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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바꾸는 전염병
6. 콜레라와 공중보건학의 태동
글 출처 : 정역주의,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바꾸는 전염병이란 무엇인가?
글 연재 : 개벽밸리
윤 석 현 가정의학과 전문의 (태전 증산도 사상 연구회원)
예방의학의 첫 시작은 존 스노우의 콜레라 예방법 발견으로 부터 시작이 됩니다. 존 스노우는 콜레라를 일으키는 원인에 대한 분석 방법으로 통계학을 사용하게 되었고 통계학적 기법이 의학에 적용되어 효과를 본 첫번째 케이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존 스노우는 예방의학과 공중 보건의 태동 뿐만 아니라 의학 통계학의 시작점으로 봅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수의 예방 의학 교과서나 의학 통계학 교과서의 1편 1장이 존 스노우와 콜레라 이야기로 시작 합니다. 예방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씩 듣게 되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그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 또한 미스테리 입니다.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왜 이토록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19세기 영국이니 그 시대적 배경도 흥미 진진한 시기 이고 또한 유럽에 영원히 지지 않는 해라고 불리던 영국의 이야기 이니 더욱 더 관심이 갑니다. 영화 배우 성룡이 리메이크 한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시대적 배경도 이때가 아닌가 생각 됩니다.
6-1. 콜레라 전염병 극복이 의학사에서 갖는 의미.
전염병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에 대한 규명과 이에 대한 백신과 치료제의 발전은 인류에게 전염병 극복을 가능하게 만드는 큰 힘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전염병에 대한 통제는 개인 병원이나 종합 병원에서의 환자 치료 수준에 의해서가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의 공중보건 사업이 나오게 되면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의 보건 정책은 훗날 전쟁에도 그 개념이 도입이 되었고, 이러한 공중 보건 정책에 의한 전염병 통제의 성공으로 독일 제국에 건국이 되고 미국이 제국이 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보건 정책은 영국에 1838년부터 시작된 콜레라 전염병을 극복하기 위한 에드윈 채드윅과 존 스노우라는 두 사람의 노력의 결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6-2. 콜레라는 어떤 전염병인가요?
콜레라는 비브리오 콜레라 (Vibrio Cholera)라고 하는 균을 통해서 발생을 합니다. 쉼표 (,) 같은 간균으로 그 이름은 진동하는 모습에서 왔다고 합니다. 위생시설 및 환경위생이 나쁜 곳 (특히 오염된 상수도원)에서 발생되며 오염된 식수, 음식물,어패류를 먹은 후 감염됩니다. 콜레라 균은 사람이 일단 삼키면 장에서 증식하면서 강한 독소를 분비합니다.잠복기간은 1∼3일간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Vibrio cholerae -- the cholera bacterium
초기에는 구역질과 구토가 날 수 있으며 통증이 없는 설사가 갑자기 시작이 되고 쌀뜬물과 같은 색의 설사가 하루에 20-30회 일어나기 때문에 치료하지 않으면 심한 탈수 증상이 나타나며 이에 따른 순환기 부전이 나타나며 신부전으로 빠져서 사망을 하게 됩니다. 콜레라는 대개 하루 또는 몇 시간 만에 환자의 20~ 50% 가 사망을 하는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http://ije.oupjournals.org/cgi/content/full/31/5/908/F1
지금이야 콜레라에 의한 설사 증상이 나타나도 수분 및 전해질을 보충해 주고 테트라사이클린 등을 사용하여 치료할 수 있고,물이나 음식물을 끓여 먹으면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예방도 가능하지만 콜레라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1817년 당시에는 콜레라는 죽음의 사신과도 같은 무서운 전염병이었습니다.
