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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있다. 한가운데 커다란 거북바위가 엎드리고 있다. 얼마나 큰가 하면, 드라마를 찍을 때 카메라 뒤에서 일하는 스탭들이 한 이삼십 명 되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기대어 앉아 쉴 수 있을 정도다. 이 바위와 넓은 정원은 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면 알아볼 만한 <파리의 연인>, <봄날> 등의 드라마에 출연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한가운데 비범한 바위가 버티고 있는 데다 도로보다 훌쩍 높이 솟아 있어, 집을 새로 짓기 전에는 너무 험해 보이는 땅이었다. 보러 온 사람마다 혀를 차고 물러나곤 해서 3년 어림 빈 집인 채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땅 임자를 만났다. 집 지을 땅을 찾으러 1년이나 돌아다닌 사람이다.
황경숙 씨는 원래 역삼동의 단독주택에서 살다가, 주변에서 다세대주택들이 계속 들어서자 이사를 결심했다. 먼저 방배동의 한 빌라를 보러 갔다. 가서 보니 3층 집값이 10억인데도 바깥 전망이 좋지 않았다. 4층은 1억을 더 주어야 하고, 그나마 전망 좋은 쪽은 3억을 더 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나중엔 용인 같은 경기도 쪽까지 나가 보다가, 그냥 서울에서 전망 좋은 곳, 평창동이나 성북동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다 여기 와 보니 사방으로 시원하게 탁 트인 것이 전망 값만 12억인 셈이 아닌가. 바로 이 땅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오래된 집을 고치려고 구조만 남겨놓고 철거에 들어갔지만, 안전도 문제가 되고 비용도 새로 짓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몇 명의 건축가에게서 설계안을 받아보는 중에 잘 아는 목수로부터 김개천 교수 교수를 소개받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디자인 스타일이 자신과는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설계해온 평면을 보면서 가족끼리 상의한 결과 가장 좋다는 결론이 나서 설계를 맡기기로 했다.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가는 5월 한복판, 축제가 열리고 있는 국민대 캠퍼스를 거슬러 올라가 김개천 교수를 만났다. 반듯한 인상과 반듯한 말투. 철학과 종교와 예술이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는 김개천 교수는 불교 철학을 공부하고 선(禪)건축을 구현하고자 하는 독특한 건축가다. 여러 채의 사찰 건축을 설계하기도 했는데, 건축이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고, 자연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김개천 교수가 그 땅을 처음 본 것은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사면이 낭떠러지에 가까운 경사지로 둘러싸이고, 바람이 유난히 세게 불었다. 땅 한가운데에는 풍수적으로 손을 대면 화를 입을 수 있다는 거북바위가 건축가에게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내왔다. 좌우의 산 사이로 보이는 먼 하늘과 좋은 날에는 여의도까지 바라보이는 원경 또한 압도적이었다. 설계에 따라 천지를 품고 우주의 중심에 있는 자연의 중암(中庵) 같은 곳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경숙 씨는 원래 벽돌로 지은 집, 말하자면 세미 클래식 스타일을 원했다. 그래서 자녀의 구성과 경제적인 조건 등 일반적인 사항 외에도, 선호하는 디자인을 설명하기 위해 수십 장의 사진을 건축가에게 건네주었다. 김개천 교수가 보기에도 사진들은 대체적으로 세련되고 호감이 느껴지는 것들로, 고급호텔과 같은 분위기의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그런 디자인은 이 땅과, 이 집에 사는 사람을 건강하고 자유롭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20년 후를 생각하고 모던 스타일로 가자고 설득을 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고려할 생각이었지만, 결국은 건축주의 기호와는 전혀 다른 집이 되었다.
“시각적으로는 특별할 게 없는 집이다, 새로운 형태는 아니다”라고 김개천 교수 스스로 이야기한다. 집의 매스가 단순하고 외관도 장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풍광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땅의 단점을 건축이 보완하는 방향이 주가 되었다. 단지 집의 어디에 있든 집이 우주의 중심으로, 자연으로 느껴지게 하고 싶었다.
도로에서 보면 옹벽 위의 큰 저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대지 안으로 들어오면 성채 같던 느낌의 집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집 안에 서서 보니, 땅이 그런 건축을 원한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져 온다. 주 동선에서 건물은 항상 옆 비켜나 있어 자연이 집의 주인이 되고, 건물은 자연에 묻혀버린다. 건축가의 의도대로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며 비워있듯 느껴지는 건축이 된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적지 않은 공이 들었다. 북서쪽의 진입부분에 옹벽을 쌓아 건물을 최대한 도로 쪽으로 붙이자, 땅 안쪽으로 여유가 제법 생겼다. 대지의 중앙에 있는 거북바위가 자연스럽게 집의 동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도로에 비해 너무 높았던 대지를 1m 가량 낮추자(대지가 주로 암반이라 힘든 결정이었지만) 거북바위의 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집이 바위를 누르고 올라선 것이 아니라 집이 바위 등에 기댄 것이다. 집안의 거실로 들어가니, 바위의 생살이 그대로 보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주인은 바위를 향하는 벽에 십자가를 걸고 마리아상을 모신 테이블을 두어 간소한 기도공간을 꾸며놓고 있었다. 건축가는 비워놓길 바랬던 공간이지만, 세로로 긴 밝은 창과 그 빛이 만든 그늘이 공간을 어스름하게 감싸 안아 안락한 느낌을 주었다. 집의 규모에 비해 거실은 좁고 길게 느껴졌는데, 그것이 실제로 거실이 좁아서였는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깥이 밀어 붙여서였는지 잘 모르겠다.
