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6월3일 월요일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사도행전 19,1-8
복음 요한복음 16,29-33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세상을 이기는 법
2019년 다해 6월3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세상을 이기는 법>
복음: 요한 16,29-33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거리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이 70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살을 한 것이었습니다. 앰뷸런스가 와서 할머니는 곧 병원으로 실려
갔고 뒤이어 달려온 경찰들이 사람들을 해산시키고는 자살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할머니의 아파트로 올라갔습니다.
실내는 온갖 고급 도구와 사치스런 장식품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왠지
썰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이 정도 살림으로 보았을 때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닌 것 같고, 혹시 건강상의 이유나 불치병 때문일지도 몰라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할머니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건강했다고 말했습니다. 골똘히 고민하던 경찰관은 책상을
뒤져 보았습니다. 할머니의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수첩을 펼쳐보는 경찰관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 하고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의 수첩엔 365일 동안 똑같은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오지 않았음.”
왜 할머니는 자신이 누군가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매일 다른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만 있었을까요? 고독했기 때문입니다.
고독하면 누군가를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다시 고독해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고독한데 고독하고 싶지 않아 만남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식당에서 활개를 치고 다닌다면 분명 어딘가에 부모가
앉아있을 것입니다. 혼자 있다면 두려워 활개를 칠 수 없는 것입니다.
혼자라는 고독감이 더더욱 자신을 방에 가둡니다. 누군가를 만나러
나갈 수 있으려면 혼자되는 두려움을 극복해야합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혼자되는 것이 두려우면 세상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세상은 인간이 외로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아서 돈이나 명예, 친구들이 필요하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렇게
외로움은 세상의 지배하에 살게 만듭니다. 그러나 수많은 친구가
있어도, 인기가 많아도 여전히 고독한 사람은 고독합니다. 이는 돈을
주고 애정을 사서 외롭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국의 문인 부르크가 미국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부두에는
전송객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전송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운함을 느낀 부르크는 부두에서
놀고 있는 한 어린아이에게 “얘야! 내가 네게 6실링을 줄 테니 내가 저
배를 타고 떠날 때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6실링을 받은 아이는 정말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르크는 “돈 받고 흔드는 손을 보고 나는 더욱 고독을 느끼게
되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를 군중속의 고독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많은데 늘 외로운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롭기 때문에 군중 속에서도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외롭지 않은 사람입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아야 세상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어야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체 홉은 “고독이 두렵다면 결혼하지 마라.”라고 했습니다. 결혼 배우자를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는 도구가 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면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고독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키에르 케고르는 “내가 고독할 때 나는 가장 고독하지 않다.”고
말했고, 도오로우는 “나는 일찍이 고독만큼 사이가 좋은 벗을 본 적이
없다.”라고 했으며, 펄 벅은 “내 안에는 나 혼자 살고 있는 고독의
장소가 있다. 그 곳은 말라붙은 마음을 소생시키는 단 하나의
장소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이 당신을 버리고 떠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을 안심시킵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 괜찮다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으면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계시니 걱정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듯 세상 애정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고독 가운데 더 나와 친밀하게
함께 하심을 믿어야합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봐야 합니다.
