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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9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여자 프로바둑 최정 9단 ‘700승’…여자 바둑 ‘최초’
2023년 안철수 국민의힘 국회의원 1500억원 기부
2023년 최가온 X게임 여자 슈퍼파이브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
한국 스노보드 최가온(15) 미국 익스트림 스포츠 이벤트 X게임 슈퍼파이브에서 역대 최연소로 우승했다. 최가온은 미국 콜로라도주 애스턴의 버터밀크 스키 리조트에서 펼쳐진 제 27회 X게임 여자 슈퍼파이브 부문에서 출전 선수 8명 중 1위에 올랐다.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이 대회에 초청 받은 최가온은 첫 출전에 금메달까지 목에 걸었다
특히 2008년 11월3일생인 최가온(약 만 14세3개월)은 현재 여자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최강자인 클로이 김(미국)이 보유했던 이 종목 최연소 우승 기록도 경신했다.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이 김은 2015년 1월 열린 X게임에서 당시 만 14세9개월로 여자 슈퍼파이프 우승을 차지했다.
2023년 바둑 프로9단 신진서 35연승 한국신기록
신진서(23) 9단이 2주 만에 2승을 추가하며 바둑리그 35연승 행진을 질주했다.
신진서 9단은 28일 바둑TV스튜디오에서 벌어진 2022-2023 KB국민은행 바둑리그 인터리그 2라운드 3경기에서 홍무진 6단과 신민준 9단을 연파했다. 지난 경기에 이어 연속 에이스 결정전에 등판한 신진서 9단은 신민준 9단을 맞아 39분, 136수 만에 백 불계승을 거뒀다. 정규 오더(4국)에서 홍무진 6단과 2시간 22분 동안 미세한 승부 끝에 272수 만에 흑 반집승을 거둔 신진서 9단은 1-2로 뒤지고 있던 팀을 패배의 수렁에서 건져냈고, 곧장 이어진 에이스 결정전에서 승리하며 하루에만 2승 사냥에 성공했다.
지난 14일 김지석 9단을 꺾고 바둑리그 33연승을 거두면서 국내 단일기전 최다연승 신기록을 작성했던 신진서 9단은 2주 만에 2승을 추가하며 신기록 행진을 35연승으로 늘렸다.
2022년 美동부해안 10개주 허리케인급 눈보라 강타하여 비상사태 선포
버지니아주부터 메인주까지 미 동부 해안지역 10개 주에 를 눈보라가 강타했다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뉴저지, 뉴욕, 로드 아일랜드 등 각 주에서 비상사태 선포가 외었다. 매사추세츠주에서는 수만 가구가 정전 상태다. 뉴욕과 보스턴,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항공편 4천500편이 대거 취소됐다 주말까지 6천 편이 결항된 상태.
고속열차 운행을 전면 취소했고 보스턴에는 눈이 60㎝ 이상 쌓일 수 있다는 예보가 나왔다. 고립된 지역에서는 눈이 1m 이상 쌓일 수도 있다고 기상당국은 예측했다.
매사추세츠주에 속한 섬 낸터킷에서는 강풍이 시속 70마일(113㎞)로 몰아쳤고 매사추세츠주 동부 지역과 로드아일랜드주에선 시속 60마일(96㎞)의 돌풍이 불었다.
당국은 주민들에게 이동을 자제하고 집에 머물라는 지침을 내렸다. 가게들은 문을 닫거나 평소보다 늦게 영업을 시작했다.
2022년 이탈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세르조 마타렐라(80) 현 대통령이 재선.
