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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永嘉의 상란喪亂과 오호 십육국 성립 현장 탐방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제국은 없다. 흥망성쇠란 작게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크게는 왕조의 운명에서도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서진 왕조만큼 허무했던 제국은 아직 들어본적 없다. 서진 왕조는 명색이 중국 역사상 몇 안되는 통일 왕조의 하나였다. 한 사람의 수명보다 짧았던 51년. 짧았지만 굵을 수도 있다. 진秦과 수隋왕조가 그랬다. 서진 왕조의 비극의 소재가 바로 그것이라고 단정할수는 없지만, 황실을 비롯한 상류계층이 하나같이 나약하고 부패했던것 만은 부정할수 없다. 그것은 서진 왕조의 태생적 비극이었다. 후한 말 이후 계속된 군웅 시대를 마감했던 서진 왕조는 외견상 매우 화려해 보였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지도층이 그만큼 사리와 위선으로 치달았던 왕조도 찾기 어렵다.
서진 왕조는 소위 "먹물"들이 합심해서 일으키고 경영한 나라였다. 나라를 경영하는 데는 먹물도 필요하지만 "군홧발"도 필요하다. 먹물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맡겨서는 낭패보기 십상이다. 먹물들은 따지기는 좋아하나 제대로 해내는 일이 별로 없다. 그들의 이념은 고결하고 그 주장은 정당하지만, 그 동기는 불순한 경우가 많다. 그들의 행동은 이름을 드러내고 사리를 추구하는, 그래서 세속적이고 공리적이다. 후한 말 외척. 환관등 구세력을 매도하고 비판하며 반 정부 운동을 벌였던 소위 청류파(淸流派)지식인들 중에도 뭔가 불순한 동기를 감추고 있던 사악한 "위군자僞君子"가 많았다. 이런 위군자들이 서진 정권을 장악하고 귀족으로 군림했다. 서진의 실질적인 창업자 사마의司馬懿:宣帝,(179~251)도 이런 청류파 지식인의 한 사람이어었다.
서진 귀족들은 조정을 권세나 부를 추구하는 장소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관직을 얻어도 왕조의 운명보다 가문의 번영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귀족 계급이 갖는 본성 때문이다. 그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함에 따라 어쩔수 없이 국가 체제가 느슨하게 되었다. 당시 지식 계급의 사조를 대표하는 청담淸談은 고답적 경향을 더해갔고, 현실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속된 것으로 치부하며 그것으로부터 회피하려는 풍조가 만연했다.
위나라 2대 명제明帝가 군주 독재권을 강화하면서 등장한것이 요즈음도 문제되는 "측근정치"였다. 후한 명문으로 조조의 모신이며, 조비의 사우師友였던 사마의가 등장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는 오나라를 공격하고 오장원 전투에서 제갈량에 잘 대처하는등 군사적 업적을 세웠다. 238년에는 요동의 공손씨公孫氏를 토벌했다. 명제가 죽자, 조씨일족인 조상曹爽과 사마의가 8살인 어린 폐제廢帝를 보좌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조상이 촉나라 정벌에 실패한 것을 계기로 249년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일파를 몰살시키고, 사마씨의 시대를 열었다. 사마의, 그리고 장남 사마사(司馬師 208~255), 2남 사마소(司馬昭: 211~265) 3부자가 음험하고 주도면밀한 공작을 거듭한 끝에 사마소의 장남 사마염(司馬炎:武帝236~290)때인 265년에 이르러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서진 왕조를 열었다. 그 과정은 결코 정당하지 않았다.
280년 마지막 남은 오나라를 병합함으로써 통일 전쟁을 성공적으로 종료한후, 서진 왕조는 뭔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상하가 모두 평하에 안주하여 왕조가 지향하는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가 의문시되었다. 안주의 결과는 사치 풍조와 청담의 유행이라는 두 가지로 표현되었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부나비처럼 살았던 지난 시절을 후회하며 허무에 빠져 왕조 전체가 어떤 전망도 없이 패색이 짙어진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귀족들은 배금주의(拜金主義)와 사치 경쟁에 몰두함으로써 무료를 달래려 했다. 무제는 통일후 점. 과전제(占.課田制)와 호조식(戶調式)등 혁신적인 경제정책을 시행하는 등 나름대로 정치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서진의 건국이후 귀족들사이에서 갈수록 더해 갔던 사치풍조에 제동 장치를 마련하려고 했다.
그러나 위진 교체기의 사예교위(司隸校尉)로서 정권 탈취에 놀라운 수완을 발휘한 창업공신 하증何曾까지 구미에 맞는 음식이라면 하루에 1만 전을 소비하는 사치삼매의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규제하기를 단념했다고 한다. 포기는 영합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제는 무제자신도 사치에 몰입했다. 황제로서 귀족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다. 무제는 273년 미인 선발을 위해 천하의 혼사를 금지시킨데 이어 280년 오나라를 병합한뒤에는 오나라 궁전에서 데려온 강남의 미녀에 빠졌다. 후궁이 1만명에 이를 정도였으니 중국 사상 제일의 "호색한"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단명한 원인도 여기에 있었다. 1995년 중국 호복성 양번에서 열린 중국위진남북조사연구회의 국제학술회의에서 일본의 중견 학자가 발표한 논문 제목이 [서진무제호색고西晉武帝好色故]였다 .
최고 통치자는 정보기관을 통해 모든것을 알고 있는것 같지만, 정작 제일 중요한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에는 어둡다. 남을 나무라고 벌주지만 자기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후한 법이다. 무제는 사예교위 유의劉毅에게 "짐은 한나라의 어느 황제에 견줄 만한가?"라고 물었다. 유의는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일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환제와 영제라면 후한 시대 환관의 전횡을 방치했던 무능한 군주였다. 무제가 이 대답에 놀라 그 이유를 묻자, 유의는 "환제와 영제는 관직을 매매하여 수익을 국고에 넣었지만, 폐하가 매관한 돈은 사문私門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문이란 무제의 장인으로 당시 가장 권세를 떨치던 양준楊俊일족을 말한다. 양준은 동생 요 瑤.제濟와 함께 삼양三揚이라 칭해졌지만 뇌물 정치의 전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사람이다. 항상 인척, 그 가운데서도 처족이 문제다.
서진 사회는 이렇게 병들어 가고 있엇다. 위.진 귀족의 에피소드 모음집인 <세설신어>(儉嗇篇과 太侈篇)에는 서진 왕조 하에서 벌어진 극도의 인색. 사치의 풍경을 빽백하게 묘사하고있다. 특히 이들은 가문의 명예를 걸고 죽기 살기로 사치 경쟁을 벌였다.
