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그리고 북경
중국으로 간다. 13억의 사람들이 사는 나라, 한반도의 44배의 광활한 대륙을 가진 나라, 중국을 간다. 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으며, 그 넓디넓은 대지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행은 언제나 '낯설기'다. 그리고 '낯익히기'다. 선 낯을 어떻게 익혀서 돌아올 수 있을까. 호기심과 신비감을 한가득 담은 걸음을 옮긴다.
2005년 12월 5일 오전 9시. 박창순 단장을 비롯한 15명의 단원들이 대구시민회관 앞에 모였다. 지난 6월에 열린 '2005 교육인적자원혁신박람회'의 경북혁신관 구성을 위하여 고락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눈과 귀 그리고 생각을 더욱 크고 넓게 틔울 수 있는 기회를 준 경상북도교육청에 감사한 마음을 안고 출발지 김해공항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린다. 날씨는 쾌청, 초겨울 해맑은 햇살이 장도를 축복해 주듯 산과 들을 수놓고 있다.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 수속과 함께 까다로운 검색 절차를 거쳐 검색대를 통과한 것은 11시20분. 모든 견문을 눈과 귀에 부지런히 담아야 할 것이지만, 그 귀중한 견문들이 오래도록 남기 바라면서 공항 면세점에서 디지털 카메라 256MG 메모리카드를 하나 더 샀다. 나의 머리를 대신하여 기억 창고가 되어줄 장치이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오리라! 각오도 비장하게.
AIR CHINA 108인승. 비행기에 탄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체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활주로를 달려 이륙한 것은 12시 40분. 산이 점점 작아져 보이더니 귀가 멍해진다. 부산에서 북경까지는 1400㎞로 2시간이 소요될 것이라 한다. 중국은 우리보다 한 시간 앞 서 가기에 중국 시간으로 오후 1시50분 경에 북경에 도착할 것이라 한다. 중국 항공기지만 한국에서 출발하는 탓인지 한국어 멘트도 해 주었다. 비행기 안에서만이 아니었다. 한국어는 이야기가 되고 노래가 되고 문자가 되어 중국 여행 내내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특히 한국 사람들이 중국을 많이 왕래하는 모양이다. 우리의 국력을 실감할 수 있기도 하고 소통이 편하여 좋기도 했지만, 이국적인 정취가 덜 느껴지게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하늘로 오를수록 산하(山河)는 부조(浮彫)처럼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난다. 기체는 솜털 같은 구름을 거느린 채 허공을 유영하고 있다. 그 광활한 하늘에 취하여 잠시 잠이 든다. 문득 눈을 뜨니 아래로 육지가 보인다. 중국 땅이다. 20분 후에 북경수도공항에 도착할 거라는 멘트가 방송되고 있다. 산이 보이지 않는다. 평야
지방인 모양이다. 경지정리가 잘 된 반듯한 논밭에는 아직도 파릇한 기운이 남아있다. 군데군데 마을이 보이고 강물이 흘러가고 있다. 고도가 낮아지는가 싶더니 마을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기하학적으로 줄을 맞추어 지은 아파트 밀집지역이 보인다. 번화한 도시가 나타난다. 오후 3시 정각. 비행기는 북경수도공항 기장에 타이어를 내린다. 검색대를 통과하여 소지품을 찾아 공항을 나서려 할 즈음 현지 안내원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오랜 이산의 혈육을 상봉한 듯 반가워한다. 이제 한 시간을 뒷걸음쳐야 한다. 여기는 북경이다.
대기해 놓은 차에 오른 것은 현지 시간 2시50분. 가이드의 인사에 이어 중국 안내가 시작된다. 북경 둘러보기의 맨 첫 코스로, 1750년 청의 건륭황제가 모친의 생신을 기리기 위해 별장으로 지은 이화원( 和園)으로 간다고 한다.
그 후에 서태후가 대대적으로 중건하였다는 황족 정원이란다. 원래 계획은 천단공원으로 되어 있지만 2008 북경 올림픽에 대비하여 보수 공사중이라 볼품이 없어 '이화원'이 어떻겠느냐고 동의를 구했다. 좋다고 했다.
차창 밖으로는 즐비한 빌딩이며 널찍한 도로가 펼쳐진다. 바깥 풍경에 눈 돌릴 겨를 없이 안내는 계속 이어진다. 북경의 면적은 16,000㎢, 인구는 1,400만 정도, 이 중에 5만의 동포들이 있단다. 전국 전체 인구는 약 13억인데 무적자(無籍者)까지 합치면 15억 정도는 될 것이라 한다. 호적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빌딩 숲을 벗어나는가 싶더니 도로 양쪽으로 긴 숲이 펼쳐진다. 포플러 숲이다. 하나하나의 나무가 모두 국가 소유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고 한다. 사회주의 중국, 그 이념은 많이 퇴색하여 자본주의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개인은 재산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시장으로 내 몰리고 있다. 그러나 땅만은 국가 소유가 되어 있어 개인의 재산이 될 수가 없다고 한다. 나무도 땅의 일부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국 동포들이 모여 산다는 코리아타운 아파트 앞을 지난다. 한국인 투자를 좋아하여 아파트 값을 엄청나게 올려놓아 평당 5,6십 만 위엔을 호가하게 해 놓았다고 한다. 한국의 졸부들은 이곳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이제 중국 사람을 이야기한다. 한 마디로 아주 주의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 여권을 아주 탐내기 때문에 잘 보관해야 할 것이라고 몇 번을 당부한다. 관광지 노점의 상품은 가짜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카메라와 같은 귀중품도 그들이 매우 노리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이것이 대국 중국의 모습인가. 청명한 북경의 하늘과는 달리 가슴엔 구름이 덮여 오는 것 같다.
빌딩이 임립하고 차량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고 있다. 북경 시내에는 55층 호텔이 제일 높고, 상해에 가면 88층 건물도 있단다. 길에는 2층 버스도 보이고, 전기로 가는 버스도 보인다. 공중엔 전선이 거미줄처럼 엉겨 있다. 차는 번화가를 벗어나 외곽지를 달리고 있다. 번화한 시내의 즐비했던 고층건물들과는 달리 70년 전쯤에 지어졌다는 초라한 오두막집들이 보인다. 화장실을 공동으로 쓰고 있는 집들이란다. 사회주의 중국에도 빈부 격차가 크다고 한다. 고층 건물이 즐비한 북경농업대학 앞을 지난다. 중국 여성들은 우리나라처럼 '사'자를 지닌 남성들, 그리고 공무원, 경찰들을 좋아한다. 관존 사상에다가 안정된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워야 하는 모양이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재미있는 중국말 하나를 가르쳐 준다. '씨(치)팔노마', '식사 맛있게 드셨습니까?'라는 뜻이라고 했다.
북경 서쪽 외곽인 해정구(海淀區:하이디엔취)에 위치해 있는 이화원( 和園)에 도착했다. 북경 시내에서 서쪽으로 15㎞ 떨어져 있는 황족 정원으로 서태후(西太后, 1835∼1908)의 여름 별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총면적 294만㎡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이화원은 전체 면적의 3/4에 달하는 인공호수인 곤명호(昆明湖)와 호수를 지으며 파낸 흙으로 만들었다는 가산인 만수산(萬壽山), 서태후가 불공을 드리는 곳인 3450계단의 불향각(佛香閣), 서태후의 산책로로 지어진 728미터에 총 273칸의 화랑으로 이어진 장랑(長廊),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한 곳인 덕화원(德和園) 등이 있다. 그 엄청난 규모와 수많은 궁궐이 경탄을 자아내게 했지만, 빛 바랜 단청과 붉은 색 일색인 벽과 기둥이 그리 단아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먼 곳에서 옮겨왔다는 기암괴석과 수령이 3∼5백년씩 되었다는 나무들이 인상적이었다. 3백년 정도 된 것에는 파란 패찰을, 5백년쯤 된 것에는 붉은 패찰을 붙여 놓았다. 마치 용이 온몸을 굽이치는 듯한 용자나무도 인상 깊게 해 주었다. 수많은 유물이 있었다 하나 아편전쟁 등 수많은 전쟁통에 남아 있는 것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 최대 규모의 황족 정원, 이화원을 나선다. 엄청난 규모와 미려한 형태에 감탄하면서도 가슴속엔 정체 모를 명암이 엇갈려 온다. 천 원짜리 털모자 하나 팔아달라며 애걸하던 주름살 깊은 노파의 얼굴이 떠오른다. 안내원은 털이 빠져 쓸 수 없는 것이라고 사지 말라고 했다.
4시15분, 서산으로 기울어지는 해를 보며 이화원을 출발하였다. 안내원의 중국 안내가 또 펼쳐진다. 중국에는 전체 인구의 92% 가 한족이며 8%가 조선족을 비롯한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 1가정 1자녀만 갖도록 하고 있지만, 시골 같은 데서는 잘 안 지켜지는 데도 있고, 그러다가 보니 무적자도 많이 생겨난다고 한다. 노후는 거의 양로원으로 가며, 공무원은 취업 기회 확대를 위해 50세로 정년 퇴직하는데 퇴직 후에도 80%의 급여를 준다고 한다. 그래서 공무원이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생활이 모두들 어려운 편이지만 여름에 더울 때는 40도가 넘어서 집집마다 에어컨은 거의 설치한다고 한다. 창 밖을 보니 아파트마다 에어컨을 다 달고 있다. 상가에는 건물마다 커다란 간판들이 붙어있다. 색깔도 대부분 붉은 색을 많이 쓰고 글자도 큼직하다. 자본주의를 향해 발버둥치고 있는 중국의 한 상징 같다. 즐비한 고층 건물 사이에 초가집 같은 한 무리의 나지막한 고가가 보인다. 소수민족의 민속촌이란다. 입구에는 묘족(苗族)을 상징하는 돼지상이 서 있다. 묘족 앞에서는 삼겹살을 좋아한다고 하면 실례라고 한다.
