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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석조미술
소 재 구(국립고궁박물관장)
1. 우리나라 석조미술의 기원
석조미술이란 여러가지 돌을 재료로 사용하여 이를 인간의 심미적인 감각으로 형상화한 조형예술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돌을 깨뜨리고 깎고 다듬고 새겨서 완성한 예술작품이 곧 석조미술품인 셈이다.
석조미술의 기원은 인간이 돌을 다루기 시작한 것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인류가 출현하여 처음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석기시대는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광범위한 도구제작의 재료로 돌을 채택하던 시대였으며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이미 석기 제작의 탁월한 예술적 경지를 경험하고 있었다. 우리가 감탄해 마지 않는 마제 석검의 조형이나 청동기를 만들기 위한 석제 거푸집 등은 당시의 공예적 감각을 증명하고 있으며 고인돌이나 선돌에서는 석조물을 통한 기념물 조형의 의지가 청동기인들에게 어떻게 반영되고 있었는가를 읽을 수 있다. 나아가 그들은 울주, 고령 등지에 암각화를 남김으로써 부조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돌을 다루는 철제 연장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석제품의 생활용구가 대량 생산되고 돌덩이에 문자를 기록하는 문화적 관습이 싹터 삼국시대에는 바야흐로 철제 치석용구에 의한 석조물 조형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2. 신라 석조미술의 특징과 후대의 경향
불교 수용과 함께 이루어진 선진문물의 도입은 이후 삼국시대의 문화수준을 가일층 진작시키는 동기가 되었으며 이에 석조미술은 불교 장엄을 위한 조각, 공예 및 건축 분야에서 도약과 성숙의 시기를 맞게 되었고 마침내 삼국시대 조형예술의 자취를 길이 후대에 남기는 대표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특히 삼국시대 말엽에 조영된 불탑과 불상 그리고 석비 등에는 생명의 혼을 불러 일으키고 존엄의 자태를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갑절 이상의 공력과 시간을 요하면서도 작품의 수정을 용납하지 않는 석물조형의 까다로움을 이미 초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삼국을 통합하여 통일 왕조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통일신라시대는 석조미술의 전성기였다. 불교문화의 융성과 함께 통일 후 100여년간 당대의 석조미술을 주도한 분야는 석불상과 석탑이었는데 石窟庵 佛像과 釋迦塔, 多寶塔 그리고 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등은 8세기 중엽의 신라 석조미술에 대한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9세기 이후에 들어서는 명승대덕의 僧塔과 塔碑, 石燈과 幢竿支柱 그리고 陵墓石物과 建築物 등의 또다른 분야에서 격조와 세련미를 겸비한 명작들이 탄생되었다. 따라서 신라의 석조미술은 곧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미술이 그 진가를 대표한다고 하겠으며 나아가 우리나라 석조미술의 정상급 수준을 점유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석조물 조영을 주도한 발원자 계급이 대부분 왕실을 비롯한 상위 귀족층 및 불교종단이었으므로 최상의 석조물을 조영하려는 발원자들의 정신적 물질적 지원이 뒷받침되어 수준급의 석조물들이 제작된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석조미술의 저변이 더욱 확대되고 전국적으로 석물조영이 크게 유행되었던 만큼 당시의 석조물은 수준급에서 민예적인 것까지 대작에서 소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조영되었다. 아울러 석조미술의 주된 대상 분야는 통일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불상, 석탑, 승탑, 석비, 석등, 당간지주 등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로는 전반적인 예술사조가 생활문화와 건축의장의 발달에 비중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건축물의 장식과 이에 종속되는 회화, 공예 등 생활 및 관상 예술분야의 진작이 두드러지고 반면에 석조미술은 후대로 갈 수록 몇점의 수준작 보다는 범작들이 대종을 이루었으며 다양성은 보여 주었으되 수준작에서는 통일신라 석조물들이 보여준 조형미와 기상을 능가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의 석조미술은 고려시대와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 즉 조선시대의 석조미술은 초기에 불탑과 승탑이 고려시대의 명맥을 이었지만 이에 못지 않게 능묘석물이 대표적 조형 분야로 두각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이미 고려 말기부터 새로이 밀려 든 중국 문물의 영향과 왕도정치를 근본으로 하는 새로운 정신적 분위기에서 불교의 사회적 지위는 날로 쇠미해지고 당대 일급의 석물조영은 역대 왕릉의 호위를 위한 엄숙한 상설물로서 예술적 가치를 평가받게 되었다. 이는 양반계급의 조상숭배와도 상통하여 조선시대의 석물조영을 주도한 분야는 석비를 비롯한 능묘관련 석조물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불교가람의 재건이 활성화되고 명승들에게서 사사한 후학들의 계보가 여러갈래로 형성되면서 비탑조영이 활성화된다. 여기에 고려시대까지만 하여도 국왕의 윤허 없이는 승려의 비탑을 세우지 못햇던 엄격한 규제가 무너지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비탑건립이 가능해졌고 18-19세기에는 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승탑과 탑비의 수효가 늘어났다. 따라서 이때 세워진 승려들의 비탑은 역사 이래 가장 다양한 면모와 가장 민예적인 작풍을 발휘했던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3. 우리나라 석조유물의 특징 - 탑, 비 및 기타 석물을 중심으로 -
우리나라의 석조유물은 석(불)상, 석탑, 승탑, 석비, 석등, 당간지주 그리고 건축물 등 다양한 분야의 조영물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석조유물을 한 주제로 엮어서 통찰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 또한 석(불)상은 이미 조각분야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지는 한 장르로 구별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석탑, 승탑, 석비 등 주요 대상만을 검토하기로 한다.
