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최대의 독립운동자금원 겸 물산장려운동의 주체인 비밀교단 민족종교 보천교(증산도)
이 윤영 초대 국무총리 안이 조 봉암에 의해 부결되자 친일파 외에 별 다른 정치기반이 없던 이 승만은 독립운동 시절 자신과 노선이 달라 불화 했던 무장항쟁주의자중의 한 사람인 이 범석 장군이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정치기반이 없어 자신의 정치노선에 방해할 것 같지 않으면서도 활용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당시 <민족청년회:족청>를 이끌고 있는 그와 손잡았던 것이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52년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킨 주인공 내무장관 철기 이 범석은 자신이 거느린 자유당 휘하 족청 세력을 동원해 버스에 탑승 중이던 47명의 국회의원을 공산당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불법 감금해 빨갱이로 몰고, 이 승만은 바톤을 받아 부산지역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야당의원을 성토하는 관제데모를 열면서 이 승만의 재선을 위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6.25 전시체제 하에서 이 승만의 권력욕이 빚은 이 같은 정치파행에 대해 국제여론은 이 승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한국에 들른 한 영국기자는 이러한 이 승만의 가당치 않은 불법 독재에 대해 "한국에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시궁창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을 바라는 격"이라 비난했으며 초록은 동색이라고 동반자적인 입장에서 권력을 공유하던 김 성수마저 얼마나 참지 못했으면 이 승만을 비난하며 부통령자리를 박차고 사임했는지 가히 알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교활하고 노련한 이 승만은 이같이 자신을 위해 악역을 맡은 이 범석의 덕으로 개헌도 하고 이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대통령에 재당선되자 마음이 바뀌어 당시 자유당의 대다수 세력을 점한 정치적 실력자 철기 이 범석의 독자적인 정치기반을 우려해 부산정치 파동(불법감금 개헌)에 대한 국내외의 빗발치는 여론을 빙자해 이 범석을 내무장관에서 해임하는 동시에 족청 등 청년조직을 불법화 하고 부통령 후보인 철기를 의도적으로 낙마시키는 등 정책적으로 제거했다.
이 범석은 부통령이 되어 장차 나이 많은 이 승만(78)의 유고상태 이후를 염두에 두었지만 정작 이 승만은 후계자 지명을 불분명하게 하기 위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함 태영 목사를 부통령에 밀어 넣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이 승만은 정치의 생리가 본시 그러하듯이 후일 박 정희가 유신개헌을 위해 김 형욱을 이용했듯이 대통령 재선을 위해 활용가치가 높은 이 범석을 아주 적절히 이용한 결과가 되었다.
당시 해방정국의 최고 실력자는 <건국 준비위원회:건준>를 이끌고 있었던 몽양 여운형이었는데 그는 박 헌영, 조 봉암과 함께 모스크바 대를 졸업한 인텔리 국제 공산당 출신이었으나 실은 박 헌영만 골수 좌파 사회주의 공산당(남로당)이었을 뿐, 몽양 여 운형은 민족문제에 관한 실천적 측면에서 민족혁명을 추구하고 이를 계급혁명보다 우선시한 우파 사회주의자 곧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였고 조 봉암 역시 사회주의 성격이 가미된 우파 사회주의 정치인이었을 뿐 빨갱이는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우파 사회주의를 학술적으로 흔히 중도좌파라 말하고 그 반대를 중도우파라 말하지만, 민족주의적 개념으로 보면 우파 사회주의가 될 터이고 이념적으로 보면 중도 좌파가 될 것이나 여기서는 이념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그냥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표현하기로 한다.
23-4 년 전, 당시 모 출판사에서 간행된 하드 카버로 장정된 실록 제 1 공화국 전집류가 10여권으로 나와 있어 일주일 내내 읽은 적이 있다. 필자의 기억이 아상미상해 저자가 김 교신 ? 김교헌?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 같기도 하여 확신은 못하겠으나 아무튼 당시 김구가 중앙청에서 자신의 진퇴를 가늠할 중요한 대중집회를 여는 자리라 생각되는데 미국에서 갓 들어온 우남 이 승만을 김구가 잠시 소개하는 대목이 있다.
잠시 소개를 받아 마이크를 잡은 초청자 이 승만은 김구의 집회 일정을 깡그리 무시하고 집회시간을 독식해 온통 개인 연설로 남의 집회를 망치게 한 것은 물론 이 집회를 계기로 모든 관중의 관심이 의외로 집회의 목적과는 다르게 이 승만에게 쏠리는 돌발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필자는 당시 이러한 상황을 보고 남의 집회에 잠시 소개받아 있을 수 없는 짓을 한, 참으로 몰상식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동시에 주최측에서는 왜 마이크를 뺏는 등 제재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일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선하다.
원래 김구가 주인이 되는 자리로 마련된 그 대중집회에서 김구는 이 승만 때문에 말 한번 할 기회조차 얻지도 못하고 결국 죽 쒀서 개준 격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생기게 된 이유는 당시 식민지 시절 친일 매국노 방 응모, 인촌 김 성수 등이 운영하던 조선, 동아 등 일간지는 친일 매국 언론으로 상해 임정과 만주 독립운동단체에 독립자금을 대던 조선 총독부 통계상 600만 신도를 거느린 최대 민족종교 보천교를
일제의 민족종교 탄압정책에 부응, 사소한 문제를 흠잡아 사이비로 매도하기도 하고 일본천황에게 스스로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하고 꽃다운 젊은이들을 대동아 전쟁으로 나가도록 부추기기도 하는 등 스스로 알아서 기기도 하고 충성을 바치기도 하던 터였다.
게다가 비록 그들 친일 매국지뿐만 아니라 일제하의 모든 언론이 사상통제다 뭐다 해서 조선총독부의 입맛에 맞는 보도만 하게끔 통제당한 연유로 해서 민족운동가 진영의 동정에 대해서는 다들 입을 굳게 다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 일반인은 독립 운동가 진영의 자세한 동정을 전혀 알 수 없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매스콤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 실정으로 보아 기본 정보조차 접하기 어려웠던 일반인은 누가 진정한 애국자이고 매국노인지 혹은 싸우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애국자연하면서 진정한 애국자의 길을 가로막는 이 승만 같은 사이비 애국자가 누구인지 전혀 옥석을 구분할 수 없던 때였다.