차는 '茶博士家'라는 커다란 건물 앞에 멈춰 선다. 차 전문점이었다. 중국 여행 중에 곧장 그러했지만, 안내원은 한 곳의 관광이 끝날 즈음이면 곳곳의 특산품점을 안내한다. 그러한 것들을 순수하게 소개하려는 것인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여러 개의 방들을 만들어 놓고 손님들을 안내하여 여러 가지 차의 효능과 용법을 안내하고 사기를 권한다. 방년의 곱상한 처녀들이 능숙한 한국말로 차를 소개하고 시음까지 시켜 준다. 고감주차, 보이차, 오룡차, 쟈스민 등의 차를 소개하며 시음 과정에서 오래될수록 높은 값이 나가는 보이차는 쩝쩝, 오룡차는 후루룩 마시라고 일러주기도 한다. 한족의 아가씨들이 얼마나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면 저렇게 한국말을 잘 하게 되었을까.
찻집을 출발하여 예약된 식당이 있는 곳으로 간다. 다시 고층건물이 즐비한 번화가를 지난다. 보통의 호텔은 자금성의 높이보다 더 높게 지을 수 없다고 한다. 거리에는 식당도 많았다. 집에서는 밥을 하지 않고 사서 먹는 집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경의 동성구역에 있는 '와하하식당[娃哈哈大酒家]'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홀도 크고 방도 많은 대규모 식당이었다. 문 앞에 '福'를 거꾸로 커다랗게 써 붙여 놓았다. 하늘로부터 많은 복이 내려오기를 기원하는 뜻이라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기복신앙이 강하여 글자에도
주술적인 기원을 많이 담는다고 하는데, 예컨대 '흠(金자 셋 합친 글자)'자를 쓰면 돈이 잘 벌린다고 하여 상호마다 이 글자를 많이 쓰고 있다. 라운드 테이블에 여러 가지 음식이 나왔지만 거의 기름을 둘러 볶은 것이어서 입맛에 맞추기가 힘들었다. 이 또한 이국적 체험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식당을 나와 오늘의 마지막 코스를 찾아간다. 중국 특유의 서커스 공연 관람이다. 거리에는 차들이 꽉 막혀 있었다. 이곳에도 버스 전용 차선이 있는데, 노선 버스만 갈 수 있다고 한다. 지하에는 1986년에 개통한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다고 한다. 버스 뒤쪽에 긴 글이 적혀 있는데, 안내원에게 뜻을 물으니 '공공버스가 당신의 교통비를 절약해 드립니다.'라는 말이라고 했다. 북경 사람들도 대중 교통 수단을 많이 이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북한대사관 앞을 지난다. '평양해당화'라는 커다란 네온이 번쩍이는
식당이 보인다. 김정일이 주인으로 되어 있는 냉면집이라 했다. 거리는 네온 불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건축물이며 도로며 곳곳에 공사 현장이 보인다. 2008년의 올림픽에 대비한 공사라고 한다. 북경은 지금 공사가 한창이다. 공연은 7시15분에 시작한다는데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 교통정체 때문이다. '조양극장'이라는 곳에 도착한 것이 7시25분. 서커스 묘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몸을 이용한 여러 가지 묘기들. 육체의 아름다움일까, 육체의 학대일까. 조그만 자전거에 12명이 올라타는 묘기는 놀라웠다. 8시30분에 공연이 끝났다.
8시50분 '北京帝景豪廷酒店'이라는 호텔에 도착했다. 유럽풍의 대규모 호텔이었다, 시설도 깨끗했다. 이택 교장과 한 방에 들었다.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옆방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져 온 소주가 있다며 같이 한 잔 하자는 것이다. 몇 사람의 일행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안주는 오늘 본 북경의 인상 이야기. 북경은 크고 넓었다. 그 크기와 넓이 속에는 밝은 빛도 있겠지만, 그 빛이 지우는 그늘도 두껍게 드리워져 있으리라는 데에 우리는 동의하고 있었다. 중국의 첫날밤은 고국의 깡소주 잔 속으로 깊어갔다.
자금성과 만리장성 그리고 장가계까지
오늘은 일정이 빠듯하여 일찍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6시에 모닝콜을 받고 일어나 뷔페로 차린 아침을 먹었다. 우리 일행을 고려해서인지 김치와 콩나물 같은 것을 준비했지만 볶고 튀긴 것들이 대부분이라 느끼한 기름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오늘의 여정은 자금성과 만리장성이다. 7시 반에 호텔을 출발했다. 거리에는 출근 차량의 물결로 분주했다. 길 양쪽으로는 자전거도 많이 지나갔다. 어떤 곳에서는 자전거와 차량이 무질서하
게 뒤엉키기도 했다. 서민들은 자전거를 많이 타는데, 자전거도 넘버가 있어야 하며 연간 500원 정도의 세금을 낸다고 했다. 넘버가 없는 것도 있지만, 무적 자전거는 매매와 주·정차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길가에 차려놓은 간이 자전거 수리점이 보였는데, 바람을 넣어주고는 50위엔을 받는다고 한다. 오토바이에 포장을 친 수레를 달아 택시 대용으로 영업하는 모습이 이채롭게 보인다.
거리의 빈터에서는 함께 모여 체조를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일찍 일어나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활기차게 생활해 나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삶의 의욕을 잃고 구걸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아이들도 구걸에 나서는데 한국 사람을 만나면 1,000원을 달라고 조른다는 것이다. 동전을 주면 쓸모가 없다고 버린다고 한다. 거지 노릇 30년에 500만 원을 벌어 북경대 출신 여자에게 장가간 남자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웃었다.
'新景小學'이라는 소학교 앞을 지난다. 중국의 학제는 소학교 6년, 초등학교 3년, 중학교 4년, 대학교 4년(의대 5년)으로 되어 있는데, 소학교까지만 국가 부담의 의무교육이라 한다
. 중국에도 가정의 공·사 교육비 부담이 만만찮다고 한다. 하나뿐인 자녀지만, 부부가 맞벌이를 하면 한쪽의 수입은 온전히 교육비로 다 들어간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그렇긴 하지만 수입이 적은 집은 자녀 교육을 온전하게 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금성(紫禁城)에 닿았다. 명·청대의 황궁으로 1406∼1420년에 건조된 이래 560년 동안 명의 15황제, 청의 9황제가 일생을 보냈던 곳이다. 총면적 72만㎡, 9999개의 방(지금은 8700개만 남음)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 건축물로, 지금은 고궁박물관이 되어 105만점의 진귀한 문물이 보존되어 있는데, 대만에서 4분의3을 가져가고 남은 것이라 한다.
천안문 광장으로 들어선다. 1989년 4월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학생과 시민들을 무력으로 유혈 진압했던 '천안문 사태'로 유명한 천안문은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중국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광장에는 동쪽에 중국역사혁명박물관, 서쪽에 인민대회당, 남쪽에 모택동기념관이 서 있는데, 모택동기념관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모택동 시신을 참배하기 위한 행렬이라 한다. 모택동은 천안문 위의 영정으로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살아 있는 모양이다. 천안문 앞에서는 수비 군인들의 근무 교대식이 진행되고 있다. 초록색의 두꺼운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의식을 행하고 있다.
천안문으로 들어간다. 1417년에 지어진 천안문은 자금성의 정문으로 33.7m의 높이로 황금색 기와 지붕과 높이 치켜든 추녀, 주홍색의 웅장한 기둥들이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문(瑞門), 오문(午門), 태화문을 지나면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3전이 나타나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건천궁, 교태전, 곤녕궁 등이 있다. 보화전은 1412마리의 용이 장식되어 있고, 보화전 뒤에는 커다란 옥돌을 3년에 걸쳐 옮겨 새긴 9마리의 크다란 용이 장식되어 있다. 곤령궁은 황제의 침실이며, 내정(內庭)의 기이하게 생긴 높다란 바위 위에 얹혀 있는 어경정(御景亭)은 황제가 궁녀와 더불어 바깥 세상을 구경하던 곳인데, 궁녀가 살아서 유일하게 세상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광활한 대지 위에 석조물들을 깔고 장식하여 거대한 궁궐을 세운 것이 대륙의 황궁다운 웅장함을 느끼게 했지만, 지배 권력의 극치를 보는 듯해서 경탄과 감탄만으로는 볼 수 없었다. 궁궐 뒷문으로 나오니 궁성을 지키는 호성하(護城河)가 부침이 무상했던 자금성의 역사를 안은 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다시 차를 타고 30분을 달린 끝에 차가 멈춰 선 곳은 아파트와 고층 건물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中國中醫硏究院'이라는 곳이다. 중국 전통의학으로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연구를 하는 국가 기관이라고 한다. 한의학 관련 자료가 게시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몇 층을 올라가니 한국말에 능숙한 간호원들이 나와 일행을 맞는다. 벽에는 역대 연구원장과 악수를 하는 김일성, 김정일, 모택동의 사진도 걸려 있다. 작은 교실 같은 방으로 안내했다. 1939년 강원도 홍천생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이기영이라는 분이 나와서 3,383명의 교수와 함께 91개국과 의료 합작을 하고 있는 곳이라며 기관을 소개한다. 그런 일을 하는 곳치고는 규모가 그리 큰 것 같지는 않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도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며 무료 진료를 해 줄 터이니 진맥을 받아 보라 한다. 세 명의 연구원이 간호사들과 함께 들어오더니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 준다. 간호원이 옆에서 통역을 해준다. 내 차례가 되어 맥을 짚어 보더니 간장과 신장이 좀 좋지 않은데 치료를 받겠느냐 했다. 아직 특별한 증세는 못 느끼기 때문에 나중에 치료를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일행 중 어떤 이는 진맥 후에 약을 처방 받기도 했다. 그리고 3,000원씩 내고 마사지를 받으라고도 했다. 상체를 주물러 주는 마사지를 받고 나니 몸이 좀 시원하게 느껴지는 듯도 했다. 중국은 하도 의심스러운 것이 많은 나라라 이 연구원이 과연 믿을 수 있을 만한 곳인지를 알 수 없었지만, 오늘 이곳의 방문이 건강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음 코스는 자금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만리장성이다. 장성이 있는 팔달령(八達嶺)을 향하여 고속도로를 달려간다. 이 도로의 통행료가 비싸 67.5㎞를 달려가는데 5만 원을 받는다고 한다. 만리장성을 찾는 관광객의 주머니를 노린 시책은 아닌지 모르겠다. 길가에 현대차 광고판이 우뚝 서 있다. 우리의 국력이 중국 땅에서 발을 내리는 선 모습으로 보였지만, 그 광고판 하나에 연간 1억 원을 중국에 지불하고 있다고 한다.
