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건너의 추억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선친께서 손을 대신 자동차 사업 때문에 중구 내동에서 넓은 땅이 있는 숭의동으로 이사를 한 것이 1956년이었다. 그 후 몇 년 잘 나가던 선친의 사업은, 버스를 꾸미면 크게 부(富)가 있을 거라는 몇 협잡꾼의 농간에 걸려 몽땅 그르치게 되었는데 그때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63년이었다.
가족들은 이리저리 흩어져야 했고, 나는 외할머니가 홀로 사시는 쑥골로 가서 고단한 신세를 의탁하게 되었다. 이 쑥골 시절이야말로 괴롭고 슬픈 시간들이었지만, 또 한편 개건너라고 부르던 가좌동 일대와 인근의 염전 지대를 자주 소풍하게 했던 사색의 시간이기도 했다.
우연하게도 이 해 담임이 바로 ‘개건너 대통령’이라고 불리던 그곳 터주 심재갑(沈載甲) 선생님이셨는데, 선생님 때문에도 툭하면 이 개건너 인천교(仁川橋) 다리를 건너야 했다. 다름아닌 ‘가좌농민학교’ 때문이었다. 그 무렵 심 선생님은 낮에는 우리들이 있는 정규 학교 교사로, 저녁에는 당신이 손수 세우신 이 농민학교의 선생으로 가난한 농사군 청소년들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왜 내가 낙점이 되었는지, 선생님은 가끔 공부 시간에도 나를 밖으로 불러내셔서 가좌동 당신 댁까지 심부름을 시키셨다. 수업 시간이 면제된 심부름은 즐거웠지만, 그 내용은 지금 생각하면 싱겁고 쓴 웃음이 나온다. 시멘트벽돌을 제대로 성형하기 위한 적정한 시멘트, 모래의 배합 비율, 혹은 반죽의 정도 같은 것을 적은 쪽지를 거기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설명하는 일 따위였다. 꼼꼼하신 데다가 일을 미루지 못하시는 성격이 저녁 퇴근 때까지 기다리시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이 많은 농민학교 학생들은 선생님 댁 넓은 언덕 밭 위쪽에 자신들의 학교 교사(校舍)를 신축하고 있었는데 흙벽돌과 달리 시멘트벽돌 제조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확하게 그 학교 자리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마 지금의 가좌중학교 위치쯤이 아닐까싶다. 농민학교가 서 있던 그 자리는 생겨날 때부터 하늘이 학교 자리로만 점지한 곳인지 모른다.
개건너와는 또 이런 추억도 있다. 심 선생님이 결혼을 하신 것도 그해 봄이었다. 학교 강당에서 우리 반 전체 생도가 축가를 합창하는 가운데 선생님은 혼례식을 올리셨다. 여기서도 나는 예외 없이 개건너 인천교를 건널 일이 생겼다.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다음날 나는, 그날 접수된 결혼 축하 물품들을 챙겨 개건너 선생님 댁으로 옮기라는 명을 받았던 것이다.
일요일에 등교를 한 나와 다른 두 친구는 학교 목수간에서 리어카를 빌려 물건들을 실었다. 다기, 화채그릇 등속의 식기류들과 앨범, 큰 색경이라고 부르던 벽거울, 벽시계 같은 것들이었다. 자유공원 언덕길을 내려와 동인천을 지나고, 배다리를 거쳐 우리는 송림동 헐떡고개 마루에 섰다. 여기서부터 길은 내리막길, 한달음에 쑥골로 넘어가는 사이길 어구까지 내달린 뒤 인천교도 단숨에 건널 참이었다.
왼쪽편의 잘 정돈된 넓은 염전들을 바라보며 땀을 식힌 우리는 지금의 인천대 옆 경사 길을 쏜살같이 달려 내려갔다. 지금 기억에는 하나는 끌고, 하나는 뒤에서 줄을 잡고, 하나는 리어카에 오르기로 했는데 아마 내가 올라탔었던 것 같다.
사고는 거기서 발생했다. 신나게 내리꽂히던 리어카가 그만 황토 속에 처박히고 만 것이었다. 헐떡고개에서 가좌동에 이르는 길은 인가도 없고 차의 통행도 별로 없는 한적한 교외, 염전지대에 지나지 않았던 까닭에 그곳 길은 그냥 흙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비로소 길을 닦느라고 불도저가 밀어 놓은 흙더미에 우리의 리어카가 걸려 비스듬히 처박히고 만 것이었다.
‘인명’ 피해라고는 삼인(三人)의 교복이 황토에 범벅이 된 것 뿐이었다. 그밖에는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말짱했다. 물건들도 다 온전했는데, 그만 선생님의 선물 색경(色鏡) 하나가 충격에 깨진 것이었다. 결혼 선물로서 색경은 당시로서는 제법 고가였고 또 귀한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리어카를 끌고 배다리로 돌아왔다. 배다리에는 거울 가게가 몇 군데 있었다. 그리고 가마솥 같은 주물 가게들이 많았다. 거기에 중학교 동창 김 모 군네 주물 가게도 있었던 것이다.