가. 석탑
1) 탑의 기원
탑(塔)이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스투우파(stupa) 또는 투우파(thupa)를 한자음으로 옮긴 것으로 원래의 뜻은 ‘무덤’을 의미한다. 기원전 566년 경 인도의 마가다 왕국의 왕자로 태어난 석가모니가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 죽게되자 제자들이 시신을 화장하고 여기사 나온 신골과 사리를 모아 8개의 탑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탑이 바로 석가모니의 무덤으로서 생전의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불교도들로부터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나중에는 제자, 고승들로 탑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므로 탑과 승탑(僧塔, ‘부도’라고도 함)은 모양을 달리하여 서로 구별하게 되었다. 최초의 탑은 처음 세운 8기의탑 외에 재를 봉안한 2기의 탑을 더하여 모두 10기의 탑이 완성되었으며 그 후 약 200년 후 아소카 왕(B.C. 272-232 경)은 그 탑들을 헐고 사리를 다시 나누어 전국에 8만 4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에 산치(Sanchi, B.C. 3세기 이후), 바르후트(Bharhut, B.C. 3세기 이후), 부다가야(Buddhagaya, B.C. 3세기 이후) 등지에 남아 있는 인도 고대의 탑들은 당시에 대탑들이 세워지면서 일정한 탑의 모습을 이루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들은 대체로 돌이나 벽돌을 이용하여 무덤처럼 둥그런 탑의 몸체를 거대하게 조성하고 꼭대기에는 몇겹의 장식물을 첨가하고 있다. 또한 탑의 둘레에는 난간을 두르고 사방에는 탑문이 세워지며 여기에는 석가모니의 행적, 전생설화, 공양도 등이 새겨지고 아을러 보리수, 법륜, 발자국, 금강좌 등이 석가모니의 상징물로 나타난다. 이때는 석가모니가 돌아간 후 약500년간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던 시대라 탑 만이 최고의 숭배대상이 되었고 사원의 공간배치에서도 탑이 항상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상이 만들어진 뒤에도 탑은 여전히 신앙의 대상물로서 오늘날까지 존속되어 오고 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하여진 것은 후한(後漢)대인 기원후 1세기 경이나 당시의 중국탑은 잘 알 수 없다. 그 뒤 남북조 시대의 석굴사원 벽화에 그려진 탑들은 목조 누각 위에 축소된 인도탑을 꼭대기 장식으로 이루어진 모습을 볼 수 있어 4-5세기 경에는 인도탑과 다른 중국식의 탑 모양이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누각형 목탑은 우리나라로 전래되며 일본에서는 우리를 통하여 받아들이게된다.
2) 삼국시대의 탑(우리나라 초기의 탑)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되던 당시 우리나라의 탑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그 모습을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요동성을 시찰하였을 때 성 밖에서 위가 가마솥을 엎어 놓은 모양의 삼층 흙탑과 스님이 함께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곳에 칠층목탑을 세웠다고 전하는데 1953년 발굴된 고구려 고분인 遼東城塚(4세기 말- 5세기 초)의 내부에 그려진 요동성도에는 실제로 다층의 목조건물(3층 이상은 벗겨짐)이 남아 있어 불교도입 초기에 고구려에 세워진 탑은 인도탑과 중국탑이 함께 존재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평양의 무진리 定陵寺터(398년), 청암리 金剛寺터(498), 대동 상오리 절터 등 고구려 사찰 유적에서는 팔각 탑터가 조사되었고 부여 군수리 절터, 익산 帝釋寺터 등 백제 사찰유적 및 신라의 사찰인 경주 皇龍寺터에서는 사각형의 목탑터가 조사되어 삼국시대에는 팔각과 사각의 목탑이 세워졌다고 하겠다.
