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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주일(장년설교)20080518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장 12절-15절
어느 조각가가 희랍성전에 조각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완전하게 하려고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았습니다.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조각의 뒷면에도 앞면과 동일하게 심혈을 기울여 조각하느라 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조각가에게 묻습니다. “조각가 선생님! 어찌하여 사람들이 볼 수도 없는 조각의 뒷면을 그렇게도 오랜시간을 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조각가는 대답을 합니다.
“사람들은 결코 볼 수 없을지라도 하늘의 신은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신앞에서 조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맡은 직분에 성실과 정직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앞에서 내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뿐입니다. “호람데오”입니다.
우리 교회학교(아동부, 중고등부)에서 교사로 봉사하시는 선생님들은 누가 알아주는 사람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헌신하는 분들이십니다.
우리아이들을 위해서 자신을 드려 섬기는 교사들에게 우리 모두! 큰 박수를 보내십시다.
우리 교사들의 기도와 사랑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믿음과 희망 가운데 잘 자라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지나간 인생속에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잊을 수 없는 한 분의 선생님이 계십니다.
저 홀로 교회에 나가던 초등학교 2학년시절! 주일날 이른아침이면 어김없이 저의 집앞에 오셔서 "자은아!" 하고 부르시는 선생님의 굵고도 부드러운 목속리!! 처음에는 저의 부모님와 형들마저 반거워하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선생님이 얼마나 성실한가! 주일이면 단 한번도 빠짐없이 집앞에 오셔서는 "자은아!""은이야!"하고부르기만 하면 나는 쏜살같이 "네!"하고는 달려나갔습니다. 대문 열고 나오는 저를 선생님은 기다렸다는듯이 저를 꼭 안아주시고는, "자은아! 잘있었어! 자! 이제 내현이네 집에 가자!!"하시고는 저의 손을 잡고는 내현이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셨습니다. 그렇게해서 6,7명되는 우리반 아이들을 모아 교회로 가면 전도사님이 얼마나 반갑게 맞아주시는지요!!! 우리반은 언제나 우승반은 도맡아 상도 푸짐하게 받았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선생님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지나가도 "자은아!"하고 부르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래 시간이 지나 전과 같이 저는 친구들 집을 돌면서 함께 손을 잡고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에서도 선생님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전도사님이 교회소식을 전할때 알았습니다. 저와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천국행 가이드였던 선생님은 폐결핵으로 요양소로 떠나가셨다는 가슴 아픈 소식이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선생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선생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왜 그리도 얼굴이 마르고 눈을 쑤욱 들어가셨고 온 몸이 앙상한 모습이셨던 것이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몸이 약하면서도 저와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어쩌면 그리도 따뜻하고 매력있고 사랑넘치는 선생님이셨는지요!!! 청년이 되어 선생님을 보고싶어 수소문을 해보았더니 결핵요양소에서 영원한 순례의 길을 떠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생님은 수십년전 이 땅을 떠나셨지만 지금도 저의 가슴에 진한 감동으로 남아계십니다.
오늘따라 꼭 안아주시면서 "자은아!~"하시던 선생님이 그립고 보고싶습니다. 오늘은 선생님을 크게 소리쳐 부르고 싶습니다. "선생님~~~" 어린 저에게 사랑과 감동을 주신 선생님! 잊을 수 없이 그리운 선생님을 통하여 깨달은 것! 하나가 있습니다.
"감동을 주는 스승!!!"입니다. 말을 하는 스승도 필요합니다. 가르치는 스승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스승! 영원히 가슴에 남는 스승은 감동을 주는 스승입니다.
교육학자인 윌리암 아서 워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평범한 스승은 가르치는 말을 합니다. 좋은 스승은 자상한 설명을 합니다. 월등한 스승은 실재로 본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위대한 스승은 제자들에게 말과 행동을 통하여 감동을 줍니다.”
어느 면에서 우리 모든 어른들은 아이들을 키워내는 스승입니다. 우리 모든 교사들이 감동을 주는 교사가 되도록 여러분! 기도해주시고 칭찬과 격려로 후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홍산가족들에게 어떤 모습으로든지 감동을 주는 목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홍산의 모든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교사가 되게 하옵소서""한국교회가 세상에 감동을 주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 지도자와 세상 지도자가 다릅니다. 세상 지도자는 철학과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는 자기 사상도 철학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사상과 예수의 정신이 필요할 뿐입니다.
세상 지도자는 사람들이 뽑고 세웁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이 뽑아 세웁니다.그래서 세상 지도자는 세상의 법칙을 따라 일을 하지만 교회의 지도자는 하늘의 법칙!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일을 해야합니다.
