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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육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늘날 교육은 무엇이 문제인가?
사회는 복잡하고 보이지 않는 계층이 수없이 많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은 모두가 각각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서다. 그러다보니 모든 일들이 자기들의 입장과 배치되면 잘못된 것으로 간주한다. 개혁이나 변화가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일로 인하여 저쪽이, 저 일로 인하여 이쪽이 손해를 본다면 서로는 싸울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자기 몫을 차지하려는 생각에서. 교육도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시장원리를 따르게 된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서 편히 돈 버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긴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액수가 지나치게 높은 것이 문제다. 세상의 어느 일 할 것 없이 소중하지 않은 일이 없다. 넥타이 매고 연구소에 앉아 일하는 이가 트럭 몰고 물건 나르며 고층 아파트 배달을 하라면 하루도 못하고 나자바질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받는 보수가 그네들 보다 높아야 한다는 논리는 옳지 않다. 또한 똑 같은 일을 하면서 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이다 하여 임금의 차이를 두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러면서 정규직이라 하여 매년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사분규를 밥 먹 듯 한 이들도 잘못되었다. 임금 인상은 물건 값 인상으로 물가상승을 부채질 하며 가난한 사람은 등이 터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허리 졸라매어 적금 부어 차 한 대 사려고 발버둥 치면 차 값은 오른다. 그러다 보니 할부 사고. 할부로 싸니 이자는 오르고. 빈곤은 악순환 되기 마련이다. 이제는 시민이 나서서 월급 많이 받는 이들이 노사분규를 할 때 같이 나서서 시위를 하던지 불매 운동을 하던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면서 비정규직 보다 더 많이 돈을 챙기는 것은 강도짓이 아닌가 하고 의문이 간다.
이러한 모두가 교육의 문제점으로 여겨진다. 학교교육, 회사교육, 노동자 교육, 경영자교육, 교육이 문제다.
그 중에서 학교교육이 더 큰 문제다.
교육 받은 자가 받지 않은 자보다 배품과 봉사, 이웃과 어려운 이를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넓어야 할 텐데 더 자기 몫을 많이 채우려 하다가 보니 다양한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하면 죽는 것처럼 생각하고 교육비를 쏟아 붓는다. 교육의 근본 목적은 교육을 받은 자가 받지 못한 자보다 인간성이 풍부하고 아름다우며, 남을 위해 배려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따뜻한 정이 넘치도록 하는데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진 것이 많으면 배고픈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미덕도 마땅히 갖고 있을 것이며 사회 질서나 정해진 규칙, 더 나아가 법을 준수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육은 목적보다 삶의 수단이 되었다. 살아가는데 교육이 하나의 방편이 되다보니 잘 받은 교육은 편하고 넉넉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작은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 사생결단으로 싸움을 하게 된다. 공교육이 튼튼해도 사교육은 판을 치게 되어있다. 학습현장에서 진 사람은 패배자로 낙인 찍혀 희망을 접거나 꿈을 잃고 만다.
그러다 보니 대학 입학시험에서 자기가 원하는 만큼 결과를 얻지 못하면 삶을 포기하기도 하는 이가 간혹 있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사자가 먹다버린 살점 한 덩이를 이리떼가 몰려와 서로 먹겠다고 아귀다툼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생존과 관계가 있으니 한 점이라도 얻어 걸치려고 하는 것인지.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이보다 심성이 착하고 올바르며 이웃과 남을 위해 배려하고 베푸는 마음 씀씀이도 넉넉할 것이다. 자기 몫보다는 남의 몫을 중시하고 많이 가지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데 머뭇거리지 않고 나눔을 실천할 것이다.
사회개혁이나 변화는 자기 몫을 포기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시장 원리에 의해 강자가 유리한 쪽으로 설 수 있도록 정책이나 정치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 예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만 해도 그렇다. 똑 같은 일을 하면서 임금을 많이 착취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초등학교 수학 논리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임금을 조금만 양보하고 나눔을 베풀면 쉽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영원한 숙제로 만들어 버린다.
