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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랑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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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이야기 주머니 스크랩 창경궁(10.6)
설악산 추천 0 조회 25 07.10.09 23:18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창경궁(10.6)


종묘에서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길은 다리 하나 건너면 된다.

창경궁으로 들어와서 종묘가도 되고 종묘에서 들어가서 창경궁으로 가도 된다.

창경궁과 창덕궁도 담하나 사이로 마주 하고 있다.

종묘에서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도중에도 담 너머에 창덕궁의 건물들이 보인다.

먼저 조선시대 천문대였던 관천대부터 가 보았다.

관천대는 돌 7개 계단 위에 올려져 있다.

네 귀퉁이에 봉오리 돌 4개가 있고 제일 위 받침돌 밑에는 문양이 있는데 무슨 문양인 지 모르겠다.

관천대에서 궁궐쪽으로 가는 정면에 문정전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데 팔작지붕에 전형적인 귀솟움 건물인데 안쏠림인 지는 알 수가 없다.

함인정을 바라보면서 먼저 빈양문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빈양문 편액 주위에는 주화문양, 꽃문양이 되어 있는데 한번도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없는 편액 주위 문양이다.

숭문당의 편액 문양은 녹색과 하늘색으로 문양을 하여 단출하면서도 품위가 있다.

숭문당 난간에는 안상모양의 풍혈을 뚫어 놓았다.

문정전의 닫집 문양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아마도 조선의 궁궐 닫집중 남아 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화려한 것같았다.

운궁형 닫집인데 특히 윗부분이 화려하다.

천정은 우물천정인데 우물문양 하나에 꽃이 5개가 문양되어 있어 화려함이 돋보인다.

명정전은 창살의 꽃살이 눈에 띠는데 꽃살의 색깔을 안 칠한 것인지 원래 누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명정전의 단청은 머리는 연꽃 같은 데 이음매에 다시 꽃문양이 있고 연꽃 주위에는 꽃 문양이 있는데 무슨 무늬인지 알 수가 없다.

하여간 저런 단청은 여기서 처음 보는 것같다.

명정전의 닫집은 단청이 많이 바래졌는데 특히 보좌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계잔난간처럼 보이는데 그 밑에 안상문양의 풍혈이 있고 그 밑에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밑에 궁판을 삼단으로 만들어서 장엄을 더 했다.

천정은 우물천정에 봉황을 조각한 듯 보였다.

명정전 바닥은 나무가 아닌 검은 돌인지 기와인지 그렇게 되어 있는데 옆에서 사람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가 여기서는 생활은 하지 않고 행사만 했다는 것이다.

품계석이 있는 곳은 행사장 위주의 공간일 것이다.

창경궁에 월대가 2개 있는데 봉황이 새겨져 있다.

어떤 학생이 왜 여기는 봉황이냐고 묻는데 그냥 청룡만 왕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고 봉황도 상징한다고 말해주었다.

명정전도 임금이 백성들에게 밝은 정치를 하겠다는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비전을 밝힌 곳이다.

창덕궁 명정전앞의 박석은 다른 곳과 달리 화강암으로 만든 것같은데 박석은 얇게 잘라진다는 의미가 있는데 여기는 인공으로 박석을 만든 듯하다.

그리고 표면을 쪼아서 햇빛의 난반사를 만든 것으로 다른 곳과는 특이하게 보였다.

명정전의 잡상 수도 5개이며 다포식 팔작지붕이며 날아갈 듯한 귀솟음 건물이다.

창덕궁에는 금천교가 있고 경복궁에는 영제교가 있는데 창경궁에는 옥천교가 있다.

풍수사상인 배산임수와 불교의 경계를 건너는 그런 이치를 모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옥천교의 석조난간에는 돌로된 짐승조각이 있고 안상문양의 풍혈같은데 좀더 마름모 모양에 가까운 문양이다.

그러고 보니 안상문양도 형태나 위치에 따라 다양하게 응용을 해서 사용한 것같다.

함인정 쪽으로 갔는데 함인정에 사람들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

함인정 안 천정 사방에 글이 써진 편액이 걸려 있었고 중수기 편액도 걸려 있었다.

환경전, 경춘전을 거쳐 통명전을 구경했는데 통명전은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통명전 안에는 순조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었다.

