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작가’ 가을호가 도톰하게 나왔다. 특집은 ‘문학의 어머니 - 신화(神話)’로 허남춘 한림화 문무병 김동윤 한진오 김진철이 썼다. 포토에세이는 이종형의 ‘배롱나무, 저 꽃다지’를, 책머리 글은 김석교의 ‘거대담론에서 생활운동으로’, ‘작가를 찾아서’는 김경훈 시인 편을 김영미의 대담과 장성규의 작가론, 문학적 자화상, 작가 연보, 신작시 등으로 꾸몄다. 김병택 교수의 기획연재 - 제주예술의 사회사는 일곱 번째로 ‘4.19혁명과 제주예술의 전개방식(2)’를 ‘제주어 산문’으로 한림화의 ‘하늘에 오른 테우리’, 시는 김수열 나기철 김광렬 김진하 김문택 김영미 김순선 현택훈, 시조는 오영호 고정국 이애자 홍경희 한희정 김진숙, 동화는 김순란이 썼다.
연작 소설로 김창집의 '섬에 태어난 죄 - ⑨ 협상' 편을, 장편연재소설은 조중연의 ‘길 - 투쟁영역의 확장(3)’을, 서평은 강영기 김순란이 맡았다. 도서출판 심지 발간, 368쪽에 값은 1만원이다. 발표 순서대로 시 5편을 골라 제주 섬 이곳저곳에서 찍은 제주특산 한라부추 꽃과 함께 싣는다.
♧ 썩다 - 김경훈 감귤을 오래 저장하다보면 썩는 놈들이 나오기 마련인데 그 모양이 제각각이다 시커멓게 혼자 타들어가는 놈 아닌 척 고요히 썩어가는 놈 겉은 멀쩡한데 속으로 썩어가는 놈 쭈글쭈글 말라가며 썩어가는 놈 흐물흐물 껍질 녹으며 썩어가는 놈 잿빛으로 변하며 썩어가는 놈 하얗게 분바르며 썩어가는 놈 수염 자라듯 곰팡이 키우며 썩어가는 놈 제 썩는 물로 옆의 놈도 같이 썩게 하는 놈 사람도 오래 묵으면 썩게 마련인데 세상사 온갖 썩은 것들 속에서 그중 가장 썩은 놈들이 제 썩은 줄 모르고 썩은 것들 나무라며 군림하려는데 이미 다 썩은 상자 속 세상 통째로 들어다 시원히 파묻어버려야 할 것인데 나도 이왕 썩을 거면 썩기 전에 고고히 버려져 감귤밭 거름이나 될 일이다
♧ 과속방지턱 - 김수열 나이를 먹다 보면 말이야 머리와 발이 따로 놀고 가슴과 아랫도리가 하나가 아닌 거라 생각 같아선 박지성이 부럽지 않지만 십분만 뛰어봐, 하늘이 노래 오장 쓴물까지 나온다니까 생각으로 단번에 설 것 같지만 막상 뛰어봐, 한 게임도 숨 차 문전만 어지럽히다 말거든 멀리는 머리와 발 사이 가깝게는 가슴과 아랫도리 사이 그래서 과속방지턱이 있는 거라 한꺼번에 넘지 말라고 한번쯤은 생각하고 넘으라고 왜, 내말이 우습냐? 한잔 따라봐
♧ 사진 - 나기철 머리 빠지고 누워만 계시는 일흔여덟 어머니 제주시 아라동 천일아파트 식탁에 앉아 조금씩 조금씩 밥 드실 때 쉰일곱 아들 나 그 옆에 서 있다 피난 내려온 스물두 살 어머니 서울 숭인동 집 포도나무 아래 장독대 옆 세 살 난 나 가볍게 안고 서 있다
♧ 소가 웃는다 - 김광렬 오름 오르는 나에게 길게 하품하며 소가 웃는다 너는 늘어지게 풀을 뜯어본 일이 없지 게으르게 풍경을 즐겨본 일도 없지 느긋함이 아름다움인 줄 모르지 오자마자 한번 쓱 훑어보고는 떠나는 인간 차를 타고 뿌옇게 먼지 일으키며 와서는 쫓기듯 부랴부랴 되돌아가는 인간 목을 빳빳이 세우고 가슴은 새처럼 떨며 마음은 늘 세속에 갇힌 속물 그렇지, 맞지 입 걸쭉하게 하품 궁굴리며 세상일 잊은 듯 선한 눈을 뜨고 소가, 풀잎 속에서 한없이 느릿느릿 웃는다
♧ 오름 - 김진하 저건 대지의 상처다 아니다 저건 성난 화산이다 아니다 저건 희망의 봉우리다 아니다 저건 부풀어 오른 종양이다 아니다 저건 반역의 봉기다 아니다 저건 쓰러진 주검들이다 아니다 저건 쓸쓸한 섬이다 아니다 저건 처녀의 젖무덤이다 아니다 저건 설문대할마님의 똥덩어리다 아니다 저건 일만팔천 신들이 집이다 아니다 저건 한라산의 새끼들이다 아니다 저건 우주의 씨앗이다 아니다 저건 마을을 낳는 모태다 아니다 저건 마을이 낳은 형제들이다 아니 대지모신의 젖꼭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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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