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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아티스트 창시 백남준 장례식 엄수, 유해 한국 독일 뉴욕안치 |
2006년 02월 04일 11:00 / 김세린 기자 (sharing13@esasangge.com> |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것이지요. 사기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악평 같은 거, 내가 일생동안 악평 오죽 보았어요. 이제 악평같은 거 받음 받을수록 예술가가 자라지요. 신념 가지고 했으니까요 난 원래 어리광쟁이로 자라서 그저 그때 하고픈 일을 그냥 해요 그러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됩니다.” -백남준- 백남준은 예술계에서도 기인(奇人)이다. 그는 여느 예술가들과 같이 특정 사조에 속한 사람도 아니었고 TV와 비디오, 프로젝션 이 세 가지 도구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 자신도 자신은 어리광쟁이로 자라서 하고픈 일을 그냥 한다 하듯 그의 예술세계에도 그의 그런 모습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지난 1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한국시간으로 4일 새벽 5시에 뉴욕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는 국적을 초월한 예술가였고 그 어떤 종교도, 그 어떤 사상도 수용하는 예술가였다. 그를 가끔 미니멀리즘, 팝아트 등으로 규정지으려는 미술사가들이 존재한다. 그를 한 사조에 규정하고 그 사조에 맞춰 그의 작품을 해석하려 한다. 그런 모습은 옳지 못하다. 사조에 얽매여 해석하려면 그는 파괴와 기이함을 목적으로 했던 다다에도 들어가고, 입체와 형태를 중요시 했으므로 큐비즘 안에도 속한다. 그런 식으로 그의 작품을 해석하고 생각한다면 그의 작품에 관한 사조를 규정짓는 데는 천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 1949년 홍콩 Royden School을 졸업했다. 195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 미학문학부에서 공부하고 1956년 독일로 유학 뮌헨 루드비히막시밀리안대학교를 수료했다. 그 뒤 유럽과 미국을 떠돌며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미술집단,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테이프리코더와 피아노음악 공연(독일 뒤셀도르프, 1959), 피아노포르테 연구 공연(1960), 심플 공연(스웨덴 스톡홀름, 1961), 뮤직일렉트로닉 TV전(1963) 등 많은 공연과 전시회를 가졌다. 1963년 독일 부퍼달 파르니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1969년 미국에서 샬롯데 무어맨(Sharlotte Mooreman)과의 공연을 통해 비디오 아트를 예술 장르로 편입시킨 선구자라는 평을 들었다. 1977년 위성TV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했고,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1996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됐다. 그러나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국내외에서 도시와 영상전(서울시립미술관, 1996), 교과서 미술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독일 비디오조각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97 바젤국제아트페어(스위스 바젤, 1997), 개인전(미국 국립미국미술관, 1997), 98서울판화미술제(예술의전당 미술관, 1998), 한국현대미술전-시간(호암갤러리, 1998) 등 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1996년 10월 독일 『포쿠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 중에 들었고, 1997년 8월에는 독일 경제월간지『캐피탈』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 가운데 8위로 올랐다. 1998년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공로로 '98년도 교토상'을 수상했고,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괴테메달'을 받았다. 2000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는 독일에서 만난 존 케이지라는 스승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작품에 있어서 삶에 있어서 그의 작품에 존 케이지의 사상이 호흡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었다.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 왼쪽부분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도 죽기 15개월 전인 2004년 10월 뉴욕 소호의 스튜디오에서 피아노에 물감을 칠한 뒤 힘껏 밀어버리는 전위예술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 바침’을 했다. 그는 58년 독일에 유학을 가서 음악 공부를 할 때 케이지를 만났다. 그는 케이지에게 훗날 ‘비디오 아트’를 할 때 구성되는 요소 중 하나인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불교 사상에 관한 영향도 함께 받으면서 그의 작품 전체에 케이지는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불교를 단지 소재로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부정하고 도전하는 선의 정신을 차용, 그의 대표적 작품 ‘다다익선’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 잘 드러난다. 그는 60년대 초 전위 예술가 요제프 보이스를 만나 그와 함께 변화, 움직임, 흐름을 뜻하는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한다. 플럭서스 운동은 60년대 초에서 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으로 미국인 마키우나스가 1962년 ‘플럭서스-국제 신 음악 페스티벌’에 처음 초청장 문구로 사용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플럭서스 운동은 ‘삶과 예술의 조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발해 베를린․뒤셀도르프 등 주로 독일 도시와 뉴욕․파리․도쿄 등 유럽과 미국, 아시아 등에 빠르게 전파돼 훗날 전 세계에 동시에 나타났다. 그는 이 운동에 참여해 예술과 삶이 조화된 작품을 연출하겠다는 고민을 시작했고 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개인전을 열 때 그 당시까지 그가 하던 전위예술 뿐 만 아니라 소규모의 비디오 아트를 보여주면서 그는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자리를 굳힌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와 더불어 ‘전위예술’이라 불리는 파괴를 위주로 하는 예술을 계속해 왔다. 20세기 초, ‘다다’라고 하는 반 예술 운동 이래로 파괴적인 성격을 지닌 예술 형태는 계속 돼 왔으나 그의 스승 존 케이지 등이 추구했던 파괴예술은 단순한 파괴 예술과 구분이 명확하게 되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는 일본에서 보고 케이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불교사상과 ‘선(禪)’사상을 동시에 체험한 인물이다. 그는 오랜 기간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선 수련을 하면서 사물의 본질에 관한 불교적 이해를 현대 서양의 미술사조와 접목하려 노력했고, 실제로 백남준은 ‘머리를 위한 선’(Zen for head, 1961)이나 ‘영화를 위한 선’(Zen for film, 1965)등 선을 작품의 직접적인 주제로 사용하기도 했다. 백남준은 이런 선사상을 바탕으로 고전적인 역사를 머금고, 귀족적이며 고도로 정제된 화음의 대표적인 악기로 특권의 상징이었던 피아노를 사정없이 박살냄으로서 관객들 앞에서 그것의 상(相)을 파괴하여 하나의 물체로 전락시켜 버렸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상파의 그림을 보며 자랐지만, 앞으로 우리 후손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보며 자랄 것이다.” 이것은 외국의 한 평론가의 말이다. 현재 비엔날레 등에서도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설치미술과 접목된 비디오 아트다. 이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백남준의 예술사적 위치를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지만 백남준을 평가하는데 아직 맹점은 남아있다. 그는 한국인이지만 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사조를 창조한 인물이다. 그에 관해 한국미술사의 텍스트라 불리는 ‘한국 미술의 이해’를 비롯한 많은 책에는 그의 예술 세계를 한국미술에 넣지 않는다. 오히려 젠슨이나 곰브리치 같은 서양미술사학자들이 그를 서양미술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여긴다. 백남준은 죽었지만 백남준의 작품은 남아있다. 그의 작품은 앞으로도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을 것이며 우리도 끊임없이 그 작품을 접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백남준은 ‘비디오 아티스트’였고 서양에서 장르를 창조한 인물이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한국 민속적인 사상과 불교사상을 접목시켜 만들어 냈다. 백남준이란 인물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이런 단기적은 ‘붐’을 만들어 낼 것이 아니라 한국미술사학자들도 ‘한국 미술은 한국 전통의 기법으로 만든 것은 연구해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실험정신을 갖고 새 장르를 백남준 같은 인물들도 연구해 한국미술사에서의 백남준을 바라볼 시기가 온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