오늘날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탑은 모두 7세기 초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백제탑으로는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부여 定林寺址五層石塔이 남아 있고 신라탑으로는 경주 芬皇寺模塼石塔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三國遺事』에는 影塔寺에 八角七層石塔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불교 도입 후 약 200년간 우리나라의 탑은 木塔이 주로 세워지다가 삼국시대 말기에 들어 石塔이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더우기 백제의 석탑에서는 목탑의 형상을 석재로 본뜨고 이를 다시 석탑 조형에 알맞게 재구성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석탑은 우리나라의 탑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석탑이 주류를 형성하게된 원동력이 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신라의 분황사모전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잘라 층층히 쌓아 탑을 세웠는데 이는 중국의 塼塔(벽돌탑)을 본뜬 것으로 모두 삼국시대의 탑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3) 백제와 신라 및 통일신라의 석탑
백제의 석탑은 익산 彌勒寺址石塔과 같이 낮은 기단 위에 위보다 밑이 넓은 안정된 기둥 그리고 처마의 구조와 같은 석재의 짜맞춤 등이 나타나고 지붕은 널찍하고 추녀 끝이 살짝 들리며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지붕과 지붕이 만나는 추녀마루를 기와를 얹은 듯 두툼하게 나타내기도 하여 목조건물을 석조물로 재현한 느낌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라의 석탑은 현재 1기만이 남아 있어 일반적인 형태를 파악할 수는 없다. 현존하는 분황사모전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탑신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龕室을 설치하고 지붕은 위아래를 층단식으로 이루었다. 또한 감실 입구 양쪽에는 인왕상이 있고 입구에는 석재 문짝을 두짝씩 달았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백제의 석탑과 신라의 모전석탑이 절충된 석탑이 등장하는데 의성 塔里五層石塔은 높은 단층기단 위에 탑신 1층에 감실을 내고 기둥은 밑이 넓고 위가 좁아 안정감이 있으며 감실에 문짝을 달아낸 흔적이 있다. 또한 기둥머리를 따로 설치하는 등 목탑형식을 나타내고 있으나 지붕은 위아래를 모두 층단형식으로 조성하여 전탑의 형태를 그대로 나타내어 이 탑은 백제식의 목탑을 본뜬 석탑과 신라식의 모전석탑의 조형이 하나의 석탑에서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도기를 지나 본격적인 통일신라시대로 접어 들면 석탑을 구성하는 단위석재가 커지는 반면 석재의 수는 줄어들고 기단은 2층기단으로 높아지며 기단부에는 귀기둥과 사잇기둥이 새겨지게 된다. 탑신의 층수는 대부분 3층으로 이루어지며 지붕 밑의 층단받침은 5단으로 되고 처마 끝은 하단이 수평을 이루고 상단은 추녀 끝에서 위가 살짝 들려 탑의 전체적인 조형은 짜임새 있고 안정감 있으며 장중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는 感恩寺址東西三層石塔, 佛國寺三層石塔(釋迦塔)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때에는 절 안에 쌍탑을 세우는 배치법이 새로 등장하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말기로 들어서면 불교의 확산으로 석탑의 수량은 많아지나 규모나 조형성은 줄어들게 된다. 예를 들면 기단의 폭이 줄어들고 탑의 모습이 연약해지고 지붕 밑 층단의 수도 줄어 들며 한편으로는 탑 표면에 조각이 장식되기도 하는데 이같은 석탑으로는 전남 장흥의 寶林寺三層石塔, 전북 남원의 實相寺三層石塔, 충남 보령의 聖住寺三層石塔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禪宗佛敎의 유행으로 당시의 석조미술은 석탑보다는 禪僧을 위한 僧塔과 石碑의 조형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4) 특수형 석탑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은 새로운 석탑형식을 확립시킨 반면 한편으로는 탑 표면에 여러가지 장식조각으로 장식을 더해 가기도 하였다. 경주 章項里五層石塔의 仁王像 조각을 비롯하여 願遠寺址三層石塔에 새겨진 四天王像과 十二支神像, 양양 陳田寺址三層石塔의 四方佛과 八部神衆像 및 天人像, 華嚴寺西五層石塔, 山淸泛鶴里三層石塔 등의 佛菩薩, 四天王, 八部神衆, 十二支 및 天人像佛像, 菩薩像, 八部神衆像, 奏樂像, 十二支神像 등은 장식화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뿐만 아니라 남원 실상사의 百丈庵三層石塔은 탑 전면에 불보살, 신장, 주악천인, 난간, 연꽃무늬 등을 가득 새겨 장식탑의 극치를 이루었다.
더우기 통일신라시대에는 일반형 석탑과 전혀 형태가 다른 특수형 석탑도 등장하게 되었는데 가령 佛國寺多寶塔, 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안강 定惠寺址十三層石塔, 海印寺願堂庵多層石塔 등은 그 기본적인 모습이 전혀 새롭게 나타난 것으로 주목된다. 또 기단부가 둥글게 조성된 석굴암앞삼층석탑이나 기단이 연꽃무늬 불상대좌를 닮은 철원 到彼岸寺三層石塔 등은 일반형 석탑의 일부가 변형된 것이며 보령의 聖住寺址三層石塔은 가단과 탑신부 사이에 괴임턱을 끼워넣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형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조형의 과정에서 비교적 석조예술에 자신감이 넘쳐 변형의 의지를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고려시대에서는 이러한 변형석탑의 조형이 더욱 다양하게 응용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아울러 분황사모전석탑을 계승한 전탑들도 통일신라시대에 계속 세워졌는데 안동의 新世洞七層塼塔, 造塔洞五層塼塔, 칠곡 松林寺多層塼塔 등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비록 소수이나마 고려시대까지 전탑 및 모전석탑의 조영은 계속되었다.
