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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가지 물음
다카가와는 앞장을 서서 사도광탄을 신전을 모신 방안으로 안
내했다. 다다미가 깔린 실내에는 옅은 향내가 풍겨나오고 있었
다. 앞서 들어간 다카가와는 방 한쪽 편에 가려져 있는 장막을
걷어올렸다. 거기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신비함과
비범함이 엿보이는 노인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한 모습으로 눈을
치뜨고 있는 초상화였다. 다카가와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이십 니 다.
초상화 밑의 위패에는 호사이라는 이름이 씌어 있었다. 이 사
람이 바로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정치인과 군인, 그리고 학자들
에 게 일본의 신국주의에 대한 믿음을 주입했던 신관이자 법술사
로서 그 신묘한 힘을 가늠하기 힘들다는 신비인 호사이였다.
예를 마친 다카가와는 제단의 서랍을 열고 낡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검은색이었다 봉투에서 하얀 종이를 끄집어내는 다카
가와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긴장하고 있기는 사도광탄도 마찬가지였다. 시공을 꿰뚫고 윤
회를 굽어보던 과거 어느 때에는 세상의 일에 대해서 모두 깨쳤
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화입마를 겪음으로써 폐인이나 다름없
는 상태가 된 적도 있었다. 사도광탄은 흐릿한 생각 한가운데서
도 정신을 집중했다
삼국지에는 왜 그렇게 많은 깃발이 등장하는가?
다카가와의 건조한 음성이 조용한 방안에 울렸다. 스승이 돌
아가신 후 긴 세월을 생각해 오던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스승이
남긴 해답지를 볼 정도도 못 되었다. 이미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지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아니 그 전에 무엇을 묻는 문제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깃발이라는 것이 소속 부대를 알려주고 병사
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 외에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한단 말
인가.
세상의 기는 삼각형에서 비롯되니 네 개의 삼각형이 동서남
북을 각각 가리킨다면 우주의 힘이 모여 없는 힘은 있게 하고 있
는 힘은 더욱 강하게 한다. 따라서 깃발의 의미는 기를 모음이
다 이를 위해서는 깃발의 모양을 삼각으로 만들고 동서남북을
정확히 택하여 세워야 한다 또한 깃발은 부적으로 전쟁터의 뭇
귀신으로부터 병사를 보호하니 귀신의 수만큼이나 많은 깃발이
필요한 까닭이며, 깃발은 병사의 혼을 잡아매는 최면이니 병사
들로 하여금 고향을 잊게 하고 부모를 잊게 하며 눈앞에 죽음이
있더라도 서슴없이 뛰어들게 한다. 따라서 깃발은 많을수록 좋
다. 그러나 깃발의 근본은 삼각형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혹
시 사각으로 할 경우에는 반드시 삼각으로 시작하는 부적의 형
태를 넣어야 한다. 사각 바탕에 단순히 용을 그린다든지 별을 그
리는 것만으로는 깃발을 만들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카가와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사도광탄은 마치
평소에 생각해 두기라도 한듯이 이 이상한문제를거침없이 풀
어냈다. 세상에 누가 깃발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두었을 것인가.
그러나 스승과 사도광탄은 신기하게도 깃발이라는 것에 기묘한
일치를 보고 있었다.
다카가와는 해답지를 꺼냈다. 그리고 분명한 스승의 필치로
씌어진 삼각과 부적이란 두 단어를 보며 탄식했다. 술법에는 한
경지를 이루었다고 말했지만 삼각에 그런 큰 힘이 있는지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부적도 수없이 그렸지만 전쟁의 부적이 삼
각형으로 시작하는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사도광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전쟁의 부적에 삼각이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떠
올랐다.
다카가와는 사도광탄에 대한 외경심이 크게 일어나는 것을 느
끼며 다음 문제지를 펴들었다.
진시황이 찾은 신선과 불로초의 땅은 어디인가?
논자는 선인은 멀리 동쪽에 있다 하였고 삼국사기에는 고
조선의 단군을 선인이라 기록하고 있으니 신선 사상은 원래 고
조선에서 생겨났다 할 것이다. 사기에는 진시황이 산등성에서
서불을 중국의 동쪽 바다로 보내어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을
찾아가 불사약을 찾아오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있는 고조선이 신선의 땅이었다고 할 것이다. 팔지지
에는 불사약을 찾는 서불이 선인을 만나기 위하여 들어간 땅은
단주라고 되어 있으니 이는 단군의 땅이란 얘기이다. 경상남도
남해군 금산에는 중국의 고문자로 새긴 마애석각이 있으니 그
내용은 '서불이 일어나 일출 때 예를올렸다(徐市起,禮日出)'는
내용이며,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정방폭포에도 '서불이 이곳을
지나갔다(徐市過此)'는 마애석각이 있으니 신선과 불로초의 땅
은 한반도와 만주를 포함하는 고조선이라 할 것이다.
