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속담엔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보낸다'라는 말이 있다. 며느리가 듣기엔 조금 서운한 말이지만, 어찌 되었든 그만큼 가을볕이 더 좋다는 말이겠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길목, 걷기 좋은 계절이 왔다. 훌쩍 멀리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시기다. 그럴 땐 집에서 가까운 둘레길로 향한다.
호수 곁에는 그늘과 햇살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는 숲이 자리하고 있고, 호수 위에는 바람과 물살을 가로지르를 배가 동동 떠 있다. 유유자적 선비가 따로 없구나!
아산 신정호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참으로 드넓다는 것이다. 호수 면적이 92ha에 달하니 그럴 만도 하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입구로 향한다. '4.8km'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타박타박 거닐다 힘이 들면 그냥 미련없이 돌아오기로 하고 길을 나선다.
0km, 준비, 시작, 탕!
신발끈을 동여매고 왼쪽 귀에는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오른쪽 귀에는 일부러 이어폰을 꽂지 않았다,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의 소리로 채우기 위해. 그렇게 걷다 보면 바람과 향, 그리고 이야기로 가득찬다.
그렇게 걷다 보면 야외음악당, 수생식물전시장, 이충무공동상, 체육공원, 음악분수와 조각공원 등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다양한 볼거리가 곳곳에 놓여 있다.
내내 평지를 걸으면 지루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다행이다. 가끔은 카메라를 들어 사진기에 담고, 또 가끔은 그저 눈으로 담고 쓱 지나가기도 한다.
신정호 입구에는 자전거 대여소가 있다. 예전에 이곳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주변을 달렸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번에도 자전거를 대여하고 싶었지만, 꾹 참는다. 공원 내 둘레길에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자전거 출입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 그렇다 보니 호수를 더 가까이서 즐기기 위해서는 도보로 걷는 것이 더 낫다.
신정호는 수면이 워낙 넓다 보니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 마산정 또는 마산저수지라 불렸던 신정호는 1926년에 만들어진 인공 호수다. 호수가 만들어지기 전, 이곳에는 '마산'이라 불리는 부락이 있었다. 이제는 물속에 가라앉은 마을, '마산'의 모습은 어땠을까.
신정호로 이름이 바뀐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이 주변에 신정관(현 온양관광호텔)을 세웠고, 신정관에서 2.6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마산저수지를 신정관의 부설 유원지 지역으로 조성하여 이곳을 '신정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름이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신정호 둘레길을 거닐며 몇 번의 벤치와 몇 번의 정자를 지나쳤는지 모른다. 걷다 앉다, 걷다 앉다를 반복하니 다시 원점.
'이 공원을 다 둘러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과 함께 걷기 시작했지만, 다시 원점에 도착하니 한 바퀴 더 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소요 시간은 대략 1시간 30분에서 두 시간 정도. 딱 적당히 걷기 좋은 둘레길이다. 쉬지 않고 걸었다면 더 빨리 도착했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