통명전 옆에는 연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보수중이었다.

그리고 다른 쪽 옆에는 양화당이 있었는데 난간은 아자(亞字)난간이었다. 

정조가 거쳐하던 연춘헌. 집복헌에서는 차예절과 다식만들기 실습을 하고 있었다.

거거서 계단을 올라가면 풍기대가 있고 성종대왕 태실비가 있다.

풍기대 가기전에는 창경궁에서만 특별히 볼 수 있는 궁궐의 수석이 조경의 일환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연지 속에도 수석 몇 개가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수석은 우리의 고유 조경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 내용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1418년에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보유 문화재현황

국보 1점 - 제226호 명정전

보물 7점 - 제384호 홍화문, 제385호 명정문 및 행각

                    제386호 옥천교, 제818호 통명전

                    제846호 풍기대, 제851호 관천대

                    제1119호 팔각칠층석탑

등록문화재 1점 - 제83호 대온실


홍화문 : 창경궁의 정문으로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하였다. 조선 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놓이고, 다포계 양식(樣式)의 외오포작 이출목, 내칠포작 삼출목의 공포를 짜았는데, 견실한 구조와 공포의 짜임은 조선 초기 형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정면의 3칸에는 각각 판문을 달고 그 위로는 홍살을 하였으며, 북쪽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마련돼 있다. 이층은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을 꾸몄다. 홍화문의 좌우로는 궁장(宮墻)이 남북십자각을 지나 궁역을 형성하였다.


옥천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 위에 설치한 다리다. 조선 왕궁은 모두 명당수 위의 석교를 건너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옥천교는 길이가 9.9미터, 폭6.6미터와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었는데, 홍예가 연결되는 중앙에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다리 좌우에는 돌난간이 조각되었는데, 난간 가장자리에 법수(法首)를 세우고 네 개의 연잎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5칸을 형성하고, 한 장의 돌로 만든 풍혈판이 설치되었으며 돌란대가 얹혀 있다. 교상(橋床)은 장마루 같은 청판돌로 짜고 중앙에는 어도(御道)를 한 단 높게 만들었다. 이 다리는 1483년 조성되었다.


명정문 : 이 문은 명정전을 둘러싼 월랑 중 명정전과 마주보고 있는 동월랑의 중앙부에 있으며, 창경궁의 외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월랑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中庭)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인데,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주열(柱列)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다. 이 건물은 포작(包作)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명정전 : 조선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이 조성되고, 그 정전으로서 명정전이 세워졌다. 이때 명정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었다.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른 것이다. 그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1616)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다른 궁의 정전과 같이 이중의 월대를 두어 그 위에 건물 기단을 마련하고, 큰 사각 주초 위에 원형의 운두 높은 주좌(柱座)를 조각하여 초석을 배열하였다. 

월대의 형식은 다른 궁의 것과 달리 지형에 맞추어 전면 동쪽과 북쪽 일부만을 이중단으로 하고, 건물 좌우와 뒷편에서는 1단으로 하였다. 평면으로 보아 정면 5칸, 측면 3칸에 후퇴(後退)를 한 단층 팔작기와지붕으로 겹처마이다.

평주 위에는 모서리를 많이 굴린 창방이 놓이고 운두가 낮은 평방 위에 다포계 양식의 외삼출목, 내사출목의 공포를 짜았다. 건물 사면은 모두 꽃살창으로 돌려져 있는데, 그 위로는 교살창이 있다. 내부 바닥에는 전(塼)을 깔았고, 뒤편 중앙부에는 왕좌인 용상이 있는데 그 뒤로 일월도의 병풍이 놓였다.

그 위로는 닫집으로 짜은 보개(寶蓋)가 있고 천정의 중앙부에는 한층을 접어올린 쌍봉문(雙鳳紋)이 있는 보개천정을 장식했으며, 그 주위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을 하고, 특히 천정판에는 화려한 연화문의 반자초 단청(丹靑)을 시문했다.