5) 고려시대의 석탑
고려시대에도 목탑은 계속 세워졌지만 탑의 주류는 석탑이었으며 석탑의 형태는 새로운 고려식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보다 훨신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은 대체로 낮고 좁은 단층기단이 보편화되고 층수가 많아져 대부분 늘씬하게 하늘로 솟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처마의 층단은 3-4단으로 줄고 처마 끝선은 상단과 하단이 추녀 끝에서 동시에 위로 들리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南溪院七層石塔, 玄化寺七層石塔, 定山西停里九層石塔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한강 이북지방에서는 月精寺八角九層石塔, 普賢寺八角十三層石塔 등 고구려탑과 중국탑의 영향을 받아 다각다층석탑이 많이 세워졌으며 옛 백제 지역에서는 扶餘長蝦里三層石塔, 徐川의 庇仁五層石塔과 같이 백제식의 석탑이 다시 등장하기도 하고 그밖의 지역에서는 통일신라 석탑의 형태를 계승하는 등 지역적인 특색이 나타나고 있다.
변형석탑으로는 탑신부의 층마다 괴임돌을 끼워 넣은 강릉 神福寺址三層石塔과 서울 弘濟洞五層石塔, 독특한 무늬와 형태를 나타내면서 한꺼번에 다량의 탑을 세워 놓은 화순 雲住寺의 석탑들, 祭壇式의 桃李寺石塔, 이국적인 형태의 상륜부를 얹은 麻谷寺五層石塔, 전혀 새로운 형태인 寶篋印石塔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淨巖寺水瑪瑙塔, 안동 東部洞五層塼塔, 神勒寺塼塔 등은 통일신라의 전탑을 계승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신륵사전탑은 전통적인 탑의 배치를 벗어나 탑이 강변의 언덕에 세워졌으며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전탑 중에서는 특이하게 벽돌마다 무늬가 새겨져 있다.
마지막으로 고려시대 석탑으로서 백미를 이룬 석탑으로 敬天寺十層石塔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석탑은 평면이 사면돌출형의 특수한 형태를 이루었고 기단이 3층이며 탑신은 삼층까지는 사면돌출형을 이루다가 4층 이상부터는 사각형을 이루었다. 탑의 재료는 대리석으로 표면에는 상세한 조각장식을 베풀어 탑의 모습은 목조건물을 방불할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하였고 여기에 불법전도와 관계된 설화, 동식물, 불보살상, 인왕상 등이 화려하게 새겨져 석조공예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 석탑은 고려 말기에 새로운 양식을 선보인 중요한 석탑으로 훗날 조선시대에 세워진 圓覺寺址十層石塔의 모체가 되기도 하였다.
6) 조선시대의 석탑
조선시대는 유교의 통치이념이 사회를 지배하여 불교는 탄압을 받기도 하고 묵시적으로 허용이 되기도 하였으나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석탑의 규모가 축소되고 새로운 석탑양식이 고안되지도 못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계승하여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世祖 임금은 불교에 매우 호의적이어서 당시 원각사탑을 세울 적에 경천사십층석탑을 본떠 제작하는 대 사업을 벌였으며 결국 이 탑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석탑이 되었다. 그 이후로는 神勒寺多層石塔과 上院寺 극락전앞다층석탑이 부분적으로 원각사탑의 조형을 계승하였고 水鍾寺八角五層石塔, 妙寂寺八角多層石塔 등은 普賢寺八角十三層石塔을 계승하였으며 양양의 洛山寺七層石塔은 강릉 신복사지삼층석탑을 모방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특기할 만한 탑의 조영이 거의 단절되다시피하여 결국 새로운 석탑을 창충하지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다.
나. 僧塔(浮屠)
불교에는 세 가지 성스러운 보배가 있으니 바로 불(佛; 부처), 법(法; 가르침, 불경), 승(僧; 스님)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의 삼보는 모든 불교도로 하여금 숭배의 대상이 되어 부처를 위해서는 탑과 불상을 만들어 예배하고, 가르침에 대해서는 수많은 경전으로 엮어서 세상에 보급하며 스님은 불법을 전하고 민생을 교화하는 전도자로서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들이 백성의 스승인 국사의 칭호와 국왕의 스승인 왕사의 칭호를 받았고 이들은 교화는 물론 불법의 학문적 탐구에도 정진하여 외국에까지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덕망 높은 스님이 일생을 마치게 되면 평소에 스님을 받들던 제자와 신도들이 스승의 묘탑인 승탑과 탑비를 세우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승탑과 탑비는 왕명으로 승탑의 칭호가 붙여지며 비문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가 글을 짓고 명필가가 글을 써서 이를 석공이 비석에 새기게 된다. 이같이 지극한 정성으로 세워진 승탑과 탑비는 온갖 장식무늬와 장엄한 조형으로 완성되어 우리나라 석조미술의 진면목을 이루게 되었다.
승탑의 건립은 탑과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부도(浮屠)’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도는 ‘붓다(Buddha)’의 음역이라고 하며 원래는 부처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고승을 부처님처럼 존경하여 부도라 일컫게 되고 나아가 고승의 묘탑이 곧 부도라는 것으로 굳어진 듯 하다. 우리 나라의 승탑은 절의 외곽에 따로 탑원을 마련하여 승탑과 탑비를 안치하고 있다. 또한 우리 나라 승탑의 모양은 조선시대 이전까지 대부분 불탑과는 별개의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극히 일부의 승탑 만이 석탑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말기 이후로는 석탑형 승탑, 석종형 승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특히 조선 시대 후기에는 간단한 석종형 승탑이 크게 유행하였다.
