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실은 조선시대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국가에서 설치한 잠실도회(蠶室都會)가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잠실이란 지역의 이름이 생겼다. 뽕나무가 무성했던 그 잠실이 초고층빌딩의 숲으로 변해버렸다.
잠실의 급격한 변화는 풍수학상으로는 이미 예견된 것이라고 한다.
"남산 서쪽 부문이 누에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잠두봉이라고 합니다. 누에라는 것이 맹목적으로 뽕을 갉아먹고
어떤 경우에는 무지막지하게 먹어대기만 한다 이야기를 할 수 상황이기 때문에 역시 잠실의 도시화 개발 발전은
그런 식으로 되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풍수학자 최창조교수의 진단이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벽해가 아니라 아예 천지개벽의 수준으로
'확 바꿔버린' 잠실이다. 그 잠실은 지형상으로도 그렇고 공간 형태상으로도 가장 변화가 많았던 곳이다.
본래 잠실은 조선초기까지 뚝섬에 이어진 반도였다. 한강은 지금과는 달리 광나루 쪽에서 직선으로 흘러가는
지금의 흐름과는 달리 잠실대교 동쪽에서 석촌호수로 흘러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쪽으로 흐르는, 반타원형을 이루며 흘렀다.
그러던 것이 중종 15년(1520)에 큰 홍수가 나고 난 뒤 지금의 광나루 아래에서 뚝섬 방향으로 샛강이 생기면서 섬이 되어버렸다.
이 샛강을 사람들이 '새로 생긴 내'라 하여 '새내'라 부르고 한자로 신천이라 한 것이다.
잠실 섬은 을축년 대홍수 이후, 강북에서도 강남에서도 나룻배를 타지 않으면 가기가 어려운 낙도이다.
해방 이후에도 도심 속의 낙도인 잠실섬의 딱한 사정을 다루는 기사가 있다.
비만 오면 섬이 거의 다 물에 침수되고 교통수단은 나룻배 한 척이며 이곳의 '신천 국민학교'는 서울 시내에서 가장 인원수가
작은 학교라 한다. 1962년 7월 경향신문 기자가 신천 국민학교에 취재하러 갔다온 후일 담이다.
그 학교 교장이 개교 3년 만에 맞는 첫 손님이라며 울면서 계란 한 알을 대접하여 기자도 그만 목에 메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학교는 1959년에 자양국민학교 신천 분교로서 문을 열고 1961년에 신천국민학교로 독립하여 인가받았던 것이다.
1965년 12월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2천여 잠실 주민들은 나룻배 사공이나 모래톱 채소밭 등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으며,
신천국민학교의 불쌍한 학동들은 강 건너 아차산 자락의 워커힐 호텔의 불야성을 밤마다 처량하게 올려다 보고 있으니
이 '낙도의 학우'들을 돕기 위한 "학우 돕기 운동이라도 펼쳐 주었으면" 이라고 교장 선생님이 이야기하고 있다.
워커힐 호텔은 수년 전인 1961년에 건설을 완료하고 이때는 활발히 영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서울에 살고 있음에도 한 번도 전화기를 본 적이 없어 전화기를 "저절로 소리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잠실섬 전체에 전화기 하나가 없었던 모양이다.동사무소도 우체국도 파출소도 없고 우편배달부도
섬을 못 건너갈 때는 발길을 돌린다 한다. 그리하여 지난 여름의 수해 때는 SOS를 알릴 수단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며
죽기만 기다리다 미군 헬리콥터가 출동하여 다들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잠실섬의 어린이들은 TV는 사람 나오는 기계, 백화점은 시장, 목욕탕은 수영하는 곳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비행기를 타 봤다"라고 자랑하는 기막힌 현실이라고 기자가 이야기하고 있다.
1971년대 잠실종합개발사업이후 잠실섬은 해체되어 서울에서 가장 큰 변화를 몰고온 초고층빌딩이 밀집된 서울 동부의
국제역사관광문화도시로 탈바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