해방이후 소련이 마리오네트(꼭두각시)로 김일성을 내세웠듯이 하지 미군정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외교가에 얼굴이 잘 알려진 이 승만을 내세워 해방정국을 요리하기로 내정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승만은 이미 미국의 신탁통치를 바라는 신탁통치 요구서를 미 국무부에 접수시킨 골수 미국 사대주의자여서 미국 입장으로서도 영어를 잘하는 미국통인 그를 마다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미국식 정부체제를 세우고자 염원했던 이 승만은 일제 식민지 시대 동안 조금씩 발아한 크리스챤 조직을 매개로 해 남한을 통치하려 했던 미국의 이해와 신앙적인 차원에서까지 서로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미국식 정부체제를 세우는 방법상의 문제에 있어 이 승만이 가장 머리 터지게 싸워야 했던 상대는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협조하기 위해 손을 잡은 미군정이었다.
1938년 당시 미국의 선교사 수는 400 명이었는데 해방 당시 한국내의 각종 조직 단체 중 가장 큰 것은 크리스챤 조직으로 미국의 크리스챤 단체들은 식민지 기간 중 한국의 선교부흥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제공해 왔으며 이러한 적극적인 지원은 아주 짧은 기간에 대규모 조직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독자들은 처음 듣는 말일지 모르지만 일제 하 가장 막강했던 보천교 연혁사와 조선 총독부 연감 통계상 650만의 민족종교 보천교가 가장 힘있는 독립운동 자금원이 되고 있는 것을 아는 일제에 의해 강력한 한국어 말살과 민족종교 말살정책을 기조로 한 악질적 문화 정책으로 인해 몰락한 사이 1919년 3.1 운동 당시 30만에 불과했던 기독교는 미국의 지원과 이 승만의 정책에 의해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일제하 한국의 종교 중에서 가장 혹독하게 탄압을 받은 것이 바로 민족종교 보천교였다는 사실과 친일지로서 일제의 문화식민지 정책에 동조한 조선, 동아 등 당시 언론의 유사 종교 내지 사이비 종교로의 일방적 매도는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이 큰 상처로 남아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종교단체로써 독립운동 자금원으로 의혹 받은 보천교의 막후 영향력이 그만큼 컸음을 역설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관한 자료는 비교적 정리가 잘 된 안 후상의 논문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을 보라)
조선일보사에서 발간한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1920∼1940->에 나타난 항일기사 건수의 통계를 통해 당시 일간지와 월간지에 나타난 보천교 관련 기사를 분석해 보면, 적어도 1925년 이전의 보천교의 활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운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항일기사 건수 총계가 23 건, 천주교 2 건, 불교 18 건, 유교 15 건, 천도교 32 건 인데 반해 증산 계열 보천교 83 건, 태을교 9건, 훔치교 55 건으로 총 147 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보천교 하나만 해도 불교나 기독교 항일운동의 4배에 맞먹으며 훔치교만 해도 불교의 3배, 기독교의 2배가 넘고 있는 항일운동 사건을 벌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계종의 초대 종정인 방 한암 스님이 산천중원(山川重遠)으로, 송광사 주지 임 석진이 임원길(林原吉)로 각기 창씨개명하고 , 월정사 주지 이 종욱이 광전종욱(廣田鍾郁)으로, 용주사 주지 강 대련이 위원형(謂原馨)으로 창씨 개명한 것에서 보다시피 불교는 종단전체 차원에서 친일하는 것이 전반적인 추세이자 분위기였고,
가톨릭과 기독교 역시 경성기독교 연합회와 교계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와 친일로 돌아선 것이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특히 임원길은 조선총독 미나미의 향응을 받고 남산의 조선신궁에서 엄숙하게 의식을 거행한 바 있으며 「신불교」라는 친일지를 발행해 총후보국의 논조를 유지했으며, 강 대련은 「불교총보」에 '불교옹호회와 법려(法侶)의 각오'란 친일성향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일본승을 왕실 및 양반집 여인과의 결혼을 주장하는 '조선불교기관 확장의견서'를 1919년 11월 사이토(齊藤實) 총독에게 제출하기도 한 친일 분자였다.
37년 7월 26일 YMCA에서는 종교단체 연합 친일 시국강연회가 열렸는데, 불교의 권 상로, 유교의 안 인식, 천도교의 이 돈화, 이 종린, 감리교의 양 주삼, 장로교의 전 필순 등이 친일을 위한 사자후를 토했으며, 38년 5월 18일 서울 부민관에서는 <경성기독교 연합회>가 창립되어 "40만 십자군병들아, 다같이 일어나 총후보국(銃後報國)의 보조를 맞추자"는 슬로건 아래 내선일체, 신앙보국을 맹서한 바 있다.
1938년 7월 29일, 구세군 최고사령관 윌슨도 전선각처의 소대장에게 국민의례, 황거요배, 국경일 경축행사 실행을 지시하는 통첩을 내렸으며 이에 의해 황 종률 구세군 전장 서기관은 구세군 1만 8천 신도가 앞으로는 단체적으로 신사참배를 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장로교 역시 1938년 9월 10-15일의 평양 서문 밖 예배당에서 열린 제 27회 총회에서 첫날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다음의 성명서를 채택했다.
'우리들은 신사가 기독교시에 위반되지 않는 본지(本旨)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대국적으로 보아 국가의 의식인 것을 자각하고, 이에 신사참배를 선서함.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이행하며, 더 나아가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에 참가하여, 시국하의 총후 황국신민으로서의 적성(赤誠)을 다하기를 기함'
이 결의에 의해 동년 12월 12일 감리교의 양 주삼, 김 종우, 성결교의 이 명식, 장로교의 홍 택기, 김 길창 등 조선을 대표한 기독교계 지도급 교역자 5명의 신궁참배단이 결성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이세(伊勢)신궁, 가시와라(檀原) 신궁, 메이지(明治) 신궁, 야스쿠니(靖國) 신궁 및 모모야마 황릉(桃山宗陵) 등을 참배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 때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을 돕기 위하여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그를 도왔다. 1960년 2월 18일 반도호텔에서 열린 교계 지도자 초청모임에서 목사들은 이승만 장로를 대대적으로 지지하였다.
이승만은 1925년 독직사건으로 상해 임정에서 탄핵이 되었고 미국에서도 독립자금 운영에 대해서 규탄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잘못은 생각지 않고 독립운동가들이 자기의 잘못을 폭로할까봐 천대했으며, 민족의 골수까지 사무친 친일파를 숙청하지 못함은 물론 그들을 친위부대로 내세워 반공주의자로 변신 애국자로 만드는데 공헌했다.
