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명신, 명장으로서 최경창처럼 문무를 겸한 공신이었다. 본관 坡平. 자 同玄. 호는 묵재, 시호는 처음에 문경이었으나 후에 文肅(숙)으로 고쳐졌다. 태조를 도운 三韓功臣 莘達의 고손(5세손)이며 檢校小府少監을 지낸 執衡의 아들이다.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고,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출생과 관련된 비화로 아버지 문정공이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날으는 꿈을 꾼 후에 부인 김씨에게 태기가 있어 낳았다고 한다. 일찍 학문에 눈이 트여 잠시도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특히 오경을 즐겨 봤다고 한다. 일곱 살 되던 해 뽕나무를 소재로 하여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073(고려 문종 2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신으로 데뷔하고 拾遺(습유), 補闕을 지냈고, 1087(선종 4)년에는 합문지후로서 출추사가 되어 광주, 충주, 청주를 시찰하였다. 그 뒤 佐司郞中으로 재직중이던 1095(숙종 즉위년)년 10월 숙종이 즉위하자, 임의와 함께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리고 돌아왔고, 3년 뒤 1098(숙종3)년에는 동궁시학사로서 송나라에 조규와 함께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를 통고하였고, 이듬해 자치통감을 기증받고 귀국하였다. 이어 우간의 대부 한림시강학사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 대부와 친척이었으므로 사간인 어사대와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의 상소에 따라 해임되었다. 1101년에는 추밀원지주사가 되었고, 1102년에는 왕명에 의하여 진사시를 주관하였으며,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1103년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지추밀원사 및 한림학사 승지가 되었다. 본래 북쪽 국경인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경계로 그 위쪽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를 상국 또는 모국이라 하여 조공도 바치고 더러는 귀화도 하고 있었으나, 점차 국경 일대인 만주 지방에서 새롭게 일어난 동여진의 추장 영가는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하나로 통일하여 갑자기 세력이 커졌고, 고려의 국경 요새 등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1103년에는 영가의 뒤를 이은 부족장 우야소가 더욱 세력을 키웠다. 이들은 좀도둑의 무리가 아니었다. 우야소는 그 세력이 함흥 지방까지 들어와 주둔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일촉즉발의 충돌 상태에 놓였다. 1104(숙종 9)년 초 여진의 완안부의 기병(이 무렵 고려는 여진족들을 좀도둑으로 취급)이 먼저 정주관 밖에 쳐들어와, 동북쪽 국경에 행패를 부리자, 이에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한다. 왕의 명을 받은 문하 시랑평장사 임간은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오히려 여진족에게 쉽사리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들 여진족은 모두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어 고려군보다 기동력이 빨랐는데, 여진의 기병들은 반격 작전을 펴서 고려의 국경선을 마구 짓밟아, 많은 고려 백성들이 짐과 재산을 잃고 죽임을 당하자, 숙종은 당황하여 이번에는 윤관 장군에게 여진족 토벌을 명하니 이때부터 윤관 장군은 왕명을 받고 여진정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윤관 장군은 1104(숙종 9)년 2월 21일에 지추밀원사로서 정벌 책임자인 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로 임명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의 완안부족 정벌에 나섰다. 이때부터 장군은 훗날 자신의 명성을 떨치게 된 여진 정벌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장군은 전장에 나가 3월에 여진과 싸웠다. 우선 여진족 추장 우야소에게 사신을 보내어 "도와준 은혜를 저버리고 행패를 부리다니, 그것이 사람으로서 할 짓이냐?"고 꾸짖자 여진족은 이웃 나라로 대접해 주면 물러가겠다고 하여, 윤관은 여진의 강한 기병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아군의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의 장수가 되고 말았고, 여진족 추장 우야소와 임기응변으로 화친을 맺어 일단 그들을 몰아내고 개경으로 철수하여 돌아왔다. 그리고 윤관은 이 일을 교훈 삼아 숙종에게 "여진족들은 모두 말을 탄 날쌘 군사들로 변해 있어, 우리 고려가 여기에 대비해야지, 보병만으로는 무찌르기 힘들 것"이라고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숙종은 윤관의 말을 듣고, 1104년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 확장에 전력하게 되었다. 우선 윤관 장군은 곧 특별 부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고려 백성으로서 말을 가지고 있거나, 말을 탈 줄 아는 장정들을 뽑아 '신기군'에 편입시켰다. 말을 갖지 못한 장정과,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은 장정은 '신보군'에 편입시켰다. 또, 스님들로 이루어진 '항마군'도 만들었다. 이 기병대인 신기군과, 보병 부대인 신보군, 그리고 항마군이 곧 윤관 장군이 창설한 별무반이란 특별 부대였다. 윤관 장군은 군제를 개편하고, 밤낮을 가리지 앉고 별무반을 훈련시켜 전투력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위한 군대를 양성하는 한편, 군량을 비축하여 여진 정벌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숙종이 승하하고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1107(예종 2)년 여진족이 날뛰기 시작하자,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어느 변방의 긴급보고가 올라오게 된다. 이를 기화로 윤관은 왕명으로 북벌 여진 정벌군 도원수가 되어 왕으로부터 지휘관을 상징하는 부월을 하사받고, 부원수 吳延寵(총), 척준경과 그동안 훈련하여 두었던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 국경지대인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휘하에 5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육지와 바다로부터 여진족을 공격하였다. 이같이 기세등등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군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을 공격하여 적의 태반을 섬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135개에 달하는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점령하였고, 적의 전사자 4,940명, 생포 130명이나 획득하는 대승을 거둔다. 이에 윤관은 조정에 승전보를 올리고 자기의 공을 뽐내지 않고, 장래에 대비하여 여기에 9성을 쌓고 남쪽 주민들을 이주시켜 땅을 개척하고 지켜야 함을 건의한다. 참으로 현명하고 대단한 장군이었다. 이에 왕의 재가를 얻어 1108년에 이 곳에 咸州, 英州, 雄州, 福州, 吉州, 公(험)鎭, 崇寧, 通泰, 眞陽의 9성을 쌓아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확정하고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두만강 건너 공험진에 국경을 표시하는 큰 비석(고려정계비)을 세워 외적이 보고 감히 접근을 못하게 하였다. 이어 남쪽에 사는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남도 지방민들이 국경지방 일대에 개척하며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하였다. 이주 규모는 함주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에 성곽 670칸과 이주민 680가구, 공험진에 이주민 532가구 등이다. 이 6성 이외에 이듬해 진양 등지에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오랑캐 땅을 개척한 것이 사방 700여 리에 달했고,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렇게 고려군이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는 1108년 봄에 굶주린 나머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가한촌의 전투에서 포위당하였으나 부하 척준경 등의 도움으로 겨우 구출되었으며, 영주성의 공방전에서도 자신의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지략으로 군사들의 일심단결로 적을 패주시켰다. 결국 국경을 지킴으로써 영토를 개척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이듬해(1108년) 3월 30일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하들과 함께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00두 등의 전리품을 앞세운 채 개경으로 개선하여, 그 공으로 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門下侍中, 尙書吏部判事, 軍國重知事가 되었다. 한편 전투에 패한 여진은 서쪽으로 강력한 요나라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이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의 추장 우야소는 조공을 바치고 끝까지 배반하지 않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9성을 돌려주기를 애원하며 강화를 요청해 왔다("우리는 일찍부터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겨 왔으나, 굶주리다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식량을 찾아 헤맨 것이옵니다. 우리가 살 땅을 돌려주신다면, 고려에 조공을 바치겠습니다"). 이처럼 여진이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나오자 당시 고려 왕인 예종은 6부를 소집하고 9성 환부를 논의하였다. 예부낭중 한상(박숭증?)