2020년 중국 코로나19 확진자 1만명과 사망자 200명 발생 공개
2018년 현직여성검사 서지현 통영지검장 검찰내부 통신망에 자신이 겪은 성폭행 폭로
2018년 제60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참가자들 성폭력피해고발 캠페인(#MeToo) 부르노 마스 7관왕
2010년 가수 이남이, 폐암으로 별세
동대문상고를 졸업한 이씨는 미8군 무대에서 공연하다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의 기타 연주자로 데뷔했고(1974), '사랑과 평화'에서 베이시스트(Bassist)로 활동하다 솔로곡 '울고 싶어라'(1988)를 발표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씨는 1991년까지 총 3장의 앨범을 발표한 뒤 춘천으로 내려갔고, 이후 2001~2003년까지 춘천 지역 음악인들과 '철가방 프로젝트' 밴드를 결성해 '오선지 위의 행복' 등을 발표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이씨의 딸 단비씨는 이 밴드의 보컬을 맡기도 했다.
이씨는 최근까지 춘천교도소 재소자들을 위한 음악 공연, 소설가 김유정 탄생 100주년 춘천시 행사 공연 등을 하며 주로 지역 문화 활동을 벌여왔다.
2009년 애국지사 이차영 선생 별세
2009년 1월 29일 오후 3시 애국지사 이차영(86) 선생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중국 푸양(阜陽)에서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해 베이징 지구로 파견돼 징집 공작활동을 벌이는 등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다.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08년 소행성 2007 TU24가 지구와 약 55만km 정도로 근접하다
2006년 비디오 아트의 거장 백남준 세상 떠남
2002년 군산 유흥주점 화재로 여종업원 12명 사망
2002년 1월 29일 낮 11시50분쯤 군산시 개복동 유흥가에 불이 나 여종업원 등 12명이 숨지고 3명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날의 화재는 유흥주점 `아방궁`에서 불이 나, 인접한 주점 ‘대가’ 등 건물 2채를 태우고 40분 만에 진화됐다. 사상자 15명 중 14명은 불이 번진 ‘대가’의 1층과 2층 사이 철제 계단에서 뒤엉킨 채 발견됐다.
이번 참사는 2000년 9월 5명의 여종업원이 숨진 군산시 대명동 윤락가 화재 사고처럼 쇠창살은 없었지만 계단이 비좁고 탈출구도 미비해 사상자가 늘어난 점에서 대명동 참사의 ‘재판(再版)’으로, 대형사고 뒤에도 여전한 ‘안전 불감증’과 허술한 소방점검이 큰 원인이었다. 화재사건을 수사중인 군산경찰서는 2월 5일 불이 난 술집 ‘대가’의 업주인 이성일씨가 여종업원들을 감금하고 매매춘 행위를 강요했던 사실을 밝혀내고, 감금치사상과 윤락행위방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이씨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2001년 박지은, 미국 LPGA 오피스데포골프대회에서 우승
박지은은 미국LPGA투어 시즌 세 번째 대회인 오피스데포대회(총상금 12만5000달러)에서 최강 캐리 웹(호주)의 추격을 따돌리고 정상에 올랐다.
2001년1월29일 오전(한국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도럴리조트 블루코스(파72·6388야드)에서 끝난 최종 4라운드에서 박지은은 1언더파(버디 2, 보기 1)를 쳐 최종합계 6언더파 280타를 기록, 웹을 1타차로 따돌리며 우승상금 12만3750달러를 차지했다. 2000년 6월 캐시아일랜드 그린스닷컴클래식 우승 이후 238일 만의 정상탈환이다.
전날까지 공동선두인 미셸 레드먼, 2위 웹과 조를 이룬 박지은의 초반 샷은 불안했다. 티샷은 러프에 떨어졌고, 아이언샷도 그린을 놓치기 일쑤였다. 페어웨이 안착률이 50%, 그린 적중률은 38.9%에 그쳤다. 하지만 PGA선수들도 절절매는 ‘블루 몬스터’ 코스에서 박지은은 깔끔한 뒷마무리로 파행진을 이어갔다.