학교 사회도 가만히 들려다 보면 교육개혁을 외치는 자들이 진정 학교를 사랑하고 학생을 사랑하는 정신이 담긴 자들의 소리인지 의문스럽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다양한 소리를 한데 묶어 하나의 아름다운 조화의 교향곡으로 연주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정치지도자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모든 이들이 연주할 수 있는 자질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교향곡이 연주되는 데 혼자 빽빽거리고 있으면 여간 거슬린다. 이 때는 해당 연주자를 끌어내야 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가고 오고 있는데 혼자만이 이리저리 가다보면 부딪히며 서로 불편할 것이다.
학교교육에서도 자기의 실적이나 업적을 쌓기 위해서, 사람들이 변화를 요구하다보니 차별화를 위한 변화나 개혁으로 잘못 길을 가는 경우도 간혹 있을 있다.
한 때 학교 사회에서 열린 교육이라고 해서 난장판을 친 적이 있다. 그 때 열린 교육한다면서 인적 물적 변화를 요구했다. 인적 변화를 꽤하기 위해 열린교육 교사 연수에 교육과정 재구성 방법, 열린 교수학습법, 등을 전국적인 단위로 지역청별로 실시했다. 열리교육이 교육청 평가항목으로 들어오니 평가 결과를 잘 받기 위해 실적 쌓기에 열을 올렸다. 열린교육 한다고 좁은 복도에 아파트 입구에 버려진 책장이나 책상이 학교로 들어와 구석마다 자리를 잡고 열린 공간이라 해서 탁자나 책꽂이, 그룹 모둠방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 때 팔려 나간 고무깔판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초등학생이 바라보아도 우스울 짓을 하고는 그게 열린 교육이라면서 입을 벌리고 다닌 사람들이 있었으니 부끄러울 일이다. 나중에 치운다고 쓰레기 처리비는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본인이 연구부장으로 있을 때 시범학교를 운영결과를 발표하게 되었는데 시범주제가 열린교육과 전혀 관계가 없지만 참관자들이 열린 교육냄새가 나지 않으면 선진교육으로 나가는데 뒤쳐진다고 하면서 열린 공간을 당장 꾸미라는 지시를 받았다. 발표 며칠 앞두고 복도 코너마다 꾸민다고 법석을 뜬 일이 생각난다. 그 때 열린 교육 주장한 학자나 실천한 행정가들은 아무도 그 뒤에 책임진 이가 없었다. 학생들만 열린 교육 시범 대상자가 되어 학력이 떨어지는 불행을 안게 되었다. 지나치게 난발한 학습지, 학생 개인 포트폴리오, 이들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교사는 편하게 학생은 죽을 맛으로 학교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포트폴리오도 프로젝트 학습이나 학생 개인 연구과제 실천을 위한 과정을 기록한 실적물로 채워져야 할 일인데 일회용 학습지를 끼워 넣었으니 무슨 공부가 되겠는가. 컴퓨터에서 뽑아온 자료를 색연필로 칠하고 붙이고 하여 끼워 둔 것이 잡다한 자료 수집이지 그걸 열린 공부라 하겠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지금도 보면 어설픈 교육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육과정을 철저히 운영하고 그 결과를 정확히만 평가하여 피드백하고 재학습을 시키면 학습은 그것으로 끝나야 한다. 인간은 능력의 차가 있기 마련이다. 그 능력의 차를 전부 줄여서 똑 같이 한다는 것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신을 믿어도 모두다 천국에 간다고 하지 않는다. 믿어도 어떻게 믿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이처럼 공부도 가르친다고 해서 똑 같이 될 수 없다. 다중지능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능력은 모두 다 다르다. 말 잘하는 이, 글 잘 쓰는 이, 수학 잘하는 이, 과학 잘 하는 이, 체육 잘하는 이, 체육 중에서도 배구냐 농구냐, 수영이냐의 문제가 있듯이 모두의 능력을 똑 같이 만들어 준다는 것은 신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이를 똑 같이 만들어 보라고 하는 것도 문제다.
교원 평가는 학생들의 학력 진단과 결과 평가가 정확하면 교원의 능력을 정확히 잴 수 있다. 교사 스스로도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단과 결과 평가가 공정하고 정확히 이뤄지길 바래어야 한다.
게으른 교사와 같이 싸잡아 욕을 얻어먹을 필요는 없으니까.
