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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북정맥 제 9구간 산행
(학당고개 ~ 공덕재)
1. 산행일자 : 2007년 8월 25일 (토일요일)
2. 산 행 지 : 충남 청양의 천마산(422.2m), 오봉산(480m)
3. 날 씨 : 맑음, 전국적으로 폭염 주의보, 바람 한 점 없는 더운 날씨
4. 참 가 자 : 강영재, 노승애, 박봉하,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7명)
5. 산행계획
[1] 총산행거리 및 소요시간 : 약 17.5km, 10시간 30분 정도
[2] 구간별 거리
학당고개--2.3km--무곡고개--3.6km--여주재--1.6km--천마봉(422.2m)-큰골도로--2.4km--오봉산(480m)--2.3km--공덕재--2.6km--백월산(565m)--2.4km--스무고개(120m)
[3] 경유지 및 소요시간
① 수원(04:00) ∼ 영동.서해안고속 ∼ 홍성IC ∼ 홍성 ∼ 청양(06:10/아침/06:40)
② 학당고개(07:00) → 청양자동차정비공장 뒷능선(07:03) → 163.3봉/2번철탑(07:35) → 능선분기(07:55) → 무곡고개/임도(08:25) → 삼각점봉(09:15) → 여주재/구봉휴게소(09:55) → 천마봉(10:30) → 큰골도로(11:00) → 임도(11:30/점심/12:00) → 오봉산(12:45) →공덕재(13:55) → 바위봉(14:30) → 백월산(15:30) → 시온산수양원(16:40) → 스무고개(17:20)
③ 스무고개(17:40) ∼ 청양(18:00/저녁식사/19:00) ∼ 645번, 32번, 616번 ∼ 아산 ∼ 수원(22:00)
④ 아침식사 : 장원해장국(시내버스터미널) 041-943-4504
⑤ 중간 탈출로 : 함지박(군청옆) 041-943-3177
6. 산행의 실제(산악대장 제공 자료)
[1]. 일정 및 소요시간 : 총산행 약 12.5km, 9시간(3시가 30분의 긴 휴식시간 포함) 정도
[2] 산행 경유지 및 소요 시간
① 수원(04:15) ∼ 영동.서해안고속 ∼ 대천IC(05:35) ∼ 스무고개(05:50) ∼ 택시 ∼ 청양(06:15/아침/06:50) ∼ 학당고개(07:00)
② 학당고개(07:10) → 163.3봉/2번철탑(07:45/07:53) → 무곡고개/임도(08:41/08:55) → 삼각점봉(09:35) → 여주재/구봉주유소(10:34/11:28) → 천마봉(11:58/12:07) → 골도로(12:23/점심/13:17) → 임도(13:51/14:06) → 오봉산(14:52/15:18) → 공덕재(16:17)
③ 공덕재(16:40) ∼ 보령, 대천(17:10/사우나, 회와 식사/20:00) ∼ 서해안고속 ∼ 수원(22:00)
[3] 탈출로 및 기타 : 장원해장국(041-943-4504), 청양콜택시(041-943-8100)
7. 산행기
이번 구간은 금북정맥 상 최남단에 위치한 백월산을 통과하는 구간이다. 시종 청정지역의 산길을 통해 이제 최남단을 찍은 뒤 이후에는 다시 북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하여 서해바다 안흥진 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지난구간을 함으로서 금북길도 절반 정도는 진행해 온 듯하다. 따라서 이번 구간을 마치면 비로소 반환점을 돌고, 남은 거리가 진행한 거리보다 더 적을 것이다.<산행의 특징 중에서>
[1] 山行 前 狀況
금북정맥 9구간 산행은 당초 8월 5일로 계획이 되었으나 회원들의 개인사정이 있어 여러 명이 참석하지 못하고 3명(박봉하, 윤희원, 이용준)이 가게 되었다. 날씨도 무덥고 인원도 적어 8월 일반산행을 끝내고 그 다음 주(8월 25일)에 산행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8월 11일 ~ 14일(3박4일간 해외 명산 산행(중국 황산), 고향방문(8. 15일), 8월 16, 17일 연수(경북 영주 부석사와 청송 주왕산 산행), 광교산 헬기장을 두어 번 오르내리고 8월 19일 강화도 석모도 해명산 산행을 한 후 3일간 휴식, 개학(8. 23일)으로 방학 막바지를 분주하게 보냈다.
