후 으레 오던 손님 대신 새로운 손님이 교역의 선금으로 금화가 가득 담긴 궤짝을 들고 나를 찾았다.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는 검은 모피를 스톨로 걸친 스코틀랜드의 신임 대사는 왕좌에 앉은 오라드에게 부임을 알리며 자애롭고 부귀한 여주인의 만수무강과 오랜 통치를 빌더니 이어 ‘친애하는 친척’으로서 스코틀랜드 국왕 길크리스트의 당부를 전했다. “조카에게.” 편지로만 조카라 칭하는 내 두 살 위 외당숙이 항상 하던 교역에 추가로 더한 요구는 아주 간단했다. 스코틀랜드로 향하는 아키텐의 과실주 수출량을 늘려 달라는 것. 역병이 창궐하던 시절 핀 기스킹 경의 둘째 사위인 노르게의 비욘 왕이 수도를 침략해 임신 중이던 왕비와 왕자, 공주가 모두 비명횡사한 뒤로 스코틀랜드 국왕이 술독에 빠져 산다는 건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오라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낭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내 친척에게 아주 큰 경사가 있었다고 전해 들었네. 기쁨을 나누려 하는 이들이 많은가 보군.”
작년 가을 스코틀랜드의 젊은 새 왕비가 공주를 낳았다. 국왕의 나이가 이미 30대 중반이기에 여러 사람이 고대하던 왕자는 아니었으나 앞선 자녀들이 몰살을 당한 뒤 얻은 귀한 첫 자식이었다. 다만 국왕은 공주 탄생 소식을 듣고는 준비했던 마상 경기를 취소했다고 한다. 나는 나서지 않고 내 딸을 지켜보며 신임 대사를 살펴보았다.
“귀국의 다정한 부탁은 우리가 충분히 검토해본 후에 되도록 좋은 대답으로 돌려주겠네. 그것에 더해 품목과 별개로, 귀한 공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뜻에서 따로 선물을 보내려 하니 부디 기쁘게 받아준다면 고맙겠네.”
“우리 공주님을 대신해 폐하의 후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대사는 정중히 몸을 숙이며 답했다. 그는 나를 제치고 어린 오라드가 주재하는 모습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전임자에게 들은 것이 많은가. 그는 이어 스코틀랜드 국왕의 선물로 흰 족제비 모피가 가득 든 상자를 열어 보였다. 아키텐 국왕이 하얀색을 좋아한다고 바다 건너까지 알려진 모양이었다. ‘저런 건 싫어할 텐데.’ 나는 흘끗 오라드의 눈치를 살폈다. 오라드는 바다를 건너느라 피로했을 테니 쉬며 여독을 풀길 바란다는 으레 쓰이는 말만 할 뿐 불편한 기색은 드러내지 않았다.
“제가 까만 토끼를 키우고 흑마를 타면 뭘 잡아서 가져올까요?”
불평을 듣는 건 내 몫이었다. 오라드는 하얀 토끼 피니를 품에 안고 투덜거렸다. 보르도 왕성의 화단에 고이 잠든 올리가 그랬던 것처럼 부르면 오고 손을 내밀면 몸을 비비는 영리한 토끼는 느긋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고 이 나라 국왕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사자라도 잡아 오겠지.”
그러자 오라드가 삐죽였다.
“사자는 까맣지 않아요.”
“새빨간 사자도 없잖아.”
그래도 사자를 가문의 문장으로 쓰는데 사자를 죽여 그 가죽을 바치는 건 안 하지 않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피니를 쓰다듬었다. 자기가 얼마나 귀한 대우를 받는지 이 토끼는 영영 모를 것이다.