회사에도 일꾼이 있습니다. 학교에도 일꾼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일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꾼은 사람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꾼은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합니다.
세상에 권력있고 힘있는 사람들을 보면 지도자가 있고 지배자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는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회사의 기업가! 한 단체의 기관장! 교권을 잡을 자! 나라의 정권을 잡은 사람들! 자칫 잘못하면 지도자가 아니라 지배자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시대의 정신을 지배하는 사람이라면 지배자는 사람을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함께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먼저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요 먼저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배자는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고 죽이고 자신은 군림하는 사람입니다. 군림하려니 교만합니다. 명령합니다. 억압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광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신을 죽여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자신을 낮추어 다른사람을 높여주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영광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인류역사에 영원한 지도자의 샘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한복음 13장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세족의 장면입니다.
-섬김으로 존경받는 민족지도자 김구선생과 자신의 권좌를 지키려는 이승만대통령
-1960년대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두 인물! 마틴루터킹목사와 말코멕스(두사람은 흑인해방운동을 위해 일했던 인물) 그러나 후대에 누가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는가? 마틴루터킹!!!
-노밸상을 받은 알버트슈바이쳐와 알베르토 까뮈(부조리문학의 작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노벨상금으로 아프리카 람바네에 병원을 짓고 병들고 죽어가는 이웃을 살리기 위해 섬김으로 살아간 슈바이쳐박사
같은 노밸상금을 받아 프랑스 외곽에 별장을 구입하고 연인과 별장을 향하여 달려가다 졸지에 인생을 마감한 까뮈! 후대는 자신을 낮춰 수많은 이웃을 섬긴 슈바이쳐를 존경합니다.
까뮈는 비록 부조리문학작가로 이름은 남겼지만 그는 당대와 후대에 가쉽거리가 되버린 인물이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도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쓰임받았던 수많은 주의 종들이 계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흥을 일으켜 당대에 인기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부흥사 목회자들을 우리는 성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자는 섬기며 헌신하는 자들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섬기는 종으로 보낸자입니다. 그 본은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계신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섬김에 대하여 죽음으로 섬길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대속물로 주려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인들을 섬기는 사역으로 목회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전사역은 섬김의 사역입니다. 설교는 말씀으로 섬기는 사역입니다. 심방도 성도들의 영혼의 연약함을 터치하는 섬김입니다. 목사가 섬김의 의식을 상실하면 목사는 지도자가 아니라 지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지도자가 아니라 지배자가 되면 성도들을 향하여 독설을 퍼붑니다. 상처를 줍니다.
왜 도산 안창호나 이준열사를 민족의 지도자로 존경하나요? 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민족을 섬기는 일에 평생을 다했습니다.
왜? 이승만대통령이 후대에까지도 존경받지 못하는 대통령이 되었나요?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섬김의 꽃도 피기전에 피살당한 신익기 선생은 존경받는 민족 지도자로 남아있건만 이대통령은 존경받는 민족 지도자는 아닙니다.
이준열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죽는다 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산다 하는가,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고,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으니 그릇 살면 죽음만 못하고 잘 죽으면 도리어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나에게 있으니 모름지기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다“
육군 사관학교 교정에 가면 강재구소령의 동상이 있습니다. 강재구 소령은 월남 파병을 위해 부하들을 훈련시키는 도중 한 사병의 수류탄이 오발되자 몸으로 그것을 덮쳐 죽음으로 많은 부하들을 살렸습니다. 강재구는 군인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군인들은 지금도 강재구소령의 죽음으로 섬겻던 희생적 섬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수많은 군인들이 강재구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의 영성입니다. 지도자의 영향력입니다.
어릴적! 배가고파서 쭝얼쭝얼거립니다. “왜 우리집은 이렇게 가난해서 먹는것도 제대로 못먹고 사는거야!”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한숨을 꺼져라고 내쉬고는 “못난 애미애비 잘못 만나 고생들 한다.”
오늘같은 날이면 여러분 앞에 너무 송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부족하고 못난 스승만나서 성도들이 고생한다. 부요하고 잘난 스승만나면 좋은 말씀에 더 큰 은혜를 받을텐데...
십자가의 죽음으로 영원한 섬김의 스승인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말씀하셧듯이 우리도 섬김으로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섬김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내일의 믿음과 희망을 주는 부모로서!
일터에서는 함께 일하는 직원과의 관계에서 섬기는 일꾼으로!