무제의 외숙 왕개王愷와 창업 공신 석포의 아들 석숭石崇, 오나라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왕혼王渾의 아들로 무제의 사위였던 왕제王濟등은 중국 사상 최고의 사치와 향락의 경연을 벌였던 인사로 기록되어 있다. 소위 "황금이 떨어지는 나무" 를 가지고 잇었던 황실과 인척들이 벌인 3파전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뭔가 일반인과는 다른 기발한 일을 벌임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받도자 하는 마음의 화려함이 그들을 그렇게 몰고 간 것이다. 왕개가 찐 쌀 말린 것을 연료로 쓰면 석숭은 뒤질세라 양초를 쓰고, 석숭이 산초나무로 벽을 필하면 왕개는 적석지赤石脂를 칠하여 대항했다.
그런가하면 왕제는 사람의 젖을 먹여 돼지를 키웠다. 비싼, 그리고 본래의 쓰임새도 아닌 물건을 무턱대고 소비한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화조풍월(花鳥風月)을 즐기며 문화적 우월감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는 통상의 "귀족"이 아니었다. 당시 귀족들의 사치벽은 진기한 소재를 소모품으로 흔적도 없이 써버리는 것이어서 시대적 기념비인 만리장성이나 대운하 건설로 권력을 과시한 황제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세상이 이처럼 온통 사치 풍조의 회오리에 휩싸인 가운데 돈의 힘의 위대함을 철저하게 풍자한 은사(隱士) 노포(魯褒)의 <전신론>錢神論 이 저술되었다. "돈이야말로 신이다"라는 것이다. 인색과 사치는 정반대의 것처럼 보이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긁어모으기[聚斂]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 그렇게 모은 돈을 감추는, 마구 뿌리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기적 사욕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다. 이런 사욕이 어떤 의미에서 서진을 파멸로 이끌고 간 "팔왕의 난"의 또 다른 요인이기도 했다.
누군가가 중국 왕조의 역사는 화려한 죽음의 꽃,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반복적 운행이었다고 했지만, 그런 점을 서진 왕조처럼 확실하게 실천한 왕조도 없었다. 서진 왕조를 이끈 자들은 도의적 고결함을 자랑해 마지 않던 후한 말 청류파 지식인들의 아들 혹은 손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조상들이 가졌던 최소한의 금도襟度마저 찾을 수 없었다. 위.진 교체라는 위태로운 시기에 재빨리 대세를 파악하고 목숨을 걸고 사마씨에게 달라 붙은 후 사마씨 4대에 걸쳐 반대 세력에게 가차없는 피의 숙청을 단행하며 위나라를 야금야금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들 선조가 그토록 강조해 마지 않았던 우국지정(憂國之情)과 지조. 절개마저 팽개치고 힘의 논리에 적극 순응하며 살아남은, 그래서 어딘가 깊은 곳에 회복할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아니 무엇이 선이며,무엇이 악인가. 무엇이 새로운 것이며 무엇이 타기할 구태인가.무엇이 흥국과 망국의 진정한 동인이란 말인가!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의문 앞에 우리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후한에서 위.진에 이르는 시기는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대전환기였다. 이 거대한 전환적 고리에 힘차게 그 존재를 과시한 것이 화북 일대에서 부락 생활을 하던 유목 호족胡族이었고, 그들로 하여금 역사 전면에 나타나게 만든 것은 서진 왕실인 사마씨들이 벌인 피비린내나는 내전이었다. 이 두가지는 400년간 지속된 한 제국이 후세에 남긴 아픈 유산이었다. 그 유산은 20~30년의 단기간에 치유하기에는 너무도 깊은 상처였다.
이번 여행은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뜨겁고 벅찬 가슴을 안고 독자 여러분과 함께 떠나야 할것 같다. 파망은 가슴을 짓누르게 하지만, 새로운 큰 희망을 움트게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의 무대는 섬서陝西 서안西安~하남河南 낙양洛陽~산서山西임분臨汾을 기점으로 하는 삼각지대다. 이 삼각지대를 중심으로 이 시대 역사가 펼쳐졌다.이 지역은 1년을 살았던 북경을 제외하고 중국 지역 가운데 필자가 가장 많이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호색한이라는 불명예를 짊어졌던 서진 무제에게도 사마씨의 왕조가 장구하게 뻗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굴뚝 같았다. 그러나 "백치태자白痴太子"로 지칭되는 황태자 사마충(司馬衷:惠帝 259~306)에 생각이 미칠라치면 골머리가 아팠다. 대신들도 마찬가지 였다. 60고개를 넘긴 노대신 위관衛瓘은 마친 능운대(陵雲臺)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옥좌를 만지며 "이 자리는그에게너무 과분합니다" 라며 술주정으로 태자 문제를 재고할 것을 요청하였다.
무제는 황태자의 머리가 얼마나 나쁜지 시험하기로 했다. 거기에 태자비 가남풍賈南風이 있었다. 그녀는 키가 작고 피부가 검어서 역사상 가장 못생긴 태자비로 유명하다. 사료에는 "가씨 집안은 투기 때문에 아들이 적고, 낳은 딸도 못생겼다"는 알쏭달쏭한 말이 적혀 있다. 질투와 못생긴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수 없지만, 가씨가 능란한 권모술수로 그 얼굴값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여인이 만 여성의 선망의 대상인 태자비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 가충 (賈衷, 217~282)덕분이었다. 그는 사마소의 반위反魏 쿠데타에 일등 공신으로 서진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고, 숙부 사마유司馬攸를 제치고 무제가 세자가 되도록 하는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이른바 "킹메이커"였다. 당시 가충이 뇌물 공세까지 펴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는 소문이 세간에 파다했다. 가남풍은 교활하고 간사한 꾀가 많아서 저능아 태자를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무제로부터 태자에게 주어진 시험지를 받자, 다른 사람을 시켜 작성하게 하되 지나치게 훌륭한 답변은 피하고, 중요한 요점은 그런 대로 답하여 과락科落은 면하면서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을 통과하도록 하였다. 대학 입학 고사도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수석보다 문을 닫고 들어서는 것말석이 좋은 것이다. 답안지를 받아든 무제는 "이 정도면 천자의 지위는 감당하겠군!" 하고는 이후 아들에 대한 어떤 문제 제기도 용납하지 않았다.
290년 무제는 주색에 빠진 생활 끝에 몸을 상해 중태에 빠지자, 장인인 양준과 지방에 있는 숙부 여남왕 사마량司馬亮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조서를 내렸다. 양준이 이 조서를 감추고는 사마량을 배제한채 의식이 몽롱한 무제로부터 태위太尉.태자태부太子太傅. 도독중외제군사. 시중. 녹상서사라는 임명장을 받았다. 국가의 원로, 황제의 보좌역, 국군 총사령관 겸 행정 수반이 된 것이다. 290년 4월 무제가 55세로 사망하고 32세의 사마충 혜제 이 들어서자, 사마씨 정권은 곧 양씨로 넘어가는 듯 했다. 그곳에도 가남풍이 있었다. 무제의 황후였던 양씨는 한대에 사세삼공四世三公을 배출한 홍농弘農 화음華陰의 명족이었고, 며느리 가씨 집안은 하동河東의 명망가였다.