다카가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납득이 가지 않는 문제였다.
그러나 스승의 답지에는 분명히 신선과 불로초의 땅은 조선이라
되어 있었다. 조선의 지기를 막고 심맥을 막으려 그리도 애썼던
스승이 왜 조선이 신선의 땅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문제로 삼았
을까 하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카가와는 의문을 누르고 다음의 문제를 꺼냈다.
어째서 백팔번뇌인가?
백팔번뇌.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온갖 번뇌를 일컬어 백팔번
뇌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는 왜 하필이면 번뇌를 108개라 하였
을까. 거기에는 무슨 신묘한 뜻이 있는 것인가. 다카가와는 사도
광탄의 대답이 기다려졌다.
유대인의 카발라에는 72명의 천사가 나오고,자바의 보로부
드그 사원에는 72개의 불탑이 있으며, 중국 소림사의 무예는 72
가지이다. 72는 지구의 지축이 흔들리면서 태양이 황도대의 별
자리 1도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연수이다 72와 36의 결합인 이
수 Im)은 태양이 열두 개 별자리의 중심에 위치하는 데 걸리는
햇수인 2,1脚년의 반인 1,ouo의 10분의 1로우주에 만재하는 모
든 물상이 꽉차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앙코르와트 사원
의 석상은 모두 108개가 있으며, 아그니카야나에는 1만8백 개
의 벽돌이 있고, 장미십자회도 108년의 주기에 따라 행동을 결
정한다. 리그베다 역시 1만8백 개의 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
팔번뇌는 내양과 우주의 돌고 도는 현상을 나타내는 비의인 동
시에 지축 이동으로 다가오는 대재해의 무서움을 경고하는 수비
학적 전승이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방에 울려퍼지는사도광탄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카가와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두려움
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제야비로소사도광탄의 깊이를 알수 있었다 또한그
토록이나 조선의 지맥을 막으려 애썼던 스승이 왜 팔만대장경을
절데 건드리지 못하게 했는지,중앙청의 석주가 드러나면 인물
이 나기 시작한다고 말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스승은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카가와는 새삼 사도광탄의 비범함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
다. 사도광탄은 자신과 같이 술법의 연마를 통하여 경지에 올라
선 것이 아니라 단번에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다 맛추셨소.
다카가와는 옷깃을 가다듬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
렸다. 사도광탄은 다카가와에게서 은연중 풍겨나오던 살기가 완
전히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다카가와는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
는 삼배를 올렸다. 사도광탄은 다카가와를 붙잡아 일으켰다.
호사이 선생은 사물이 흘러가는 흐름을 꿰뚫은 분이었소.
아마 사도 선생님이 오실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다카가와는 말투조차 완전히 바뀌었다
조선의 지맥과 심맥을 막으면서도 대장경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던 것을 보면 호사이 선생은 하늘을 읽고 땅을 볼 줄 알았던
분이라 아니할 수 없소.
스승님께서는 조선의 신비력을 높이 보셨습니다. 특히 팔만
대장경은 동양의 정신을 대표하는 보물이라고 하셨지요. 조선에
어떤 위기가 오더라도 팔만대장경이 있는 한 다 극복할 수 있다
고 하셨습니다. 또한 북악의 기가 드러나면 기인이 찾아올 것도
예상하셨고, 그 기인이 세 가지 문제를 풀면 스승을 대하듯 하라
하셨습니다. 기인이 나오면 그간 조선에 인물이 나오지 못하고
사람들이 화합하여 지내지 못하던 것이 모두 해소되리라 하셨으
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또한 저더러는 10년 간 폐관하라 하
셨으니, 이제 저는 관문을 닫고 10년 간 좌선할 예정입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은 스승님의 유언입니다. 이제 저는 세상에 펼쳤던 기를
다 거둘 것입니다. 폐관하기 전 (묘제의 연구)를 찾아드리고 동
경대학교에 있는 토우도 거두어 팔만대장경이 있는 원래의 자리
에 묻겠습니다.
원래의 자리를 알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스승님께서 무라야마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그런데 단군의 신물을 파괴하
려는 자는 어떻게 할 건가요?~
다카가와는 야마자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사도광탄의 얼굴에 시선을 모으며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저는그문제의 의미조차도알수없었지만 이제
참된 힘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사도광탄은 다카가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패
배를 받아들일 줄 아는 수도인에 대한 예의였다. 다카가와는 대
문 앞까지 나와 사도광탄을 배웅했다.