먼 교역을 떠나기 전 성스러운 국왕에게 축복을 받으려는 교역상들이 선물을 들고 날짜를 달리해 여럿 방문했다. 작은 새알 같은 진주, 바다빛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푸른 보석을 이은 목걸이, 포효하는 사자 머리를 세공한 두꺼운 백금 반지, 알모라비드의 한 총독 일가가 내놓았다는 청금석이 알알이 박힌 단검, 지중해의 동쪽 끝에서 실어 온 술 등이 줄줄이 선을 보이며 진상되었다. 누군가는 왕가의 끝없는 부를 칭송하며 패물 대신 책을 건네기도 했다. 1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내가 이 나라의 재무를 담당하는 장관이었으므로 그들을 위해 민간에서 쉽게 접하지 못할 정보를 알려주거나 교역에 필요한 추천장을 넘겨주는 것 등은 모두 내 몫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접견으로 바쁜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아르투아 백작과 그 새신랑 외스타슈는 신혼부부를 축하해주고 싶은 이들에게 둘러싸이고, 국왕의 동무로 공주를 의붓어머니로 둔 소녀 백작 시빌도 선대와의 교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아드마르는 어느샌가 손에서 간식이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서류를 검토하는 내 손 근처에는 언제나 아이가 종종거리며 가져온 과자가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고기 먹고 싶어요.”
나는 그때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리고서도 오늘이 며칠이나 되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접견할 외부 인사가 없는 우리만의 소박한 식사 자리에서 아드마르는 풀죽은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농지 개간, 수로 정비, 군락 재건, 병영 신축, 진료소 확장 등 내가 스스로 벌인 일이라 누구에게 우는 소리 한마디 못 한 채 자주 외근을 나가다 보니 아이들의 식선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먹었던, 이미 앙상한 뼈를 절반이나 드러낸 넙치를 보며 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 했다. 나보다 마틸드가 더 빨랐다.
“대제절이잖아. 참아야 해.”
“그렇지만 기운이 없어. 어지럽다고. 생선은 싫어.”
사순절이더라도 아이와 노인, 병자, 임부 등 영양이 필요한 자는 고기를 금하지 않는다. 하물며 열 살 남짓한 아이들임에야. 그때 오라드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열세 살이 되었으니 괜찮아요. 그렇지만 아드마르는 아직 어려서 힘들 거예요.”
“오라드, 잠깐만. 아빠는 전혀 몰랐어.”
나는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그동안 식사를 준비한 주방장에게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을 꾸욱 억눌렀다. 줄리아나가 오빠와 아버지를 닮은 푸른 눈을 둥글게 뜨고 내게 물었다.
“형부가 몰랐다고요? 알리지도 않았어요?”
그러자 프레브라나가 물벼락을 느닷없이 맞은 생쥐처럼 움츠러들었다. 나는 식탁 아래로 손을 내밀어 그이의 허벅지 위에 가볍게 얹었다. 이 사람 잘못이 아니다.
“오라드 말대로 오라드가 열세 살이 되었으니 무심코 상례를 따랐겠지. 지금은 그냥 먹자. 이것도 먹을 만하잖아. 저녁에는 맛있는 걸 달라고 할게.”
아이들은 착하게도 내 말을 잘 들었다. 약속해달라는 다짐도 없이.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아이들을 위해 고기를 올리라 주방장에게 부탁하겠다는 프레브라나를 제지하고 주교를 만나러 예배실로 향했다. 위치가 애매한 프레브라나에게 교단의 관습을 거스르는 악역을 맡길 수는 없었다. 다행히 주교는 신학생들을 돌려보내고 예배실 안쪽에서 혼자 쉬고 있었다. 아니, 머리를 대고 졸고 있었다.
“그대의 지혜를 구할 것이 있어서 찾아왔소.”
여느 때였으면 깨우지 않고 발길을 돌렸겠으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내 목소리를 들은 주교는 잠이 덜 깬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나는 의자를 하나 끌어당겨 그이 앞에 적당히 앉았다. 주교는 내 행동에 더욱 당황하더니 자신이 앉았던 의자에서 아예 일어났다.
“앉으시오. 괜찮으니.”
나는 손바닥을 살짝 들어 보이는 것으로 그에게 착석을 허락했다. 그는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순순히 앉았다. 원래 나는 가족과 가신들을 대동하는 정기 예배 시간 외에 예배실을 찾는 일이 없었기에 이 자리의 분위기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양 냉랭하게 경직되었다. 일방적인 긴장이었다.
“목회자의 소임이 쉽지 않음은 내 비록 속인이나 알고 있소. 그대가 왕가를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음도 말이오. 내가 국왕을 대신해 푸아티에를 돌보지 못했던 동안 그대가 선량한 이들의 길잡이가 되어줌에 깊이 감사하오.”