例年 같으면 末伏(8월 14일) 넘기고 處暑(8월 23일)가 가까워지면 아침저녁에는 서늘한 기운을 느끼는데 올해는 末伏 後 열흘이 지났는데도 기상 예보에는 연일 暴炎 主義報를 내리고 있다. 지난 8구간 산행 때도 더위와 땀으로 산행을 중도에서 포기(청양 문박산 구간, 3.4km)했는데 이 번 산행은 17.5km(10시간 30분소요)로 지난 산행(약 22.6km, 10시간 30분) 보다 약 5km가 준 산행이라 해도 큰 산(천마봉 422.2m, 오봉산 480m, 백월산 565m)을 세 개나 오르내려야 하고 起伏이 잦다고 한다. 더하여 한남금북정맥 산행 때의 경험으로 보아 지금쯤이면 잡목과 풀이 뒤엉켜 마루금을 따라 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해가 진지도 한참 지났는데도(20 :00시경) 熱氣가 좀처럼 수그러지지를 않는다. 선풍기를 털어 놓고 산행 준비를 하는데도 이마에 땀이 고이고 등짝이 근질근질하다. 산행 준비를 하고 있는데 윤사장님 전화, 내일 03시 40분에 아파트 앞에 차를 대기시키겠다고 한다. 산행 때마다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미안하고 고맙다.
참가 인원(카페 참가신청 : 강동규, 강영재외 1명, 김명자, 노승애, 박봉하,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 10명)을 확인해 보니 강동규사장은 사정이 있어 못 간다고 한다. 모처럼 금북정맥 산행에서 얼굴을 대할 수 있다고 기대를 했는데 아쉽다.
[2] 산행 당일, 산행 시작 전에 있었던 일
2007. 8. 25일 03 : 00시 기상.
물과 간식, 점심 饌을 챙겨 밖에 나와 보니 地熱이 그대로 남아 후근 그린다. 03 : 40분, 윤사장 도착, 04 : 00시경 출발 지점인 경기도 여권 민원실 앞에 도착 해 보니 강영재, 노승애부장, 안상경교장, 산악대장, 장부장은 나와 있는데 두 분이 보이지 않는다. 강영재부장 친구분과 김명자부장이 참가하지 못한다는 열락이 왔다고 한다. 모처럼 금북정맥 산행이 성황을 이룬다 생각했는데 결국 평상시 인원(7명)이 되고 말았다.
04 : 00시를 좀 넘겨 출발했다. 잠시 눈을 붙였는가 싶었는데 오늘 산행의 종착지 『스무고개』에 도착(05 : 55분경)했다. 『스무고개』에 차 두고 택시 두 대를 불러 미리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청양읍내로 향했다.
06 : 30분, 차창 밖으로 동녘 하늘을 보니 새빨간 해가 구름을 뚫고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정지된 바람, 짙은 해의 빛깔, 산자락으로 길게 뻗은 안개를 보니 오늘 더위도 예사롭지 않을 것 같다.
잠시 후 청양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는 장원해장국(☎ 041-943-4504) 앞에 도착했다. 택시를 대기시켜 놓고 선지와 버섯 해장국으로 아침 식사(06 : 40분경)를 하고 공기 밥을 추가로 주문하여 점심 식사를 마련한 후 곧 바로 『학당고개(청양 장례 예식장 :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학당리 362-9, 청양장례식장 )』로 출발했다(07 : 05분경 도착).
[3] 산행 중에 있었던 일
(1) 산행 들머리, 학당이 고개
장례예식장 정문 앞에서 下車를 해서 등산화 끈을 졸라매고 스틱 길이를 조정한 후 곧바로 예식장 광장을 가로질러 비탈로 올라붙었다. 대개 산행 들머리에는 색색의 표지기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산악대장이 인도하는 데로 생각 없이 따라 숲 속으로 들어서 걷기를 3, 4분. 지금쯤이면 길도 선명하고 표지기도 보일 법 한데 길도 없고 잡목과 풀이 뒤엉킨 곳을 가고 있다. 산악대장도 길을 잘 못 들었다 싶은지 자주 머뭇거린다.
07 : 20분, 密陽 孫氏 墓를 지나 산비탈을 내려서니 자동차 정비 공장과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난다(07 : 24분경). 돌아보니 장레예식장 뒤 숲 속을 한 바퀴 돌아 내려 온 것이다. 역시 표시기는 보이지 않고 ---
포장길을 따라 걷기를 7, 8분. 매일유업 입간판(정문 앞). 다시 좌측 포장길 오르막을 올라 숲 속으로 걷기를 3,4분. 드디어 표지기가 나타난다(07 : 45분경).
그러고 보니 장례 예식장을 출발하여 (청양) 자동차 정비공장 뒤 능선 → 매일 유업 정문에서 우측 철망 울타리를 따라 진행해야 하는 것을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던 것이다.
산자락 따라 물 길 따라 형성 되었던 마을들이 현대 문명(각종 편의 시설 및 공장)의 産物들이 들어서면서 산자락을 깎아내고 물길을 바꾼 결과로 산줄기의 흐름이 끊겨 이런 고생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地形地物을 변화시켜 편함을 구하고 발전도 도모해야 하겠지만 자연을 보존하고 보호하는 범위 내에서 계발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될 것 같다.