이 반대하였으나 나머지 28명이 환부에 찬성하는 등 6부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화평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 여진을 공략할 때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다는 점, 둘째 개척한 땅이 수도에서 너무 멀어 9성의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셋째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 등이었다. 이에 예종은 다수의 의견에 따라 편암함을 쫒게 되니, 1109년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고 강화를 맺었다. 결국 자신이 장병들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경략하였던 9성 일대의 땅이 아무 의미없이 다시 여진에게 돌아갔던 것이니, 하루 아침에 윤관의 노력이 허물어진 것이다. 정세가 바뀌자 여진정벌의 실패로 그를 시기하던 문신들의 여진 정벌에 대한 패장의 모함을 받아 벼슬을 빼앗기고 공신칭호마저 삭탈되었다. 더구나 이익 또는 명분이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했다고 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탄핵을 받아 개경으로 돌아와서 왕에게 복명조차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 참담하였으랴! 반대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상소를 올려 그의 사형을 주장하였다. 예종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달래기 위하여 윤관의 관직과 공신의 호를 빼앗기에 이르렀다. 이후 윤관을 아낀 예종이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비호해 준 덕으로, 1110년 다시 守太保, 門下侍中, 兵部判事, 上柱國, 監修國史의 문무관직과 시호가 내려졌으나, 윤관은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인 파평(경기도 파주)에서 말년을 우울한 심정으로 서재에 파묻혀 평소 좋아하던 경서를 읽으며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 1111(예종 6)년 5월 "호국일념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끝까지 분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쓸쓸히 눈을 감았다.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어진 성품과 학식을 겸비했다고 전한다.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후대에 일가를 이루었다. 1130(인종 8)년 예종의 묘정과 조선 문종대에 이르러 왕의 명으로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파주 여충사에 봉사하고 청원의 호남사 등에 배향되었다. 척지대업을 이룩한 해동명장이라는 명성으로 지금까지 후대에 널리 추앙받고 있다. 슬하에 언인, 언순, 언식, 언이, 언민 등 5아들을 두었는데, 언순은 예종 때 남원부사, 언식은 글씨와 그림에 조예가 깊었고, 언이는 인종 때 급제하여 의종때 정당문학에 오르고, 나머지 두 아들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윤관 장군은 고려의 먼 앞날을 내다보았으나, 당장의 무사함을 좇는 대신들은 어리석게도 고양이를 데려다가 호랑이로 키우는 일을 한 셈이다. 9성을 되돌려 받은 여진족들은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키워 나가다가 추장 우야소의 뒤를 이은 그의 아우 아구타가 금나라를 세우기에 이른다. 아구타는 1115년, 고려 예종 10년에 금나라의 태조가 되었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침입하자, 요나라는 고려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고려는 이때 나라의 형편을 들어 요나라의 청을 거절하였다. 마침내 금나라는 요나라 땅의 절반이나 빼앗아 그 힘이 강대해졌다. 1117년(예종 12) 고려는 압록강 유역의 요나라 땅인 포주성을 차지하고 '의주'라 하였다. 대륙에 힘을 크게 떨치게 된 금나라의 태조 아구타는 바로 그해 3월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협박하였다. "고려는 예를 갖추어 우리 금나라를 섬기시오!" 참으로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모르는 일이었다. 그제야 어리석은 고려의 대신들은 9성을 여진족에게 내 준 것을 뼈저리게 뉘우쳤다. "윤관 장군을 박대한 죗값으로 수모를 받는구나!" 왕도 한탄하였다. 고려는 정신이 뻔쩍 나서 금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그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금나라는 송나라도 양쯔강 남쪽으로 쫓아내고, 중국 대륙과 만주 대륙을 휩쓸어 대제국을 건설하였는데, 또 다시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자기 나라를 섬기라고 위협하였다. 고려 조정은 골치가 아팠다. 금나라를 섬기자니 옛날 생각이 나서 아니꼽고, 아니 섬기자니 그 강대한 나라가 고려를 칠 것 같아서였다. 이때, 이자겸 일파는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금나라와 화친하여 사대의 예를 갖추게 되었다. 윤관 장군이 땅 속에서 통곡을 할 일이었다. 윤관 장군의 9성은 이처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아무리 잘 얻은 것이라 하여도 그것을 잘 지키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것임을 실감난다.
**** 윤관장군 묘 ****
고려 예종 6(1111)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번지로서 도로 변에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다. 장군 내외의 묘가 앞으로 툭 트인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고 누워 있다. 고려시대 睿(예)宗때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명장답게 묘역 전체 규모가 상당히 크고 웅장하며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고 있다. 최영 장군의 묘와 너무나 대비되어 어지럽다. 윤관의 묘역은 고려에서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는 문벌 가문답게 상당히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 격식에 맞지 않게 마치 왕릉처럼 되어 있어, 한편으로는 후손들의 과시욕이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홍살문을 앞에 두고 저멀리 묘역이 보인다. 입구 왼쪽으로 새로 지은 건물이 몇 개 보인다. 충효관, 진국문, 여충문 등이 그들인데, 위용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묘역에 들어서면 광장 양쪽에 장군의 신도비와 공적비가 늘어서 있고, 한 계단 올라서면 윤관 장군의 영정이 봉안돼 있는 영당(사당)인 麗忠祠가 자리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 위로 온 능선 하나를 모두 잔디밭으로 가꾼 시원스러운 묘역이 나온다. 넓은 공간이라 무척 좋다. 묘는 원형봉분이다. 봉분 아래는 장대석 보양의 護石을 두르고 봉분 뒤로 높직한 담장(곡장)이 둘러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봉분 정면에 床石이 놓여 있으며 왼쪽에 묘비가 서 있다. 묘비문은 “高麗 守太保門下侍中 鈴平伯文肅(숙) 尹公諱(휘)之墓”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 계단 아래에 양쪽으로 망주석과 상석 전면에 사각의 장명등이 세워져 있으며 長明燈을 중심으로 각각 양편에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양, 石馬, 石虎 등 석물이 고루 갖춰져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윤관장군 묘는 원래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번듯한 묘였지만, 1980년 묘역정비사업을 하여 영당, 신도비, 재실을 개축하였다. 1988. 2. 27. 국가지정 문화재인 사적 제323호로 승격되면서 1991년부터 파평윤씨 문중에 의하여 대대적인 묘역정비사업이 이루어져서 현재와 같은 장중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1993년에 묘역을 정비하였는지 묘역정화준공 기념비도 오석에 잘 새겨져 있고 윤관장군의 시비도 잘 만들어 두었다. 파평윤씨 대종회 소유이다.
** 坡平 尹氏 : 시조 윤신달은 고려 태종 때 개국공신이다. 그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잉어 전설이 있다. 경기도 坡平(파주)에 있는 坡平山 기슭에 龍淵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 날 이 용연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다. 그런지 사흘째 되는 날, 윤온이라는 할머니가 연못 한 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금궤를 건져서 열어보니 한 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채 속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윤온 할머니는 이 아이를 거두어서 길렀으며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씨가 되었다. 시조 윤신달의 5세손 윤관이 고려 숙종 때 병마도총사를 지내며,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문하시중에 오르고 영평현(파평) 개국백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윤관은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외교술에 능하여 요나라 및 송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윤신달의 5대손인 윤관의 일대기에도 잉어에 대한 전설이 나온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廣浦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떼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이번에는 장군의 뒤를 쫓던 적군이 뒤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윤관 장군에게 다리를 만들어 주었던 잉어떼는 어느 틈에 흩어져 버리고 없어졌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坡平 윤씨에서는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조선 때만 해도 상신 11명, 대제학 1명, 문과 급제자가 330명이나 된다. 오늘날 파평 윤씨의 대표적인 인물로 전 대법원 판사였던 윤일영과 윤관, 크라운제과 윤태현 사장이 유명하다.
