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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디다케(서울교구 청소년국 발행) 11월호에 투고한 내용입니다. (두 사람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태)
1. 천주교와 개신교 신앙과의 만남
수기1 (글쓴이-조하늘 글라라, 28세, 서울여자대학교 졸업)
저는 모태신앙으로 천주교를 믿어 왔습니다. 열심히 까지는 아니었지만 냉담하지 않고 꾸준히 지금까지 성당을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을 미션스쿨로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종교가 다른 것을 모르고 간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입시 현실에서 종교적 색채를 띠는 학교를 가는 것이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션스쿨이기에 필수적으로 개신교와 관련된 시간이 있었습니다. 3년 동안 채플 시간을 통해 예배를 드려야 했고 교양 과목을 통해 개신교에 대한 이론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심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채플 시간에는 일부러 다른 짓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교양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편협한 시각을 가진 제 모습에 스스로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런 시간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 오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믿는 주님이나 개신교에서 믿는 주님이나 다 같은 분일 텐데, 그리고 바로 내가 믿는 주님을 향한 예식인데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죄책감이 들어 그때부터 예배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제가 뻔히 성당에 다니는 것을 알고 있는 데도 교회를 다니라고 권하곤 했습니다. 교양 수업이나 예배 시간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서도 가끔 성당과 교회의 다른 점에 대해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개신교 관련 교양 시간에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비교하며 왜 천주교의 교리가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상세히 수업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천주교를 믿는 주변 사람들 중에서도 교회를 아예 다른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쉽게 만날 수 있었고요.
그럴 때마다 우리 천주교인이나 개신교인이나 너무 흑백논리로 주님을 향한 신앙을 판단하는 게 아닌가 싶어 회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개신교라도 해도 수많은 종파가 있고, 불교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자기만 옳고 남은 모두 그르다는 생각은 맞는 건가요?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유일하시다고 말하는데, 그럼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건가요? 그래서 저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우연치 않게 개신교를 접할 때면 가능한 자연스럽게 대하려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 결혼식이 교회에서 열린다면, 저는 그곳에서 찬송가도 열심히 부르고 목사님의 주도에 따라 기도도 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성호경을 긋는다는 것과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것 뿐 교회에 있는 다른 개신교 신자들고 다를 바 없이 행동합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요? 저는 천주교이기에 개신교식 예배를 따르면 안 되는 것인지, 또 천주교를 믿기에 무조건 개신교는 나와는 다른 종교로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늘 궁금합니다.
(답변)
수기 1 (글쓴이 조하늘 글라라)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
천주교와 개신교는 같은 그리스도 신앙에 뿌리를 둔 하나의 종교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신앙이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죄와 죽음에 갇힌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마태 1, 23)계심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그리스도가 바로 2천년 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셔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선포하신 나자렛 사람 예수임을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란 바로 예수님이 구원자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는 가장 짧은 신앙 고백입니다. 천주교인이던 개신교인이던 모두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천주교는 본래 시대와 장소, 민족과 문화를 뛰어 넘어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고 있음을 선포하는 가톨릭, 즉 보편적인(catholic) 교회입니다. 한국에서는 이 보편적인 교회의 성격을 한국인의 공통된 종교심성의 뿌리인 “하늘’(天)의 주인(主)을 섬기는 종교”란 의미로 받아들여 ‘천주교(天主敎)’란 용어가 정착되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16세기 서구사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제도적인 모순을 비판하고, ‘오직 신앙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 오직 성경만으로’란 원리에 입각하여 개혁신앙을 표방한 교회들을 일컫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들을 “믿음을 새롭게 혁신했다.”란 의미에서 ‘개신교(改新敎)’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천주교와 다른 종교는 결코 아닙니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같은 그리스도교입니다. 단지 종교 개혁 이후 성경과 교리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신앙과 신심의 전통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가령 가톨릭 교회가 지켜온 성경 경전의 숫자가 다르거나(천주교는 73권, 개신교는 66권), 교회의 전통(성전)과 교계제도(교황직), 성사(성체성사), 마리아와 성인 공경 등에 있어서 다른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개신교와 천주교의 관계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합니다. 잘 알다시피 대다수의 개신교인들은 천주교를 ‘마리아교’라고 비판합니다. 심지어 천주교를 ‘이단’이나 ‘우상숭배’의 종교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편협한 비판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는 18세기 선교 초기부터 많은 박해와 순교를 통하여 신앙을 지켰고,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선교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박해로 인해 교세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민중들로부터 ‘서학’이라는 오해를 받으며 외면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개신교가 들어오던 19세기말 당시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개항과 더불어 근대화의 요청 속에서 미국의 여러 선교사들은 개신교 신앙을 전하면서 민중들로부터 외면 받던 천주교와는 차별화된 신앙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같은 그리스도교를 강조하기 보다는 마리아 신심이 강한 천주교를 우상숭배로 비판하면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는 종교’임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한자어로 음만 바꾼 ‘기독교(基督敎)’라는 용어를 자신들의 고유한 이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여전히 천주교와 개신교가 마치 다른 종교인 것처럼 비춰지는 지도 모릅니다.
