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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공(文康公) 추의사(秋義使)
우성전(禹性傳)의 학문과 의병장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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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홍 규
(전 경기대 사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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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 리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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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연(秋淵) 우성전(禹性傳)은 16세기 중․후반, 대내적으로는 정쟁이 격화된 끝에 당색이 동․서․남․북인으로 분화되고, 대외적으로는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역사상 미증유의 전란기를 맞아 관료·학자·의병장으로서 그 격동과 위기의 시대가 던져주는 문제의식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치열하게 사색하고 행동했던 역사적 인물이다.
일찍이 그는 청년기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퇴계의 3대 제자로 꼽힐 만큼 스승으로부터 각별한 관심과 촉망을 받는 대상이었으며 뛰어난 성리학자로서 학문적 탐구의 끈을 끝까지 견지했던 당대의 주목받던 학자였다. 무엇보다 높은 안목과 경륜, 그리고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그는 그 시대적 정치현실로 치열하게 전개되던 당쟁의 한가운데서 남인 당색을 이끄는 정계의 중견 관료로서 온갖 시련과 질시를 마다하지 않는 가운데 때로는 실의와 불우한 세월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노모를 모시고 은거생활을 하던 우성전은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그는 선영과 관직의 연고지였던 수원을 중심으로 경기도 각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 추의군(秋義軍)이라는 경기지역 최대의 의병부대를 조직, 경기 남북부와 서울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큰 전과를 올렸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왜군의 진군 목표였던 수도 서울을 둘러싼 경기지역 일대는 거의 왜군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즉, 경기지역은 관할 37개 군읍 가운데 서해안 중심부에 위치한 강화·교동만을 제외한 35개 군읍이 왜군의 침략을 겪거나 점거된 적이 있을 만큼 그 피해가 극심하였다. 그중에서 의병이 봉기 활동한 대표적인 지역은 수원(우성전, 김천일, 최흘), 안성(홍계남), 고양(신거상, 이산휘, 이신의, 이로), 양지(김충수), 양근(이일), 삭령(김적), 강화와 인천(우성전, 김천일) 등지였다. 왜군의 분탕질이 매우 컸던 경기지역에서 이예(吏隷)와 사민(士民)을 규합해 대규모 의병부대 추의군을 결성하고, 수원을 비롯한 강화·고양, 그리고 한성 수복전 등 결정적 고비마다 참여해 활약한 우성전의 활동은 각 지역의 향촌 수호는 물론 근왕(勤王)과 도성 회복을 위한 경기지역 의병운동의 상징적 성과와 의미를 지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추의군은 나주에서 북상한 김천일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당시 왜군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강화와 인천에 들어가 전투 병력 강화와 군수품 조달을 도모하면서 경기 북부 고양과 한강, 서울지역 전투에서 왜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우성전의 뛰어난 활동과 전공을 기려 의병장으로서 최대의 영예인 ‘추의사(秋義使)’라는 직첩과 인장을 내렸으며, 의병장 김천일에게 내린 창의사(倡義使)와 함께 의병장으로서는 최고의 대표적인 지휘관임을 공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과 역사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경기지역 의병과 우성전의 의병운동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또한 서애·학봉과 함께 퇴계의 고제(高弟)이자 성리학자로서 일생동안 탐구와 연찬을 게을리 하지 않은 그의 학문, 그리고 분화를 거듭하던 당시 격동적인 정계의 한가운데서 남인의 영수로서 한 정파를 이끈 관료로서, 또한 시대의식에 투철한 지식인으로서의 치열한 삶과 역할에 대한 역사적 평가 또한 소극적이라 하리만큼 지나치게 미미하였다. 이 글을 계기로 의병장 우성전의 의병운동은 물론 학자, 관료로서의 역사적 역할과 의미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과 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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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출생과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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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전(禹性傳, 1542~1593)은 1542년(중종 37) 음 8월 16일 한성부(漢城府) 낙선방(樂善坊)에서 우언겸(禹彦謙)과 연안 김씨 부인(현감 金碩鱗의 딸)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맏형인 우심전(禹心傳), 밑으로는 동생 우도전(禹道傳, 字 景中, 사헌부 감찰)이 있었다. 그의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연암(淵庵)이라고 하였다.
우성전의 본관은 단양(丹陽)으로,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낸 우현(禹玄)이며 고려 말의 애국적인 무장으로 경상도원수(元帥)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조선 태종 초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낸 우인열(禹仁烈, 1337~1403)을 분파시조로 하는 정평공파(靖平公派)의 17세손이 된다. 단양 우씨는 앞의 정평공 우인열 이외에 고려조에서 성균좨주(成均祭主)를 지냈고 한국 성리학의 개척자로서 경사(經史)와 『주역(周易)』에 달통했던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3~1342), 우왕~공양왕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좌시중(左侍中)․판삼사사를 지낸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 우현보(禹玄寶, 1333~1400) 등 역사적 인물을 배출한 명문의 하나이다.
