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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매전중 서경동문회 ♡ 원문보기 글쓴이: 김욱(10회-명대)
남양리(南陽里) |
아음(牙音)이란 동명은 당초에는 배 공이 애암이라 하였는데 뒷산에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상이라 거문고에는 우아한 옥음이 나와야 대국(對局)이 됨으로 아음(牙音-애암)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풍류적인 마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사곡(沙谷)은 천변이라(溪川) 좁은 곡야(谷野)이고 지형상 자갈과 모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암(象岩)은 처음 성 공이 마을 주위를 살펴보니 코끼리(象) 형상의 큰 바위가 있어 코끼리 바위 즉 상방우라 한 것을 상암(象岩)으로 표기한 것이다. 곡리(谷里-안골, 골마을)는 옥녀봉 기슭 골 안에 자리잡은 탓으로 붙여진 이름인데 이 마을은 서복(鼠伏)마을과 같이 인재가 많이 나와 명당촌이라는 별칭도 있다. 서복(鼠伏)또는 시비기는 마을 앞산의 형상이 마치 쥐가 엎드린 듯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쥐가 머무는 곳에는 항상 먹을 것이 풍부하다는 풍수설처럼 서복산이 멈추는 곳에서 들이 펼쳐져 식생활이 풍족하고 인재가 많이 나는 마을이다. 임곡(壬谷-임실)은 3면이 산에 둘러싸여 있고 북쪽만 열려 있어서 임곡(壬谷)이라고 처음 입촌한 성 공이 붙였다는 것이다. 만의보(巒衣洑) |
당호리(堂湖里) |
동호(東湖)란 마을이 물가에 있고 동당(東堂)의 동쪽에 자리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동(東)에 대하여는 역시 석연치 않다. 상동당, 하동당은 상·하 마을의 별칭이다. 상동당은 동창천 건너편 갯벌에 옛날에는 마을이 있었다는데 홍수로 유실되고 현재는 황개뜸풀, 야시방구라는 지명만 남아 있다. |
금곡리(金谷里) |
쇠실, 쇠골, 금곡(金谷)은 옛날부터 금과 철광이 나왔다고 쇠실, 쇠골이라 하였는데 표기들 금곡(金谷)으로 했다. 이 곳에는 현재도 철광맥이 있어 매장량도 풍부하나 채산이 안 맞아 채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이(法耳)는 버구, 버귀라 한다. 이는 마을이 고봉에 둘러싸여 있고 일종의 분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와는 첩첩이 차단되어 있어 외부의 소식에 어두웠다. 지봉수태(支烽燧台)가 일시적이나마 있을 때 소식이 빠른 귀 역할을 하였다 한다. 귀자를 넣어 저(봉수대를 가르킴)귀가 있다는 것이 어떻게 변하여 저귀로 저귀가 버구, 버귀로 다시 변하고 표기로는 법이(法耳)로 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담안, 장내(墻內)는 돌이 많이 집터 및 밭갈 때 나온 돌들로 돌담을 쌓았기 때문에 불러지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
동산리(東山里) |
구동창(舊東倉)이란 중종 15년(1520년)에 삼족당(三足堂) 김대유 공과 소요당(逍遙堂) 박하담 공의 주도로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동헌(郡廳 華陽邑 東上里)의 동쪽이라고 동창(東倉)이라 불렀던 것이 마을 이름으로 변했던 것이다. 사창이 들어선 70여년 후에 김 공이 입촌하였는데 당시에 주민들이 없는 곳에는 사창을 설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규명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사창이 있던 자리가 현재는 밭이 되어 창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동창(舊東倉)을 봉산리(奉山里)라 부른다. 이는 마을 뒷산이 험준하여 마을에 무슨 피해가 있을까봐 김 공이 산을 받든다는(奉)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이 산을 효양(孝養)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후부터 이 마을에는 효자 효부가 많이 난다는 것이다. 