교회에서는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섬김으로!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1995년에 한국에서는 어이 없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강남의 중심지에서 부자들이 많이 드나들기로 유명한 삼풍 백화점이 무너진 것입니다. 무엇이든 쌓기는 힘이 들어도 무너지기는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것인지 불과 몇 초 만에 호화스럽던 5층 건물이 폭삭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조금 후에 닥쳐올 처참한 비극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 참혹한 현장에서도 3명의 극적인 생존자를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던 사람 중에 유지환 양이 있었습니다. 당시 18세의 어린 소녀였던 유 양은 무려 13일만에 구출이 되었는데. 건강한 모습으로 구조되어 기뻐하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과연 그 오랜 시간 동안 죽음의 구렁텅이에 갇혀 있으면서도 견뎌 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유 양은 “이제 죽었구나” 하고 절망해 본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 그리고 곁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나고, 마실 물 조차 없어서 오줌을 받아 마시면서도 “어떤 일이 있어도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평소에 엄마가 들려 주던 말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소녀의 어머니는 고학력자가 아니었습니다. 넉넉한 가정의 주부도 아니었습니다. 5년 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남편의 병 간호와 생계를 도맡은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상을 졸업하고 대학생인 오빠의 뒷바라지와 생계를 돕기 위해 취직한 딸에게 늘 희망의 말을 들려 주었습니다.
“지환아! 너는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이 언제든지 도와주실거야!! 너에겐 좋은 일만 있을꺼야!”어머니는 언제나 딸 지환이에게 믿음과 희망의 말씀을 해주셨다는겁니다.
유 양은 죽음이 바로 곁에서 기숙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비규환속에 죽어가는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평소 엄마가 들려 주던 희망의 말들을 곱씹으면서 절망과 죽음을 끝내 이긴 것입니다.
부모는 가장 중요한 스승입니다. 참된 교육의 시작은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과 제자들에게 평소에 어떤 말을 들려 주십니까? 이것이 교육입니다. 그리고 어떤 본을 보여 주십니까? 유 양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나는 아이들 귀에 못이 박히도록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 가라는 잔소리뿐이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악착같이 성공해라” 는 말뿐이었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남은 시간은 이제 불과 하루 정도 남았을 시간입니다. 죽을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주님은 얼마 후에 어떤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며, 육신의 생명의 남은 시간까지 정확히 아시는 입장에서 마지막까지 행하신 일들은 무엇입니까? 주님으로써 그리고 선생으로써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본을 보이신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스승의 주일 아침에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시오, 선생님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 주님은 겸손하고 예의 있는 스승이십니다.
12절에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사랑에는 격식을 뛰어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격식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한 격식을 더 진실한 마음으로 갖추게 됩니다. 4절에서 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함께 한 식탁을 물리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겉옷을 벗으신 다음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시는 주님, 대야에 물을 떠 오시는 주님, 그리고 무릎을 꿇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주님,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바닥에 무릎을 꿇은 김에 그냥 바닥에 주저 앉아 말씀하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두른 수건을 잘 정돈하시고 겉옷을 다시 입으신 후에 본래 당신의 자리에 되돌아가 정좌하신 후에 비로소 입을 여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렇게 스승으로서 격식과 예의를 갖추십니까? 조금 전에는 종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시더니 다시 정색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지금부터 하실 말씀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격식을 갖추어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들 역시 두말 할 것도 없이 자세를 가다듬으며 제자로써 스승의 말씀에 경청하지 않았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일마다 주님의 전에 나와서 격식과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을 경배케 하십니까? 말할 수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한 주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당신의 말씀에 우리가 자세를 가다듬고, 정좌를 하고, 경청케 하셔, 그 살아있는 말씀을 우리 심령 속에 깊게 새겨 주시기 위하심입니다.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을 들려 주시려 격식과 예의를 요구 하십니다. 이 험한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들만으로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모아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겸손하시고, 제자에게도 스승으로써 예의를 지키시는 참다운 스승이셨습니다.
적용)이처럼 참된 스승께서는 제자들에게 겸손하게 예의를 갖추십니다. 그러면 우리 부모와 선생들께서는 자녀들에게, 제자들에게 주님처럼 겸손하게 예의를 갖추십니까? 아니면 삶과 일에 쫓겨서 대충 형식적으로 맡은 것이니 억지로 하십니까? 또한 제자인 우리는 오늘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맞으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어떤 자세로 나왔습니까? 겨우 시간에 맞추어 허겁지겁 나오지는 않았습니까? 나오기 싫은 것을 억지로 나오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오늘도 우리는 어떠하든 우리보다 먼저 오셔서 예의를 갖추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님은 본분을 다하신 스승이십니다. 13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12절 하 반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너희가 아느냐?”는 어떤 뜻으로 하신 질문입니까? “안다”는 단어는 “본다”는 뜻을 지닌 “에이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아는 것’은 즉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는 자에게만 보일 뿐입니다. 아무리 같은 것을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무엇을 보여 주셨습니까? 바로 주님의 수 많은 가르침과 이적과 기사들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하실 수 없는 기적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참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당신께서 하실 일을 바로 알고 계셨고, 주님은 한 시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목적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순종하시기 위해서 하나 씩, 그리고 한 걸음씩 하셔야 할 일들과 가셔야 할 길을 향해 걸어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놀라운 일들을 보고 알아서 “나를 주와 선생”이라 한다면 옳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보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곁에 계셔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온 것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입니다.