월대의 전면에는 명정전 어간에 맞추어 중앙에 삼도의 이중계단이 놓였다. 가운데 어계의 폭은 2.4미터이고, 양측 협계(挾階)의 폭은 각 1.3미터이다. 상하 계단은 모두 6단씩으로, 어간의 답도(踏道) 석판 중앙에 사분심엽형(西分心葉形) 윤곽을 양각(陽刻)한 후 그 안에 날개를 활짝 편 한쌍의 봉황을 조각해 장식했고, 챌판에도 당초(唐草)와 보상화(寶相華), 운문(雲紋)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하층 계단 앞에는 명정문과 연결되는 어도가 있고 좌우에 24개의 품계석(品階石)이 있다. 


문정전은 창경궁 창건 때 편전으로 건립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명정전과 함께 중건하였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朝鮮古蹟圖譜」에 실린 명정전 정면 사진에 동측면의 일부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이 전각이 존속했던 것으로 알 수 있으나, 그후의 자세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1984년부터 시행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건물의 기단과 동쪽에 두 곳, 서쪽 한 곳의 계단이 확인되었는데, 기단의 규모는 남북 20미터, 동서 18미터였다. 

1986년 창경궁 중창공사 때 중건되었는데, 발굴조사와 문헌 고증에 의하여 방주에다 정면 3칸, 측면 3칸, 내삼출목, 외이출목, 단층 팔작집(38평)으로 겹처마이며 남향하여 세웠다.

이 건물의 서쪽에서, 숭문당 남쪽면으로는 경사진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남북 방향으로 아름다운 2단의 화계(花階)를 꾸몄고 동쪽에는 문정문이 있다. 


이 관천대는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던 곳으로, 「書雲觀志」에 보면 숙종 14년(1688)에 조성된 것이다. 원래 창덕궁 금마문 밖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창경궁으로 옮겨 왔다.

높이는 2.2미터, 넓이는 2.4*2.3미터이며, 주위에는 돌난간을 돌렸다. 대의 중앙에는 높이 99센티미터의 관측기를 설치하는 작은 대가 있고, 그 위에 넓이 73.4*52.6센티미터, 두께 24.5센티미터의 또하나의 판석이 있다. 여기에 남북방향으로 관측기를 고정했던 5개의 구멍이 파여 있다.


숭문당 : 이 건물은 조선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순조 30년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崇文堂'의 현판과 '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를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홑처마이며, 지형에 따라 앞면에만 방형의 장초석을 사용하여 누각처럼 세웠다. 기둥 위에는 간단한 초익공의 공포를 짜았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 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장식하였다.

평면으로 보아 전후와 남쪽에 퇴간을 두고 마루를 깔았으며, 가운데칸의 마루와 동선을 연결시켰고 그 좌우에 방을 놓았다. 


빈양문 : 숭문당 북쪽에 연접되어 있는 이 문은 치조공간(외전)과 연조공간(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의 개폐 기능을 갖는 문으로 명정전의 뒷면 중앙 어칸 앞으로 설치된 복도를 따라가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내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북쪽으로 함인정, 경춘전, 환경전이 눈에 들어온다. 이 문은「궁궐지」에 간단한 규모가 기록되어 있고 1986년 중건공사 때 발굴 조사를 토대로 재건하였다


함인정 : 이곳에는 원래 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았고, 주간에는 화반 두 개씩을 놓았다.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내진주(內陳柱)로 구획된 마루는 한 단 높게 처리하여 그 위로는 우물천정을 하고 사방둘레의 퇴간(退間)에는 연등천정을 하였다 


경춘전 : 이 전각은 창경궁의 내전으로 성종 14년에 건립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그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7칸, 전후퇴칸을 포함해서 측면 4칸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사모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간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네면에는 모두 세살문을 달았고 그 위에 교살창을 하였다. 내부에는 모두 마루를 깔았는데 양측으로 각 2칸과 전후퇴칸은 연등천정을 하고 우물천정을 하였다


환경전 : 이 건물은 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익종이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간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건물의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고, 외진평주(外陳平柱)와 내진고주(內陣高柱)를 배열하여 퇴량을 걸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대량(大樑)은 내진고주 사이에 걸었다. 


통명전은 창경궁의 연조 공간으로 명정전 서북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이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이다. 남향한 전면에는 월대를 두고 양모서리에는 청동제 드므를 놓고 그 북쪽에 외벌대 기단 한 단을 두어 건물을 세웠다. 

정면은 7칸이고 측면이 4칸인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였다. 지붕 위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전후퇴칸을 두었다.