개신교가 선교 초기에 배재학당(배재대학교)이나 이화학당(이화여자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연세대학교)과 같은 근대 시설들을 도입하면서 한국 근대화를 이끌면서 놀라울 정도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지만, 한국과 같은 다종교 사회 안에서의 종교적 관용에는 인색한 편입니다. 그 이유는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청교도 정신에 뿌리를 둔 배타적 근본주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선교 정책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신앙적 열정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한국의 천주교를 비롯하여, 불교 역시 구원받지 못할우상숭배를 일삼는 종교로 치부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한국 개신교의 대다수는 서구 유럽 교회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종교 간의 대화”나 “교회일치운동”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특히 같은 신앙이면서도 서로 갈라져 ‘하나 되게 하소서(요한 17, 21)’라는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려는 이른바 세계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단이라고 치부하는 교단들도 있어서 개신교 교단들 간의 일치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는 교회일치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천주교 신부로서 흔히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같은 흑백논리나, 이웃종교들을 우상숭배로 폄하하는 한국 개신교의 배타성이 목회자들의 편협한 신앙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한국 개신교 안에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을 믿고, 이웃종교들과 대화하며 천주교와 적극적으로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에 나서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글라라님이 개신교 미션스쿨에서 겪으신 일들도 사실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호 불신과 편견, 그리고 대화의 부족에서 온다고 봅니다. 천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1962-65) 개신교를 “한 분이신 주님과 하나의 세례”로 결합된, 그러나 다양한 이유로 서로 ‘갈라져 있는 형제’로 받아들입니다. 글라라님이 개신교에 대한 존중과 천주교 신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신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념하실 점은 아무리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개신교는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그와 결합된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본질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과거처럼 장자의식을 갖고 개신교를 서자 취급하는 모습은 버려야 하지만, 개신교와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계 어디서나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믿음과 동일한 교리, 하나의 성체성사를 통하여 일치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야말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신교에 대한 형제적 존중과는 달리 가톨릭적 신앙 고백과 전례의 중요성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별한 경우에 개신교 예배에 참석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천주교 신자로서의 미사 참례와 기본적인 신앙의 의무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 역시 개신교와 갈라진 채로 살아가는 것은 일치를 원하신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개신교와 형제적 대화를 지속하면서 서로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글라라님이 만나는 개신교 신자들과 가능하면 서로의 교리적 차이점이나 교회에 대한 비난보다는 서로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삶의 고백을 나눈다면 일치의 성령께서 대화와 만남 속에서 형제적 사랑과 일치를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시리라 밉습니다.
2. 종교 간의 대화
수기2(글쓴이-백윤환 미카엘, 16살, 부산교구 우동성당)
저는 백윤환 미카엘이라고 합니다. 저는 중학교3학년으로 천주교를 믿고 있습니다. 친가, 외가 쪽 모두 성당에 열심히 다니셔서 어릴 때부터 일요일마다 미사에 나가고 집에서 기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입니다. 저 역시 초등학교 때 복사도 했었으며 지금도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나가고 있습니다.
친한 친구들 중에는 저와 다른 종교를 가진 친구들도 많고 아예 종교가 없는 무교인 경우도 많습니다. 친구들이 천주교를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배웠고 또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제 생각이 조금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 친구 때문입니다. 그 친구는 제 주변에서 유일하게 불교가 종교인 친구입니다. 사실 그 친구가 불교를 믿는 다는 것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았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친구들은 주일에 교회를 빠지지 않고 나가고 식사 시간에도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아 금방 알 수 있었지만 불교를 믿는 그 친구는 도저히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친구는 주말에 절에 가지도 않고 평소에 부처님께 기도를 하지도 않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스님들은 항상 염주를 손에 들고 다니시며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을 외우고 있어서 저는 그것이 불교의 기도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우리 앞에서 그런 말을 외우지도 않고 주말에 절에 가지도 않습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불교도 절에 가야 하는 날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매주 의무적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솔직히 내가 천주교를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과 그 친구가 불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것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친구는 불교를 믿으면서도 자주 절에 가야 한다거나 염불을 외우며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당에 다니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이 많은데 불교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믿는 것과 친구가 부처님을 믿는 것은 달라 보입니다. 부처님이 인간이기 때문이라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훌륭한 위인들을 존경하듯이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물론 불교라는 종교를 나쁘다고 생각해서 불교를 버리고 천주교로 오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생각인 줄 알면서도 친구를 보면 자꾸 제가 믿는 천주교는 위대한 신을 믿는 진정한 종교로 보이고 불교는 하나의 문화 정도로만 느껴집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많이 잘못된 것이겠지요?