다카가와는 하늘이 참으로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도광
탄의 얼굴에 보이는 주화입마의 흔적이 연민의 정을 금치 못하
게 하는 것이었다. 선지식을 가진 선지자가 조금만 인도했어도
스승 호사이, 아니 그 이상으로 깨우칠 자질이었다.
다카가와는 사도광탄이 숲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몸을 돌
리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다카가와는 다시 사도광탄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러나 그 순간 사도광탄은 이미 숲속으로 들어가 보이
지 않았다.
퍼뜩뇌리를스치는 예감이 있었다. 그의 얼굴에 보였던 비명
횡사의 뚜렷한 기운.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다카가와는 언뜻 그에
게서 사망수를 읽었다. 그러나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자신은 스
승이 내려준 문제를 낼 것이고 그는 못 풀 테니까 당연히 자기
손에 죽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제를 다 풀어
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죽음의 기색은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짙어져 보였다 다카가와는 자신이 작을 崙다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기에 그럴 수도 있
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야마자키:
이 이름이 떠오르자 다카가와는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사도
광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카가와는 터질 듯한 심장을 가
까스로 억누르고 뛰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사도광탄의 모
습이 보이자 다카가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카가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도광탄이
지나간 숲으로 번개같이 내달리는 자가 있었다 야마자키였다
그의 손에는 에도 시대의 자객들이 즐겨 사용하던 짧은 칼이 들
려 있었다.
안 돼 !
다카가와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왔다
사도 선생 !
사도광탄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야마자키는 이미 사도광
탄의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피할 시간은 물론 놀랄 시간조차 없었다
이얏!
외마디 기합과 함께 시퍼렇게 날이 선 야마자키의 칼이 허공
을 가르는 순간이었다.
안 돼 ! 멈춰 !~
그러나 다카가와의 목소리는 쉿 하는 칼바람에 묻혀버렸다
야마자키의 칼이 허공을 가르며 사도광탄의 목을 향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날아든 것으로 보이는 순간 다카가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카가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사람은 사도광탄이 아니라 다름아
닌 야마자키였던 것이다.
육중한 체구의 야마자키는 마치 통나무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다카가와가 다가갔을 때 야마자키는 이미 죽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얼굴에 급살수가 있더니만~
다카가와는 야마자키의 눈을 감겼다
선생께서 내 목숨을 구해 주셨군요.
사도광탄은 고개를 숙였다 다카가와는 놀랐다.
아니, 제가 아닙니다. 까닭을 모르겠군요.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도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 야마자키의 머리를 살펴본
다카가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주위
를 둘러보았다.
총에 맞았는데요.
경찰이 와서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시각 이미 현장을 떠나와 차 안에서 자신의 행동과 앞으로
의 계획을 곱씹어보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안 돼. 누구도 그를 죽여서는 안 돼. 내가 심문해서 내 판단에
따라 결정하기 전에는 그는 죽어서는 안 돼:
바로 기디온이었다.
28.눈동자
다카가와의 적극적인 증언으로사도광탄에 대한 경찰의 조사
는 곧 마무리되었다. 다카가와는 야마자키의 사무실에서 (묘제
의 연구)를 찾아사도광탄에게 전해주었다. 한참 동안이나 (묘
제의 연구)를 검토하던 사도광탄은 수아와 테드를 불렀다.
받아라.
어, 이것은 (묘제의 연구)아니에요? 아니, 이 중요한 것을
왜 저희에게 주세요?
수아와 테드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난 백 년 간 우리 나라는 자기를 올바로 볼 줄 모르고 남에
게 끌려다니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 결과 오늘날 너희 젊은이
들의 머리와 가슴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
태에서 국력이니 뭐니 하는 것은 온당치가 않아. 하지만 천기는
거스를 수 없는 법. 이제 북악의 기가 드러났으니 팔만대장경을
온전히 정비하고 단군의 성물을 찾으면 21세기에는 잃었던 우리
나라의 기가 온 세계에 뻗치게 된다.
잃었던 우리의 거대한 힘들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인가요?
그렇다.
그렇다면 이 (묘제의 연구)를 학자들에게 주어 우리 역사를
밝히게 해야 하지 않나요?~
사도광탄은 고개를 가로저 었다
아니 , 이것은 너희들의 일이야. 중요한 것은 너희들의 의식이
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캐는 노력은 몇몇 전문가만의 일이 아니
라 바로 너희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게 더 중요해.
사도광탄의 목소리는 숙연했다.