* 沈之源[1593(선조 26)∼1662(현종 3)] 묘와 신도비 : 경기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 소재. 윤관장군 묘 뒤에 바짝 붙어 인접해 있다. 1992년 12월 31일 경기도기념물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청송심씨 대종회 소유. 봉분은 단분으로 전 부인인 증정경부인 安東權氏와 후처 정경부인 海平尹氏를 좌우에 안장한 어울무덤[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 상석 · 향로석이 있으며, 상석 전방으로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규모는 묘역 30여 평, 신도비 전체 높이 2.95m, 비 높이 208cm, 너비 1m, 두께 0.35m이다. 신도비는 묘역 하단 3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비문은 金壽恒(항)이 撰(찬)하고, 新翼相이 글과 전액(篆額)을 써서 1686(숙종 12)년에 건립하였다. 묘비의 이수 부분은 구름에 싸인 두 마리의 용이 대칭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좌의 상단에는 복련문을, 몸체에는 화문이 새겨져 있다. 심지원의 본관은 靑松, 자는 源之, 호는 晩沙이다. 沈宗췂(완)의 손자이며, 감찰을 역임한 沈첁(설)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어려서부터 과묵한 성격을 나타내 대인의 풍도가 있었다. 처음 배울 때부터 총명한 재질을 보여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웃들이 '독서가'라 할 정도로 밤낮으로 책을 읽으며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하여 1617년(광해군 9)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0(광해군 12)년 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의 族祖인 沈宗道가 大北派 李爾瞻(이첨)의 심복이었고, 당시는 심지원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大地派가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원은 大北派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승문원박사에 제수되는 등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방금 인륜기강이 무너졌는데 영화로운 환관이 제 소원은 아닙니다. "라고 하면서 대북파에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623년 3월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등극한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갔다. 인조반정 이듬해인 1624년 檢閱에 기용되고, 홍문관 著作兼 시강원說書로 있다가 예조좌랑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正言, 副校理, 校理, 獻納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27(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갔다가 돌아와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영천군수로 나가 올바른 정치를 베풀자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 공덕을 기린 적도 있었다. 1630(인조 8)년 함경도 按察御史로 나가 여진족에게 人馬를 팔아넘긴 자를 적발하는 등 호인들과의 말무역을 단속하고 육진 방어책을 진언하여 인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뒤 내직으로 돌아와서도 應敎, 執義, 校理, 副修撰 등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강화도로 피신했을 당시 노모로 인해 뒤늦게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한 적이 있었다. 이때 趙翼 · 尹啓 등과 의병을 모으려 했으나 윤계의 죽음으로 실패하였다. 뒤이어 강화도로 들어가 죽음으로써 청에 항거하려 하였으나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난이 끝나고 강화도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죄가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고 한때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불운은 계속되어 1641년 극진히 봉양하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상을 마치자 그간의 사정을 용서받고, 다시 1643(인조 21)년 탄핵에서 풀려나 洪州牧使로 등용되었다. 이때도 고을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쳐 임기를 마치고 떠나가자 많은 이들이 비석을 세워 그 뜻을 기렸다. 이후 1648(인조 26)년 이조참의를 거쳐 동부승지, 대사간, 성균관대사성, 대사헌 등의 직책을 두루 거쳤다. 효종이 1650년 즉위한 후에는 대사간에 있다가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대사헌·병조참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652년(효종 3) 형조판서로 나갔다. 이때 아들 益顯이 효종의 딸인 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왕실과 사돈이 됨으로써 효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1653(孝宗 4)년 이조판서에 있으면서 왕의 정책 시행에 대해 완급조절을 건의하였고, 같은 해 11월 正朝使로서 청나라에 갔다. 돌아올 때 중국의 비단을 하나 행낭에 들어있지 않아 평소 단아하고 검소한 면모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듬해 1654(효종 5)년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우의정에 올랐고 다시 1655년에 좌의정에 이르러 中樞府領使가 되었다. 1657년 동지사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使行하고 돌아와 이듬해 1658년(효종 9)년 가을 영의정 겸 훈련도제조에 올랐다. 1659년 5월 효종이 승하하자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院相으로서 국정을 맡고 총호사로서 효종상례의 책임을 수행하였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慈懿大王大妃의 복제문제가 발생하자 서인의 영수로서 宋時烈의 의견을 따르면서도 여러 차례 글을 올려 남인 趙絅을 적극 신원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도 계속 재상으로 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은 크게 슬퍼하여 사흘 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부의로 잣나무 관과 秘器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큰 키에 온화하고 준수한 용모를 갖춰 주위의 호감을 샀으며, 너그럽고 장중한 기상을 지녀 남을 대할 때 거리감을 두지 않았으며 나쁘다 좋다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았다 한다. 또한 효성이 깊어 부모의 상중에는 절대로 남에게 웃음을 보이지 않았고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하였다. 관직생활 40여 년에 재상으로 오랫동안 재직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산을 돌보는 데 눈을 두지 않아 청빈한 살림살이에 변화가 없었다. 또한 높은 직에 있으면서 뇌물을 금하게 하여 일체의 청탁을 멀리했고, 붕당을 지어 논하기를 꺼려하여 공무를 마치고 나면 물러와 문을 잠갔다. 비록 江華設鎭의 설치를 반대했다든지 양역의 폐해를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사족에 대한 收布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실 등 정치적으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 적도 있었지만, 청빈한 관리로서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워 국정 전반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글씨에 능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작품으로 鄭昌衍碑(글씨)가 과천에 남아 있다. 저서에 詩文集인 晩沙稿(奎7671)가 있다.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晩沙稿는 木板本(後刷) 29×19.5cm. 四周雙邊 半郭:20.6×13.6cm. 有界 9行 18字 注雙行. 版心:上白魚尾로 6권[5卷 附錄] 1冊이고, 表題는 晩沙遺稿라 되어 있다. 만사고는 1759(영조 35)년에 손자 廷最가 편집 ·간행하였다. 그 수록 내용은 {권1}엔 疏(소) ·箚(차), {권2}엔 啓(계) ·議 ·表 ·箴(잠), {권3}엔 祭文 ·家狀(장) ·墓誌 · 墓碣銘(갈명) ·시장(諡狀), {권4}엔 詩 ·燕行日錄 ·附錄 등으로 編次되어 있다. 책 끝에 정최가 1759년에 쓴 지(識)가 있다. 晩沙稿의 중심이 되는 부분은 疏, 箚, 啓, 議, 表 및 祭文 일부로 그 주요목록은 다음과 같다. 疏는 14편으로 守永川時陳情請竅疏, 請於推刷成冊上來後發送 御史箚, 請還收兪撤刑推之命箚, 因閔維重避嫌辭免箚 등이다. 箚는 3편으로 請還收李晩榮鄭 晳遠竄箚, 請與諸堂上同被罪罰箚, 請留右參贊宋浚吉箚 등이다. 啓는 6편으로 執義時請與姜 碩期等同被罪罰避嫌啓, 諫長時論弑主罪人按律處斷啓, 憲長時因丁彦璧徐必遠避辭引避啓 , 右相時因虹變寺罪啓, 庶蘗許通後通仕路啓, 各道歲幣木減除啓 등이다. 議는 4편으로 引見 時服色議, 社稷親祭時議, 宗廟祝文議, 大王大妃服制議 등이고. 表는 3편으로 冬至表, 方物 表, 擬漢朝群臣賀積甲高山表 등이다. 祭文은 3편으로 仁烈王后進香祭文, 仁祖大王進香祭文 , 豊莢君繁致祭文 등이다. 이상의 각 항목의 내용은 대부분이 저자가 官路에 있으면서 관계된 사실들을 기록한 것으로서 顯官의 한 사람이었던 沈之源의 생애를 아는 데에 도움을 주는 정도의 내용들이다. 단지 庶蘖 허통 문제, 服制 問題, 일련의 外交에 관한 기록들이 중요시된다. 沈之源은 이 啓에서, "서얼이 官路에 나와서 紀綱이 해이함으로 嚴飭하기를 바란다"고 하였고, 또 "官路에 있는 자는 軍役을 엄히 하라"고 주장하였다. 服喪問題에 있어, 1660(顯宗 1)년 2차 禮訟이 일어나자, 沈之源은 領議政으로 재직하면서 老論의 편에서 慈懿大妃의 服을 顯宗이 朞年으로 행해야 한다고 역설, 이를 관철한 「李惟 泰等獻議後議」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저자는 淸에 2차 왕래하면서 方物 등에 관한 간단한 기록이 소재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권5}에 있는 燕行日錄은 淸에 다녀 온 기행문으로 1653년 저자가 正朝使로 다녀올 때의 3개월간의 기록이다. 이것은 출발에서부터 歸還까지를 기록한 것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었다. 附錄은 閔維重 등의 祭文과 李景奭 등의 挽詩로 엮어져 있다. 跋文은 이 책 출간 당시에 그 전말을 손자 沈廷最가 기록한 것이다. 책 중간에는 더러 落張이 있다.
교통 :
갈 때는 신촌 국철역에서 경의선 문산행 통일호 열차를 07 : 10에 타서(이 열차는 서울역에서 문산 간을 06 : 00부터 1시간 간격 운행. 월롱역까지는 약 1시간 소요). 파주시 월롱역에 08시 10분 하차. 요금은 1,200원.
올 때는 윤관장군 묘 앞 버스 정류장에서 서울역 행 158-1번 신성교통이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이용. 요금은 금1,370원. 약1시간 10분 소요. 버스를 타고 오다가 다시 고양시장 앞에 내려서 벽제관터, 고양향교, 중남미문화원을 답사하였다.
