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촌현의 치소는 정해마을이 아닐 수 있다는데...
백제시대의 정촌현이 정해마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정촌현의 치소는 어디에 존재했던 것일까? 이 문제는 유적이 있는 것도 아니요 문헌에 나와 있는 것도 아닌지라 참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다.
선사시대-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라할 고인돌은 정읍천 상류와 노령산맥(갈재를 지나는 산맥으로서) 북편의 도처에 산재하고 있고, 마한의 일국인 초산도비리국이 초산에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금강저지선을 뚫고 지금의 전북일원을 장악한 백제는 근초고왕기에 갈재저지선을 넘어 남진하고자 했으나, 險高(험고)에 밀려 결국 남원을 거쳐 남정에 성공한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백제는 새재- 서천산 사이의 현 금구와 정해마을 일대에 전진기지로서의 정촌현을 세웠다가 정읍천과 초산사이로 이동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가 있다. 그 후 통일신라와 고려에 의해 많은 석불과 석탑이 새로운 지배지에 세워지게 됨에 따라 대실마을과 장명동에도 불교유적이 남겨지지만 정해마을 근처에는 아무런 유적이 없게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신태인 백산에 있던 빈굴현과 비슷)
정읍사 가사와 정읍사 음악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정읍사 가사에는 망부석이라는 말이 없다. 이는 여인이 살아서 부른 노래이기 때문에 그러하며, 정읍사여인이 부른 노래와 지금의 정읍사음악은 결코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가사가 있는 정읍사는 어디까지나 여인이 남편을 그리며 부른 달노래이고, 수제천 등은 여인의 한을 위로 하고 기다림의 정절을 찬미하는 헌정음악일 것이므로 느리든 빠르든 개의치 말고 제3의 정읍사음악을 출현시켜도 좋을 것이다.
망부석인가, 망부상인가, 그 기념비인가?
정읍사를 국문학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에서 접근하는 방법 외에도 지리학적인 면과 거석문화적인 면, 그리고 민속적인 차원과 종교신앙적인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존의 연구는 문학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에 집중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지역사가들의 노력이 더해지고 있다.
과연 그 당시의 신앙과 민속 측면에서 정읍사에 등장하는 주인공 여인은 어떠한 종교적 반응을 보였는지를 추정하여 그 당시의 거석문화와 신앙의 일단면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장봉선선생은 정읍군지에 `비를 세웠다`고 썼는데 그렇다면 그 비는 어떤 형태로 조성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망부석 설화는 박제상전에 나오는 것인데 정읍사의 망부석 전설에는 어떻게 등장하고 있고, 그 해석은 어떤 다양한 측면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과연 굳어서 망부석이 되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망부상을 세운 것인지, 또는 기념비를 세운 것인지를 파악해 보려고 한다.
정읍의 망부석 전설지만 해도 여섯 곳
정읍지역에 내려오는 망부석의 전설지는 모두 여섯군데인데 부사치, 아양동고개, 망치봉, 승부리 월봉, 괴바라기, 망제봉 민들바위 등이 그것이다. 최근에 곽상주님은 치재를 대상으로 하여 설명한 적이 있다.
이처럼 여러 곳에 정읍사 망부석의 전설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정읍사 여인은 결코 한 곳에서만 남편을 기다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서해안과 갈재 남녘땅으로 연결되는 길목, 그리고 고사부리성과 대산성으로 가는 길목에도 갔을 것이다. 또한 소성에 있는 백제 시대에 조성된 춘수리부처님전에 나아가서 불공을 드렸을 수도 있고, 지금도 민속 종교적 기운이 넘치는 망제봉 치마바위 앞에 자녀를 동반하고 가서 기도를 드렸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무려 여섯군데에 걸쳐 정읍사 망부석의 전설이 있다고 생각한다.
달의 이미지 지닌 망월사, 월령, 월봉마을...괴바라기는 달바라기
정촌현에 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은 저 먼곳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그의 아내는 오래도록 산의 바위에 올라 달빛아래에 서있었다..... 이 내용을 통해 우리는 망월의 풍속을 읽을 수가 있다. 달빛은 사랑의 빛이고 달은 사랑의 매개체이다. 그리고 달은 내마음을 비추는 거울이고 님에게 내 마음을 전해줄 것만 같은 존재이다. 달빛이 없다면 어두운 밤이 되듯이 사랑이 없다면 그 여인의 인생은 어두운 적막일 뿐이다. 그러기에 달은 높이 높이 돋아 멀리 멀리 비추어주어야 한다.
망월사가 있었다는 망제봉, 신월마을과 월봉마을 사이의 월령, 승부마을의 월봉은 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해바라기, 별바라기처럼 괴바라기가 있는데 괴는 사랑의 고어이고 달은 사랑의 매개체이므로 괴바라기는 달바라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정촌현 치소가 어딘들 어떠하리~
정촌현이 어디에 치소를 두었든 정촌현 사람들은 정해마을에도 살고, 대실마을에도 살았을 것이며, 지금의 송산동과 내장산 주변, 장명동과 상동, 승부리와 군대마을 등등에도 분포되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 기다림의 장면을 상상을 해보자. 정촌현에 장사하는 이가 있어 멀리 행상을 나가 돌아오지 않아 그 아내된 이가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전에도 그 여인은 자주 밤늦게 돌아오는 남편을 마중나가곤 하였으리라. 달이 휘영청 밝은 저녁에 둘이는 오손도손 얘기하며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고, 비가 오거나 날이 궂으면 아내는 조바심을 치곤 하였으리라.
아내는 그렇게 쌓인 정을 그리워하며 애타게 남편을 기다렸다. 처음엔 대문 앞에서 다음엔 동구에서 또 그 다음에는 멀리 삼거리 큰 길가에서 기다리다가 어느 날인가 그 아내는 공 들이는 바위가 있는 어느 고개에 올라갔다. 그리고 일심으로 남편의 무사귀환을 간구하였다.
기다리던 아내는 남편 찾아 정촌현을 두루 헤매였을 것
그러나 남편은 소식이 없고 처절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그 아내는 남편이 다니던 이곳저곳의 시장으로 통하는 길목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게 된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해 여인의 사연은 두루 알려지게 되었으리라.
그 여인이 남편을 기다리던 여섯군데의 장소들을 그 당시에 있었을 법한 대표적인 시장과 연결해보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수가 있을 것이다. 당시의 큰고을이던 고부(영원)로 가는 길은 망치봉 혹은 치재, 김제 벽골이나 만경은 부례 혹은 괴바라기, 태산은 승부와 싸리재, 빈굴과 금구는 괴바라기, 순창은 아요현과 월령, 새재와 갈재는부사치와 월령 등으로 다양하게 엮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여인 관련 여섯군데, 각각 당시 대표적인 시장과 연결되는 길목이었을 것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달노래를 불렀던 그 여인이 죽은 뒤 후인들은 망부상을 세워 그 뜻을 기리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으리라. 치마띠를 두른 듯한 군대마을에서 망제봉의 치마바위와 괴바라기가 있었다는 곳을 바라보며, 일제와 새마을사업기의 미신타파운동시에도 몰래 당산제를 지냈다는 괴바라기 주민의 증언을 가슴에 새겨본다.
내년에는 군대마을 당산제에서 정읍사여인을 기리는 다음과 같은 헌시를 읽어 봄이 어떠할까?
달아 높이 돋아라
돌아 바위야 오래도록 변치 말아라
님이시여 우리들을 지켜주소서......
세월은 흘러갔고 망부석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뜻은 오늘에도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