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문신 외 4편
윤은주
온몸에 문신이 형벌처럼 감겨있는 남자와 일하는 밤
바다우산뱀이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향해 머리를 ‘카아’ 치켜올린다
그때 풍문으로 들은 그가 다녀온 감방을 떠올렸다
어두운 배후가 드리워진, 흑백 줄무늬의 팔이
분류한 편지를 카트에 실어 간다
그의 발소리에서 세찬 파도 소리가 난다
새로 도착한 편지상자를 갖다 줄 때마다
뒷걸음치는 나의 발뒤꿈치
물컹, 눈 속의 흑점과 마주치는 순간
알전구 켜진 밤의 창문처럼 스르르 열리는 마다가스카르
모론다바 섬마을
바오밥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수평선을 바라보는 아이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고깃배를 기다린다
비가 새는 지붕의 오두막에서 혼자 밤새워 울다가
건기에 물을 마시러 육지로 올라온 뱀들과 마주쳤다
그날 이후
까만 아이의 하얀 이빨이 돛대처럼 아른거렸다
배 한 척 꼬리를 흔들며 먼바다에서 돌아오는
빗소리에
사내의 살 속에 박힌 뱀들이 몸을 풀고 나와
수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로 목을 축인다
저 사내의 맹독도 한때는 어린 우산 아래에서 비를 피했을까?
바다 냄새를 시침질하던 밤이 어둠을 접자, 새벽이 우산을 펼친다
속
날개가 잠을 잡니다 한 마리, 어떤 종이새
꺼내어 날개를 펼쳐 봅니다 그녀를 스치는 한쪽 뺨
푸른 사과 하나 열립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밥숟가락이 천장에 별을 그리다가 우두둑 떨어집니다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거울 속 하늘에 실금이 생기자 여자가 바늘로 촘촘히 하늘의 상처를 깁고 있습니다 꿈속을 거니는 하얀 종이학 하나 더 꺼내어 펼치자 단칸 셋방에 물 먹은 별들이 놀러 옵니다
고개가 갸우뚱해지고 어둠이 벗겨진 창
‘도레미파솔라시 솔파미레도’ 딸기코가 된 고래가 술독에서 나옵니다 망치로 장독을 실로폰처럼 깨트립니다
여자는 창문을 엽니다 동상 걸린 바람, 유리병 속의 천 마리의 눈꽃들 허공으로 날아갑니다
변질된 남자는 그녀를 속였고 속은 속도만큼 속상해서 속으로 속삭이다 속옷처럼 얇아집니다
그녀는 얼른 병뚜껑을 접어 버렸습니다
모르는 얼굴 하나가 바깥으로 들어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바람을 번역하다
때가 되었구나 가이야, 불러 보렴 너의 검고 긴 속눈썹을 닫고서
하얀 발을 가진 아리랑 부족의 노래를 불러보렴
겨울 눈 위에 떨어진 산수유처럼 너의 귀고리가 순록의 방울로 찰랑거린다
나의 작은 새야 너는 한국말은 모르지만 바람의 언어는 이해하지
누가 바람을 보았니, 너도나도 볼 수 없어요*
고요한 새벽은 알죠 꿈에 들었던 신비한 목소리가 나뭇가지 사이를 지날 때
파란 파랑새처럼 파티로 파도 타며 파랑거리는 파란 리본
먼바다 건너 갈대숲 지나 겨울이 반짝이는 유리 늪에
너의 옛 가야 그리워 수천 년을 건너온 나무가 산단다
그 나무 푸른 잎 모두 깨워 초록의 소리로 너를 향해 박수 치지, 너를 알아본 거지
뉴브런즈윅에 사는 가이야, 혹시 알고 있니? 너의 귀고리는 흰 노래의 유산이라는 걸
오 가야, 바람의 왕국 이야기 듣고 있니
(자줏빛 댕기를 맨 아이야, 오래전 가야국에서 금귀고리를 달고 너무 일찍 토분에 묻힌)
(외할머니 나를 번역해 주세요 뉴브런즈윅에 사는 지금의 나는 누구의 기록인가요)
그때 나무 뒤에서 또 다른 네가 말했지
(오래전 그 아이에게서 들었던 소리가 나에게서 난대요…… 1600년 동안 떠돌다 어느 눈 내리던 밤, 전나무 위에 쌓인 전설처럼 이 북쪽에 도착했대요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고 착한 노루처럼 들판을 달리는 하얀 백성들의 아리랑이 이곳까지 긴 강물처럼 들려와요)
가이야- 내 아가, 너의 작은 입술에 손을 대어 보렴
너의 안에서 유빙처럼 만져지는 낙동강의 물줄기를 들어 보렴
강가에 살던 사람들의 입김이 아직도 네 안에서 따스하게 만져질 거야
가이야 네 안에서 불어온 가야의 바람이 지금도,
한반도의 젖줄처럼 네 체온 속에서 아득히 출렁일 거야
*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시 「누가 바람을 보았니」 일부 인용.