우성전의 직계 선조가 세거(世居)해 오고 묘역(墓域)이 있는 수원부 호매절면(好梅折面) 외촌(현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은 바로 그의 선산(先山)이 있는 본향(本鄕)으로서, 추연의 증조가 되는 우수(禹樹, 14세 손, 延安府使 역임)대에 이르러 그동안 세거해 오던 파주군 내포(內浦) 2리에서 이곳으로 이주해온 것이 시초라고 한다. 우성전이 수원현감을 역임하고 정계에서 물러나 노모를 봉양하며 살았던 현재의 매송면 어천리의 주변 일대는 명고서원(明皐書院)·매곡서원(梅谷書院) 터가
<!--[if !vml]--><!--[endif]--> 남아 있어서 조선중기 사림들의 활동 근거지로서 위상을 갖추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어천리 동쪽으로 우뚝 솟아있는 칠보산(七寶山)은 산삼·맷돌·잣나무·황계(黃鷄)수탉·호랑이·사찰·장사(壯士)등 7가지 보물이 유명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그 빼어난 산수와 함께 이 고장의 유서 깊은 인문과 자연환경의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어천리 외촌에서 서남향으로 관옥골, 능골이라 불리는 나지막한 야산과 골짜기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는 최초로 이 고장에 이주했던 정평공파 14세손 우수(禹樹, 延安府使)이후 우성전과 그의 7세손인 조선후기실학자 천일록(千一錄)의 저자 우하영(禹夏永, 醉石室, 1741~1812)을 비롯하여 단양 우씨 선대의 묘역(墓域)이 위치해 있다.
우성전의 선대는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고 관도(官途)에 나아간 비교적 현달한 가문이었다. 고조인 우기(禹圻)는 평양판관을, 증조인 우수(禹樹)는 연안부사를 지냈고, 조부 우성훈(禹成勳)은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학문이 깊었으며, 생부 우언겸(禹彦謙, 字 益之, 1509~1573)은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을 거쳐 함종현령(咸從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우언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나 뒤에 아들이 없던 백부인 우준겸(禹俊謙, 贈 左承旨)에게 입양 출계(出系, 양모는 밀양 박씨)되어 청소년 시절과 중년 이후 주로 서울 낙선방, 남산 밑 초정(草亭), 숭례문 밖 등지에 있던 생가와 양가(養家)를 오가며 살았다.
장성해서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대사성․대사간 등을 역임하며 동인(東人)의 영수로 명성이 높던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의 둘째딸 양천 허씨와 혼인하였다. 추연의 장모가 되는 초당의 초취부인 한씨는 서평군 한숙창의 딸로서 소생으로는 아들 허성(許荿, 자 功彦, 호 岳麓, 1548~1612, 대사성․대사간․부제학에 이어 예조․병조․이조판서 역임)과 군수 박순원에게 출가한 맏딸 등 1남 2녀를 두었다. 또한 초당의 재취부인 김씨는 예조판서 김광철의 딸로서, 소생으로는 허봉(許篈, 자 美叔, 호 荷谷, 1551~1558, 예조․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예문관의 應敎, 典翰을 역임)․허난설헌(許蘭雪軒, 초명 楚姬, 1563~1589)․허균(許筠, 자 端甫, 호 蚊山, 1569~1618, 검열․세자시강원 說書 등 역임) 등 2남 1녀를 두었다. 이들 처가붙이가 바로 추연의 동복과 이복처남․처제가 되는데, 특히 처족들은 하나같이 제제다사(濟濟多士)의 인물들로써 관직 또한 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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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퇴계(退溪)의 문하(門下)에서 학문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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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연 우성전이 당대 최고의 석학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기 위해 예안(禮安, 지금의 안동)에 유학(遊學)하여 학문을 본격적으로 깊이 있게 연찬(硏鑽)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21세 때의 일이었다. 이 시기는 벼슬에서 물러난 퇴계가 61세가 되던 1561년 11월 현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 남쪽에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부속건물들을 완공하고, 또 이듬해에는 그 곁에 제자들이 힘을 모아 역락서재(亦樂書齋)를 지었으며,『근사록(近思錄)』을 강의하던 무렵이었다. 추연의 나이 22세가 되던 1563년(명종 18) 추연의 생부 우언겸(禹彦謙)과 여답(與答)한 서간 1편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 해 전부터 예안에서 직접 퇴계의 지도 아래 유학 경전 강의가 이루어지고, 또 서간을 통해 학문 지도와 연찬이 본격화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if !vml]--><!--[endif]--> 추연이 1562년(명종 17) 퇴계의 문하에 유학할 때 동문․동갑의 유성룡(柳成龍, 1542~1607, 호 西厓)을 만났는데, 그와는 뜻이 맞는 평생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 서애는 “내가 용궁(龍宮)에 내려가서 외삼촌의 상례를 치를 때 경선(景善)을 만났으니, 수회촌(水回村) 여관방에서였다. 다음해에 경선이 한성부 낙선방(樂善坊)의 집으로 돌아갔으니, 나와 함께 같은 곳에서 독서한 지가 거의 반년쯤 되었는데, 이때부터 우정이 돈독하였다.”고 추연과의 각별한 인연을 회고하였다. 고우(故友)에 대한 감회어린 서애의 회고로 미루어 이때 두 사람이 도산서당에 머문 것은 약 6개월 정도의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64년(명종 19) 퇴계의 답서「우경성의 문목(問目)에 답함」에서 추연에게 거경(居敬) 공부에서 지나치게 마음을 잡아두려는 의사를 가져서는 안 되고, 또 그 공효(功效)를 너무 빨리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으며, 그 별지(別紙)에서는 안자(顔子)․증자(曾子)․주자(朱子)의 말을 들어 경(敬)을 지키는 요체를 초학자인 제자에게 설유(說諭)하고 있다.