(2) 무곡 고개
충남 당진의 화력발전소가 인근에 있어서인지 송전탑이 선을 물고 계속 이어진다. 2번 송전탑을 지나고 3번 송전탑이 나타나고(08 : 00시경) 이어서 4번 송전탑, 우측 내림 길, 밭이 있는 안부 사거리 도착(08 : 05분경), 잠시 휴식을 갖는다. 산행 출발부터 흐르는 땀을 훔치고 닦아도 그치질 않는다. 겨우 한 시간여를 걸었는데 목 안으로 물 넘기는 소리가 게릴라성 폭우가 내린 후 개울물 흘러가는 소리 같다.
휴식도 잠시 다시 출발이다. 묘 → 묘 → 묘 → 숲 길, 石板으로 테두리를 한 묘 2기를 지나니 밤나무 조림지가 나타나고(08 : 10분경) 계속되는 가시 풀과 잡목이 엉켜 걷는 것이 고역이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강부장과 윤사장의 팔, 다리에 어느새 긁힌 자국으로 붉은 상처 드러나기 시작한다.
08 : 15분, 안부 사거리 도착
08 : 20분 파평윤씨 부부 묘를 지나 봉우리에 올랐다 좌측으로 내려서니 임도 고개 마루가 나타나는데 우측은 시멘트 포장이 되 있고 좌측은 비포장 길로 『무곡고개』라고 한다(산악대장).
이 고개는 청양읍 청수리(오릿골)와 비봉면 용천리를 거쳐 홍성군 관천으로 가는 고개로 고개가 대단히 험하여 옛날에는 도적이 많았으므로 행인들이 어두우면 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고개 아래 人家에서 묵었다가 떼를 지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3) 여주재(九峰 休憩所)
무곡고개를 가로 질러 숲 속으로 들어섰다. 인가도 멀어지고 산 높이도 점점 높아가니 잡목, 잡풀이 길을 가로막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다.
08 : 50분경, 무명봉에 올랐다 좌측 내림 길 능선에 도착(08 : 55분)하여 잠시 휴식. 땀을 훔치고 물 마시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산행 출발하여 한 시간을 좀 넘겼는데 물 한 병이 동이 났다. 이 상태면 물 부족으로 산행을 중도에서 포기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09 : 15분, 9번 송전탑을 지나고 다시 급경사 오름 봉(09 : 26분)에 오르니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면서 전망이 다소 터진다. 더위와 숲에 가려 주변 모습을 살필 수 없어 답답했는데 다소 숨통이 터지는 것 같다.
09 : 36분, 청양 401 삼각점봉, 해발 330m가 되는 봉이다. 직진 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진행, 10여분을 진행(09 : 46분)하니 삼거리가 나타난다. 伐木한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가시나무가 엉켜 가는 길이 여의치 못하다.
9분여를 더 가다보니 돌무더기가 있는 십자로 안부가 나타난다. 성황당이 있었던 자리인가? 지도상에 표기된 284.3봉쯤 되는 것 같다. 잠시 휴식.
10 : 25분, 무명봉→ 내림 길→ 묘를 지나 잡목을 헤치며 내려가니(10 : 36분경)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구봉 휴게소와 SK주유소』간판, 휴게소 건물과 광장, 주유소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도로 건너편에는 청양읍과 『여주재』 정상(해발 210m)을 나타내는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물이 부족하여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다. 휴게소에 들려 물도 보충하고 아이스크림도 사 먹으며 몸의 열기를 시키겠다는 생각으로 도로에 내려서자 급한 걸음으로 휴게소로 향했다.
여드-재(여티=여주재)는 장승리에서 화성면 신정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여드재>라 부른다. 옛날엔 이 고개에 도적이 많아서 고개를 넘을 때 여든 명(80명)의 사람이 모여서 고개를 넘었다 하여 <여든이재>라고 불렀다고 하며 고개 아래 마을도 고개 지명따라 <여드재>라고 부르는데 고개 아래에 있다 해서 그리 부르며 <여드티>라고도 부른다. <출처 : 청양군지, 1995>
기대를 가지고 휴게소 앞에 도착 했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고 휴게소를 임대한다는 현수막만이 펄럭이고 있다.
우선 휴게소 광장 가장자리에 설치된 원두막에 배낭을 내리고 땀을 훔치고 거친 숨도 진정 시키며 주변을 살펴보니 휴게소 문 앞에 수도가 설치되 있다. 먼저 도착한 대원들이 머리를 식히고 있다. 식수로 쓰기에는 부적합하겠지만 예비로 물을 보충할 수는 있겠다.