1) 우리 나라 승탑의 기원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 전래 이후 처음부터 승탑이 세워진 것은 아니었으며 모든 승려에게 세워 준 것도 아니었다. 신라의 고승 元曉는 유골로 초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고 백제의 승려 惠賢의 시신은 호랑이 밥이 되게 하였으며 통일신라 시대의 眞表律師의 시신은 흙 속에 매장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승탑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고승들의 유골을 안전하게 탑 속에 안치하는 법식을 중국으로부터 들여 온 후라고 생각된다. 『삼국유사』에는 고승 원광, 혜숙, 혜현 등의 승탑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어 우ㄹ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말기에 승탑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는 중국에서 고승 구마라습의 승탑이 조영되고 있었음로 그러한 장례법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라고 추정된다. 오늘날 남아 있는 승탑들은 대부분 통일신라 하대 이후에 조성된 것들로 신라사회에서 새로운 선종불교가 널리 전파되고 있던 시기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상당한 지위와 덕망을 갖춘 고승에 한하여 국왕의 허락을 받아 승탑이 조영되었다.
2) 전통을 이룬 팔각당형 승탑
현존하는 우리나라 승탑 중에서 건립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傳興法寺廉巨和尙塔이다. 이 염거화상은 신라 선종 9산문 중의 하나인 迦智山門을 개창한 道義선사의 제자이며 844년에 입적하였다. 이 승탑은 평면이 팔각형이며 가단은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차례로 결합하고 하대석에는 사자, 중대석에는 향로와 꽃무늬, 상대석은 연꽃잎무늬를 장식하였으며 기단 전체의 형태는 불상의 대좜모양을 하고 있다. 상대석 위에는 탑신 받침대를 돋우고 여기에 팔부중상을 새겼으며 탑신부에는 사천왕상과 기둥을 새겼고 지붕은 처마 밑에 서까래를 새겨 넣었으며 지붕 위는 가왓골을 내어 기와지붕의 형태를 갗추었다.
이와 같은 팔각당형의 승탑은 계속 후대로 이어져 조선시대까지 계승되는데 형식은 변함없지만 기단과 탑신의 조각은 승탑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 하대의 승탑이 모두 팔각당형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염거화상의 스승인 도의선사가 머물렀던 양양의 陳田寺터에는 사각형 석탑모양의 기단 위에 팔각형의 작은 탑신을 올린 승탑이 남아 있어 이 승탑은 팔각당형으로 승탑이 정착되어 가는 과도적인 승탑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외국의 예를 보면 746년에 세워진 중국 하남의 회선사 정장선사탑이 팔각당형을 이루고 있으며 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세워진 장안 소요원의 구마라습사리탑은 지붕은 사각형이나 탑신이 팔각형을 이루고 있다. 또 팔각당형 건물로 일본에 남아 있는 夢殿은 739년에 세워진 것으로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세워졌는데 이러한 예들로 미루어 팔각당형 또는 절충된 팔각당형의 승탑이 이미 존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팔각당형 승탑으로는 곡성 太安寺의 寂忍禪師照輪淸淨塔, 화순 雙峰寺의 澈鑒禪師塔, 남원 실상사의 證覺大師凝廖塔과 秀澈和尙楞伽寶月塔, 장흥 寶林寺의 普照禪師彰聖塔, 문경 鳳巖寺의 智證大師寂照塔, 구례 鷰谷寺의 東浮屠 등을 들 수 있으며 여기에 약간 변형을 가한 승탑으로는 高達寺址浮屠, 禪林院址浮屠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승탑들은 한결같이 뛰어난 조형성을 발휘하고 있어 9세기 이후 통일신라 하대의 석조미술의 진면목이 석탑에서 승탑으로 옮겨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
3) 고려시대의 승탑
통일신라 말기에 들어 팔각당형 승탑 중에는 중대석이 북모양으로 배가 부르게 되거나 용과 구름무늬로 채워지고 하대석에 구름무늬가 입체적으로 나타나는 등 기단부가 일부 변형되기도 하는데 변형과정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통일신라 하대의 승탑은 고려시대로 계승된다.
고려시대의 승탑은 일반적으로 규모가 장중해지고 지붕이 과장되며 기단부의 변형이 신라의 승탑에 비하여 다양하게 전개된다. 여기에 해당하는 승탑으로는 여주 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 문경 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 국립중앙박물관의 興法寺眞空大師塔 등을 들 수 있는데 한결같이 장중한 기풍에 다소 둔중한 지붕이 처마 밑이 보일 정도로 휘어 들린 모습을 하고 있어 신라 하대의 승탑과 뚜렷이 구별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곡성 大安寺廣慈大師塔, 공주 岬寺浮屠, 영동 寧國寺浮屠, 강릉 崛山寺址浮屠 등과 같이 극히 왜소해진 승탑도 조성되고 있으며 그러한 경향은 후기로 갈 수록 역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의 승탑은 석탑과 마찬가지로 일반형을 벗어나 다양한 형태를 지닌 승탑이 눈에 띠게 조성되었다. 이같은 변형의 승탑은 크게 寶宮形, 塔形, 石鍾形, 塔身圓球形 등으로 분류된다.