마침 기근이 들어 인심이 흉흉한 것을 보고 한 대신이 "인민은 먹을 쌀이 없어 곤란에 빠져 있습니다"라고 하자, 혜제는 "바보같은 놈들, 쌀이 없다면 왜 그 대신 고기라도 먹지 않는담?" 이라 힐책했다. 혜제야 원래 저능아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이렇게 태평이었지만, 황후 가씨는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과 종친들이 언제 혜제를 폐위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가씨는 못생긴 대신 뛰어난 머리와 여성 특유의 시기심과 의심, 남자 못지않은 결단력을 겸비한 여장부였다. 그래서 하느님이 하시는 역사役事는 공평한 것이다. 무제 사후 가황후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시어머니 양태후楊太后와 그녀의 아버지 양준이 친권을 발동해서 혜제를 폐위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가황후는 친척 오빠인 가모賈模를 끌어들이고 혜제의 동생인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를 부추겨 근위병을 동원토록 하였다. 이들은 양준의 막부를 불시에 공격하여 마구간에서 죽이고 양태후의 어머니인 방씨方氏도 체포했다. 양태후는 어머니 방씨를 살리기 위해 며느리에게 자신을 "첩"이라 칭하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가황후는 끝내 거절하고 방씨를 처형하니 양황후는 단식 끝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굶어죽었다. 이때 주살된 자가 수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 비장한 여인에 의해 마침내 "대량살육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양준을 대신해 천자의 후견인이 된 자는 혜제의 대숙부 여남왕汝南王사마량司馬亮과 72세의 노대신 위관이었다. 이 두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자 가황후는 다시 불안해졌다. 여남왕은특히 일족의 최연장이므로 언제 혜제를 폐위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황후는 초왕을 시켜 다시 두 사람을 살해했다. 이렇게 대량 살육에는 어김없이 종실의 여러 왕들이 관여한 것이 서진 왕조의 특징이다. 이것도 서진 황실의 사리추구와 이기심에서 파생된 것이다.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한 무제는 사마씨 왕국의 영원한 존속을 위해 정치적 혁신을 단행했다. 위 왕조는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천자 일가만의 권위를 높이고 천자의 일족에게는 정권을 맡기지 않았다. 천자의 가문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데 그 목적이 있었지만, 이러한 조치는 나라를 쉽게 다른 가문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다. 서진은 위나라의 전사前事를 반면 거울로 삼아 그 반대의 정책을 채용했다. 종실에게 대규모의 영토와 군대를 분배했던 것이다.
종실왕들을 황실의 울타리[藩屛]로 삼아 중앙집권을 지키게 하는, 소위 봉건封建형식을 취한 것이다. 이것을 종왕宗王의 분봉分封과 출진出鎭이라 한다. 277년 무제는 아들과 조카들을 왕공王公, 군공郡公, 군후郡侯, 현왕縣王으로 책봉했다. 사마씨로서 왕에 봉해진 자가 27명이었다.이들은 독자적인 봉국과 군대를 가졌다. 대국(大國:3만호,3軍 사병5000명), 차국(次國: 1만호, 2軍 사병 3000명), 소국(小國 :5천호, 1軍 사병 1500명)의 차이를 두었다. 이들이 황실이 위급할때 손을 잡고 큰 힘을 이루어 수도를 보위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천하 화평을 구실로 지방관들에게 소속된 군대를 해산하거나 크게 줄였다. 위나 서진이나 모두 황실의 사리만을 생각한 결과였다.
당초 일가 일족의 번영을 목표로 입안한 종왕의 분봉과 출진 제도는 무제의 이기심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일족을 도살시키는 참담한 비극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황실은 황실대로, 제후는 제후대로 사람인 이상 돈과 권력에서 각각의 이해득실이 있게 마련이다. 이 간단한 논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제후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무력에 호소하거나 일족을 죽이는 경우가 많아진 것은 그들에게 막대한 무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국의 군사 체제를 종실에게만 위임하는 것도 너무 사려 없는 방법이었다. 황제와 종실의 결합은 혈연의 연결 통일성을 보증하기 위한 장치로서 혈연이란 끈은 너무 취약하다. 도리어 비혈연적이지만, 황제와 관료와의 패거리[任俠的]관계쪽이 강한 끈이 될수 있다. 대통령 J씨와 안기부장 J씨의 끈끈한 신뢰 관계가 그러하듯 말이다. 옛일을 거울 삼기 위해서는 평정심을 가져야만 제대로 보인다. 사리가 개입되면 거울은 비뚤어지게 마련이다.
가황후의 조종을 받아 외척 양씨 세력을 척결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초왕 사마위는 소위 "대세론(大勢論)"을 너무 과신했다. 잘하면 혜제의 "황태제(皇太第)
"가 되어 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다는 은근한 기대였다. 대세론 만큼 실패율이 높은 것도 없다. 정치란 그 정도로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세를 누르는 것은 바람이고, 바람을 잠재우는 것은 무심한 것 같은 인심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미를 알아차린 가황후는 조서를 고쳤단 죄목으로 초왕을 문책하여 죽였다. 이런 식이라면 방해자는 항상 연이어 눈에 띄게 마련이다.
가황후는 사씨謝氏 소생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재기에 찬 황태자 사마휼(司馬鷸)이 폐위를 도모하지 않을까 의심했다. 결국 구실을 만들어 그를 귀향부낸 후 독살하려 했다. 그러나 황태자가 독약을 마시려 하지 않자, 약 찧는 절구로 쳐서 죽였다. 300년에 일어난 일이다. 이렇게 가황후는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자는 차례로 죽였다. 잘생긴 양황후의 천하는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못생긴 가황후의 천하는 10년이나 계속되었다.
못나도 가황후는 필경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가황후의 사치와 음란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태의령(太醫令) 정거程據와 정을 통하더니, 노상에 잘생긴 소년이 보이면 잡아서 상자에 넣어 궁중으로 데려와 정을 통하고는 죽여 버리곤 했다. 간혹 아주 매력이 있고 썩 마음에 드는 소년이 있으면 희귀하고 값비싼 선물을 주어 돌려보냈다. 다시 부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서진판 "원조교제" 인 셈이다. 그녀가 준 선물은 미소년에게 가당치 않은 값비싼 물건이었다. 훔친 것으로 오인받아 심한 고문을 받게 된 소년에 대한 고문은 중단되었다. 일반인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러한 탐닉적인 행위가 반드시 가황후에 한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서진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이 바른 말이다. 최고 지식인들은 마약과 술에 찌들어 있었다. 가황후는 공주만 넷 낳았을 뿐 황자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친정 동생이 낳은 아이를 데려다 자기가 낳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옷 속에 짚을 넣어 임신한 것처럼 가장했다. 무슨 특집 TV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가황후의 무소불위의 행위를 참지 못하고 일족의 장로인 조왕(趙王:무제의 숙부) 사마윤(司馬倫)이 군사를 끌고 궁성으로 들어와 혜제를 감금하고 가황후와 그의 일족을 체포했다. 궁성 서복 요새인 금용성(金庸城)에 유폐된 가황후에게 주어진 것은 죽음을 강요하는 금설주(金屑酒:금가루를 넣은 술)였다.