수아는 (묘제의 연구)를 넘겨받았다.
그 책에는 만주에 있는 단군릉의 위치가 역사의 암호로 적혀
있다 고조선의 실제 위치와 수도.그리고 능의 위치가 우선
고대의 지명을 명확히 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어 .
수아는 (묘제의 연구)를 넘겼다. 서문에 이은 마에다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단군릉을 발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능을 처음 발굴
할 때의 그 신비한 느낌. 선인화에서 뿜어져나오던 엄숙함.신물
에 욕심이 생길 때마다 등을 떠미는 듯하던 그 알 수 없는 힘
나는 이번만큼은 결코 도굴범들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숙한 사명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능의 위치를 고대의 지명을 이용
하여 표시함으로써 찾아낼 수 없도록 하였다.
수많은 인물들의 일치된 견해가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능의 위치
가 드러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도굴범을 막는 데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단군의 기록을 말살하여 조선의 역사를 조작하려는 총독
부의 음모를 막는 데에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니 후인들은 수많은 사서를 비교 검토하여 올바른 지명을 찾아
야만 능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마에다의 말대로 다음 장부터는 다섯 가지의 물음이 던
져져 있었다.
1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어디인가?
2. 요동은 어디에 있었나?
3. 폐수는 어느 강이었나?
4. 한번한은 어디였나?
5. 장당경은 어디였나?
이 다섯 가지의 물음 뒤에 다시 다섯 가지의 물음이 이어져 있
었다. 마에다는 스무고개식 방법으로 단군릉의 위치를 밝히고
있었다.
이제야 알겠군요. 야마자키가 왜 고조선 연구의 권위자를 그
렇게 찾았는지.
그래. 하나하나의 물음이 학자들에 따라 이견이 무성해서 쉽
게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지.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것을 전문 학자도 아닌 우리가 어떻게
밝히죠?~
우리 나라의 모든 젊은이들이 힘을 합치면 비밀은 풀릴 것이
다 젊은이들의 의견을 전부 수렴해. 그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단
군을 찾아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올바른 지명도
얻게 될 테고.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이 (묘제의 연구)를 인터넷에 띄워 우리
나라의 모든 젊은이들이 볼 수 있게 하겠어요. 테드 빼고는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이 모두 참가할 거예요.
하하하하.
사도광탄은 이렇게 웃어보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사도광탄은 수아와 테드의 어깨에 양팔을 올려놓았다.
기쁘구나. 너희에게는 우리가 젊은 시절 겪었던 독재도 없고
가난도 없어. 우리 세대가 온몸으로 이겨냈던 그 힘들었던 세월
이 너희를 이렇게 꽃피웠구나.그 유머와 여유 나는 너희를 보
면서 우리 민족의 미래에 희망을 갖는다.
염려 마세요. 방학이 되면 돌아와 해인사에 갈 작정이에요.
최고의 문화 유산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수조차 아무도 확실히 모
른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요. 일본인들이 훔쳐간 후 대나무로 깎
아 넣은 것도 있다면서요. 그 얘기를 듣고는 NBA 농구니 내셔
널 리그니 하는 것만 찾으며 살아왔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인터넷을 통해 자원 봉사자를 구해 그들과 같이 그 무겁다는 경
판을 한 장 한 장 나를 거예요. 팔만대장경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싶어요.
수아가 사도광탄을 위로하듯 부드러우나 야무진 목소리로 말
했다.
기미히토는 이제 작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그동안
함께 지내며 갖게 된 이들에 대한 애정은 생각보다 컸다. 비록
국적은 달랐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들은 친
형제 이상으로 정이 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만남으로써 과
학에 대한 인식의 전환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한국의 문화에 대
해서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큰 것이었다.
자신은 그간 이웃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너무 모르고 지내왔
던 것이다. 이들을 만났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기미히토 교수님을 만난 것은 제 인생의 큰 행운이었어요.
수아의 맑은 목소리가 아쉬움에 머뭇거리는 기미히토의 귀에
전해져 왔다.
미국에서 다시 만나요.
할 적마다 이길걸요, 해킹 말예요.
만만치 않을걸요!
어려우면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을 받지요.
하하하하.
사도 선생님께는 참으로 많은 걸 배웠습니다.
별말씀을.
과학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고,무엇보다도 동양사
는 다시 씌어져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간 정신의 역사가 부당하게 무시되었지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테드도 기미히토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기미히토는 세 사람을 나리다공항까지 배웅했다. 돌아오는 길
에 기미히토는 컴퓨터와 동양적 신비주의의 결합을 필생의 연구
주제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과학과 기술이 현대 세계를 이
끌어가는 중요한 수단이긴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
가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인간의 본질을 형성한다는 생각이 들
었다.