내 삶의 근원이자 목적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바라봄으로 그 분께서 원하시는 참된 삶을 이루어가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보여주는 분으로, 알게 하시는 분으로, 보냄 받은 자로써, 주와 선생으로 본분을 다하셨습니다.
적용)또한 부모와 선생인 우리도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서 우리가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모와 선생으로써 우리의 자녀들과 제자들에게 주님처럼 본분을 다 하고 있습니까? 자녀들과 제자들에게 얼마나 기도하며 준비하셨습니까? 얼마나 말씀으로 충실하게 가르치셨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까? 이 시간 주님처럼 부모와 선생으로, 신앙인으로 본분을 다하고 있는지 함께 반성해 봅시다.
셋째: 주님은 본을 보여 주신 스승이십니다. 15절에 “내가 너희에게 행 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이렇게 본을 보여 주셨습니까? 그것은 지난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기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섬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도리어 “누가 크냐?”를 가지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섬김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물은 높은 곳을 찾아 올라 가는 법이 없습니다. 낮은 곳으로 그리고 더 낮은 곳으로 흐르다가 마침내 가장 낮은 곳인 바다에 합쳐 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높아지려 했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결코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티끌보다 겸손해야 한다. 세상은 티끌을 발 밑에 짓밟지만 진리를 찾는 사람은 그 티끌에조차 짓밟힐 수 있을 만큼 겸손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진리의 한 모서리를 조금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겸손이란 단어 “타페이노스”는 즉 ‘저지(低地)’‘공지(空地)’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낮은 곳’, ‘비어있는 곳’을 의미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29장 19절에서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한다” 라고 외쳤습니다. 겸손한 자의 낮고 비어 있는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리고 생명과 기쁨과 사랑이 흘러내리는 까닭입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주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겸손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셨고, 겸손의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종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순종의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적용)부모님들 그리고 선생님들, 성도들께서는 부모님으로, 또한 선생님으로, 자녀와 제자들에게 무엇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는 가장 중한 것도 아낌없이 바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까? 아니면 주님께 적선하듯 다 쓰고 남는 것을 인색하게 드리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까? 겸손하게 섬기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까? 아니면 어디에서든지 높아지려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까? 우리가 함께 반성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몇년 전에 어느 성도의 사업장에 갔습니다. 우연한 심방이었습니다. 학원을 운영하시는 분이었는데, 남자아이를 품에 안아 잠을 재우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분은 스승의 자격을 갖추었구나. 이 학원은 너무 훌륭한 학원이다. 부모들께 시설 좋은 학원보다는 자기 아이를 내 아들같이 사랑해 주는 학원이 훌륭한 학원이고 스승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승에게 꼭 요구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실력 있고 신령한 목사라 하더라도 마음 속에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죄송하지만 부적격자입니다. 저는 기분이 좋아져서 찬양을 부르며 돌아왔습니다. 저는 우리 집사님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주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13장 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못 난 인간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으로 인정해 주심이 감격스럽고,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라는 말씀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잊지 마십시다. 부모와 선생, 신앙인인 우리에게 붙여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 할 지라도 “자기 사람들”이요, “인간을 사랑하되, 자녀를 사랑하되, 제자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특히 사역자나 부모나 선생들은 사람을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렵다고 포기 하지 않으셨고, 갈기 갈기 찢기시면서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배반과 유대인들의 멸시와 우리 죄로 인해 지옥의 저주를 당하시면서도 자기 사람들을 결코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건과 상황에 따라 변하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변치 않는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참된 스승의 필수조건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자녀와 제자와 인간을 진정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주님처럼 포기하지 마십시오. 전도를 시작하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 보십시오. 겸손히 예의를 갖추신 예수님, 주와 선생으로 본분을 다하신 예수님, 그리고 주와 선생으로 겸손히 본을 보여 주신 예수님을 본 받고, 무엇 보다 중요한 “주님의 끝까지 포기 하지 않는 사랑”을 본 받아 “우리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부모와 선생과 찬양의 교회 성도들, 성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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