6-3. 콜레라 전염병의 시작과 전파 경로
콜레라는 2500년 전부터 인도에 있어 왔던 병입니다. 주로 인도의 갠지스강 유역의 벵갈, 그리고 중국의 일부 해안 지대에서만 있던 풍토병이었습니다. 1816년에는 푸니아 (Purneah) 지역과 동인도 지역에 있는 바이하르 (Bihar)에서 풍토병 발생이 보고 되었습니다. 흑사병이나 천연두와 같이 오래 동안 인류를 괴롭혀 왔던 병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 산업화가 되고 지구가 좁아지면서 세계적인 문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풍토병에 불과하던 콜레라는 가 범 유행성 질환인 전염병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817년에 접어 들면서 부터였습니다. 당시 인도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은 17세기부터 캘커타 (Calcutta)를 행정 도시로 만들기 위해 도로와 철도 그리고 항구를 만들었는데 이곳을 통해 상인, 행정가, 군대, 순례자등이 끊임없이 왕래 하면서 도시는 대형화 되었고 점차 더러운 소굴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817년 8월에 캘커타(Calcutta)와 제소르 (Jessore)에서 콜레라가 발생 하였고 1주 만에 5천명의 영국 군인들이 콜레라로 죽었습니다. 이 사건을 콜레라의 전 세계적인 전염병의 시작 시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콜레라는 곧이어 1818년 12월에는 스리랑카에까지 전염이 됩니다. 그러는 동안 인도 북부 경계선에서 영국군과 대치상황에 놓여 있던 아프간과 네팔의 군인들도 얼마 안 있어서 콜레라에 걸리게 됩니다. 이어 버마와 타이렌드에서도 콜레라 전염병이 발생합니다. 거의 동시에 수마트라, 자바, 필리핀, 중국, 일본, 그리고 남 아시아 전역에 콜레라가 퍼지게 됩니다.
1821년 노예 상인 근절이란 명목으로 오만에 무스캇 (Muscat)에 들어간 영국 군인을 통해서 콜레라가 유입이 되었고 콜레라에 전염된 노예 상인들을 통해서 아프리카 동부 연안 부터 잔지바까지 콜레라가 퍼지게 됩니다.
1821년 페르시아만 꼭대기인 바스라 (Basra) 지역에 창궐하기 시작 한 뒤로 바르다드, 시리아, 안톨리아, 그리고 러시아 남부에 위치한 아스트라칸 (Astrakhan) 지역에도 콜레라가 창궐을 합니다. 하지만 1823년부터 1824년까지 예외적으로 추웠던 겨울에 의하여 그 이상으로 콜레라가 전파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콜레라가 유럽에서 맹위를 떨친 것은 1830년대의 전반이었습니다. 1830년 모스코바는 콜레라로 고생르 한 최초의 유럽 도시가 되었었는데 이때의 사뭉률은 50% 이상을 상회하였다고 합니다. 공포에 질린 모스코바 시민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스몰렌스크로 가는 도로를 가득 메웠고 이 병은 이주민들과 함께 러시아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이 병은 홀란드를 거쳐 1831년에는 독일 함부르크에 퍼졌습니다. 1831년 여름 헝가리에 콜레라가 유행을 하면서 1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죽어 나가게 되자 농민들을 죽이기 위해 귀족들이 독을 탔다는 소문이 나돌게 폭동이 유발 되기까지 합니다. 이런 현상은 러시아를, 독일, 헝가리를 비롯하여 프랑스 등 유럽 각 지역에서 나타났습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 가 있었던 독일시인 하이네는 파리의 콜레라 공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갑자기 죽는다는 것은 병이라기보다 독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빵 가게,푸줏간,술집,야채시장에 독을 뿌리고 다닌 자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고 모이는 거리마다 웅성거렸다. 그러다가 수상한 사람의 호주머니에서 하얀 가루약을 보았다고 말하면 군중은 야수처럼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죽임을 하곤 했다. 이렇게 참살 당한 사람을 나는 여섯 명이나 알고 있다."