서진 왕조는 창칼을 가진 종실 여러 왕[宗王]들의 각축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조왕이 정권을 장악하고 나니 종실은 모두 자기보다 손아래 사람들뿐이었다. 멍청한 혜제를 밀어내고 그의 아들을 세워 봐도 이 난마처럼 얽힌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사마윤은 자신이 황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나 아니면 안된다는 과대망상증이 발동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종실 일족들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모두들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욕심이 발동한 때문이었다.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은 조왕을 토벌하려다 도리어 자기가 죽었다. 뒤를 이어 혜제의 동생 성도왕(成都王 :업에 주둔) 사마영(司馬潁)과 사촌 동생 제왕(齊王: 許昌의 주둔) 사마경(司馬경) , 그리고 족부(族父)인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擁)등이 연합해서 조왕을 죽이고 혜제를 복위시켰다. 이때 주도적인 역활을 한 자는 제왕 사마경이었으므로 그가 궁궐로 들어와 혜제를 보좌했다. 제왕 사마경은 권력을 잡기 전에는 현명한 자로 인망이 높았으나 권좌에 오르자 역시 타락했다. 그래서 권력이란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모양이다.
이에 여러 왕이 제왕을 공격하여 죽였다. 이때 302 공이 있었던 혜제의 동생 장사왕(長沙王: 常山) 사마예(司馬乂)가 궁궐로 들어와 혜제를 보좌했다. 성도왕과 하간왕은 장사왕의 성공을 시기해 함께 군사를 동원해 토벌에 나서 그를 잡아 불에 구워서 죽였다. 하간왕의 부하 장방張方은 서진 시대판 "이근안"으로 적대 세력을 잔혹하게 살해하니 그 현장에 있던 부하들마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가황후가 쫓겨나자 혜제는 양씨(羊氏:羊獻容) 를 황후로 세우고 황태자까지 책봉했다.
그러나 다시 혜제를 보좌하게 된 성도왕 사마영은 황후와 황태자를 폐하고 자신이 황태제가 되었다. 자기가 혜제 다음으로 황제위에 오르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성도왕의 이 같은 처사에 종실 왕들이 성도왕을 공격하는 등 혼전이 계속되었다. 이러는 동안 양씨는 황후 자리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복위되고, 혜제도 장안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낙양으로 돌아오는 등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이어졌다. 팔왕 가운데 남은 자는 성도왕, 하간왕 그리고 동해왕 세명 뿐이었다.
306년 10월 성도왕이 먼저 두 아들과 함께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뒤이어 12월 하간왕은 세 아들과 함께 남양왕(南陽王) 사마모(司馬模)에게 살해 되었다. 성도왕과 하간왕이 장사왕을 제거할 때 혜제의 족부에 해당하는 동해왕(東海王)사마월(司馬越)의 도움이 컸다. 이제 팔왕 가운데 최후로 살아남은 자는 동해왕 사마월이었다. 306년 동해왕은 48세의 혜제를 독살했다. 이처럼 여남왕에서 동해왕까지 여덟 명의 종실 왕들이 번갈아 가면서 권력을 장악하거나 장악하려고 싸웠는데, 그때마다 대규모의 무력이 동원되었다. 이를 소위 "팔왕의 난" 291~306이라고 한다. 팔왕의 난의 주역으로서 등장한 여덟 명의 종실 왕들은 무제의 아들이 세명, 조카가 한명, 숙부가 한명, 증조부를 같이 하는 6촌이 두명이었다. 가후가 정치에 참여할 때로부터 혜제가 중독사할 때까지 16년동안, 이들 "별들의 전쟁"의 여파는 현재의 산동. 하북. 하남. 섬서 지역까지 파급되었다.
군사를 일으킬때 어떤 왕은 20만명, 어떤 왕은 7만명을 동원했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죽은 사람이 1만명으로 계산되었다. 피붙이 간에 서로 먹고 먹히는 사마씨 일족의 내란이 순식간에 서진 왕조를 공중 분해시켜 버렸다. 혹자는 못생긴 여자 한명 때문에 생긴 일이라 하지만, 그녀도 못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듯, 뭇 남성들이 그녀의 전횡을 막지 못하고 그녀의 인물 탓으로 돌리는 것은 실로 비겁한 일이 아닐수 없다.
여덟 왕의 진영으로선 한 발짝도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었기 때문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병력을 극대화하려 했다. 거기에 오호(五胡)라 불리는 호족이 있었다. 중국 고대에 호족의 중심 세력이 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흉노였다. 진秦나라는 흉노의 시도 때도 없는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만리나 되는 장성長城을 쌓았고, 한나라도 건국 초에 흉노 때문에 무던히도 골치를 앓았다. 양자의 역관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무제 시대였다. 한나라 쪽이 반드시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흉노의 예봉을 꺾은 것만은 분명하다.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 얻은 결과였다.
그러나 후한 시대가 되면서 흉노의 열세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그 직접적 원인은 선우위單于位의 쟁탈전에서 비롯되었지만, 간접적 원인으로는 흉노 내부에 한나라의 문화가 침투해서 그 단결이 이완되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몽고고원 기후의 한랭화가 그곳에서의 유목 생활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남흉노는 친한파(親漢派) 였지만 북흉노는 한나라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알력의 결과 남흉노는 후한 왕조에 항복해 왔고, 그 선우는 후한 황제에게 자신을 신하로 칭했다. 후한 왕조는 사흉노중랑장(使匈奴中郞將)을 파견해서 남흉노를 감독하고 그 동향을 감시했다. 남흉노는 한나라를 위해 변경 방위의 의무를 짊어졌다. AD 89년 한나라와 남흉노는 공동으로 북흉노를 토벌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후 북흉노는 서방으로 이동해서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흑해 연안에 도달했다. 그 일부가 유럽 역사상 중요한 역활을 한 훈Hun족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북흉노의 패배를 계기로 대량의 흉노민들이 남선우 밑으로 귀속했다. 이들 북흉노 귀속민을 "신항호新降胡" 라 했다. 남흉노 내부에서는 구민舊民과 신항호 사이의 분쟁이 끊이지 않앗다. 흉노는 갈수록 약해졌다. 신항호는 때로 반란을 일으켜 새외로 탈출하거나 선우정單于庭을 포위하기도 했다. 신항호가 서방으로 이동한 후 새외에는 오환烏桓이나 선비鮮卑가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강대해진 신흥의 오환과 선비에 대한 방위 부담을 남흉노의 구민은 신항호에 떠넘기려 했다. 한나라측은 이들 흉노인들의 분쟁에 개입해서 구민측을 돕기도 하고, 통제력을 상실한 선우를 압박하여 자살시키기도 했다.
