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딸 화평옹주(和平翁主1727~1748 )다.
화평옹주는 영빈 이씨 소생으로 사도세자의 동복(同腹) 친누이다. 그가 1748년 갑자기 죽게 된다.
"1748년(영조 24) 병에 걸려 위독해진 화평옹주가 가인(家人)을 시켜 영조에게 '다시 천안(天顔)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하자, 영조는 옹주의 집으로 바로 거둥하였다. 그러나 화평옹주는 끝내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영조는 빈소(殯所)에서 통곡하면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이 날 날씨가 매우 더웠는데도 영조는 환궁하지 않고
밤을 새웠다."(『영조실록』 24년 6월 24일)
영조는 화평옹주의 상차(喪次)에서 가까운 창덕궁으로 잠시 이어한다.
사랑하는 딸 화평옹주의 상차에 자주 들려 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어를 한 것이다.
그때 영조는 경덕궁에 있었다. 그는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덕궁은 사도세자에 맡긴다.
임금과 왕세자가 서로 떨어져 있을 때 분조(分朝)를 차린다. 경덕궁에 분조를 꾸렸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최측근에서 모시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위수(衛率)에 겸재 정선을 임명한다.
영조가 그만큼 겸재 정선을 신임하였다는 이야기다.이때 사도세자 나이 14살이었다. 영조는 경덕궁을 떠나면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사도세자를 맡겨야 했다.가장 믿을만한 사람으로 73살의 겸재 정선을 선발한 것이다.
위수는 종6품이지만 가장 중요한 자리이다. 늘 사도세자의 곁을 지키는 위수에 자신의 그림 선생 겸재 정선을 앉힌다.
겸재 정선은 사도세자에게 그림을 가르쳤다고 한다.사도세자는 그림에 호기심이 많았고 그림 재주도 뛰어났다.
사도세자는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다.꿈속에 본 황룡을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그렸는데 아주 출중했다고 전한다.
영조가 겸재 정선을 만난 것도 14살 때였다. 영조는 일부러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분조는 5일만에 끝난다.
화평옹주는 1727년(영조 3년)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으며, 1738년 반남 박씨 박명원에게 시집갔다.
박명원은 박지원의 재종형이다. 그가 178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육촌 동생 박지원을 데리고 갔다.
이때 박지원이 쓴 작품이 그 유명한 ‘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영조는 영빈 이씨의 딸들을 매우 아꼈다.특히 품성이 좋은 화평을 총애해 사위와 함께 궁궐 안에 살게 했다.
화평옹주는 아버지에게 늘 꾸지람 듣는 사도세자를 위로했으며, 세자에게 사랑을 베풀어줄 것을 영조에게 건의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던 화평옹주는 1748년 22세 꽃다운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22세의 나이로 요절한 화평옹주의 죽음을 영조는 매우 슬퍼하였다.
영조는 화평옹주의 죽음을 슬퍼함이 지나치다고 신하들이 간하자, 노하여 그들을 파직시켰다.
화평옹주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게 하여 분묘를 만드는 데만도 수 개월이 소요되었다.

화평옹주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에 있다.
1790년(정조 14)에 영조의 친필로 비문을 쓴 묘비가 세워졌다
“딸 중에는 화평옹주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다.”-영조의 회고
“옹주는 훌륭한 부덕(婦德)을 지니고 있었는데 졸하였으므로
왕이 사랑하는 뜻에서 통석해 마지않았다.”-사관의 평가
영조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화평옹주였다.
‘한중록’에도 “화평옹주가 영묘(영조)를 한결같이 대하시던 일들은 궁중 사람들이 다 아는 일로 모두 감탄했다.
선희궁(영빈 이씨)께서는 왕의 사랑이 고르지 않은 것을 서러워하셨다”며 화평옹주가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음을
증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한중록'은 또 “화평옹주가 계셨다면 부자간에 자효(慈孝)하게 살았을 것이니 착하신 옹주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어찌 국운에 관계하지 아니하리오. 지금 생각해도 통절하고 애석하다”고 했다.
영조가 화평옹주를 끔찍하게 사랑하였음을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화평 옹주가 마마를 앓으므로, 추국을 우선 정지하고,
모든 죄인을 죽이는 공사는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라 명하였다."
-영조실록 29권, 영조 7년(1731년) 1월 12일 병자 1번째 기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그때 임금이 화평 옹주를 위하여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이현궁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그 궁은 바로 능원 대군의 옛집으로서 내수사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서
오래도록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좌의정 서명균이 경계하는 말을 올리자,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이 집은 내 사친의 옛집인데, 근래 포수의 무리들이 거주하는 바가 되었으니,
차라리 왕녀(王女)의 집으로 만드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니,
서명균이 말하기를, "이 궁가는 *어의궁보다도 큽니다."하였다.
이리하여 그 뒤에 마침내 그 역사를 중지하였다.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1735년) 4월 4일 갑진 1번째 기사
그때 임금이 화평 옹주를 위하여 이현궁의 제택을 수리하였는데,
경복궁의 옛 궁궐의 소나무를 베어 쓰도록 하니, 일을 담당하는 자들이 이것을 빙자하고서
이익을 도모하여, 심지어는 이것을 관재로써 발매하기에 이르렀다.
좌의정 서명균이 임금에게 묻기를,
"이것이 과연 전하의 명령입니까? 조종의 옛터에서 그 나무를 벨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나무 가운데 말라 죽은 것은 비록 시어소라고 하더라도 으레 혹은 베어서 쓰기도 한다."
하자, 서명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전하께서 다만 말라 죽은 소나무만 베라고 허락한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람에 쓰러진 것도 아울러 베라고 허락하였다.
바람에 쓰러진 것은 정말 살아 있는 나무와 같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일을 주장하는 자가 함부로 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장이 있었는데, 어떻게 감히 함부로 벨 수가 있었겠는가?
불을 땔 나무들을 취한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5월 25일 갑자 2번째 기사
지평 김상로가 상소하여 옛 궁궐에서 소나무를 베어낸 사건을 말하고, (중략)
임금이 비답하기를,
"말라 죽은 소나무를 베라고 명령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며,
호조의 비용 조달을 번잡하게 하지 않으려고 옛날 발[簾]을 내려 주던 뜻을 따랐는데,
대신들이 이를 먼저 말하고, 너희들도 또 이것을 논쟁거리로 삼고 있으니,
왕가의 자녀가 아직 번성하지 않은 것이 또한 다행하다고 하겠다......."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5월 28일 정묘 2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