또 도산서당에서 함께 수업한 동문 김성일(金誠一, 1538~1593, 호 鶴峯))이 경전에 대한 독서의 경중(輕重)을 퇴계에게 질의한데 대하여 그 답서만 보더라도 이 시기 추연과 서애의 학문적 생각과 취향의 일단이 어떠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학봉이 퇴계에게 “우성전과 유성룡이 이르기를, 『주서(朱書)』는 『심경(心經)』처럼 중요치 않다고 하니, 그 말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이에 퇴계는 “일찍이 다 읽기 전에 지레 어떻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니, 반드시 여러 해 동안 깊은 공력을 거쳐 익숙히 읽고, 자세히 맛들인 연후에야 바야흐로 그 친절함을 알 것이다. 또 학문을 한다면 그다지 졸속을 좋아하고 수고를 싫어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깨우쳐 주고 있는 대목이 바로 그 단적인 예이다.
24세가 되던 1565년(명종 19) 성균관에 재학 중이던 추연은 낙향한 퇴계에게 기준(奇遵, 1492~1521, 호 服齋)의 저술 『덕양유고(德陽遺藁)』를 구해 보내드리면서 자신의 근황을 피력하자, 퇴계는 제자의 배려에 대해 감사의 마음과 함께 성균관생들이 요승 보우의 죄를 상소한 소식을 듣고, 당시 성균관에서 보우의 탄핵운동을 주도하던 제자 우성전에 대하여 우려의 뜻을 간략히 피력하고 있다.
이로부터 몇 달 후인 이해 7월 추연은 스승의 역학(易學) 강론을 직접 듣기 위해 다시 도산서당을 찾았다. 이번 방문은 동문인 김성일과 함께 독서를 하면서 스승으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는 기회였던 만큼 특히 학구열이 남다르던 그의 기대 또한 컸다. 65세의 퇴계가 맏손자 이안도(李安道, 호 蒙齋, 당시 25세)에게 보낸 이 해 8월 1일자와 8월 3일자, 그리고 11월 하순의 서간「안도에게 보낸다(安道寄書)」에 의하면, 이때 추연은 학봉과 함께 계재(溪齋)에 머무르면서 스승의 지도하에 정지운(鄭之雲, 1509~1561, 호 秋巒) 소장의 『역학계몽(易學啓蒙)』2책을 강독하는데 깊이 잠심(潛心)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65년(명종 20) 한 해만 해도 퇴계는 문도(門徒)들에게 6월에는 『논어(論語)』, 8월에는 『역학계몽』, 그리고 12월에는 『심경』 강의를 했던 만큼, 추연은 이를 수강하면서 많은 학문적 깨우침을 얻었던 것 같다. 이 해 한 해 동안 퇴계와 추연이 여답(與答)하여 『퇴계선생문집』에 수록한 서간만 해도 4편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이듬해인 1566년(명종 21) 1월 퇴계는 학봉․추연 두 제자와 『역학계몽』을 논한 자신의 학문적 즐거움과 보람을 손수 시로 읊어 제자들을 크게 격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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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 바람 오히려 북풍처럼 사나울 제
밝은 창을 잠그고는 향로 연기 다했어라.
두 벗이 함께 와서 옛 학문을 강론하니
새해라 새 공부를 나는 기뻐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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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추연의 학문적 관심사는 온통 『역학계몽』에 쏠려 재독, 3독을 하면서 그 물리를 터득하는데 힘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추연이 도산서당을 떠난 이듬해에도 서간을 통해 스승에게 정독 후 남은 의문점에 대해 몇 차례 질의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제자의 질의에 대해 퇴계는 1566년(명종 21)경 장문의 서간을 보내 추연이 질의한 문목(問目)에 대해 성심을 다해 조목조목 세세히 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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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무렵 추연은 퇴계에게 『중용(中庸)』 제12장에 나오는 비은(非隱)에 대한 질의에, 퇴계는 그 해석을 두고 제자의 의문점에 대해 두어 차례 자세한 설명을 답서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주역』계사(繫辭)의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는 ‘도(道)’가 이(理)인가 기(氣)인가를 묻자, 비은에 대한 논리를 반성케 하였다.