(답변)
(수기 2) 백윤환 미카엘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
요즘 같이 놀거리가 많은 세상에서 열심히 성당에 다니면서 신앙을 키워가는 미카엘에게 먼저 칭찬의 박수를 보냅니다. 열심한 신앙 가족에서 자라면서 복사단 활동도 하고 있다니 더욱 기쁘네요. 미카엘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우리 나라처럼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사회에서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는 문제랍니다.
우선 미카엘은 ‘종교’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미카엘이 만난 불교 외에도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있습니다. 무교, 유교, 원불교, 이슬람교, 천도교 등 세계 각지에는 다양한 이름과 조직을 가진 종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 종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이들은 한결 같이 생명의 신비와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인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일까?” “나는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까?” “과연 천당과 지옥은 있을까?” “세상에서 받는 고통이 의미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모든 종교들은 저마다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요.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그리스도교 역시 이들 질문에 나름대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약속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쳐 이기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기뻐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신앙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또 우리가 매주 미사에 참석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찬미이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지요. 미사 참례는 단순히 의무이기 이전에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만남의 시간이고, 매순간 기도하는 것은 내 삶의 하느님의 숨결 속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랍니다.
미카엘이 질문한 불교 역시 하나의 종교로서 우리가 겪는 고민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불교는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종교로 인식되어왔습니다. 중요한 관광지와 문화재도 불교의 사찰이나 불교와 관련된 것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우리와는 좀 다른 종교적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 속에서 참된 행복을 찾는 반면에 불교는 이 세상은 결국 사라지고 말 텅빈 것(空)에 불과하다고 가르칩니다.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있지도 않은 이 세상이 영원할 것인양 붙잡고 집착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나(無我)를 만나는 깨달은 자(부처)가 되는 길이 참된 행복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면 죽음이후 자신이 살아온 업보(業報)에 따라 또 다른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사슬 속에서 영원히 깨닫지 못하고 반복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불교는 우리처럼 교회 안에서 하느님께 구원 받은 기쁨으로 함께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며 형제적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적인 신앙보다는 세상의 헛됨을 깨닫고(해탈) 명상과 화두와 같은 개인적 수행을 더 중요한 종교적 실천으로 가르쳐왔습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전혀 신앙적 실천이나 의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서도 사찰에 정기적으로 다니며 열심히 공양을 드리는 분들도 있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불교 경전을 매일 읽고 공부하며, 불교 대학이나 불교 사찰 내의 다양한 불자들의 공동체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생태계 보존을 위해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환경 운동을 전개하고 있고, 실제로 생태 공동체를 형성해서 자연과 하나된 삶을 추구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불자들은 자신이 불교 신자이기 때문에 그냥 부처님의 마음으로 자비롭게 살고 깨달음을 얻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다지 종교적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미카엘이 생각하듯 친구의 신앙을 보고 우리의 기준으로 불교가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하느님께로 가는 순례의 여정에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 다른 종교들에 대한 형제적 사랑을 전하면서 불교가 “무상한 세계의 근본적 불완전성을 긍정하고, 신심과 확신으로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이르거나 아니면 자기 노력이나 위의 도움으로 궁극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종교임”(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을 인정합니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비록 우리와 다르다 하더라도 그들 안에는 진리의 성령께서 이끄시는 ‘옳고 거룩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죠.
천주교 신자로서 하느님을 알게 되고 그 분의 사랑을 받는 것을 커다란 축복으로 생각하면서도, 나와 함께 세상을 사는 이웃 종교인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서로 대화하는 것은 내 신앙을 더 깊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요한 3, 8) 성령을 통하여 구원의 표징들을 보여주시기 때문이죠. 이웃 종교인들과의 대화는 내가 가진 편견과 오해를 벗어나 상대방의 믿음의 열정을 만나게 해준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부족한 믿음을 보게 되고, 때로는 내가 가진 신앙을 더 풍요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보이기도 합니다.
불교 신자인 친구들과 단순히 교리나 신앙적 의무만을 가지고 비교하지 말고, 정말로 내가 예수님을 만나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게 사는 지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동시에 친구가 체험한 불교의 아름다운 신앙 체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나의 신앙은 한층 더 성숙해질 것입니다.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