잠시 쉬었다가 수돗물로 머리 열기를 식히고 물도 한 병 받았다. 산행 출발부터 후미로 따라 오던 안교장선생님, 오늘 산행을 이곳에서 접겠단다. 감기 몸살로 산행을 따라 나서지 말아야 했는데 더 이상 산행을 하는 것이 무리라고 하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아침에 이용했던 택시를 부르고 가진 물도 인계를 해 준다. 걱정했던 물 문제는 일단 해결이 됐다.
윤사장도 반바지 차림으로 산행을 할 수 없었던지 긴 바지로 갈아입고 강부장은 차에 바지를 두었기 때문에 도착한 택시를 돼 돌려 차를 주차시켜 둔 스무고개로 떠난다. 왕복 10여분이 걸린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일로 넉넉한 휴식을 갖게 되었다.
날씨 때문인지 오늘 산행이 힘겨운 모양이다. 안교장이 떠난다고 하니 공덕재까지 산행하자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雜木, 길을 가로 막는 伐木, 더위와 땀을 주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 7, 8시간을 더 산행 한다는 것은 무리란다. 공덕재에서 오늘 산행을 접었으면 좋겠는데 산악대장의 생각이 바뀔지 모르겠다.
(4) 천마봉(千馬峰) 오르는 길
강부장 도착하고 안교장은 떠났다.
느긋하게 휴식을 하며 산행 채비를 가다듬고 오늘 산행의 첫 고비가 되는 천마산(422.1m)을 오르기 위해 배낭을 짊어진다. 빈 물병을 채우고 보니 어깨를 짓누르는 무개가 여간 아니다.
도로를 횡단하여(11 : 38분경) 숲 속 오름 길로 달라붙었다. 점점 경사가 심해지고 모자 창끝으로 쉴 새 없이 물방울이 떨어진다. 숨소리도 거치러 지는데 산봉을 올려다봐도 나무 잎에 가린 하늘도 보이지 않는다. 여주재가 210m, 천마봉 정상이 422.1m. 212.1m 급경사 오르는 수고를 감내해야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일반 산행 때 210m 高度를 오르는 것이야 별 것 아니지만 脫盡한 상태라 발걸음 한 번 옮기는 것도 힘겹다. 雪上加霜이라 했던가? 이마에서 타고내리는 땀과 하루살이는 코, 귀, 입을 두고 눈으로만 날아들며 괴롭힌다.
12 : 00시, 정상이다 싶어 오른 봉에 도착하여 휴식, 이미 선두는 정상에 올랐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가쁜 숨을 가다듬고 힘을 모아 산 정상에 오라보니(12 : 07분경) 『천마산』표지판이 소나무에 매달려 있다. 정상에는 이동통신 중계 탑과 산불 감시 초소가 있고 국방지리 연구소에서 설치한 큰 삼각점도 있다.
『千馬峯(422.1m)』은 청양읍 서쪽 장승리와 軍良里에 걸쳐 있는 산봉우리로 산정에는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보이는 고대토성지가 있고 옛날에는 성안에 수십 채의 집이 있어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갑오년 東學亂 때 洪成까지 올라갔던 동학군이 이곳에서 관군과 싸우다가 천마리의 말이(千馬) 죽어 말 천마리를 묻었다하여 『천마봉』이라 命名했다고 하며 山形이 ‘천마안형(天馬鞍形)’과 같다고 하여 『천마봉』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너무 더디 오른 때문인가? 먼저 오른 대원들은 山頂에서 다 내려가고 뜨겁게 내리쏟는 태양 열기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천마봉을 오르는데 너무 지체한 것 같아 주변만 급히 살피고 봉 정상에서 내려오니 무인 기지국 건물과 기지탑이 또 하나 세워져 있다.
(5) 큰골 고개
천마봉 정상 이동통신 기지국을 세울 때 만들어진 넓은 길을 따라 2분여를 내려오니 삼거리가 나오고 앞서가던 윤사장님이 기다리고 있다. 정맥 표시기는 우측 숲 속으로 달려 있다. 혹시 직진을 할까 염려 되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12 : 23분, 파평윤씨 묘를 지나 숲이 끝나는 지점(콩밭)에 내려서니 대원들이 쉬고 있다.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할 모양이다. 콩밭을 내려서면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나오는데 청양읍 군량리와 화성면 구시티를 지나 매산리를 연결시켜 주는 도로가 된다.
『구시티』는 천마봉 아래에 자리한 마을로 숯을 구어 내는 숯구터가 많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하며 『군량동(軍糧洞)』은 <구시터>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군량동> <군량골> 이라고 부른다. 백제 때는 古良部里縣(고량부리현)에 속했고 신라 때는 靑正縣(청정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靑陽縣(청양현)에 속했었다. 이조 때는 靑陽郡(청양군)에 속했는데 이조말엽엔 靑陽郡 邑內面의 지역으로서 이조때 軍糧(군량) 倉庫(창고)가 있었으므로 <군량골> 또는 <軍良洞군량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옛날에는 土城이 마을에 자리했었다고 한다.
