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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제월봉과 면앙정의 형세
无等山(무등산) 한 활기 뫼히 동다히로 버더 이셔
멀리 떼쳐 와 霽月峯(제월봉)이 되여거날
無邊大野(무변 대야)의 므삼 짐쟉 하노라
닐곱 구비 한데 움쳐 므득므득 버럿난 닷.
가온대 구비난 굼긔 든 늘근 뇽이
선잠을 갓 깨어 머리랄 안쳐시니
너라바회 우해 송죽을 헤혀고 정자를 안쳐시니
구름 탄 쳥학이 천리를 가리라 두 나릐 버렷난 닷
무등산 한 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어 있어, (무등산을) 멀리 떼어 버리고 나와 제월봉이 되었거늘, 끝 없는 넓은 들에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일곱 굽이가 한데 움치리어 우뚝우뚝 벌여 놓은 듯, 그 가운데 굽이는 구멍에 든 늙은 용이 선잠을 막 깨어 머리를 얹어 놓은 듯하며, 넓고 편편한 바위 위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헤치고 정자를 앉혀 놓았으니, 마치 구름을 탄 푸른 학이 천 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벌린 듯하다.
<본사 1> 면앙정의 아름다운 경치
玉泉山(옥천산) 龍泉山(용천산) 나린 믈이
정자 압 너븐 들해 올올히 펴진 드시
넙거든 기노라 프르거든 희디마나
雙龍(쌍룡)이 뒤트난 닷, 긴 깁을 채폇난 닷
어드러로 가노라 므삼 일 배얏바
닷난 닷 따로난 닷 밤낫즈로 흐르난 닷 .....시냇물의 아름다운 경치 <근경(近景)>
옥천산, 용천산에서 내리는 물이 정자 앞 넓은 들에 끊임없이 (잇달아) 퍼져 있으니, 넓거든 길지나, 푸르거든 희지나 말거나(넓으면서도 길며 푸르면서도 희다는 뜻), 쌍룡이 몸을 뒤트는 듯, 긴 비단을 가득하게 펼쳐 놓은 듯, 어디를 가려고 무슨 일이 바빠서 달려가는 듯, 따라가는 듯 밤낮으로 흐르는 듯하다.
므조친 沙汀(사정)은 눈갓치 펴뎠는데 어즈러온 기럭기난 므스거슬 어로노라
안즈락 나리락 모드락 흣트락
蘆花(노화)를 사이 두고 우러곰 좃니난고..... 물가의 기러기 <근경(近景)>
물 따라 벌여 있는 물가의 모래밭은 눈같이 하얗게 펴졌는데, 어지러운 기러기는 무엇을 통정(通情)하려고 앉았다가 내렸다가,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갈대꽃을 사이에 두고 울면서 서로 따라 다니는고?
너븐 길 밧기요 긴 하날 아래
두르고 꼬잔 거슨 뫼힌가 屛風(병풍)인가 그림가 아닌가.
노픈 닷 나즌 닷 긋난 닷 닛난 닷
숨거니 뵈거니 가거니 머물거니
어즈러온 가온데 일흠난 양하야 하날도 젓티 아녀
웃독이 셧난 거시 秋月山(추월산) 머리 짓고
龍龜山(용구산) 夢仙山(몽선산) 佛臺山(불대산) 魚登山(어등산)
湧珍山(용진산) 錦城山(금성산)이虛空(허공)에 버러거든
遠近(원근) 蒼崖(창애)의 머믄 것도 하도 할샤..... 면앙정 주위의 산봉우리 원경 (遠景)>
넓은 길 밖, 긴 하늘 아래 두르고 꽂은 것은 산인가, 병풍인가, 그림인가, 아닌가. 높은 듯 낮은 듯, 끊어지는 듯 잇는 듯, 숨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며, 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며, 어지러운 가운데 이름난 체하여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뚝 선 것이 추월산 머리 삼고, 용구산, 몽선산, 불대산, 어등산, 용진산, 금성산이 허공에 벌어져 있는 데, 멀리 가까이 푸른 언덕에 머문 것(펼쳐진 모양)도 많기도 많구나.
<본사 2> 면앙정의 사계절의 풍경
흰구름 브흰 煙霞(연하) 프르니난 山嵐(산람)이라.