바깥의 ‘너무 좋은’ 풍경들을 끌어안기 위해 고심한 건축가의 생각은 바닥과 식탁 유리에까지 비치는 나무그림자로 읽혀진다. 거실은 바위 위의 소나무 너머로 멀리 북악 스카이웨이의 팔각정까지 바라다보이고, 식당은 산이 휘어 감는 위치에 놓여 있으며, 2층 방에선 창에 가득한 소나무로 인해 숲에 그대로 누운 것 같다. 옥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나뉘던 주변의 풍경이 하나가 되어 달려든다.
그리고는 그 풍경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정원에서 본 바위는 몸의 거의 대부분은 땅속에 묻어놓고 있는데, 사람이 손댄 자리가 분명한 몇 개의 상처는 정자를 허문 흔적이다. 머리끝 정수리 부근에서 한 2할 정도만 빼꼼히 내놓고 그 위에 소나무를 그것도 아주 잘 생긴 소나무들을 공짜로 얹고 있었다.
그 바위의 뿌리는 무척 깊었다. 바깥주인이 아랫집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축대 아래로 불룩하게 불거진 바위의 뿌리를 보여주었다. 마치 늦게 얻은 아들을 내보이는 듯한 대견함이 물씬했다. 참으로 장한 바위였다.
바위의 정수리와 바위가 얹고 있는 소나무 그리고 은근히 끼어든 백일홍 뒤로, 어쩔 수 없이 속세의 껍질을 두른 건물은 갑자기 문이 열리고 몸을 미쳐 가리지 못하고 있는 어떤 이처럼 수줍게 서 있었다. 건축가에게는 미안하지만 "참으로 땅을 잘 못 잡으셨습니다. 혹은 아주 땅을 잘 잡으셨습니다." 나는 인사말을 고르며 앉아 있었다.
집을 짓는 데는 약 1년이 걸렸다. 비가 많이 왔던 까닭인데, 그 사이 가장 의견 차가 컸던 부분은 주로 마감에 관한 것이었다. 담장을 외벽과 같은 라임 스톤으로 한 것, 내부도 화려한 벽지가 아니라 바깥의 돌과 어울리는 깨끗한 한지 벽지로 한 것. 특히 벽지는 건축주가 강하게 주장하자 건축가가 한발 물러섰다가 다시 얘기하고 다시 얘기하고 해서 세 번째에는 건축주가 양보했다. 황경숙 씨는 그렇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고, 김개천 교수는 건축주가 깐깐하게 대해서 더 좋았다고 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납득이 가게 설득하면 잘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황경숙 씨는 김개천 교수에게 “내가 원하는 대로 한 곳이 하나도 없다. 처음 집을 설계 의뢰했을 때 상상했던 집하고는 다른 집이지만 오히려 만족스럽다”고 인사를 했다. 화려한 것 같지 않으나 화려하고 적조하지 않은 듯 고요하다는 것이다. 처음 이사를 온 날 아들과 새벽 세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각 방마다 들어가보니 창문마다 전망이 다르고 정서가 달라, 가슴이 뛰도록 좋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이 집은 들어오기만 하면 잠이 온다. 그리고 밖에 나가고 싶지 않게 만들어 친구들과 멀어질 것 같다.”고도 했다. 아니 친구들을 오히려 불러들이고 친구들도 오고 싶어한다. 황경숙 씨는 친구들에게 “건축이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 아는가”라고 자랑한다. 가장 좋은 풍경은 눈 온 풍경이고, 비가 많이 올 때도 좋으며, 안개 낀 모습도 좋고, 화창한 날의 풍경이 꼴찌인 셈이라는데, 집 구경 간 날은 마침 화창한 날이었으니 어쩐지 손해를 본 듯 하다.
황경숙 씨가 집을 짓고 후회한 것은 딱 두 가지다. 첫번째는 식당에서 보이는 뒷마당의 소나무 한 그루를 옮긴 것이다. 정원사가 트랙터가 들어오려면 옮겨야 한다고 해서 앞쪽으로 옮겼는데, 결국 죽고 말았다. 또 부엌의 작은 창을 밖으로 드나들기 위해 문으로 바꾸었더니 전혀 느낌이 달라져서, 그것도 아쉽다. 둘 다 건축가가 말렸던 일을 굳이 바꾼 것이 후회된다.