口傳에 따르면 고리섬에 물이 가득하면 이 마을을 통해 서 화성면으로 물이 넘어간다 하여 <무넘교>라고도 불렀고 마을 입구에는 배가 드나들었다 하여 <넉배>라고도 불렀다. <넉배>에서 산날등으로 토성을 쌓고 화성을 거처 대천으로 <군량미>를 날랐다 한다.
점심 식사 자리를 찾아보기 위해 자리를 떠났던 산악대장이 돌아와 그늘진 마땅한 자리가 없다고 하여 다소 비탈진 그늘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 온 도시락을 꺼내 놓는다.
오전 산행 중 더위로 땀을 너무 흘린 탓인가? 배가 출출하면서도 식욕이 나지 않는다. 윤사장은 아예 미수가루로 점심을 준비했다. 이런 때는 시원한 냉면 한 그릇이면 珍羞盛饌이 부럽지 않을 것 같다.
윤사장, 더위와 심한 땀 배출로 힘이 드는지 오후 산행은 포기하겠다고 한다. 산악대장도 생각이 달라졌는지 『백월산』산행을 다음 구간으로 미루고 『공덕재』에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하겠다고 한다.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다. 힘이야 들겠지만 3시간 정도의 산행은 버틸 것 같다.
(6) 오봉산(=구봉산) 오르는 길
13 : 25분경, 큰골 도로를 횡단하여 급경사 절개지로 올라붙었다. 절개지 3/2지점에 올랐는데 고개 마루에 택시가 도착했다.
노부장, 윤사장님 조심해서 가라고 손짓을 하다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벌에 쏘였단다. 손짓을 하며 뒷걸음을 하다 벌집을 건드린 모양이다. 큰 산벌이 떼를 지어 노부장 주변을 날아다닌다.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게 하고 벌집을 피해 조심을 하며 절개지 급경사를 벗어나 숲 속으로 접어들어 峰 마루에 올라섰다(13 : 40분경).
오전 산행 때와 마찬가지로 伐木, 雜木, 산초나무, 가시덩굴로 길을 헤쳐 나가기가 힘든데 하루살이가 좇고 좇아도 끈질기고 성가시게 따라 붙는다. 참 고약한 놈이다.
13 : 45분, 묘목장 → 임도 → 임도 삼거리 → 임도를 따르다 숲 속으로 접어들어 휴식(13 : 50분경)
14 : 15분, 안부 오름 길. 아마도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오봉산』을 오르고 있는 모양이다. 기력이 소진했는지 오봉산 오름 길이 힘겹다. 갑자기 허벅지가 따끔거린다. 풀쐐기가 毒針을 날린 모양이다.
스틱에 의지해 하늘이 훤히 보이는 山頂에 올랐다(14 : 53분경). 풀로 가득 덮인 헬기장이 나타난다. 2분 더 진행, 「이곳은 정상입니다」라고 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오봉산, 485m』 정상에 도착(14 : 55분경) 했다.
오봉산(=구봉산)은 충청남도 청양군 남양면과 화성면 사이의 산으로 높이는 485미터이며 아홉 봉우리를 이룬 산이라 해서 <구봉산>이라고도 부른다. 해방 때부터 1971년 한국 굴지의 큰 금광의 있어서 많은 금을 캐던 곳이며 구봉광업소가 있었다고 한다.
(7) 오늘 산행의 종착지 『공덕재』
앞으로 한 시간, 낮은 봉을 두어 번 오르내리면 오늘 산행의 종착지 『공덕재』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미지근한 물로 목마름을 달래고 하나 남을 복숭아로 허기를 면하며 휴식. 거리가 멀고 산이 높아 힘들었던 산행이 아니라 더위와 쓰러져 길을 막은 나무, 키 높이로 자란 잡목과 서로 뒤엉킨 가시나무와 잡풀이 유별나게 힘들게 만든 산행이었다.
내림 길, 한 시간이면 산행을 종료할 수 있어 느긋한 휴식(약 27분 정도)을 취하고 출발(15 : 18분).
15 : 38분, 산불 감시 초소 통과(금북정맥, 청양산악회라고 쓴 코팅 표지판이 있음), 鬱鬱蒼蒼한 松林 숲을 지나고 성황당 흔적(돌무더기)이 있는 안부(15 : 55분경)에서 낮은 무명봉을 치고 오르니 길은 능선 평지로 이어진다. 자생으로 자란듯한 밤나무가 至賤으로 길을 덮어 아차 하면 길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갈 것만 같다.
