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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고을 답사
인문학습원의 고을학교에서 괴산고을 답사를 진행했다.(2017.6.25) 진행요원 포함 29인이 참가, 07시에 전용버스 편으로 압구정동 공용주차장을 출발했다.
한 시간 뒤에 안성맞춤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 고속도로변을 지날 때는 논과 밭은 물론 가옥까지도 반듯반듯한 모습, 그러나 국보로 들어서면서 모든 풍경은 아기자기하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고을학교장 최연교장의 강의, 괴산의 한자가 어떤 것이냐고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나는 괴산( 怪山)이라고, 아마 산세가 괴이하고도 신비롭게 생겨 산자수려한 곳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괴산의 한자 지명은 괴산(槐山). 이때 괴(槐)자는 회화나무(홰나무) 괴자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회화나무로 불리는 괴화나무는 ‘괴(槐)’의 중국식 발음이 ‘회’로 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드렸다는 것, 회화나무의 한자글자는 ‘괴화(槐花)나무’로 쓴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회화나무, 곧 괴화나무에서 괴(槐)자의 독특한 조합이다. 나무 木에 귀신 鬼자가 합해진 것(木+鬼). 사람들이 집에 회화나무를 심는 것은 잡귀가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란다. 특히 신성한 공간인 궁궐이나 향교에 회화나무를 많이 심는 것은 잡귀의 근접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최연 선생의 말씀으로는 예전 우리 조상들은 아들을 낳으면 회화나무를 심고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궁궐에서, 향교에서 회화나무를 심은 것이 잡귀의 근접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면 백성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회화나무는 부귀공명의 상징으로 보였을 것이다. 특히 궁궐에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었다는데 이는 삼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상징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정승수(정승나무: 政丞樹)로 불렀다고도 한다. 한편 과거에 장원 급제하게 되면 그 집에서 먼저 한 일이 회화나무를 심는 것이었다고 하니 회화나무야 말로 입신양명과 부귀공명을 탐하는 상서로운 나무였을 것이다.
괴산(槐山), 회화나무가 많아서 그래서 붙여진 지명일까. 회화나무가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출세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 아무튼 괴산 지역은 오랫동안 노론의 사상적 지주, 정신적 고향으로 불리어 왔다.
사진 : 인문학습원 제공
여기에서 잠시 노론(老論)에 대해 돌아보기로 하자.
인조 이후 서인과 남인이 대립과 갈등이 심각했다. 남인이 임금의 노여움을 받아 몰락하자 서인 가운데 노장파는 남인에 대해 가혹한 처벌을 원하는 데 반해 소장파는 좀 부드럽게 하자는 주장이 대립되었고 이후 서인 가운데 노장파는 노론으로 소장파는 소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시절 노론의 우두머리가 송시열이었다.
괴산쪽으로 가까워지면서 국도변에는 담배 밭과 옥수수 밭이 퍼렇게 펼쳐졌다. 산에는 밤꽃이 만개해 있었다. 담배 피는 사람을 몰염치한으로 몰고가는 시대에, 담배농사 짓는 농가의 주민들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그만 지방도로 들어서자 ‘임꺽정로’란 안내판이 있었다. 퇴계로 을지로 세종로 하는 도로 도로명이 있기는 하지만, 어떻든 도둑의 이름을 딴, 아무리 의적이라고 해도 ‘임꺽정로’라니.....임꺽정은 주로 황해도 봉화, 평산, 황주, 해주, 구월산등 북쪽 지역에서 활동하던 인물로 기억하고 있는데, 강원도 철원의 고석정에는 임꺽정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서 임꺽정의 커다란 인물조각을 해놓은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충청도 괴산지역에 ‘임꺽정로’라.....임꺽정로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 것은 그로부터 1시간 쯤 뒤의 일이다.
처음 찾아간 곳은 충민사(忠愍祠, 괴산읍 능촌리 소재) 임진왜란 때 전사한 장군 김시민(金時敏)과 그의 숙부 김제갑(金悌甲)을 모신 사당이다. 충민사 앞으로 괴강이 흐르고 있다.
계단 위로 효충문이 있다.
효충문으로 들어서자 선무문
마침내 대면하게 되는 충민사
김시민 장군의 영정
김시민 장군의 무덤
김시민 장군 (1554~1592)은 선조11년(1578) 무과에 급제, 1591년에 진주판관으로 부임했고 이듬해에 진주목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임란이 일어나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7일간의 격전 끝에 전사했다. 본래 김시민은 진주 충렬사에 제향되었으나 고종3년(1866)에 훼철되어 김제갑의 충열사에 합사하였다가 1976년 이곳으로 묘소를 이전, 이곳에 충민사를 세웠다.
김제갑은 김시민의 숙부로 문신출신이다. 1553년 명종8년 별시에 문과급제하고 선조 14년(1581)년 충청도 관찰사 역임, 임란 때 원주목사로 영원산성에서 싸우다가 아내, 아들과 함께 순절했다.