千巖(천암) 萬壑(만학)을 제 집을 삼아 두고
나명셩 들명셩 일해도 구난지고.
오르거니 나리거니
長空(장공)의 떠나거니 廣野(광야)로 거너거니
프르락 블그락 여트락 지트락
斜陽(사양)과 섯거디어 細雨(세우)조차 뿌리난다. .....춘경(春景)
흰 구름과 뿌연 안개와 놀, 푸른 것은 산 아지랭이다.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를 제 집을 삼아두고. 나며 들며 아양도 떠는구나. 오르기도 하며 내리기도 하며 넓고 먼 하늘 에 떠나기도하고 넓은 들판으로 건너가기도 하여, 푸르락 붉으락, 옅으락 짙으락 석양에 지는 해와 섞이어 보슬비마저 뿌리는구나.
籃輿(남여)랄 배야 타고 솔 아래 구븐 길로
오며 가며 하난 적의
綠楊(녹양)의 우난 黃鶯(황앵) 嬌態(교태) 겨워 하난고야.
나모 새 자자지어 수음이 얼린 적의
百尺(백 척) 欄干(난간)의 긴 조으름 내여 펴니
水面(수면) 凉風(양풍)이야 긋칠 줄 모르난가. ......하경(夏景)
뚜껑 없는 가마를 재촉해 타고 소나무 아래 굽은 길로 오며 가며 하는 때에, 푸른 버들에서 지저귀는 꾀꼬리는 흥에 겨워 아양을 떠는구나. 나무 사이가 가득하여(우거져) 녹음이 엉긴 때에 긴 난간에서 긴 졸음을 내어 펴니, 물 위의 서늘한 바람이야 그칠 줄 모르는구나.
즌 서리 빠딘 후의 산 빗치 錦繡(금수)로다.
黃雲(황운)은 또 엇디 萬頃(만경)의 편겨긔오.
漁笛(어적)도 흥을 계워 달랄 따라 브니난다. ......추경(秋景)
된서리 걷힌 후에 산빛이 수놓은 비단 물결 같구나. 누렇게 익은 곡식은 또 어찌 넓은 들에 퍼져 있는고? 고기잡이를 하며 부는 피리도 흥을 이기지 못하여 달을 따라 부는 것인가?
草木(초목) 다 진 후의 江山(강산)이 매몰커날
造物(조물)이 헌사하야 氷雪(빙설)로 꾸며내니
瓊宮瑤臺(경궁요대)와 玉海銀山(옥해은산)이
眼低(안저)의 버러셰라.
乾坤(건곤)도 가암열샤 간 대마다 경이로다. ......동경(冬景)
초목이 다 떨어진 후에 강과 산이 묻혀 있거늘 조물주가 야단스러워 얼음과 눈으로 자연을 꾸며 내니, 경궁요대와 옥해은산 같은 눈에 덮힌 아름다운 대자연이 눈 아래 펼쳐 있구나. 자연도 풍성하구나.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경치로다.
<결사> 작자의 풍류생활
人間(인간)을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업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져것도 드르려코
바람도 혀려 하고 달도 마즈려코
밤으란 언제 줍고 고기란 언제 낙고
柴扉(시비)란 뉘 다드며 딘 곳츠란 뉘 쓸려뇨.
아참이 낫브거니 나조해라 슬흘소냐.
오날이 不足(부족)커니 來日(내일)이라 有餘(유여)하랴.
이 뫼해 안자 보고 뎌 뫼해 거러 보니
煩勞(번로)한 마암의 바릴 일이 아조 업다.
쉴 사이 업거든 길히나 젼하리야.
다만 한 靑藜杖(청려장)이 다 므듸여 가노매라...... 자연을 즐기는 풍류 생활
인간 세상을 떠나와도 내 몸이 한가로울 겨를이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쏘이려 하고, 달도 맞으려고 하니,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으며,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 것인가? 아침나절 시간이 부족한데 (자연을 완상하느라고) 저녁이라고 싫을소냐? (자연이 아름답지 아니하랴.) 오늘도 (완상할) 시간이 부족한데 내일이라고 넉넉하랴? 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에 걸어 보니 번거로운 마음이면서도 아름다운 자연은 버릴 것이 전혀 없다. 쉴 사이가 없는데(이 아름다운 자연을 구경하러 올) 길이나마 전할 틈이 있으랴. 다만 하나의 지팡이만 다 무디어 가는구나.