우선 보궁형 승탑으로는 원주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온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을 들 수 있는데 이 승탑은 1085년에 세워진 것으로 평면 사각형에 2층누각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기단으로부터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장식을 베풀고 있으며 특히 탑신부의 장식은 이국적인 조형감각을 보여주고 있어 특이한 느낌을 준다. 탑형 승탑으로는 역시 원주에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온 원주 令傳寺址普濟尊者舍利塔을 들 수 있는데 이 승탑은 쌍탑으로 그 모습이 五層石塔과 다를 바가 없다. 또한 경기도 장단의 華藏寺 智空禪師塔, 여주 신륵사의 普濟尊者石鍾, 淸州 安心寺石鍾, 북한산 太古寺의 圓證國師塔 등은 石鍾形 승탑의 대표적인 예로써 그 연원은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된 울산 太和寺址舍利塔이나 고려시대 초기의 금산사 석종에서 찾을 수 있다. 이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弘法國師實相塔은 원래 충주 淨土寺터에 있던 것으로 탑신이 원구형으로 이루어지고 지붕은 연잎모양을 하고 있는데 조형성이 매우 뛰어난 고려시대의 승탑에 속하고 있다.
4) 조선시대의 승탑
조선시대의 일반형 승탑은 고려시대의 승탑을 계승하는 한편 탑신이 북모양으로 비대해지고 기단부와 지붕도 두툼해지면서 조각장식도 굵직하게 표현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여기에 시대가 하락할 수록 지붕이 솟아오르고 상륜부는 길쭉해져 고려시대의 팔각당형 승탑과 쉽게 구별이 된다. 이러한 예로는 충주 청룡사 普覺國師定慧援融塔, 檜巖寺址浮屠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후기에는 간략한 형태의 석종형 승탑이 크게 유행하고 아울러 팔각당형 승탑과 석종형 승탑이 혼재된 듯한 복합형의 승탑도 눈에 띠게 조성된다.
또한 조선시대 후기에는 승탑의 수량이 부쩍 늘어 사찰마다 조성된 승탑원에 다량의 승탑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 들어 그동안 승탑의 조영을 제한하던 불교계가 유교사회에서 전국의 사찰을 통제할 만한 힘을 잃어 승탑이 무절제하게 양산된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한편으로 다양한 민예적 승탑의 전성기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서도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은 전통의 팔각당형 승탑을 고수하였으며 순천 선암사의 華山大師塔은 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의 형식을 계승한 조선시대 말기의 승탑으로 조선시대 특수형 승탑의 양식을 마감하고 있다.
다. 석등
1) 석등의 의미와 구조
석등은 중국의 한 나라 때부터 능묘에 설치된 석물의 일종이었으며 불교가 도입된 이흐로는 진리를 밝히는 상징적인 석물로 받아들여 다양한 형태의 석등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사찰의 석등은 탑 앞에 배지되는 것을 비롯하여 고승의 묘탑 앞에도 세워졌고 고려 때부터는 임금과 정승의 능묘 앞에도 장명등이란 이름으로 세워졌다.
석등의 일반적인 구조는 기단부 하단에 댓돌을 놓고 중간부는 기둥돌을 세우며 상단에는 연꽃무늬를 장식하고 그 위로는 불발기집을 얹게 되어 있다. 기본적인 평면형태는 팔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기둥돌은 팔각기둥, 사자모양, 장구모양 등으로 표현되고 고려시대부터는 사각형 석등도 등장하고 있다. 또한 불발기집은 양면, 사면 혹은 팔면으로 불빛창을 내고 그 테두리에는 비비람을 막기 위하여 종이나 베를 씌운 창틀을 고정하도록 못구멍을 내었으며 창 주위에는 사천왕이나 보살상을 조각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석등 중 가장 오랜 것은 익산 彌勒寺址에서 발견된 백제의 석등조각을 들 수 있으며 완형의 석등으로는 영주 부석사 석등을 비롯한 통일신라 시대 이후의 석등들만이 남아 있다.
2) 석등의 종류
ⅰ) 팔각기둥형 석등
팔각기둥형 석등의 대표적인 예는 통일신라 초기에 세워진 浮石寺 석등으로 이 석등은 댓돌 각면에 두 개씩의 안상을 배치하고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베풀었다. 기둥은 팔각기둥이며 상대에는 다시 연꽃장식을 하였다. 불발기집은 사면에 보살상이 새겨지고 상륜부에 보주만을 얹어 전체적으로 매우 단정한 느낌을 주고 있다. 보은 법주사에 남아 있는 四天王石燈은 같은 형식의 석둥이나 浮石寺石燈보다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댓돌받침이 높다랗게 2층으로 구성되고 당당한 불발기집에는 사천왕이 부조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당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 말기의 석등은 장식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이같은 예로는 장흥 보림사석등, 남원 실상사의 백장암석등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연꽃무늬에서 꽃잎마다 내부에 다시 장식적인 꽃무늬를 새겨 넣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편 통일신라 하대 이후에는 기둥부분이 장구모양, 북모양으로 변하면서 이곳에 꽃띠, 돌대와 같ㅌ은 장식이 나타나는데 전체적인 석등의 규모는 매우 당당한 편으로써 통일신라 석등의 빼어난 조형감각을 발휘하고 있다. 합천 淸凉寺石燈, 화엄사 각황전앞석등, 실상사석등 등은 이러한 형식에 해당하는 석등으로 모두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수작들이다.