목화밭이 있는 탑방
신월동 59번지,
곰팡이 핀 벽 위로 달동네의 미간이 만져져요
가끔 머리맡 물병에서 깨진 거울이 만져져도 추위는 견딜만해요
밤늦은 귀갓길, 어두운 골목마다 이따금 불빛처럼 반짝이는
유기묘의 눈빛들 제겐 고요한 석등이에요
어둠을 지고 오르막을 올라 벽에 기대면,
습한 냄새와 벌레들의 참선이 줄지어 방을 밝혀요
날짜 지난 빵으로 저녁 공양을 해요
불경기가 되면서 불경이 더 잘 보여서 괜찮아요
창이 없어도 풍경이 보이는 이 방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어디에나 보리수처럼 붉게 자생하는 풍경소리가 있죠
목어를 열고 나온 하얀 물고기 한 마리, 별을 향해 날아갈 때면
보리수나무 아래 작은 방문 하나 열리죠
비 오는 날은 수트라*가 되어 넘치고
검은콩을 볶으면 자부라진 냄비가 되는 옥탑방,
입김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면
얇은 이불 위로 목화꽃이 피는 방
사슴이 눈밭을 뛰어가는 벌판으로 놀러 오세요
팔만대장경처럼 펼쳐진 구름이 탑의 지붕을 잇고 있어요
저 아래 경사진 계단을 오르다
목화밭에 핀, 별들을 누군가 오래 바라봐요
* 아름다운 꽃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격언과 금언을 모은 것.
달새
계절이 세금처럼 밀린 사람들
가난한 달이 동전처럼 보름달이 되는 시간은 너무 짧아요
날마다 달은 뜨지만 마음은 늘 연체되어 그믐달 같아요
그래서일까요
보름달 속에는 평생 눈물이 주식인 달세가 살아요
매일 밤늦게 집으로 날아들던 남자는
겨드랑이부터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자고 깨 보니 갈라진 틈마다 깃털이 자라 있었죠
혼자 달을 보는 시간이 점점 늘어가는 남자는
날이 갈수록 초승달처럼 야위어 갔어요
끄트머리에 붙어사는 것들은 입이 없어 빈 몸만 달랑거리죠
아침마다 빨래판을 부리로 쪼아대던 딱따구리 여자는
깃털 몇 남겨둔 채 날아가 버렸어요
수도꼭지를 아무리 잠가도 흘러내리는 절망들
벽지에 그녀가 버리고 간 얼룩이 번져갑니다
지대가 높은 곳은 나뭇가지와 가깝지만
달을 보면 먼저,
어느 날 밤 둥지로 날아간 사내가 떠올라요
깎이는 구멍은 가파르고
환한 달빛을 아무리 먹어도 늘 배가 고파요
어쩌죠 저 허름한 둥지, 이제 조금만 있으면 겨울인데
가파른 담벼락 금이 간 사이로 옥탑방이라도 구해야 하나요
젖은 날짜들이 점점 청구서처럼 쌓이고
따뜻한 내일이 우수수
달이라는 이름을 가진 새의 심장을 빠져나갑니다
2024년 《상상인》 신춘문예 당선.
윤은주 시인
대구 카톨릭대학 불문과 졸업. 2019년 캐나다 한국일보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없는 입선으로 입상. 2024년 《상상인》 신춘문예 당선. 캐나다문인협회 회원. 캐나다 미시사가 시립도서관 근무했음.현재 캐나다 거주. 캐나다 포스트 현재 근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