그와 나는 사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 까닭에서인지 주교는 나를 보는 것도 겨우 하며 “망극하옵니다.”라는 형식적인 단어로 답했다. 나는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내 딸을 비롯해 이 나라에 더없이 소중한 어린 친구들이 어른들의 자취를 따르려다 무척 힘이 드는 모양이오. 열 살도 안 된 아이도 있잖소.”
주교는 어리둥절한지 눈빛을 흐렸다. 그러다가.
“폐하, 소인이 그리한 것이 아닙니다. 소인은 그저 국왕께서 열셋이 되셨으니 관습을 따르시어 모범을 보이시는 편이 좋으리라 싶어 언질을 줬을 뿐입니다. 그 외의 일은 모르는 일입니다.”
오라드가 연약하니 나는 금육일인 금요일에서 일요일 낮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식선에 고기가 끊이지 않도록 지시했다. 오라드가 아프다는 사실은 숨긴 채로. 즉 그리스도의 고행을 기리는 사순절이 다가오자 식선을 담당하는 자는 관습과 내 지시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주교에게 조언을 구했고, 주교는 여상스레 관습을 따르라 말했다. 아직 열셋이 되지 않은 아드마르나 마틸드가 덩달아 금육하게 된 것은 국왕과 함께 식사를 드니 굳이 국왕보다 더한 배려를 할 수는 없어서였겠지.
“실은 내 딸이 아직 아프오.”
나는 그에게 명분을 주기로 했다.
“남쪽 보르도에서만 주로 지내던 아이라 이번 겨울이 유독 춥게 느껴졌던 모양이오. 추운 바람을 쐬는 날이 길기도 했고. 내 딸과 함께 지낸 앙굴렘 백작도 마찬가지로 아침이 되면 열이 떨어지지 않아 얼굴이 발갛소. 그대의 말대로 모범을 보여야 할 위치에 있으나 아직 어린 소녀들이잖소.”
그때 나는 ‘지금 오라드와 시빌의 키를 보고도 아이들을 40일이나 금육시킬 마음이 드느냐’며 따지고 싶은 것을 슬며시 억눌렀다. 내 앞의 상대는 파트리샤도 선대 앙굴렘 백작도 본 적이 없을 테니. 주교는 면목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소인이 경솔해 군주의 안위를 우선 살피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나는 일부러 빙그레 웃어 보이며 그의 손등을 감싸 잡았다. 원하는 대답이 나왔으므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량으로 이해해주니 아이의 아비로서 내가 그대에게 고마울 뿐이오. 그대를 믿고 이만 돌아가 보겠소.”
“저, 폐하.”
주교는 일어서려던 나를 불러 멈췄다. 나는 멈칫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절대 말해서는 안 될 엄청난 기밀을 누설하는 듯 주저하더니 걱정이 가득 담긴 눈을 하며 입을 열었다.
“국왕께서 종종 예배실을 찾으십니다.”
사실 내 마음속에서는 신을 떠나보냈으므로 오라드가 홀로 여기 와 기도하는 모습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국왕의 신실함이 굳이 부모에게 알려야 할 만큼 문제가 될 것은 아니며, 원래 그때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게 해달라거나 내일 식탁에 맛있는 음식이 오르게 해달라는 사소한 이유로도 신을 부른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넘겨짚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묵상하셔서 무엇을 기원하셨는지는 모르오나, 하염없이 우셨습니다. 한 번이 아닙니다.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떻게 집무실까지 돌아갔을까. 모든 기억과 인식이 겨울 호수의 짙은 안개에 휩싸인 양 희뿌옇기만 했다. 내 머릿속의 오라드는 지금의 모습이 아닌 나와 탑에서 지냈을 때의 어린 모습으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엉엉 울었다.
어떻게 물어야 할까. 물어도 될까. 자존심이 강한 아이라 잘못 건드리면 나와 말도 안 하려 할 텐데. 아이를 속상하게 할 만한 일이 있었던가. 내가 놓친 부분은 없었나.