http://www.nsf.gov/od/lpa/forum/colwell/rc02abelwolman/sld014.htm
이 병은 러시아에서 폴란드, 독일을 거쳐 배를 통해 1832년 2월 12일 런던 동해안에 처음으로 콜레라 유입이 보고 되었습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전염병에 의한 주 사망은 콜레라보다 결핵이 더 많았었고 1832년 당시에는 800명만이 콜레라로 죽었습니다. 영국에서의 콜레라 전염병에 의한 1차 공습은 이로부터 6년 뒤인 1838년 에 발생합니다.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미국 뉴욕에 콜레라가 유입이 되고 1855년에는 전 세계로 창궐을 하게 됩니다. 특히 1866년 봄 리버풀 (liverpool)에서 떠난 배들에 있던 콜레라 환자들에 의해 미국 전역에 콜레라가 유입이 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차례의 콜레라 유행이 더 있었습니다.

http://members.iquest.net/~joemilr/conquest.htm

http://wwwihm.nlm.nih.gov/ihm/images/A/12/770.jpg
1차 유행 : 1817년 인도에서 시작 전 세계적인 전염병 시작
2차 유행 : 1824년 카스피해에서 시작하여 러시아, 폴란드, 터키 오스트리아
1832년 독일과 영국 미국
1833년 남미에 유입된 이후 풍토병으로 지속
3차 유행 : 1838년 영국
1848년 미국 뉴욕에 유입
185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유입
1855년까지 전 세계에 창궐
4차 유행 : 1863년 ~ 1874년
5차 유행 :1899년 ~ 1923년
6-4. 콜레라가 창궐하던 1838년 당시 영국의 모습
1838년 당시 영국은 산업 혁명으로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천연두 백신 접종 사업의 성공과 외과 기술의 발달의 도움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 하였고 또 인구가 산업화된 도시 지역을 밀질 하였기 때문에 도시들의 위생 상태는 최악의 조건이었습니다.

http://www.ph.ucla.edu/epi/snow/snows_testimony.html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도심지로 몰려들어 살게 되었는데 그곳은 가장 기본적인 위생시설조차 부족했고 뒷골목에는 항상 배설물이 널려 있었으며 도시 사람들은 온갖 것으로 오염된 운하 물과 강물을 마시고 살아갔습니다. 쓰레기와 배설물은 부정기적으로 치워 지거나 아니면 전혀 치워지지 않았으며 동물의 배설물이 거리를 가득 메워서 런던은 악취를 풍겼다고 합니다. 각 가정은 대개 거리나 도랑으로 바로 연결된 오물 구덩이에서 하수를 처리하였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분변을 거름으로 팔기 위해 분변을 방에다 모아두기까지 했습니다. 런던의 일곱 개 하수도는 서로 연결되지 않았고 파이프도 많이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하수도에는 인간과 동물이 배출 한 수천 톤의 분변, 도살장의 폐기물, 병원과 가죽 공장의 악취 나는 오물, 때로는 시체, 그리고 묘지의 오염된 지하수등이 쏟아져 들어 갔다고 합니다. 런던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모든 오물의 종착지는 템즈강 ( River Thames)이었는데 템즈강은 런던 대부분의 상수원 구실을 하였다고 합니다.

This section shows the River Thames, Southwark Bridge and the Royal Exchange
http://www.ph.ucla.edu/epi/snow/woodcut_london1844_E.html
콜레라가 영국에 처음 유입이 되었던 1832년 당시에는 여덟 개의 용수 회사들이 있었지만, 한 곳만 실험적인 정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을 정도로 위생 시설이 열악했다 합니다. 템즈 강에서 오는 것 이외의 물은 우물로 부터 나왔는데, 이것도 템즈강 못지 않게 오염이 되어 있었습니다. 1832년 콜레라가 영국에서 처음 유입된 이후로 콜레라 전염병 유행이 크게 4번 있었으며 1948년 때가 사망률이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1838년 콜레라가 가장 유행하던 달에 2600명이 죽었는데 비해, 1848년의 같은 시기에는 1만 1000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당시 콜레라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1838년 2만 2천
1848년 ~9 7만 2천
1853년 ~4 2만
1868년 1만 4천
6-5 에드윈 채드윅과 공중 보건법의 탄생
제너의 천연두 종두법 발견으로 영국은 천연두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갖기 시작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천연두가 영국에서 완전히 살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영국은 농촌으로 부터 유입되는 인구와 도시의 발전과 더불어 증사한 인구 성장으로 더 조밀한 인구 집단이 형성이 되었습니다. 공장과 빈민가 그리고 대규모의 쓰레기 더미, 오염된 공기와 물등 전염병이 발생하기 좋은 환경적 여건이 조성이 됩니다. 그렇다고 뚜렷한 치료제나 백신이 개발되기 이전의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도시 문화 환경 속에서 콜레라의 발생은 필연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콜레라 창궐로 인해 사망을 하였습니다.하지만 처음에 콜레라를 도시의 쓰레기와 환경 오염에 결부 시킨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당시 의학은 중세 이래 거의 발전이 발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콜레라가 돌자 의사들이 권장을 했던 방법은 아편, 담배, 스트리키닌, 얼음목욕, 한증목욕 등이 전부였습니다. 병원은 사람들이 나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 죽으러 가는 장소였습니다. 오히려 의학 지식이 없던 일반인들은 오히려 콜레라가 전염된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페스트 때와 마찬가지로 검역 차단 구역 설치를 국민들이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의료계도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영국 정부에 의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접근 또한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19세기 초기 영국은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나 모두 자유방임적인 신념을 갖고 있었고 정부는 사회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 할 때 사화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보건은 사적인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기초적인 위생 수단조차도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 여겨졌던 것이지요.
이러한 신념에 대해서 처음 반기를 든 것은 제러미 벤덤입니다. 그는 정부가 국민 대다수를 위한 것이라면 공중 보건에 관한 법을 통과 시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벤덤의 이러한 정신을 신봉하던 에드윈 채드윅은 1832년 구빈법을 조사연구 하던 위원회의 책임 간사가 됩니다. 이 때 체드윅은 빈민들을 치료하기 위해 존재하는 구빈원이 오히려 전염병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있다고 보고 합니다. 그리고 더욱 상세한 조사 결과 1842년에는 더럽고 비위생적인 주거 환경이 전염병을 일으킨다고 보고 합니다.