동양의 정신 문화는 서구의 물질 문화가 이르지 못하는 깊은
깨달음의 경지를 이루어왔고, 이 깨달음이 물질에 마비된 인간
의 정신을 일깨워 자유로운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가장 훌륭
한 수단이라는 것을 기미히토는 사도광탄을 통하여 릴이 느꼈던
것이다,
김포공항에는 기미히토의 연락을 받고 서 원장이 마중 나와 있
었다. 서 원장은 사도광탄을 진심으로 반겼다. 그녀가 주차장에
자동차를 가지러 간 사이 수아는 사도광탄에게 작별을 고했다.
저는 이제 아버지를 뵈러 가야겠어요. 선생님은 제 가슴에 우
리 민족의 긍지를 심어주셨어요. 보고 싶을 거예요.
수아는 공항에서 바로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겠다고 했다. 테
드는 섭섭했지만 이제 곧 중국으로 가야 하는 자신의 일정상 수
아와는 미국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선생님 , 미국에서 편지 드릴게요.
그래, 잘 가라.
수아가 두 눈을 붉히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네, 선생님. 그럼 이제 인터넷을 통해 만나요.
그래, 네가 자랑스럽구나.
저야말로 아저씨가 자랑스러워요.
수아는 사도광탄을 선생님이라고도 불렀다가 아저씨라고도
불렀다. 존경과 친근함을 다 같이 느낀다는 의미일 것이다
수아와 테드를 보내고 난 사도광탄 앞에 서 원장의 자동차가
와서 멎었다.
제천으로 가서 머무르고 싶군요.
서 원장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었다.
제천에는 연고가 있나요?~
아뇨, 그래도 정 붙이고 살았지요. 이지영이도 있고
사도광탄은 무슨 말을 덧붙이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
았다
무엇보다도 자연이 있어요.
서 원장은 그런 사도광탄에게 연민을 느꼈다. 자신만의 생각
인지는 몰라도 외로움이 느껴졌던 것이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어때요? 병원으로 가지 말고.
서 원장은 그녀답지 않게 약간 어색해하며 물었다
아뇨, 그냥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서 원장은 자동차를 병원으로 몰았다.
다음날 아침 사도광탄은 병원을 나섰다.
연락도 없이 가면 누가 맞아주지요?
오랫동안 누가 나를 맞아준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서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천에도 사도 선생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나요?
자연이 있지요. 지금은 시퍼렇게 흐르는 강물 위로 솟구칠 물
고기가 있구요. 그 밖에 뭘 더 바라겠습니까?
서울에 오면 꼭 들르셔야 해요.
사도광탄은 말없이 서 원장의 눈을 들여다봤다
사도광탄은 청량리로 가서 기차를 탔다. 평일 아침이라 제천
으로 내려가는 중앙선 열차는 텅텅 비어 있었다. 창가에 앉아 바
깥 풍경을 내다보던 사도광탄은 앞자리에 두 사람이 와서 의자
를 자신과 마주보게 돌리는 것을 보고는 상대방들의 얼굴을 쳐
다봤다.
양복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두 사람의 신사가 사도광탄에게 밝
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사람은 깨끗한 피부의 잘생긴 외국인
이었다. 그는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독일인이었다.
구린 모르겐.
사도괌탄도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도광탄 씨 , 맞죠?
한국인이 물어왔다. 쾌활해 보이는 외국인과는 달리 신중하고
근엄해 보였다. 사도광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만나고 싶어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누가요?
이분은 유럽에서 오셨습니다. 기디온 교수입니다.
그제야 사도광탄은 외국인을 자세히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직자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분은 독일의 종교학 교수입니다. 로마의 교황청으로부터
교리 해석에 대한 위임을 받고 있습니다.
평범한 교수 같지는 않군요.
상대방은 복잡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이 말에 기디온
은 싱긋 웃었다.
저는 이분으로부터 통역을 의뢰받았습니다.
이분은 교황청의 요청에 의해 나를 만나러 온 건가요?
사도광탄의 질문에 기디온은 장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대답했
고 사내가 통역 했다
그는 몇 가지 신과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자유롭게 대화를 나
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통역이 말을 전하는 동안 사도광탄은 사나이가 풍기는 이상한
기운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생각했다
기디온은 보기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도광탄은 고개를 끄덕 였다
신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간이 바로 신이오.
너무나직선적인 사도광탄의 대답에 기디온의 미소가순간적
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너무 교만한 생각 아닙니까?