★★ 1. 벽제관터(碧蹄館址)
사적 제144호.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소재. 조선 성종 7(1476)년 11월 준공된 건물이 있던 곳이었다. 벽제관은 한양을 방문하는 중국 사신들이 반드시 묵게 되는 숙소로서 서쪽의 첫 관문이었으니 지금의 김포공항 영빈관과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驛을 동반하고 있어 교통과 통신의 이용이 편리했을 객사가 벽제역에 있다 하여 벽제관이라 불렀다. 중국에서 온 사신은 벽제역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여독을 푼 다음 위용을 갖춰 입성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한양에 접어든 사절은 다시 지금의 서대문 밖 독립문 자리에 있었던 모화관에서 영접하였다. 본래 고양시의 古邑治는 벽제관에서 서북방으로 5리 정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위치로 읍치를 옮긴 인조 3(1625)년에 이곳에 새로 세운 객관이 지금의 벽제관이다. 그 당시의 벽제관은 대지 1,265평, 건물이 601평 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에 언제 다시 건물을 세웠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그 벽제관은 일제강점기 때 일부가 헐렸지만 그런대로 모습을 유지하다가 6.25사변 때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1960년 경까지도 客館門은 남아 있었으나 頹(퇴)落해 무너져버려 현재에는 객사의 윤곽과 터, 그리고 7척(尺) 간격으로 원좌주초석의 長臺石[주춧돌과 석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조선 시대에 한성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關西路, 또는 義州路, 燕行路에는 역관이 10여 곳 있었다. 역관에서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절단이 숙박 휴식하였고, 특히 벽제관은 때로 임금이 齋陵 親祭時에 숙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은 역관에 머물러 휴식하였으니, 이는 공용의 宿泊施設이기도 했다. 더욱이 이들 역관은 驛을 동반하고 있어서 교통 통신의 편의를 최대한도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벽제관은 한성에 인접하고 있었으므로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은 한성에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이 역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관복으로 갈아입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정해진 예법이었다.
이곳을 기점으로 북방에 혜음령과 동북방으로 있는 퇴패현(퇴패고개)이 있다. 그리고 서남으로 이어진 도로를 이어 임진왜란 당시 1593(선조 26 계사)년에 명나라 이여송의 구원군 군대가 평양탈환여세를 몰아 왜군을 추격 중 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른바 벽제관 싸움의 전장터 중심지가 되는 곳이 있기도 하여 많은 뒷얘기를 남기고 있다. 결국 예봉이 꺾여 화평회담을 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하던가.... 벽제관은 관서로 연로(沿路)에 설치한 첫 번째 역이었다는 점 이외에도 임금이 중국 사신을 친히 맞았던 모화관(慕華館)에 버금가는 곳으로 반드시 하루 전에 이곳에 머물러 입경하도록 된 객사 자리인 데에 보존과 복원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500m 거리에 중남미 문화원/박물관과 고양 향교가 있다.
★★ 2. 高陽鄕校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306번지 소재. 1985년 9월 10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69호로 지정되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의 제례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운 조선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고양향교는 조선 肅宗(재위 1674∼1720) 때 처음 지었으며, 창건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향교의 大成殿과 동무, 서무, 內三門 등은 조선 말기의 건축수법을 나타내는데,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고, 6.25전쟁 때 불에 탄 明倫堂, 典祀廳, 外三門 등은 1984년에 새로 지었다. 건물 배치는 前學後廟의 형태를 따르고 있는데, 앞쪽에 강학 공간으로 강당인 明倫堂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東齋, 西齋가 있고, 뒤쪽에는 제향 공간으로 대성전과 동무, 서무, 전사청이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신 곳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단청이 칠해져 있고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를 하던 강당인데,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明倫堂의 좌우에 있는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머물며 공부를 하던 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향교에서는 해마다 고양 유림에서 주관하여 공자를 제사 지내는 석전대제를 봉행한다. 행사 때만 개관하니 운이 좋으면 내부를 들여다볼 수도 있다고 하는데, 모처럼 찾아온 산꾼은 내부를 보지 못하여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 3. 중남미문화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302-1(고양 향교 옆)에 위치한다. 전화는 031-962-9291, 962-7171이다. 고양시장 맞은편(고양 종로약국) 주택가 골목을 올라가니 아담한 중남미 문화원 건물이 나타났다. 퇴직금 등 사재를 털어 개장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문화 관련 박물관인 동시에 국내 유일의 중남미관련 박물관이자 아시아 유일의 중남미 테마 박물관으로서, 중남미의 문화와 유품 생활상들을 짜임새 있게 소개하고 있었다. 개인 박물관이라 하지만 운영자가 이 박물관을 중남미 문화원 재단에 기증했기 때문에 공립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1993년 5월 3일 비영리 문화재단으로 설립 인가(외무부 장관 허가 263호)를 받았고, 1994년 10월 6일 개관하였으며, 1994년 11월 1일 박물관으로 등록(문화체육부 65호)되었다. 그 후 1996년 9월 6일에는 경기도 지정 테마 박물관으로 제96-1호로 지정되었으며, 미술관은 1997. 9. 10에, 조각공원은 2001. 11.에 개관하였다. 문화체육부 장관으로부터 우수 박물관으로 표창받기도 했다. 규모는 대지 5,000여 평, 박물관 건평 상 · 하층 300평, 미술관 건평 상 · 하층 200평. 제2회 고양 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1993년 말 멕시코 대사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33년 동안 외교관 생활 중 대부분을 중남미에서 보내고, 코스타리카, 도미니카(공), 아르헨티나, 멕시코 대사 등을 역임하고, 멕시코, 중미, 카리브와 남미 등 중남미를 엮는 4나라에서 공관장을 보내며 중남미 인정, 풍물, 문화에 심취한 초로의 李福衡(72)원장[2002년 월드컵 유치위 집행위원, 조직위원을 역임하기도 함]과 부인 洪甲標(67)씨가 현지에서 골동품시장 벼룩시장 등 북적대는 시장을 누비며 정성들여 수집한 유물 3천5백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모교인 서울고등학교에서는 ‘올해의 자랑스런 서울인상’을 수상했다. 아마 우리의 50년대 때처럼 중남미 사람들도 배가 고프니까 문화재인지 뭔지도 모르고 리어커에서 헐값에 팔았을 것이고, 이를 놓치지 않고 우리나라 대사관 부인인 홍여서님이 사들인 것이 여기서 이렇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이복형 원장이 31년 전 스페인 참사관으로 떠나며 집 판 돈으로 사두었던 경기도 고양시 고양동 야산에 중남미 문화원을 연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었다고 한다.
Maya, Inca, Azteca 문명 등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남미 각국의 찬란했던 고대문화 유산과 역사와 생활상 및 현재 중남미의 생활상을 한자리에서 일목요연하게 진수를 맛볼 수 있어서 아주 유익했다. 이 박물관에는 멕시코와 페루의 고원지대에 정착했던 인디오들이 쓰던 토기, 멕시코인의 가면 등이 가면관, 민속공예관, 석기, 목기관, 토기관의 4개 전시실에 전시돼 있고, 또 콜롬비안 토기, 테라코타, 목기, 석기, 가면 등 총 1,500여 점의 자료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각종 영상물과 전문서적도 갖추어져 있다. 공업입국으로 선진국 문턱에 와 있는 우리에게 격심한 경쟁 속에서 생존, 발전해 가려면 건전하고 균형있는 국제화가 필수적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밖을, 상대를 편견없이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들의 문화를 먼저 제대로 알고 또 우리 문화를 전달해야 착실한 관계를 기대할 수 있는데.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 바로 이 중남미문화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볼 것도 많고 교육적 가치도 큰 것 같다. 문화원 경내에 있는 볼거리들을 모두 둘러보는 데는 넉넉하게 2시간은 있어야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시간 관계상 그리 많이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여 아쉬웠다. 연인들이 데이트하기에 더 없이 아름다운 코스이고, 자녀들과 가족 나들이하기에 더 없이 좋은 교육장이며, 독특한 중남미 문화를 접하면서 이색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에 나들이 장소로 적극 추천하고 싶다. 각종 유물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나무 의자 하나, 인테리어 품목 하나하나에도 남미의 풍취를 느낄 수 있게 신경을 썼음은 물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방대한 수집 품목과 전시물의 수준도 여느 박물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으니 말이다. 도심 속 주택가에 이런 곳이 있다니 참 신기하고 여름에 녹음이 우거지면 너무 좋을 것 같다. 현대화에 기여한 유럽 일색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서구 문화와는 달리 모처럼 친근하고 동양적이며 심지어 우리 전통문화와 유사한 느낌마저 주는 중남미 문화를 만날 수 있으니 행운이라는 생각도 들 것이리라.