술이 닉어거니 벗지라 업슬소냐.
블내며 타이며 혀이며 이아며
온가짓 소래로 醉興(취흥)을 배야거니
근심이라 이시며 시람이라 브트시랴.
누으락 안즈락 구브락 져츠락
을프락 파람하락 노혜로 놀거니
天地(천지)도 넙고넙고 日月(일월)도 한가하다.
羲皇(희황) 모랄러니 이적이야 긔로고야
神仙(신선)이 엇더턴지 이 몸이야 긔로고야....... 취흥에 젖어 태평성대 구가(謳歌)
술이 익었거니 벗이 없을 것인가. 노래를 부르게 하며, 악기를 타게 하며, 악기를 끌어당기게 하며, 흔들며 온갖 아름다운 소리로 취흥을 재촉하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라 붙었으랴. 누웠다가 앉았다가 구부렸다 젖혔다가, 시를 읊었다가 휘파람을 불었다가 하며 마음 놓고 노니, 천지도 넓고 넓으며 세월도 한가하다. 복희씨의 태평성대를 모르고 지내더니 이 때야말로 그것이로구나. 신선이 어떻던가 이 몸이야말로 그것이로구나.
江山風月(강산 풍월) 거나리고 내 百年(백 년)을 다 누리면
岳陽樓(악양루) 상의 李太白(이태백)이 사라오다.
浩蕩(호탕) 情懷(정회)야 이에서 더할소냐..... 호연지기(浩然之氣)
江山 風月 거느리고 (속에 묻혀) 내 평생을 다 누리면 악양루 위의 이백이 살아온다 한들 넓고 끝없는 정다운 회포야말로 이보다 더할 것인가.
이 몸이 이렁 굼도 亦君恩(역군)이샷다.......군은(君恩)
이 몸이 이렇게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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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 ? 옛 선비의 멋스러움이...
조광조와 호남
1519년(중종14년) 12월 20일 전라도 능성현 남정마을(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구). 유배형에 처해 있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사약을 받았다. 조선 중기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결과(기묘사화)였다.
능성현 월곡리 태생으로 당시 호남사림의 선두였던 학포 양팽손(梁彭孫,1488~1545)은 그의 시신을 수습, 장례를 지냈다.
광주 서창(광주시 광산구 서창동)에서 태어난 박상((朴祥,1474~1530)은 기묘사림을 후원했고, 유배가는 조광조의 손을 잡으며 애국시(愛國詩)를 지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인 소쇄원(瀟灑園,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을 지었던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서울에 있었던 조광조의 문하에 들어 학문을 닦았었다. 17세에 과거에 합격했지만 스승 조광조가 사사되자 무등산 아래 마을(소쇄원이 있는 지곡리)로 내려와 평생 처사로 지냈다.
양산보가 살았을 때 송순, 김인후, 임억령, 양응정, 기대승, 김성원, 고경명 등 당대의 이름난 허다한 문사들이 이 소쇄원을 출입하며 시작품을 남겼다. 호남사림들이 기묘사림과 함께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호남사림은 이렇듯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기묘사림과 연을 갖고 성장했었다.
조광조는 무오사화로 유배중이던 김굉필에게 수학했고,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그는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주장했다. 추천제인 현량과를 실시, 신진사류등을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키면서 훈구세력의 타도와 개혁을 추진하다 훈구파와 충돌했다. 그 충돌은 결국 그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사림은 정치적으로도 큰 타격을 받았다.
남정리 유배지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쓴 비각이 있다.
호남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던 조광조의 유배지가 역사교육장으로 개발된다. 화순군은 15일 “능주면 남정리에 있는 도지정 기념물 41호인 조광조 선생 유배지를 2010년까지 역사교육장으로 개발한다”고 밝혔다.
군은 200평규모의 유배지를 9500평 규모로 늘리고, 호남 사림 역사문화관과 자료전시관을 세우기로 했다. 유배 조형물, 형벌·과거(科擧)체험장도 만들 계획. 토지매입비 73억원과 시설비 197억원 등 총 270억원을 확보, 내년부터 개발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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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안 블로그. 남도이야기 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