그 밖에 상제절차(喪祭節次), 존양(存養) 공부에 관한 것, 분상(奔喪) 절차, 처세와 면학(勉學)에 대한 것, 조관(朝官)으로 언사(言事)에 대한 문제, 거상중(居喪中)에 있는 추연에게 보낸 답서, 생지위성(生之謂性)에 대한 주자(朱子)에 분절(分節)에 관한 것과 노수신(盧守慎)․서경덕(徐敬德) 등이 흥(興)이 나면 일어나 춤을 춘다는 사실에 대한 논평, 『근사록(近思錄)』 문목에 답변 등 상례(喪禮)를 비롯한 추연의 질의에 대하여 퇴계는 친절하리만큼 세세한 답서를 보냈다. 『퇴계전서』 권 31~32 서(書)에는 별지를 포함하여 퇴계가 추연에게 보낸 답서 총 26건이 수록되어 있다. 퇴계가 추연에게 보낸 답서는 시기적으로 1564년(명종 19)부터 퇴계가 70세를 일기로 서거하던 1570년(선조 3)에 이르기까지 6년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추연보다 4세 연상인 석학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낸 퇴계의 답서가 총 17건이고 다른 문도들과 여답한 것이 대부분 10건 미만인 것을 감안하면, 퇴계의 주요 문인들 중 추연에 대한 답서가 편수․회수나 분량면에서 단연 가장 많은 편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성심성의를 다해 스승을 받드는 추연의 열성과 존경심에서도 연유되는 것이었지만, 학문에 대한 탐구열이 남다르고 또한 당시 중앙 정계에서 활약하던 추연의 활동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제자애(弟子愛)를 보여주는 확연한 증거임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추연에 대한 스승의 관심과 제자애는 비단 서간으로서만 끝나지 않았다. 앞에서 예거한 1566년 1월「김성일․우성전과 『역학계몽』을 논하면서 읊다(士純․景善論啓蒙)」를 비롯하여 4편의 시가 『퇴계선생문집』권 5, 시(詩)에 별도로 수록되어 있다. 이중 추연이 28세 때인 선조 3년(1569) 9월에 69세의 노스승 퇴계가 지은 시 「정자 우경선을 증별하여 관서로 가다(贈別禹景善正字之關西)」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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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그대 와서 돌지아비 찾았었지
서울에서 다시 만날 줄 어찌 미리 알았으리
여러 사람 모인 자리에서 대면한 일 있었건만
시내에 다다라서 경서 강론 다르도다.
올바른 학문이란 공부 성숙함에 있고
뜬 이름은 마침내 헛됨으로 돌아가리
대장부의 이별이란 아녀자와 다를지니
그럭저럭 지나면서 작은 선비 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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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같은 무렵에 지어 읊은 퇴계의 시 「우경선의 시를 차운하니 두 마디이다(次韻答禹景善二首)」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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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좋은 벗이 서울에 있으면서
나에게 글월 봉해 멀리 보내왔도다.
나의 시름은 완전히 물러가지 못함이요
그대의 계면쩍음은 좋은 벼슬 오른 것이라.
옛 학문을 의론함은 기약하기 어려우니
옛날 도산정사에서 함께 한 일 생각나도다.
벼슬바다 물결 일어 번복이 하도 할샤
애당초 품은 뜻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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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산중 취미 다름없이 마음 편안한 따름이니
머리를 때로 돌려 내 홀로 시름토다.
내년에는 꽃군자를 기필코 기다리리니
구름․노을과 함께 외롭게 살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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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퇴계는 50세 이후 잠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것을 제외하고도 거의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 부근 계상서당(溪上書堂)․도산서당(陶山書堂) 등에서 교육과 저술에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한 문인들은 무려 368명이나 이를 만큼 서당교육을 통한 후진 양성에 주력, 김성일․우성전․유성룡․조목(趙穆)․이덕홍(李德弘)․정구(鄭逑)․김우옹(金宇顒)․정탁(鄭琢)․유운룡(柳雲龍)․권호문(權好文)․구봉령(具鳳齡)․황준량(黃俊良)․정유일(鄭惟一)․조호익(曺好益) 등 학계와 정계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퇴계의 사후에도 우성전을 비롯한 유성룡․김성일․구봉령 등을 중심으로 중앙 정계에서 광범위한 세력을 형성,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학파와 함께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동인의 남․북인 분리 이후에는 남인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특히 퇴계학파(영남학파)는 율곡학파(기호학파)와 함께 조선 중기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면서 조선 성리학 발전은 물론 중․후기 역사 전개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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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직생활 - 남인(南人) 영수로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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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연은 27세가 되던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예문관 검열(檢閱)․봉교(奉敎), 홍문관 정자(正字)․수찬(修撰)을 거쳐 1572년(선조 5) 홍문관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573년(선조 6) 생부상을 당해 부임지였던 관서에서 돌아와 3년간 묘소가 있는 경기도 광주 대왕리(大旺里)에서 시묘살이를 마친 추연은 35세가 되던 1576년(선조 9) 수원현감(水原縣監)으로 부임하게 된다. 