만리장성의 주변엔 식당들로 붐볐다. 점심부터 먹고 장성에 오르기로 했다. '玉麒麟'이라는 샤브샤브 식당에 들었다. 닭고기탕인 듯한 국물이 매우 느끼했다. 채소와 고기를 끓는 물에 넣어 익혀 밥을 먹었다. 식성에 맞지 않을지언정 이 또한 여정(旅程)의 하나라 생각하며 참고 먹는다. 식사가 끝나자 안내원이 만리장성에 오르기 전에 한 곳만 더 들르자며 '寶樹堂'이라는 큼지막한 간판이 붙은 곳으로 안내한다. 진통과 치료를 위한 파스와 피부치료제인 연고를 파는 곳이다. 20대 청년이 등장하여 유창한 우리말로 설명을 했다. 이국 땅에 와서 이국인에게 우리말을 듣는 것이 반가운 일만은 아니라고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좋은 약들을 많이 사라면서, 돈이면 어떤 종류의 것이든 다 받는다고 했다. 안내원이 이런 곳으로 자꾸 안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팔달령 수비참(收費站, Tall gate)을 통과하여 나아가니 웅장한 석산이 다가온다. 커다란 바위가 앉아 있는 듯하다. 그 중턱으로 길다란 뱀이 꿈틀거리는 듯한 긴 선이 보인다. 만리장성이다. 말로만 듣던 그 만리장성을 오늘 내 걸음으로 오른다. 생애의 전혀 새로운 체험이 될 것 같아 가슴마저 설레어진다. 만리도 넘는 6,700㎞에 이르는 장성, 달에서도 보인다는 곳이다. 2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 성은 전국시대 때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북방 유목민족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여러 개의 성이 이어지면서 장성을 이룬다. 오늘 우리가 오르는 곳은 거룡관장성(居庸關長城)이다. 산 아래는 군사 기지가 자리 잡고 있고, 성은 평균 7.6m의 높이로 산으로 오르고 있다. 남·북을 가르고 있는 성채 사이의 계단을 타고 성을 오른다. 오르기 시작할 무렵 "不到長城非好漢(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사나이가 아니다.)"라 새긴 석비가 버티고 섰다. 사나이가 되어 보리라며 가파른 산세를 따라 지어진 성채를 따라 오름길을 재촉한다. 모두들 숨 가빠했다. 그러나 나는 매일 산을 오른 탓인지 비교적 가벼운 걸음으로 오를 수 있었다. 성벽 한 곳에 쳐진 줄에 수많은 자물쇠들이 걸려 있다. 젊은 연인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성에 와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그 증표로 자물쇠를 채우고는 열쇠를 버린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랑놀이다.
일행들이 한 사람씩 자꾸 처진다. 섬돌은 사람들이 하도 많이 밟은 탓인지 닳고 닳아있다. 고모산성 토끼벼루가 문득 생각난다. 내 삶의 터 문경의 마성에 있는 영남대로의 한 부분이다. 그 옛날 과거 보러 가는 선비를 비롯한 하고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녀 바위가 얼굴이 비칠 만큼 반질반질하게 닳은 곳이다. 잠시 잊고 있었던 집 생각이 난다. 벌써 객수(客愁)가 솟는 걸까. 아내의 김치가 먹고 싶다.
중간 중간에 세워져 있는 요새는 등반객의 휴식처가 될만하다. 그 옛날엔 군사들의 긴장을 돋우게 했던 곳이 이제는 관광객의 휴식처가 되다니, 세월과 시대가 다른 탓이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날씨가 차갑다. 그러나 몸은 땀으로 젖는다. 오를수록 성과 산의 경관은 웅장해지고 웅대해지고 광활해진다. 대지는 산 너머로 무궁하게 펼쳐지고 있다. 산세가 험하다. 이 험준한 산세가 전쟁을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치열했던 전쟁터가 지금은 관광객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 만리장성은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거대한 성을 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야 했고 죽으면 그곳에다가 묻었다는 것이다. 죽음을 막기 위한 성이 주검으로 세워졌다니 가진 자의 횡포일까,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나를 앞서 가는 사람이 있다. 이동옥 연구관이다. 박창순 단장이 뒤따르고 있다. 세찬 바람을 안고 지며 드디어 해발 880m의 정상 요새에 올랐다. 무슨 고봉준령이라도 정복한 것 마냥 감격과 흥분에 찼다. 우리가 오른 곳은 고봉준령이 아니라 역사의 시공(時空)이다. 그 시공의 현장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요새 꼭대기에 올라 쾌재를 불렀다. 중원을 호령했던 요새 위에 우리가 서 있으니 이 감격 무엇에 담을 수 있으랴. 카메라 셔터를 분주히 눌러 댄다. 감격에 취해 있다보니 3시 반까지 돌아오라던 안내원의 엄명을 어기고 말았다. 큰일이다. 두어 층계씩 건너 뛰어 내리기도 하며 황급히 출발지로 돌아온 것은 약속 시간 20분이 지나서였다. 만리장성을 등지고 떠난다. 숱한 역사와 전설, 지배자의 권력과 민중의 애환으로 쌓은 만리장성을 떠난다. 그 성의 길이만큼이나 긴 여운을 끌면서―.
차는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려간다. 북경공항을 향하여 가는 길이다. 장가계(張家界)로 가기 위해 밤 비행기를 타러 간다. 장가계는 경치는 아름답지만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열악한 시골이라고 한다. 그곳의 상인들을 조심하라고 안내원이 당부한다. 물건도 가짜가 많고, 사람들도 악착스럽다고 했다. 그곳 3모작 깨를 사면 기름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장가계의 모습이 더욱 궁금해진다. 길다란 상가 건물을 지난다. 개인이 경영하는 도매 상가라고 한다. 자본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오늘날 중국의 모습이다. 고가도로 옆에는 'SAMSUNG' 전자제품 광고판이 현란하다. 타향에서 이웃 사람을 만난 것 같다.
우리 일행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아가씨가 있다. 관에서 운영하는 영상제작소의 종사원으로 우리의 움직임을 찍고 있는 사람이다. 좋은 추억 거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비디오 촬영을 하고 있는데, 나중에 원하는 사람만 자기 모습이 담긴 비디오나 시디를 구입하면 된다고 했다. 지금까지 찍은 것을 버스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보여 주었다. 하나의 상술인 것 같다. 초상권 침해니 하는 말은 아예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을 형편이다.
5시10분, 공항에 도착했다. 대합실에는 탑승을 대기하고 있는 승객들 앞에서 삼성과 엘지 전자의 액정 모니터가 밝고 깨끗한 영상을 비쳐주고 있었다. 화물을 먼저 부치고 트랩을 오른 것은 5시 55분. 2백여 석은 될 듯한 좌석이 다 찼다. 말소리를 들으니 거의 한국 사람들이다. 안내 방송도 한국어로 하고 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가. 이국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없다. 반가움이 아니라 아쉬움이다. 이국에서라면 이국의 정취에 젖을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의 넉넉해진 자화상일까. 분 모르고 넘쳐나는 모습일까.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넉넉함 속에 서 있는가, 과분함 속에 서 있는가.
6시25분,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좀처럼 이륙을 할 줄 모른다. 비행기가 움직이는 차창 밖은 도심이다. 은행이 보이고, 아파트가 도열해 있고, 지하차도 아래로 차량들이 분주히 오간다. 도회지 한가운데 비행장이 있단 말인가. 여기 사람들은 공해를 말하지 않는가.
20분쯤을 궁싯거리던 비행기가 드디어 하늘을 차고 올랐다. 장가계까지는 1,650㎞.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한국을 가기보다 더 먼 길이다. 중국은 역시 광활한 대륙이다. 창 밖으로 휘황한 야경이 명멸하며 춤을 추고 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불의 꽃밭은 멀어져 갔지만 가도 가도 땅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곧장 내륙을 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별이 하늘에 뜬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피고 있다.
기내식으로 저녁 식사를 마친 승객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 때문일까. 잠이 오지 않는다. 여행할 때마다 지니고 다니는 피천득의 '수필'을 꺼내어 읽는다.