산명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신기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매전(買田), 매전(梅田)은 김명한 공이 택리하고 마을 주변을 살펴보니 매화낙지형국(梅花落地形局)이라 매전(梅田)이라고 마을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으나 각종 지리지에 매전(買田)으로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김 공이 매전(梅田)으로 동명을 정했다는 설이 신뢰성이 있다. 또 1914년 행정구역 조정시의 동명에 매전(梅田)리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그 때 매전(買田)을 매전(梅田)으로 개명을 했다는 설이 있다. 새터, 신기(新基)란 봉산리(奉山里-구동창) 서쪽에 새로 터를 잡아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하고 표기는 신기(新基)라 했다. 동창은 매전면 소재지다. 사창(社倉)을 동창(東倉)이라 합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산(東山)리는 신동창, 구동창, 매전동을 합친 동리다. |
북지리(北旨里) |
북지(北旨)는 한자로 표기한 동명이고 애당초는 북마을이 북말로 다시 금이 변하여 북마리등으로 불리다가 들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북지라고 한 것이다. 무심암(無心岩)이란 북지(北旨) 마을 앞으로 흐르는 동창천변의 별바위 모퉁이에 있는 바위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 부부가 난리가 끝나고 평화가 되면 이 바위에서 만나자는 언약을 하고 각자 피난길에 올랐다가 전쟁이 끝나자 부인은 이 바위에서 기다렸으나 끝내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지혈(指血)로 무심(無心) 이라고 혈서를 남기고 투신 자살한 데서 유래한 바위다. |
용산리(龍山里) |
사갈(巳渴), 사가래는 윤 공이 동기를 잡고 보니 물이 귀하여 사갈(巳渴)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 마을 지형을 살펴보고 용산(龍山)을 동명으로 정한 것과 비교해 보면 이해가 된다. 용산리에서 낮게 뻗어간 구릉이 온막 고개가 되고 다시 더 뻗어 동창천변에서 멈춘 자미산(紫嵋山)을 마을에서 내려다 보면 용맥으로는 너무 약하여 사맥(巳脈-뱀)으로 보고 동창천을 향하여 뻗은 형상이 목마른(渴) 뱀(巳)이 믈을 맛려 내닫는 형국이라 사갈(巳渴) 또는 뱀이 가는 모습이라 사가내가 변하여 사(巳)가래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한 설은 사(沙) 즉 모래 성질이 많은 토질이라 사(沙)자와 가래는 자미산(紫嵋山)을 마을에서 바라보면 흡사 가래 모양이라 모래는 가래로도 일구어 나갈 수 있다는 뜻에서 사가래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뱀(巳)를 용으로 미화시키고 마을옆 비룡곡에 있는 용소(龍沼)를 용연(龍淵)으로 다시 미화시켜 용연리(龍淵里) 동명이 정해 진 것이라고 믿어진다. 중산리는 둘러싸인 산속의 마을이라서 중산(中山)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용산리는 용연리와 중산리의 합동이다. 비룡(飛龍)곡에는 신라 고찰인 불영사(佛靈寺)가 있다. 이 절에 있는 천불탑은 전탑(塡塔)으로 기단 및 탑신에 벽돌 한 장 마다 불상이 새겨져 있어 특이하다. |
온막리(溫幕里) |
광명대(光明臺), 명대(明臺)란 이 담 공이 마을의 발전을 위해 항상 밝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오늘날 적중된 것으로 선견지명의 동명이라 생각된다. 원전(院前)이란 지금부터 약 200여년 전인 1782년에 명계서원(明溪書院)이 건립되고 마을이 형성되어 원전이라 불렀다. 온막(溫幕)이란 경사를 따라 오르막이 있다고 올막이 변화하여 온막(溫幕)으로 미화 표기되었다는 설과 자미산(紫嵋山)릉 용담산 비탈이 막을 두른 것처럼 마을을 감고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다. 當谷(당골)은 당나무가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용송(龍松)은 당골에 있었던 소나무다. 임란 공신인 식성군(息城君) 이운룡 장군의 태생지에 이 장군이 심은 소나무가 마치 한 마리의 용처럼 둥지를 감아 돌면서 자랐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약 400여년된 이 고목이 고사되고 말았다. 부근의 산을 임금산, 들을 임금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신에게 하사된 토지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추정된다. |