이승만은 장로, 최 인규는 장로교 집사, 이 기붕은 감리교 권사였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대해서 기독교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기에 공산당은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면서 종교는 가장 무서운 사회악으로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박해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북의 김 일성이 일제 잔재청산을 철저히 한 것은 그와 반대인 남한에 비해 실로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실로 이 사회에 있어서는 안될 암적 존재들이다. 기독교는 해방이 후에도 하나님과 조국을 배신한 무리들을 정리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민족의 반역자들이 큰 소리를 치는 것은 세계 기독교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기독교였다.
정리해서 말하면 이 같은 종교계의 전반적인 친일 분위기로 인해 불교, 기독교, 유교 등이 일제 하에 강력한 항일운동을 벌인다는 것 자체는 이미 자기모순이었다.일제시대에는 특히 '공인종교(公認宗敎)'라 하여 일본의 전통적 신교(神道), 교단적인 차원에서 창씨개명과 친일노선을 공식화 한 불교, 기독교만을 공식적 종교라고 인정했었다.
그러므로 이외의 새로운 종교들은 비슷한 종교 즉 유사종교가 될 수밖에 없었고 당시 가장 막강한 반일 민족종교 보천교는 유례없는 "보천교 신법"까지 만들어 탄압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앞에서 본 통계와 같이 보천교의 가장 활발한 147 건 항일기사는(기독교 23 건, 불교 18 건, 천주교 2건, 유교 15건) 친일로 돌아선 여늬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보천교가 그만큼 가장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본은 유일하게 친일적이지 않은 민족 자생종교 보천교를 조선의 종교단체를 마음대로 억압하고 요리하는 하나의 샘플로 삼았는데, 이러한 사실을 밝혀주는 자료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특히 통감부령 제 45호 '종교의 포교에 관한 부칙'은 일본 내지(內地) 신도(神道)와 불교,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 민족종교는 근본 속성을 정치적 결사체로 보아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당시 650만 신도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교단체가 공개단체도 아닌 비밀단체인데다 여타의 종교처럼 친일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가장 큰 독립운동 자금원인 것을 알고 있는 일제로서는 이 비밀 단체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내심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제는 종교단체와 사상단체 관리를 위한 방편 상,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에 의해 비밀교단의 모습을 공개하도록 유도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간부 이 상호에 의해 <보천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계기로 민족종교 탄압책의 일환으로 당시 친일 언론이었던 조선, 동아를 무기 삼아 보천교의 어두운 면 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유사종교화 내지 사이비 종교화 했다.
안 후상은 1918년 10월에 제주 중문 법정사에서 벌어진 항일봉기를 한일합방 이후 최초의 조직적 독립운동이라 말하고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이라 말한다. 그의 연구성과를 잠시 인용하면,
-단일 기미독립만세운동(1919) 직전인 1918년 10월에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라산 중턱의 법정사(法井寺)라는 곳에 근거지를 둔 봉기대 약 500여 명은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관헌들을 납치하였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이 사건은 한일합방 이후 처음 있는 조직적인 반일 항쟁이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도내(島內)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일대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조직원 수백 명이 체포, 수감되면서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차 경석 역시 이때부터 수배의 긴 장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교인 수천 명이 검거, 구속되었다.
검거된 이들의 형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일 사건으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 봉기였다. 구속된 간부 수명이 고문으로 죽었으며 수 십 명이 긴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1년 대규모 검거 선풍 :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동학계열의 주도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의 다음 수순은 보천교 조직의 해체였다. 당시 관련 자료가 이를 잘 말해준다.
드디어, 1921년 보천교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 수 천 명의 교인이 구금, 구타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일간지에서는 '당국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재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도하였다.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 일경은 압수와 함께 곧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최도홍, 육원익, 고편상 등 교간부 수십명이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이들 모두는 반란죄로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 돈 항아리와 관련해 일경은 이렇게 밝혔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돈으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이라고. 이외, 강원도 간부 이 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 홍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수 천 명의 교인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2년 전남 고흥 교도 피살사건 :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또는 구타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비밀 집회를 통하여 조직운동(국권회복을 위한 제 활동)을 더욱 공공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 어쨓든 조직으로서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셈이다. 일경에 의해 보천교 조직원이 사살된 사건이 전남 고흥에서 발생하였다. 교 집회에 일경이 나타나 이를 해산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 교인 한 명이 죽고 나머지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 집단으로 항의를 하는 교인들을 일제는 보안법으로 구속해버렸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사회 문제화되었다. 문제는 언론의 보도 태도였다.
사건 초기에는 경찰의 집회 해산 과정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도하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미신, 사교 집단의 우매한 종교 행위가 더 큰 문제라고, 논조의 흐름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리력을 동원하여 조직을 파괴해나가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 일제는 보천교 조직을 미신·사교 집단으로 매도하여 민심 이반을 꾀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일제하 『보천교』는 마치 구한말 불교계 내 일제에 대한 구국운동의 중심이었던 임제종 이상으로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식민지 지배 초기과정인 구한말에 승려입성해금을 기화로 조선불교를 친일 불교 종단 원종(圓宗:1908)에 종속시키려 하자 불교계에서 구국운동의 차원에서 송광사에 임제종을 설립해 불교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강력한 탄압을 가해 폐쇄한 바 있다.
1922년 2월 세칭 <차천자교>로 베일에 가려졌던 650만의 민족종교 <보천교>가 세상에 공개되어 모습을 드러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일제의 갖은 회유와 협박 끝에 설득당한 청음 이 상호는 차 경석 교주로부터 교단공개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위임받아 교단이름을 가칭 『보천교』로 등록 신고하고(실제이름은 보화교), 급히 대외 창구라 할 경성 교단 사무소를 급조하여 진정원이라 칭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실체가 처음 드러나게 되었다.
막상 『보천교(보화교)』를 공개화하자 일본은 민족종교를 말살하고자 광분하여 <보천교 신법>까지 만들어 20년부터 22년 봄까지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는데, 이는 경복궁보다 크게 지었던 정읍 대흥리의 보천교 본부 '십일전(十一殿)'이 일제에 의해 강제 경매 처분된 사건과 상기 항일기사 147 건만으로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당시 십일전의 목재로 조계사 대웅전을 지었으니 그 규모를 가히 알 수 있다) 인터넷 조계사인 ijogesa.net에 따르면 이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Click here!