인간이란 참으로 깊고도 깊어요. 그 안에는 신도 있고 우주도
있어요.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얘긴가요?~
신이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인간을 말하는 것이니, 깊어지면
누구나 다 신이 될 수 있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깊어지지는
못해요.
어떻게 해야 신이 될 수 있지요?
눈을 감고 앉아서 끝없는 사색으로 들어가면 평소에 알지 못
하던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요. 물질과 욕심에 가려 느끼지 못하
던 세상의 또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신선한 정신
을 얻게 되고, 추하고 이기적인 생각이 모두 흩어져 없어지는 대
신 존재에 대한 공허한 마음이 생겨나지요.나뿐만아니라모든
살아 있는 것들, 심지어는 무생물에게조차 마음이 전해져서 그
들과 내가 하나이며 서로 그 존재의 뜻을 존중하게 돼요. 이 단
계에서는 꽃잎과도 대화를 나누고 하늘을 나는 새들이나 흐르는
시냇물과도 교감을 나누게 됩니다. 이 단계는 보통 사람이라 하
더라도 며칠 간의 정좌로 얻을 수 있는 단계이지요.
그런 것이 보통 사람에게도 가능하다구요?
물론이오. 사실 이 단계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오. 사고가
논리적 인과 구조로 짜인 서양인들에 비해 정신의 비약을 저항
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동양인들이 훨씬 쉽게 이르는 단계지
요. 물론 베토벤이나 워즈리스, 에머슨, 소로 같은 서양인들은
그 예술적 재능으로 이 단계를 늘 유지하긴 했지만.
그 단계가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죠?
탐욕스럽게 많이 먹는 것이 싫어지고 피가 배어 있는 음식을
안 먹게 됩니다 신선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은 피하게 되고, 재
미있는 유머라 하더라도 역겨움이 먼저 느껴 지지요. 친한 친구
라 하더라도 피하게 되고 말을 아끼게 되며 힘있는 사람을 피하
고 아이들을 아끼게 됩니다. 인간의 죄악을 생각하며 혼자 흐느
끼거나 희열에 들떠 자연을 배회하기도 하지요.
기디온은 사도광탄의 거침없는 설명에 적이 놀랐다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보통사람의 경우 이 단계는 계속 유지가 되지 않아요.쉽게
다시 원상으로 돌아와요.
왜 그렇죠?
이 단계에 올라서는 것은 정신이 하는 부분인데, 정신은 언제
나 육체의 포로가 되어 있어요. 육체는 자기 존재를 지속시키려
는 강한 경향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본능이라 할 수 있을 겁니
다. 본능은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에 설사 자연과의 교감 단계
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정신이 본능을 뛰어넘어 지속된다는 것은
보통사람의 경우 너무나 어려워요.본능은 우주의 질서요 힘이
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다시 평상의 단계로 떨어지고 말아요.
어떤 사람들이 그 단계를 지속할 수 있나요?
아까 얘기했던 예술가들의 경우는 정신이 워낙 뛰어나고, 타
고난 재능이 마치 수도자의 수도와 같은 역할을 하여 기실 그들
은 오랫동안 수도를 해온 사람과 같아요. 그리하여 보통 때라도
그들의 정신은 예술이라는 신성하고 창조적인 작업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탈속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수도자들과는 어떻게 다르지요?
수도에 정진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떨어졌다가 다시 오르곤
하면서 그 단계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쌓아요. 그러나 보통 사
람이 오직 생각의 힘에 의해서만 급속히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
에는 그 다음이 어려워요.
무엇이 어렵다는 말인가요?
육체의 부담이 어렵다는 뜻이지요. 정신이 아무리 높은 단계
에 이르더라도 육체를 이탈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누구라도 이
단계에 올라설 수는 있지만 쉽게 원점으로 돌아가지요. 도스토
예프스키의 악령이라는 소설에서 키릴로프는 초인적인 정신
력으로 인신(人神)의 경지에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는 그 단
계에서 자신의 저급한 육체가 최고에 다다른 정신을 끌어내린다
는 것을 알고는 자살을 택하지요. 도스토예프스키도 깊은 사색
을 통하여 거의 신의 경지에까지 올라갔겠지요.그러나 깨어나
현실에 봉착하면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한계를 처절히 느끼고는 자신의 체험을 소설로 나타낸 것입니
다 그가 선택한 인신(人神)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그의 체험을 알
수 있어요.
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도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흥미롭군요. 자연과의 교감보다 위에 이르면 어떻게 되지
요?
자연 현상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존재를 느끼게 됩니다. 너
무나 무서운 단계지요.