"나는 …한 해 한 해를 젖은 짚단을 태우듯 살았다. 민족과 사회를 위해 보람 있는 일도 하지 못하고 …학구에 충실치도 못했다.…"
아, 나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늘을 가르며 달려가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내 삶의 지난날이 문득 돌아 보인다. 부끄러운 일 많은 지난날들이다. 이 여행만은 부끄럽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지상에 은하수가 흐르고 있다. 울긋불긋한 화원이 펼쳐지고 있다. 장가계 '롄화기장(荷花機場)'에 발을 내린 것은 9시10분. 북경에서 2시간 40분 정도가 걸린 셈이다. 공항을 나오니 새로운 현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다. 이름을 '김영'이라고 하는 예쁘장하고 날씬한 몸매의 아가씨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함께 탄 안내원은 자기 소개에 이어 중국을 '차이나'라고 하는 것은 북경과 장가계가 '차이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며 우스개 소리로 장가계를 소개했다. 북경보다 모든 것이 낙후되어 있다는 것이다. 장가계의 원주민은 토가족(土家族)인데 산적의 후예들로 매우 어렵게 살고 있는 중국의 소수민족이라 했다. 장가계는 호남성에 속하며 중국의 남쪽 지방으로 여름 평균 기온은 36도로 습기가 높아 여자들은 화장을 할 줄 모른다고 했다.
장가계를 안내 받는 사이에 예약된 호텔에 이르렀다. '通達國際酒店'. 중국에서 주점이란 말은 호텔이라는 뜻이다. 여장을 풀자마자 저녁을 먹어야 한단다. 이미 기내식으로 저녁을 먹은 터인데, 예약이 된 것이 또 먹어야 한단다. 갖가지 고기 종류와 술이 나왔다. 중국의 전통 술을 몇 잔 마셨다. 특별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발마사지를 해 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젖었다. 내 몸의 모습을 남에게 맡기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것도 여정 속의 한 프로그램이라 체험해 보기로 했다. 호텔 방에 들자마자 스무 살 내외로 보이는 조그마한 몸매의 앳된 처녀들이 따라 들어와 발을 주물러 준다. 토가족 처녀들인 모양이다. 하루 종일 걸은 피곤이 풀려나는 듯했지만 마음은 영 편치 않다. 마사지가 끝나고 천 원짜리 몇 장을 손에 쥐어 주었지만, 아리따운 처녀들에게 못할 일을 시킨 것만 같다.
중국, 이틀째의 밤은 마사지와 더불어 깊어갔다.
장가계의 비경 그리고 토가족 이야기
사흘째의 여정. 호텔을 나선 것은 9시. 하루를 더 묶을 것이기로 가방은 두고 나왔다. 차에서는 현철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한국 사람들이 탔다고 중국인 기사가 배려한 것이다. 차라리 중국 노래를 들려주기 바랐지만, 준비한 테이프가 없다고 했다. 쇼핑을 해도 의사 소통에 별 불편이 없다. 종업원들이 필요한 우리말은 거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면 그리할까 싶어 씁쓸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장가계의 거리는 어수선했다. 한창 개발 중이라 공사중인 집과 도로가 많고, 개발되지 않은 곳의 건물은 낡고 초라했다. 길거리에 고기를 걸어놓고 손님을 부르는 노점도 보인다. 지나는 차들도 낡은 것들이 많다. 어느 거리를 지나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노동자들이라 했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고 할 일 없이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공사 기간 중에는 시공기관에서 노동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지만, 일이 다 끝나면 노동자 스스로 숙식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다음 일이 생길 때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적당히 일을 한다는 것이다. 시공기관에서도 방치하는 것 같았다. 사회주의 중국의 한 현상으로 보인다. 관광지 안내판 곳곳에 '服務游客 有求必應'이라는 문구가 많이 적혀 있는데 '服務'는 'service'라는 말로 손님에 대한 친절한 서비스를 강조한 말이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돈은 밝히면서도 '서비스'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서비스에 대한 인식을 드높이기 위해 그런 구호를 많이 적어 놓은 것 같다. 시장경제로 나아가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차는 시내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든다. 오늘의 첫 행선지인 무릉관광지구내의 보봉호(寶峰湖)를 향해 가고 있다. 장가계는 3억8천만 년 전에는 망망한 바다였던 곳으로 지구의 지각변동에 의해 깊은 협곡과 기이한 봉우리를 이루어 오늘날의 자연 절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장가계 관광지구는 1982년 중국 국무원에서 중국 최초의 국가삼림공원으로 인준하고 1991년에는 유네스코로부터 세계 자연 유산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관광지로 개발된 지 5년밖에 되지 않아 경치는 아름답지만 잘 정비되지 않는 것이 많다면서 안내원이 유의해야 할 점을 일러 준다. 기념품을 살 때 조심하라고 했다. 가짜와 불량품이 많다는 것이다. 화장실은 대변간이 나지막하여 밖에서 안쪽이 다 보인다고 했다. 계곡의 길에는 가마꾼들이 많은데, 한 번 타면 턱없는 요금을 달라고 하니 유의하라고 했다. 아름다운 경관에 대한 감동에 흠이 지는 기억이 될까 걱정되었다. 보봉호 입구에 당도하니 장사꾼들이 물건을 손에 들고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손님을 부르고 있고, 가마꾼들은 한 사람이 겨우 올라 탈만한 조그만 가마를 두고 '만 원'을 외치며 매달리듯 달라붙는다.
눈앞에는 수십 길 폭포가 나는 듯 떨어지고, 멀리 협곡 사이로는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눈길을 잡는다. 계곡 길 곳곳에는 자연 경관의 애호를 강조하는 표지석이 서 있는데 한국어도 함께 적어 놓았다. "愛護綠色 保護遺産"이라는 구호 아래 영문 표기를 하고 한국어로 "자연을 애호하고 유산을 보호합시다."라고 새겨 놓았다. 우리나라 어느 관광지를 걷고 있는 느낌이다. 협곡 사이를 오르다가 북쪽 등성이로 길을 꺾는다. 가쁜 숨 몰아 쉬며 몇 걸음 올라 고개를 내려서니 호수가 펼쳐진다.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보봉호(寶峰湖)다. 해발 340m에 수심 72m 의 댐을 쌓아 물을 넣은 인공 호수로 주변의 기이한 경관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해 내고 있다. 배를 타고 호수를 유영한다. 굽이굽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펼쳐지는 호수 가에는 갖가지 형상의 기암 괴석들이 온갖 전설을 간직한 채 그림처럼 서 있고, 그 그림이 물에 다시 비치어 또 다른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하늘에서 8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는데 나무꾼이 옷을 훔쳐 가서 아직 하늘로 못 올라간 선녀가 이곳 호수에 살고 있다고 한다. 호수에 비쳐 물결 따라 흔들리는 산과 바위의 경치는 잘 짜여진 아름다운 영상물을 보고 있는 듯한 환상에 젖게 한다. 그 아름다운 풍경 속을 돌아드니 배를 탄 토가족 소녀가 손을 흔들며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준다. 비로소 이국 땅의 나그네가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또 한 굽이를 돌아드니 이제는 미소년이 배를 타고 있다가 나그네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옥 같은 소리로 노래를 불러 준다. 무엇에라도 홀린 듯 숨을 죽이고 듣는다.
안내원은 더욱 흥을 돋구기 위해 다른 안내원을 불러 노래를 부르게 하더니, 노래한 안내원이 우리 일행의 박 단장을 불러내어 노래를 부르라고 한다. 박 단장은 이 호수를 다스리는 신들을 위해 부르겠다며 진혼가(鎭魂歌)를 엄숙하고도 신나게 불렀다. 경치 이리 아름다운데 달리 무슨 흥이 또 필요하랴. 두꺼비바위, 선녀바위, 또 무슨 바위 수많은 형상을 카메라에, 가슴속에 담으려 애를 쓰는 사이에 배가 부두에 닿았다. 한 사흘쯤 유유히 머물면서 경관에 흠뻑 취해 보고 싶건만 정해진 일정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전통 복장을 한 남녀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건만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이 산수임에야 사람을 배경으로 넣은 사진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길은 가파르기만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협곡이다. 그만큼 보봉호가 놓은 곳에 깊게 위치하고 있는 증거이리라. 저 아래 골짜기에서 귀에 익은 우리의 대중가요 가락이 청아한 피리소리로 들려온다. 계곡을 내려와 보니 '토가신적(土家神笛)'이라는 이름의 중국의 소수족인 토가족의 전통 피리 소리였다.
다시 차는 계곡을 벗어나 빌딩들이 있는 마을에 이른다. 천자가(天子街)라는 장가계 무릉원구역의 중심 거리다. 안내원은 '天子珠玉'이라는 진주 전문점으로 안내한다. 매장의 안내원이 나와 참관표를 나누어준 다음 진주에 대해 설명하고 매장으로 안내를 한다. 널따란 매장에는 자연산과 양식 진주로 만든 갖가지 장식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판매원들이 한국말로 구매를 권한다. 아내와 며느리를 생각하며 조그만 목걸이 하나와 크림 한 통을 샀다. 교포 3세가 경영하는 '韓立飯店'이라는 식당으로 갔다. 한국인 관광객을 위한 식당 같았다. 김치와 콩나물에 상추와 삼겹살이 반찬으로 나왔다. 상추에 고기를 싸서 먹는다. 모처럼 입에 익은 것을 먹는 듯했다.