2세기 후반 들어 남선우가 이끌고 온 부락 내부에서 한나라에 대한 반항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비당시(壇石槐시대)토벌에 나서는 것에 반항했던 것 같다. 한나라측은 이들을 토벌함과 동시에 선우를 바꾸려고 했다. 그 후에도 선우는 한나라측에 의해 살해되기도 하고, 혹은 흉노인에 의해서 살해되는 사건이 이어졌다. 선우는 한나라에 협력할 것인가, 아니면 자국인의 이익을 지킬 것인가 하는 두 가지 갈림길에 봉착하여 그 권위와 지위가 점차 저하되었다. 후한 말 내란 시대에는 선우의 공위空位 시대마저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선우는 부활되었지만 명목적인 것에 불과했다.
조조 시대에는 흉노의 여러 부락이 산서山西 일대에 분포해 있었다. 조조는 이들 부락을 좌. 우. 남. 북. 중의 5부로 분할하고 각 부 중에서 "수帥"를 선발해 통솔시켰다. 그리고 수 아래 한인의 사마司馬를 두어 감시했다. 5부 전체는 사흉노중랑장이 감시했다. 중랑장은 태원太原에 주둔했는데 병주자사(幷州刺史)를 겸했다. 남선우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 이런 사태는 흉노족 전체가 종족으로서의 자립성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진 시대의 태원은 노예 공급지였다. 낙양의 귀족들은 사흉노중랑장에게 돈을 주어 노예알선을 의뢰했다. 이들 노예는 대부분 흉노인이었다. 흉노는 정치적으로 자립성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경제생활에서도 도탄에 빠졌다. 그 가장 좋은 예가 후에 후조後趙를 건설했던 석륵石勒의 경우다.
그의 가문은 흉노보다 한급 낮은 갈족褐族의 부락을 대대로 이끌고 왔던 집안이었다. 석륵은 열네 살 때 동향인을 따라서 낙양에 행상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곳의 한인들로부터 심한 멸시를 받았다. 당시 태원 지방에 몰아닥친 기근으로 그는 동족 갈인褐人 들과 함께 북방의 안문雁門 까지 갓다가 노예가 되어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석륵의 전기인 <진서晉書> <석륵재기載記>를 읽으면, 당시 흉노인들이 빠졌던 비참한 생활의 일면을 엿볼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폭팔한 것이 바로 "영가永嘉" 의 난이었다.
다른 오호족으로 눈을 돌려 보자. 한과 흉노와의 역관계가 변화하여 한나라로 힘의 축이 옮겨감에 따라, 한나라는 하서 지방을 손에 넣고 여기에다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후한 시대 들어 그들의 서방 경영은 그곳을 넘어 강족羌族의 집거지인 서역에까지 미쳤다. 이로써 흉노와 강족의 연계가 단절되니 한나라는 강족 부락을 하나하나 토평해 나갔다.
후한 정부는 정복했던 강족 부락을 강제로 관중關中에 이주시켰다. 저족底族들도 전한 무제가 감숙성 일대에 무도군武都郡을 건설한 이래, 위수渭水 유역에서 파촉巴蜀에 걸친 지역으로 이주된 자가 많았다. 삼국 시대에는 위와 촉이 경쟁적으로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특히 위나라는 무도에서 관중으로 그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다. 이리하여 저.강 양족은 그 본래의 거주지에서 점차 중국 내지로 이주하는 경향이 생겼다. 당시 관중 인구 100만명 가운데 그 반이 융적戎狄이라 할 정도로 그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이 중국 내지로 이주해 오니, 당연히 한족 사회와의 접촉이 밀접해졌다. 그들과 한족과의 관계는 결코 평등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까지 피정복의 소수민족이었기 때문에 불이익을 많이 당했다고 생각 된다. 197년에는 강족의 대반란이 일어났다. 소위 서강"西姜의 난" 이다. 감숙.섬서 방면의 강족이 병역을 기피해 도망하자, 후한 정부가 군대의 힘으로 부락을 파괴하는 등 탄압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이 서강의 난은 감숙. 섬서. 사천. 하동河東 : 산서, 다시 하내河內 : 하남 일대를 거쳐 황하 남안의 낙양까지 위협했다. 반란은 일어난 지 11년째인 207년에 겨우 진압되었다. 중앙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고 각지의 피폐도 극심하였다.
1세기 후반은 후한 제국으로서는 최초로 북방에 강적이 없고 그 위광이 서역에까지 미쳤던 시대였다. 서방 로마와의 교통도 열렸다. 당시 로마가 "팍스 로마나Pax Romana" 불리고, 후한 또한 "후한의 평화" 라 불려지기에 합당한 시대였다. 그러나 2세기 들어 후한은 자기 몸 속으로 끌어들였던 소수 민족으로부터 지독한 타격을 받게 된다.
이 시기부터 영광의 시대는 가고 쇠퇴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후한 국가가 피정복 소수민족을 자기 몸 속으로 넣었던 것이 바로 로마 제국해체의 1호였다. 다만 2~3세기에는 소수 민족이 아직 역사의 표면에 그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시기 한족 내부에서는 분열 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수의 오호십육국시대의 정황으로부터 알수 있득이 각각의 호족은 중국 내지에 그 거주구를 중심으로 집주하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흉노는 산서 지역에서, 저는 관중과 사천 지역에서, 강은 관중지역에서 그들의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후한에서 위.진 시대에 걸쳐 피정복민인 흉노.저.강 등 각족이 중원 지역으로 대거 옮겨와 한인과 잡거하고 있었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대로다. 이러한 정황이 국가의 중대한 위기로 발전할 것이라는 점을 우려해 경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진 혜제 원강元康 9년299에 강통江統이 상주한 유명한 <사륭론徙戎論>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흉노.저.강 및 고구려曹魏의 毋丘儉이 토벌해서 河南 滎陽지방에 이주했던 사람들을 각각 새외의 옛땅으로 돌려보내 국가의 화근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晉書> 권 58 江統傳. 이러한 주장은 강통만이 아니고 위나라의 등애鄧艾 , 서진 무제 태강太康 원년280 곽흠郭欽 등이 이미 경고한 바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미국이 흑인 노예들을 아프리카로 다시 돌려보내자는 것과 다름없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중원 깊숙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만인을 중국의 국경 밖, 원래의 주거지로 이주시키자는 강통등의 주장이 대두했지만 정세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팔왕의 난으로 여러 종왕들의 대립이 격화되자 그들은 동원할수 있는 모든 세력을 끌어들여 자기 편으로 이용하려 했다. 성도왕 사마영은 그 근거지가 조조의 수도였던 업 이었는데, 이곳은 흉노 부락과 가까운 곳이였다. 그 힘을 빌리기 위해 좌현왕左賢王이라 칭하는 유연劉淵을 장군으로 임명한후 업에 역류하고는 흉노 부락의 병사를 징발하는 임무를 맡겼다. 유연은 선우의 자손으로 그의 조상이 한나라 왕실과 통혼한 사실을 이유로 성을 유라 했던 자다.