자연과의 교감을 거치나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선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수
도자의 경우라면 보통 자연과의 교감을 거치지요.그러나 이 단
계가 없이 불쑥 그 거대한 존재에게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어요.
기디온은 사도광탄의 얘기에 빨려들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지만 그 속에서는 깊은 체험에서 우러나는
절실함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기디온은 늘 최후의 심판을 내리기에 앞서 반가톨릭적인 수많
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모두 지나치게 세속적이
거나 자의 적이었다. 인간의 주관적 정신 세계를 이렇게 확실하
고 정연하게 풀어내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 거대한 존재란 무엇을 말하는 거죠?
정신이지요. 우리의 의식 세계 밖에 존재하는 거대한 정신 체
계입니다.
이 부분을 기디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을 떠나 외부의 공간에 존재하는 실체인
가요?
아니오. 인간의 의식과 그 거대한 정신 체계는 맞물려 있어
요.
그렇다면 그 거대한 존재가 객관적 절대자는 아닌가요?
절대자이지요. 하지만 절대자는 나를 떠나 외부에 따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오. 가령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그런 절
대자가 아니란 말이지요.
신이 아니란 말인가요?
신이지요. 다만 나와 연결되어 있는 신, 나도 될 수 있는 신이
란 말입니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구요?~
그렇소. 신의 본 모습은 인간이오.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자신의 신비 체험으로 신을 만
들어낸 것이지요. 인간은 종교에서 말하듯 그렇게 하등한 존재
가 아니오. 그 자신 절대자도 될 수 있고 신도 될 수 있는 불가사
의한 존재이지요. 다만 육체를 떠나지 못하고 본능의 세계에 붙
들려 있을 뿐이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기디온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아까 거대한 존재 앞으로 불숙 나아간다고 했는데 그
거대한 존재는 객관적 실체가 아닙니까?
아니오. 본인의 의식 체계 안에 있는 세계이기도 하고, 객관
적 실체이기도 하지요.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사람들은 시인이 시를 쓸 때 보통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를 쓴
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시에는 시인의 체험이 들어가 있
지요.니체의 시 중에 (눈동자)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나는
느낀다. 나의 등뒤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다늪 것
을 사람들은 이 시를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읽어갈 것입니다. 시
인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쓴 시라고 생각하며 말이오. 그러나 이
시는 니체가 직접 겪은 내용을 담은 것이오. 니체는 어느 날 밤
무슨 생각엔가 잠겨 있다가 바로 등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무
섭게 노려보고 있는 것을 느꼈어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뒤
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지만 바로 등뒤에서 자기를 보고 있었던
그 눈동자를 잊지 못했던 것이지요.
니체가 그런 것을 경험했다고 어떻게 확신하지요?~
기디온이 묻자 사도광탄은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망설입
없이 대답했다.
내가 경험했으니까.
으음~
기디온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결사에 가입하고 처음으
로 회의가 찼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체험에서 우러나
온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사람이 절실하게 설명하는 것을 자신은 이해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자신이 모든 것을 심판하겠
다고 나선 것은 오류가 아닌가 하는 심한 자괴감이 느껴졌다. 잘
못하면 중세의 종교 재판의 오류를 자신이 범할 수도 있다는 두
려움마저 생겨났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디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것을 경험하지요?~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지만 지속이 되는 것은 아까 얘기했듯
이 단계를 거친 수도자이지요.
보통 사람이 이 단계에 올라서면 어떻게 됩니까?~
선지 식이 없이 이 단계로 나가면 보통 혼이 빠지지요. 미쳐버
리는 것입니다.
단계를 거친 수도 자는요?
이 거대한 존재, 즉 절대자 앞으로 나아갔던 수도자는 극도의
외경심과 더불어 지극히 겸손해지지요.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절
대자를 모시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기디온은 사도광탄이 얘기하는 것이 바로 깊은 성직자의 단계
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 단계도 있습니까?~
있어요. 어떤 인간은 이 절대자와 자기가 다르지 않다고 느껴
요. 자신이 절대자가 되어 보겠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은 욕심 때
문이 아니고 깨달음이 이끌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깨달음은 아래에서 위로 자연스럽게 진
행되어 나가기 때문이지요.사실 이 단계에서는 멈추는 것이 더
낫겠지만
사도광탄은 도중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기디온은 사도광탄
의 얼굴에 희미하게 나타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어째서 멈추는 게 낫다는 얘기지요?~
도저히 그 단계에 이를 수가 없어요.
아무도 헤어나을 수 없나요?
그 길고 긴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도 이 단계를 넘어서는 인간
은 손으로 헤아릴 정도이지요.
그 단계를 넘어서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 궁금하군요. 절대자
의 세계가 말입니다.