교육부나 교육청에서도 교원이 학생을 잘 가르치면 되지 학생들이 어떤 대회에 참가해라, 어떤 공문은 반드시 보고해라. 어떤 것들은 꼭 실천해라. 무슨 지시가 어떻게도 많은지 그 지시 이행 하느라 학교교육이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재량활동이라면서 학교재량이 아니라 교육청 재량으로 반드시 무슨 내용을 배당된 시간만큼 이행해라. 그래놓고는 말만 재량이지 재량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전인교육 시킨다면서 교과목은 아니지만 교육과정 시간 수가 늘어났으니.
진정한 교육은 교육과정을 알차게 운영하여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얻도록 하여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요즘은 영어가 난리다. 영어교육에 쏟아 붓는 사교육비뿐만 아니라 공교육비도 엄청나다. 글로벌 사회에서 영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꼭 필요할 것이다. 외국 농산물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국내 농산물 생산자도 영어를 알아야 한다는 논리는 그럴 뜻 하다. 하지만 기업형 농사가 아닌 이상 영어가 과연 필요하겠는가. 시골서 초등학교를 나와 수박을 기르는 어떤 친구는 경험과 농촌지도소에서 우리말로 가르쳐 주는 영농기법을 듣고 맛있는 수박수확으로 매출이 연 2천만 원 정도는 된다고 한다. 겨울이면 호박농사를 지어 또 많은 수확을 올리고, 벼 수확에 모두 얻는 연 수입이 중산층은 된다고 한다.
공사장에서 돌을 나르거나 시멘트를 치는 일에 영어가 필요하겠지요. 자원이 부족한 나라로 인력을 외국에 송출 했을 때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로 어디 외국에 나가 일 할 경우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본다. 기업에도 영어가 꼭 필요한 부서가 있을 것이다. 생산직도 영어를 알아야 기계를 다루고 외국 정보를 수집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창조적 물건이 만들어지겠지만 이는 기술을 담당하는 이들의 몫으로 돌이면 될 것이다. 그래야 역할 분담도 되고 서로 공생 차원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니까.
영어공부, 온 나라가 영어판이라 어린 애들 사설 영어학원이 대학생 학비보다 많다고 하니 웬만큼 벌어 애들 교육시키겠는가가 의문이다. 그래놓고는 애 낳으라고 홍보하고. 영어가 필요하지만 국가가 앞서서 영어가 꼭 필요하니 영어교육이 국가의 장래를 바꾸는 것처럼 과제로 선정하여 추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거기에 맞춰 시장은 따라가기 마련이다. 영어 관련 사업은 성장하고 성장한 산업은 수익을 맞추기 위해서 홍보하고, 그 홍보를 본 학부모는 꼭두각시처럼 따라가고, 학부모가 따라가니 학습부담 줄인다고 영어공교육비 증액하고 , 영어공교육비 증액은 국민세금으로 채우고, 국민 세금으로 채우니 없는 이는 허리가 휘고, 빈곤이 악순환 되기 마련이다.
학교마다 영어체험실이다 하여 쏟아 붓는 돈이며, 원어민 강사 채용 인건비며, 방학 때에 실시한 단기 영어학습방이라 하여 지원한 돈이며, 영어 콘텐츠 설치비며, 그 비용을 따져보면 엄청나다.
초등학교에서는 자연스럽게 영어를 가르치면 될 것을 영어경시대회다. 영어말하기 대회다. 영어단어인증제다 하여 대회를 연다. 이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영어 학습 과열현상을 초래한다.
학부모는 남보다 더 한 발 앞서기 위해 사교육에 치중하게 되고 비용을 쏟아 붓는다.
어떻게 보면 정책 결정자나 입안자의 손끝에 따라 춤추는 꼴이 된다,
진정 깨어 있는 학부모라면 연대하여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고려하여 토론과 대안을 찾아 일이 결정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학교교장이 학생 가르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학교재정을 늘인다고 기업과 학교가 결연을 하여 재정을 끌어들이라고 한다.
학교와 기업이 윈윈 할 일이란 없다. 대학 쯤 되면 인력을 양성하여 기업에 지금 바로 보탬이 되거나 산학협동으로 기술을 개발한다는 일들이 있지만 그 이하의 학교에서는 기업에 줄 도움은 없다.
그런데 일선 학교에 공문을 내려 보내 그 실적을 보고해라, 그 결과를 서열로 세우고 있으니 비열하다.