다시 차를 타고 간다. 삭계욕 풍경구에 있는 백장협(百杖峽) 산경을 원경으로 지난다. 고대 전쟁터였다는 백장협은 기이한 형상의 산봉이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잠시 차를 달려 이른 곳은 무릉원구 관광지구. 입장을 할 때 인식기에 손가락을 넣게 하고서는 지문카드를 만들어 준다. 관광이 끝날 때가지 잘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관광객의 신분을 뚜렷하게 확인함으로써 철저하게 자연을 보호하겠다는 뜻인 것 같다. 새로운 체험이다.
장가계(張家界) 절경 속으로 들어간다. '장씨의 마을'이라는 뜻의 장가계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때는 BC 200년 경.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장량(張良, ?∼BC168)이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눈치 채고 은둔할 곳을 찾다가 정착한 곳이 토가족(土家族)이 살던 이 장가계라고 한다. 장량은 유방의 군사를 피해 황석채의 바위 봉우리에서 무려 49일을 버텼다고 전한다. 실제로 장량의 무덤이 이곳의 풍광이 빼어난 십리화랑(十里畵廊)이란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며, 그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고 산 곳이라 하여 '장가계'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는 것이다. 외부와 격리된 채 살고 있던 토가족의 생활 터전인 장가계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때는 그로부터 2200년이 흐른 후인 20여 년 전, 이 지역 출신의 화가가 장가계의 산수를 담은 그림을 발표하면서부터 알려져 중국 정부에 의해 본격적인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82년에 중국 최초의 국가삼림공원(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장가계는 1992년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면서 많은 관광객들, 특히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태어나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人生不到張家界 白歲豈能稱老翁)."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절경이라는 것이다.
원가계(袁家界) 관광지구로 가는 길이다. 원가계는 장가계세계자연유산의 핵심 지구로 뛰어난 신비와 신기를 간직한 천혜의 자연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굽이굽이 산기슭을 달린다. 바위를 그대로 뚫은 돌터널을 지난다. 울릉도 통구미 터널이 연상된다. 세 개의 돌터널을 지나니, 계곡이 보이고 작은 댐이 있고 물이 있다. 멀리로는 기묘한 형상의 산봉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차가 닿은 곳은 백룡천제(白龍天梯) 아래다. 백룡천제는 원가계관광지구의 핵심적인 교통 시설로 천애의 절벽에 의지해 326m의 엘리베이트를 세운 곳으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곳이라 한다. 계단을 올라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바위의 형상들이 너무나 걸출하다. 지난 여름 금강산을 갔을 때 만물상의 형상을 보고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는데 만물상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형상도 다양했다. 금강산을 수석이라 하면 이곳의 바위는 커다란 정원석이라 할까.
그 바위 형상들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데 청년 하나가 카메라를 들이대며 내 모습을 찍는다. 다음 코스로 이동했을 때 그 청년이 열쇠고리 하나를 내밀었다. 네모난 플라스틱 장식물 안에 내 모습이 들어있다. '천 원'을 요구했다. 사진을 어느 새 출력하여 열쇠고리 장식물로 만든 것이다. 그 기민한 상혼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원가계를 여행하는 동안 일행은 꼼짝없이 두서너 개씩의 열쇠고리를 장만해야 했다.
터널 같은 굴 안으로 들어간다. 굴 끝에는 엘리베이터가 기다리고 있다. 유리창으로 트인 엘리베이터는 1분58초를 올라가는 동안 건너편의 웅장하고 기묘한 바위들을 환하게 보여 주었다. 해발 800m의 산봉에 도로가 나 있고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저 건너 남쪽으로 펼쳐지는 기묘한 바위들의 모습을 연발하는 탄성으로 바라보며 길을 걸어 나아간다. 나뭇잎이 푸르고 나무 아래는 고비가 자라고 있다. 울릉도의 성인봉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다. 초가을 날씨 같다. 다시 기다리고 있는 셔틀버스에 오른다. 길에서 병사 네댓 명이 제식훈련을 하고 있다. 차가 지나도 비켜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차가 비켜 가야 했다. 이 또한 중국적 현실일까.
2시25분 드디어 원가계의 핵심부에 도착했다. 언어와 생각을 잃고 말았다. 저 앞으로 펼쳐지는 바위와 나무와 구름의 모습들이 인간의 언어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몇 개씩 무리를 지어 기묘한 형상을 이루는가 하면 홀로 우뚝 서서 절묘한 형상을 연출해 내고 있다. 협곡에 솟은 바위 봉우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혼을 온통 빼앗겨 버린다는 미혼대(迷魂臺)에서 내려다보는 원가계의 절경은 너무나 수려하고도 장엄한 산수화다. 400∼500m 높이의 뾰족 바위 수백 개가 도심지에 임립(林立)해 있는 고층빌딩처럼 거대한 바위 숲을 이루고 있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걸려 있고, 봉우리 아래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이 두루마리 그림처럼 펼쳐진다. 拜仙臺, 小洞天, 乾坤柱, 連心橋, 九天玄梯, 五女出征, 天生橋, 猿人望月, 百丈絶壁, …….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산봉과 바위의 모습이 다기하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지는 '이름'은 신의 창조물을 따라가지 못한다. 기묘한 산봉과 바위들은 '이름'의 수보다 훨씬 많다. 신의 무한한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인간의 유한한 상상력으로 어찌 다 이름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저기 우람하고 웅장하며, 신비하고 신기하게 펼쳐지는 신의 피조물들을 보며 볼품 없는 인간의 모습이 안타깝게만 느껴질 뿐이다.
바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자연의 다리가 이루어진 천생교, 건너편에 조그만 신당 같은 집이 보이고 건너가는 난간에 줄을 걸어 수많은 자물쇠를 달아놓았다. 만리장성에서 본 것과 같은, 연인들의 사랑의 맹세를 걸어 놓은 것이다. 중국식 사랑법이라고나 할까.
바위와 나무와 이내로 이루어지는 절묘 다기한 풍광은 눈 뗄 겨를 없이 펼쳐지고 있다. 카메라의 눈보다는 인간의 눈이 나았다. 보는 것에 일일이 이름은 못 붙일지언정 그 신기, 다기한 모습을 눈에 다 넣을 수는 있는데, 카메라의 눈은 그 모습을 다 넣지를 못한다. 바위가 몰려 있는 산의 모습뿐만 아니라 우뚝이 솟아 있는 바위 하나의 모습도 온전히 담을 수가 없다. 그러나 카메라에 담기를 애쓸 수밖에 없다. 눈은 보이는 것을 다 넣을 수 있기는 하나 간직하지를 못한다. 저 절묘한 것들을 한 번 바라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흐르는 시간 속에 간직해 두자면 그 일부나마 카메라에 담을 수밖에 없다. 그 신비한 풍광들을 두고 떠나기가 아쉽지만, 카메라에 담아놓은 것으로 위안을 삼고 다시 오기 어려운 발길을 돌린다.
다시 새로운 셔틀버스에 오른다. 산기슭을 돌고 돌아 달린다. 높은 산이 보이고 인가가 보인다. 토가족들의 거주지역이라 한다. 조금 전에 보았던 원가계의 풍경들이 차창 밖으로 펼쳐지고 있다. 포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차가 요동을 친다. 이삼십 년 전 우리나라의 시골 길이 연상된다. 차를 내린 곳은 하룡공원 구역. 토가족들이 경영하는 숙박시설과 음식점들이 보였지만 조금은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길가에는 노점상들이 밤이며 토산품을 들고 천 원을 외쳐대지만 거들떠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곤궁한 토가족의 삶이 여실히 보이는 듯했다. 길을 공사중이라 불편을 양해해달라는 안내문을 한국어로도 적어 놓았는데 어법이 맞지 않았다.
하룡공원(河龍公園)으로 들어선다. 중국의 10대 원수 중의 한 사람인 하룡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공원으로 '河龍公園' 휘호는 1995년에 강택민 총서기가 쓴 것이라 한다. 공원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하룡 장군 동상이다. 높이는 6.5m, 무게가 9톤으로 근 100년 동안 중국에서 가장 큰 동상이라 한다. 하룡 장군은 한국전에도 참전을 했다하니, 북한군과 함께 남한을 쳐들어 왔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50여 년이 지난 오늘 침략자의 동상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리고 그 주변 경관에 감탄하고 있다. 시대와 이념의 무상함이다.
원가계 무릉원의 가장 걸출한 경관이라고 하는 어필봉이 보인다. 하늘을 향해 뻗은 높고 낮은 세 개의 바위 위에 소나무가 서 있는 것이 마치 붓을 세워 놓은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전쟁에 진 황제가 천자를 향해 던진 붓이 꽂힌 것이라 하여 어필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다듬을 수 없을 듯한 절묘한 풍경이다. 경치가 잘 보이는 곳에 철근 받침대를 세워두고 그 위에 올라선 청년 하나가 사진을 찍어 주겠단다. 카메라를 맡기니 찍어주고서는 천 원을 달란다. 기가 막혔지만 웃으면서 주었다. 이곳 사람들은 한국 돈 '천 원'을 참 목말라 하고 있다.
셔틀버스를 잠시 타고 내린 곳은 천자산(天子山) 삭도.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내려간다. 케이블카 위 아래로 펼쳐지는 풍광들은 무의식중에도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5시의 해가 산을 넘고 있다. 한국보다 한 시간 빨리 가는 시간이지만 한국의 5시도 해가 지는 시각이다. 저녁놀의 채광을 받은 산 빛이 더욱 수려해 보인다.