그래서 외로울 수 없어야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세상을
이기는 법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3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세상을 이기는 삶
복음: 요한 16,29-33: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29절)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것 같이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지난 토요일 복음에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줄
때가 온다.”(16,25)고 하셨는데 그때는 아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비유로 말씀하시지만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들이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였고 그분을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30ㄱ절)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묻기도 하고 질문도 받는다. 묻기도 하고 질문도 받는 것은 학생들이
더 많이 알게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묻는
것이지 자기가 알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그분께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분은 제자들이 묻기도 전에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의 생각을 아시는 것은 주님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30ㄴ절)고 한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31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심으로써
제자들이 나약한 어린애라고 하시는 것이다. 앞에서 그들은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으며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제자들이 스승님께서 잡혀가시자 행동으로 그분을
버렸으며, 믿음마저도 버렸다.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고 지금 믿는
것조차 버렸다. 제자들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 자기들의 믿음이 죽게
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그분을 떠나게 되어 그분을 일이보지 못하고
만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32절)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33절) 제자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으로
끌려가 온갖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그분의 이름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은 언제나 지배자들의 격노를 불러 일으켰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사악한 범죄자를 대하듯 그들에게 온갖 형벌과
고문을 가한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순교자들은 언제나 평화를
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신 뒤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는
제자들이 그분 안에 머물며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때에 그들은 환난을
받으면서도 그분을 버리지 않았다. 이 고을 저 고을로 피해 다녔지만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 박해를 당하지만 그분에게서 달아나는
도망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피난처로 삼고 그분 안에서 평화를
누렸다. 성령을 받았을 때,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며 더욱 용기를 내었기
때문이다. 이 평화를 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이 평화는 끝이 없을 것이고 모든 선행과 선의는 이 평화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신
덕분에 우리는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용기백배한다. 그리고 그분은
참으로 세상을 이기셨다. 그래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 우리가 말씀을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고 그분을
팔아넘기는 것은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덕을 위해 이겨낸 모든
환난의 결과는 기쁨이며, 모든 수고의 결과는 안식이며, 모든 치욕의
결과는 영광이다. 즉 덕을 위한 모든 고난의 결과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영원히 그분과 함께 머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세상을 이기며 참된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2019년 다해 6월3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1784년에 시작된 한국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은 한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1886년에 맺은 조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시작되고 100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외견상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때부터 한국 정부는 신앙을 가진 사람을 박해하지 않았고, 잡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의 자유는 100년간의 박해와
시련을 이겨낸 순교자들의 피와 땀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제가
없는 시기가 50년이나 되었지만, 사제를 기다리며 사제를 영입하려고
노력했던 신자들의 기도와 갈망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고향에 사시는 친척 형님이 전화하셨습니다.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를
보러 온다고 합니다. 형님들은 시간이 되면 가족이 함께 봉고차를 타고
전국 성지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강화도에 있는 성지를
방문하면서 어머니께 들린다고 합니다. 구교라고 하면서, 몇 대째
천주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명예, 권력, 재물로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아픈 가족을 찾아보고, 성지를 순례하는 형님들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본당에서 단체로 성지순례 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함께
가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산업화, 도시화, 핵가족화를 거치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가정 교회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꽃 한 송이도 쉽게 피는
것은 아닙니다. 줄기는 추운 겨울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가지는 비와
눈을 맞았습니다. 뿌리는 어두운 땅속에서 양분을 찾았습니다. 신앙이
식어가는 신자들에게 율법과 계명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과 갈망을 전해주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 고난은 무엇일까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어떻게 져야 할까요? 어깨에 메고
가는 사람,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 끌고 가는 사람, 바퀴를 달고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진정한 의미는 품에 안고
가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하는 것은 아이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를 품고 젖을 먹입니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짐으로 생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면
부활의 기쁨을 얻기 어렵습니다. 십자가를 남에게 떠넘기려는 사람도
부활의 기쁨을 얻기 어렵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소중하게 지고 가야 합니다. 베로니카 성녀처럼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 드려야 합니다. 그런 소중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런 십자가는 우리를 부활의 기쁨으로 인도하는 다리가
될 것입니다.
예전에 듣고서 큰 위로를 받았던 성가가 있습니다. 제목은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네.’입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마음이 외로워 홀로 남았을 때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마음을 그대 홀로 있지 못함을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새로운 한 주간입니다. 이 세상에 오직 나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누군가 날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에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다.
(요한 16, 32)|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3일. 월.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다.(요한 16, 32)
다시 힘을 내어 십자가를 지게하십니다.
항상 처음처럼 아버지 하느님을 신뢰하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를 평화로 이끄십니다.
하느님 현존의 핵심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거짓된 자아의 껍질을 십자가로 부수어 냅니다.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 안에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제 갈 곳으로 갔던 우리들이 평화 안에 다시 모이게 됩니다.
평화를 제외하고는 십자가의 고난을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평화로 사랑하는 법을 다시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평화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끝내
사랑을 완성하신다는 참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이 있기에 용기를 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 33)
주님께서 십자가로 세상을 이겼기에 평화롭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사라지지 않을 평화를 주십니다.
뒤따라 가야 할 평화의 여정입니다.