중남미(Latin America)는 미주 대륙에서 북미의 캐나다와 미국을 제외한 멕시코와 중미, 카리브 해역 및 남미 대륙의 제국을 말한다. 인구는 약 4억 5천만 명이고 33개의 나라가 있다. 인구 1억 5천만이 되는 브라질 같이 큰 나라에서 5만의 세인트, 크리스토퍼 네버스 등 다양하다. 약 4만년전 빙하기에 아시아로부터 욱지로 연결되어 있던 Bering 해협을 통하여 사람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B.C. 9,000년 경에는 미주대륙 최남단인 Tierra del Fuego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초기 이주민들은 멕시코와 안데스 고원지대에 정착한 Indio들이다. Indio들은 B.C. 7,000부터 농경사회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Meso-america와 Andes 지방에 국가형태의 부족이 형성되고, 16세기 초 스페인 정복이 시작되기 전에 인구 5만 내지 10만의 도시들이 형성되는데, 멕시코 Azteca 제국의 수도인 Tenochititlan과 페루 Inca 제국의 Cuzco가 대표적이다. 특히 고도의 수학, 천문학, 섬세한 건축과 고유문자를 보유하였던 멕시코 Yucatan - 중미일원의 Maya족도 값진 세계 1류문화 유산을 남기고 오늘까지 그 후손들이 존재한다.
콜럼버스가 1492년 우연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그는 서방 항해로 아세아에 도착할 목적이었음)한 것이 Indio들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극복하고 스페인 문화와 자신의 문화를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콜럼버스의 발견 후 4회의 항해 끝에 1518년 Santo Domingo에 총독부를 설치하게 된다. 이어서 1521년에 Herman Cortes가 멕시코의 Azteca 제국을 정복하고, 1533년 Francis Pizarro가 페루 Inca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3세기 여에 걸친 유럽의 식민지시대가 열린다. 그러나 중남미제국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1804년 독립한 Haiti를 효시로 대부분 19세기 초반에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왕권을 대신한 정통성의 문제와 구 식민지 체제에 집착하는 보수파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자유파의 투쟁, 중앙집권파와 분리파의 대립, 열강의 개입, 독재와 군부 쿠테타 등으로 독립후 시행착오의 악순환을 겪었다. 혁명, 폐쇄적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독재 등 악순환을 헤매다가 80년대의 민주화 과정을 거쳐 최근 정치면에서 민정 안착과 누적외채문제를 위시해 경제, 사회적 난관 극복, 경제통합, 외교의 다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과감한 개방, 자유화의 길을 걷고 있고, 이에 우리 나라와도 협력증대, 강화를 추구하고 있어 아주 중요한 지역이다.
참고로 중남미의 역사와 문화를 본다. 구대륙인 아시아나 유럽에 비해 아메리카에서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2-3만년 전으로 그다지 오래지 않다. 최후의 빙하기가 끝날 무렵 몽고족들이 시베리아에서 베링해를 거쳐 알래스카를 통해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뒤, 오랜 세월에 걸쳐 북에서 남으로 서서히 남하해 내려왔다. 당시는 사냥을 주축으로 하는 수렵에 의존했었는데, 이는 멕시코 계곡에서 약 1만년 전의 맘모스와 인골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B.C. 6000년에서 4000년에 걸쳐 수렵민의 생활은 절정기를 이루었다. 기온도 높고 강수량도 풍부했다. 그러나 B.C. 3000년 경(지금부터 약 5000년 전) 기온이 내려가면서 건조현상이 나타나자, 인류는 새로운 생활방식인 찾아서 농경을 시작한다. 농경은 B.C 7000년경부터 식물을 채집하면서 반 정착생활을 하면서 시작되었는데, B.C 5000년경에 이르러 감자와 고추, B.C 3000년경에는 원시적이지만 옥수수를 재배할 줄 알았으며, 돌절구(Metate)를 쓰기 시작했다. 한편 에콰도르에 페루에 이르는 해안에서는 풍부한 어족 자원에 힘입어 어로 생활이 시작하였으나 이들도 B.C. 2500년에서 1200년에 이르러서는 반농. 반어적인 생활형태를 띠게 되었다. 약 14개의 민족이 모두 다른 문명을 가지고 살아간 것이다. ① 멕시코 계곡을 중심으로 B.C. 1500년경부터 옥수수 농경이 펼쳐졌다. 약 500년이 지난 후 멕시코만 연안에서 일어나 B.C. 1000-600년경에 전성기를 이룬 Olmeca 문화는 '자가야'신을 중심으로 한 고도로 체계적인 종교를 지니고 있었다. Veracruz 근처의 La Venta 지역에는 Olmeca 문화의 특징인 눈을 치켜뜨고 반달 모양으로 입의 양쪽 끝을 아래로 구부린 거대한 인간 형상의 석조상, 피라미드, 검은 토기 등이 발견된다. 특히 인간과 동물의 결합상, 괴기 인간상 등은 중미인들의 사상적 근간을 이루었다. ② Teotihuacan 문화는 멕시코시티의 북부지역 분지에서 B.C.200년경에 시작되었는데, AD 100년에서 300년경에는 Piramide del Sol(태양의 미라미드)와 Piramide de la(달의 피라미드 Luna)가 세워졌고, Tlaloc(뜰랄록; 물의 신)에 대한 신앙이 시작되었다. 신전과 신관을 중심으로 하는 대도시가 이루어지고 거대한 신전이 축조되었으며, 그곳에는 새의 털을 지닌 뱀의 신인 Quetzalcoatl이 있었다. 그는 인간과 신의 중개자이며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정치적 지도자였다. 9세기 중엽 북쪽에서 온 침입자에게 멸망당했다. ③ AD 600년에서 900년경에 멕시코 고원의 남쪽에 있는 Oaxaca(오아하까)분지를 중심으로 Zapoteca족의 새로운 문명이 발생했다. 돌조각과 상형문자, 천문학이 발달하였고, 윗니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특징인 토기를 만들었다. ④ Maya 문명은 고전기와 신제국으로 구분한다. 고전 마야 문명은 AD 320년경에 시작되었고, 과떼말라의 Tikal, 왁샥뚠, 까미날퓨 등이 그 중심지이다. 석조각 등을 세우고 연호를 기록하였으며, 태양력에 의한 1년을 365일로 정했고, 춘분과 추분도 알고 있었다. 600년에서 약 200년간은 고전 마야 문명의 절정기인데, 이때 2m에서 10m에 달하는 거대한 돌기둥 위에 마야 숫자를 기록해 놓았는데, 온두라스의 Copan, 멕시코의 Palenque가 그 중심지이다. 금속기를 몰랐던 마야인은 모든 물건을 돌로 만들었으며, 천문학과 수학이 매우 발달했다. 그들은 정령의 개념을 알고, 20진법을 사용하였다. 10세기 말엽 마야문명 은 갑자기 종말을 고하는데, 그 원인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신마야 제국은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똘떼까족이 북방에서 유까딴 반도로 이동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중심지는 치첸잇싸(Chichen Itza)이고, 주신은 께쌀꼬아뜰이었다. 살아 있는 인간을 제단에 안치시키고 그 심장을 석재 칼로 도려내어 바치는 인신공양은 최고의 의식이었다. Chichen Itza와 Uxmal(욱스말)과 Mayapan(마야빤) 등 3대 도시는 마야 문명의 르네상스를 이룬다. 그러나 고전 마야시대가 정교하고 충실함에 비해 신마야 예술은 과거의 모방에 그치고 있다. 고전기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인데 반해, 르네상스기에는 추상화한 기하학적 문양이 많이 쓰였다. 카카오에서 초콜렛을, 치끌레 나무에서 츄잉껌을 만들어냈다. 천연고무 또한 중요한 수출품으로 등장했다. 후기 마야 문명은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초엽에 이르러서는 권력싸움이 극대화되어 거의 무정부 상태에 이르렀다. 16세기 초 스페인인이 이곳에 왔을 때는 이미 찬란한 마야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⑤ 페루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고대의 옥수수신인 자가야를 섬겼던 모치까족은 Mochica 문화를 이룬다. 떼오띠우아깐보다도 금속을 먼저 사용했고, 전쟁을 많이 했던 종족답게 전쟁에 대한 기록은 모치까의 토기에 생생히 남겨져 있다. ⑥ 페루 남해안의 나스까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Nasca 문화는 아름다운 직물과 토기, 미이라를 만들었다. 