학교마다 환경이 다르고 조건이 다르다. 들어보면 어떤 곳은 가만히 있어도 큰 액수의 돈을 척척 갖다 주는가 하면 본인이 있는 곳은 온갖 노력을 해도 다 합쳐봤자 그런 곳의 한 곳에도 못 미친다. 큰 액수를 모금하면 표창까지 하니 이상한 노릇이다. 세상에 돈이 좋은 모양이다.
어렵게 돈을 모으는데 위에서는 돈이 넉넉한지 다문화 가정 자녀교육비다 하여 담임이 자기반 학생을 가르치는데 백이십만원이란 돈을 쏟아 붓는다. 물론 담임이 가르칠 때는 위에서 지시한 대로의 프로그램이 있지만. 그러나 그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면 평소에 하고 있는 것을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신경 써 주는 것인데. 차라리 다문화 가정에 재정적 지원을 하여 받고 싶은 방과후 교육과목수를 늘리거나 학교에 개설된 과목이 아니라면 학원수강보조비를 주던지. 교사가 자기반 학생을 방과 후 별도로 상담하고 가르치는 일에 돈을 쏟아 붓는 것은 엄격히 따지면 교사의 복수직업을 허용하는 꼴이다. 교사 과외로 이는 법에 위배 될 것으로 본다. 예산이 넘쳐나 이렇게 하면서 외부로 부터 돈 일백만원도 안 되는 것을 지원받기 위해 학교교육보다 우선시처럼 여겨지는 일에 열정을 쏟아야 하는지 의문이 간다. 그 지원받은 돈을 제 때에 쓰라며 공문을 내려 보내니 이 또한 학교경영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안 모우는 게 편하지. 돈을 아무렇게나 쓸 경영자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는 게 시스템이다. 위에서는 그걸 학교재정 확충의 성과 자료로 내 놓는다. 학교장은 가르치는 본연의 활동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교육청에서 학교 현장에 쏟아 붓는 돈이 올바른 취지에 모두가 희망하는 올바른 재정집행인지를 학부모로부터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각 학교마다 균등하게 재정 집행을 했는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다문화 가정 학생을 지도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짜고 예산을 집행 했다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절실한 일이며 그 성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혜택 받은 가정 부모가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육 현장이 상급 기관의 평가를 잘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략하는 한 변화를 했지만 진보는 절대로 없다.
진보 없는 학교개혁과 변화는 모래성에 쌓는 성으로 남을 뿐이다.
결정자들은 자기 욕심이나 자기 과시를 위한, 자기 실적이나 업적으로 기리기 위해 교육을 개혁해서는 안 된다. 진보를 위한 개혁과 변화를 해야 한다.
위험한 변화와 개혁은 사회 갈등과 치유할 수 없는 이념 대립만 불러올 것이다.
우리 교육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 해법을 찾아보고자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교육자와 교육당국자, 학습자인학생과 그 보호자인 학부모, 사회 환경적 측면에서 공교육외의 교육기관 역할을 하는 단체나 학원을 들어 분석해 보겠다.
첫째로 교육당국부터 논하면 교육당국으로 위에서는 장관이 있는 부처와 교육감이 있는 교육청, 교육장이 있는 산하 교육청이 있다.
교육부에서는 지나치게 교육정책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시대와 사회가 변하고 구성원의 생각이 바뀌면 개혁이나 변화를 가져야 하겠지만 선진제도가 좋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 나라마다 특성이 있고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소나무가 아름답지만 열대지방에서 자랄 수 없듯이 제도도 마찬가지다. 개혁이나 변화를 시도하다보면 그기에 따라가는 수요자는 곤혹을 치르기 마련이다. 제도가 바뀌면 새로운 직종이나 새로운 산업이 생겨 국가발전의 한 축은 살아날지 모르지만 따라가는 수요자는 비용지출이 많아 힘들게 된다.
대학 입학 사정관제도 좋은 제도이다. 이 제도가 모든 대학 입시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여기지만 여기를 맞추기 위해 새로운 교육산업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새로운 교육산업이 생겨나면 날 수 록 비용지출은 늘어나게 된다.
학생들의 학력을 포괄적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 논술능력이 어떻고 영어를 잘해야 하고, 창의성이 있어야 하고, 수능점수가 아니라 대학 수능은 등급별 점수에 사회봉사, 각종 대회행사 참여, 시민행사 참여, 지역문화행사참여, 동아리 활동, 적성 검사 결과 등을 망라하여 사회 구성원으로 진취성이 있는지를 대학에서 면접으로 뽑으면 될 것이다.