그날 밤 나는 꿈에 위그를 보았다. 나는 위그가 갑주를 걸친 모습도 반역자로 전락해 죄인으로 압송된 모습도 보지 못했기에 그저 플랑드르 공작의 모습 그대로였다. 위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나를 보고만 있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뜨니 세상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내 곁에 누운 이가 파트리샤가 아닌 프레브라나임을 알고서야 나는 위그가 이미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걸 떠올렸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이 연둣빛으로 물든 세상을 비춰 완연히 봄이 왔음을 느끼게 하던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형의 편지가 도착했다. “친애하는 아우에게.” 길크리스트의 아들이 열 살에 요절한 후 언제나 모레이 공작의 서명을 쓰게 된 형의 편지에는 내 형수이면서 당질녀인 모레이 공작 줄리아가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는 기쁜 소식이 적혀있었다. 부모 각각의 부친인 길크리스트와 말콤의 이름이 붙은 쌍둥이였다.
보고 싶은 조카들에게 숙부로서 줄 첫 선물을 고민하던 때 잉글랜드의 데본 백작이 내게 친전을 보냈다. 데본 백작과 나는 사적인 교분이 없고 잉글랜드 국왕이 아닌 봉신 백작이 아키텐의 정부 수반에게 ‘반드시 본인에게 직접 전할 것.’이라는 서신을 보냈으니 나도 나를 위시한 이들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시종이 내게 겉봉을 확인시켜준 후 편지를 열어 내게 보였다. 정중하게 쓴 내용을 확인했을 때, 내 심장은 닻처럼 무거운 추를 달고 바닥없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렸다.
위그의 막내아우 가르시아가 데본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이미 병이 깊어 수시로 괴성을 지르며 제힘으로 방 밖을 나가기도 어려워한다. 데본 백작은 가르시아가 앓는 병이 전염병이 아님을 밝히며 가족의 정으로 아키텐 국왕이 데려가겠다면 기꺼이 입항을 허가하겠음을 전했다. 나는 사자를 정중히 대접하도록 부탁하고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태연한 척 걸음을 옮겼다. 가족들에게는 가지 않았다. 오라드에게도. 내 발은 나도 모르게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서 걷고 또 걸었다.
내가 파트리샤와 결혼하며 가르시아를 처음 만났을 때 가르시아는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아기였다. 다음에 보았을 때 파트리샤에게 “왜 누나는 친동생하고 결혼했어?”라 물을 만큼. 오라드가 태어난 뒤에는 오라드가 누나의 딸이니 동생이 아니라 조카라는 사실을 설명해야 했다. 내 기억 속에서 점점 자라던 가르시아의 모습은 처남의 대관식 축제 즈음에서 멈췄다. 겨우 열 살 남짓했을 무렵이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은 청년이 되었다.
푸아티에 왕가의 유일한 성인 남자.
필리파 공주를 데려오려 했을 때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의지할 곳을 잃고 타국에 홀로 남겨진, 그렇지만 능력을 증명할 기회가 아직 주어지지 않은 어린 조카를 대신할 수 있으며 남편에게 왕관을 줄 수 있는 공주. 그리고 마찬가지로 홀로 타국에 남겨졌으나 여건만 된다면 스스로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청년 왕족. 내 딸이 성년을 맞으려면 아직도 2년 반이나 남았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도 줄리아나 공주 다음 계승서열인 20대 당숙은 충분히 위협적이다. 오라드에게는 다른 왕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으니 더욱. 데본 백작은 아키텐 정부의 입항을 허가하겠다 했으니 고국으로 맞이할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올가미와 단도를 쥔 집행자가 가더라도 제지하지 않을 것이다. 친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로서도 가르시아가 부담스러울 테니.
“……내가 드디어 미쳤구나.”
가르시아는 죄가 없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지을 걸 예상해서 미리 해치면 안 된다고 이 나라의 국왕이 그러지 않았던가. 하나 남은 외당숙마저 죽여서 내 딸을 더 외롭게 만들 참인가. 힘을 갖지 못하도록 플랑드르로 돌려보내지 않고 내 감시하에 두면 될 일이다. 아키텐이 정당한 새 후계자를 얻을 때까지만이라도. 나는 마음이 변하기 전에 데본 백작에게 보낼 답신을 썼다. 그동안 아키텐의 왕족을 보살펴줌에 따른 사례와 가르시아의 안위를 보장하고 신분에 걸맞은 모든 대우를 돌려줄 것임을 약속하는 증서를 포함해서.