일요일이었는데도 다행히 김 군은 가게에 있었다. 우리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김 군이 선뜻 안으로 들어가 어른들께 말씀을 여쭙고 색경 값을 빌려 주었다. 고마웠다. 우리는 유리 가게로 달려가 주인에게 우리가 깨트린 거울과 흡사한 것을 구해 전과 같은 문구를 써 넣게 하고는 거울 뒷면과 나무 판 사이에다 고죄(告罪)와 함께 그날의 모든 곡절을 적은 쪽지를 넣었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 훗날인 오늘날까지도 선생님으로부터 별다른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을 보면, 이 거울이 여전히 건재하거나 아니면 이미 벌써 전에 통째로 사라졌거나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심재갑 선생님과의 관계 말고도 서구 지역 중에 나와 인연이 많은 지역을 꼽는다면 역시 개건너, 가좌동밖에는 없다. 6․25 사변 통에 온 식구가 처음 피난을 간 곳이 어쩐 일인지 가좌동이었고, 여름방학이면 염전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거나 망둥이를 잡던 곳이었고, S 양과 함께 석양 속의 ‘소금기찻길’을 같이 걸어 돌아오던 추억의 장소였고, 송충이 구제(驅除)를 위해 가던 솔밭이었고, 가난과 실의에 빠져「염전」이라는 시를 처음 쓴 곳이기도 한 때문이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에피소드. ‘소의 웃음’을 본 것도 인천교를 막 건너 가좌동으로 접어들던 그해 초가을 어느 일요일이었다. 심 선생님 댁으로 올라서기 몇 걸음 전, 달구지 하나가 주인의 손에 이끌려 마주 오다가 우리와 서로 지나치려는 순간에 일어났다. 수레를 끌고 오던 황소가 있는 대로 입을 크게 벌려 위아래 그 누렇고 긴 이빨들을 드러내놓은 채 허공을 향해 고갯짓을 하는 것이었다.
이 기묘한 광경에 동행했던 우리 모두가 놀라자 달구지 주인이 그것이 바로 소가 웃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소는 평생 웃는 것을 볼 수 없는데, 아주 드물고 뜻밖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가 웃는 것은 썩 좋은 일로서 오늘 학생들도 운수가 좋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날 선생님 댁에서 점심으로 고봉밥을 먹었으니 이 동물의 웃음 때문에 우리의 운수가 좋기는 했던 것이다.
“숙골동산을 넘으면 ‘번저기나루’가 있는 주안염전 갯골이 나온다. 갯골 너머가 ‘개건너’라고 하는 서관이다. 번저기나루에는 나룻배 대신 웅장한 인천교가 걸려 있고, 개건너 일대의 야산은 공장지대로 변하고 있다.”
고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글을 쓰신 때가 1980년대 초이다.
“이곳에 가재가 많이 사는 건지(乾池)가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큰 가재 한 마리가 건지에서 나와 ‘가재울’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가재리(佳裁里)’라 하였고, 이후 ‘가재’가 변음되어 ‘가좌(佳佐)’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이곳을 건지가 있던 곳이라 하여 ‘건지골’로도 불리었다.”는 『인천광역시사』의 기록도 보인다.
그야말로 벽해상전이어서 외지 사람들이나 지금 태생들은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 꿈같은 과거사일 것이다.
요즘도 서구도서관 문예창작 강의를 위해 매주일 가좌동에서 버스를 타고 내린다. 신포동에서 송림동 헐떡고개를 넘고, 인천교를 건너, 개건너 가좌동을 왕복하는 것이다. 그 옛날 고봉 점심밥을 먹었던 선생님 댁, 몇 백 년 누대의 고택 한 채가 이제 밥 짓는 연기를 끊은 채, 잘라빠진 문명에 포위당한 모습으로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오가는 버스 창밖으로 말없이 내려다볼 뿐이다.<2006. 8. 6. 서구문화원>
첫댓글 선생님은 참 많은 기억들의 보물상자를 갖고 계시네요. 재밌어요.
이런것들을 다 소설로 풀어내면 좋을 것도 같은데,
근데 아직 읽지 못한 선생님 소설이 선생님 시보다 재미없을까봐 권하지는 못하겄써요. ㅋㅋ
저는 기억이 더의 안 나요.
잊고 싶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생각이 안 나는 건지,
어린 시절 가난까지도 남의 일 같고 그냥 희미한 꿈만 같거든요...
소설에다 소상히 녹여내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 부럽더라구요.
벽돌 씨의 과찬, 그래도 기분 참 좋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