이런 길 걷기를 약 20여분, 차 소리가 들린다 싶은데 절개지 아래로 굽이돌아 오르는 고개 마루 아스팔트길(610번 지방 도로)이 눈에 들어온다. 큰골 도로에서 하산 했던 윤사장님, 차를 옮겨 놓았고 먼저 도착한 대원들도 그늘에서 쉬며 후미로 도착하는 우리(장부장과 나)를 기다리고 있다.
16 : 25분, 유별나게 땀을 많이 흘렸던 금북정맥 9구간 산행의 종착지『공덕재』에 도착을 했다. 『공덕재』는 청양군 화성면(산정리)과 남양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큰 공대기, 작은 공대기라 부르며 이 고개를 경계로 「청양」편이 끝나고 「보령」편이 시작되는 지점이 된다.
(8) 산행을 끝내고
선두로 도착한 대원들, 느긋하게 쉬었는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가기를 서두른다. 급히 승차, 아침에 차를 주차시켜 둔 『스무고개』로 향했다.
윤사장님 차가 이상이 있는지 속도가 나지 않고(시속 40km) 빨간 경고등이 켜진다고 한다. 20여분 후 스무고개 도착, 산악대장 차로 分乘하고 차를 고치기 위해 보령 시내로 향했다.
땀으로 범벅을 이룬 몸을 닦기 위해 사우나장에 주차 시키고, 車 運行 案內書를 보고 경고등 문제 해결. 약 40여 분간 사우나, 온탕, 냉탕을 넘나들며 10여 시간 절은 땀을 씻어내니 날아갈 듯 상쾌하다.
산행 뒤풀이 겸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대천 해수욕장으로 이동을 했다. 예년 같으면 해수욕장이 썰렁할 시기인데 늦더위로 인파로 북적이고 도로변에는 빈틈없이 주차가 돼 있다. 해변 가 2층 집에 자리를 잡고 농어와 도미로 회를 준비시키고 소주잔을 부딪치며 오늘 산행의 고단함을 풀었다. 아침 차창 밖으로 보았던 해가 바다 속으로 빠져든다.
(9) 오늘 산행은
○ 가장 더운 때, 가장 많은 땀을 흘린 산행이었다.
○ 산행 중 가장 많은 물(1ℓ들이 5병)을 마셔 본 산행이었다.
○ 伐木, 雜木, 가시덩굴의 방해를 가장 많이 받았던 산행이었다.
○ 금북정맥 중 처음으로 계획된 구간을 참여 대원 전체가 중도에서(공덕재) 포기한 산행이었다.
○ 가장 넉넉한 휴식 시간을 가져본 산행이었다.
○ 산행 후 사우나로, 회로 산행 뒤풀이를 해 본 산행이었다.
***************************** < 참고자료 > ********************************
<참고자료 1> 청양군 청양읍 『학당이』와 『임바우』 전설
학당이는 청양군 서하면의 지역으로 글을 배우는 학당(學堂)이 있었으므로 학당 또는 학당동, 학댕이라 하였다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읍동, 아리현, 건곡리와 안부동, 원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학당리라 해서 비봉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2호에 의하여 청양면에 편입되었으며 가운뎃골(마을), 갓골(마을), 곱두실(마을), 부엉산(산), 쇳대배기(들), 싸리울(마을), 아리고개(마을), 아리고개(고개), 안부동(마을), 여우실(마을), 원학당(마을), 인바우(마을), 인바우(바위), 인바웃들(들), 장승배기(들) 통미(산)등이 있다.
이 마을은 200년 전에는 100호 가량 되었으며 주로 임씨가 많이 살았다고 하며 마을 앞에는 한밭봉과 조로봉(조리봉)이 있다. 조리가 있으며 물이 있는 못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크게 흥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나간 이후로 마을이 쇠하였다고 한다.
학당리에는 『임바위』란 바위가 있는데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이곳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 은 살림이 넉넉한 편이 못되어서 아무리 무더운 여름날이나 살이 에일 것 같은 겨울이라도 부지런히 일을 해야 했다.
남편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아야 하고 아내는 날품을 팔아야 했다 . 이래서 늘 고단한 몸이었지만 그들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나란히 앉아서 저녁밥을 먹을 때는 더 없이 즐거웠다. 남편은 아내가 날품을 팔러 다니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런가하면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매일같이 그 험한 산에 오르는 것이 걱정되었다. 이런 땐 아내는 자기도 부지런히 노력하여 남들처럼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래서 아내는 쉴 사이도 없이 몸을 날리며 뛰어 다녔다. 이날도 남편은 지게를 지고 일어섰다. 몸이 좀 불편했지만 이런 것쯤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내도 이날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남편이 산에 오르는 것이 꺼림칙했다.