유연은 혼란이 격렬해짐에 따라 산서 지역을 근거지로 해서 흉노의 자립을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그러던 차에 유연의 종조부 유선劉宣이 주동이 되어 비밀리에 유연을 대선우로 추대하였다. 유연은 업을 벗어나기 위해 사마영에게 오환. 선비를 이용하여 공격하려는 서진 병주자사 사마등(司馬騰)이나 안북장군(安北將軍) 왕준王浚 등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는 흉노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유연은 304년 8월 산서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은 "20일 동안 이미 5만 명이 되었다."고 한다. 곧 대선우가 된 유연은 일찍이 남선우의 근거지였던 이석(離石 :山西省 離石市)의 좌국성(左國省)을 수도로 삼았다. 그해 10월 한인도 지배하게 되었으므로 한왕漢王을 칭하고 원희元熙라 건원함으로써 독립국을 세웠다. 오호십육국의 시작이다. 팔왕의 난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국세는 급속하게 신장되었다. 유연은 사마등을 격파해 하동 지역을 거두고는 308년 10월 포자(蒲子:山西省 襲縣)에서 황제위에 올랐다. 309년 1월에는 평양平陽으로 천도했다가 310년 7월 그곳에서 병사했다.
당시에 종족 문제는 단순히 한인들과 잡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었다. 만약 한인 왕조가 이들 이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본족인과 같이 대했다면, 아니 그들의 근본이 강고했다면 그 정도로 중대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진 왕조는 그렇지 않았다. 전근대 국가에서 이민족을 차별없이 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일지 모른다.
피정복민은 한인들의 멸시와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강통이 "융적의 마음은 중국인과 다르다. 그들이 어려울때 수도 지역으로 옮겨온 후 모두가 그들을 부리고 희롱하였으니 그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다" 고 한 것은 적절한 지적이다. 한왕 유연이 병사를 일으킬때 " 진이 무도하여 우리를 노예처럼 부렸다.[晉爲無道 奴隸御我]" 라고 한 것은 당시 민족 갈등의 정도를 말해준다. 이민족을 군대로 사용하는 것은 자칫하면 이런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다. 특히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그들은 점차 자신들의 역량을 자각하고 타인의 용병을 일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그 무력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후한 말 동탁.여포가 끌어들인 이민족 기병, 소위 호기胡驥의 내전 참가를 시작으로 팔왕의 난에서 오랑캐 기병의 이용은 절정에 달했다. 예를 들어 동영공東瀛公 등騰은 새외의 선비족에게 원군을 청했고, 성도왕 영은 산서 지방의 남흉노와 결탁했다. 전자는 훗날 북위 왕조를 세운 탁발부이고, 후자는 오호십육국의 선구를 이루었던 한漢. 전조前趙 왕조의 주체 세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호십육국의 성립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로마 제국 말기 유럽에서도 밟았던 경로였다. 서진 종실 팔왕의 난은 호족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유연의 좌현왕 유선이 " 지금 사마씨는 골육을 서로 잔혹하게 죽이고 있어 사해가 가마솥 끓듯 하니 나라를 일으키고 제업을 회복하는 것은 바로 이때다." 라고 말한 것은 지금이야 말로 그들의 흉노 국가 재건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파악한 것이다.
흉노를 중심으로 하는 오호족의 봉기는 비참한 생활에 대한 반동만이 아니라 흉노인에 의한 흉노인의 국가 건설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경 새외에 건설되었던 흉노 국가와는 달리, 그들이 건설하려는 왕조는 지역도 주민도 이전의 그것과 달랐다. 흉노 중흥의 기수를 내걸었던 유연은 오히려 중국 내지에 흉노가 중심이 되는 왕조의 거널을 기도한 것이다. 중국 내지에 건설한 이상 그 왕조는 당연히 중국 전토全土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이렇게 하여 유목민이 통치 주체가 된 왕조가 내지 중원땅에 처음으로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서진혜제가 독살되고 혜제의 동생 회제懷帝, 284~313가 즉위할 무렵 한왕 유연의 세력은 더 커졌다. 당시 서진 영토 내에는 흉노의 한 외에도 요서지방의 선비 모용씨慕容氏. 우문씨宇文氏 .단씨段氏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점차 자립하여 내지를 향해 진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서진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모용외慕容嵬를 선비 도독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오히려 선비 세력을 뭉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나라에서는 유연이 죽은 뒤 약간의 혼란을 거쳐 311년 그의 아들 유총劉聰이 즉위했다. 유총은 일족인 유요劉曜와 갈족인 석륵을 시켜 서진의 군현을 공격. 함락하기 시작했다. 우선 하남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여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고립시키는 작전을 폈다. 서진의 실력자인 동해왕 사마월은 천하에 격문을 띄워 근왕병을 독촉하는 한편,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석륵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구원병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동해왕은 사방에서 긁어모은 4먼 명을 거느리고 낙양 동남쪽에 있는 허창許昌에 주둔했다. 회제는 동해왕이 제멋대로 병사를 동원하는 것이 괘씸하여 동해왕을 토벌하라고 밀조를 내렸다. 작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회제로부터 면직 통보를 받은 동해왕은 흥분한 나머지 발작으로 쓰러져 죽었다. 그는 명사이며 태위太尉 왕연王衍에게 후사를 부탁했다. 왕연은 서진 왕조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마음은 없고 고립무원의 낙양에서 빠져나가 자기만 살 궁리를 하고 있었던 터였다. 동해왕의 죽음은 그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다. 동해왕의 영구靈柩를 호송하여 귀장歸葬시킨다는 명분으로 황족.귀족.명문 자제등 10만명을 이끌고 황제를 남겨둔채 수도 낙양을 떠났던 것이다. 왕연은 당초 10 만명을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으나 모두 다투어 그를 따라 나섰다고 한다. 석륵은 이 소식을 듣고 이들을 공격했다. 서진의 10만 군중 가운데 서로 밟혀 죽은 자가 태반이라 석륵군은 힘들이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왕공이하 사졸까지 피살된 자가 10만 여명이고, 왕연 및 서진 종실 48왕이 모두 석륵의 포로가 되었다. 신문하는 석륵에게 왕연은
"나는 군사령관이라는 이름만 있었을 뿐 작전에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각하가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간판 역활을 하고자 합니다."