재임하는 동안 그는 이 고장의 적페(積弊)를 일소하고 교화로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그가 이임(移任)할 때 당시 주민들이 지방관으로서 추연의 업적을 칭송하는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이후 그는 한때 파직되었다가 1581년(선조 14) 경연(經筵)에 들어가 홍문관 수찬․사헌부 장령(掌令)․사옹원정(司饔院正) 등을 역임한 뒤, 1583년(선조 16) 예문관 응교(應敎)를 거쳐 여러 번 검상(檢詳)․의정부 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이해 6월 사간(司諫)․군자감 정(軍資監 正), 7월에는 홍문관 부수찬․부교리, 8월과 10월에는 성균관 사성(司成), 11월에는 사옹원 정(司饔院 正), 그리고 외직으로는 강화부사(江華府使) 연안부사(延安府使)등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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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술(自述)한 『추연선생일기(秋淵先生日記)』(『癸甲日錄)』)에 의하면 1583.1584년(선조16.17) 관직생활 중 여러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가운데서도 독서와 학문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추연의 이 『일록』에는 당시 병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며 당시 정계의 영향력을 발휘하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등의 정치적 거취 문제와 동․서인 당파의 갈등이 상세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학문적․정치적으로 우정과 당색을 함께 하고 있던 친우 유성룡과 김성일, 처남인 허성, 허봉, 그리고 반대당인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등 인물들의 언행과 동향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추연이 조선 중기 동인과 남인의 당색을 주도한 역사적 인물임을 생각할 때 이 『일록』은 16세기 말 초기 첨예화되던 정국의 동향과 분당정치 연구에 주요 자료라는 점에서 개인 저술로는 관찬자료 이상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은 기록물이라는 데 주목해야 할 것 같다.
1584년 3월 최담령(崔聃齡)이 보내온 절구 한 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화답시를 지어 보냈는데, 이 시에는 이 무렵 갈등을 겪고 있던 추연의 처지와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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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 밖 찬 매화는 먼지 한 점 없는데
온 성에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네.
가련하다, 한밤중에 비바람이 일어나서
매화는 다 떨어지고 살구꽃만 남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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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는 당쟁이 불타오르던 초기에 해당되는데,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이루어질 때 추연은 유성룡․김성일․김효원(金孝元) 등과 함께 동인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또 동인 집권 하에 남․북인으로 분당할 때는 상대방 서인 세력을 대응함에 있어서 동인 내 공서파(攻西派)에 가담하지 않고 공평하고 온건한 입장에서 분쟁을 조정(調停)하는데 힘썼다. 그리하여 친우이자 당색을 함께 한 유성룡과 정구(鄭逑)․정탁(鄭琢)․이원익(李元翼) 등과 함께 남인 온건파를 대변하였다. 남․북인으로 분리 호칭하게 된 배경에 대해 추연의 집이 당시 남산 밑 초정(草亭)에 있다는 데서 연유, 그 당파를 남인(南人)으로 호칭하게 되었다고 하니 그는 남인의 실질적인 영수였던 셈이다. 그는 남인의 거두(巨頭)가 되어 당내 여론을 이끌면서 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 등 강경파인 북인 세력과 대립하였다.
남인의 거두로서 남인 당색의 여론을 실질적으로 이끄는데 앞장섰던 그는, 동․서분당과 남․북인으로 분리 파쟁하는 과정에서 많은 질시와 미움을 받고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1591년(선조 24) 당시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으로 있던 추연은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처리과정중 서인의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편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같은 당내 동인 중 북인에게 몰려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削奪官職)되기에 이르렀다. 당시는 기축옥사(己丑獄死)의 처리과정에서 위관을 맡았던 정철을 위시한 서인계 관료들에 대한 공세가 가열되던 시기로, 정철에 대한 가죄론(加罪論)을 두고 온건파인 남인계 추연과 강경파인 북인계 홍여순과 의견 차이를 보인 추연은 곧바로 북인들의 논핵 대상이 된 것이다 이렇듯 당쟁의 한 가운데에서 활동하였던 추연의 정치 행로는 서애의 표현 그대로 세로(世路)에 막힘이 많아 부침(浮沈)이 심한, 무상하고 불운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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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추의사(秋義使)로서 의병장(義兵將)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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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에서 실세한 추연이 선산이 있는 수원부 호매절면 외촌으로 퇴거(退去)하여 노모를 봉양하며 학문에 전념하던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란의 발발로 국가가 존망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향촌이자 한때 현감으로 재임한 바 있는 연고지 수원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추연이 일으킨 의병부대는 ‘의(義)’자로 군호(軍號)를 삼았는데 경기 안의 사민(士民)들이 따르는 자가 많아 군사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추
<!--[if !vml]--><!--[endif]--> 연이 지휘하는 의병부대 추의군은 독성산성에 주둔하던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 권율이 지휘하는 관군(官軍) 및 김천일과 최흘의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독성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어서 수원 삼천병마골 전투, 금천전투에 참여 활동하였다. 이후 추연과 추의군은 강화로 들어가 수비하라는 조정의 명에 따라 김천일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강화에 들어가 활약하게 된다.