물고기, 짐승, 새, 식물, 기하학적 문양을 그린 토기를 대량 제작해 상업화했다. ⑦ Chimu 문화는 모치까, 나스까 주변의 고원지대에 이르는 페루 북부지역의 문화로 금속 세공, 토기등이 유명하다. ⑧ Tairona 문화는 콜롬비아 북부에 살았던 인디언으로 직물 및 무늬토기를 제작하였으며 특히 금 장신구와 동 제련의 수준이 높았다. ⑨ Teotihuacan이 멸망했을 때, 980년경 멕시코시티 북서쪽에 있는 Tula에서 Tolteca족이 번성하였다. 서기 1000년경 왕 또삘친은 개혁을 단행하다가 보수파에 밀려 망명했다. 그의 망명지가 지금의 베라끄루스에서 유까딴 반도의 마야지역인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또삘친은 께쌀꼬아뜰로 추앙받고 있었으나 그가 Tula를 떠나면서 후에 동방으로부터 다시 환도해 올 것임을 선언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로부터 500년 후 동방의 카리브해로 상륙한 스페인인들을 께쌀꼬아뜰의 환국인 양 환영한 것도 이 전설에 연유한 것이다. 위를 바라보며 누워서 머리만 들고 있는 인간의 복부 위에 그릇이 놓여 있는 모양으로 된 착몰(Chacmol) 이라는 석기제단과 5m 높이의 전사의 석주등이 Tula 문화의 특징이다. 또한 그들은 Teotihuacan이나 고전 마야 문명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경기장을 만들어 후에고 데 뻴로따 (Juego de Pelota)란 공놀이를 즐겼는데, 이는 운동이라기보다는 의식에 가까왔다. 이들은 11세기 말 내우외환으로 멸망했다. 그들은 멕시코 중앙고원 최초로 상형문자를 사용했고, 이는 마야문명과 아주 흡사했다. ⑩ Azteca 문명 : Tolteca족이 유까딴 반도로 건너간 후,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까지 멕시코 중앙 고원에는 이렇다 할 문명이 없었다. 그러나 Teotihuacan과 Tolteca 문명의 영향으로 13세기 말 Azteca족이 부족신의 계시를 받아, Texcoco호수 가운데 있는 작은 섬으로 이주해 와 Tenochtitlan(현 멕시코시티)이라는 수도를 정했다. 15세기 전반에 이르러 태평양에서 멕시코 만에 이르기까지 멕시코 중앙고원 전역을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한다. 께쌀꼬아뜰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신이었으며, 태양신을 달래기 위한 인신공양이 이루어졌다. 1520년 Azteca의 마지막 왕 Moctezuma는 껫살꼬아뜰 전설을 믿었고, 이는 Cortez에 의한 Azteca 멸망을 앞당기게 했다. 사실 Azteca라는 이름은 이 종족이 어딘가 동화속의 나라 아스트란에서 온 것 같다고 생각한 스페인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테노치까라 불렀다. 또한 나우아족 또는 Mexica족으로도 불렸다. ⑪ 멕시코 남부에서는 사뽀떼까족의 뒤를 이어 Monte Alban과 Mitla를 중심으로 Mixteca(미슈떼까) 문명이 번성했다. 그들은 금속 세공과 회화에 특이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⑫ Chavin 문화는 남미 에콰도르 지역에서 기원전 1000년에서 400년경에 발달한 초기문화로 건축과 도자기에서 뛰어났다. ⑬ Inca 문명 : 3세기 초, 만코까빡이 그의 일족을 끌고 페루의 Cuzco계곡에 도착했다. 사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초대왕 만코까빡에서 8대 비라코차 그리고 Inca까지 약 200년간은 전통 Inca제국 시대이다. 외침을 물리치고 쿠스코 계곡을 평정하고 태양신의 숭배와 농업을 주축으로 하는 Inca제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15세기 중엽, 제9대 빠치쿠치 잉카 유빵끼(Yupanqui)가 왕이 되었다. 그는 태양신의 신전을 건립하고, 우르밤바와 비루가밤바를 정복했다. 1471년 빠치쿠치가 아들 또빠잉카에게 왕위를 물려줄 무렵 잉카는 볼리비아에서 칠레에 이르기까지 약 4,800km의 대제국을 거느렸다. 잉카의 석조건축물은 최고의 수준이며, 태양신이 최고의 신이었다. 1525년 와스카르가 12대 왕이 되었고, 이때 왕권다툼으로 허수아비 13대 왕이 스페인인들에 의해 추대되었으나 1533년 11월 15일 삐사로의 쿠스코 입성으로 잉카는 멸망했다. Cuzco나 Machu Pichu는 Inca의 실존을 밝혀주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⑭ Taino족은 카리브해 에스빠뇰라 섬에 살았던 Arawak(아라왁) 인디언으로 스페인 정복 후 100년 만에 멸족되었다. 돌과 나무 공예품으로 유명하다.
이 중남미 문화원의 미술관에는 중남미 작가들의 그림과 조각전도 초청해 전시하고 있다. 서울에 화랑들이 많지만 중남미의 작품들은 상업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전시 공간을 내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 중남미의 화가들에게 공간을 빌려주고 동시에 주한 중남미 공관들의 전시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여기에 미술관을 97년 9월에 개관하였다 하니 국가도 못할 일을 감히 개인이 한 것에 대해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이 미술관을 통해서 중남미의 예술세계를 폭넓게 접하게 될 수 있으니 우리 국민들의 정서 함양에 한몫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학회, 외교단, 기업과 교육기관 등에서 관심을 가지고 많이 이용해 주었으면 좋겠고, 문화, 예술계의 모임장소로, 국민일반과 향토의 문화공간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기원드리고 싶다.
아치형 목재 현관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스페인풍의 정취가 물씬 풍기고, 인상적인 붉은 벽돌건물 두 채가 서 있고, 그 사이 넓은 정원이 보인다. 왼쪽은 박물관, 오른쪽은 미술관. 뒤편에는 조각공원이 조성돼 있다. 잘 꾸며진 정원수와 잔디, 그리고 야외 전시품 등과 함께 잘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많이 보던 서양화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야외전시장, 휴게소, 기념품점, 강의실(100석), 영상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남미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데, 잔잔하면서도 경쾌한 리듬이 흥겹기도 하지만 이국적이라서 귀가 예민하게 쏠린다. 어디선가 안데스 고산족의 구슬픈 피리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듯도 하다. 남미의 어느 공간에 와있는 듯한 착각도 불러일으킨다. 그동안 중남미문화원(미술관, 박물관)에 대하여 많이 들어왔지만 이제야 한북산줄기를 종주하는 것을 계기로 오게 된 것이 마냥 다행스럽다. 미술관 앞에 도착하니 좁은 주차시설이 만원인데, 주차관리인이 1사람 있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런데, 문화원에서는 야외 조각 공원 등 넓은 실외 공간에서는 사진 촬영이 가능하나, 빠에야 요리를 비롯한 실내의 사진 촬영이 금지되고 있음을 유의하여 협조할 필요가 있다.
개장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17시(하계인 4월에서 10월까지는 18시)까지이고, 연중무휴이다. 입장료는 성인 3,500원, 중고생 2,500원, 초등학생 2,000원이다. 개인 박물관이라서 유지비용이 많이 들어서인지 다소 비싸다. 하지만 중남미는 세계 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천연자원이 풍부하며, 바로 우리의 교역, 투자협력대상국이 되는 곳이며, 그리고 우리의 교민이 많이도 정착하고 있는 곳이기에 자못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 가보지 못하여 중남미 쪽의 이해를 부족한 것을 안타까이 여기고, 직접 가보지 않고도 지구 반대편 중남미의 문화를 우리 국민들이 느끼고 이해하도록 돕는 이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이복형원장님이 쏟은 집념과 초인간적인 정열, 헌신, 꿈을 실현해 주기 위한 탁월한 비전에 비하면 결코 비싸지 않다고 여겨지며 이해할 만하다. 우리나라에도 아프리카 박물관 등 이색 박물관들이 최근 많이 들어섰지만, 중남미문화관을 개관하신 원장님 부부에게 새삼 존경과 격려를 드리고 싶다. 서울에는 중남미 18개국이 상주 공간을 개설하고 있으나, 그들의 문화를 알리는 공간은 없어서 아쉬운 차에 이러한 공간이 개인의 힘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말이다. 한글과 영어로 유물 해설 오디오 가이드도 준비되어 있다. 단체 관람객이 미리 신청하면 중남미 문화와 음악에 관한 강의도 들을 수 있다.