평화는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매일의 고통과 시련, 불완전과 부족함 앞에서도 절망하지
말아야겠습니다!
2019년 다해 6월3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매일의 고통과 시련, 불완전과 부족함 앞에서도 절망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제자들과 작별하실 날이 다가오자, 예수님 말씀의 어조는 더욱
비장해지고, 아주 분명해집니다. 당신께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 유언의 말씀은 자주 반복되는 동시에 점차
명확해집니다. 중요한 시험이 목전에 다가오면,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그간의 가르침에 대한 핵심 요점 정리를 해주는 것과 유사한
분위기입니다.
예수님 고별사의 요점 정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선물로
보내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와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 한 마음, 한뜻, 그분 자체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된 그분은 조만간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십니다.
제자들은 스승님께서 체포되고 수난당하시는 동안 그분을 버리고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성부께서
언제나 그분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성부께로 떠나신
다음 제자들은 세상에서 갖은 고통과 환난을 겪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세상의 평화와는 차별화된 참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고별사를 마무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감동적인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복음 16장 33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재 기간 동안, 사악하고 불의한 세상의 세력이
판을 칠 것임을 예견하시면서, 잘 견뎌내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이 세상 오셨지만 세상은 빛보다는 어둠을
선호합니다. 따라서 세상은 빛이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세상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고통의 시간은 어떤 면에서 예쁜 아기의
출산을 기다리는 진통의 시간과도 같습니다. 극심한 고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간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정도의 기쁨 충만한 순간, 위로와 축복의 시간이
도래합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지 않으신 불완전한
시대, 미완성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매일의 고통과 시련, 불완전과 부족함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이 극단적 미성숙으로 인한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존재, 사건 속에서도 부단히 희망하면서, 인내롭게
기다려야겠습니다.
“경건한 이들은 구원의 지평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어두침침한 고난의
길을 거쳐야만 합니다. 새 날이 오기 전에 옛날은 뿌리채 흔들릴 것이다.
마지막 눈앞에 펼쳐지기 전에 가장 두려운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때는 마지막으로 악마가 판을 치는 시간입니다. 어쩌면 그 순간은
수난과 죽음을 끝까지 잘 견뎌내고 극복하신 메시아의 시간과도
같습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용기를 내어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6월3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요한16,29-33)
용기를 내어라.
사람의 약점 중에 하나가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
입니다. 안 그런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을 보면 인간은 분명
의지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위 줄서기를 잘못하면 낭패를
봅니다. 굶주릴 때는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인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자마자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흔들릴 것을 아셨기에 당신이 유다인들에게 체포될 때 제자들이
도망갈 것이라고 미리 예고하신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여 감동을 하더라도 손발에 머물러 증거하거 하기 까지는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믿음은 아직도 더 무르익어야만 합니다.
이제 곧 모두가 다 각자의 유익한 곳으로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혼자가 아니십니다. 아버지께서 항상 그분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살며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요한 복음 10장38절에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듯,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 길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하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며 시련에 굴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정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세상을 이긴 예수님을 바라보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용기를 내어라’고 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용기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하느님도 계십니다”(성 도미니꼬). 춥다고 버리지도
말고 배부르다고 떠나지도 마십시오! 흔들림 없는 믿음과 소신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굳건한 믿음은 시련 속에서 빛납니다. “조금만
더 참고 이겨내면 하느님의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얻기 전에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찾아나서는 일부터 해야 할
때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소망의 성도
오늘은 ‘소망의 성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로마서 15장 13절 말씀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소망에 하나님, 소망이 넘치게 라는 표현을 하며
소망에 대하여 두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소망이란 무한 영혼을 말합니다. 무한 기쁨을 말합니다. 무한 든든함을
말합니다. 살아갈 소망이 없는 사람이 무슨 재미로 삽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 순간 소망도
되십니다. 그 이유는 이 외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온전히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부모님도 우리에게 힘이 되시다가도 본인의 마음이 아프면
그만 중단하게 되고 도리어 어려워지고 맙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오히려 부모님이 힘이 되기보다 오히려 내가 힘이
되어져야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을 나의 소망으로 내 삶의 전부로
여기고 모든 일들에 있어서 하나님을 우선하는 성도가 될 때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성도가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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