국가의 위기를 구하고자 분연히 몸을 던져 대규모 의병부대 추의군을 결성하고 왜적과 항전하여 큰 전과를 거둔 추연은, 마침내 홍성민(洪聖民)․김우옹(金宇顒)․이해수(李海壽) 등과 함께 다시 서용(叙用)되어 1592년(선조 25) 7월에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 9월에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임명되었다. 이어 “봉상시정(奉常寺正) 우성전(禹性傳)은 장수로 결정되자 힘껏 흩어진 사졸을 거두어 모아 1천여 명의 많은 무리에 이르게 하였고, 조치하는 일도 합당한 것은 물론 수급 18급을 베었으니 특별히 중가(重加)를 내려야 마땅할 듯합니다.”라는 비변사의 요청에 따라 포상과 함께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특진되었다. 왜란으로 인해 조성된 국가적 위기를 척결하고자 일어선 그의 과감한 실천 활동은 추연이 실천력․행동력이 거세된 관념적인 성리학자․관인이 아님을 보여준 단적인 예이거니와, 조정에서도 그의 뛰어난 실천력과 국가에 헌신한 공로를 높이 평가, 그에게 다시한번 국사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추연이 임란 직후 경기지역에서 의병을 초모(招募)하여 결진한 추의군의 군세는 왜란 중 중부지역에서 활동한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의병부대였다. 당시 활약한 추의군의 군세와 활동에 대해서 『선조실록』 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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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전(禹性傳)이 거느린 군사가 매우 숫자가 많고 윤정(尹瀞)이 거느린 군사가 5천여 명입니다. 이들 군사는 모두 삼강(三江) 하구의 사람들로 용맹스러워 쓸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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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우성전의 추의군은 김천일․최원(崔遠) 의병부대와 함께 강화도에 들어가서 활약하면서 권율의 관군과 연합하여 고양 전투와 행주산성대첩, 한강 유역과 용산지역에서 서울 수복작전에 참여 활동하기도 했고, 황해도지역으로 진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특히 우성전이 지휘하는 의병부대 추의군은 강화도 해상에 주둔하고 있을 때는 소금을 구워 군자금을 마련하여 식량을 조달하였다.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1월에는 그의 예하부대 400여 명의 의병이 수원지방에 진출하여 활동하기도 했고, 2월에는 약 2천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기도 고양(高陽)에 주둔 활동하였다. 특히 이해 1월 평양의 전첩(戰捷)으로 쫓긴 왜적들이 서울로 들어오자 그의 의병부대는 먼 곳까지 왕래하면서 유격전술(遊擊戰術)로 이에 맞섰다. 추연의 추의군은 용산에 있던 주사(舟師) 김천일․이빈(李薲) 등을 성원하는 가운데 쫓겨 돌아가는 왜적을 섬멸하는데 진력하였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경기지역과 서울 도성 회복작전에서 크게 활약한 추연의 전공을 인정, ‘추의사(秋義使)’라는 직첩과 인장을 내림으로써 창의사(倡義使) 김천일과 함께 의병장으로서는 최고 지휘관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추의사(秋義使) 우성전(禹性傳). 창의사(倡義使) 김천일은 관군(전라병사·경기수사·충청병사)과 합세해 양화도전투(楊花渡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우성전의 추의군은 관군과 합세하여 고양과 한강유역 전투에 이어 서울 도성 수복작전의 중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의 의병부대는 왜군이 창궐하던 숭례문 밖에서 용산 일대에 이르는 왜적을 섬멸하는데 진력, 큰 전과를 올렸다. 우성전이 서울 숭례문 밖에서 용산 일대에 이르는 서울 수호 작전에서 얼마나 크게 활약했는가는 현재까지 전해오는 지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임란 후 현재까지 서울 도동에서 후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마을 이름이 ‘우수현(禹守峴)’이라 불려오는데, 이는 왜군이 창궐하던 이 일대의 지역을 의병장 우성전이 잘 수호했다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이 지명은 최고의 지휘관인 의병장으로서 이 지역 일대로 몰려드는 왜군을 효과적으로 소탕하며 한성 수복과 수호작전을 굳건히 수행한 추연 우성전의 상징적인 활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주민들 간에 그의 전공을 기리는 뜻에서 오랜 시기를 연면히 전승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1593년(선조 26) 6월 추연은 바닥난 군량으로 많은 관군과 의군이 어려움을 겪자 비변사(備邊司)에 정부의 군량미 조달을 위한 비상대책을 건의하였다. 그의 건의에 의하면, 당시 문경(聞慶) 이하 각 참(站)에는 명나라 군사를 위한 군량이 수만 석이나 쌓여 있는데도, 정작 어려운 조건 아래서 싸우고 있는 조선군은 기아에 허덕이며 피폐한 가운데 왜적에 맞서 전투 수행에 크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상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명군을 위해 예축해 놓은 군량미를 아군에게 공급해 줄 것을 간곡히 주장함으로써 마침내 그의 건의가 그대로 받아들여져 비로소 관군과 의군의 자량(資糧)을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추연의 추의군은 왜군이 평양으로부터 패퇴하자 한강에서 이를 맞아 크게 무찔렀고 숭례문 밖에 주둔하며 경기감사 성영(成泳)과 함께 왜군이 가설한 한강의 부교(浮橋)를 불태워버림으로써 도강(渡江)이 어려워진 왜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이후 그의 의병부대는 퇴각하는 왜군을 뒤쫓아 멀리 경상도 의령(宜寧)까지 추격하면서 여러 차례 큰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 과로로 병을 얻어 이해(1593, 선조 26) 7월 19일 향년 52세를 일기로 부평(富平)의 노상에서 별세, 당쟁의 와중에서 기복(起伏)과 파란(波瀾)으로 점철된 삶을 마감하였다.