출입문을 들어가니 먼저 스페인 풍으로 지어진 붉은 벽돌의 미술관 건물이 아담하고 예쁘다. 아래층까지 전시된 화려하고 강렬한 풍의 여러 현대화 작품들을 돌아보니 중남미의 또 다른 세계로 몰입된다. 난방시설이 잘되어 쾌적한 공간에서 강렬하고 원색적인 작품감상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원색의 화려한 색채와 기하학적인 문양이 눈길을 끈다. 일반적인 유화와 함께 아크릴을 깎아 조각한 뒤 색을 입히는 독특한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인디언 전통과 스페인 문화가 만나 독특한 중남미 문화를 만들어 낸 것 같다. 전시실 옆 기념품점에서는 머리핀, 냄비받침, 컵받침 등 값싼 수공예품에서 값비싼 골동품까지 중남미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물건을 다양한 가격에 구입할 수도 있다. 대부분 태양, 물, 고기 등 남미 토속 신앙과 태양 중심의 전통 사상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멕시코산인데, 구경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대부분의 제품들이 화려하고 원색으로 만들어져 흥미롭다. 멕시코, 페루 등에서 생산된 항아리나 작은 수공예품도 있고, 중남미 박물관 도록과 중남미 음악 테이프도 판매한다.
미술관을 나오니 잔디밭이 있는데, 거기에는 여러 조각품들이 서 있고, 의자도 마련되어 있어 지친 다리도 쉴 수 있어 좋다. 이어 박물관으로 들어선다. 이제 남미문화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그러나 유물 감상보다도 황금빛 태양신이 번뜩이는 툭 트인 천장과, 스테인드 글라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아늑하고 황홀한 색의 빛깔 등 이국적인 분위기에 먼저 취하여 그저 경이롭기만 할 뿐이다. 입구 양쪽에 멕시코 최초의 벽화 화가 리에고 리베라의 그림을 타일에 옮겨 그린 작품이 걸려 있다. 박물관은 제대로 표시가 되어 있지 않지만 중앙홀과 가면전시실, 민속공예실(생활용품전시실), 석기.목기실, 토기전시실, 유럽 식민시대의 가구전시실 등 5개의 전시실과 1개의 영상 세미나실(지하)로 이루어져 있어 낯선 이방인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중앙홀에는 멕시코의 석조 분수대가 있고 천장 중심에는 아즈텍 금색 목조물(황금빛 태양신)이 걸려 있다. 분수대는 여름에는 열기를 식히게 해 줄 것 같은데, 무엇보다 잔잔한 라틴 음악과 조화되어 문화원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하는 것 같았다. 금빛 태양신 상은 미소를 머금은 채 문화원 전체를 밝게 해주고 있고, 주변으로는 채광창이 있어 중앙 바닥에 있는 식물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빛을 제공해 주고 있다. 중앙홀의 사면의 벽에는 성화와 성물들 그리고 조각품들이 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도 보이는데, 문화원에서 특별 행사로 열리는 음악제 때마다 아름다운 음색을 자랑한다고 한다. 왼쪽 계단을 오르면 8개의 테이블이 놓여진 아담한 휴게실이 마련돼 있고, 입구의 오른쪽부터 5개의 전시실이 차례로 이어져 있다. 석상, 목각양식, 조각 등에서 그들만의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고대 전시물들은 남미 특유의 태양사상과 물고기 신앙, 인디오의 전통을 느낄 수 있는 반면 현대 전시물로 넘어올수록 유럽의 문화와 융합된 복합적인 느낌을 준다.
제1전시실은 토기 전시실이다. B.C. 3천년경 멕시코와 페루 고원지대에 정착한 인디오들 중 가마솥 속에서 구은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 신석기시대문화가 열리고 Olmeca와 Chavin이 초기 토기문화를 정착시킨다. A.D 300~900년 간의 Maya 고전시기문화가 유카탄 반도와 과테말라 일원에, 그리고 남미 페루 사막지대에 Mochica 문화가 절정기에 달하는데, Azteca 와 Inca가 단연 군림하였다. 금, 동을 이용한 고도의 금속문화, 피라밋 건축, 모직, 면직 및 염색기술 등 다양한 예술성을 지닌 문화재들이 정복자에 의해 Hapsburg왕조에 조공으로 보내져 신대륙의 높은 문화 수준에 왕궁의 찬탄을 일으켰다. 인디오 문화는 B.C. 1,000년 전쯤 매우 세련된 토기를 생산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콜럼버스 이전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예술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전시실에는 멕시코, 코스타리카. 아르헨티나. 브라질, 에콰도르, 페루 등 중남미 각국에서 발굴된 아즈텍과 잉카, 마야로 대표되는 질박한 중남미 옛 토기들 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주로 멕시코-중미 일대(Meso-America)의 일부 토기이다. 마야토기(A.D 550~950), 코스타리카, 파나마 일대의 Chorotega 토기(A.D 1,000~1,400), Nicoya 반도의 Metate 토기(A.D 300~700), Veracruz 지방의 Olmeca(B.C.1,000 ~500)와 Colima(B.C 100 ~A.D 250)토기 등이 진열되어 있다. 그 중 Colima토기와 Chorotega 토기, Metate 토기 등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요호아의 남상', '요호아의 여상', 품안에 수십 명의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 '다산의 여신' 등도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인물상과 많이 닮아 있어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제2전시실은 중앙홀과 연결되어 있는데, 스페인 점령 당시, 영화로운 인디오 상류문화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루이 15세와 16세의 의자와 테이블, 조각품을 비롯한 16C의 종교화가 있어 여느 전시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즉, 기독교, 무력, 그리고 부에 대한 욕망과 실험이 느껴졌다.
이어 제3전시실은 석기. 목기 전시실이다. 여기서는 중남미 고대문명의 예술과 종교의식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당시 인디오들의 영혼과 물질을 혼합한 신비성이 살아 숨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는 코스타리카의 Guanacaste-Nicoya 지방의 Metate(A.D 300~700)와 Mixtec(A.D 900~1,200) 메떼따, 특히 멕시코의 아즈테카 시대 이전인 Tolteca(A.D 900~1,200) 왕조, 수도 Tula의 Quetzalcoatl(퀘찰코아틀) 석조물과 카리브해 Taino족의 사람모양을 한 조각석기인 Cemi, 원숭이 모양의 나무 조각, 도끼, 방망이(Majador) 등 석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중남미 문명의 主神인 깃털 달린 뱀 모양을 한 석기인 퀘찰코아뜰은 당시 인디오들의 영혼과 물질을 혼합한 신비성의 상징물인 듯하다. 마야 피라미드의 돌조각, 부리부리한 눈과 두툼한 입술을 가진 조각상도 이채롭다. 따이노족은 남미대륙 북단 Amazon 지역에서 카누를 이용, 이주 15세기말 스페인 정복 당시 도미니카(공) 일대에서 고도의 문화를 개화시킨 바 있는데, 이 전시관에는 이들의 의례용 의자인 Duho가 여러 점 있다. Haiti 마호가니 조각물들과 각 전시관 사이의 복도에 카톨릭과 인디오 종교가 제설혼합된 요소를 보여주는 중남미의 종교화와 각국의 현대화, 조각물들도 감상할 수 있다.