http://www.civeng.ucl.ac.uk/edwin.htm
채드윅은 하수나 오물 처리만 제대로 하면 공중 보건 문제가 해결이 되리라 믿고 있었고 1848년 영국에 제 1차 공중보건법이 제정이 될 때 그의 생각이 반영이 됩니다. 그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방 자치 단체가 원하거나 납세자의 1/10 이상이 요구하는 경우에는 그 지방에 공중 보건 위원회를 둘 수 있다. 그리고 런던의 중앙 보건 위원회는 어느 지방의 조사망율 (인구 천 명 가운데 한 해 동안 사망한 사람의 수)이 23/1000 이상이 되는 경우 지방 자치 단체의 공중 보건 위원회 구성을 명할 수 있다. 공중 보건 위원회는 상수 공급, 하수 처리, 가로 청소 등을 위해 주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
1848년에는 영국에서 제 1차 공중 보건법이 통과 되면서 전염병을 통제하기 위한 국가적인 정책이 처음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정책은 원론적인 내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개혁 조치에 대한 수많은 반대에 의해 강제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합니다. 정작 영국에서 만연하고 있는 콜레라 전염병의 대책에 있어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콜레라의 유행 경로를 발견하여 실질적인 보건 정책의 방법을 제시해 준 존 스노우의 도움으로 그는 상하수도 시스템 개선을 시행 할 수 있게 됩니다.
6-6. 존 스노우와 역학의 탄생
인간의 실질적인 전염병 관리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1854년에 콜레라가 오염된 물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낸 영국 런던의 의사이며 역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스노우 (John snow)에 의해서였습니다.

http://www.ph.ucla.edu/epi/snow/box1cricketarticle.htm
스노우는 한 지역에서 치명적인 질병이 무리지어 나타나는 사실에 주목을 하였습니다. 스노우는 런던에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던 1848~49년, 그리고 1853년~54년에 사망자의 발생 장소를 지도상에 표시하여 봄으로써 특정 회사에서 제공한 물 펌프와 콜레라에 의한 사망 사이에 연관 관계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환자들과 사망자들이 모두 브로드가 40가의 한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는 사실도 발견을 하게 된 것이지요.

http://www.ph.ucla.edu/epi/snow/mapsbroadstreet.html

http://www.ph.ucla.edu/epi/snow/snowmap1_1854.html

http://www.ph.ucla.edu/epi/snow/indexcase.html

http://www.ph.ucla.edu/epi/snow/mapsbroadstreet.html
특히 그는 다른 지역에서의 콜레라에 의한 사망자 수와 비교 분석을 함으로써 연관 관계를 증명 하였고 통계를 이용한 증명 방법을 최초로 사용합니다. 다음은 1854년 7월 8일부터 8월 26일 동안 콜레라에 의해 생간 사망자 수를 비교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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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공급 회사 |
1851년 인구 |
콜레라에 의한 사망자수 |
인구 천명당 콜레라에 의한 사망자 비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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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wark |
167,654 |
844 |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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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mbeth |
19133 |
18 |
0.9 |
훗날 콜레라가 이 지역에서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당시 29살로 브로드가 40에 있던 성제임스 성당 (St. James"s Church)의 성직자였던 레버랜드 핸리 화이트해드 (Reverend Henry Whitehead : 1825-1896 )에 의해 밝혀지게 됩니다.