20대 초반 이후 그의 생애 전반기는 퇴계의 각별한 촉망을 받는 가운데 학문에 힘쓰는 성리학자로서, 중년 이후에는 동․서인 분당과 다시 남․북인 분리라는 당쟁의 한가운데서 남인 당색을 이끌면서 관인(官人)으로서 ‘세로(世路)에 막힘이 많아 부침(浮沈)’이 빈번한 고난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말년에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가 존망의 위기를 당해 불우한 처지에서 과감히 떨쳐 일어나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 각지의 향토 수호와 서울 도성 수복작전에 큰 전공을 세워 의병장으로서는 최고 지위의 지휘관인 추의사(秋義使) 직첩을 하사받았다. 애국적이고 실천적인 학자․문신, 의병장으로서 삼위일체의 진면목과 역사적 소임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추연이 세상을 떠난 지 7년 후인 1600년(선조 33) 5월 동문․동갑의 친우 유성룡은 생전에 보여준 추연의 고고한 인품과 절조, 그리고 20대 초 이후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관직생활을 함께 하면서 나눈 각별하고도 도타운 우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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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경선(景善)은 동년으로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할 때 뜻이 맞는 친구가 되었다. ……대각(臺閣)에 있을 때엔 언론과 처사(處事)가 비록 모의하지 않아도 거의 부합되었고, 세로(世路)에 막힘이 많아 부침(浮沈)은 서로 같지 않았지만, 평소 좋은 뜻을 하루도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경선은 눈이 높아서 세간(世間)의 사람들을 인정해 줌이 적었고, 뜻이 맞지 않는 자와는 비록 대면하고 있다 활지라도 서로 말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문을 닫고 사람을 거절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원망을 많이 사서 불우하고 곤궁하게 지냈지만, 끝내 변하지 않고 죽었고, 죽은 후에도 오히려 삭탈관직의 화(禍)까지 입었으니,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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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는 친우의 『일록』을 읽고 난 다음 추연의 불운과 재앙이 모두 당화(黨禍)에서 비롯되었음을 세 번 탄식하고 심지어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고인을 새삼 추모하는 뜻에서 「우경선을 애도함(哭禹景善)」에서 그 절실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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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께서 오늘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만사가 아득하여 한 꿈인 양 놀랍구나.
난실(蘭室)에서 흔쾌하게 취미를 같이했고
바람서리에도 끝내 마음 변치 않았다네.
생전에 불우함이 어찌 운명이 아닐까
사후에는 중상모략 더욱 말이 많았지.
한 권의 책을 못난 친구에게 남기시니
해 지나도 무덤 풀이 울음소리를 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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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상 눈이 높아 어울리는 이 적었고
당대의 대소 인물 대수롭지 않게 여겼네.
수레와 말 오가는 중에 늘 문을 닫았고
추상같은 곧은 말로 좌중을 놀라게 했네.
해우에 깃발 적시며 나라 일에 애쓰더니
영문 하늘에 별이 지고 목숨이 떨어졌네.
죽지 않고 남은 벗은 가시덤불 속에서
호소할 길이 없어 마음만 상해하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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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맺 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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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연 우성전은 21세 때 퇴계의 문하에서 유성룡, 김성일 등과 동문수학하여 성리학자, 관료로서 입신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수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기지역으로서는 최대 규모의 의병부대 추의군을 조직, 경기도 각 지역과 도성지역에서 큰 전공을 세우고 의병 군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친우인 윤국형(尹國馨, 恩省)의 『문소만록(聞韶漫錄)』에는
공(公)은 사람됨이 강경하고 정직해서 남에게 허여함이 적었고, 부앙(俯仰)하며 세태에 영합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무리들에게 크게 미움을 받았다. 30년 동안 침체되어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서애(西厓, 유성룡), 파곡(坡谷, 李誠中), 백곡(柏谷, 鄭崑壽), 시우(時雨, 洪渾), 자앙(子昻, 金睟), 그리고 나(윤국형) 몇 사람뿐이었다. 계미년에 응교가 되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언론이 매우 정당해서 비록 그를 모르는 자라 하더라도 또한 더욱 탄복하였다. 그러나 사우(士友) 사이에서는 의심을 풀고 다시 이해해주는 자가 끝까지 없었으니, 천명(天命)인 것을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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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연(秋淵)의 저술은 역설(易設). 이기설(理氣設) 계갑일록(癸甲日錄) (『추연선생일기』) 중 계갑일록(癸甲日錄)을 제외하고는 거의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집필한 대부분의 원고들이 전란 중에 산실된 까닭에 추연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접근과 평가가 매우 저조하고 제한되는 주요 원인이 되어준다고 할 수 있다.