수능점수 한 점을 높이려고 족집게 학원이 생겼다고 하더니 알고 보니 시험지 유출이란 큰 부정이 있었다. 해당 연도에 해당학원에서 학원수강을 받은 학생은 대학입학취소를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학력을 교과목 이수 결과에 의한 평가 결과의 점수만을 인정하다보니 학원 과열이 생긴다. 초등학교만 나와도 중소기업회사를 차리고 경영하는 사람이 많다. 대학 나오고도 도전하기 힘든 일을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과부에서 하는 일이 하위 기관 감독하고 서열세우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위 기관의 일을 컨설팅해주고 지원하고 권한 위임으로 살맛나게 일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라에 문제가 생기면 공문 내려 보내어 보고해라, 조치해라, 안되면 주의 조치하고 결과는 서열세우고 하다 보니 따라가느라 치마 두르고 양복입고 고무신 신고 구두신고 야단 법석이다. 결과가 잘 나오면 잘했다고 재정 지원 더 주고. 더 받으면 큰 공으로 내 세우고.
평가는 학부모나 학생이 해야 할 일이지 교과부가 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교육문제를 학교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책은 버려야 한다. 그 한 예로 청소년 단체 어린이 활동은 일반 수련원에 맡기어 그네들이 학교에 와서 년간 프로그램에 따라 지도를 하고 자기들 수련원에서 단체 수련을 실시한다면 잡다한 교원 업무가 사라질 것이다. 학기초가 되면 청소년 단체 업무 맡을 이가 없어 곤혹을 치루며 맡은 이에게는 인센티브로 승진 가산점을 주고 하는데 이럴 필요가 있을까 한다. 학생은 단체 활동참가 인증을 하면 될 것이다.
둘째, 교육청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받은 프로젝트나 아젠다를 받으면 차별화 한다고 별 짓을 다하다보니 일선 학교에 내려 보내는 것은 교육과정만 충실히 이행해도 벅찰 일인데 외적인 일에 지나치게 따라갈 수밖에 없다. 무슨 대회에 참가해라, 어떤 일에는 의무적으로 사람을 보내라, 무슨 행사에는 자발적이지만 반 강제적으로 참여를 독려하고, 학교는 독창적이고 학교 특성을 살려 경영을 할 수가 없다. 3년마다 받는 평가가 항목이 있으니 온갖 음식을 다 파는 음식점처럼 메뉴를 써 붙여야 하니 맛이 제대로 살아날 이유가 없다.
교직구성원 수에 따라 실행에 있어 근무부담으로 여겨진다.
특색 있는 부분만 평가를 하면 될 일이지 그렇지 못하다보니 늘어놓는 교육이 된다. 늘어놓으면 깊이가 없고 얕게 흘러가는 강바닥 물처럼 소리만 날 뿐이다. 학부모가 학교를 평가하여 도저히 학교경영이 학생들 교육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하면 해당 학교장과 교사에게 따끔한 경고를 주어야 할 것이다.
학교예산 배분에 있어 특별예산은 학교 방문한 기념이나 선처를 부탁하면 주는 자기호주머니에서 내 놓는 선심용 예산이 아니다. 국민이 내는 세금이라 고루 배분되고 집행되어야 한다.
셋째, 일선 학교에서는 학교장 책임 경영이 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 학교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지시 감독에 따르는 일이라면 책임 경영이 안 된다. 주어진 일만 찾아 하면 될 터이니. 목표중심 하에 년 단위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 달성을 평가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행하여야 한다. 이행 여부는 정확한 진단에, 정확한 결과평가로 이루어지도록 하며 퇴보한 학급, 학교경영은 경고가 필요하다. 구차하게 사무감사 하느라 골머리 앓지 말고. 교사는 수업에 전념하고 교장은 수업개선 마인드를 살려 수업이 신나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수업을 즐겁고 신나게 할 수 없는 경우는 학부모들이 가감하게 전보 건의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때는 학부모 대표나 운영위원장이 해당 교원에게 사전 경고를 할 필요가 있다.
전교사와 학교장이 짠 학교의 중대 목표를 학부모 앞에서 학기초에 안내하고 학기말에 평가 받아야 한다. 설문지 형식으로 가정으로 보내지 말고 학교에서 날을 잡아 학부모들이 모여 교사와 교장 모두를 평가하고 익년도 대책을 세운다.