고려시대에는 부여 無量寺石燈, 羅州西文石燈 등이 통일신라의 석등의 조형을 계승하였는데 장식에 약간의 변형이 있을 뿐 형식상의 변화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개성의 玄化寺石燈은 불발기집을 개방형으로 나타내고 상륜부를 강조하였으며 고려 말기에 제작된 神勒寺 普濟尊者石燈은 불발기집의 불빛창이 이국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어 다양하게 변화된 고려시대 석등의 조형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沃溝鉢山里石燈은 원형 기둥에 용무늬를 표현하였고 논산 觀燭寺石燈은 원기둥에 꽃띠를 두르고 있어 이례적이다.
ⅱ) 쌍사자형 석등
이 석등은 기둥을 쌍사자형으로 장식한 석등으로써 통일신라시대의 쌍사자석등으로는 法住寺雙獅子石燈, 광양 中興山城雙獅子石燈, 합천 靈巖寺址雙獅子石燈 등을 들 수 있다. 이 석등들은 한결같이 기둥부분에 마주선 쌍사자를 배치하고 있는데 이는 불법을 호위하는 동물 중에 으뜸가는 사자들을 쌍으로 배치함으로써 사자를 배치하는 석탑이나 승탑의 조형을 석등에서도 응용한 듯하다.
그런데 이 쌍사자석등은 고려시대에 계승되면서 또다른 변형을 낳게 되었는데 高達寺址雙獅子石燈에서는 사자가 마주 서지 않고 나란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초기에 제작된 충주 靑龍寺石燈에서는 엎드린 사자가 두마리에서 한 마리로 줄어든 형태를 볼 수있고 양주 檜巖寺址石燈에서는 마주선 쌍사자가 왜소해지고 납작해진 모습을 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석조미술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ⅲ) 사각형 석등(고려시대 이후의 양식)
사각형 석등은 대체로 기둥을 제외한 다른 부재, 즉 불발기집과 댓돌 등이 사각형인 경우를 일컬으며 이러한 형식의 석등은 고려시대 이후에 나타난다. 觀燭寺石燈, 玄化寺石燈 등이 이같은 예에 속하며 조선시대의 석등으로는 靑龍寺石燈, 檜巖寺址石燈이 포함된다. 그리고 고려 및 조선왕조 후기의 능묘에 세워진 석등 중에서도 사각형 석등이 다수 눈에 띠는데 이 능묘의 사각석등은 기둥을 포함한 평면 전체가 사각형을 이루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ⅳ) 長明燈(능묘의 석등)
장명등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능묘 앞에 세워진 석등으로써 고려의 공민왕릉의 장명등은 사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면 초기의 장명등부터 팔각장명등 일색을 이루게 된다. 특히 조선시대 전기의 장명등은 댓돌이 높고 기둥이 짤막하며 불빛창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亞자형을 이루나 창의 규격이 매우 작다. 또한 지붕은 두터워 조선시대 승탑의 외형과 비슷한 점이 많다.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는 장명등의 규모가 축소되고 사각장명등으로 외형이 바뀌어진다. 이는 숙종대 이후로 왕명에 따른 결과이며 정조 이후에는 다시 팔각장명등이 등장하고 댓돌은 향로의 다리모양으로 바뀌어지기도 한다. 또한 평면의 변화 및 시기적 조형감각의 변화에 따라 장명등의 지붕이나 기타 외형적인 형태도 변화하게 된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장명등은 주로 왕릉의 석물로 조영된 까닭에 국내 일급의 석공이 장명등 제작에 투입되었음은 물론이며 조선시대의 석등을 대표하는 수작들이라고 하겠다.
라. 石碑
1) 석비의 기원
碑란 무엇인가.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고부터 어떠한 의미를 특정한 장소에서 널리 알리고 또한 그 내용을 길이 보전하기 위하여 영구불변의 재료인 돌을 택하여 그 표면에 새겨놓은 기념물이다. 그것은 단순한 표지물일 수도 있고 만인이 지켜야 할 법규일 수도 있으며 영원히 기억하여야 할 중요한 인물 또는 사건의 내력일 수도 있다. 이 석비들 중에서는 만대의 보전을 염원하였던 석비들이 단연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고 명품의 석물을 조성하게 되었으니 그러한 석비의 주인공은 대개 인간사에 내력 있는 인물들로써 제왕, 성현, 영웅호걸, 고승 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인걸은 떠나도 비석은 영원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비석은 중국에서 장례를 치를 적에 무덤의 구덩이에 관을 용이하게 내리기 위하여 무덤 앞에 세운 돌기둥에서 비롯되었으며 한 나라 때에는 이 돌기둥에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하였다고 하며 일설에는 周 나라 때부터 이미 木碑가 존재하였다고 한다. 후한대부터는 비의 머리가 지붕 꼭대기처럼 뾰족하거나 둥글게 만들어지고 비신의 한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 관을 내리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 비의 테두리에는 용, 꽃, 四神 등을 새겼는데 玄武를 새겼던 아랫쪽과 용을 새겼던 윗쪽은 각각 댓돌과 머릿돌에 해당하는 龜趺와 螭首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거북돌과 용머리를 갖춘 비석이 南北朝時代부터 등장하고 唐 나라 때에 들어서는 일정한 신분을 갖춘 귀족들이 거북비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비석은 고인의 행적을 기리는 데에 사용된 것만은 아니었으므로 어떠한 사실의 기록을 현장에서 영구히 후세에 전하는 데에도 필요했던 것으로 中原高句麗碑, 북한산 眞興王巡狩碑 등이 이에 해당된다. 결국 석비는 원시적인 石刻에서 출발하여 자연석의 비석을 거쳐 예술적인 비석으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하겠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당 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예술적인 석비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2) 우리나라의 석비의 특징
우리나라의 석비는 자연석비에서 출발하고 있다. 廣開土大王陵碑, 眞興王巡狩碑, 迎日 冷水里碑, 戊戌塢作碑, 南山新城碑, 砂宅智積碑 등 은 모두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빗돌로 사용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삼국시대 석비들의 조형적 특징을 대표하고 있다. 또한 당시에 새겨진 글씨체는 예서와 해서가 주로 쓰였고 서각기술은 고구려가 단연 뛰어났으며 백제가 그 다음을 차지하였고 신라는 고졸한 書風을 오랫동안 간직하였다.