어젯밤 꿈이었다. 남편과 나란히 친정에 간다고 길을 나섰다. 얼마쯤 걸어가자 갑자기 어디선가 검은 말이 나타나더니 남편을 등에 업고 달리는 것이었다. 아내는 있는 힘을 다해서 남편을 불렀다. 남편도 아내를 보고 안타까워했지만 검은 말은 아랑곳없이 남편을 싣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아내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한없이 울다가 지쳐서 꿈을 깨었다. 아내는 꿈을 생각할 때마다 어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걱정이 되 남편이 쉬도록 권했으나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사립문을 나섰다. 가까운 산은 나무를 매일같이 했기 때문에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날따라 지게를 벗어 놓고 나무를 할 만한 자리가 얼른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자꾸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울울창창한 숲 그는 드디어 나무할 자리를 잡고 앉아서 담배를 한 대 피어 물 즈음 어디선가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지게 작대기를 들고 일어섰지만 날쌘 호랑이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호랑이한테 잡히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어쩔 수 없이 호랑이한테 죽고 말았다.
아내는 남편을 산에 보내고 무엇인가 꺼림직 하게 느꼈지만 일터로 나가자 곧 잊어 버렸다. 이젠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둠이 쌓이고 하늘에 별이 하나 둘 보였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생각을 떨치려고 애를 썼다.
방으로 들어와 등불에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찬이슬을 밤새도록 맞았다. 꼬박 밤을 새운 것이다. 이튼 날은 일을 나가지 않았다. 혹시 남편이 무슨 일이 있어 다쳐서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낮에도 사립문 앞 언덕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날도 해가 기울도록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는 매일같이 등불을 들고 나와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그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매일같이 기다리다가 몸이 점점 야위어 갔다. 그러다가 그 자리에서 등불을 든 채 쓰러져 하나의 바위가 되고 말았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임바위』라고 불렀다고 하며 마을 이름도 『임바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고 한다.
<참고자료 2> 청양읍 청수리와 비봉면 용천리(龍川里)
① 청수리
백제때는 古良釜里縣(고량부리현)에 속했고 신라때는 靑正縣(청정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靑陽縣(청양현)에 속했었다. 이조때는 靑陽郡(청양군)에 속했고 이조말엽엔 靑陽郡 西下面(청양군 서하면)의 지역으로 산골이 되어 맑은 물이 늘 흐르므로 <청수골 > 또는 <청수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내당리> <애달리> <하오리> <행동>등 병합하여 비봉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1일 靑陽面(청양면) 편입되고 읍 승격에 따라 靑陽邑(청양읍)에 속하게 되었다.
② 박정거리(청양읍 청수리)
<오릿골>아래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박정거리>라고 부른다. 마을 앞에 큰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을 <博井박정>이라 부르고 우 물이 있는 마을을 <박정거리>라고 부른다.
③ 오릿골
<청수골> 북동쪽에 자리한 마을을 <오릿골> <오류동> <오리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오동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오릿골> <오류동> <오리골>이라고 부른다한다
④ 장안샘
<박정거리>앞 논에 있는 우물을 <장안샘>이라고 부른다. 물이 항상 줄지 않고 나오는 샘이다. 물코가 장안에 있다하여 <장안샘>이라 부른다 한다.
⑤ 비봉면 용천리(龍川里)
백제때는 고량부리현에 속했고, 신라때는 청정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여양현에 속했었다. 이조때는 청양현에 속해서 이조말엽엔 홍성군 청양군 얼방변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만천리 내동 용계리 하봉리 방축동과 조동 리동 마흘리 대한리의 각 일부와 청양군 서하면의 리목동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천리라 해서 청양군 비봉면에 편입되었다.
⑥ 박성미
용천리 <박성산> 아래에 마을을 <박성미>라고 부른다. 마을 뒷산에 박씨가 묘를 쓰면 마을에 후환이 없고 다른 성씨가 묘를 쓰면 마을에 후환이 온다해서 마을 뒷산을 <박성산>이라고 부르고 산 아래 마을을 처음은 <박성묘제>라고 부르던 것이 변해서 <박성뫼>라고 부른다.
<참고자료 3> 청양읍 장승리(長承里)
① 백제 때는 古良釜里縣(고량부리현)에 속했고 신라 때는 靑正縣(청정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靑陽縣(청양현)에 속했으며 이조 때는 靑陽郡(청양군)에 속했고 이조말엽엔 靑陽郡 南上面(청양군 남상면)의 지역으로서 장승이 서 있으므로 <장승거리> 또는 <장승가>라 불렀으며 변해서 <장승개> 또는 <長浦장포>라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근동 구대리 심곡리 산수동 여치리와 방축동 군량동의 각일부의 읍내리의 송애리 일부를 병합하여 장승리라 해서 읍내면 편입 되었다가 1917년 面名呼稱(면명호칭) 변경에 따라 靑陽面(청양면)에 그리고 후에 읍 승격(읍 승격)에 따라 靑陽邑(청양읍)에 속하게 되었다.