정무에 짓눌려 뻣뻣하게 굳은 몸을 펴려 산책하던 도중 나는 작은 소동을 발견했다. 어른 남자의 팔뚝만큼 자란 검은 강아지를 안고 웬 아이가 훌쩍훌쩍 울었다. 예전의 나처럼 갈색 더벅머리가 덥수룩한 그 아이 앞에 위병으로 보이는 이가 몸을 낮춰 시선을 맞추고 강아지를 돌려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삼촌이 다른 강아지를 구해 줄게. 이 강아지는 여왕님 거라서 안 돼.”
내 딸의 또래로 보이는 그 아이는 여전히 울먹이며 강아지를 꼭 끌어안았다.
“여왕님은 얘가 이름이 뭔지도 모르세요. 강아지도 소도 말도 돼지도 많으시잖아요. 토끼를 더 좋아하시잖아요.”
아마 저 아이 말이 옳을 것이다. 강아지는 자신을 안은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니 눈을 둥글게 뜨며 아이 입술에 자기 혀를 날름거렸다. 위로해주려는 것으로 보아 이미 아이에게 정이 든 모양이다.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기로 마음먹었다.
“그 강아지가 마음에 드니?”
내 말에 어른과 아이가 둘 다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들 앞에 성큼 다가와 아이의 어깨를 잡아 몸을 세웠다. 검은 강아지는 순진한 눈을 빛내며 나를 빤히 보더니 킁킁 소리를 내며 코를 들이밀었다.
“경비견인가?”
나는 아이 대신 위병에게 물었다. 위병은 봄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연신 꾸벅꾸벅하며 말을 더듬었다.
“이, 이 녀석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따끔히 혼을 내겠으니 부디 이번 한 번만 너그러이…….”
그때 내 뒤에서 날카롭게 쏘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들어 그이를 제지했다. 내 앞에서는 누구도 나를 제치고 언성을 높이거나 아랫사람을 꾸짖을 수 없다. 그만한 일도 아니고.
“자네를 책망하려고 물은 것이 아니네. 자네는 경비견이나 사냥개를 돌보는 자인가?”
보르도에서는 내가 불쑥 나타나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가 없다. 반년이나 이 성에서 지냈음에도 이렇다니, 내가 나도 모르는 새 여기 사람들을 무섭게 할 만한 일이라도 벌였나? 아니면 그저 신입이라 두려운가? 내가 그렇게 속으로 의아해하는 동안 위병은 “그렇습니다, 폐하.” 하며 짧게 대답했다. 그제야 나는 조금 전 이들이 오라드를 거론했음을 떠올렸다. 나쁜 뜻은 없었겠으나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지.
“내 눈에는 이제 넉 달쯤 된 강아지로 보이는데. 반년은 되지 않았겠어. 원래 있던 녀석이 새끼를 낳았나 보군.”
“……형제가 아홉이나 됩니다.”
아이가 우물쭈물한 목소리로 대신 답했다. 나는 손을 내밀어 강아지의 촉촉한 코에 내 손가락을 가까이 대고는 아이에게 물었다.
“강아지가 너를 좋아하니?”
아이는 아까와 달리 자신 있게 답했다.
“네. 저를 기다려줍니다. 제가 오면 꼬리도 좌우로 치고 앞발을 들고서 껑충껑충 뛰어올라요.”
위병은 내 뒤를 보고 흠칫 놀라며 땅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내 뒤의 이가 그에게 눈빛으로 찌릿찌릿 꾸짖는 모양이었다. 왕실의 경비견이나 사냥개로 키워야 할 강아지가 다른 누군가를, 그것도 왕실에 소속된 이도 아닌 자신의 어린 가족을 따르게 했으니 잘못이 아니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근무하는 동안 따로 의탁할 데 없는 어린 가족을 데려오는 이는 한둘이 아니다. 되도록 선생을 붙여 동무들이 있을 학습실로 보내기는 하지만.
“이 녀석을 네게 보내준다면 잘 돌볼 수 있겠니?”
나는 몸을 낮춰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아이가 뛸 듯이 기뻐할 모습을 예상했는데, 아이는 물고기처럼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내 제 삼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여왕님이 싫어하실 것 같습니다. 여왕님 강아지잖아요.”
조금 전에는 내 딸이 이 강아지 이름도 모를 거라 구시렁거렸으면서 퍽 착한 대답이었다.