공동선두였던 레드먼이 2번홀에서 보기를 하며 박지은이 단독선두. 5번홀(파4)에서 그린 오른쪽 벙커에서 멋진 벙커샷으로 컵 80㎝에 붙여 파를 잡아냈지만, 이틈에 웹이 버디를 잡아 박지은과 어깨를 맞댔다.
6번홀도 위험했다. 티샷이 왼쪽 페어웨이 벙커로 가더니 세컨드샷마저 벙커에 빠져 겨우 세 번 만에 그린에 올랐다. 하지만 박은 4m 파퍼팅을 떨궈 공동선두를 지켰다.
박지은은 티샷이 훅이난 8번홀(파5)서 세번째 샷을 컵 1m에 붙여 버디를 잡아내며 다시 단독선두로 나섰다. 10번홀(파5)에서는 버디를 추가하며 2타차로 달아났지만 웹이 다시 14번홀(파4)에서 버디를 잡아 1타차로 따라붙었다.
박지은은 16번홀(파4)에서 2번연속 벙커에 빠지는 난조 속에서 파를 잡아내며 웹의 추격에 찬물을 끼얹었다.
박지은의 뚝심은 마지막 18번홀(파4·385야드)에서 빛이 났다. 웹이 먼저 왼쪽의 워터해저드를 피해 안전하게 페어웨이 오른쪽에 공을 떨궜다. ‘수비’에 치중해야 할 입장인 박지은은 워터해저드 오른쪽 끝을 가로질러 드로 샷을 날렸다. 갤러리의 탄성이 터졌다. 페어웨이를 걸어가던 박지은은 카메라가 다가오자 장난스레 얼굴을 손으로 가리는 여유까지 보였다.
박지은과 웹의 세컨드샷은 모두 그린 중앙에 떨어졌다. 하지만 웹의 마지막 희망을 담은 7m 버디퍼팅은 컵 왼쪽으로 흘렀다. 과감한 버디 퍼팅을 놓친 박지은은 60㎝짜리 챔피언 퍼팅을 컵에 떨구며 힘겨운 ‘외줄타기’ 우승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1998년 15개국 국제우주정거장 건설 조인
1998년 필리핀 대법원, 이멜다 마르코스에게 징역 9~12년형을 선고
1996년 일본 강제연행 조선인 징용자 1945년 3월말 현재 60만4천명으로 밝힘
1992년 한국-우즈베키스탄, 국교 수립
1990년 제8차 남북체육회담 개최
1980년 이희성 계엄사령관, 김계원을 무기징역으로 감형, 김재규 등 6명에 형량 확인
1980년 KOC, 소련 올림픽 초청장 IOC를 통해 접수
1974년 대구시내 고교입시부정 적발
1974년 임충식 육군 대장 사망
6·25전쟁 때 큰 전공을 세우며 활약한 임충식 육군 대장이 1974년 1월 29일 사망했다. 192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임 장군은 1946년 6월 육사 제1기로 임관했으며, 6·25 전쟁 당시 수도사단 18연대장을 맡아 의정부 전투, 김포·오류동 전투 등에 참전했다.