여기 온 후 공간에 맞추어 남편도 바뀌었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라 무뚝뚝하던 사람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꽃을 가꾸고 텃밭에 물을 주기도 하고, 소소한 심부름까지 즐겁게 해 준다. 집이라는 게 라이프 스타일을, 인생을 바꾸어준다는 걸 알았다. 이들 부부는 집 짓고 3년 사는 동안 왠지 모르게 몸이 건강해지는 것 같고 집이 날마다 변화하는 것 같아 한번도 지겹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집이라며 칭찬이 대단하다.
집은 집에 대한 또다른 기억을 불러온다. 황경숙 씨는 자미온이라는 침구 회사를 삼십여 년 가까이 하고 있지만 어렸을 때는 시골에 살았다. 세 살쯤이던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식구들이 모두 들에 일하러 나가고 없었다. 무서운 마음에 울고 싶다가 갑자기 아무도 없는 황토 마당에 햇볕이 내리쬐는 모습에 황홀해져, 울음을 그쳤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집을 짓고 나서 1년이 지난 후쯤, 김개천 교수가 조선일보에 쓴 글을 보았다. 그도 “명묵의 공간”이라 하여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집 짓던 당시엔 그런 얘기를 굳이 나눈 적은 없었다. 그때는 설계도 그렇고 44세라는 나이, 한창 건축가로서 전성기라는 것에 기대를 많이 했었다. 건축가가 추구한 것이 바로 “밝으면서도 품격 있는 공간”이었기에, 집 짓는 동안 서로 잘 맞고 통해서 좋은 집을 짓게 된 것을 이제 알겠다고 한다.
얼마 전 김개천 교수는 전통건축에 대한 생각을 묶어 <명묵의 건축>이라는 책을 내기도 한 했다. 그는 “‘한국성’을 이야기할 때 흔히 무엇이 남들과 다른가에 초점을 두는데, 무엇이 같은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한국건축의 ‘명묵(明默)’, 밝은 침묵은 “침묵을 의도하지 않은 침묵이요, 빈집에 하루 종일 햇빛이 비추는데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침묵”이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존재하는 아름다움, 그는 건축이 단순한 ‘공간’만이 아니기를 원했다.
집이 살아있는 집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돈까지 벌어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여기서 촬영하면 드라마가 잘 된다며 방송국에서 연이어 촬영을 해갔다. 방송국 사람들이 150억짜리 집으로 알고 있길래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100억짜리 집이냐고 되묻고, 그도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50억짜리 집이냐고 또 묻고 하길래 굳이 대답을 안 했단다. 좋은 조건으로 땅을 살 수 있었고, 전망 값만으로도 계산이 벌써 끝난 셈 아닌가.
촬영 당시 스탭이 너무 많아 집 내부는 공개를 못하고 주연인 박신양을 초대해서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성악을 전공한 동생이 노래를 부르자 박신양도 “사랑해도 될까요” 그 노래로 답가를 불렀는데 소리의 울림이 너무 좋았다. 집 설계할 때 2층과 1층의 가족실을 오픈하는 것과 창을 많이 내는 것, 그리고 소리의 순환이 잘 되면 좋겠다는 희망이 잘 이루어진 덕을 본 것이다.
굳이 꼽으라면, 건축가는 해질녘 거실의 높고 긴 창으로 보이는 바위 위의 소나무와 북악산의 팔각정이 보이는 전망을 가장 좋아한다. 건축주는 길에서 집을 바라볼 때, 햇빛에 반사된 흰 벽의 아스라한 빛깔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 집의 절정은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의 풍경이다.
이 땅을 사려다 말았던 사람이 나중에 와서 보고, 예전에는 이렇게 편안하고 넓지도 않았으며 전망도 좋을 줄 몰랐는데 어떻게 한 것인가 라며 아쉬워했다. 땅의 좋고 나쁨은 결국 사는 사람과의 조화에 따른 것이다. 남들이 다 험하다고 피해간 땅이 아닌가. 집과 정원 사이에 수줍게 선 백일홍, 옆 집에서 이사온 감나무, 경사진 땅에 계단을 심어 정원과 텃밭 사이를 연결한 산책로는 안주인의 솜씨이고, 온갖 들꽃과 야채를 가꾸는 텃밭의 관리는 남편의 손에 넘어갔다. 낮은 돌담을 낀 자연스런 길의 흐름은 소쇄원 같은 전통정원까지 참고한 정성이 점점이 박혀 있다.
집 안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어느새 주섬주섬 밖으로 나왔다. 바위는 언제쯤 목을 슬쩍 빼고 우리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내려다볼 것만 같다. 북한산에서 흘러내려온 산은 평창동에서 부암동 뒤로 해서 백악산에서 머물다가 남산으로 덩실거리며 가든지 평창동에서 구기동으로 인왕산으로 안산으로 해서 연희동쪽으로 가던지 하는데, 이 집은 그 분기점에 있다. 나는 바위에 앉아서, 갈림길에서 서로 헤어지며 수선스럽게 인사하는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시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