호화리(好花里) |
동화(東化), 동해에는 1리와 같은 무렵인 1500년 중엽경에 풍천인 임동유 공이 입주하여 마을을 일구었다는 것이다. 임씨(任氏)가 아닌 임씨(林氏)란 설도 있으나 본관으로 보아 임씨가 맞다고 믿어진다. 큰 바위 동쪽에 마을이 있다고 동화(東化)라는 설이 있으나 여러 가지로 미루어 볼 때에 호방(好方)의 동쪽이고 호방리와 같이 잘 사는 마을이 되라고 동화로 동명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다른 의견은 호화의 동편 마을이라 동화라는 설도 일리가 있다. 성주(城主)바위는 호화 2리 북쪽에 위치하며 길이가 약 8m 폭이 약 10m로 동창천 가운데 있다.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이기도 하다. 그 유래와 연대는 미상이나 어느 해 큰 가뭄으로 농민들이 아사할 우려가 되었을 때 성주가 이 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내자 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성주 바위라 불렀다. |
장연리(長淵里) |
이란 철성인 이 공이 마을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 즉 후손의 발복(發福)을 바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철성인 이씨들이 택리한 동명에는 한결같이 후손을 위한 소망에서 명(明), 길(吉), 호자(好字)를 쓰고 있다. 그런 탓인지 위선심(爲先心)이 강하고 일가간의 우애 우의는 타성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고도 복된 일이라 할 수 있다. 장수곡(長水谷), 장수곡(長壽谷), 장연(長淵)은 계곡이 깊고 길다는데서 유래되어 장수곡(長水谷)이 되었고 이 골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장수하므로 장수곡(長壽谷) 또는 절이 있었다고 절골이라고 한다. 장연(長淵)은 동창천이 마을 모퉁이인 산밑을 감아 돌면서 생긴 소(沼)가 깊고 넓어 못 같다하여 장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하나 확실치는 않다. 고암(高岩),고방(考方)은 마을이 높은 곳에 있고 그 곳에 큰 바위가 있다고 고암이라 했는데 음이 변하여 부르기 쉽게 고방(考方)으로 되었다는 설과 옛날 이곳에 피난한 사람이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고바위(거바위)라고 대답하여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계당(桂塘)은 당목인 계수나무와 못(地)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예전리(禮田里) |
용전(龍田)이란 마을 앞의 동창천에 깊은 소(沼)가 있어 이 소에 용이 살고 있다하여 용당호(龍堂湖)라 불렸다 한다. 또 흰 비둘기가 날아와서 용당호 바위에 앉았다가 어디론지 날아 간 후에 용은 등천하고 용당호는 밭(田)으로 변해 버렸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봉당호가 밭으로 변했다는 것은 동창천 물줄기가 변한 것으로 믿어진다. 과목정(果木亭)에는 유실수(밤, 감, 배등)가 많고, 천변에는 정자가 있어 유래된 이름이라 하나 정자는 어떤 정자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가례(嘉禮)는 예절을 잘 지키는 마을이라고 가례(街禮)라 불렀으나 조선중엽 경에 정주인 이광규 공이 예절을 더욱 숭상하여 예의 범절이 잘 이행되므로 가례(嘉禮)를 동명으로 했다 한다. 그러나 각종 지리지에는 가례(加禮)로 수록되어 있다. |
내리(內里) |