1950년 8월 기계·안강 전투에선 적의 주력을 포위, 섬멸하고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반격작전 때는 신고산·원산 탈환, 함흥·청진 진격 작전을 지휘하는 등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태극·을지·충무·화랑 무공훈장과 미 은성훈장 등을 받았다. 전쟁기념관은 임 장군을 2001년 4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1974년 구미 윤성방직, 화재로 전소(피해액 150억원)
1967년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 나병의 날 기념식
1964년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 내한
1964년 제9회 동계올림픽 개막(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1964년 미국 초대형 인공위성 새턴 1호 발사 성공
1963년 영국, 유럽공동체 가입 좌절
1963년 콜롬보회의 한국가입 가결
1963년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사망
1962년 오스트리아 바이올리니스트 크라이슬러 사망
1961년 루안다 독립 선언
1960년 조병옥 민주당대통령후보 신병치료차 도미
1959년 일본정부 재일동포 북송 발표
1958년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주한미군 핵무기 배치 공식 발표
1955년 언론인 김동진, 양재희 권총 피격사건
5·16군사정부가 이른바 정치깡패의 일소에 나서자 이정재, 임화수 등의 정치깡패가 사형으로 다스려지기도 했다. 1955년 1월 29일 오후 7시40분경 종로3가에 있는 단성사 앞에서 영화구경을 하고 나오는 정경민보사 문화부장 김동진씨와 기자 양재희씨가 누군가 갑자기 쏜 총에 맞아 양씨가 다리에 관통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당시 자유당 감찰부 차장이며 깡패두목인 이정재의 사촌동생 이석재였다. 피해자 김씨는 “이정재가 1954년 12월 6일 야당 국회의원 등 정계요인 40명의 명단을 자신에게 건네주면서 이들은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는 제3세력이니 모두 죽일 것을 요구했지만 자신이 이 사실을 경찰에 고발하는 바람에 이정재의 미움을 사게됐다”고 진술했다.
사결과 김씨의 진술이 사실로 밝혀져 이정재는 살인교사혐의로 1월 31일 구속됐다. 이 사건수사에도 자유당의 압력이 작용, 이정재는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되었고 이석재만 살인미수협의로 기소됐다.
1940년 일본 오사카에서 철도 충돌. 191명 사망
1939년 한말 의병장 박윤식 사망
192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압두스 살람 출생
1916년 독일 비행선 최초로 파리 공습
1915년 독립운동가 유인석 선생 사망
항일 의병투쟁을 벌였던 의암 유인석(1842~1915) 선생이 1915년 1월 29일 사망했다. 강원도 춘성군에서 태어난 유 선생은 1896년 ‘격고팔도열읍’이라는 격문을 발표, 의병을 규합한 뒤 제천성에서 의병활동을 활발히 벌였으나 그해 5월 26일 관군의 대공세로 제천성을 내주고 서북지방을 거쳐 만주 서간도 회인현으로 옮겨 재봉기를 꾀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0년 귀국해 황해도, 평안도에서 후학을 양성했던 선생은 1908년 7월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정미 7조약 체결 이후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연해주로 가서 분산된 항일세력 통합에 주력했으며, 1910년 6월 ‘십삼도의군’ 도총재로 추대돼 항일 무력전을 전개하려 했으나 경술국치로 뜻을 못이뤘다. 그뒤 경술국치에 반대하는 연해주 한인대회를 개최, ‘적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 ‘성피지죄 명아지원’이란 뜻을 가진 성명회를 결성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200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10년 순천시민 3천여 명 시장세에 반대, 재무서, 관아등 日人점포 습격
1907년 대구의 서상돈 등 국채보상운동 시작
1904년 고문정치 이래 일본은 한국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함으로써 한국민의 저항을 억압했다. 1907년에 이르러서는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가 총 1300만원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액에 비해 세출부족액은 77만여 원이나 되는 적자예산으로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한 처지였다.
이에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서상돈 등이 발기하여 전국민이 국채를 상환하여 주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이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전국민의 호응을 얻고 각종 신문이 후원하여 신문 캠페인도 벌였다. 이 운동이 실시된 이후 4월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 명이고 보상금액은 230만원 이상이었다.
이와같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이 운동을 극력 탄압 금지함에 따라 더 이상 전진없이 좌절되고 말았다.
1906년 고종, 을사조약 반대 밀서 전달
을사조약 체결 3개월이 지난 1906년 1월29일, 고종이 을사조약에 조인ㆍ동의하지 않았다는 밀서를 영국 런던트리뷴 기자 더글러스 스토리에게 전달했다. 밀서는 고종의 측근이 일본측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스토리에게 전달했고, 스토리는 중국으로 건너가 기사를 영국 본사로 송고했다.