학부모 명의로 경고도 할 수 있는 제도로 바뀌어야 한다.
학교는 스스로 공부하는 공부방으로 자릴 잡아 학생이 언제든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묻고 가르치고 답하는 편안한 곳으로 머물 수 있게 하여야 하며 스스로 머물러 공부하는 어린이에게는 학생 인센티브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자기학습능력 몇 점을 받았다는 인증제처럼.
넷째, 학생 측면에서는 담임교사의 지시나 안내 사항을 철저히 이해하여야 한다. 학생이 교사가 가르치는 일에 따르지 않는다면 성과는 오르지 않는다. 톱니바퀴에서 톱니 하나가 제멋대로 돌면 그 기계는 못 쓰게 된다. 못 쓰는 기계는 당장 교체해야 하듯이 한 학생이 교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해당 학부모가 학교에서 노력봉사를 하던지 그기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치를 가해 학생이 학습활동에 참여할 수 잇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학습권도 중요하지만 교수권도 중요하다. 인정 못하는 교수권은 허수아비와 같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담임교사 늦게 왔다고 꾸지람을 선생님 보고 눈을 부라리며 달려드는 태도에 꼴 쳐보는 태도는 괜찮다는 말인가. 그것도 공부 잘하는 어느 과학고 학생이라니 더 가당찮다. 공부와 예절은 상반되는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학습활동이 학생들에게 우선시되어야 한다. 쉬운 말로 숙제 안 해 오는 것도 학력 점수에 보태어야 한다. 학력이 교과 성적은 등급별로 하고 다양한 사회봉사, 각종 대회행사 참여, 시민행사 참여, 지역문화행사참여, 동아리 활동, 적성 검사 결과 등을 망라한 것으로 인증하도록 한다. 따라서 학교 제도도 이를 뒷받침해야 할 것으로 본다.
학부모는 교사의 말을 신뢰하고 학교교육을 중시하고 따라야 하며 교사의 가르침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학교에 와서 당당하게 상담을 요청해야 한다. 이때는 교장실에서 학부모, 교사, 학교장, 더 나아가 교감도 참여하여 상담을 하고 대안이나 대책을 수립해 나간다.
인터넷에 올려 서로 불신하는 자세는 학교교육을 오히려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
학교는 학생, 학부모, 교사, 학교장 만들어가는 하교여야 아름다운 학교가 된다. 학교의 문제를 학교 밖에서 논하면 제 얼굴에 침 뱉는 일이다. 자녀가 집 밖에서 부모 욕하면 자기 가정 자랑거리가 될까요.
다섯째, 보조 학습기관이나 학원은 학생교육을 보조하는 기관으로서 학교교육을 우선시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 돈벌이에 눈이 멀어 학교교육을 질책하고 헐뜯는 일은 서로가 학생들에게 신뢰는 잃는 일이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각에서 너도 살고 나도 살아야 하는 생각으로 바뀌어야 한다. 족집게 학원이라면서 교사를 유혹하여 문제지나 빼 돌려 특별과외를 하고 비싼 돈을 챙기는 것은 도둑질이 아닌가.
학원은 학교에서 부족한 공부를 채워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서로 과열 경쟁을 하여 잘 가르치는 학원으로 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은 비신사적이며 사회를 힘들게 하는 기생충이다.
학생들의 다양한 배움의 욕구를 교과 외적인 측면에서 방과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 정규교과는 보충의 차원이나 학교공부를 받지 않는 학생을 상대로 특별 커리큘럼을 짜서 가르쳐야 한다.
시장경제원리에 의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말고 국가 장래를 걱정하는 마당에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학원이 없으면 그 곳에서 일하는 인력을 흡수할 곳이 없으니 살릴 필요는 있다. 하지만 학원은 학생을 가르치는 사교육기관이라 볼 때 공익성이 있음으로 해당 기관에 대한 세무감사와 교육과정 감사제도가 생겨 철저히 관리 감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시장원리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하는 틀에서 학원비 과다 징수가 법률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학원 평균 강의 수강료에 비례하여 수강료 책정 기준을 정하여 감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연차적으로 물가 상승분에 비례하여 규제를 하면 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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