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閑中錄(朝鮮,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은 서울 종로구 효자로 12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한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남긴 일종의 회고록인 통칭 한중록閑(恨)中錄의 20여종의 이본 중 하나이다. 한글 필사본으로, ‘고종실록高宗實錄’에는 한중록閑中錄이 읍혈록泣血錄과 한중만록閑中漫錄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이와 동일한 명칭의 필사본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묘사함으로써 조선시대 궁중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책으로 그 시대의 치열했던 당쟁의 현장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를 더한다.
한중록閑中錄은 크게 두 차례의 집필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첫 번째 시기는 아들 정조가 조선 최대의 원행인 을묘원행을 통해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 전배를 마치고 화성행궁華城行宮에서 회갑연까지 벌여주었던 1795년(정조 19년)경이었다. ‘내가 언제 이렇듯 인생을 한가하게 즐길 때가 있었던가.’ 당시 혜경궁 홍씨는 이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환갑을 맞이하면서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붓을 들었다. 그러기에 이 책의 최초의 제목은 ‘한가한 가운데 썼다.’라는 뜻의 ‘한중록閒中錄’이었다. 여기에서 혜경궁 홍씨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비정상적인 성격을 보이던 영조와 그로 인해 정신질환에 걸린 사도세자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로 인해 야기된 모든 갈등은 바로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만이 풀어낼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 아내로서 남편을 적극적으로 구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아울러 사위의 죽음을 방관한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비호함으로써 최근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심약한 궁중 여인이 아니라 냉혹하고 권력지향적인 정치인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두 번째 집필은 정조가 죽은 지 1년 후인 1801년(순조 1년), 정순왕후에 의해 그녀의 동기인 홍낙임이 죽고 많은 친척들이 유배형에 처해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무렵 기대했던 가문의 신원은 고사하고 오히려 핍박이 가중되자 혜경궁은 피를 토하는 듯 한 비통한 심정이 되어 붓을 들어서 제목이 읍혈록泣血錄이다. 그러므로 한중록恨中錄은 1795년의 한중록閒中錄과 1801년의 읍혈록泣血錄이 합쳐진 책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이 책을 순조의 생모인 가순궁 박씨에게 맡겼다. 훗날 순조가 친히 정사를 관장하게 되면 정순왕후 김씨 일파를 몰아내고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 한시惠慶宮 洪氏 漢詩(朝鮮, 홍기원 소장)는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희수喜壽인 77세에 지은 친필親筆 칠언칠구七言七句 한시漢詩로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시詩의 처음과 끝에 ‘희수喜壽’ 낙관落款과 ‘혜경궁惠慶宮’이라고 명시된 궁호宮號 낙관落款이 각각 찍혀 있다.
‘사악한 이야기는 어찌 군자의 귀에 머물겠는가/ 한가한 시름은 달인의 눈썹에 미치기 어려워라/ 고인(사도세자)은 지금 누구와 한 통 술을 마시는가/ 지난 일은 이미 외로운 베개 밑의 꿈이 되었네’
시詩에 나타난 혜경궁의 마음은 남편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과 살아남은 이의 허망함이었다. 28세에 청상과부가 되어 50년을 구중궁궐에 혼자 살아온 여인의 그 처절한 삶을 견디게 한 것은 오직 아들 정조를 지키는 일이었다.
- 봉수당 진찬도(奉壽堂 進饌圖,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6호), 화성행행도 華城行幸圖 -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는 1795년 을묘년, 혜빈 홍씨는 봄빛이 화창한 윤2월 9일 아침, 창덕궁 돈화문을 나와 남편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화성으로 향했다. 정조는 새로 축조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 참배와 함께 그해 61세가 된 어머니 혜빈惠嬪 홍씨洪氏의 회갑연回甲宴을 준비했다. 그것은 등극과 동시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일성을 내뱉었던 그가 영조 이래 강력한 신권을 휘두르며 자신의 입지를 뒤흔들던 노론 세력을 억누르고 진정한 군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는 매우 특별한 이벤트였다. 이윽고 화성의 현륭원에 당도한 그녀는 28세의 나이로 비명에 죽은 남편 사도세자의 묘소를 어루만지며 오랜 세월 삼켜왔던 눈물을 마음껏 쏟아냈다.
정조正祖는 이런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화성행궁에서 회갑연을 열어주고 혜빈惠嬪이었던 그녀의 궁호宮號를 혜경궁惠慶宮으로 올려주었다. 아울러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바쳤다. 홍씨가 젊은 날 비정한 정치놀음의 희생양으로 남편을 잃은 뒤 수많은 정적들의 위협 속에서 아들 정조를 지켜내기 위해 살아온 30여 년 간의 고행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혜경궁 홍씨 황후 추봉 옥보惠慶宮 洪氏 皇后 追封 玉寶(大韓帝國, 1899, 광무 3)는 혜경궁 홍씨를 의황후懿皇后로 추봉追封하면서 만든 어보御寶이다. 고종이 직계 5위의 왕과 왕비를 황후로 추봉할 때 혜경궁 홍씨도 황후로 추봉 되었다. (자료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이상각 작가/ 글과 사진: 문화재청. 이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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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