나동(羅洞)은 최 공의 본관이 경주 즉 신라라서 붙여 진 것이라는 설과 하나는 태산을 등지고 깊은 계곡과 거기에다 큰 내인 동창천이 흘러 풍광이 비단(羅) 같다고 붙여진 것이라는 설인데 후자가 동명 유래로 보아 더 정확한 것 같다. 회계리(回溪里), 양지편(陽地便), 중각단(중리), 큰각단 등이 있는데 회계리를 제외한 마을 이름은 모두 지형이나 위치에 따라 정했다. 회계리는 계천이나 지형을 따라 이리 돌고 저리 감아도는 계곡의 생김새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내리(內里)란 마을의 위치가 안쪽에 있다고 안마을인 내리로 정했다는 설과,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사람이 산다는 뜻으로 경형( 型)에 인자(人字)를 더하면 내자가 되므로 내리로 절했다 한다. 또한 처음 이주한 최수필 공의 고향이 고양군 내리라서 그대로 정했다 하는데 첫째 설이 가장 타당하다. 육화(六花)산은 500고지나 되는 산이다. 이 산은 큰산, 작은산, 청계수(淸溪水), 폭포(瀑布), 적석(赤石), 흑석(黑石)의 6가지가 갖추어져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풍치가 좋은 산으로 인근에 이름이 높다. 약수(藥水)곡은 약수가 나는 곳이라고 붙여진 이름인데 옛날에는 3일 기도 후에 약수를 마시면 효험이 대단했으나 현재는 시대 풍류로 좋은 약이 많아 찾는 이가 없어 지난날과는 격세지감이다. |
지전리(紙田里) |
지소(紙所), 지수(紙需) 양지마을은 양지 바른 곳의 마을이라고 양지마을, 양지면이라 부르고 지소, 지수는 조선시대 관영(官營) 관지소(官紙所)로 종이를 생산한 마을이라고 지소(紙所)라 하고, 종이를 공급한 마을이라고 지수(紙需)라고도 했다. 불곡(佛谷)이란 조선시대에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부처님께 공을 많이 드리면 소원 성취가 된다고 하여 불곡(佛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부처골(佛谷)이란 이 곳에 절이 있어 그렇게 불렀으나 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절이라 1700년경 국명으로 무너져 없어진 절인 것 같다. |
송원리(松元里) |
건현(巾峴), 건치(巾峙), 송원(松元), 송원(宋圓), 송서(松西) 등이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건현(巾峴), 송원(松元)이다. 건현또는 건치는 같은 뜻으로 마을 주위에 우뚝 솟은 산의 생김새가 묘하게도 수건(巾)형이다. 그리고 마을 뒷산에는 높은 재(峴, 峙)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수건을 두른 듯이 마을을 산이 둘러져 있다고 붙여진 이름은 아닐 것이다. 송서니 송원이니 하는 것은 조선시대 헐벗은 산이 많아 청도, 화양등지에서 이곳까지 땔감 나무를 하러 다녔다. 그로 인해 소나무가 많아 땔감 채취산으로는 으뜸(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같다는 것이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땔감이 무연탄으로 대체되기 전까지는 이 마을 주민들의 농외 소득원으로 땔감을 매각하여 얻어진 것으로 보면 송원이라는 동명을 낳게 할만하다고 본다. 마을이 깊은 산중에 있고 계곡의 경사가 심하여 마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머무를 여유가 없이 흘러가 버리고 밤과 낮의 기온차도 다른 마을에 비교하여 많아서인지 모기가 없다는 것이 특이하다. 무엇보다도 지대가 높은 탓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다. 계곡의 경사가 심한 증거는 계곡에 용소(龍沼)가 무려 7개나 있다는 것이다. |
구촌리(龜村里) |
구촌(龜村)이란 구미(龜尾)와 신촌(新村)동을 합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1580년경에 인동인 장재휴 공이 정착한 것이다. 구미(龜尾), 덕정(德亭)은 본 마을로 마을이 자리잡은 곳이 풍수지리상 거북이등과 같이 생긴 형상이라 하여 구미(龜尾)라고 이름이 붙여지고, 거북이등과 같이 단단한 곳에 정자를 지으면 발복(發福)한다고 정자를 많이 지었으므로 덕정(德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천변에 숲이 좋아 풍취 또한 좋은 것이다. 