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글> 천경자(3) 1923 ~ 2015 고흥
미인도 위작 논란(1)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를 기획합니다. 기나긴 위작 논란의 발단은 천경자의 후배 시인이 천경자의 집을 방문했을 때 대화 중에 "선생님 그림 잘 보고 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후배 시인은 당시 현대그룹 계동 사옥 부근에 살면서 현대그룹 사옥 지하 사우나탕에 자주 들르는데 거기에 천경자의 미인도가 하나 걸려있다고 했습니다.
그 미인도는 오리지날 작품이 아니고 현대미술관에서 당시에 유명 작가의 그림을 선택하여 미술관 아트숍에서 대량 프린트하여 미술문화 대중화 차원과 전시회 홍보용으로 팔고 있었는데, 현대사옥의 헬스클럽도 천경자의 미인도 프린트를 사다 걸어 놓았던 것입니다.
평소에도 예민하고 자존심 강한 천경자 화백이 그냥 넘어가실 분이 아닙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직접 프린트가 걸려 있다는 헬스클럽에 찾아가 확인한 뒤에 그 그림의 미인도는 진짜가 아니라고 현대미술관에 통보했습니다. 당시 천경자 화백은 분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작가 자신이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했으니 위작을 발견한 단순한 사건으로 결론이 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야심차게 준비해오던 기획 전시가 송두리째 흔들릴 상황이 되자 깜짝 놀란 국립현대미술관측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소장품이었다가 국가에 환수되어 재무부 문공부를 거쳐 미술관으로 넘어온, 소장 경위가 확실하다는 근거와, 전문위원이었던 미술평론가 오광수씨가 이미 진품으로 감정했다는 이유를 들어 진품이라고 맞서며 국내 미술계 최대의 위작시비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천경자의 위작 주장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은 진위를 가리기 위해 X-ray, 적외선, 자외선 촬영 등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였고,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는 2차에 걸친 감정 평가 후 1991년 4월 진품이라고 최종 판정 하였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앞으로 위작임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밝혀지면 받아 들이겠다"는 단서를 붙인 끝에 진품임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생존 작가이고 정신 상태가 정상이라면 작가 의견에 감정의 우선 순위를 둔다는 화랑협의회 내부의 규정에도 어긋난 결론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재판까지 가게 되었지만 당시 법전은 ‘판단 불가’를 판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상당한 정신적 피해를 받았습니다. 작가는 사건 직후 예술원 회원직을 사퇴하고 전시회 출품 등 작품공개 활동을 중지하겠다는 절필 선언을 하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붓을 들기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후 천경자는 대규모 회고전을 가진 적은 있으나 신작은 보기가 어려워졌으며, 1998년 말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93점과 화구 등을 기증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잠해졌던 <미인도>에 대한 논란은 그로부터 8년 후인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춘식이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시비는 재연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당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2002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다시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습니다.
현대미술관은 이에 대한 재수사는 앞으로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재천명하여 수많은 의혹을 간직한 채 이 그림은 진품으로 판정되는 듯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