북서쪽 일부의 방을 제외하고는 건물 내부 바닥에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원래는 정면으로 보아 양측에 2칸씩 방을 꾸몄음이, 1984년의 발굴조사에서 연도지(煙道址)가 노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양화당 :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각주(角柱)를 세우고 초익공계 포작(包作)을 짜았다. 기둥간에는 화반(花盤)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간결한 장식을 하였다. 

건물의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전면 중앙의 2칸에만 툇마루를 창 없이 개방하였다. 외진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는 퇴량을 걸었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대들보는 내진고주 사이에 걸리었다. 


 이 풍기대는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대 위의 구멍에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방향은 24방향으로 측정하였다.

전체 높이는 228.1센티미터인데, 하부대석 높이는 92.4센티미터, 상부 팔각주의 높이는 135.7센티미터이다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集福軒)은 영춘헌의 서행각으로 초창 연대는 알 수 없다. 집복헌에서는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정조 14년(1790)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영춘헌에서 거처하다가 재위 24년(1800) 6월 승하하였다.

순조 30년(1830) 8월 1일 오전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 경춘전등과 함께 소실되어 순조 34년 장남궁을 헐어다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1983년 동물사 본관에 있던 창경원 관리 사무소가 동물사의 철거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겨 임시 관리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1986년 중건 공사 때 창경궁 관리 사무소를 신축하고 이 건물은 변형된 부분을 보수하였다.

영춘헌은 본채 5칸이 남향하여 ㅡ자형을 이루고 본채의 좌우와 뒷면으로는 행각이 둘러져 있어 ㅁ자형을 이루었으며 서쪽으로 ㅁ자형의 행각이 이어져 맞붙어 있다. 주위 건물과 비교해 볼 때 통명전, 경춘전, 환경전 등은 이익공식이고 양화당은 초익공식인 데 비하여 영춘헌은 기둥의 높이도 낮고 익공의 끝을 몰익공식으로 둥글게 굴려 초각하였으며 행각은 더욱 간결하게 굴도리집으로 처리하여 각 건물의 격을 엿볼 수 있다. 

성종태실비 : 양화당의 동북쪽 구릉지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태실은 4각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石鍾形)의 몸체를 놓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었으며 상륜부(相輪部)는 보주로 장식하였다.

태실비는 태실 동쪽에 있는데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를 갖추고 있고 비신 앞면에는 "성종대왕 태실"이라 새겨져 있다. 이들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태를 묻은 곳인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에 있었던 것인데 1930년 5월 전국에 있는 조선 역대 임금의 태실을 대부분 서삼릉으로 이봉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성종은 세조 3년(1457) 덕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예종의 뒤를 이어 1469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뒤 25년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경국대전」의 반포 등 조선의 문물 제도를 완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창경궁을 창건한 임금이기도 하다. 


집춘문 : 창경궁 동북쪽 담장에 있는 궁문으로 서울 문묘가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있다. 현재 이 문 외부 지역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어 출입문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이 문은 후원의 동문으로, 태학(太學) 서쪽 반교(泮橋)와 제일 가까워 역대 임금들이 태학으로 나갈 때에는 이 문을 경유하였다 한다. 초창은 창경궁 창건 때인 성종 때이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조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여진다. 


월근문 : 창경궁 사무소 정면에 있는 이 문은 정조가 그 부친 사도세자의 묘(廟)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정조 3년(1779)에 건립하였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둥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하였기 때문에 월근문(月覲門)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선인문 : 홍화문에서 이어진 궁 담장의 남쪽 곧 창경궁 동남쪽 담장에 있는 궁문이다. 이 문은 성종 15년에 초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는데 철종 8년(1857)에 다시 소실되어 고종 14년(1877)에 복원하였다. '동궐도'에 보면 현재의 월근문과 같이 솟을지붕의 외관을 갖추고 있었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건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이 문의 예전 이름은 서린문(瑞燐門)이라 하며 동궁의 정문이었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이 문으로 출입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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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0.10 11:00

    첫댓글 설악산님 덕분에 창경궁을 다시 한번 느껴 봅니다. 예전에는 밤벚꽃놀이로 몇번을 찾았던 곳, 그리고 나이 들어 문화유산으로 마음에 담으려 찾았던 곳인데....

  • 작성자 07.10.10 13:14

    한번 다녀 오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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