충민사 경내에 김시민 김제갑 두 사람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괴산읍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고을이라고 한다. 나지막한 산들이 둘러서 있고, 벌이라고 하는 곳도 넓지 않은 편이었다.
언덕 위에서 본 괴산벌
언덕에서 걸어서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독특한 구조의 조각품을, 가까이 접근해서 보니 벽초 홍명희 선생의 문학비였다. 세상에, 이곳에서 벽초선생의 문학비를 보다니....
두 사람의 국문학도가 홍명희 선생의 캐리커츄어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김순태 제공
고을학교 자료집에서는 순국지사 홈범식 고택에 대한 소개만 나와 있었다. 자료집에서 홍범식은 1888년 진사에 합격하고 1909년 금산군수로 있을 때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항일지사라는 설명만 나와 있었다. 그가 바로 벽초선생의 부친이라는 언급은 전혀 없었다.
벽초 홍명희(洪命憙 1888~1968), 민족운동가이자 ⟪林巨正⟫을 쓴 소설가, 민족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가.
그러나 내게는 1910년대 춘원 이광수와 함께 일본에서 유학할 때 같은 하숙집에서 기거했고, 춘원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 경술국치를 당해 금산군수였던 아버지가 자살하자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해버렸지만, 춘원 선생이 작품을 발표하면 먼 이국에서 그에 대한 평을 보내왔었다는 그런 문인으로 각인되어 있다. 오래 전 같은 소재로 글을 쓴 다양한 본의⟪임꺽정⟫을 읽으면서, 벽초선생의 ⟪林巨正⟫을 읽고 감탄, 감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내가 울면 외할아버지께서는 "곽쥐 온다, 곽쥐 온다" 하고 공포분위기를 만드셨다. 그러면 나는 울다가도 무서워 울음을 뚝 그치던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고는 했었다.
⟪林巨正⟫ 소설 속에서 곽오주(곽쥐)는 임꺽정의 부하로 아내가 산후중독으로 사망하자 곧 이어 갓난 아이까지 잃은 이후, 아이의 울음소리만 들으면 순간적인 착란상태에 빠져 아이를 해치는 사람으로 나온다. 아이들에게 곽오주(곽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벽초 홍명희는 작품 속에 그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토속어와 그들의 생각과, 전설과 역사적 사실들을 잘 반죽해서 옛날 이야기하듯 얼마나 시적시적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는지, 한 번 그의 책을 잡으면 그 한 권이 다 끝나기까지 일어나지를 못했다.
사계절사에서 펴낸 대하역사소설 ⟪林巨正⟫의 날개표지에 소개된 벽초선생에 대한 글을 아래에서 전문 인용한다.
홍명희는 1988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1910년 당시 금 산군수이던 아버지 홍범식이 일제의 한국 병탄에 항거하여 순국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중국, 남양 등지를 7년 동안 방랑하며 신흥사조의 세례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괴산에서 이를 주도하였으며 1923년에는 신사상연구회(화요회)를 조직, 활동하였다. 192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25년 시대일보 사장을 거쳐 27년 항일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창립과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29년 민중대회 사건으로 1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그가 ⟪林巨正⟫을 집필한 것도 이 무렵을 전후한 6~7년의 시기였다. 그는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일컬어졌지만, 우리 민족의 해방과 민주주의의 성취를 위한 그의 신념과 활동은 앞의 두 사람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8.15 이후 조선문학가 동맹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가 48년 민족의 분단을 막고자 남북협상을 위해 월북한 이후 남하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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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는 남양 등지를 방랑하면서 당시 춘원 선생이 발표한 글들을 읽게 되면 그에 대한 감동을 이광수에게 글로 써보냈다는 기록을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만큼 홍명희와 이광수 사이는 친밀했다.
한국동란 때 미쳐 피난가지 못한 춘원이 납북되고, 북한측의 회유를 거부한 춘원이 평양형무소에서 다 죽어갈 때, 춘원은 당시 북한 정부의 고위직에 있던 벽초에게 연락했다, 벽초는 즉시 춘원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살리려고 애를 썼으나 춘원은 사망하고 말았다.
벽초 문학비에서 2~30m 떨어진 곳에 ‘제월대’의 안내석이 서 있었다.
숲길로 잠시 걸어올라가자 제월대(霽月臺), 그 위에 고산정이 있었다. 그러나 고산정은 보수공사중
정자 아래로는 절벽, 그 아래 괴강이 감돌다가 벌을 지나 멀리 마을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제월대에서 바라본 괴강과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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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쓴 현판, '호산승집'
완산 이완서가 쓴 고산정 현판
제월대(霽月臺), 눈이나 비가 그친 다음에 보는 달구경이 기가 막히다는 곳이다. 괴강에는 하늘이 비쳐들고, 강가에는 달팽이 잡는 사람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괴강 주변의 밭에는 농작물들이 한참 초록색을 토해내고 있었다. 굳이 달밤이 아니라해도, 제월대에서 바라보는 괴산의 벌과 마을과 괴강은 아름다웠다.