가면전시실에는 나무, 천, 동물 뼈, 가죽, 철기, 석기, 토기 등 다양한 재료와 색채를 이용하여 축제, 카니발, 의식 등에 사용되며, 신, 마귀, 동물, 인어, 2중 가면, 죽음. 천사, 귀족, 나비 등 다채로운 모양으로 만들어진 200여 점의 가면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 박물관의 가장 큰 볼거리다. 이 가면들은 남미의 전통 사상에 입각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모습과 영혼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인디오들이 카니발 등 의식 때 쓰던 각종 가면은 높은 회벽에서 모두 나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어 언뜻 보면 섬뜩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화내는 표정, 웃는 표정, 슬픈 표정 등 저마다 복잡한 사연을 담은 얼굴들을 하고 있다. 사람살이는 어디나 비슷한가 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해서 입이 없는 '죽음의 가면'에서는 강한 그 무엇이 암시되기도 하였다. 인간은 생존하는 한 각자의 이름과 가면으로부터 숨어 지낼 수 없으며, 이러한 가면들은 우리의 형태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데, 가면은 곧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멕시코의 가면문화는 인디오들이 여러 모양의 상징적인 가면들은 영혼과 직결하는 문화로 발전시킨 것이 그 기원이다. 멕시코 동해안 지대의 Totonacs 인디오들은 가면으로 얼굴을 덮음으로써 일상생활상 잠시 자신의 정체와 영혼으로부터 해방되고, 가면을 씀으로써 새얼굴, 새로운 자신의 인간성과 영혼을 대신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면을 보면 인디오들의 가치관이 깃들어 있어서인지 묘한 일탈의 즐거움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와 숫자에서 인디오들의 상상력이 대단함을 느낌과 동시에 신비로움과 함께 경외감마저 갖게 하였다. 주로 서해안 Guerrero, Nayarit, Michoacan, Oaxaca(오하카) 지방이 주산지이다. 돌가면 중에는 Teotihuacan(A.D 450~ 650) 비취가면이 대표적이고, 통가면(Casco)은 크고 특이하였다.
제5전시실은 민속예술/공예품실(생활용품 전시실)이다. 구리로 만든 생활용기들과 아르헨티나에서 사용하는 승마기구, 20세기 초에 사용하던 축음기, 재봉틀, 다리미, 농기구, 커피 원두를 가는 기계 등 서민용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입구에는 반도네온(탱고 악기), 멕시코의 마리아치 등 인디오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 공예품이 토착 인디오 문화에서 나온 것들이지만, 특히 스페인(도자기)과 16세기 동방(Manila)과의 교역(도자기, 비단)을 통해 영향을 받은 물건들도 적지 않은 듯하여 신기하다. 특히 멕시코에 세계 민속예술 중 가장 다양하고 창의적인 작품이 많았다. 비취목걸이, 싼타클라라 데 꼬브레(Santa clara de cobre)의 동제품, 추아칸 소나무로 만든 투박한 가구(Mueble Rustico), 노리개(Muneca), 궤짝(Baut), 위촐(Huichol) 뜨개, 장수를 기원하는 생명의 나무(Arbol de la vida), 악기, 다리미, 재봉틀 등과 아르헨티나의 축음기, 반도리나(Bandolina)등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청색 딸라베라(Talavera)와 강한 황색이 교차하는 뜨락스깔라(Traxcala), 과나하또(Guanajuato)와 오하카(Oaxaca) 지방의 검은토기 항아리 등 도자기, 접시가 다양하다. 코스타리카의 곡물 빻은 기구 등도 창의적이다. 좀 더 폭넓은 정보를 원한다면 자세한 설명이 녹음되어 있는 무선전화기 모양의 도우미를 활용할 수 있다(대여비 1,000원).
중앙홀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휴게소가 있다.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어 좋다. 이국의 풍경에 젖어 언제든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약만 하면 여기에서 남미 전통음식인 '빠에야'(PAELLA)를 맛볼 수도 있다고 한다. 빠에야는 전통 스페인 요리인데, 독특한 쌀요리인데, 새우, 홍합 등 해산물과 쌀을 볶아 어우러진 것이다. 중남미에서는 이 음식을 축제 때 주로 많이 먹는다고 한다. 이 빠에야에 스테이크, 포도주, 샐러드, 과일, 커피가 함께 나오는 스페인 정식(2만 5천원)이다. 하루 전 예약해야 하고 주중(월~토) 점심 때(12시 내지 14시)만 가능하다. 커피 등 간단한 차와 음료는 3,000원선이다. 토, 일요일, 공휴일에는 스낵코너 이벤트로 따꼬(Tacos)를 맛볼 수 있다. Tacos는 멕시코 전통, 대중음식으로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져 특히 젊은이와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좋다. 가격은 6,000~7,000원선이다. 옥수수 전병인 ‘또르띠야’(Tortilla)에다 소고기, 돼지고기 또는 닭고기 등을 잘게 썰어 양파, 파인애플 등과 섞어 구어 속을 만들어 멕시코 양념(Salsa Mexicana ; 메콤한 맛)을 곁들여 싸 먹는다. 또 다른 것으로 ‘께사디야’(Quesadilla)로 치즈를 녹여 곁들여 먹기도 한다. 요리를 먹고 난 후에는 요리법 강의도 있다. 연인과 함께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따사로움을 느끼면서 정식을 즐기면 금상첨화일 듯하다. 한 잔의 차라도 마시노라면 그림 같은 정원을 배경으로 고색 창연한 골동품과 유물, 각가지 이야기를 머금은 수집품들 속에서 마치 먼 옛날의 그들과 만날 것만 같은 아련함에 젖어들게 할 것 같다.
박물관을 나와 정원을 가로지르면 야외 조각공원이 있다. 입구에 코요아칸 대문을 들어서면 산책로도 있어서 잘 꾸며진 정원처럼 아늑하다. 소담스레 꾸며져 있어 오붓한 사색의 공간으로는 아주 그만이다. 중남미 12개국(멕시코, 베네주엘라, 브라질, 칠레, 페루, 엘살바도르,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코스타리카, 포르투갈)작가들의 우수한 조각 작품들과 인디오풍의 인디헤나들의 형상들의 조각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경기문화재단 지원으로 구입한 조각 30여점이 포함되어 있다. 16명의 중남미 나라들의 조각가들에게 기증받은 60여점의 조각품들이 잔디를 배경으로 저마다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①네개의 바람(CUATRO VIENTOS) JOSE SACAL, BRONZE, 3m×1.5m×4m(2001), ②무제(SIN TITULO) CONSTANZA MAYO(칠레), 철과 철사, 2m×1.5m×1.5m(2000), ③순수한 신성 4(LAS DIVINAS4) JUAN PACHECO(페루), 대리석, 2m×2m×1.56m(2000), ④우주와의 연결(CONEXION CON COSMOS) EDGAR ZUNIGA(코스타리카), 대리석, 3m×0.4m×0.4m(2000), ⑤불의 혼(ESPORIT DEL FUEGO), GIORGIO CARLEVARO(우루과이),GRANITO,1.7m×40cm×30cm(2000),⑥즐거운노래(CANTOJUBILOSO),COLLETEDELOZANNE(베네주엘라),ERES-EPOXY, 1.55cm×55cm×50cm(1986), ⑦꾸루삐(KURUPI) KOKI RUIZ(파라과이), 적회암, 1.2m×0.8m(2000), ⑧중남미 척추의 절단(MUTILACION DE LA COLUMNA ERTEBRAL DE AMERICE LATINA) OLAG RASCO(에쿠아돌), 비산화철, 1.3m×0.65m×0.45m(2000), ⑨날으는 여인(VICTORIA-SENHORA ALADA) OSNI BRANCO(브라질), BRONZE, 90cm×50cm×40cm(2000), ⑩카르멘-빛과 희망(CARMEN-LUZ Y ESPERANZA) VICTOR GUTIERREZ(멕시코), BRONZE, 2m(2000), ⑪태양으로(AO-SOL) ARMINDA LOPEZ(브라질), BRONZE, 1.75m×0.8m×0.4m(2000), ⑫태양의 천사(ARCANGEL SOLAR) VICTOR SALAS(베네주엘라), 스테인레스, 3.6m×3.6m×2m(2001), ⑬항아리 벽(MURO DE JARRONES) JALISCO(멕시코), 스테인레스, 3.5m×5m(1999), ⑭희망(ESPERANZA) MARCO BUSRAMANTE(칠레), 화강암, 2.6m×78cm×63cm(2001) 등이 그것이다. 조각품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은 걸로 보아 그 인기는 실로 대단하다. 내가 보아도 정말로 카메라를 들고 온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나무 아래에는 멋진 디자인의 벤치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그늘을 만들어 놓은 중남미문화원측의 친절한 배려가 느껴진다. 하늘색 옷을 걸친 청동 여인상의 건강한 아름다움과 청동색 벤치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면 황홀하다. 6천여 평이나 되는 정원 곳곳에서는 중남미 문화원 이복형 원장 부부의 정성이 구석구석마다 배어 있다. 둘만의 한적한 시간을 원한다면 조각공원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된다. 고대의 신전처럼 도열한 해묵은 돌기둥 사이에 벤치가 마련되어 있다. 바위와 풀밭, 곳곳에 젖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상들이 100점 이상 놓여있는 이곳.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화원에 대해 보조금을 주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