"서울시 지방 유형문화재인 조계사 대웅전은 1938년 10월 25일 준공되었습니다. 조계사 대웅전은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입니다. 그 규모는 경복궁 근정전(勤政殿)보다 크며, 사방에 계단을 둔 단층 석조 기단위에 정면 7칸, 측면 4칸의 515.6㎡(155.7평)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조계사 대웅전은 처음부터 불전(佛殿)으로 설계된 건물은 아니었습니다. 전북 정읍에 소재했던 보천교(普天敎) 본소의 중심 건물인 십일전(十一殿))을 이전, 신축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공사에 투입된 연 인원은 목공(木工)이 7,000명, 와공(瓦工)이 200명, 석공이 250명, 니장(泥匠)이 200명, 기타 인부 65,500명이나 투입된 큰 공사였습니다.
대웅전은 또한 덕수궁 중화전이나 경복궁 근정전을 참고로 하여 지어졌습니다. 사방으로 계단이 나있는 것이나, 기단이 다른 사찰 전각에 비해 유난히 높은 것, 또한 대웅전 양면으로 해태(海苔)가 모셔져 있는 것은 궁을 지을 때 나타나는 일반 양식입니다.
그러나 궁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공포의 구성, 단청 등을 통하여 불전(佛殿) 양식으로 조성되었음은 물론입니다."
"한국 불교계 총본산 건설운동이 일제의 심전개발운동과 관련하여 추진된 것은 1935년 8월에 개최된 31본산주지회의에서였다. 이 때 '조선불교선교양종교무원'이라는 새로운 대표기관을 구성한다는 원칙과 각황사교당(覺皇寺敎堂) 개축안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교당은 순수한 조선식 법당을 모방할 것과 위치는 서울 수송동에 있던 교무원 사무소 필지로 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2. 대웅전 건립불사
총본산 건축이라 함은 당초 조선불교선교양종총본산 각황사로 명명된 총본산 건물을 이전, 신축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황사를 철거하여 수송동의 중앙교무원 자리로 옮기는 것이었는데, 건물은 정읍의 보천교 십일전(普天敎 十一殿)을 이전하는 것이었다.
1) 보천교 십일전(普天敎 十一殿)
동학농민전쟁으로 실의에 빠진 민중들을 위무하며, 동학운동과는 달리 조직과 행사를 통해 암울했던 시대를 극복하려는 운동이 보천교 운동이다. 한때 수백만 민중을 조직했다는 보천교는 1918년 10월 제주도 법정사에서 승려들과 함께 항일봉기를 주도하는 등, 물산장려운동을 전면 또는 측면에서 이끌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제로서는 보천교가 커다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 전후로 보천교도에 대한 대규모 검거선풍이 있었으며 이 영향으로 결국 보천교는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결국 교주 차월곡의 타계(1936)로 조직과 교본소는 완전 해체되었다.
보천교는 1925년 정읍 대흥리에 보천교의 대성전인 십일전(태극전) 건립을 시작한다. 1928년 겨울에 완공한 보천교 본소는 2만평 부지에 현 조계사 대웅전·내장사 대웅전과 같은 건축물 45채, 부속건물 10여 채가 성전이라 불리는 본소 내에 자리하였다. 본소 규모는 들어가서 나오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1시간 이상, 건설비는 당시 총 150만원 이상이 들었다고 한다. 십일전을 짓는데 필요한 원목은 만주 및 노령 방면에서 가져왔으며, 건평 136평에 높이는 87.7척, 길이 100자, 넓이 50자, 기둥이 24자라고 전한다. 십일전 공사비는 총 50만원이 소요되어 그 웅장함이란 조선 내 최고였다고 한다.
2) 십일전의 해체와 대웅전으로의 이전
보천교 교주 월곡이 타계하자 일제는 보천교 십일전을 경매에 부친다. 당시 경매대금 500원에 낙찰되었다. 당시 한국 불교는 ①일제의 권유 ②일본 불교와의 차별화 ③보천교 십일전의 규모, 구조, 재료의 우수성 등을 이유로 보천교 십일전을 12,000원에 매입하여 각황사 대웅전으로 이전하게 된다.
교무원은 교무원과 부속 건물을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철거한 다음, 주변 한옥 3동 45간에 해당하는 대지 160평을 매입하여 그 자리에 총본산 대웅전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중앙교무원 자리는 보성학교가 있던 곳이다.
십일전 석재 및 목재 운반은 1937년 4월에 이루어진다. 재료가 도착하자마자 건출설계(5.25), 건축허가(7.6), 기공(7.27), 정초(9.3), 완료(11.26)의 순으로 단시간에 대웅전 이전건립을 마쳤다. 그리고 단청(1938.4.14-6.2)과 후불탱화(1938.7.3-8.29)가 완료되고 제반 시설공사를 마친 때는 1938년 10월 10일이다. 20개월이 걸려 완공을 본 대웅전 낙성 봉불식은 1938년 10월 25일 오전 6시에 거행되었다."
당시 보천교에서는 신유년(1921년) 1월까지 60방주 제도에 55만 7천 7백명의 간부가 임명되었는데 민족종교 탄압을 위해 급조된 보천교 박멸법 <보천교 신법>은 차교주의 체포령과 함께 고위 방주직은 6년형, 6임직은 4년형, 12임직은 2년형, 18임직은 1년형에 처한다고 공고하여 전국적으로 『보천교』 검거선풍과 박멸운동이 벌어졌다.
이는 친일을 자임하고 나선 타 종교와는 달리 항일민족운동을 벌인 『보천교』로서 일제하 종교사상 유례없는 민족종교탄압이었다.
일제는 1920년 겨울에 청송군 일본 경찰서에서 소위 「제령 7호 위반」혐의로 신도 3000 여명을 검거하여 고문치사한 자가 수 십 명이고 700여명이 기소되어 미체포로 망명다니는 사람이 3 만여 명에 달하고 129 명이 고등법원까지 상고하여 최고 2년 6개월에서 최하 9개월 징역에 처해졌는 바, 이 사건 하나만 해도 기미년 3.1 만세 운동 버금가는 엄청난 사건임에도 세인들은 물론 해방 후 지금까지 학계에 주목을 받은 적이 없다.