“오라드는 착한 아이니까 네가 소중히 잘 키워준다면 더 좋아할 거야. 이름도 잘 모르는 여러 마리 가운데 하나인 것보다 친구를 만나 하나뿐인 강아지로 사랑받는 걸 더 바랄 테니까.”
나는 아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 일어났다. 절차는 내 뒤에 선 이들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뒤늦게 아이가 돌아서서 가는 내게 대고 소리쳤다. “폐하! 감사합니다! 정말 잘 키울게요!” 나는 돌아보지 않고 아이가 볼 수 있도록 손만 들어 보였다.
나를 닮은 그 아이에게 나는 어디까지가 진심이었을까.
오라드 외에 다른 이를 따른다면 사람이건 짐승이건 우리 집에 있어서는 안 된다, 언제고 다른 이에게 넘어가 오라드를 해칠 수 있으므로. 이것은 분명 ‘어쩌다가 강아지가 여럿 태어났으니 한 마리쯤은 기꺼이 양보하는’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의 호의는 절대 아니다. 그래서 아이의 행복해하는 얼굴을 지켜볼 수 없었다.
“저 친구는 다른 임무를 맡기게.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적당히 핑계를 대서. 앞으로 신입이 개를 돌보는 건 고려할 필요가 있겠어.”
나는 조금 더 걸은 후 실내로 돌아갔다. 봄이 찾아왔어도 여전히 해는 이르게 졌다. 점점 청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위에 볼록한 반달이 하얗게 빛날 때가 되어서야 나는 자리를 옮겼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식탁에 앉아 나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아내와 딸, 처제와 처제의 의붓딸들, 착한 어린 손님, 그리고 오늘은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와 그 신랑까지. 문득 나는, 어쩌면 머지않아 이 자리에 같이 앉게 될 가르시아를 떠올렸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가르시아는 지금의 오라드보다도 어린 나이였기에 무심결에 그의 맏형 위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다. 정말 10년이나 지난 옛 추억의 편린을.
“저는 고양이가 더 좋아요.”
개를 좋아하는지 묻자 줄리아나는 푸른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고양이가 올라와서 꾹꾹 눌러주는 게 좋거든요. 언제나 여기저기 쑤시니까요. 강아지는 너무 딱딱해요. 그리고 올려놓으면 늘어져 자고요.”
선천적으로 발이 휜 줄리아나는 방 바깥을 다니고 나면 늘 힘들어했다. 아드마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희 집에도 커다란 강아지가 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랑 결혼하실 때 큰아버지가 주셨다는데, 언제나 푹신하고 햇볕 쬐는 데를 찾아 늘어져 자요. 그렇지만 옆에 와서 기대도 그냥 있게 해줘요.”
이미 나이가 많아서 그러지 않을까. 아드마르의 말에 외스타슈도 “저도 개가 영리하고 충성스러워 좋습니다.”라 맞장구를 쳤다. 신랑의 말을 들은 아르투아 백작은 “고양이는 자기 먹을 걸 양보해줘요. 개가 싫지는 않아요.”라며 줄리아나의 편을 들었다. 몇 년 전 내가 닥스 백작 기랑드 경에게 고양이의 습성을 들은 후 학살 위기에 처한 고양이들을 구해줬을 때, 자신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걸 알아챘는지 고양이들이 돌봐준 이들에게 쥐나 작은 새 등을 물어다 준 적이 있었다. 좀 더 눈치가 빠른 녀석은 인간이 먹는 빵 조각을 물어다 주기도 하고.
“저는 토끼가 가장 좋아요. 올리가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피니가 있고요. 시빌은 어때? 마틸드도.”
“나는 다 좋아. 다 귀여워.”
오라드의 물음에 앙굴렘 백작은 고민할 거리도 되지 않았는지 즉시 대답했다. 마틸드는 망설이더니 “…저도 토끼가 좋아요. 하지만 강아지도 귀엽고 고양이도 예뻐요.”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격이 퍽 다른 자매다.
“아버지는요?”
오라드가 내게 물었다.
“나는 멧돼지. 멧돼지를 가져가면 네 큰아버지들과 고모가 기뻐했거든.”
오라드는 녹음처럼 짙은 초록빛 눈을 둥글게 뜨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이내 소리 높여 까르르 웃었다.
“먹는 거, 먹는 거 말고요. 사냥꾼 같았어요.”