전용버스에 올라 10분 정도 달리자 농업역사 박물관이 나타났다. 주차장에서 내려 애한정(愛閑亭))을 찾아올라갔다. 애한정으로 오르는 작은 언덕길에 수령 270년 이상된 느티나무들이 비탈길에서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애한정 별채에서 사진 찍는 김순태, 허경옥 선생
애한정 별채
사진 8075
별채에서 나와 20~30m 오르자 애한정이 나타나고 그 앞에 하얀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童蒙先習>기념비가 서 있었다.
애한정에 대한 안내판 사진
애한정의 대문
대문은 닫혀 있고 그 오른 쪽에 작은 쪽문이 있어서 사람들은 이 쪽문을 사용했다. 이런 대문을 ‘내외대문’이라 부른다고 한다. 대문을 열게 되면 안이 다 들여다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문이다. 이 사진의 왼쪽에 대문이 있다.
밖에서 다시 본 대문(外門)은 닫혀 있고 오른 쪽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내문(內門)이 설치되어 있다.
애한정 , 조선중기의 유학자 박지겸(1549~1623)이 광해군 시절, 세상이 문란해지자 낙향하여 이곳에 정자를 짓고, 그의 호를 써서 '애한정'이라 부르고 이곳에서 학동들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동몽선습 같은 교재를 사용했을 것이다.
애한정(愛閑亭)의 정면모습
측면과 전면을 동시에 담은 애한정 모습
애한정에서 내려가는 길, 밤나무 꽃들이 떨어져 쌓여 푹신한 보료를 밟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농기구 박물관 옆을 지나다보니 황토건물 벽에 주렁주렁 매달린 농기구들
애한정이 선 곳은 괴강의 합류지점, 과거 시험 보러 가는 이들이 이 합류지점을 통과하여 갔기로 달리 ‘양반길’로도 불리었다고 한다.
다시 전용버스에 올라 20분 정도 달리자 순국지사 ‘홍범식 고가’ 표지판이 나타났다.
안내판을 읽으면서 비로소 홍범식이 홍명희의 부친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왜 홍명희문학비가 가까운 곳에 있었던지, ‘임꺽정로’가 어떻게 하여 이 지역에 있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랑채
홍범식가의 안채
홍범식 고가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홍범식선생 고택 안내문에 의하면 이 고택은 조선 선조 때 김 정승이 지었고, 헌종 때 기병사(奇兵使)가 인수하여 살다가 철종 11년(1860)부터 홍판서가 살았다고 한다. 지붕에서 발견된 기와에 새겨진 “擁正八年”이란 명문을 통해 1730년 경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3.19 홍명희 선생이 이집 사랑방에서 괴산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주도하였다고 한다. 홍범식 고가는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 146호로 지정, 1990년 일부건물이 훼손되어 민족자료에서 해제되었다가 2002년 괴산군에서 매입하여 2002~2008년까지 보수하고 일부 멸실 건물 5동 및 화장실 뒤주 등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 건물은 충북 민속자료 제 14호로 지정되어 있다.
홍범식 지사 추모비 8108
다음은 홍범식 선생이 아들에게 남긴 유서 가운데 일부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잡기엔 내 히미 무력하기 그지 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을오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 1910.8. 29).........
홍범식 (一阮 洪範植 1871.7.23~1910.8.29) 선생의 아들 홍명희(벽초 1888 ~1968.3.5)선생은 민족 운동가, 언론인이며, 소설가, 북한의 정치가였다. 홍명희선생의 아들 홍기문(洪基文)은 국문학자, 김일성대학교수였다. 홍기문의 아들 홍석중은 소설가로 장편소설 ⟪황진이⟫를 발표, 이 작품으로 2013년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북한에 생존해 있는 작가에게 문학상이 수상된 최초의 문학사적 기록이 되었다.
*주지번 (朱之蕃, ?~1624)
주지번은 명나라 산동(山東) 치평(茌平) 출신으로, 1595년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이부 시랑(吏部侍郞)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1606년(선조 39) 명나라 신종(神宗)의 손자가 탄생하자, 이를 알리기 위해 우리나라에 정사(正使)로 왔다.
주지번의 당시 벼슬은 한림원 수찬(翰林院修撰)이었는데, 서화(書畫)에 뛰어나 그의 글씨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성균관(成均館)의 명륜당(明倫堂) 현판 글씨와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안향(安珦) 사당 편액 등도 그가 썼다고 한다. 허균(許筠)과도 잠시나마 교류가 깊었으니, 허난설헌의 시를 가져가 중국 땅에 널리 알린 인물이 바로 주지번이다
(http://www.itkc.or.kr/bbs/boardView.do?id=75&bIdx=32842&page=1&menuId=10063&bc=0 주지번 관련 내용 참조)
첫댓글 선생님~벽초 선생님 출생 연도 오타가 있어요~~
1888년 인거같은데 1988년으루~~ ^^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