나은방, 남방(南方)은 오례산성(烏禮山城) 및 구미(龜尾)의 남쪽에 취락된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가 많은 마을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바위를 많이 정리한 것으로 보이나 아직도 바위가 많이 남아 있어서 남은 바위라 부르다가 남바위의 음이 변하여 나은방이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싶다. 동산(東山), 칠송정(七松亭)은 수풍소와 말굽소가 있는 근처에 보기 좋은 소나무가 7그루가 있어 칠송정이라 부르고 이 푸른 동산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었다 한다. 말굴소, 말구르기 마전암(馬轉岩)은 동창천변에 있는 절벽으로 이 아래는 깊은 소(沼)를 이루고 절벽위로 길이 나 있다. 이서국이 금성(慶州)를 공략하다 패퇴할 때 이서군이 오례산성에 입성하기 위하여 이 곳을 지나다가 신라병에게 추격을 당하여 많은 사람과 말이 추락사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구전이 되고 있다. 오례산성(烏禮山城)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청도천과 동창천 사이에 있는 산성이다. 밀양, 대구방면 통로를 봉쇄할 수도, 공격할 수 있는 지리적 요새이며 석축으로 주위가 9,980尺, 높이 7尺이며, 산성대에는 3계(溪), 5지(池), 3천(泉)이 있고, 3면이 낭떠러지로 천혜 난공불락 성이고 구도성(仇刀城), 오혜성(烏惠城), 부성(扶城)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
상평리(上坪里) |
반곡(盤谷)은 신리(新里)에 약 2km 계곡 상류쪽에 자리하고 계곡 지형이 소반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버섯 재배를 하는 두 가구가 살고 있다. 둔치산성(屯峙山城)은 일명 명미(明媚)산성이라고도 한다. 둔치 정상에 있는 아주 작은 산성이라 하나 성이 아니고 경비초소 같은 곳이라 추측된다. |
하평리(下坪里) |
월촌(月村)은 산기슭에 경사도가 급한 곳으로 산기슭이라는 것보다는 산허리이라고 할 수 있다. 토함산록에는 무리(武里), 모은리(慕隱里)가, 자산록(紫山麓)에는 추곡(楸谷)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몬담, 모은정(慕隱亭)에는 1300년 중엽경에 제주 고씨가 입촌했다 하나 구전일 뿐 현재는 철성 이씨가 주종을 이루면서 동기를 굳혔다. 동명은 철성 이씨들이 조상을 존경하는 마음에 모은정(慕隱亭)을 축조한데서 비롯되었는데 모은정이 변하여 몬담으로 부르게 되었다 하나 규명하기 힘들다. 다만 모은정에서 동명이 유래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무리, 추무리에는 경주 박씨가 1400년대에 입주했다고 한다. 수문동, 숨은동은 마을이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숨은 것같다하여 붙여진 설과 어떠한 난리가 나도 마을이 숨어 있어 피난할 필요도 없이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마을이라고 수무리(愁無里)로 표기되었다는 설이 있다. 가락골, 가라골, 추곡(楸谷)에는 철성 이씨가 임란 후에 입촌했다 한다. 그리고 인가가 일직선으로 길게 취락되어 실가락 같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묘기를 추곡(楸谷)으로 했다. 월촌, 광월리, 넓은월리, 너부리에는 1780년경에 밀양서 이거 김해인 김익경 공이 정착하여 오늘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마을 앞산인 자산(紫山)에 달이 뜨면 마을이 한층 넓게 보인다고 월촌(月村) 또는 광월리(廣月里)라 했다. 이는 지대가 심한 경사로 부근일대가 속속이 드러나지 않고 달밤이나 고저의 구별 없이 일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넓게 보이는 마을이라 하여 광월리로 표기하고 보니 발음이 잘 되지 않아 월촌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월촌이란 표기상 동명이고, 광원리는 "넓원리" 즉 널붤리라 하여 이를 부르게 쉽게 너부리, 너브리라고 부르고 있다. |
관하리(管下里) |
