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별명은 ‘개털’.야구인생도 별명처럼 활짝 펼쳐진 비단길보다는 울퉁 불퉁한 가시밭이었다.광주일고 시절 잘 나갔다.선배 문희수,동기 박준태 이 강철,후배 이호성 등과 전국무대를 휩쓸었다.유격수겸 3번타자.83년 대통령 기 전국대회 결승에서 세광고의 송진우를 상대로 6-6이던 연장 10회 결승타 도 때렸다.85년 연세대에 진학했다.운명이 꼬이지만 않았다면 연고팀 해태의 유니폼을 입고 이종범과 주전 유격수 자리를 겨뤘을 지도 모른다(본인의 주 장).
그러나 불행이 찾아왔다.2학년 때였다.“겨울동안 훈련을 한번도 하지 않고 놀다가 학교에 갔는데 대회를 준비하라고 했다.무식하게 공을 던졌는데 그 때 어깨를 다쳤다”는 김선진의 뼈아픈 회한이다.야구선수로서 흠잡을 곳이 없는 몸인데 하필 어깨부상이었다.
89년 프로야구 신인지명.삼성이 찍었으나 계약을 미뤘다.공을 제대로 던지 지못하는 반쪽선수.12월에 가서야 삼성은 “다른 팀을 알아보라”고 말했다.
갈 곳이 없었다.실업자.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김충남 연세대감독이 김선 진을 거뒀다.보조코치로 후배들과 지내도록 했다.1년 뒤 김충남감독은 프로 관계자들을 만나 사정했다.제자 한 명만 살려달라고.“태평양에 훈련생으로 갔다.거기서도 오래 있지 못했다.잘렸다.” 그때 김선진은 “내 야구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프로행을 포기한 순간 LG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시작한 프로생활.90년 공을 제대로 들지도 못할 어깨를 가지고 2군 에서 시작했다.대타,대주자 등등 없어도 그만인 선수로 지냈다.연봉 1천만원.
불행중 행복도 있었다.가정도 꾸렸다.LG구단의 홍보과 직원이었던 전병순씨. 장내아나운서로 일하다 김선진과 눈이 맞았다.“내가 구단에 연봉협상을 하 러 갈 때마다 나를 놀리곤 했다.팬이라고 접근했고 잘 대해줬다.”
93년 그는 유니폼을 벗을 뻔했다.다행히 아내 덕을 봤다.구단직원과 결혼한 지 얼마되지 않은 그를 구단은 차마 자르지 못하고 살려줬다.
94년 희망이 보였다.높은 벽이었던 1루수 김상훈이 해태로 떠났다.하지만 서용빈이라는 신인이 나타났다.그늘속의 영원한 2인자가 그의 운명이었다.94 년 그는 결심했다.올해도 안되면 미련 없이 유니폼을 벗으리라고.10월 태평 양과의 한국시리즈.김선진의 야구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이라이트가 기 다렸다.
한국시리즈 개막전.태평양의 선발투수 김홍집의 역투에 LG타자들은 밀렸다. 1-1.6회부터 대주자로 들어갔던 김선진은 연장 11회 김홍집으로부터 끝내기 홈런을 날렸다.한국시리즈 역사상 대단히 멋진 홈런중 하나였다.그 한방으로 LG는 한국시리즈를 차지했다.김선진은 영웅이 됐다.“앞으로 몇년간 선수생 활은 문제없다”며 동료들은 축하했다.‘개털’이 ‘용털’로 변하는 순간이 었다.“야구를 하면서 가장 잊지 못할 것이다.김홍집이 슬라이더를 던지려는 것이 그 순간 묘하게도 보였다.”이후 김홍집은 단 한번도 김선진이 나오면 슬라이더를 던지지 않았다. 그래도 저만치 다가왔던 주전자리는 멀고도 멀 었다.또 좌절.98시즌을 앞두고 노장이라는 이유로 퇴출위기에 몰렸다.
팀의 체질개선이 필요했던 천보성감독은 김선진을 버렸다.연봉협상 때 구단 은 그를 부르지도 않았다.“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다.트레이드를 생각하고 이삿짐을 쌌다.전지훈련도 못갔다.”트레이드는 실패했다.LG에 주저앉았다.
98시즌 또 기회가 왔다.이번엔 그의 앞을 평생 가로막을 것처럼 보였던 서 용빈이 다쳤다.교통사고였다.
그래도 김선진에게 막바로 기회가 오지 않았다.애를 태운 뒤에야 왔다.5월 이 되자 김선진이 LG의 주전 1루수가 됐다.놓치지 않았다.잘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