졸지에 광대가 되었다. 그래도 이 아이가 웃으면 그걸로 됐다. 나는 웃으며 나도 모르게 딸의 작은 어깨를 도닥였다. 잠자코 듣던 프레브라나가 반달 같은 눈을 휘며 나를 도왔다.
“저는 지금도 거위가 가장 좋아요. 거위를 오리들 사이에 갖다 놓으면 거위가 대장이 되거든요. 그러면 거위가 오리들을 몰아주니까 일이 훌쩍 줄어들어요. 집도 잘 지켜서 웬만한 들개하고는 싸워서 이기고요. 고양이는 상대도 안 되니까 닭이나 병아리도 보호받아요.”
“거위가 개를 이겨요?”
아드마르가 프레브라나에게 물었다. 프레브라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투아 백작이 동조하며 “경비용으로는 개보다 거위가 더 유능하기도 합니다. 저들끼리 모아두면 언제나 보초를 세우는데, 누가 침입해 보초가 소리 지르면 다들 일제히 소리쳐 사람을 부르지요.”라고 어린 귀족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불어넣었다. 거위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화제는 ‘좋아하는 동물’에 이어 ‘좋아하는 새’로 넘어갔다. 눈알 백 개가 달렸다는 전설처럼 깃털이 화려한 공작, 주황빛 배를 가진 귀여운 울새, 보송보송한 병아리, 하늘의 제왕 독수리, 사냥을 돕는 매, 털이 매끈하고 반짝반짝한 백조 등등 여러 새가 이야깃거리로 올랐다. 이번에도 나는 전서구로 쓰이는 비둘기를 댔다. 아마 파트리샤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가장 좋아하는 동물로 말을, 가장 좋아하는 새로 자신의 태몽이었다던 새하얀 부엉이를 댔을 것이다. 언제나 붉은 사자를 상징으로 썼던 아키텐의 2대 국왕은 사실 사람을 주저앉힐 만큼 커다란 개를 좋아했었지. 새는 어떤 새를 말했을까.
식사 자리를 파한 후 오라드는 대뜸 내게 물었다.
“아버지는 제가 왜 좋으세요?”
이 아이를 처음 만나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였다. 나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차피 고찰한들 다른 대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내 딸이니까 사랑하지.”
“저는 도움이 안 되잖아요.”
“아빠는 네가 있어서 살아.”
“저 아니었으면 더 잘 사셨을 거예요.”
나는 오늘 혹은 최근 아이를 우울하게 할 만한 일이 있는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되짚어보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무 탓에 종종 오라드와 따로 행동할 때가 있는데, 그때 오라드가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고 어떤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지는 늘 보고받았다. 수업도. 밥 잘 먹고 왜 갑자기 땅을 팔까.
“아빠가 어디 가서 국왕보다 높은 사람이 되어 보겠어?”
“제가 잘나서 국왕이 된 건 아니잖아요.”
오라드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삐죽였다. 팩 토라진 것처럼.
달콤한 향을 퍼트리며 흐드러진 꽃이 분주한 사람들 머리 위로 하나 둘 꽃잎을 떨어뜨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오라드와 함께 성 밖을 다녀 오느라 해가 진 뒤에 돌아왔는데, 마침 데본까지 먼 길을 다녀온 이들이 돌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오라드를 방으로 돌려보내고 아르투아 백작과 함께 그들을 맞았다. 나보다는 플랑드르 소속인 아르투아 백작이 가르시아의 모습을 유추하기 더 좋을 것이었기에.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내게 대본 백작의 친서를 전하며 가르시아가 이미 세상을 떠나 매장되었음을 보고했다. 내가 그의 목숨과 내 딸의 안정이라는, 전혀 맞지 않는 짝을 억지로 저울추에 올려놓던 날보다도 더 먼저.
나는 아르투아 백작을 내보냈다. 다른 이들도 모두 돌려보냈다. 나 홀로 남겨진 방에서 사람 없는 아우성이 그치지 않았다. 불을 끄면 어둠 속에서 형형한 눈빛이 천 개는 떠오를 것처럼. 결국 나는 그 방을 나서서 정처 없이 걸었다. 밀려오는 바람을 따라 밖으로 향했다. 모래알 같은 별빛도 내리쬐는 환한 달빛도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멈춰 서서 아무 기둥이나 손을 짚고 쉬고 싶었다. 그러나 묵묵히 내 뒤를 따르는 여러 발소리와 눈빛이 나를 어디까지고 걷게 시켰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웃어야지. 기뻐해야지. 축배라도 들어야지. 이 잔인한 놈아.
