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톱 모둠 [부산],(근호,보람)
부산
*부산의 면적
부산은 15구 1개군을 가진 광역시로서 그 면적은 총 763.03㎢(2003.12.31)에 달한다. 최근에 편입된 기장군이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여 전체의 29.10%이고, 다음으로 강서구 22.84%, 금정구 8.57% 순이다. 부산의 도심지에 해당하는 중구와 동구는 각각 0.37%와 1.30%에 그치고 있어 가장 적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부산의 면적 변화를 시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산이 근대도시의 성격을 갖춘 시기는 일제시기인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산부제가 실시되면서부터이다. 당시 면적은 불과 84.15㎢로 지금의 중구·동구·영도구 그리고 서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1936년 4월 1일 제1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동래군 서면과 사하면 암남리 편입으로 면적이 112.12㎢로 늘어났으며, 1942년 10월 1일 제2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면적이 이전보다 두배 이상인 241.12㎢로 확대되면서 오랫동안 이 지방의 행정중심지였던 동래군 동래읍과 사하면·남면·북면일부가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1일 부산이 정부직할시로 승격과 동시에 제3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동래군 구포읍·사상면·북면과 기장읍의 송정리가 편입되면서 면적은 360.25㎢로 늘어났고, 1978년 2월 25일 제4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김해군 대저읍·명지면·가락면의 일부지역이 편입되면서 면적은 432.32㎢로 확대되었다.
1989년 1월 1일 제5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경상남도의 김해군의 가락면·녹산면과 창원군 천가면의 편입으로 면적은 525.25㎢에 이르게 되었다. 1995년 1월 1일 행정기구 개편에 따라 광역시로 개칭하였으며, 3월 1일부로 제6차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양산군 5개읍·면(기장·장안읍, 일광·정관·철마면)과 진해시 웅동 일부지역이 편입(749.17㎢)되었으며, 2003년 12월 31일 현재 신선대 등 일부 해안지역의 매립으로 763.03㎢로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산의 문화재
□ 국가지정문화재
...○ 철새도래지(천연기념물 제179호)
- 소 재 지: 낙동강 하류일대로서 대저수문을 시작으로 낙동강
.......본류와 서낙동강 연안과 낙동강하류와 사하구 다대동
.......홍티마을에서 천가동의 아동도 그리고 진해시 웅동동 안골마을
.......최남단에서 천가동 고직마을을 연결하는 해변 일대이며 녹산동의
.......신호리 진우도 명지동의 대마등 장자도 신자도 하단동의 을숙도
.......일대 모두가 여기에 해당된다.
......- 문화재의 종류: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179호
......- 지정 년월일: 1966년 7월 13일 지정
......- 새의종류: 겨울새 여름새 나그네새로 일 백 수십 종에 달한다.
...○ 여 름 새
구 분
종 류
1.백로과 - 왜가리, 검은댕기해오라기, 황로, 중대백로, 중백로,
쇠백로, 덤불해오라기, 큰덤불해오라기 등
2.뜸부기과 - 뜸부기, 쇠물닭 등
3.물때새과,도요과 - 꼬마물때새, 흰목물때새 등
4.갈매기과 - 쇠재비갈매기
5.물총새과 - 물총새
6.휘파람새 - 개개비,쇠개개비등
...○ 나그네새
구 분
종 류
1.도요과 - 중부리도요, 마야도요, 알락꼬리마야도요, 홑꼬리도요,흰허리뒷
부리도요, 학도요, 붉은발도요, 청다리도요, 삑삑도요, 알락도요,
노란발도요, 뒷부리도요, 갑짝도요, 꼬까도요, 청도요, 넙적부리
도요, 좀도요, 종달도요, 모츠래기도요, 민물도요, 송곳부리도요
2.물때새과 - 검은머리물때새, 개꿩, 검은가슴물때새, 흰물때새, 왕눈물때새
...○ 겨울새
구 분 종 류
1.오리과 - 큰고니, 고니, 흑고니, 개애리, 쇠기러기, 큰기러기, 흑
부리오리, 황오리, 청둥오리, 쇠오리, 가창오리, 청머리
오리, 홍머리오리, 고방오리, 넙적오리, 원앙이, 붉은가
슴흰죽지, 댕기흰죽지, 검은머리흰죽지, 흰뺨오리, 검
둥오리사촌, 흰줄박이오리, 비오리, 바다오리 등
2.갈매기과 - 갈매기, 재갈매기, 큰재갈매기, 붉은부리갈매기, 검은
머리 갈매기 등
3.아비과,농병아리과 - 아비, 회색머리아비, 큰회색머리아비, 귀뿔농병아리,
검은목 농병아리, 뿔농병아리등
4.가마우지과 - 가마우지, 쇠가마우지 등
5.도요과, 물때새과 - 민물도요, 깍도요, 댕기물때새 등
6.매과, 수리과 - 개구리매, 빛개구리매, 흰꼬리수리, 흰쭉지수리, 털발
말똥가리, 큰말똥가리, 독수리 등
7.할미새과, 종다리과 - 밭종다리, 검은등할미새, 큰종다리 등
8.멧새과 - 쇠검은머리쑥새, 북방검은머리쑥새, 검은머리쑥새,쇠
붉은뺨 멧새 등
9.기타 희귀한 것 - 재두루미, 황새, 저어새, 느시, 대백로, 물수리, 흰눈썹
뜸부기, 물닭, 알락해오라기 등
*부산의 자랑거리
*금정산성
태백산 줄기가 내려오다 머문 금정산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산성. 선열들의 호국의 숨결이 스며 있는 곳.