케이블카를 내려와 다시 일행을 태우고 산을 내려갈 버스를 기다리며 그동안 겪은 에피소드들을 나눈다. '천 원'에 당한 열쇠고리 이야기가 으뜸 화제다. 어떤 이의 열쇠고리 장식물이 그만 부서지고 말았다. 그 불량품을 보며 다시 한 번 웃는다.
버스를 타고 올라왔던 길을 되짚어 출발지인 관광지구 입구에 이른다. 호텔에서부터 타고 온 버스로 갈아타고 원가계 무릉원구를 떠난다. 2,3층의 집들이 보인다. 연립주택 같지만 한 가정이 사는 집이란다. 잘 살아서 집이 큰 것이 아니라 비만 오면 물이 차고 습기가 많은 1층에서는 생활할 수 없어 2, 3층으로 짓는다는 것이다. 식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다니면서 하는 것이 토가족들의 독특한 식습관이고, 이빨 빠진 그릇을 좋아한단다. 삶의 경륜과 희노애락이 스며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땅거미가 젖어 올 무렵 백장협호텔에 이른다. 호텔 안에 있는 '백장협중심극장'에서 토가족들의 공연이 준비되어 있단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서커스 묘기와 가무 공연이 진행되었다. 여러 가지 묘기 중에 여섯 살 난 쌍둥이의 재주넘기는 눈물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토가족의 전통적인 제사의식을 시연하기도 했다. 기공을 이용하여 깨어진 병 조각 위를 걷기도 하고, 무사 두 사람이 창 끝을 목에 대고 서로 밀어대는 묘기는 소름을 끼치게 했다. 사회자가 '울고 넘는 박달재'를 걸쭉하게 부를 때는 나도 모르게 따라 불렀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라 중국인 것을 잠시 잊었다.
장가계의 원주민인 토가족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있다. 2000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802만8천 명 정도로 중국 전체 인구의 0.65%에 달한다고 한다. 주거주지는 호남과 호북이며, 장가계에 11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독특한 말은 있으나 문자는 없고, 언어생활은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오늘 공연에서 보여준 것처럼 무술을 매우 즐기는데, 무술을 즐기는 강인한 정신은 전쟁과 함께 살아온 그들의 민족사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춤추기도 매우 즐기며 손춤, 발춤 등 형식도 다양하다고 한다.
또한 그들에게는 독특한 의식이 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경사가 났다고 폭죽을 터뜨리고 춤을 추며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고생 많은 이 세상을 떠나 편안한 세상으로 가니 경사가 났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시집가는 일을 '곡가(哭嫁)'라고 하는데, 시집가기 보름 전부터 운다고 한다. 부모를 위해 울고, 형제를 위해 울고, 친척을 위해 울고,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운다는 것이다. 시집을 간 첫날 시부모 앞에서 세 번 절하고 구성지게 울어야 한단다. 이때 목청 돋우어 잘 울고 눈이 퉁퉁 부어 올라야 며느리를 잘 보았다며 재산을 상속해주고 곡간 열쇠를 준다고 한다. 눈이 많이 부어있지 않으면 3년을 더 가르친 후에 곡간 열쇠를 준다는 것이다. 죽음이 경사라면 결혼이란 또 하나 슬픈 삶의 시작이라는 말인가. 여자들이 마음에 드는 남자의 발등을 찍으면, 발등을 찍힌 남자는 그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한단다.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결혼하지 않으려면 황소 1마리를 여자 집에 주거나, 여자 집에 가서 한 달 동안 일을 해주어야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관습이다. 그리고 토가족은 설 하루 전 날을 명절로 즐긴다고 한다. 용맹무쌍한 토가족 남자들은 설날에 전의(戰意)를 다지면서 전쟁터로 나아갔는데, 출정하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명절의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설 하루 전 날을 명절로 삼았다고 한다. 지금도 설 전 날을 명절로 쇠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네들의 상식으로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특이한 풍습을 가진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류를 이루는 한족과 함께 55개 소수민족을 가진 중국은 가히 민족 전시장이라 할 수 있겠다. 모두들 특이한 생활 관습과 풍습과 문화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중국의 특별한 문화재요, 관광 자원이 라 할 수 있으니 중국은 역시 대단한 문화 자원을 가진 나라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공연장을 나와 호텔을 향하여 달린다. 안내원은 토가족 이야기와 함께 우리 동포 조선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조선족은 220만 명 정도로 주로 연변에서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다른 민족들은 거의 원주민이지만, 조선족은 모두 이주민들로써 일제시대에 많이 중국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자치주를 이루어 살고 있는데, 2002년에 자치주 수립 50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조선족은 어느 민족보다도 문화적으로 우수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살고 있는데, 안내원도 조선족 3세로서 아버지는 주 정부의 양식 정책 담당 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비교적 유족한 가정환경 속에서 예술학교에 진학하여 음악과 무용을 전공했다고 한다. 조선족에게는 다른 민족에 비해 여덟 가지 '제일' 가는 것이 있는데, '예절, 위생, 택시, 담배, 노래방, 술, 예술, 민족심'이 그것이라 했다. 중국의 소수민족 중에서 문화가 제일 발달한 민족일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문자와 언어를 가지고 있는다는 것에 제일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사는 것이 넉넉하진 못해도 중국 안의 여러 민족 중에서 제일 발달된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살고 있노라고 했다.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 민족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동포, 우리의 혈육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국가적인 시책이 강구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원은 오늘 여정의 피로를 푸는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 노래 한 곡을 부르겠다며 한국 노래 '자옥아'를 불렀다. 고객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한 성의가 역력히 보이는 듯했다. 차는 장가계 시내의 '金滿樓'라는 음식점 앞에 닿았다. 토가족 고유 음식에다가 한식을 곁들인 것으로 준비해 놓았다고 했다. 채소와 생선, 옥수수, 고기볶음 등으로 반찬을 준비했다. 이국 생활 사흘째의 만찬을 즐기다가 호텔로 돌아온 것은 10시경이었다.
이국의 밤을 그냥 잠들지 않았다. 일행은 두 방으로 나누어 모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져온 소주를 가방 속에서 털어 내고 이곳의 맥주의 곁들였다. 여정에 얽힌 이런 저런 견문담을 나누기도 하고, 우리네 살이에서 얽히고 설킨 인연담을 나누기도 하는 사이에 이국의 밤은 새록새록 깊어 가고 있었다.
장가계의 계곡 비경 그리고 용이 사는 동네
중국 여행 나흘째,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귀로에 올라야 하니 오늘이 마지막 여정의 날인 셈이다. 이곳은 비가 많이 오는 곳으로 날씨가 고르지 못할 때가 많다는데, 여행 내내 날씨가 쾌청하다. 오늘도 쾌청, 날씨 복을 많이 받은 여행이다.
모닝콜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옆에서 자고 있는 이 교장이 깰까 조심하며 호텔 밖으로 나왔다. 장가계 거리에도 아침이 열리고 있다. 차량들이 오가고 사람들이 일터를 찾아 오갔다. 포장마차에서 더운 국물을 마시는 사람도 있고, 길 건너 노점에서는 장판이 열리고 있다. 노동자인 듯한 사람이 차림새는 무척 남루한데도 휴대폰을 들고 있다. 중국에도 휴대폰은 보편화된 모양이다. 중고자동차매매장인 듯한 곳의 간판에 '以質量求生存 以服務求發展'이라는 표어가 적혀 있었다. '질과 양으로서 생존을 구하고, 서비스로서 발전을 구한다'는 말이겠다. 고객 위주의 영업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자본주의로 다가서고 있는 중국이 보인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호텔을 나선다. 오늘 저녁에는 북경으로 가야 하기로 모든 짐을 다 가지고 나선다.
고객을 무료하게 하지 않으려는 안내원의 노력이 계속된다. 맛보는 요리, 냄새 맡는 요리, 보는 요리 등 한꺼번에 128가지 요리를 즐겼던 서태후의 식도락이며, 중국의 3대 기이한 요리인 곰발바닥 요리, 모기눈알 요리, 원숭이골 요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다가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조선족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용정 이야기며 윤동주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1992년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할 때까지 조선족들은 '조국'은 오직 북조선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고 했다. 1981년생인 안내원도 그렇게 알고 자랐다고 했다. 동포들은 한국에 88올림픽이 열리고 1992년에 한·중 국교가 이어지면서 한국에 '남조선'도 있다는 것을 알고 이념적 갈등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남한을 조국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간혹 조국 사람들이 와서 남쪽이 더 좋으냐, 북쪽이 더 좋으냐고 물으면, "북한은 어머니요, 남한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을 하여 우리는 버려진 아이가 되었습니다. 누구를 더 좋아해야 하겠습니까?"라며 되묻는다고 한다. 조선족을 '버려진 아이'로 비유할 때 듣는 사람들 모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족 동포들에게 따뜻한 애정을 보내달라고 했다. 남북이 어서 통일되어야 하지만 마음의 통일이 더 중요하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우리는 모두 따뜻한 박수로 답해 주었다. 안내원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히는 듯했다.