무오년(1918) 9월 제주도에서 김 연일이란 술사가 불무황제라 자칭하고 도민 수백명을 거느리고 일본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두 어명을 쳐죽이는 항일전이 벌어졌다. 일본경찰 대부대가 목포에서 파견되어 토벌하자 도민들과 김 연일은 모두 함께 도망가 숨어버렸다.
이에 일본경찰은 이 사건이 차천자교(당시 일본은 비밀교단인 『보천교』의 이름도 제대로 몰랐다)가 벌인 짓이라 단정해 『보천교』 신도에 대한 엄중한 조사를 벌였다.
그러던 중 제주도 신도 문 인택이 교금 십여 만원을 면화포대에 감추어 나오다가 목포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어 검거되고 인택의 자백으로 고 판례 수부와 차 윤칠과 방주 18 명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뒤이어 검거선풍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21년 10월 29일자, 30일자에 의하면 보천교의 간부 김 홍규(학승 탄허 부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해 약 10만 7천 여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는데 일경이 압수 조사에 착수한 결과 독립운동 자금으로 발표한 사건에 대해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일경은 이 사건에 대해 간부 최 도홍, 육 원익, 고 편상 등 수십명을 구속하여 반란죄로 처벌하고 그 돈이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한 독립운동자금이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강원도 간부 이 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으며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 홍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 발각되어 체포되었다고 싣고 있다.
당시 재무 책임자였던 탄허 부친 김 홍규는 21년 정월 보천교 간부 개편으로 평안도 책임자가 되어 (독립운동 자금 용도로) 극비리에 보관해 두라는 차교주의 명령을 받고 평양역에 부임차 도착했는데 마침 대대적인 『보천교』 박멸운동의 일환으로 검거선풍이 불자 역에서 내리자 마자 체포된 것이다.
이때 김 영두라는 자가 구속된 김 홍규의 친족 공칠(公七)에게 접근해 차 경석의 명령을 사칭해 자금보관 내막을 상세히 알아내 중앙교단의 인장을 위조해 별도로 11만 3천원을 사기한 사건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보천교』가 실로 대단한 자금력을 가지고 각계 각층의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법상종』 종지에 나타난 독립운동 자금 전달에 대한 내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법상종』은 보천교인이었던 김 형렬이 보천교 차 경석 교주의 이간질 내용을 장 기동에게 전해듣고 분노하여 보천교 대흥리 교단을 떠나 1914년 가을에 정부인을 데려다가 수련을 시켜서 신력을 통하게 하여 대흥리의 고부인과 대항하게 하려 급조한 보천교의 한 갈래로 상해임정 독립운동자금 사건 발각후 미륵불교 진흥회로 단체명을 바꾸었다.
'대표 김 형렬 화상을 중심으로 약 6000여 신도가 30 본산의 사찰유지 분담금을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은연한 가운데 일대 모금운동을 일으키어 백 성욱(白性郁) 화상을 통하여 극비리에 상해임시정부에 파견하여 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호국불교운동을 하다가
1919년 기미 음 9월 19일에 금산사 향로전에서 불공 중 재등실(사이토 마코토) 총독 아래에 예속되었던 일본관헌 곧 전주경찰대가 급습하여 80여명 연행 중에 28명이 전주 형무소 제 8호실 감방에 수감되어 6개월의 체형을 받고 형기가 끝난 뒤에도 곽 법경 화상, 김 형렬 화상, 박 금곡 화상, 유 제봉 화상, 황 성렬 화상, 정 태환 서기장 사이에 호국불교 사상은 굳어졌고 일부는 옥사하였다.'
원광대 김 홍철(철학) 교수는 이에 대해 '증산사후 분열된 각 파들은 막상 자기들의 종교를 미신, 사교, 사이비 종교로 몰아 부치며, 증산종단 자체를 준 민족단체로 규정하여 종교활동마저 저지하는 일제에 대해 강한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은 10 여개의 증산교단 모두가 해체당해 버리는 대탄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대 탄압 속에서 교단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은 각종 비밀결사를 일으켰고 그것이 탄로되면 연행, 징역 또는 사망하는 사람의 수가 수 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 총독 사이토오 마코토(齊藤實)는 1926년 3월에 남선(南鮮:태전(대전)이북을 북선, 이남을 남선) 시찰도중 정읍 대흥리 본소에 들러 차 경석 교주와 면담하고 호화롭게 짓는 <십일전(十一殿)> 공사현장을 보고 올라간 뒤 『보천교』 박멸을 골몰하다가 마침내 차 경석교주가 1936년 세상을 뜨자 완공된 『보천교』 「십일전」을 강권으로 해체해 불과 수 천원에 경매처분하고 말았다.
당시 「십일전」은 경복궁 근정전보다 두배 넓이로 훨씬 웅장하고 호화로왔으며 북경 천자궁인 자금성을 본떠 누른 기와를 사용해 호화의 극치를 더했고 대들보는 만주 훈춘현 노령지방의 거목들을 벌목해 군산항을 통해 들여온 것이었으니 국내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이 대들보 중 일부는 불교도들이 서울로 가져다가 태고사(지금의 한국일보 건너편 조계종 본부 대웅전)를 짓고 말았다.
1936년 3월 주인장(교주 호칭) 차 경석의 사망과 함께 해체되기 전, 당시의 『보천교』는 이미 공개적인 차원에서 친일로 돌아선 국내 여타 종교와는 다르게 국내 종교단체 중 은밀하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가장 막강한 비밀조직이었는데, 조 만식에 의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의 기관지 <산업계>는 『보천교』의 기관지 <보광>을 인쇄하는 「보광사」인쇄부에서 인쇄되었다.
이는 『보천교』 충남 진정원 간부 임 경호와 보천교 경성 진정원 간부 고 용환(高龍煥) 그리고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는 경성 진정원 부장 주 익(朱翼)이 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한 사실과 <산업계>의 실제 사무 담당자가 바로 임 경호, 고 용환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천교의 역할이 『물산장려운동』의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이를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본래 이 종익, 고 용환, 주 익은 보천교 혁신운동을 일으킨 이 상호, 이 성영(정립) 형제의 연비(제자)로 보천교에 입교한 자로, 이 상호 이 성영 형제가 최남선이 사장으로 있던 <시대일보>를 <보천교>의 자금 2 만원에 인수해 전권을 휘두르다 <보천교> 교주 차 경석으로부터 출교 당하자 이들 제자연비들을 앞에 내세워 혁신운동을 일으킨 바 있는 인물들이었다.(見 <증산도의 세계> 안 원전 著, 下 334쪽)
당시 최남선이 경영하던 <시대일보>가 경영난에 빠지자 부사장 이 득년은 경성진정원장 이 종익에게 보천교의 <시대일보> 인수를 타진했고 종익은 총령원장인 이 상호에게 상의해 마침내 이 상호와 최남선의 만남과 거래가 이루어졌다.