라고 했다. 서진의 대표적인 명사가 취한 행동이다. 석륵이 왕연에게
"그대의 이름은 사해를 뒤덮고 몸은 무거운 지위에 있으며 어린 나이에 조정에 들어와 흰머리가 될때까지 벼슬을 하였는데, 어찌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을 할수 있다는 말인가! 천하를 파괴한 죄가 바로 그대에게 있다!"
라고 꾸짖었다. 석륵은 왕연보다는 훨씬 사람 사는 도리를 아는 자였다. 명사였던 그를 공공연히 사형에 취하기보다 밤중에 사람을 시켜 흙벽을 넘어뜨려 그 밑에 깔려 죽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석륵이 왕연 일행을 습격한 것은 영가 5년3114월의 일이고, 흉노군이 낙양으로 쳐들어간 것은 5월의 일이었다. 유총은 유연의 친척 조카인 유요와 낙양을 포위했다. 수도 낙양은 무방비 상태였다. 이때 백관.사졸로 죽은 자가 3만 명이었다. 낙양 궁성은 유요에 의해 깨끗하게 불태워졌다. 동탁에 의해 불태워진 후, 약 120년 만에 낙양은 다시 불타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이로써 서진 왕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회제는 포로가 되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영가 7년313정월 원단 평양의 광극전전(光極前殿)에서 연회가 베풀어졌다. 회제에게 배당된 임무는 허리에 청색 앞치마를 두르고 흉노 황제에게 술을 따르게 하는[靑衣行酒]고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노예가 늘상 하던 역활이었다. 흉노족은 중화의 군주에게 이렇게 통쾌하게 되갚음을 한 것이다. 그 굴욕적인 광경이 목도될 때마다 서진 신하들의 곡성이 이곳저곳에서 올랐다.유총은 그런 광경의 전개에 싫증났다.그래서 2월 1일 짐독을 주어 회제를 독살했다.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한족에게는 진실로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아닐수 없었다.
회제의 형제는 25명이었지만 일찍 죽거나 살해당해서 회제가 죽은 뒤 남은 자가 아무도 없었다. 조카인 오왕吳王안晏의 아들 사마업 司馬 이 낙양을 탈출해서 고생끝에 장안에 이르자312, 9월 3일 황태자로 책립되었다. 이듬해 4월 회제가 죽었다는 흉보를 받고는 27일 즉위했다. 그가 서진의 마지막 황제인 민제(愍帝,300~317)다. 오랫동안 제국의 수도로서 명성이 높았던 장안은 후한 말 전란으로 황폐해져 성안의 주민은 1백호에도 미치지 못했고, 한 왕조의 조정이라 해도 수레 4량밖에 없었으며 양식도 부족하여 한심하기 이를데 없었다. 민제가 즉위한 그 다음 달 유요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두번(313년 10~12월),(314 7월)은 억지로 견뎠다. 그러나 세번째(316) 침략 했을 때는 장안 외성이 함락되었다. 안팎이 단절되자 장안성 안은 쌀 한 말이 황금 두냥에 거래되었다. 겨우 죽으로 연명하던 민제는 11월11일 하는 수 없이 항복했다. 민제가 압송되어 평양에 도착한 날은 17일이었다.
18일 민제는 유총 앞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렸다. 시종하고 왔던 국윤麴允은 그것을 보고 자살했다. 다른 신료들은 황제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 하여 살해되었다. 유총은 민제를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하여 사냥 대회에 나갈 때는 군복을 입고 긴창을 들고 선두에 서개 했다. 연회가 열리자 술을 올린뒤 술잔을 씻게 하더니 다시 옷을 갈아입히고는 수레의 차양[蓋]을 잡도록 하니, 서진 상서랑 신빈辛賓이 어린 민제를 안고 통곡하다 유총에게 살해되었다. 민제도 회제 못지 않은 치욕을 받고 317년 12우러 20일, 18세의 나이로 살해되었다. 서진은 무제 태시泰始원년265에서 민제 건흥建興4년316까지 51년의 조명으로 끝났다. "크게 시작[泰始]"했으나 끝은 너무 비참했다. 좋은 경치는 원래 길지 않은[好景不長]법이다.
여기에 서진 왕조의 운명만큼이나 처절한 한 여인이 있었다. 낙양이 함락되었을 때 혜제의 황후로서 팔왕의 난 때 거듭 폐립되었으며, 회제의 치세 때 홍훈궁弘訓宮에 살고 있던 황후 양씨[羊獻容]는 유요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유요가 한나라의 후신인 전조前趙의 황제가 되자, 양씨를 황후로 책립했다. 유요가 양씨에게 물었다.
"사마가에 놈들과 나를 비교하면 어떠냐?" 고. 그러자, 양씨는
" 어찌 동열에 놓고 비교할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왕조의 기틀을 연 성군聖君입니다. 그혜제는 망국의 암부暗夫로 마누라, 아들과 자기 자신마저 지키지 못햇습니다. 고귀한 제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자식을 범서凡庶의 손에 욕보이게 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당시에는 진실로 살아갈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찌 금일이 있을 것을 도모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저는 고문高門에서 태어나 항상 세간의 남자들이란 작자는 다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첩이 되고 부터 비로소 천하에 진짜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당시 한족은 물론, 흉노족 내부에서마저 오랑캐 출신이 과연 중화제국의 제왕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한때 서진의 태후였던 양씨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긍정.지지하고 나선것이다. 망국도 서진처럼 비참한 망국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한족 역사가들은 이를 지칭하기를 영가 연간에 일어난 "상란喪亂"이라고 했다.