어제 왔던 무릉원구로 다시 왔다. '무릉원(武陵源)'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등장하는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따온 말로 수려한 산세와 청량한 계곡, 그리고 기이한 동굴이 빚어내는 원시의 자연이 영락없이 무릉도원을 닮았다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라 한다. 어제는 산 위를 거닐었지만 오늘은 산 아래 계곡을 걷는다고 한다. 어제 만들었던 지문카드로 신분 확인을 받고 입장하여 셔틀버스로 갈아탔다. 계곡을 달리고 숲 속을 헤쳐 이른 곳은 '십리화랑(十里畵廊)'이라는 곳이다. 십리에 걸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모노레일이 오가고 있다. 레일을 타고 가며 계곡 사이에 펼쳐지는 풍경, 그 감동에 젖는다. 무성한 갈대 숲 건너 남쪽 산봉에는 어제본 원가계의 장관 못지 않은 갖가지 형상의 바위들이 줄지어 서 있다. 커다란 수석들의 전시장 같다. 집게손가락을 바로 세운 듯한 식지봉, 모자가 다정히 앉아 있는 듯한 모자봉, 약초가 든 망태를 지고 있는 약초 캐는 노인……. 역시 이곳도 이름이 모자랐다. 인간의 상상력이 신의 창조력을 따라갈 수가 없다. 갖가지 모양으로 우뚝우뚝 솟은 바위에 옷을 입듯 모자를 쓰던 나무들이 서 있고, 구름과 이내가 포옹하듯 이들을 감싸고 그것들이 한데 어울려 각양각색의 형상들을 연출해 내고 있다. 5㎞에 걸쳐 이어지는 절경은 세 자매가 다정하게 서 있는 세자매봉으로 끝이 난다. 나이가 든 자매들인 것 같다. 그 중 한 누이는 아기를 업고 있는 형상이다. 이 신비로운 광경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으랴. 나그네들은 필사적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으로라도 남겨 두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것 같은 예감을 떨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레일에 다시 오른다. 현철의 '사랑의 이름표'가 울려 퍼진다. 선경에 젖어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 싹 가셔진다. 갑자기 세속의 오염된 바람을 맞는 기분이다.
레일에서 내려 다시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금편계곡을 향해 달린다. 푸른 숲의 계곡을 잠시 달려 금편계곡에 닿았다. 한번 걸으면 십 년은 젊어진다고 해서 신선계곡이라고도 불리는 금편계곡은 깎아지른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지는 협곡으로 황금빛이 나는 300m 높이의 금편암 등 기기묘묘한 바위와 나무와 맑은 계곡수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계곡의 풍경이 그야말로 신선들 사는 세상인 것 같다. 기묘한 모습으로 우뚝우뚝 솟은 바위 사이의 길을 따라 잠시 걸어 들어가니 '張家界國家森林公園'라 새긴 커다란 바위가 막아선다. 주위에는 수많은 봉우리가 솟아 있고,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숲은 계절이 멈추어선 듯 아직 한창 푸르다. 어제 원가계에서 수많은 기봉(奇峰)들을 본 터라 감탄에도 익숙해져 버렸다.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이 절묘하게 생긴 품이 창조주의 전지전능한 힘을 절로 느끼게 한다. 놀라운 것은 절경만이 아니었다. 이곳의 절경을 그림으로 재현해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붓이 아니라 팔뚝과 손가락, 손톱으로 그려낸다. 먹물을 팔과 손에 묻혀 하얀 종이 위에 산수도를 그려내는 재주가 절묘하다. 신비경 속을 사니 재주도 신비로워지는 모양이다. 그 화가의 가게 옆에는 이동막걸리와 참이슬 소주를 팔고 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다시 선경의 환상에서 깨어나 세상 속으로 돌아와야 했다.
금편계곡을 나왔다. 상가에서는 우리나라 노래가 울려 퍼지고, 우리말 간판을 단 가게도 몇 집이나 보인다. 길가에 내어놓은 텔레비전에서는 우리나라 가요콘서트 장면이 방영되고 있다. 이 산골짜기에도 한류(韓流)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 같다. 어제 과음을 한 사람들은 속이 쓰리다며 국물이 있는 집을 찾았다. '김씨짜장면'이라는 간판을 단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어묵국물이라 나온 것이 소시지를 삶은 물 같기도 하여 영 입에 맞지 않다. 기왕 한국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기를 애쓸 것 같으면 입맛도 좀 맞추어주면 좋으련만.
무릉원구를 벗어나 다시 천자가로 나왔다. 어제 점심을 먹었던 곳이다. 식당에 올라 점심을 먹는데 식당 텔레비전을 모니터로 삼아 지금까지 영상회사 직원이 따라 다니며 촬영했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지나 온 자취가 담겨진 영상을 보며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안내된 곳은 '建貨天然博物館'이라는 실크 전문 취급점이었다. 안내원들에겐 그런 코스가 미리 기획되어 있는 모양이다. 고치를 번데기와 분리하여 늘여서 솜 같은 이불 속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실크 의상 패션 쇼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의상 매장도 안내했다. 일행이 매장을 둘러 보는 사이에 밖으로 나와 토가족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본다.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작고 마른 몸집이다. 여자들은 햇빛에 그은 검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는 길게 늘여 묶고 있다. 모자며, 가방이며, 손으로 짠 슬리퍼들을 토산품으로 팔고 있는 가게에서는 '천 원'을 외치며 목메게 길손을 부른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은 길가에 모여 앉아 카드놀이에 몰두하고 있고, 몇 사람의 여인네는 털실로 슬리퍼를 짜고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들 고단해 보이는 모습이다. 사는 것이 그리 고단하기에 죽음을 경사로 여기는 걸까.
황룡동굴(黃龍洞窟)에 이른다. 크고 작은 천연 동굴이 많은 것이 장가계의 특징 중의 하나라는데, 그 중 용왕의 논이 있다는 황룡동굴은 거대한 석회암 동굴이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 주민들은 동굴 안에 황룡이 산다고 믿으며 제사를 지냈었다고 한다. 동굴 안에 사람이 들어가는 것조차 꺼렸었는데, 토가족의 한 대학생이 동굴 안에 들어가 이틀만에 살아 온 후로 신비의 베일이 벗겨졌다고 한다. 1983년에 발견되어 그 이듬해부터 개방되었다고 하는데 총 면적은 48㎢, 총 길이 11.7㎞, 수직 고도 140m나 되는 거대한 동굴이다.
주차장에서 십여 분 걸어가 차례를 기다려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좁다란 입구를 통해 들어가니 행복문, 장수문이라는 두 개의 문이 나타나는데 행복하면서 장수하자고 행복문을 통해 들어가서 장수문으로 나오기로 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널따란 공간이 펼쳐지면서 갖가지 모양의 종류석과 석순들이 색색의 조명을 받으며 숲을 이루고 있다. 땅이 넓으면 동굴도 크고 넓은 모양이다. 우리나라 단양에 있는 고수동굴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동굴이다. 동굴 속에 동굴이 있고, 서로 엇갈리며 절묘한 경관을 이루는 산과 강이 있고, 산기슭을 따라 에도는 길이 있다. 용이 춤추며 노래하는 형상의 '용무청(龍舞廳)'을 지나니 '향수하( 水河)'라는 널따란 강이 나타난다. 배가 대어져 있다. 수심 6미터에 2,820m에 걸친 강을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니 깊숙한 골짜기로 물길이 굽이굽이 애돈다. 기슭엔 가파른 벼랑과 갖가지 모양의 종류석이 첩첩하고 강 가운데 섬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무슨 꿈속이나 환상 속을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까마득히 높은 곳에 다리가 있고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배를 내려 계단길을 타고 오르니 천선수(天仙水)라는 곳이 나타난다. 동굴 구멍에서 폭포가 안개처럼 쏟아져 내린다. 길이가 1㎞에 이른다는 천주가(天柱街)가 나타난다. 크고 작은 갖가지 모양의 종류석들이 몰려 있는 가운데 두드리면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석금산(石琴山), 향수하를 가로지르는 천룡교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용궁이라는 곳이 보인다. 무럭무럭 자란 1700여개의 석순들이 천태만상의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직경이 9m나 되는 용왕보좌는 근엄한 모습으로 아래를 굽어보고 있고, '정해신침(定海神針)'이라는 종류석은 가늘다가 굵어지기를 되풀이하면서 19.2m나 자라 있다. 행여 무너질까 1억 위엔의 보험에 들어 있다고 한다. 계단길을 오르고 내려 회음벽(回音壁) 앞에 이른다. 팍팍해진 다리를 잠시 쉬도록 해 놓았다. 잠시 쉬다가 일어서며 파이팅 대신에 '아자!'를 외치니 소리가 이내 되돌아온다. 마치 산골짝의 천수답 같은 모양으로 물이 고인 곳이 있다. 용왕이 농사를 짓는 논이라고 한다. 숱한 형상의 종류석과 석순을 지난다. 그 숱한 형상들에는 이름이 붙여진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역시 인간의 언어가 모자란 탓이다. 장수문을 거쳐 동굴을 나온다. 용들이 사는 동네를 다녀 온 것인가. 잠시 꿈속을 헤매었던 같다. 생시에는 도무지 다다를 수 없는 별천지를 다녀온 것 같다.
몽롱했던 꿈속의 세상은 다시 처참하게 깨어지고 아비규환의 세상이 펼쳐진다. '천 원!', '천 원!'을 외쳐대는 땟물에 전 소녀와 소년, 세상의 온갖 주름살을 얼굴에 그린 노인과 노파가 있는 세상이다. 악을 쓰듯 불러대는 기념품 가게 사람들, 한 뭉치의 밤이나 귤을 들고 바짝 붙어 따라오며 팔아달라 애걸하는 사람들, 십분도 못되는 시간을 걷는 사이에 사람들의 장막을 헤치느라 진땀이 났다. 우리나라 돈 천 원짜리 열 장을 묶고 들고 와서 만 원짜리로 바꾸어 달라고도 조르는 사람들이 있다. 천 원짜리 열 장보다는 만 원짜리 한 장이 더 가치 있게 쓰이는 모양이다. 차에 오르려는데 문득 '이발 세두 세면'이라 붉은 색으로 커다랗게 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백화문자로 써서 안내원에게 묻고서야 뜻을 알았다. 어렵게 사는 토가족들에게는 그런 간판이 커다란 만큼이나 이발하고 머리 감고 얼굴을 씻는 일이 큰 일인 모양이다. 모두가 고단하게 사는 모습이다.