추연이 생전에 퇴계와 서애, 그리고 당대의 많은 인사들과 주고받은 많은 서간과 시문들도 몇 편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거의 전해지는 것이 없어서, 아쉽지만 그의 유고를 가능한 발굴하는 일이 향후 하나의 학문적 과제로 남겨두고 있다. 현재 『퇴계선생문집』권 31과 권32 서(書)에는 별지(別紙)를 포함하여 26편의 퇴계의 답서가 수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퇴계가(退溪家)나 서애가(西厓家)에 혹시 추연이 스승과 친우에게 보낸 많은 서간과 시문들이 소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추연의 저술로는 후손 우광성이 소장한 추연선생일기(秋淵先生日記)(『계갑일록』)외에 성리론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힌『이기설(理氣說)』등이 있다. 특히 『역설(易說)』은 추연이 20대 초반에서 4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퇴계의 지도하에 읽은 『역학계몽(易學啓蒙)』과 평소 『주역』에 밝았던 그의 학문적 관심과 성향, 이론 등을 반영한 저술이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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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연에 대한 사림의 여망과 추앙은 그가 별세한 지 2백 년 후인 1788년(정조 12) 4월 경기유학 조한진(趙漢璡) 등이 임금의 행차길에 학행과 절의가 뛰어나고 경학(經學)에 조예가 깊었던 그에게 증직(贈職)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한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해 정조는 “우성전은 학행(學行)과 절의(節義)가 탁월하였으니 3품에게 시호를 내리는 예가 없으나, 품계를 올려 증직하는 것은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 특별히 증직의 은전을 베풀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지제교(成均館大司成知製敎)였던 우성전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겸동지경연의금부사홍문관제학동지춘추관성균관사오위도총부부총관(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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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년 후인 1790년(정조 14) 10월 수원유학 유황(柳煌) 등이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추연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는 상언(上言)을 올렸으나 이조(吏曹)에서 추연의 학행과 절의가 우뚝한 것은 인정하지만 시호를 내리는 일은 사체가 지엄하므로 함부로 내릴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후 1791년(정조 15) 1월, 사직(司直) 신기경(愼基慶)이 당면한 문제 12조항에 대해 올린 상소에서 “임진왜란때 추의사(秋義使) 우성전(禹性傳)이 창의(倡義)를 하여 공훈을 세웠고 병자호란때 병사(兵使) 김준룡(金俊龍)은 오랑캐를 섬멸하여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주어 장려해야 한다”고 건의하였고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추연은 정2품에 해당되는 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추증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1793년(정조 17) 12월, 마침내 추연에게 문강(文康)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추연의 묘역(墓域)은 선대의 묘소가 있는 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능골에 추연의 사후 8년 뒤인1601년(선조 34)에 별세한 부인 양천 허씨(陽川 許氏)와 쌍분(雙墳)으로 조성되었다.41) 추연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윤두수(尹斗壽)의 주청으로 영길(永吉)을 사후 양자로 입양케 하여 후사(後嗣)를 잇도록 조치하였다.
<!--[if !vml]--><!--[endif]--> 묘역 입구 산허리에는 남인계의 후배 학자로 조선후기 실학 학풍을 중흥시킨 대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위치해 있다. 그의 묘역(墓域)은 학자․관인․의병장으로서의 역사적 업적은 오랫동안 세인의 관심 속에 멀어져 오다가, 2003년 4월 추연일기(癸甲日錄)및 관련문서 5점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7호로, 묘역(墓域)은 직계 7대 후손인 조선후기의 재야 실학자 우하영(禹夏永, 1741~1812, 호 醉石室. 醒石堂)의 묘(墓)와 함께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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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추연(秋淵)이 퇴계(退溪)의 지도하에 공부할 때부터 “학문과 사상이 상호 바탕이 되고 실천과 지식이 모두 도저하여 부지런히 노력한” 학구적 태도에 경의를 표하면서, “뒤에 전쟁이 잔혹하고 사무가 뒤얽혀 비록 말고삐를 잡고 활을 동개에 넣고 다녔으나 평소 긴요하게 공부했던 것을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구제하는데 썼던”42) 추연(秋淵)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뛰어난 탐구정신과 실천력이야 말로 추연(秋淵)이 지향한 학문과 사색의 본령이었다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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