2월8일자 런던트리뷴 3면 머리에 한국의 황제는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다. 을사조약은 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기사가 6개항의 밀서내용과 함께 영문으로 소개되면서 한국의 실상이 로이터통신을 통해 세계각지로 알려졌다.
한국과 일본 신문에도 기사가 실려 평소 을사조약은 한일양국이 자발적으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온 일본을 곤혹스럽게 했다. 국권을 찾기 위한 고종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질 않았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에게 일본의 야욕을 고발하는 친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게 했고, 1907년 6월에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명의 밀사를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보내 일제의 한국침략을 세계에 알리려 했다. 밀사 외교의 실패는 고종이 감내해야 했고, 결과는 7월19일의 강제퇴위로 이어졌다.
12세에 왕위에 올라 44년동안 망국(亡國)의 전과정을 지켜보며 일본의 불법성을 각국에 알려온 고종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무능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의 치세동안 나라가 무너진 탓도 있었겠지만, 다분히 일제에 의해 조작된 측면도 컸다.
1905년 미국 화가 버넷 뉴먼 출생
1902년 철강왕 카네기, 카네기협회 설립
카네기를 재벌로 만든 것은 산업주의의 쌀이라고 부른 강철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 전역에 2,500개의 도서관을 지어 헌납한 기업가이기도 했다.
앤드류 카네기는 스코틀랜드 수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1848년 가족과 함께 미국의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로 이주했다.
어려서부터 방적공·기관조수·전보배달원·전신기사 등의 여러 직업에 종사하다가, 1853년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취직했다.
1865년까지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침대차회사에 투자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
1865년 철강 수요의 증대를 예견하고 철도회사를 사직하고 독자적으로 철강업을 경영하기 시작해, 1872년 홈스테드제강소를 건설했다.
1892년에는 카네기철강회사(뒤에 카네기회사로 개칭)를 설립했다.
1901년 카네기는 이 회사를 4억 4000만 파운드에 모건계의 제강회사와 합병하여 미국 철강시장의 65%를 지배하는 US스틸회사를 탄생시켰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좌우명으로 평생을 살아온 카네기는 사업에서 은퇴하고 자신의 재산을 `나누기` 시작했다.
먼저 1902년 1월 29일 워싱턴 카네기 협회를 설립했다.
공공 도서관 건립을 지원하는 재단이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액수인 2천5백만 달러의 사재를 털었다.
이어 그는 카네기 회관, 카네기 공과대학, 카네기 교육진흥재단 등에 모두 3억 달러를 기증했다.
카네기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미국식 재산 사회환원` 전통은 록펠러재단 (3억5천만달러·1913년), 포드재단(5억달러·1936년) 설립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1886년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 출생
1862년 영국 작곡가 딜리어스 출생
1860년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 출생
1843년 미국 제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 출생
1819년 싱가포르, 영국의 식민지화
영국 동인도회사의 행정장관 토마스 스탬포트 래플즈가 매년 5천 스페인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싱가포르 왕국의 조호르 왕으로부터 싱가포르 지배권을 얻는 조약을 1819년 1월 29일 맺었다.
래플즈는 싱가포르 왕국이 왕위계승권 분쟁으로 혼란스런 틈을 이용해 군주와 대신들을 매수해 이같은 공작을 벌여왔다.
래플즈는 2월 6일 싱가포르에 동인도무역회사를 설립해 싱가포르 지배를 보다 구체화했다. 영국은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잇는 길목인 싱가포르를 차지함으로써 이후 동인도제도에서 네덜란드 상권과 경쟁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이후 싱가포르는 1959년 6월 3일 신헌법을 발표해 영연방자치국으로 독립했다.
1737년 미국 혁명이론가 토머스 페인 출생
1688년 스웨덴의 신비주의자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출생
1634(조선 인조 12) 명재상 이원익 세상 떠남
1393년 지진 발생
291년 가야, 마품왕(麻品王) 사망, 거질미왕(居叱彌王) 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