무릉원구를 벗어나 다시 천자거리에 이른다. 점심때도 왔던 곳이다. '天子飾品'이라는 수정 전문 취급점으로 안내한다. 한 종업원이 나와 유창한 한국어로 자수정과 티베트산 천주와 수정 안경을 소개하고는 매장으로 안내한다. 매장에는 수정 제품이 가득하다. 종업원들은 모두 능숙한 한국어로 열심히 제품을 선전한다. 수정 돋보기 하나를 샀다. 안내원이 안내하는 매장은 모두 중국의 고유한 제품들을 판매하는 국영 상점이라 한다. 이런 곳에서도 에누리가 만연했다. 25,000원짜리 안경을 10,000원에 팔기도 했다.
장가계 시내로 향한다. 어떤 처녀가 까만 뿔이 달린 소와 송아지를 몰고 길을 가고 있다. 차가 경적을 울려대도 비켜설 줄을 모른다. 차가 비켜 가야 했다. 귀로의 해가 저물고 있다. 장가계를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북경을 떠나야 하고, 중국을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유난히 밝게 비치는 별 하나가 있다. 좀더 머물다가 가라고 잡는 손길 같다. 그러나 차는 달려가고 있다.
장가계 시내로 접어든다. 어두운 시가지에 네온 불이 빛난다. 차가 네거리에 섰다. 신기한 것을 보았다. 신호등 아래 대기 시각이 표시되고 있었다. 일정한 시간이 먼저 표시되어 점차 줄어들고 있다. 편리한 장치로 보였다. 그러나 교통질서가 잘 지켜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 간부 차가 지나간다고 모든 차를 다 세우고 우선 지나게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중앙선도 예사로 넘나들고, 행인들도 차가 오건 말건 횡단을 예사로 한다. 적당히 알아서 가는 것이 중국의 교통 질서란다. 후진국 중국의 모습이라고 할까.
차는 '玉樓東'이라는 음식점 앞에 멈춘다. 저녁을 먹을 곳이다. 장가계에서의 최후의 만찬이다. 생선과 버섯 요리가 나왔다. 생선찜은 식사 때마다 거의 먹은 듯하다. 별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는 요리다. 마지막 술 한 잔을 나누었다. 북경으로 향하는 차로 영상 촬영원이 장가계 여정을 촬영한 비디오와 사진을 들고 왔다. 허락 없이 찍은 것들이다. 그러나 여정 속의 모습이 담긴 것이라 모두들 말없이 대가를 치르고 받아 들였다.
북경행 비행기를 타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다며 가이드가 '공항 VIP 휴게 광장'으로 안내했다. 한글로 표기한 간판에는 '휴계'로 표기되어 있다. 종업원에게 바로 고칠 것을 말해 주었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한국말을 잘하는 이들이 그리 많던데, 이곳 종업원들은 신기하게도 한국어를 모른다. 공항에 들어가니 자막도 방송도 모두 한국어를 함께 쓰고 있다.
공항 검색대를 통과했다. 대합실에서 탑승 대기를 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공항 종사원 한 사람이 가방 하나를 들고 주인을 찾으면서 일행이 있는 곳까지 온 것이다. 그의 손에는 가방과 함께 사진이 들려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 일행 중 어떤 이의 가방이었고, 사진은 촬영원 아가씨가 준 것이었다. 검색대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잊어버리고 온 것이다. 가방을 뒤져 사진을 찾아 들고 탑승을 대기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주인을 찾아 왔다. 그의 여권을 보고서는 가방을 돌려주었다. '친절한 중국인'을 목도하는 순간이다. 가짜와 악다구니로 인상 지워진 상인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중국인이다. 중국 여행을 기쁨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9시50분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의 하늘을 헤치며 장장 1,650㎞를 날아 북경 공항에 도착한 것은 12시가 넘어서였다. 북경의 안내원이 영접을 나와 있었다. 대기해 놓은 차를 타고 '北京國都大飯店'이라는 호텔에 이른 것은 0시40분. 중국의 마지막 잠자리에 든 것은 새벽 2시가 가까워서였다. 아침엔 귀국 길을 서둘러야 한다.
뇌리에서 중국을 정리하는 사이에 몸은 잠에 젖는다.
귀로에서
귀로의 날이다. 중국에 머문 나흘 간은 너무나 청명한 날씨였다. 비가 그리 잦다는 장가계조차도 우리들에게는 참 좋은 날씨를 선사해 주었다. 5시에 콜을 받아 일어났을 때 안개가 많이 끼어 있었지만, 오늘도 맑을 것이다. 귀국의 시간을 서둘러야 한다. 만두와 떡으로 아침 식사를 마쳤다. '서유기'에도 나온다는 계란처럼 생긴 '인삼과'라는 과일을 처음 먹어 보았다. 체험의 미지는 끝이 없다. 중국을 보고 돌아간다 하나 과연 얼마만큼의 중국을, 중국의 무엇을 보았는가. 내가 본 중국은 아주 적고도 작은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애에 있어서 귀중한 체험 중의 한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모든 짐을 꾸려 호텔을 나선 것은 6시20분. 공항으로 갔다. 8시 반 출발 예정인 귀국행 비행기를 출국 수속이 시작되었다. 돌아가는 수속이 올 때보다 더 까다로운 것 같다. 현지 안내원과 석별의 인사를 나누고, 온갖 절차를 거쳐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탑승장으로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은 9시가 넘어서였다. 아니다. 10시가 넘어서였다. 이제는 중국의 시간과도 헤어져야 한다. 비행기가 하늘을 차고 나아간 것은 10시 반이 넘어서였다. 대구까지는 1,277㎞, 1시간50분이 소요되어 12시20분에 도착할 거라고 했다. 내 고향 대구로 간다. 내 생존과 생활의 터전으로 돌아간다. 기내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승객이 많이 채워지지 않은 탓인지 출발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게 어겼다. 중국 비행기는 제 시간에 운행되는 것이 비정상적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여행을 마무리짓는 지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중국은 큰 나라였다. 960만㎢에 이르는 세계 3위의 광활한 대륙을 가진 나라, 13억일지 15억일지를 모르는 엄청난 인구를 가진 나라, 56개 민족이 모여 사는 나라, 끝이 보이지 않는 인공호수와 엄청난 크기의 가산(假山)을 가진 황족 정원이 있는 나라, 9999개의 방이 있는 황궁을 가진 나라, 6,700㎞나 되는 장성을 가진 나라, 유네스코에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될 정도로 빼어난 절경을 가진 나라, 용이 산다는 어마어마한 동굴을 가진 나라……. 어느 나라도 따라갈 수 없고, 어떤 나라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넓이와 크기를 가진 나라다.
그러나 중국은 작은 나라다. 죽음을 경사로 여기는 고단한 소수민족이 사는 나라, 돈 되는 일이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나라, 그래서 가짜와 불량품이 판을 치고, 로렉스 손목시계를 이천 원에 파는 나라, 교통질서가 없는 나라 그래서 높은 사람이 탄 차가 지나가면 모든 차량은 멈춰야 하고 비행기가 제 시간에 날을 줄 모르는 나라, 물건을 살 때 80%는 깎아야 하고, 국영 상점에서도 물건값을 깎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 그리고 남의 역사를 빼앗으려 하는 속 좁은 나라……. 아직은 많은 것들을 정비해야 하고, 숱한 것들을 바로 잡아야 할 나라다.
두 얼굴의 중국. 내가 본 것이 그 광활한 중국의 아주 작은 부분일지라도, 그래서 중국에 대한 나의 인상과 생각이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 될는지 몰라도, 나는 보았다. 큰 중국과 작은 중국을. 이제 중국은 국제 질서 속에서 빈번해지는 내왕의 기회와 더불어 좋든 싫든 우리의 이웃이 되어 가고 있다. 서로 선량한 이웃 관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중국은 구각을 서서히 벗으며 우리에게서 후발 효과를 얻겠다고 한다. 6,7년 이내에 한국의 사는 모습을 따라잡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작은 중국의 모습을 커다란 중국으로 키우겠다고 한다. 함께 잘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우리의 역사가 어떠했는가. 중국의 힘이 강할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시 그런 역사는 되풀이할 수 없다. 중국이 일어설수록 우리도 더욱 분발해 나가야 할 일이다.
비행기는 지금 고국 산천을 날고 있다. 산과 들 그리고 내와 마을이 펼쳐진다. 그리 높고 크지도 않고, 그리 모나지도 않은 산하, 옹기종기 오순도순 모여있는 마을들. 어디를 봐도 내 정겨운 고향 같다. 우리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내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온, 나를 키운 우리의 땅이다. 계절의 절서(節序)가 뚜렷하고, 사람살이의 질서가 분명한 내 조국이다. 그렇게 되어야 할 내 삶의 터전이다.
비행기의 바퀴가 땅을 구른다. 하늘이 맑고 푸르다.
'크고도 작은 나라' 중국을 깊이 새기자며,
그리하여 새로운 우리의 모습도 찾아보자며,
함께 한 여정 좋은 인연으로 간직하자며,
일행들은 박수를 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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