1924년 1월 최 남선과 이 상호는 석 달 동안 경영비 3 만원과 판권대금 1만 2천 원을 부담하는 동시에 석 달 동안 각각 교단에서 10 만원, 최 남선이 10 만원을 조달하여 주식회사 형태로 <시대일보>를 경영하기로 하고 경영비와 판권비로 2만 2천 원을 주고 계약했다.
그런데 최남선은 무슨 연유에선지 모르게 각 신문지상에 <보천교> 비방 기사를 게재하고 행방을 감추었으니 이는 그가 조선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만주 괴뢰국 건국대 교수를 지냈으며, 일선동조론을 부르짖으며 학병권유 연사로 나서 수많은 젊은이를 일제의 총알받이로 몰아넣은 이력으로 능히 미루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30년대 말 '동남지구특별후원회 본부'의 고문을 맡아 독립군 박멸에 나서기도 하고 강제징용을 부추기는 운동도 했다) 이때 보천교인 부사장 이 득년이 나서 보천교와 시대일보 사이의 중재역할을 한 것이다.
이 상호 후임으로 보천교 경성 진정원장을 지낸 이 종익(李鍾翊)과 임 규(林圭)는 <조선물산장려회> 회원으로 함께 참여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임 규는 기미 독립 만세 운동을 물밑에서 주도한 바 있으며 『보천교』의 자금을 상해 임정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고 극비리에 『보천교』에 입교하여 경성 진정원 형평사장(衡平司長)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보천교』 이 상호, 이 성영(정립) 형제의 동생이자 일제하 최고의 연희전문 경제학자였던 효정(曉亭) 이 순탁은 <조선물산장려회>, <신간회>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1938년 반일교육 및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소위 연희전문 상과 사건으로 경제사학자로 유명한 백 남운 교수(1894-1979) 및 노 동규 교수 등과 함께 구속되어 3년간 옥고를 치루기도 한 독립투사였다.
일본 유학시절 고베 한인교회와 교토 제국대학 시절 교토 한인교회를 다닌 것으로 알려진 이 순탁(李順鐸)은 유학 후, 서울 새문안 교회 집사로 있으면서 해방 후 연대 상대 초대 학장도 지냈고, 45년 9월 5일 한민당 발기인으로도 참여해 계획부에서 재정분과 위원장, 비상국민회의 재정위원을 맡기도 했으며, 46년 10월에는 한민당을 탈당하고 민중동맹에 참여 총무부장, 재무부장을 맡기도 하다가 뒤에 민주독립 당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급기야는 일본인 재산을 몰수, 관리하는 신한공사 이사를 거쳐 건국정부 초대 기획처장을 지내면서 <대일배상 요구조서>를 만들고 6.25때 납북되었는데 일제하에서 김 철수, 정 노식 등과 함께 좌익성향의 조선청년 총동맹에 가입한 바 있어 자진월북인지 납북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이 순탁은 보천교도인 형 이 상호, 이 정립과는 다르게 일본 유학중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두 형이 『보천교』 혁신운동을 일으켜 <서해방 인장압수>로 간부직에서 쫒겨나 만주로 망명하여 떠돌다 모종의 사건으로 구속되자 경무청 당국에 교섭하여 석방시키기도 한 바 있고
차 교주와의 관계개선에 중간역할을 하는 등 조선물산장려회 운동참여나 신간회 참여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보천교의 자금으로 일본 유학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형들이 몸담고 활동하는 보천교의 사회적 영향 아래 있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보천교』 사수(스승)인 이 상호, 이 성영 형제가 출교 당하자 그들의 명을 받들어 <보천교 혁신회> 발기대회에서 발기인으로 개회사를 한 바 있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주 익(朱翼)은 이 상호, 이 성영 형제의 동생인 이 순탁과 함께 보천교의 <시대일보: 최남선 사장 > 인수문제에 중재자로 깊이 개입한 바 있으며, 그는 독립운동자금 전달책 임 규(林圭), 이 중성(李重盛:『대개벽경』 저자)과 마찬가지로 기미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다.
또 최남선 사장 밑에서 <시대일보> 부사장으로 있던 『보천교』 신도 이 득년(李得年)은 시대일보 인수사건 중 임시폐간사태를 막으려 적극 중재 노력했고, 서울 상해파 공산당원으로 3차 조선 공산당 책임비서 경력을 가진 김 철수(金綴洙)는 보천교로부터 5만원을 받았다고 스스로 증언한 바 있으며, 3.1 운동 당시 48인 중의 하나이며 독립운동자금 전달책 임 규(林圭) 역시 『보천교』로부터 5만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 후상이 인터뷰한 전북대 이 강오 교수의 증언과 『보천교』에서 자금을 직접 받아 쓴 김 철수의 증언은(<김 철수 친필 유고> 《역사비평 5호:역사문제 연구소》) 각각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3.1 운동 당시 48인의 하나인 임 규라는 자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천교』로부터 교금 5 만원을 받았다. 임규는 금마 출신이다. 원래 임규의 일가는 금마 "아전" 출신이었다. 동학과 관련을 맺었다. 즉, 일찍 개화가 됐다는 것이다. 임은 와세다 대학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경흥의숙'에서 공부했다. 그 당시 김 학곤이라는 사람과 알게 되었다. 이 자는 '엠엘당 사건' 연루자다.
임은 상해 임정 수금책 소 병언과 친했다. 송 진우, 장 덕수의 선배이기도 한 임은 『보천교』와 관련을 맺었던 것은 바로 동학때문이었다. 임은 『보천교』 차 경석에게 돈을 받아 장 덕수에게 주었고, 하와이에 가서 다시 라 영균에게 주었다.
다시 라 영균이 받은 즉시 영국 옥스퍼드大로 유학했기에, 혹 유학경비로 쓰지 않았나 추측한다. 실제 라 영균 생존시 얘기로 들었으나, 자금이 상해로 전달됐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1922년경, 모스크바의 약소민족 회의에 김 규식, 여 운형, 김 철, 김 상덕, 라 용균, 정 광호, 장 덕진 등을 파견키로 하고, 여비 마련은 최 팔용, 장 덕수 두 사람이 차 경석을 방문해 돈 만 원을 받아, 이 것을 내가 맡아 가지고 7인에게 지급했다.'