[지정일 : 1972년 2월 16일]
[위치 :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 일대]
금정산성은 사적 제215호(‘71. 2. 9 지정)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 일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으로 성벽과 문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으며, 성의 길이가 17,337m, 성벽 높이는 1.5m~3m가량이다. 성내의 총면적은 약 2,512,000평(약 8,213㎢)이다. 금정산에 언제 처음으로 성을 수축하였는지는 문헌상으로는 알 길이 없다. 고대부터 남해 연안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신라시대에는 이미 축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산성은 1703년(숙종 29)에 축성한 것으로 그 이전에 성이 있었음은 1667년(현종 8) 현종이 통제사 이지형을 불러 왜구방수계책을 논의하는 가운데 언급된 기사에서 확인된다. 즉 1703년(숙종 29) 이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성이 위에서 언급한 신라시대의 성인지 언제 축조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지금의 산성은 임진왜란 이후 국방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여러차례 축성 건의가 있었으나, 1702년(숙종 28) 11월 경상감사 조태동이 재차 산성의 축조를 청하여 이루어졌으며, 1703년(숙종 29)에 준공을 보았다.
그때 완공된 성은 둘레 9,011보 높이 15척에 동.서남북의 네 성문을 둔 방대한 산성이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성의 수축과 성문의 중건이 있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으나 기록에 있는 건물은 좌기청 6간, 좌우행랑 각 5간, 군기고 4간, 화약고 1간, 내동헌 3간, 별전청 4간과 그 외에 장대, 중군소, 교련청, 승장소, 산성창 등이 있으며, 축성에는 동래부민과 경상감영 각군에서 차역한 민정으로 이룩된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독진의 수성장을 겸하고 있는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중군 승병장.군기감.도훈도 군뇌.문직 등의 직책을 가진 사람과 군병 등의 상비군이 파수하고 또 인근 사찰의 승려가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나 변란이 발생하면 동래.양산.기장의 세읍 소속군과 세읍 사찰의 승려들이 승군(僧軍) 차출되어 방어토록 되어있다.
일제시기 시가지계획의 이름 아래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평지의 성축은 철거되었으며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성축도 민가가 점유하여 훼손당하고 해월사지를 중심으로 성곽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 1972년부터 성곽과 성문 등을 연차적으로 복원과 보수를 계속하여 국방유적으로 길이 남겨야할 산성은 이로써 어느 정도의 면목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교통
부산역에서 지하철로 40분 거리(온천장역 하차)
*부산의 인물
과학자
구포시장의 의거
부산진과 동래지역의 학생층과 민중들의 의거는 곧 부산인근지역으로 알려졌고, 여기에 크게 고무 받은 부산인근 지역민들도 시위대열에 동참하였다. 특히 구포의거는 청년학생 들의 주도로 일반 민중들의 참여로 인해 시위가 훨씬 적극성을 띠었고, 일경의 탄압도 더 더욱 폭력적이었다. 구포는 낙동강 하류의 포구로서 북쪽은 양산, 남쪽은 부산, 서쪽은 김 해, 동쪽은 동래을 거쳐 울산으로 통하는 요충지대이며, 경남 각지로 통하는 수륙 운송의 중계지 이기 때문에 상업이 번창하였던 곳이다. 이같은 상업중심지 구포에도 서울의 3.1운 동 소식과 아울러 인근 부산, 동래읍의 민족의거의 소식이 전해졌다.
구포의거는 경성의학 전문학교에 다니는 양봉근이 구포로 내려와 평소 안면이 있는 구포 면 서기 임봉래와 윤경 등에 의해 거사가 도모되었다. 3월 27일, 28일 주동 인물인 임봉래, 류기호, 윤경외 11명은 구포면 구포리 박영초, 이수련집에 모여 모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음력 2월 28일)구포 장날 거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각각 수백매를 만들었다. 3월 29일 주동 인물들은 준비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비밀리에 박덕홍, 손진태, 김장학, 이몽석, 양대용, 김영길, 정치호, 정용학, 안화중, 허희중 등 청년 동지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오를 기해서 구포장터에서 장꾼 1,000여명과 더불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박덕홍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면서 또 안화중은 시위를 하기 위하여 시장 철시를 호소하면서 장꾼을 지휘하였다. 김윤길 등은 구포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 윤영대 에게, 민족적 양심으로 뉘우치고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 김옥겸 외 11명의 주동인 물이 현장에서 검거되어 구포 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에 임봉래, 윤정은 등은 '구금된 애 국동지를 석방하라'고 외치면서 청년동지 윤장수, 김달수, 백인봉, 윤경봉 등 30여명과 더 불어 1,200여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주재소로 돌진하여 구금된 동지들을 구출하려고 하였 다. 마침내 일경들은 시위군중들에게 무차별 총탄을 퍼붓기 시작하자 군중들은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위에서 일경 추산으로 일군경 3인과 조선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시위군중 9명 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신에 수많은 총탄을 맞아 중상을 입은자가 있었던 것으로 볼때 시위 군중가운데 부상자는 이 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구포장터 의거에서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42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모두 부산 지방법원에서 예심에 회부되어 조사에 오랜 시일을 끌어 이들의 고초는 말할 수 없었거니와, 이중 유진영, 최종호, 노원길 은 면소 되었고, 최한봉, 정태호는 방면되었으나, 나머지는 4월에서 1년 6개월에 걸친 징역 형을 받았다. 공판이 끝난 것은 1919년 8월 7일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20, 30대의 청년 또 농민, 상인, 근로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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