1854년 8월 29일 브로드가 40 (40 Broad Street)에 살던 여인은 남편과 아이를 콜레라 때문에 잃게 됩니다. 당시 화이트해드는 임종을 위한 기도를 위하여 방문을 하였고 이때 애기의 엄마로 부터 애기가 사망하기 전날 그녀는 애기의 설사를 닦은 냅킨과 기저기를 물에 넣어서 집 앞에 있던 지하의 오수 저수지에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지하 저수지의 물이 펌프로 전염되는 것을 우려 했던 화아트해드는 이 지역 담당자에게 이야기를 하여 이 부근을 확인해 보게 하였고, 담당자가 확인해 본 결과 물 펌프와 저수지와는 불과 3 피트도 안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스노우가 1854년 9월 7일 저녁 지역 당국에게 물 펌프의 손잡이를 교체 하도록 요구 했고 이미 물 펌프의 위생상태를 확인 하였던 물 펌프 담당자는 그 다음날 물 펌프의 손잡이를 교체 할 뿐만 아니라 물 펌프를 폐쇄 시켜 버립니다.

왼쪽 건물은 성제임스 성당이고 오른쪽에 있는 모자쓴 신사가 당시 스노우를 만났던 담당자랍니다.
http://www.ph.ucla.edu/epi/snow/1859map/boardof_guardians.html
당시의 사람들은 물 펌프 손잡이 교체에 대한 효과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임스 성당의 성직자 화이트해드 (Reverend Henry Whitehead)는 또한번 스노우를 도와 줍니다. 그는 아래와 같은 도표를 그려서 물 펌프 손잡이 교체가 콜레라 전염병 예방에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을 합니다. 래버랜트와 스노우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던 사람이었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콜레라의 전염병에 대한 원인에 대해서 같은 결론을 내렸고 스노우의 학설에 보이지 않는 힘을 실어줍니다.

http://www.ije.oupjournals.org/content/vol31/issue5/images/large/C02_47DaveySmith_f4.jpeg

http://www.ph.ucla.edu/epi/snow/snowpub.html
물 펌프 손잡이 교체의 효과는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867년 콜레라가 세 번째로 영국을 덮쳤을 때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스노우는 콜레라 물속의 균 같은 어떤 것에 의해 유발되며 사람에게 사람으로 전염이 된다는 본인의 통계 자료가 사실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스노우의 콜레라의 발생과 물과의 관계를 밝힌 업적의 도움으로 영국은 상하수도 시크템을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콜레라의 발생뿐만 아니라 이질, 장티푸스, 설사 같은 다른 수인성 전염병의 발생도 감소하였습니다.

http://www.ph.ucla.edu/epi/snow/removal.html
이러한 결과에 힘을 얻은 채드윅은 82개 지방자치단체에게 공중보건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권했으나 오히려 사생활 침해 및 재원 마련을 위한 세금 인상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여러 방면의 반대에 부딪쳐 1854년 중앙보건위원회의 건판을 내리게 됩니다. 그의 개혁은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채드윅의 사업을 이어 받아 1855년 보건위원회를 다시 열은 존 사이먼에 의해 불씨가 살아남게 됩니다.
영국에서는 여러 단체의 이해득실에 의해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공중 보건 관리를 시행하지 못하다가 1866년 제 4차 콜레라 전염병이 발생으로 1만 4천명의 사람이 사망을 하자 하원 의원에서 드디어 무언가 조취를 취해야만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1875년 2차 공중보건법을 재정하면서 새로운 공중보건법에 지방 자치 단체가 필요한 조취를 취하도록 하는 강제 조항을 삽입 시키면서 그 효력을 발휘 하게 됩니다.
1880년대 이집트에서 콜레라가 심하게 발생하자 이 지역으로 파견된 코프가 1883년 카이로에서 콜레라 유행을 연구하다가 환자와 음료수와 음식에서 콜레라 균을 발견하게 되면서 의학과 공중 보건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콜레라 방벽 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하였으며 1926년 이후에는 세계적인 대 유행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보건 정책과 역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학문의 분야가 생겼으며 다른 전염병에도 보건 정책과 역학이 적용이 되면서 인류는 전염병의 그늘에서 서서히 벗어 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패턴으로 돌아가는 듯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