관하실(管下室), 관곡(館谷)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룩된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라 하나 지명유래통설을 인용하면 종도면 청사 아래쪽에 위치한데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사료된다. 신천 2리는 1580년경에 예천에서 경주인 이 완 공이 이주하였다 하는데 사연은 잘 알 수가 없다. 이 공이 택리를 하고 마을 주위를 보니 산형이 봉학형국(鳳鶴形局)이고 거기에다 계천의 물 또한 맑아 학천이라 이름을 붙였다 한다. 창원 황씨도 입촌하여 학봉 기슭에 정주하였다고 하며, 그후 연대는 미상이나 화재로 마을이 전소한 일이 있은 후에 신천(新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원정자(院亭子)라는 이름은 이 곳에 수림이 울창한 숲이 있고 숲 사이로는 계천물이 맑아 풍치가 좋은 곳으로 원님(郡守)이 하루 소요하고 간 후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상방천(上防川)은 이씨가 계천에 제방을 축조한 위쪽에 마을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금천리(錦川里) |
장산리(場山里)(마당, 마당말리)는 마을 뒷산에 마당처럼 넓은 곳이 있어서 이 산을 장산(場山)이라 불렀다 하며 마을도 장산리라고 불렀다 한다. 이는 표기명이고 마당마을이 변하여 마당말리가 되고 산에도 마당 같은 곳이 있다고 하여 마당(場)과 산을 합쳐서 장산(場山)으로 된 것이다. 가자골, 가재골은 이 마을의 지형이 가재와 비슷하게 생겼고, 이 곳에 마을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어떤 주민이 논을 개간할 때 가재발 모양의 지맥을 끊었더니 그로부터 마을에 불운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이현(伊峴)을 이태(鯉胎)라고도 한다. 이는 뒷산의 모양이 잉어와 비슷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이 고개를 벗고개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고개길의 경사가 급하여 웃옷을 벗지 않고서는 넘을 수가 없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복고개는 이현(伊峴)의 동쪽에 있는 고개다. 해발 800고지의 대왕산 주령의 500고지에 있는 고개인데 왕래하는 행인이 거의 없어 현재는 길도 찾기가 어렵다. |
덕산리(德山里) |
송정(松亭), 송정리(松亭里)는 옛날에는 노송의 숲이 울창하였고 정자가 숲속에 있어서 행인들의 휴식처로 이름이 높아 마을 이름도 송정리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촌(新村), 새각단은 덕산리에서제일 늦게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곰태마을은 곰태재 밑에 있는 마을이라 재(峙) 이름을 그대로 동명으로 부르게된 것이다. 사촌(沙村), 개정자(開亭子)는 곰태 계천에 유입된 모래가 쌓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모래마을, 즉 사촌(沙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이 마을 입구에 송림이 많았고 송림에는 정자가 있어서 개정자(開亭子)라는 별칭도 있다. 고청리(高靑里)는 파평 윤씨가 주로 거주하고 있는 마을로 높은 산밑에 있으며 봄부터는 푸른 숲에 마을이 가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밤실, 율곡(栗谷)은 옥산 전씨가 주된 마을로 밤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밤나무를 볼 수가 없고 그 대신에 사과나무와 복숭아 나무가 많은 과실 마을이 되었다. |
두곡리(杜谷里) |
숲실, 임곡(林谷)은 울창한 숲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곡(寺谷)은 절이 있던 계곡에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암자골은 옛날에 암자가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암자터는 찾을 수가 없고 암자 이름도 알 길이 없다. |
첫댓글 좋은 자료네 잘 보고간다,
굽이 굽이,다 사연이 많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