또한 고당 조 만식, 여 운형, 설산 장 덕수, 고하 송 진우, 조 병욱, 설 태희, 안 재홍 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보천교』를 내왕하며 독립운동 자금과 사회운동 자금을 제공받았는데, 그 중 일부는 직접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도 했다.
가령 비밀리에 내왕한 조 만식은 보천교 수호사장(修好司長)을 지냈으며 상해 임정 독립자금 전달책 이 중성(李重盛)은 당시 『보천교』 신도 인암 박 공우와 사돈관계까지 맺으며 입교한 바 있다.
당시 『보천교』의 김 형렬이 신안이 열리자 그 영향을 받은 박 공우, 김 경학, 김 광찬, 문 공신은 후일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박 중빈과 무극도(후일 태극도와 대순진리회로 분파)를 창시한 조 철제와 함께 모여 수련하기도 했다.
이중 박 공우와 박 중빈은 재종간이었으며 독립운동 자금문제로 극비리에 드나들던 상해 밀정 이 중성은 『보천교』에 눈을 떠 박 공우와 사돈관계까지 맺게 되고 보천교에 입교하여 「대개벽경」(일명 천지개벽경)까지 집필한 바 있다. 고당 조 만식과 또 다른 조 만식도 한때 『보천교』 본소에 거주하면서 한 규숙, 정 봉규, 정 상택 등과 교 운동에 동참하다가 구속되기도 한 바 있으며 고하 송 진우, 민세 안 재홍, 신 석우, 변 영채 등도 교단과의 교류가 잦았던 것으로 전한다.
다음은 안 후상이 1991년 1. 21일 보천교 차 경석 교주의 차남 차 용남으로부터 녹취한 구술이다. 필자도 대흥리 본소의 차 용남 옹으로부터 비슷한 내용을 들은 것이 『증산도의 세계 上,下』를 집필하던 89, 90년 여름쯤으로 생각된다.
'철수씨(3차 조선 공산당 책임비서 경력이 있는 김 철수) 도 부친께 3 만원, 2 만원 두 차례에 걸쳐 받았다고 구당 이 범재 화실에서, 그리고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나 내게 말했다. 또한 철수씨가 당질녀에게 '(차교주께서) 노금을 필금해 주었다'고 전했다. 이 성찬 선생도 있었다......고당 조 만식과 고하 송 진우, 안 재홍 등도 비밀리에 교 본소에 다녔다.
군자금 관계도 목포의 김 해배씨가 『보천교』에서 돈을 받아 중국 임시정부로 가져갔다는 얘기를 해줬다. 신 석우, 변 영채 등도 교 본소를 자주 찿았다.(필자가 당시에 이 돈이 김철수 증언에 나오는 그 돈이 아닌가요 하자) 송 진우, 장 덕수가 받은 돈은 별도의 돈이다. 철수씨가 받은 돈도 또 별도이다. 이런 군자금은 늘 극비였기 때문에 아무도 알지 못한다.
나는 그 당사자의 얘기를 직접 들어 안다. 당시 왜놈 형사가 교 본소에 늘상 상주했다. 나 어렸을 때도 그랬다. 그런데 어디 함부로 군자금이 어떻고 했겠는가. 한때는 왜놈 경찰이 사오백 명씩 총을 들이대고 와서 모든 것을 차압해 버리는 등 그 때는 정말 살벌했다. 조 만식은 권총 사건으로 옥고를 치뤘으나....조 만식은 당시 『보천교』 간부였다. 외교담당 차석이었다.
당시 그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을 받고 풀려나 1 년여간 교 본소에 있다가 군산을 통해 상해로 들어갔다. 다시 상해에서 귀국해 교 본소로 왔다가 한달 여 만에 잡힌 것이다. 이때 권총 서너 자루가 발견되고, 그래서 김 정곤, 한 규숙 등이 고문을 당했다. 조 만식 뿐 아니라 송 진우, 조 병욱, 신 석우, 안 재홍,김 철수, 백 남훈, 이씨, 허씨, 변 형채, 정 순정 등이 다 교인이었다.
이들은 비밀리에 출입하였다. 조만식만 드러나 다시 붙잡혔다.(필자가 이러한 자금내역을 왜 보천교 연혁사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느냐고 묻자) 그 때는 연혁사를 記해놓고 '교인들을 다 죽일 수 없다'라는 것이 교의 입장이었고, 따라서 연혁사는 그런 대목들이 대부분 빠져있다.
또, 당시 그런 얘기가 나오면 관련자들이 죽을 수도 있었다.'(참고로 기독교 불교 등 대부분이 창씨개명으로 친일정책을 공개화했으며 당시 기독교 신도수는 30만이 채 안되었으며 『보천교』는 조선총독부 공식통계상 650만이었다)
1922년 11월 이 상재, 조 만식, 한 규설, 윤 치소, 고 용환 등 47인이 발기해 소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1923년 3월 31일 중앙집행위원 30인 중 고 용환과 주익이 이들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특히 고 용환은 민대 제 1회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에 피선되었으며, 이 득년은 민립대 경성부 발기인 총회에서 감사원으로 선임되었다. 서울 94명의 발기인 이에 『보천교』 발상지인 전북이 36명의 발기인이 대거 참여하기도 한 것으로 보아 『보천교』의 민족운동의 족적이 확연히 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의 가정을 잠시 얘기한다 해도 조부(柄자, 彧자로 字는 東基)가 일제시대 보천교의 한 사람으로 바로 조선 총독부의 민족종교 보천교 탄압(문제의 독립운동자금 연루)으로 인해 3-5년의 징역형을 받고 모진 고문과 징역 끝에 석방 된 후 돌아가셨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홍 범초라는 반골이 짜깁기 자료집에 불과한 자신의 모 저서라 하는 곳에서 필자의 조부와 관련된 사실을 왜곡, 폄하했다.