② 장승개
<마근골> 동남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장승개> <장승가> <장포> <장승거리>라 부른다. 마을에 장승이 서 있다 해서 <장승개> <장승가> <장포> <장승거리>라 부른다
③ 사직동(社稷洞)
<장승개> 북동쪽 산에 社稷壇(사직단)이 있고 <사직단>이 있는 마을을 <社稷洞사직동>이라고 부른다.
이곳 사직단은 이조말엽에 밤나무로 만든 牌(편)를 세우고 사직을 세워 토신과 곡신에게 춘추로 제물을 차려놓고 현감이 제사를 지내며 한해의 백성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농민들이 농악을 울리며 제사를 지낸 다음 음식을 나누워 먹으며 흥겨워 하는 잔치이기도 하였다.
<참고자료 4> 청양읍 군량리(軍粮里)
① 군량리(軍糧里)
백제때는 古良部里縣(고량부리현)에 속했고 신라때는 靑正縣(청정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靑陽縣(청양현)에 속했었다. 이조때는 靑陽郡(청양군)에 속해서 이조말엽엔 靑陽郡 邑內面의 지역으로서 이조때 軍糧(군량) 倉庫(창고)가 있었으므로 <군량골> 또는 <軍良洞군량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上九里(상구리), 中大里(중대리),軍良洞(군량동) 일부를 병합하여 軍良里(군량리)라 해서 邑內面(읍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面名呼稱(면명호칭)변경에 따라 靑陽面(청양면)에 다시 읍 승격에 따라 靑陽郡(청양군) 靑陽邑(청양읍)에 속하게 되었다.
② 고군량골
<군량골>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고군량골>이라고 부른다. <군량골> 서쪽 산아래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이고 하늘만 보이는 곳이다. <군량골>이라 부를 만큼 첩첩한 산에 가린 마을인데 옛날에는 孔氏(공씨)들이 많이 살았다 한다. <군량골>에서 오래된 마을임으로 <古君糧(고군량)골>이라고 부른다
<참고자료 5> 청양읍 군량리 『고란초(皐蘭草)』
청양읍 군량리에 있는 고란초는 常綠多年草(상록다년초)로서 뿌리가 길게 뻗고 갈색잎이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대개의 경우 끝이 뾰족한 것이 많지만 자란 난은 잎이 2-3개로 갈라진다.
잎이 세 개로 갈라질 때는 중앙부의 것이 가장 크고 뒷면은 다소 흰빛이 돌고 흙빛이 돌고 흙색 반점이 있다. 강원도 이남의 그늘진 바위틈이나 낭떠러지에서 자라는데 부여 고란사 뒤 암벽에 있는 고란초보다 잎이 넓은 것이 특색이다. 칠갑산에 있는 큰 고란초보다 짙은 색깔의 난초인데 자리를 옮기면 죽으므로 장소를 옮길 수 없다.
구전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할 때 궁성을 뛰쳐나온 궁녀한 사람이 몰래 궁성울 빠져나와 <반여울>쪽으로 도망갔다가 피난민 따라 강을 건너고 금강사에 숨어 살다가 하루는 남장을 하고 사비성에 들려 고란사에 들렸다가 옛날 그녀가 아끼고 키우던 고란초를 한주먹 캐어서 들고 다시 강을 건너 금강산에 돌아왔다가 그곳에도 오래 있기가 싫어서 은산을 거쳐 청양 땅에 들려선 지금의 군량리부근에 자리하고 살게 되었다. 하루는 역시 망국의 슬픔을 안고 떠도는 한 사내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는 백제가 망하자 당나라 군사들에게 포로로 잡혀서 당나라까지 끌려갔다가 도망쳐 나온 사내였었다. 궁녀는 그 사내를 만나자 서로 이 부근에서 살게 되는데 되는대로 바위틈에 고란초를 심어 놓은 것 이 번성해서 옛날 사비성에서 보았던 때의 고란초보다 더욱 아름답게 수놓아지자 옛날을 달래듯 오직 고란초를 보면서 재미있게 살았다 한다.
그 후 그들은 이곳까지 신라 사람들이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그때에도 이곳을 떠날 때 그녀는 한줌의 고란초를 뽑아 들고 칠갑산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칠갑산에도 고란초가 퍼지게 되었는데 그녀가 죽자 그녀가 죽던해에 번지던 고란초는 모두 시들하였지만 그녀가 살던 곳에만 고란초가 남아서 옛 모습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고란초>를 <궁녀란>이라고 부르는데 백제의 궁녀의 넋이라고도 부르는 여기 고란초는 마을 사람들이 옛날부터 백제가 남긴 유산처럼 보호한 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