다음날 낮에 나는 오라드에게 가르시아의 사망을 알렸다. 이번에도 나만 아는 사실로 처리하고 싶었으나 타국에서 객사한 아키텐 왕족의 유해를 데려오는 일이니 국왕이 모른 채로 진행해서는 안 될 일이므로. 아니, 내가 더는 내 딸에게 감추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 딸은 내가 한순간도 예상한 적 없는 미래로 조금씩 나를 이끌었다.
“안 돼요.”
그때 내 딸의 눈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서늘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 목은 갑자기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내 딸을 닮은 파트리샤에게서도, 왕태자로 자라나 7년이나 이 나라를 통치했던 처남 조슬랭에게서도 한 번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네 숙부야. 너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그 사실을 한순간이라도 떠올렸다면 생전에 제게로 연락을 보냈겠죠. 돌아오고 싶다고. 어머니도 저도 추방령을 내리거나 암살자를 보내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억지로 끌고 오는 일 없이 타국에서 살겠다는 선택을 존중해준 거라고요. 필리파 이모가 돌아오시지 않는 것처럼요.”
후우. 내 딸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도 냉혹한 국왕과 섭정 때문에 죽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불쌍한 도련님이라는 그림을 만들어서 플랑드르를 다시 자극하시려고요? 정말 그래요? 플랑드르가 소외를 감수하는 동안 그자는 플랑드르를 등졌어요. 지금 시신을 돌려받는다면 그자는 플랑드르를 등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핍박받은 끝에 안타깝게 객사로 요절했다는 이야기가 덧씌워질 거예요. 그것도 반 플란데런 가문의 외손이요. 저는 뒷감당할 자신 없어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오라드를 설득할 말은 인정밖에 없었고, 지금 내가 한 마디라도 더 덧붙여 재고를 부탁한다면 내 딸은 분명 분노든 실망이든 쏟아부으며 도끼눈을 치켜뜰 것이다. 어차피 마음대로 할 거면서 왜 알리려 하냐고 눈보라 쌩쌩 몰아치는 냉랭함으로 홱 돌아설 모습도 그려졌다. 다만 가르시아에게 품은 마지막 정리와 잠시나마 몹쓸 마음을 먹었던 죄책감이 “네 말대로 할게.” 그 짧은 한마디를 목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수백 번을 했던 말임에도. 내 무응답을 거부로 받아들였는지 오라드의 초록빛 눈에 점점 오기가 차올랐다. 겹쌍꺼풀이 진 생김새는 나를, 색은 파트리샤를 닮은 눈이다.
“왕명이에요. 데본 백작에게 그 가여운 영혼을 따뜻이 맞아주고 장례까지 정중히 치러줌에 감사를 표하세요. 아키텐의 왕가에 보여준 호의는 잊지 않겠다고요. 아키텐 국왕은 박정하지 않으니 충분히 보상하시고요. 그렇지만 송환은 안 돼요. 지금은 안 돼요. 이번에는 꼭 제 말대로 해주세요.”
오라드는 내게 최후통첩을 남기고 방 밖으로 나섰다. 딸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시린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오후에 시작할 일반 알현 때 내 딸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내 손을 잡으려면 지금 하지 못한 말을 꼭 해야 한다. “네 말대로 했어.” 그 한 마디면 된다. 가르시아의 주검을 이용하고. 도와달라며 나를 보던 위그의 눈을 저버리고.
저 아이 말이 옳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잘하고 있는 것일까.
오라드의 원래 건강수치는 5.7, 성장은 음모력 4티어 환영의 그림자입니다.
첫댓글 ㄲ ㅑ 아껴봐야지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으아아아아
후 기습 연재라니요.. 다봤으니 상관없습니다만. 이러시면 정말 감사합니다.
어째 오라드는 점점 냉정해지고 길은 허술해져가는 느낌이네요
잉 ;ㅁ; 그래도 제가 콤콤님에게는 올리자마자 쪽지를 보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