기디온의 물음은 이미 가톨릭의 계율을 어기는 것이었다. 종
교의 세계에는 단 한 사람의 절대자만 있는 것이 아니던가.
아까 얘기했던 육체가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아요.
그 단계에 오른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석가모니를 예로 들 수 있겠군요 그는 깨닫기 직전 수없는
나찰들의 유혹을 받았어요. 그러나 강한 정신력으로 결국은 이
겨내고야 말았지요. 예수도 광야에서 40일 간을 방황하며 마귀
와 싸워 미치기 직전까지 갔었지요. 그러나 그 역시 강인한 정신
력으로 이겨냈어요. 석가모니와 예수는 사람들 가운데로 뛰어들
었기에 알려졌지만 이 단계에 다다른 대부분의 절대자들은 세상
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버렸지요.
아니, 그렇게 크게 깨달은 사람들이 알려지지도 않은 채 없어
진단 말입니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크게 보지요.탐욕과 술
수가 난무하는 인간 세계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자연의 범주
속에서 늘 일어나는 일로 보일 뿐이지요. 따라서 크게 깨우쳐줄
그 무엇도 없다고 생각하지요.
깨닫고 나면 초능력이 생기지 않습니까? 병자도 고치고 죽었
다가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
지만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것들의 위에 있어
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석가모니는 깨우침을 얻은 후 각지를 돌며 설법을 했어요. 그
의 설법을 들은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이적이 일어났지요. 하지
만 석가모니 자신은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리스도는 수많은 이적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행하
지 않았습니까?
그 단계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단정적으로 얘기하는 사도광탄의 자연스런 표정을 보고 기디
온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해석한 가톨릭이란 무엇이었던가. 그 세계에 들어가 믿고 복종
하고 그 대가로 영생을 누린다 했던가.
기디온의 가슴속에는 앞에 앉은 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일
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깨달은 분이
아니 란 뜻이오?
그렇소.
과거에는 이런 답변을 순간 상대방은 이미 살아 있는 사
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너무나 확고한 사도광탄
읜 체험적 설명은 이제까지 들어왔던 단편적 지식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자신이 못 미치는 단계에 있는 이 사람이 가톨릭에 도전
한다는 이유로 살해해야 한다니
기디온은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암살자가
상대의 사정에 귀기울이기 시작하면 때가 왔다는 신호다. 제거
해야할상대의 이야기로부터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면 더 이
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도 선생은 전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해 주는군요.
기디온의 진심 어린 말에 사도광탄은 미소를 띠며 화답했다.
얼굴에 원귀가 가득하니 사고를 조심하고 그들을 달래며 여
생을 보내는 것이 좋겠소.
그들이라니요?
기디온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글쎄, 본인이 모르면 누가 알겠소?
그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작게 깨달은 자는 작게 보고 크게 깨달은 자는 크게 보지요.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것은 작게 깨달은 자도 할 수 있는 일입
니다. 내가 교황청에 파티마의 제3의 예언을 공개하라고 한 것
은 더 큰 오류를 막자는 뜻이지 가톨릭에 흠을 내려는 것이 아
니오.
기디온은 깜짝 놀랐다 사도광탄에게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불
가사의한 힘이 느껴졌다
기디온은 자신이 신봉해 온 가톨릭도 세상의 많은 종교 가운
데 하나라는 사실을 수긍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 역시 크게 깨
달았던 세상 사람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도광탄의 얘기도 함께.
교황이 말하는 종교의 평등이란 이런 것이었던가 이런 평화
를 타종교와 같이 누릴 수 있었단 말인가.
기디온은 사도광탄의 말 속에서 교황의 얘기와 동일한 메시
지를 느꼈다 내가 믿는 예수만큼이나 남이 믿는 석가도 존중해
야 하지 않을까 내가 가진 종교만큼이나 남이 가진 종교도 인
정해야 하지 않을까. 교황은 바로 그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음 순간 기디온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럴 수
는 없었다.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 된다.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
다. 그는 자신을 다잡았다. 지극히 위험한 이 인물, 가톨릭을 흔
들어놓을지 도 모를 이 인물을 반드시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
야 한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이 사나이의 운명이라고 기디온은
생각했다
기차가 다음 역에 닿자 기디온은 손을 내밀었다. 사도광탄은 그
와 악수를 나누었다. 출입구를 향해가는 그의 걸음이 불안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도광탄의 눈길도 흔들리고 있었다.
첫댓글 여명님. 잘 일고 갑니다.건강 하세요~
여명님 대단하셔 어떠게 이렇게 긴 작문을 쓰셨나요.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