그가 어느정도 반골이냐 하면 증산사상 연구회 배용덕 회장의 고뇌어린 고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증산사상 연구회를 창립해 학계 논문을 20여권 발표한 배 용덕 회장은 적은 돈이나마 지난 85년도부터 수시로 필자가 만날때마다 생활비조로 대준 적도 있고 연배 차이는 나지만 80년도부터 20여년간 수 백회에 걸쳐 만나면서 거의 가족처럼 지냈던 이다. 따라서 흉금없이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눈 분인데 몇년전 고인이 된 배회장은 증산사상 연구회 회장직을 자신에게 내놓으라 해서 늘 우울한 심경을 토로한 바 있다.
그 뿐인가. 그는 증산도의 최고 지도자이신 안 운산 종도사 선생님으로부터 도를 받고도 종통을 부정하는가 하면 종교신문과의 대담에서 가진 인터뷰를 볼 것 같으면 도를 누구에게 받았습니까 하는 기자의 질문에 대전의 안 **에게 받았다고 하는 둥 비칭을 사용해 자신의 뿌리마저 부인하는 인물이다. 그가 수많은 사람을 음해하고 척을 짓고 송사에 휘말리더니만 두 부부가 살해당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동서고금이 그러하듯 악인의 말로는 비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참고:탄허스님은 일제하 보천교 간부였던 부친 김홍규에 대해 보천교 신앙운동을 독립운동으로 묘사한다(1977 신춘 조선일보 대담)
"제 경우를 보면 저의 先考(선고)께서는 17세부터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정치문제를 가지고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17~18세가 되었을 때 先考(선고)께 "邵康節(소강절)은 小人(소인)입니까, 君子(군자)입니까"하고 여쭈었더니 "宋朝(송조) 六君子(육군자) 중의 한 분이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기사 확인Click here!
*법보신문 탄허부친 김홍규 보천교 간부 독립운동자금
탄허부친 보천교 간부(증산도) 김홍규 독립운동 자금 규모를 밝힌 부분
10만원은 천문학적인 거액, 그 당시 건설된 경부선 철도의 총 공사비가 20만원
탄허는 전라도 김제군 만경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홍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홍규씨는 독립군에게 수십만원의 자금을 대 주었을 정도로 당대의 부호. 그러나 10만원의 독립자금을 추가로 전달하려다가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21년 10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전북 김제군 만경면에 사는 김홍규가 10만원의 독립자금을 전달하려다가 발각됐다.”고 당시의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당시의 10만원은 천문학적인 거액. 그 당시 건설된 경부선 철도의 총 공사비가 20만원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훗날 탄허는 비용이 없어 출판을 하지 못하고 있던 신화엄경합론 원고를 6000만엔에 팔라는 일본 불교계의 제안을 `출판을 못하더라도 일본인에게 원고를 팔지 않는다'고 단호히 거절을 했는데, 이런 배경에는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
<탄허스님과 보천교(증산도)>
-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에서 발췌 --
일제가 보천교(지금의 증산도) 와해를 위하여 많은 인력과 자금을 들여서 결국에는 유사종교로 몰아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보천교가 민족주의자들의 소굴이었기 때문이다. 교주인 차경석의 아버지도 차치구라는 동학의 비중있는 간부였다.
차치구는 전봉준을 따라서 동학에 가다하였다가 결국에는 참형을 당해서, 목이 뒹구는 시체가 형장에 버려져 있었다. 목 없는 시체를 무서워해서 아무도 수습하려는 사람이 엇었는데, 당시 열네댓 살 밖에 안 되었던 차경석이 캄캄한 한밤중에 형장에 가서 아버지 시체를 지게에 메고 와서 매장하였다. 일본군에 의하여 참혹하게 아버지가 죽는 현장을 목격하였던 차경석은 일본을 증오하였다.
한일합방이 되어 모두가 절망하였을 때 모악산 밑에서 ‘일제는 물러나고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선언하고 다니던 신인(神人) 강증산(姜甑山)을 만났다. 고기잡는 어부를 하다가 예수를 만나자 만사 제치고 예수를 따라다녔던 베드로처럼, 차경석도 강증산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보천교를 세웠으니 외부적으로는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독립을 염원하는 우국지사들의 아지트였다고 표현해야 옳다.
대표적으로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1882~1950) 같은 인물이 보천교를 많이 출입하였다. 조만식은 한규숙(韓圭淑), 정복규(鄭復奎), 정상탁(鄭常鐸)과 함께 당시 30만 원이라는 거액을 독립자금으로 만주에 보내려고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된 적이 있다.
30만 원은 보천교의 차경석으로부터 나온 돈이었다. 차경석은 우국지사들에게 거처를 제공하였으며 형편이 되는 대로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돈은 300만 신도들이 살림을 팔아 마련한 돈이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탄허 스님의 아버지인 김홍규(金洪圭)도 보천교에 깊숙하게 참여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김홍규는 차경석을 보좌하는 4대 참모 가운데 가장 수석참모인 목방주(木方主)를 담당하였다. 차경석을 중심으로 수,화,목,금,토 오행에 맞추어서 각 방향을 담당하는 5대 방주(方主)라는 제도가 있었다.
가장 중심인 토방주(土方主)는 교주인 차경석이었고, 그 다음 위치에 목방주가 있었는데, 탄허의 아버지인 김홍규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조만식과 같이 체포된 한규숙은 수방주(水方主)였다.
김홍규는 처음부터 보천교에 들어갔던 게 아니다. 원래는 독립운동을 하려고 상해로 갔었다. 그러나 상해에서의 독립운동도 쉽지 않았다. 도산 안창호와 뜻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탄허의 말에 의하면 임시정부에서 자금을 모을 때 각 지역에 자금을 모집할 담당자를 결정하였는데, 그 결정을 도산이 하였다. 그래서 김홍규는 도산에게 자신을 국내 담당 자금책으로 파견해 달라고 부탁하였지만, 도산으로부터 여러 번 거절당하자 인연이 없다고 판단, 국내로 들어와 보천교 운동에 가담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독립운동 대신에 보천교 운동을 시작한 셈이다. 김홍규는 보천교에 오기 이전에도 태을교라는 단체에 가담하여 거액의 독립자금을 마련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적도 있다.
이렇게 탄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인 김홍규로부터 민족에 대한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보천교의 수석 참모였던 만큼 보천교 건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탄허는 보천교의 웅장한 건물을 처음 지을 때부터 보고 자랐던 것이다. 어렸을 때 보던 그 건물이 보천교가 일제 탄압으로 망하고 나서 서울로 옮겨져 조계사 대웅전으로 재건축되었으니, 조계사 대웅전을 바라보는 탄허의 심정이 어땠겠는가./(이하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