삼국시대 말기에 들어 당 문화의 영향으로 거북비가 처음 등장하였고 글씨체도 매우 정제되었는데 이러한 예술적인 석비는 太宗武烈王陵碑가 효시를 이루며 비의 조형적 특징은 역동적인 기상이 넘치는 거북의 형상과 함께 머릿돌에는 용무늬가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석비의 조형은 상당히 진척되었다. 특히 불교의 융성과 함께 고승들의 석비가 최대의 역량을 발휘하여 통일신라 하대의 石碑藝術은 승탑과 함께 우리나라 석비조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서 있는 月光寺圓朗禪師碑, 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등은 대표적인 통일신라 석비인 동시에 우리나라 석비예술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시기의 석비는 거북돌의 머리부분이 怪獸形으로 바뀌고 머릿돌에는 활기찬 九龍이 몸을 서린 모습으로 표현되며 거북등의 빗돌받침에는 구름무늬가 생기있게 베풀어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석비의 위용이 더욱 당당해지고 그 규모 또한 매우 장중해진다. 다만 머릿돌에 새겨진 활기에 찬 구룡의 조각이 자유분방한 양식에서 틀에 박힌 형식으로 바뀌어지고 거북돌의 등가죽에는 王자, 卍자, 꽃무늬 등이 새겨지며 장식이 농후해진다. 그러나 빗돌에 새겨진 글자는 품위를 더하여 원주 興法寺眞空大師碑에서는 유려한 행서를 읽을 수 있고 천안의 奉先弘慶寺碑碣에서는 한국 제일의 해서인 白顯禮의 글씨를 감상할 수가 있다.
물론 고려시대의 석비예술에서도 특수형을 찾을 수 있다. 奉先弘慶寺碑碣은 거북돌의 머리가 옆을 바라보고 있으며 법천사 智光國師玄妙塔碑는 머릿돌이 冠帽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 중기를 벗어나면 영일 寶鏡寺圓眞國師塔碑와 같이 머릿돌이 자취를 감추고 거북돌 위에 귀를 접은 빗돌만이 세워지는 생략형 석비를 찾을 수 있으며 충주 億政寺大智國師碑에서는 아예 거북둘마저도 생략된 귀접비 석비가 등장하기도 한다.
한편 고려 말기에서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는시기에서는 간략한 댓돌 위에 비석을 세우고 빗돌 위에는 가옥형 지붕돌을 얹는 형식이 나타나 오늘날까지 가장 보편적인 석비의 형식으로 유행하게 되며 왕실 및 고위계층의 석비는 중국 명나라 석비의 영향을 받아 거북돌과 머릿돌의 조형이 추상화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檜巖寺先覺王師碑, 大圓覺寺碑 그리고 각종 陵碑와 神道碑들은 모두 명 나라 석비의 영향을 받은 석비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 석비들의 형식상 또하나의 특징은 빗돌과 머릿돌이 하나의 돌에 함께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석비는 우리에게 제작당시의 네 가지 중요한 문화적 요소를 전달해 준다. 첫째는 비문 자체가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써 역사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둘째로 석비는 제작연대가 확실한 작품으로 석비제작에 부여된 모든 예술적 감각은 당시의 시대적 예술역량을 정확히 기늠하는 척도가 된다. 그리하여 여타 예술작품의 제작편년을 판정하는 기준작품으로서의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세쩨로 비문에 새겨진 내용은 그 자체가 명문장으로써 문학작품이다. 이를 테면 崔致遠의 명문장을 우리는 四山碑銘에서 읽어 볼수 있다는 것이다. 네째로 빗돌에 새겨진 글씨는 명필가의 작품으로 특히 중세 이전의 서예사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 崔致遠의 친필은 오로지 하동 雙磎寺眞鑑禪師碑文에서 찾을 수 있으며 金生의 글씨는 太子寺朗空大師碑文에서 유일하게 증거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모든 석조예술 분야에서 석비예술은 단연 그 중요도가 매우 높음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