오호란 잘 알다시피 흉노. 갈. 선비. 저. 강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3~5세기 중국의 서.북. 동방에서 중국 내지로 이주해와 활동한 소수민족은 이외에도 정령丁零. 오환烏桓. 부여夫餘. 고구려. 파巴. 만蠻. 료瞭. 호胡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호라는 명칭은 당시 화북의 민족 상황을 표현하는 말로는 적당하지 않다. 사실 오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정작 "오호" 라는 말이 없었다. 이 용어는 대체로 4세기 중반 이후 등장하여 6세기 전반에 고착되어 쓰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십육국(成漢. 前趙. 後趙. 前燕. 前凉. 前秦. 後秦. 西秦. 後燕. 南燕. 北燕. 夏. 後凉. 南凉. 北凉. 西凉)도 마찬가지다. 당시 화북에는 육국 외에도 염위苒魏. 서연西燕. 전후前後. 구지仇池. 적요翟遼 의 위魏 등의 나라가 있었으니 "십육"이라는 것도 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이 용어는 북위 말 역사가 최홍(崔鴻. ?~525)의 저서<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 의해 공식화된 명칭일 뿐이다. 오호 십육국은 314년 10월 이웅李雄과 유연이 각각 사천과 산서 일대에서 성도왕과 한왕을 칭한 해부터 선비족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까지 135년간에 걸친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대 세력의 큰 움직임은 화북에 있는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갔다.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관중關中과 업(현 河北省 臨章縣) . 양국(襄國 : 현 河北省 邢臺市). 중산(中山 : 현 河北省 定州市)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關東이 그것이다. 이 두 지역을 지배했던 국가가 십육국 가운데서 강국으로서의 지위는 유지하였으니, 양 지역에서 유력정권이 일어나 동서로 대립하는 형세를 펼쳤다. 즉 320년대의 전조前趙와 후조後趙, 350~360년대의 전연前燕과 전진前秦, 380년대 중기~390년대 중기의 후연後燕과 후진後秦, 410년대 말~420년대 중기의 북위와 하夏가 그것이다.
오호십육국 시대와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로마 제국이 쇠퇴하여 동서로 분열되고 게르만 민족의 부족국가가 세워졌다. 유라시아 대륙은 바로"민족의 시대"를 맞은 것이다. 게르만 민족의 부족국가 대부분은 곧 그 하나인 프랑크 왕국에 의해 통합되어 "서유럽 세계" 가 형성되어 갔다. 이 때문에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현대까지 이어지는 유럽의 골간이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오호십육국의 성립에 대해서는 "성공한 쿠데타" 인데도 "역사상 가장 굴욕" 이라거나 "오호가 중화를 어지럽혔다" 고 하며 매우 부정적인 의미인 "난리" . "혼란" . "동란" . "분란" 등으로 이름짓고 있다. 이렇게 오호족과 게르만족은 북방의 "소박한 민족"으로 남방, 소위 "문명" 사회에 한과 로마라는 양 고대 제국의 지배에 대항해서 기원후 3세기에 유라시아 대륙 동서에서 일어났던 민족의 움직임이지만, 그 평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일련의 역사적 사건이 비난받고 부정되어야 할 일인가? 오호십육국을 진. 한과 수.당 제국 사이의 불안정한 시대를 야기한 악의 존재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호의 중국 이동 후, 그들이 한족과 융합했기 때문에 수. 당의 중국 통일이 실현되었고, 동아시아 각국의 모범이 된 국가체제가 구축되었으며, 불교가 중국사회에 침투 할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회의 창조였다. 새로운 중국의 창조였던 것이다. 이제 천천히 여행을 떠나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시대 역사의 중요 무대였던 삼각 지대 가운데 장안즉 西安다른 글에서 따로 독자 여러분과 함께 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 따라서 이 글의 주도니 여행지는 오호의 본거지인 산서지역이다. 산서는 몇개의 분지로 되어있다. 이 중요 분지들을 연결하는 것이 황하의 지류인 분수汾水다. 서남으로 흘러 용문龍門 근처에서 황하와 만나는 분수의 중하류에 임분臨汾이라는 도시가 있다. 이곳이 바로 흉노 유씨의 한나라가 수도로 정했던 평양이다. 임분 사람들은 그곳이 한나라의 수도라기보다 중국인들이 성군聖君의 전형으로 추모하고 있는 요 임금의 도읍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임분의 별명이 요도堯都다. 임분시 남쪽 4km지점에 요 임금을 제사 지내는 요묘堯廟가 있고, 동쪽에는 50m 높이의 요릉堯陵이 있다. 임분시 혹은 임분현 지역에서 유연 혹은 흉노 한나라에 관한 유적, 옛 평양성의 흔적을 찾기란 힘들다. 다만 임분현 서남18km 지점에 있는 여량산맥呂梁山脈의 한 줄기인 고사산故射山 산록에 평수平水의 시발점으로 알려진 용자사천龍子詞泉이라는 샘이 유연과 관련된 전설을 전할 뿐이다. 서진 영가 연간에 그곳에 사는 한씨韓氏부인이 야외에 나갔다가 큰 알 하나를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왔더니 알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을 궐蕨이라 했다. 아이가 여덟 살때 유연이 백성을 동원하여 "평양도당금성平陽陶唐金城" 을 건축하는 데 궐이 응모하여 하룻밤 만에 성을 완성해 버렸다. 유연이 그의 초능력을 질투하여 죽여 없애려 하였다. 4월 15일 고사 산록까지 추격하니 궐이 원형의 금룡金龍으로 변하여 돌구멍을 파고는 숨어버렸다. 유연이 칼을 빼 용의 꼬리를 끊으니 샘물이 거기에서부터 용출되어 나왔다. 그 후 사람들은 이를 "용자천龍子泉"이라 하고, 그 아래 만들어진 저수지를 "금룡지金龍池"이라 했다.
이 물이 흘러 일대의 토지를 윤택하게 하니 후세 사람들은 그를 "강택왕康澤王"이라 하고는 저수지 옆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이 사당을 "강택왕묘康澤王廟", 속칭 "용자사" 라고 한다. 당대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사당에 매년 4월 15일 묘회가 열리면 주민이 구름처럼 모인다고 한다. 유연의 명령을 받고 궐이 쌓았다는 유연성劉淵城의 흔적이 지금도 있다는 이야기를 최근에야 들었다. 서안의 섬서사범대학에 근무하는 L씨가 백방으로 탐문한 결과다. 산서성은 필자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때문에 여러 차례 그곳을 찾았다. 임분도 마찬가지였다. 필자가 임분지역, 특히 소위 "분서汾西" 지역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96년 여름이었다. 산서성 수도 태원에서 서안으로 가는 열착길은 분수를 따라 나 있다.
태원 시내를 벗어나면 가도가도 끝없는 옥수수밭이다. 이곳이 바로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 "붉은 수수밭[紅高梁]"의 무대다. 당시 임분을 방문한 목적은 역사학도로서가 아니라 "붉은 수수밭" 때문이었다. 필자는 평양성을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역사학도로서 그곳을 찾아 기구한 여인 양황후가 남긴 이야기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다
출처 : [기타] (박한제 교수의 中國역사기행 1.<영웅시대의 빛과 그늘>中)
첫댓글 서진... 중국 25사 최악의 막장왕조였죠. 서진 자체도 막장인데다 이후의 오호십륙국 시대는 문화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그시대 사람들 입장에선 지옥의 다른 이름이었을 겁니다. 제대로 된 황제도 별로 없고, 걸핏하면 전쟁에 통치도 가혹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